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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성곽과 능원] 2. 구리 동구릉

조선왕조 500년 깃든… 천하명당 王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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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원릉 전경 / 천하명당 동구릉에서도 진혈에 자리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전경. 거대하게 조성된 능역 위에 조그마한 봉분이 얹혀 있다. 중국에 대해서는 번왕이되 조선 백성 앞에서는 군림하고자 하는 이중적 지위와 심리가 잘 드러난다.
건원릉 전경 / 천하명당 동구릉에서도 진혈에 자리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전경. 거대하게 조성된 능역 위에 조그마한 봉분이 얹혀 있다. 중국에 대해서는 번왕이되 조선 백성 앞에서는 군림하고자 하는 이중적 지위와 심리가 잘 드러난다.

“따그르르르 또그르르” “따그르르르 또그르르” 딱따구리가 부리로 소나무 등걸을 두드린다. 능역 안에서는 들리지 않다가도 능역을 나와 모퉁이를 돌 때면 들린다. 그것도 희한한데, 1초에 최고 20번까지 나무를 두드린단다. 그러고도 부리가 머리가 목이 남아난다는 게 신기하다. 영혼과 이성을 일깨우는 딱따구리 소리를 들으며 노동절의 동구릉 참배를 계속했다. 옛 왕조 시절 성곽과 궁궐, 왕릉 조성은 백성에게는 어마 무시한 부담이었다. 생업에 종사할 시간에 무상으로 노동력을 빼앗기니 사연도 한(恨)도 많았을 게다. 기리고 존중할 것이 있다면, 나라 잘되기를 빌며 역사(役事)에 참여한 백성의 원력이요 정성일 것이다. 그 민초들을 기리며 묵례를 올리자.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이라, 살아서는 충북 진천에 머물고 죽어서는 경기도 용인에 거하라는 뜻이다. 현대에는 국내 최대 재벌의 별장이 들어서고, 요즘은 ‘수용성(수원용인성남)’이라 중대형 아파트가 꽉 들어차니 생사불문 용인이다. 조선 왕실에서는 생거한양, 사거구리였던 모양이다. 궁궐과 종친 사저는 한양에, 왕과 왕비 17명 능이 구리 동구릉에 빼곡하니 말이다. 동구릉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중국의 번왕(藩王)이면서 백성 앞에서는 황제로 허세를 부리던 조선왕의 2중적 지위와 고민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삼연릉과 경릉 / 한 곡장 안에 능 2개가 나란히 모셔진 쌍릉은 드물지 않지만 삼연릉은 흔치 않다. 어떤 학자들은 ‘파격’이라는 표현까지 쓴다. 인조나 영조의 경우 원비 즉 첫 번째 왕비와 계비 즉 둘째 왕비가 전혀 엉뚱한 데 묻힌 경우도 있고, 동구릉의 경우만 해도 선조와 두 왕후는 멀리 떨어져 묻혀 있다. (목릉 사진 참조)
삼연릉과 경릉 / 한 곡장 안에 능 2개가 나란히 모셔진 쌍릉은 드물지 않지만 삼연릉은 흔치 않다. 어떤 학자들은 ‘파격’이라는 표현까지 쓴다. 인조나 영조의 경우 원비 즉 첫 번째 왕비와 계비 즉 둘째 왕비가 전혀 엉뚱한 데 묻힌 경우도 있고, 동구릉의 경우만 해도 선조와 두 왕후는 멀리 떨어져 묻혀 있다. (목릉 사진 참조)

명당과 국운의 관계

2중으로 조성한 봉분도 조선의 2중적 지위를 말하거니와, 조종(祖宗), 왕의 묘호가 대표적이다. 엄격한 규칙은 없지만 대체로 나라를 처음 일으키거나 중단된 국통(國統)을 다시 일으킨 왕에게 조를 올리는 것이 오랜 법도였다. 신라는 백제를 멸망시킨 무열왕 김춘추만 묘호(太宗)를 가졌고, 고려는 태조 왕건에게만 조의 묘호를 올렸다. 중국에서도 통일왕조에서 창업주 아닌 천자 가운데 조는 명나라 영락제[成祖], 청나라 순치제[世祖], 강희제[成祖] 단 3명뿐이다. 그만큼 귀한 묘호였는데, 조선에 와서 어마어마하게 인플레 된다. 조선은 태조 이성계 외 세조 이유·선조 이균·인조·영조·정조·순조 등 조가 7명이나 된다. 선종(宣宗)을 선조로, 영종·정종을 영조·정조로, 순종을 순조로 바꾸기도 했다. 여기 묻힌 9명 왕 가운데 묘호에 값할 임금은 태조 단 한 명이다. 국운 쇠한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 새 왕조를 개창했으니 잘 봐 주면 ‘태조’라 부를 만하다. 나머지 왕들은 과분한 묘호로 스스로 숨이 막힐 것이다. 선거 때마다 바꿔 유권자들이 기억도 하기 어려운 요즘 정당명들 같다. 이름만 바꾼다고 꼴찌가 1등 하고, 흉악범이 위대한 성인이 되나? 그 아첨의 시대에도, 윤근수(尹根壽), 정경세(鄭經世) 등 의식 있는 사림 출신 신하들은 묘호 개칭에 반대했다. 아, 기개 넘친 조선의 사림이여!

무인석과 석수 / 봉분 바로 앞 좌우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을 양옆에 한 쌍씩, 석수로는 말[馬石]을 좌우 한 쌍씩 배치했다.
무인석과 석수 / 봉분 바로 앞 좌우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을 양옆에 한 쌍씩, 석수로는 말[馬石]을 좌우 한 쌍씩 배치했다.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

조선 왕실의 음택 동구릉, ‘동쪽 언덕 아홉릉’에는 9왕 8왕비가 묻혀 있다. 1408년 이성계가 붕어한 뒤 참찬 김인귀의 추천으로 태종 이방원 옹립의 훈신 하륜이 정한 것이 시작이다. 1855년 철종이 24대 헌종의 아버지를 익종으로 추존해 수릉에 장사지냄으로써 완성된다. 왕릉을 한데 모으는 것은 후손들이 관리하고 참배하기 편하게 하라는 이성계의 뜻이었다 한다. 옛적에는 한때 동오릉, 동칠릉이라 불린 적도 있었다. 59만 평을 헤아리는 광대한 숲에 건원릉과 수릉 외에 5대 문종과 왕비의 현릉(顯陵), 14대 선조와 두 왕비의 목릉(穆陵), 18대 현종과 왕비의 숭릉(崇陵), 21대 영조와 계비의 원릉(元陵), 24대 헌종과 두 왕비의 경릉(景陵) 등이 자리잡았다.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후 대부분의 능역은 접근 금지되고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 릉만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쉽다. 동구릉은 소중한 역사의 현장이며 교육과 연구의 소재며, 자연과 인간이 교감하는 한국 특유의 문화재다. 굳이 그런 가치를 따지지 않더라도 숲과 개울, 너른 풀밭으로 도시 생활에 지친 서울시민에게는 귀중한 휴식 공간이 된다.

석수 / 곡장은 굽은 담장이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직선이었으며 지형에 따라 꺾었다. 석수는 봉분 앞에는 말을 두었지만, 옆과 뒤로는 호랑이[虎石]와 양[羊石]을 썼다.석수는 마석, 호석, 양석이 모두 각 2쌍씩 모두 6쌍 12개를 놓았다.
석수 / 곡장은 굽은 담장이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직선이었으며 지형에 따라 꺾었다. 석수는 봉분 앞에는 말을 두었지만, 옆과 뒤로는 호랑이[虎石]와 양[羊石]을 썼다.석수는 마석, 호석, 양석이 모두 각 2쌍씩 모두 6쌍 12개를 놓았다.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 사신들이 “어떻게 이와 같은 천작지구(天作地區) 하늘이 지어낸 자리가 있는가? 필시 인간의 조산(造山)일 것이다.”라고 찬탄하고, 풍수가들이 모두 동의한 명당이다. 이성계가 천하명당 동구릉의 진혈에 묻히고, 37살로 즉위 2년 여 만에 요절한 이성계의 증손자 문종도 그 옆 명당자리에 묻혔다. 그러나 골육상쟁은 끝이 없었다. 능토가 마르기도 전에, 이성계의 증손자 이유(세조)는 조카 단종과 동생 안평대군을 죽이고 집권했다. 이성계의 5대손 성종은 첫 왕비 한씨가 후사 없이 죽고, 아들 형제를 낳은 계비 윤씨는 폐위돼 사사된다. 이성계의 6대손 연산군은 부왕 성종의 후궁들과 배다른 동생들을 죽이고, 왕위에서 쫓겨난다. 선조는 정여립 모반 사건을 조작해 영호남 선비 1천500명을 죽이고 임진 정유 왜란을 초래했다. 명당에 살고 묻히는 것보다, 후손이 선을 행하고 덕을 쌓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것이 가정의 달을 맞는 우리의 자세겠다.

목릉 / 왼쪽이 선조능이고 오른쪽 위가 의인왕후 능. 사진 중앙 아래쪽 비각을 끼고오른쪽으로 난 길은 계비 인목왕후 능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목릉 / 왼쪽이 선조능이고 오른쪽 위가 의인왕후 능. 사진 중앙 아래쪽 비각을 끼고오른쪽으로 난 길은 계비 인목왕후 능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김구철 시민기자(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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