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도박 사이트

[경기도의 성곽과 능원] 18.화성 융건릉

평생 아버지를 그리워한 아들… 정조대왕 효심 깃들다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 수은묘
훗날 정조가 화성 현륭원으로 높여
137년 지난 1899년엔 장조로 격상돼

카지노 도박 사이트

융릉 원찰 용주사

■ 당쟁에 희생된 영민한 세자… 당쟁에 휘둘린 혼군 영조

역사는 승자의 역사, 가해자의 역사라 한다. 조선 중기 이래 한국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역사와 교육 문화가 서인-노론으로 이어진 것을 보면 확실히 그렇다. 그러나 융건릉의 주인공은, 가해자 영조와 노론 일당이 아니라 피해자 사도세자와 유족 모자(母子)다. 사도세자는 차남이지만 맏아들 효장세자가 일찍 죽어 실질적 장남이다. 영빈 이씨가 후궁으로는 환갑인 39살에 얻은 늦둥이였다. 장남 겸 외아들에 영특하고 생모는 임금의 총애를 받으니, 세자가 보위를 잇는 것은 떼놓은 당상 격이었다. 연로한 부왕 영조도 경험을 쌓아주려고 대리청정까지 맡겼다. 세자는 노론의 국정 농단이 큰 폐단이라 생각하고, 소외된 남인·소론·북인을 자주 불렀다. 위기를 감지한 노론과 영조계비 정순왕후 김씨는 세자를 거세하기로 하고, 후궁, 옹주들과 힘을 모았다. 사실상 역모였다. 세자도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시키며 몰래 평양에 놀러 가는 등 빌미를 제공했다.

일찍 죽은 화순(38세 사망, 남편 김한빈, 이하 같음) 화협(19세, 신광수) 화길(18세, 구민화) 옹주는 노론 집안에 시집가긴 했으나,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다. 화완(70세, 정치달), 화령(68세, 심능건)이 문 숙의와 함께 세자 참소의 돌격대였다. 문 숙의는 영조의 첫 며느리 현빈 조씨의 시비(侍婢) 출신으로, 웃전의 빈소에서 영조를 유혹해 승은을 입은 요부다. 세자 장인 홍봉한, 영조 장인 김한구, 생모 영빈 모두 세자의 죽음을 적극적으로 만류하지 않았다. 영조 38년 5월 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고 7월 양주 배봉산(拜峯山) 아래 수은묘(垂恩墓)에 묻혔다. 14년 뒤 즉위한 정조는 수은묘를 영우원(永祐園)으로 존호도 사도(思悼)에서 장헌(莊獻)으로 올리고, 다시 13년 뒤 화성으로 이장하고 현륭원으로 높였다. 정조는 복수와 예우를 고심하면서, 홀로 된 어머니를 생각해 외조부 홍봉한을 사면하는 갈등을 겪었다. 고종 때인 1899년 세자는 드디어 장종(莊宗)을 거쳐 장조(莊祖)로 격상됐다. 꼬박 137년이었다.

사도세자 부부의 합장묘인 융릉의 봉분은 12지신상 대신 모란과 연꽃이 양각된 12면 병풍석이 감싸고 있다. 난간석 없이 3면 곡장(曲墻)만 둘렀다. 석물로 망주석, 석양(石羊)·석호(石虎)·석마(石馬), 문·무인석 각 1쌍, 팔각 장명등과 상석 각 1좌와 능 언덕 아래 정자각·비각·홍살문·재실은 여느 왕릉과 같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參道) 좌우에 박석(薄石)이 이채롭고, 천장 이듬해 조성한 곤신방(坤申方) 즉 남서향의 연지가 눈길을 끈다.

 

융건릉 숲길
융건릉 숲길

■ 학문과 기록의 중흥조(中興祖)… 명군(名君) 정조의 등장

정조는 세종과 함께 조선조를 대표하는 명군이다. 학문을 좋아하고 학자를 예우하며, 현실에 적용하니, 세종 이후 위축, 후퇴를 거듭하던 조선 사회가 부흥기를 맞았다. 우선 아버지 죽음에 개입하고 자신의 즉위를 방해한 일당을 제거하고 친정체제를 구축했다. ‘우문지치(右文之治)’ ‘작성지화(作成之化)’의 명분을 내걸고 신진 기예를 발굴하고 인재를 모아 친위세력을 확보했다. 당쟁을 혐오하면서 탕평책을 썼으니, 남인 실학파와 노론 서출 북학파를 두루 중용해 문운(文運)을 진작했다. 정치문제화한 서학(西學)에 대해서는 유연하게 대처했다. 변화하는 조선후기 사회에 맞추어 문물제도를 재정비해,『속오례의』·『증보동국문헌비고』·『국조보감』·『대전통편』등을 냈고, 형정(刑政) 개편,『서류소통절목』공포, 노비추쇄법(奴婢推刷法) 폐지 등 개혁 정책을 폈다. ‘개유와(皆有窩)’ 도서실을 마련해 『사고전서(四庫全書)』등 외국 서적을 수입하고, 중인(中人) 이하 위항문학(委巷文學)을 지원해 문화의 저변을 확대했다. 신설한 규장각(奎章閣)이 문화정치 추진본부였다.

융건릉 재실
융건릉 재실

정조의 또 다른 업적은 기록이다. 제도를 정비해도 왜, 어떻게, 그래서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기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서원, 수원 화성, 남한산성,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모두 기록 덕분이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자신의 언행과 학문을『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로 작성했다. 즉위 7년부터는 기록 방식과 담당자가 변해 공식 국정 일기로 승격되고, 정조 생전에 670권이 작성되는 등 1760년부터 1910년까지 151년간 총 2천329책에 이르는 방대한『일성록』이 탄생했다.『일성록』은 군신이 모두 정무에 활용했는데, 편찬방식과 체재, 표현 방식까지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정해져 있었다. 전통시대에 세계 어디에도 이토록 중립적·객관적인 기록은 별로 없다. 때문에 일성록은 1973년 국보로 지정되고, 2011년 5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임금이 기록을 중시하니, 규장각은『내각일력(內閣日曆)』1천245책을 남겼고, 비변사는 『주모유집(籌謀類輯)』을 편찬했다. 정조는 호학군주(好學君主) 세종도 없는 문집을 남겼으니, 180권 100책 10갑의『홍재전서(弘齋全書)』다.

모후 혜경궁 홍씨, 헌경왕후(獻敬王后)도 글쓰기에 일가견 있었다.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호소하고, 그 죽음에 친정아버지가 책임없음을 해명한 회고록《한중록》이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탄탄한 구성과 박진감 있는 전개, 소설 이상의 생생한 묘사와 아름다운 문체로 고전문학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다. 여성 특유의 섬세한 관찰력과 필치로 묘사되고 표현된 왕실 법도와 궁중 어법은 역사와 국어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헌경왕후의 의도와 목적은 뛰어난 작품성 덕분에 확실히 초과 달성되었다. 정조가 아버지 능을 모셔오며 조성한 원찰 용주사(龍珠寺)도 같이 들르면 좋을 것이다.

융릉 정자각
융릉 정자각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경기일보(committingcarbicide.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