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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성곽과 능원] 안성 죽주산성

삼국시대~조선 ‘난공불락 요충’… 국난 극복의 성지
신라 첫 축조, 세 시대 걸친 삼중 구조, 포루에서 안성벌과 이천떮장호원 한눈에
고려 말 송문주 장군이 몽골군 물리쳐, 물의 낙차 이용 계단식 저수시설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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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성 동문. 제대로 남아있는 유일한 문이다. 이 문밖으로 완만한 경사의 진입로

가 산 아래로 이어진다. 문밖에 이끼 낀 성벽이 그대로 이어진다.

안성(安城), ‘위태롭지 않고 편안하며 무탈한 성’이란 뜻이다. 안성에는 극적루(克敵樓)라는 특이한 이름의 누각이 있다. 조선의 개국공신 권근(權近)은 《신증동국여지승람》10권에 실린 극적루 기문(記文)에서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에 송도가 함락되고 임금이 다른 곳으로 옮겨갈 때, 풍문을 듣고 근처 30여 고을이 의기를 분발하여, 항복을 위장해 잔치를 벌인 뒤 취한 적군을 섬멸하니, 적의 위세는 끊기고 더 이상 남으로 내려가지 못했다. 이에 국가에 공을 세운 사실을 적고 누각의 현판도 극적루로 지었다’고 썼다.

산세를 따라 자연스럽게 구부러진 성벽. 한국의 산성은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지

세에 따라 지어진 것이 큰 특징이다. 축성법도 특정한 방식을 고집하지 않고 능선

과 골짜기에 다른 축성방식을 쓰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안성의 옛이름 죽주(竹州)는 본래 백제 개차산(皆次山郡)이었지만 통일 신라기 경덕왕이 개산군(介山郡)으로 고쳐 한주(漢州) 아래 두었다고 세종실록지리지는 썼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고구려 내혜홀(奈兮忽)’이란 표현이 보이고, 최근 연구 결과 진흥왕 시절 신라 영토로 편입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고려 태조 때 죽주라 부르기 시작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죽주 대부분이 안성군 ‘죽일면(竹一面)’, ‘죽이면(竹二面)’으로 나뉜다. 그러나 발음이 좋지 않아 일죽, 이죽이 되고, 후에는 일죽, 죽산으로 다시 바뀌었다. (‘죽일’, ‘죽이’ 몹시 거북하다. ‘이죽’도 어감이 나쁘다.) 신라 말 궁예(弓裔)가 처음 이곳의 기훤(箕萱)에게 귀의했으나 푸대접받자, 5년 후 북원(北原: 원주)의 양길(梁吉)에게 갔다는 기록도 있다.

난공불락의 요충, 죽주산성

『선조실록』에 사간(司諫) 이덕형(오성과 한음의 한음 대감)은 “죽산 취봉(鷲峰)은 형세가 매우 든든하여 한 명의 군사로도 길을 막을 수 있는 험한 곳”이라 상소를 올렸다고 나온다. 그 말대로 죽주산성 포루에 서면 안성벌과 이천·장호원이 한눈에 잡힌다. 죽산은 영남대로가 조령과 추풍령 방면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으로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조까지 전략적 요충지다. 조선시대에는 한양과 삼남대로(三南大路)를 잇는 중요한 교통 요지였다. 오늘날에도 평택항에서 충주를 거쳐 태백, 동해항을 잇는 주요 산업도로(38번 국도)와 한반도의 대동맥 경부선이 만난다.

산성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7단 의 계단식 연못을 두었다. 맨 위에는 샘이 있어 오늘날에도 산책 나온 마

을 주민들이 애용하고 있다. 죽주산 성을 포위한 몽골군이 물을 끊고 나서 항복을 강요하자, 송문주 장군은

연못의 잉어를 잡아 보내면서 성안에 물이 넉넉함을 과시했다고 한다.

죽주산성은 삼국시대 신라가 북진하던 가장 이른 시기, 대중국 교역항인 당항진(남양만)으로 진출하는 거점으로 처음 축조했다. 전체 둘레 1천688m 원래 높이 6∼8m(내성과 복원 성벽은 2.5m). 신라(중성), 고려(외성), 조선조(내성) 세 시대에 걸친 삼중 구조로, 대부분 3차례 이상의 수축한 흔적이 보인다. 따라서 시대별 성벽 축조 방법과 활용 변화를 잘 살펴볼 수 있는데, 전반적으로 영남의 신라산성이 한강 유역으로 북상하는 과도기적 성격을 띤다. 고려와 조선의 성벽은 신라 체성벽 상면에 축조되었는데, 대부분 무너지고 일부에 흔적만 보인다. 체성벽은 성벽의 높이와 너비가 거의 1대 1 비율로 구조적으로 탄탄하다.

몽골군 격퇴한 송문주 장군과 물!

성 안에서 신라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사용된 계단식 저수시설 8기가 출토되어 복원되었다. 물의 낙차를 고려해 계단식 저수시설을 두되 나름 조경도 꾸미고 물을 활용했다. 수조터에서 다양한 시대의 기와와 토기, 무기, 공구류 등이 출토되었다. 프랑스 남부 골 지방에 가면, 계단식 물레방아를 8단으로 놓고 하루 4.5톤의 밀을 빻은 고대 로마 시대 제분공장 유적이 있는데, 죽주산성에도 마찬가지로 8단의 크고 작은 계단식 저수조를 두었다. 하남 이성산성은 저수지가 큼지막하게 2군데 있었는데, 여기는 8단 저수조니 사용자 계급이나 용도에 따라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외벽을 따라 외항(해자)을 두른 것도 산성에는 흔치 않은 예다. 그만큼 죽주산성에는 물이 흔했던 모양이다.

송문주 장군 안내판.

고려 말 몽골군의 3차 침입 때는 산성방호별감(山城防護別監) 송문주 장군이 주민들과 함께 파죽지세로 공격해오던 몽골군을 물리치고 전공을 세웠다. 5년 전 귀주성(龜州城)에서 동향 죽주 출신의 서북면 방어사 박서 장군을 모시고 명장 살리타가 이끄는 몽골군의 공격을 물리친 군공을 인정받아 낭장(將)에 초수(超授)되고, 1236년 죽주방호별감(竹州防護別監)이 되었다. 귀주성의 경험으로 몽고군의 작전과 장비를 잘 알아 적절히 대응하였으므로, 성안의 사람들이 신명(神明)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물이 넉넉하니 화공(火攻)도 포격(砲擊)도 소용없었을 것이고, 물이 넉넉하니 당대 세계 최강 몽골군의 포위 공격에도 보름이나 버텼을 것이다. 6차에 걸친 몽골 침입에서 고려가 승리한 대표적 전투의 하나다. 송문주 장군은 이 공으로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이 되고, 산성 안에 장군의 전공영각과 재실이 모셔졌다. 그러나 구국의 영웅이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 기록도 없으니 서글프고 한심하다. 죽주산성은 360년 뒤 임진왜란 때도 격전지가 된다. 왜군에게 내준 죽주산성을 조방장(助防將) 황진 장군이 기습으로 탈환하자 왜군은 더 이상 용인과 이천을 넘보지 못했다. 그만치 죽주산성은 교통 요지요, 군사전략적 요충이었다. 안성에 내려간 김에 죽산 칠현산에 바짝 등 기대고 안긴 칠장사를 들러봐도 후회하지는 않을 듯하다.

김구철 시민기자(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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