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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인사

인사 -스테판 말라르메 아무것도 아닌 것, 이 거품은, 이 때묻지 않은 시는 술잔의 모습을 지시할 뿐 멀리, 해정(海精)의 떼들 수없이 몸을 엎치락뒤치락 바닷물에 든다. 오 나의 다양한 친구들아 우리는 함께 항행(航行)하나, 나는 벌써 선미(船尾)에 자리 잡고 그대들은 장려한 선수(船首)에서, 우뢰와 찬 겨울의 물결을 끊고 나간다. 아름다운 취기에 젖어 배의 요동을 두려워 않고 내 일어서 이 술잔을, 고독, 암초, 별의 술잔을 들어 우리들 돛이 받아 안은 그 백색의 모든 심려(心慮)에 인사한다. 『목신의 오후』, 민음사, 2016 거센 파도는 배를 움직이는 동력 내가 누구냐고 물을 수 있는 건 인간뿐이다. 그 물음 안에는 내가 왜 사는지, 너는 누구인지, 죽음이란 무엇인지 등과 같은 복잡하고 골치 아픈 내용이 빼곡한데, 그러한 의문의 뿌리는 한결같이 염려(念慮)에 닿아있다.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핵심은 앞일에 대해 걱정을 한다는 것이다. 그 점을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현존재의 존재는 염려라는 말로 요약했다. 삶 전부가 염려라 생각하면 우울하겠지만, 하이데거는 염려하기 때문에 양심에 부응하고 나아가 행동의 결단을 내린다고 설명한다. 염려함으로써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게 인간이다. 그런 면에서 자유를 동경하는 낭만주의자의 도취적(陶醉的) 정념은 염려에서 시작된다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스테판 말라르메(Stephane Mallarme)의 시 ?인사?는 시종일관 순백의 취기로 가득하다. 해정(海精)의 떼로 비유된 파도가 엎치락뒤치락하며 사정없이 배를 흔들어도 화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선미의 화자와 선수의 친구들이 현실의 염려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취기에 흠뻑 젖어 있는 저 격정의 풍경은 지극히 자유로워 보인다. 술의 거품은 때묻지 않는 시이며 아무것도 아닌 것, 그저 술잔을 지시할 뿐이라는 시인의 비유적 설명은 취기, 즉 예술적 도취만이 삶의 심려를 잠재울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삶의 바다를 항해하다 보면 고독과 암초와 별로 비유된 근심과 고통과 동경의 감정들 마주하게 된다. 그러한 마주침은 돛, 즉 실존이라는 배를 움직이게 하는 근원이다. 심려하지 않는 자는 한 자리에 정주할 뿐 바다로 표상된 이상(理想)을 향해 모험하지 않는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신년의 도약과 모험을 위해 백색의 모든 심려에 인사하자!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은빛으로 밝은

은빛으로 밝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은빛으로 밝은, 눈이 쌓인 밤의 품에 널찍이 누워 모든 것은 졸고 있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만이 누군가의 영혼의 고독 속에 잠 깨어 있을 뿐. 너는 묻는다. 영혼은 왜 말이 없느냐고 왜 밤의 품속으로 슬픔을 부어 넣지 않느냐고- 그러나 영혼은 알고 있다. 슬픔이 그에게서 사라지면 별들이 모두 빛을 잃고 마는 것을. 『릴케 시집』, 문예출판사, 2014. 슬픔으로 빛나는 인간의 영혼 얼마 전 오래된 카세트테이프와 시디, 그리고 서랍 속에 처박혀 있던 플로피디스크를 정리했다. 버리고 나니 허전하고 쓸쓸했다. 우리 주변에서 사라지는 건 비단 물건만이 아닐 듯하다. 영혼, 슬픔, 고독, 낭만 등등의 단어들은 그 쓰임과 빈도가 약해져 있어도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말 자체가 추상적이라서 혹은 시대가 변해서 그렇다고 나름의 이유를 대는데, 그런 답변은 실로 해로워 보인다. 어떤 말들의 소멸은 곧 정서(情緖)의 몰락을 지시한다. 기술 시대의 위험은 쓸모를 강조하고 정서를 등한히 해 인간을 좀비처럼 만든다는 점이다. 영혼이 존재하느냐 마느냐의 과학적 시비를 따질 게 아니라 왜 우리에게 영혼이라는 말이 필요한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은빛으로 밝은」을 읽으며 나는 인간이 왜 숭고한 존재인지를 다시금 깨닫는다. 눈이 쌓여 모든 사물이 밤의 품 안에서 평화롭게 졸고 있는데, 오직 걷잡을 수 없는 슬픔만이 누군가의 영혼의 고독 속에 홀로 깨어 있다는 1연의 상황은 요즘의 감수성으로 보자면 촌스럽고 어설퍼 보일 수 있다. 슬픔과 고독과 영혼이라는 단어가 연이어 나오기에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러한 큰 규모의 단어 연결이 엉성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은빛으로 밝은이라는 시어 때문이다. 슬픔과 고독은 인간의 영혼을 눈처럼 희고 순수하고 밝게 만드는 힘이라는 게 릴케의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가급적 피하고 싶은 게 슬픔과 고독이다. 그래서 왜 밤의 품속으로 슬픔을 부어 넣지 않느냐라고 영혼에 묻는다. 하지만 영혼은 대답이 없다. 슬픔이란 제거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슬픔을 없애는 것은 인간의 본질을 없애는 것과 같다. 그것을 릴케는 슬픔이 그에게서 사라지면/별들이 모두 빛을 잃고 마는 것을.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늘 슬퍼해야 하는 걸까? 이런 물음은 지극히 유아적이다. 슬픔과 고독을 어떻게 단련해 인간이라는 한 점의 별을 빛나게 만들 것인가, 라는 물음이 필요하다. 그런 물음을 던지기 위해서는 영혼이 살아 있어야 한다. 영혼이란 만져지고 느껴지는 실체라기보다는 존재해야만 하는 당위의 신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숭고는 그런 신념에서 나온다. 신념이 없으면 비루해진다. 영혼이라는 말이 뜬구름처럼 모호할지라도 그 말을 소중히 간직해야 할 이유는 은빛으로 밝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나날들

나날들 심보선 우리는 초대장 없이 같은 숲에 모여들었다. 봄에는 나무들을 이리저리 옮겨 심어 시절의 문란을 풍미했고 여름에는 말과 과실을 바꿔 침묵이 동그랗게 잘 여물도록 했다. 가을에는 최선을 다해 혼기(婚期)로부터 달아났으며 겨울에는 인간의 발자국 아닌 것들이 난수표처럼 찍힌 눈밭을 헤맸다. 밤마다 각자의 사타구니에서 갓 구운 달빛을 꺼내 자랑하던 우리. 다시는 볼 수 없을 처녀 총각으로 헤어진 우리. 세월은 흐르고, 엽서 속 글자 수는 줄어들고, 불운과 행운의 차이는 사라져갔다. 이제 우리는 지친 노새처럼 노변에 앉아 쉬고 있다. 청춘을 제외한 나머지 생에 대해 우리는 너무 불충실하였다. 우리는 지금 여기가 아닌 곳에서만 안심한다. 이 세상에 없는 숲의 나날들을 그리워하며. 『눈앞에 없는 사람』, 문학과지성사, 2011. 나무들처럼 각자의 나날을 산다 서초동 대법원 앞 도로 한가운데 수령이 무려 800년이 넘은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보호수로 지정된 이 나무는 갖은 소음과 매연을 견디며 지금껏 살아있다. 장대하고, 경이롭지만 한편 쓸쓸해 보인다. 숲을 떠난 나무의 삶은 어떠할까?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기울어가는 노목(老木)의 몸을 받쳐주는 철제 버팀목이 대신하여 답을 하는 듯하다. 심보선 시인의 시 ?나날들?을 읽으며 향나무의 나날들과 내가 살아온 나날들의 면면을 돌아본다. 나날의 반복과 계절의 순환이 빚어내는 세월의 단호한 흐름 앞에서 우리의 삶은 왜소하다. 초대장 없이 같은 숲에 모여든 것처럼, 우리는 우연들의 겹침으로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나무들처럼 각자의 나날을 산다. 문란을 풍미하는 봄의 열정과 과일처럼 여문 침묵의 여름, 그리고 혼기로부터 달아나는 가을과 인간의 발자국이 없는 눈밭을 헤매는 겨울의 시간이란 시인의 내밀한 경험이 담긴 삶의 흐름과 열정을 사계(四季)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경험의 내용은 다르겠지만 우리는 시간 앞에서 동일하다. 다 같이 소진(消盡)하는 삶을 산다. 방황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자랑하며 사는 게 숲으로 상징화된 인간 삶의 모습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사라진다고 숲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내가 없어도 삶은 지속된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허무를 느낀다. 할 말도 점차 사라지고, 지친 노새처럼 노변에 앉아 쉬고 있는 소진의 시간은 무력해 보인다. 그래서 시인은 청춘을 제외한 나머지 생에 대해 우리는 너무 불충실했다는 회한과 지금 여기가 아닌 곳에서만 안심한다는 동경을 내비친다. 참으로 공감이 가는 표현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을 한껏 소진하며 살기에 숲의 시간은 아름답다. 그래서 이 세상에 없는 숲의 나날은 이 세상에 있는 숲의 나날로 새로 읽히기도 한다. 삶은 능동적 소진이다. 소진하지 않은 나날들은 후회의 연속일 뿐이다. 서초동 대법원 앞이 소나무가 쓸쓸해 보이는 이유는 숲의 시간, 즉 서로 부대끼고 흐느끼는 소진과 사랑의 시간을 살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그 무엇이 속삭이고 있었다

그 무엇이 속삭이고 있었다 -박정대 다들 돌아가버린 한적한 오후의 도서관에서 내가 생애처럼 긴 담배를 피워물 때 어디서 작은 새들이 날아와 처음 보는 이름으로 움직이고, 꽃들은 낡은 외투에 손을 꿰는 아이들의 손끝마냥 불쑥 피어오르고 있었다, 외상값 정리되지 않은 외상값에 대한 생각처럼 나는, 그 어떤,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집요한 상념에 잠기어 있었는데, 비가 내려 내 생각의 한가운데로 비가 내려, 그 무엇이 속삭이고 있었다, 하늘 한구석에서 누군가 또 낚시질을 하고있군, 글쎄 비 내리는 오후는 저녁처럼 어두워져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두운 하늘에 검은 말 한 마리 지나가고 있었다, 저기 저 비에 젖은 별들은 진흙탕의 세월을 지나온 시간의 말발굽이야, 그 무엇이 속삭이고 있었다, 잔인한 추억이지 뭐 나는 담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 나지막한 속삭임에게 들려주었다 다 잔인한 추억이지 그 무엇이 전하는 신비의 속삭임 『단편들』, 문학동네, 2020 어느 날 갑자기 세계가 낯설어지는 순간이 있다. 늘 봐왔던 사물들이 처음 본 것처럼 생경하고, 처음 간 장소가 예전에 와본 곳처럼 익숙하게 느껴지는 그런 경험들과 조우할 때마다 이 세계란 합리(合理)의 그물로 포획할 수 없는 그 무엇의 작용일지 모른다는 추측을 하게 된다. 친숙하고 낯선 정체불명의 그 무엇이 삶에 반복적으로 출현하는 이유는 뭘까? 이 물음에 답을 얻기란 실로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삶이란 두렵고 신비한 것이라고 짐작한다. 이때의 짐작이란 대강의 이해가 아니다. 불가해한 것들에 대한 깊이의 사유다. 따라서 깊게 생각하는 자만이 짐작의 세계에 출몰하는 그 무엇의 실체를 상념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이 박정대 시인의 시 ?그 무엇이 속삭이고 있었다?의 토대가 아닐까 한다. 시인이 말하듯, 삶은 정리되지 않은 외상값에 대한 생각처럼 떨쳐버릴 수 없는 근심들로, 혹은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로 가득 찬 그 무엇에 관한 상념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그 무엇이 전하는 속삭임은 작은 새들이 처음 보는 이름으로 날아다니는 신비의 움직임이기도 하고, 가난한 아이의 낡은 외투 주머니 밖으로 튀어나온 손끝처럼 불쑥 피어나는 꽃의 불안이기도 하다. 신비와 불안, 혹은 삶과 죽음의 병렬. 그것이 실존의 세계로 내리는 비의 정체다. 그 비는 피할 수 없다. 우리란 비에 젖은 별들이고, 삶은 진흙탕의 세월을 지나온 시간의 말발굽이라는 게 그 무엇이 전하는 운명의 속삭임이지만, 그 곁에는 신비의 속삭임도 있다. 시인이 마지막에 읊조리는 다 잔인한 추억이지라는 속삭임에는 불안하지만 살아봐야겠다는 어떤 의지가 담겨 있어 보인다. 의지는 이성(理性)의 낚시질이 아니라 신비의 짐작이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등

등 -김선우 아이 업은 사람이 등 뒤에 두 손을 포개 잡듯이 등 뒤에 두 날개를 포개 얹고 죽은 새 머리와 꽁지는 벌써 돌아갔는지 검은 등만 오롯하다 왜 등만 가장 나중까지 남았을까, 묻지 못한다 안 보이는 부리를 오물거리며 흙 속의 누군가에게 무언가 먹이고 있는 듯한 그때마다 작은 등이 움찟거리는 죽은 새의 등에 업혀 있는 것 아직 많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문학과지성사, 2007. 등의 서사는 슬픔 간주곡 영화 조커에 호아킨 피닉스가 웃옷을 벗고 등뼈가 돌출된 굽은 등으로 춤을 추는 장면이 나온다. 고독과 분노가 앙상하게 드러난 그의 야윈 등은 얼굴로 드러낼 수 없는 깊은 표정을 짓고 있다. 내가 쉽게 볼 수 없는 곳, 그래서 누군가에게 보이기만 하는 등의 서사(敍事)는 슬픔의 간주곡이다. 짐을 지기도 하고, 누군가를 업기도 하는 등의 시간은 기쁨보다 슬픔에 더 많이 닿아있는 듯하다. 그래서 등은 고통과 죽음의 긴 통로처럼 보인다. 어린 시절 엄마의 등에 업혀 느꼈던 따뜻한 살 냄새와 촉각은 언젠가는 감당해야 할 이별의 온기라는 것을 어른이 되어서야 자각하게 되었다. 김선우 시인의 시 「등」은 그 뼈아픈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죽은 새의 등 이미지는 피하려 해도 기필코 엄마의 등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에게 엄마의 등은 평온과 사랑의 장소이자 희생의 상징이기 때문에 그렇다. 늙어 굽은 등으로 뒷짐을 지고 걷는 엄마들의 뒷모습은 아직도 자식들을 업고 있는 산처럼 보인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등 위에 두 날개를 포개 얹은 새. 머리와 꽁지는 없고 검은 등만 남은 새. 시인은 그런 새를 보며 왜 등만 남았는지 묻지 못한다. 숭고함 앞에서 누가 서툰 질문을 던질 수 있겠는가? 죽어서도 흙 속의 누군가에게 안 보이는 부리로 먹이를 먹이며 등을 움찟거리는 죽은 새의 모습은 모성의 숭고함 그 자체다. 아직도 죽은 새의 등에 업혀 있는 게 많다는 시인의 진술은 인류를 지속해온 불가항력의 힘이 바로 모성이라는 것을 선언한 것이다. 엄마들은 죽어서도 움직이는 등이다. 그 등에 쓰인 많은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는 이제야 겨우 삶의 날갯짓을 시도하는 노란 부리의 작은 새들일 것이다. 검은 등만 오롯이 남은 엄마들에게 무한한 감사와 사랑을.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묵언(默言)의 날

묵언(默言)의 날 -고진하 하루 종일 입을 봉(封)하기로 한 날, 마당귀에 엎어져 있는 빈 항아리들을 보았다. 쌀을 넣었던 항아리, 겨를 담았던 항아리, 된장을 익히던 항아리, 술을 빚었던 항아리들, 하지만 지금은 속엣것들을 말끔히 비워내고 거꾸로 엎어져 있다. 시끄러운 세상을 향한 시위일까, 고행일까, 큰 입 봉(封)한 채 물구나무선 항아리들, 부글부글거리는 욕망을 비워내고도 배부른 항아리들, 침묵만으로도 충분히 배부른 항아리들! 호랑나비 돛배, 지만지, 2012. 침묵만으로도 배부른 항아리 말 많은 집은 장맛도 쓰다.라는 속담이 있다. 집안에 쓸데없는 잔말이 많으면 살림이 잘 안된다는 뜻인데, 표현이 참 신랄하다. 말이란 잘 쓰면 약(藥)이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독(毒)이 된다. 대개의 말들은 약이 되기보다는 독이 되는 경우가 많다. 말이란 욕망이기 때문에 그렇다. 사람들이 갖는 욕망은 일치하고 조화하기보다는 엇갈리거나 불화하는 게 일반적이다. 말싸움이란 곧 욕망 싸움이다. 욕망을 하나의 자연법칙으로 인정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말은 독이 될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말을 기록한 글의 성격 또한 마찬가지다. 플라톤은 글의 속성을 약(drug)과 독(poison)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 뜻을 지닌 파르마콘(Pharmakon)에 견주었는데, 이는 말이나 글이 갖는 이중성과 모호성을 지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크게 보자면, 인류사의 비극은 말의 이중성과 모호성, 다시 말해 욕망의 문제와 직결된 것이다. 고진하 시인의 시 [묵언의 날]의 시적 맥락은 말과 욕망의 문제에 기반한다. 쌀이나 겨를 넣었던, 혹은 된장과 술을 익히고 빚었던 마당의 항아리처럼 인간이란 자신의 내면에 욕망을 넣고 부풀린 또 다른 항아리라 할 수 있다. 시인이 말하는 시끄러운 세상이란 욕망으로 가득 찬 자본의 세상이다. 그 세상에서 벗어나는 지혜는 무엇일까? 시인이 내민 방법은 속에 담긴 것을 비워내고 거꾸로 엎어져 있는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말을 봉쇄하고 욕망을 비우는 행위는 쉽지 않다. 비움으로써 배부를 수 있는 것은 지극한 역설이기에 실천하기 어렵다. 그러나 지향해야만 하는 당위(當爲)임에는 분명하다. 시인이 제시한 묵언은 고행이나 시위라기보다는 침묵으로 가는 구도행이자, 세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자기 치유의 방편일 것이다. 침묵만으로도 충분히 배부른 항아리들!이 되려면 먼저 하루쯤의 묵언으로 자신 안에 쌓인 말과 욕망의 찌꺼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병보다 지독한 병

병보다 지독한 병 페르난두 페소아 병보다 지독한 병이 있다. 아프지 않은 아픔도 있지, 영혼조차 안 아파, 그런데 다른 아픔들보다 더 심하게 아픈. 꿈꾸긴 했지만 현실인 삶이 가져오는 것보다 더 현실적인 고통이 있지, 그리고 그런 감각도 있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것들 우리 삶보다도 더 우리 것인 것들.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있는지,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존재하고, 느지막이 존재한다, 그리고 느지막이 우리의 것이다, 바로 우리이다 넓은 강 흐릿한 신록 위로 갈매기들의 하얀 굴곡 영혼 위로 부질없는 날갯짓 과거에도 아니었고 앞으로도 될 수 없는, 그리고 그게 전부. 포도주나 한잔 더 주게,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니. 느지막이 깨닫는 삶의 뜻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 2018, 문학과지성사.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한 생을 사는 게 적절한 일일까? 이런 물음은 쓸데없는 일로 치부된다. 이름이 곧 그 사람이라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명이나 필명을 한두 개 사용하는 경우는 이해되지만, 그 이상을 넘어서면 사기꾼이나 범죄자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포르투갈의 천재 시인 페르난도 페소아는 70여 개가 넘는 이명(異名)으로 시, 소설, 희곡 등의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왜 그리 많은 이름을 사용했을까? 이유를 명확히 알 수는 없겠지만, 언뜻 이해는 간다. 한 사람의 삶을 속박하고 규정하는 게 이름의 한 속성이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다는 어느 대중가요의 가사처럼 우리의 삶은 하나의 나로 수렴할 수 없는 낯설고 복잡하고 다양한 나로 얽혀 있다. 페소아의 시 「병보다 지독한 병」은 내가 아프다고 느끼는 것보다 더 아픈 일들이 있고, 심지어 아프지 않은 아픔도 있다는 사실을 통해 내가 이미 알고 있는 혹은 감각하고 있는 나의 세계란 지극히 협소한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것들/우리 삶보다도 더 우리 것인 것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태를 시인은 병보다 지독한 병에 빗댄다.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그것들은 느지막이 인지된다. 삶의 참뜻은 늘 느지막이 인지될 수밖에 없다는 자명한 사실로 인해 우리 삶은 쓸모없고, 그 무엇도 될 수 없다는 게 시인의 생각인 듯하다. 부질없는 날갯짓이 우리이고 그게 전부라는 그의 허무는 포도주나 한잔 더 주게,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니.라는 구절로 압축된다. 페소아의 말처럼 인생은 아무것도 아닐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삶은 하나의 나가 부르는 독창이 아니라 다수의 나가 부르는 합창이다. 그는 「경계 있는 영혼은」이라는 시에서 나는 여럿이며 나의 소유가 아니다.라고 진술했는데, 이는 소유할 수 없는 다수의 나, 그것이 바로 우리라는 것을 뜻한다. 페소아가 70개의 이명을 쓴 것은 하나의 이름으로 소유할 수 없는 삶의 다양함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리라. 따라서 아무것도 아닌 삶은 없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흰색 가면

흰색 가면 -박지웅 어수룩한 개는 아무거나 주워 먹었다 쥐약과 건넛산에 놓인 달을 잘 구별하지 못했다 달이 어렴풋이 뒤뜰에 지면 홀린 듯 달려갔다 키우던 개와 닭은 주로 화단에 묻혔다가 이듬해 유월 머리가 여럿 달린 수국이 되었다 둥그스름한 수국 머리를 쓰다듬으면 묶인 새끼들이 먼저 알아보고 낑낑댔다 한동안 흙과 물과 바람과 섞여 백수국은 낯가림 없이 옛집 마당을 지켰다 닭이 다 자라면 날개를 꺾어 안고 시장에 갔다 닭장수는 모가지를 젖혀 칼집만 스윽 냈다 닭이 던져진 고무통 속에서 둥둥 북소리가 났다 피가 다 빠진 뒤에야 잠잠해지는 짐승의 안쪽 잠자리에 들 때마다 머리가 핑 돌았다 핏발선 꽃들, 힘세고 오래가던 어지럼들 닭 뼈다귀를 화단에 던져주면 수국은 혈육처럼 그러안고 밤새 핥는 것이었다 나비가면, 문학동네, 2021. 삶과 죽음의 현기증 신화학의 고전으로 알려진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James George Frazer)의 황금가지는 공감주술(共感呪術)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류의 신화와 종교를 분석하는데, 그 개념의 요체는 공간적으로 떨어져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생명체는 비밀스러운 공감을 통해 상호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나 파동이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전해지며 공간을 초월해 상호 연결된다는 주장이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주술(呪術)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비밀스럽고 두려운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세계의 파동을 느끼고 읽어내 현시하는 게 시인이다. 그런 면에서 시인은 삶과 죽음을 매개하는 영매(靈媒)라 정의할 수 있다. 영매로서의 시인은 이곳과 저곳, 이승과 저승의 간극에 다리를 놓아 삶의 안쪽에 고립된 어지럼증과 불안을 정화(淨化)하는 역할을 한다. 박지웅 시인의 시 '흰색 가면'은 개와 닭의 죽음과 화단에 핀 수국의 대조를 통해 삶과 죽음의 현기증을 제시함으로써 비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불안의 세계를 독자들 앞에 불쑥 내민다. 쥐약을 먹고 죽은 개와 모가지에 칼집이 나 죽은 닭은 유년의 화자가 실감한 최초의 공포였을 것이다. 목에 칼집이 난 채로 고무통 속에 던져져 둥둥 북소리를 내다 피가 다 빠져서야 잠잠해지는 고요, 그것이 유년의 화자가 목도한 짐승의 안쪽이고, 죽음의 실체다. 공포스러운 사태는 닭의 죽음이 아니다. 그 닭을 잡아먹음으로써 유지되는 인간의 삶이다. 여기에 삶과 죽음의 어지럼증이 있다. 시인은 죽은 개와 닭이 수국이 되었다고 생각함으로써 어지럼증을 견딘다. 수국을 보고 낑낑대는 강아지들과 닭 뼈다귀를 혈육처럼 핥는 수국을 보며 시인은 삶에서 죽음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이어지는 비밀스럽고 두려운 텔레파시(telepathy)를 읽어낸다. 삶의 가면은 죽음이고, 죽음의 가면은 삶이라는 공감의 내밀한 순환을 이해할 때 불안은 정화된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가을이 올 때

가을이 올 때 -박형준 뜰에 찬서리가 내려 국화가 지기 전에 아버지는 문에 창호지를 새로 바르셨다 그런 날, 뜰 앞에 서서 꽃을 바라보는 아버지는 일 년 중 가장 흐뭇한 표정을 하고 계셨다 아버지는 그해의 가장 좋은 국화꽃을 따서 창호지와 함께 바르시곤 문을 양지바른 담벼락에 기대어놓으셨다 바람과 그늘이 잘 드나들어야 혀 잘 마른 창호지 문을 새로 단 방에서 잠을 자는 첫 밤에는 달그림자가 길어져서 대처에서 일하는 누이와 형이 몹시 그리웠다 바람이 찾아와서 문풍지를 살랑살랑 흔드는 밤이면 국화꽃이 창호지 안에서 그늘째 피어나는 듯했다 꽃과 그늘과 바람이 숨을 쉬는 우리 집 방문에서 가을이 깊어갔다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 창비, 2020 결이 고운 사람은 행동이 섬세하다. 거창한 일보다 일상의 작은 일을 어떻게 꾸려가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인성을 저절로 알게 된다. 우리 삶의 면면은 풍족하고 빛나는 순간보다 힘들고, 어렵고, 지친 시간이 더 많다. 아름다운 사람은 삶의 고됨을 견디는 방법을 터득해 알고 있기에 주변을 환하게 만든다. 박형준 시인의 ?가을이 올 때?에 그려진 아버지는 참으로 아름다운 분이다. 무더운 여름이 가고 찬서리가 내리는 날 그해의 가장 좋은 국화꽃을 따서 창호지에 발라 새로 문풍지를 만드는 섬세한 아버지. 가난하지만 뜰에 핀 국화를 보며 일 년 중 가장 흐뭇한 표정을 지을 줄 아는 미적(美的)인 태도에서 우리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게 된다. 그 답은 햇볕 잘 드는 담벼락에 새로 바른 문을 기대어 놓으며 바람과 그늘이 잘 드나들어야 혀라는 말에 담겨 있다. 성급한 마음에 문풍지를 햇볕에 말리면 뒤틀려 터진다. 시간이 더디더라도 그늘에서 바람으로 은근히 말려야 하는 것처럼 삶 또한 그래야 한다는 게 아버지의 가르침일 것이다. 그래서 잘 마른 창호지 문을 새로 달고 자는 첫 밤에 달그림자를 보며 대처에서 일하는 누이와 형을 그리워하는 화자의 마음이 국화꽃이 창호지 안에서 그늘째 피어나는 사태처럼 아늑하고 간절해 보인다. 안과 밖이 잘 통기(通氣)되어 꽃과 바람과 그늘이 고루 숨을 내쉬는 화자의 집 창호지에서 절로 깊어만 가는 가을밤의 풍경은 가난해도 한없이 행복해 보인다. 그것은 꽃을 바라볼 줄 알고, 가족을 위해 필요한 일을 때맞춰서 완수하는 아버지의 심미적 여유가 만들어낸 풍경이다. 창호지 안에 핀 국화처럼 안과 밖, 기쁨과 슬픔 등 대립해 막힌 것을 소통시켜 숨 쉬게 하는 아버지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우리들의 집을 아늑하고 환하게 만든다. 그런 아버지들이 마냥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새는 게 상책(上策)이다

새는 게 상책(上策)이다 -정진규 새지 않으면 소리가 되지 않는다 음악이 되지 않는다 노래가 되지 않는다 구멍으로 새어야 소리가 된다 막히면 끝장이다 한 소식도 들을 수 없다 새는 게 상책(上策)이다 새지 않으면 사랑도 되지 않는다 몸을 만들지 못한다 새끼를 만들지도 못한다 막히면 끝장이다 새는 게 상책(上策)이다 달도 뜨지 않는 그런 여자 하나가 바다가 출렁대지도 않는 그런 여자 하나가 오지도 않는 보름사리 때*를 부르며 슬피 울고 간다 새는 게 상책(上策)이다 *미당(未堂) 『영산홍(映山紅)』 『밥을 멕이다』, 시인생각, 2012. 새는 일이 생명이고 삶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로티노스(Plotinos)는 모든 존재와 사물의 원천으로 일자(一者)를 제시한다. 일자는 그 자체로 충일하고 완전한 존재이며, 이 세계의 모든 것은 그로부터 흘러나온 것이라는 게 플로티노스의 그 유명한 유출설(Emanation theory, 流出說)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세계란 완전한 하나가 지속적으로 분출하면서 만든 다수의 범람이라 이해된다. 어쨌든, 플로티노스의 주장에서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은 일자라는 존재보다는 일자가 흘러나올 수 있는 구멍에 있지 않을까, 라는 게 나의 속견(俗見)이다. 내친김에 속내를 더 밀고 나가자면, 창조란 일자 혹은 신이 자신의 몸에 구멍을 내는 행위로도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따라서 일자로부터 새어 나온 인간의 생명 또한 구멍을 내야만 유지되고, 그 구멍으로 뭔가를 흘려내야만 삶의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즉, 막히면 인간이든 동물이든 또는 사회건 문화건 간에 다 죽고 질식하게 된다는 게 플로티노스의 본의(本意)가 아닐까? 정진규 시인의 시 [새는 게 상책이다]는 유출설과 긴밀한 연관을 보인다. 새지 않으면 소리가 되지 않는다라는 표현은 음악의 본질을 간파한 탁월한 직관이다. 이는 아름다움이란 곧 새는 것, 즉 끊임없이 흘러 유동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직관은 미적 인식만이 아니라 삶의 지혜에도 적용된다. 흔히들 새는 것을 손해나 칠칠치 못한 행동으로 여기지만 새는 일이 생명이고 삶이다. 제방에 수문이 없으면 둑은 터져버린다. 피리에 구멍이 꼭 있어야 하듯 삶이라는 제방에도 막았다 열 구멍이 필요하다. 새지 않으면 사랑도 되지 않고, 몸도 만들 수 없으며, 새끼를 만들 수도 없다는 시인의 열거는 새는 것이 곧 생명임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생명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겠는가. 막히면 모두 죽고, 고이면 다 슬프다. 오지도 않는 보름사리 때를 부르며 슬피 울고 가는 한 여인의 사연은 아마도 새지 못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플로티노스의 유출설이 그리스철학이 도달한 가장 아름다운 직관의 하나라 알려진 것처럼 새는 게 상책이라는 시인의 표현은 철학적 사유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시적 직관의 높은 경지를 서슴없이 보여준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밤에 쓰는 편지 3

밤에 쓰는 편지 3 김사인 한강아 강가에 나아가 가만히 불러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작은 목소리에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나 값싼 눈물 몇 낱으로 저 큰 슬픔을 부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진즉 알고는 있었습니다. 한강아 부르면서 나는 무엇을 또 기대했던 것인지요. 큰 손바닥과 다정한 목소리를 기다렸던 것인지요. 나도 한줄기 강이어야 합니다. 나도 큰 슬픔으로 누워 머리 풀고 나란히 흘러야 합니다. 《밤에 쓰는 편지》, 문학동네, 2020. 강을 바라보는 시간은 삶의 흔적을 되짚어보게 만든다. 강물은 바다로 흘러가기보다 강을 응시하는 사람의 마음 안으로 굽이쳐 성찰의 발원지가 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세상은 강물처럼 끊임없이 흐르고 변하기 때문에 동일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아주 세밀히 따진다면 조금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인물이 되는 셈인데, 그 차이는 사변적이라서 현실로 체감하기 어렵다. 변한다는 사실에만 얽매인다면 세상은 덧없다. 변하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는 것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윤리적 결단이다. 윤리란 묻고, 답하는 일이다. 묻기만 하는 시간은 거칠고 황량하다. 왜 사는가, 라는 큰 물음에 속 시원한 대답은 내놓지 못하겠지만 최선의 답은 내놔야 한다. 그게 성찰이고 윤리다. 아름다움이 시의 얼굴이라면 윤리는 시의 표정일 것이다. 좋은 얼굴은 표정으로 살아난다. 김사인 시인의 시 ?밤에 쓰는 편지 3?은 자문하고 자답하는 윤리적 시간을 한강아라는 호명과 나도 한줄기 강이어야 합니다.라는 다짐으로 성찰한다. 시인의 성찰은 가만히, 작은, 떨리는이라는 표현에 드러난 것처럼 겸손하다. 저 큰 슬픔으로 비유된 강물은 역사와 실존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흘러가는 숭고의 시간이다. 한강은 값싼 눈물로 호소하거나 떨리는 목소리로 부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며, 부른다 해도 쉽게 말하지 않는 단호함의 상징이기에 멀찍이 떨어져서 큰 손바닥과 다정한 목소리를 기대하는 건 어리석고 염치없는 일일 수 있다. 타인의, 혹은 역사의 슬픔을 바라보며 애통해하기보다 자신도 한줄기 강이 되어 나란히 흘러야만 강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시인의 나직한 고백이 마음에 깊게 남는 이유는 인간이란 자신의 미흡을 성찰하는 윤리적 존재라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더 나은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견은 있겠지만 인간이란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말아야 한다. 큰 슬픔으로 강과 함께 흘러가는 시인의 발은 필시 모든 강에 닿아 있을 것이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싸리꽃 핀 벌판

싸리꽃 핀 벌판 -김수영 피로는 도회뿐만 아니라 시골에도 있다 푸른 연못을 넘쳐흐르는 장마통의 싸리꽃 핀 벌판에서 나는 왜 이다지도 피로에 집착하고 있는가 기적소리는 문명의 밑바닥을 가고 형이상학은 돈지갑처럼 나의 머리 위에서 떨어진다 《김수영 전집》, 민음사, 2018. 현대사회, 물질에 소진된 인간 왜 피로한가? 이 질문은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복잡하다. 원하는 사람은 없지만 피할 수 없는 게 피로다. 피로의 원인은 심신의 과도한 사용에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불가피하다. 노동하지 않으면 먹고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간에 노동은 인간의 기력을 소진하게 한다. 일하지 않는 소수 계층도 피로를 호소하는데, 그들의 피로는 육체적 노동에 따른 피로라기보다 신경증 또는 권태의 산물로 보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피로는 계급적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피로하면 언제든 쉴 수 있는 사람과 피로해도 쉴 수 없는 사람으로 나뉜 사회가 자본주의다. 전자의 계층이 느끼는 피로는 일시적이고 해소할 수 있는 상태이겠지만 후자의 계층이 느끼는 피로는 만성적이고 해소 불가능한 운명과도 같다. 그래서 대다수 사람에게 피로하면 쉬라는 말은 빈말처럼 들린다. 결국 자본주의에서 왜 피로한가? 라는 물음은 해결책이 없는 물음과도 같아 보인다. 김수영 시인의 시 ?싸리꽃 핀 벌판?의 첫 구절에 피로는 도시뿐만 아니라 시골에도 있다는 진술은 어디를 가든 피로의 상태를 피할 수 없다는 인식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장마통의 싸리꽃 핀 벌판의 풍경을 감상하지 못하고 나는 왜 이다지도 피로에 집착하고 있는가라고 반문하는 시인의 불편한 심경은 현대인 모두가 느끼는 공통의 감정일 것이다. 휴식을 취하면서도 피로를 느끼는 이유는 한마디로 돈 때문이다. 돈은 피로의 산물이다. 안 벌어도 피로하고, 벌어도 피로한 게 돈이다. 돈은 모든 가치를 집어삼키는 블랙홀이다. 김수영 시인은 집착하고 싶지 않지만 집착할 수밖에 없는 게 돈이라는 사실을 형이상학은 돈지갑처럼/나의 머리 위에서 떨어진다라는 표현을 통해 솔직히 드러낸다. 형이상학이 돈지갑처럼 떨어진다는 표현은 한국 현대시의 흐름에 한 획을 긋는 엄청난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 표현이 전하는 메시지는 돈에 집착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는 사람만이 돈이 주는 피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돈에 대해 초연한 척하는 사람은 대개가 위선적이다. 돈에 대해 솔직하다는 게 최선의 윤리는 아니다. 그러나 솔직하지 않으면 돈의 노예가 되어 삶을 소진하게 된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는 소진된 인간은 피로한 인간을 훨씬 넘어선다.라고 말했다. 소진은 회복할 수 없는 상실이고 죽음이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두 자리

두 자리 -천양희 스스로 속지 않겠다는 마음이 산을 보는 마음이라면 스스로 비우겠다는 마음이 물을 보는 마음일 거라 생각는데 들을 보는 마음이 산도 물도 아닌 것이 참으로 좋다 살아 있는 서명 같고 말의 축포 같은 참 그것은 너무 많은 마음이니 붉은 꽃처럼 뜨거운 시절을 붉게 피어 견딘다 서로가 견딘 자리는 크다 『지독히 다행한』, 창비, 2021. 논어 「옹야편(翁也篇)」에 나오는 지자요수 인자요산(智者樂水 仁者樂山)은 사람들 사이에 널리 회자되는 구절이다. 자구(字句)대로 풀어보면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즐기고 인자한 사람은 산을 즐긴다는 뜻일 텐데, 항시 어떤 연유로 지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는 산을 좋아하는지 우문(愚問)이 뒤따른다. 물은 장애를 피해 흘러가기에 지혜롭고, 산은 의연히 그 자리를 지킴으로써 인자하다는 게 일반적 이해로 알려졌으나 그 또한 개운하지는 않다. 천양희 시인의 시 「두 자리」는 개운치 않은 이해가 남긴 이물감을 씻겨 내려가게 해준다. 시의 1행과 2행을 읽으며 스스로 속지 않겠다는 마음은 산처럼 굳건해야 하고, 스스로 비우겠다는 마음은 물처럼 유연해야 한다는 게 어짊과 지혜의 본뜻이 아닐까 하는 추론을 하게 되니 생각이 한결 명료해진다. 그러나 정작 나를 놀란 게 한 것은 따로 있으니, 그것은 들을 보는 마음이라는 표현이다. 어짊과 지혜도 좋으나 그것들은 들을 보는 마음만 못하다는 시인의 인식은 삶의 깊이가 여간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어 보인다. 시 「두 자리」를 읽다 보니 문득 김제의 만경평야를 봤을 때의 감흥이 떠오른다. 그냥 속절없이 벅찼었다. 속지 않으려 애쓰고, 비우고자 다짐하며 흘러왔던 그 모든 시간의 우여곡절이 한순간에 잦아들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 꿈틀댔었는데, 천양희 시인은 그것을 살아있는 서명 같고/말의 축포 같은/참 그것은/너무 많은 마음이니라는 구절로 드러낸다. 확연하고 감동적이다. 아픔과 기쁨, 옳고 그름, 사랑과 이별이라는 감정들의 교차로 이어진, 붉은 꽃처럼 뜨거운 시절을 지나와 탁 트인 들 앞에 선 시인은 그 시절을 견디며 붉게 피어 있는 꽃들로부터 서로가 견딘 자리는 크다라는 한 생각을 얻어낸다. 혼자 견딘 게 아니라 서로가 견딘 그 자리는 살아있음의 자리다. 그 자리는 참으로 너무 많은 마음이어서 고독해 보인다. 산도 물도 아닌 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참으로 좋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려면 얼마만큼 고독해야 할까. 아직은 알 수 없기에 나는 내 자리만큼만 겨우 견뎌보기로 한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아버지의 고된 노동

휘파람 -이윤학 반농반어(半農半漁)의 아버지가 양식장 김을 뜯어온 대소쿠리 지게를 받쳐놓고 숨을 고르고 있겠다 아침나절 양지바른 산모롱이 소나무 가지에 얹힌 눈덩이들 가루를 날리고 있겠다 물이 빠지는 대소쿠리 지게를 지고 일어서는 아버지 짧은 입김 끙 소리 기합에 맞추어 눈 알갱이 굵어진 논배미 어디선가 바짓가랑이 터지는 소리 들리겠다 폭설에서 벗어난 풀들 젖은 말뚝 아래 이끼들 푸르스름 입술을 열고 생기를 찾았겠다 두 손을 모아 누군가를 불러내는 부엉이 우는 소리 창호지 문구멍으로 날아들겠다 -『나보다 더 오래 내게 다가온 사람』, 간드레, 2021. 이탈리아의 심리학자 루이지 조야(Luigi Zoja)는 『아버지란 무엇인가』에서 아버지들을 무거운 짐을 짊어진 역사의 당나귀들에 비유한다. 아버지들이 인류 역사를 이끌어온 동력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한 비유겠지만 당나귀에 빗댄 게 내심 불편하다. 국어사전에, 당나귀는 병에 대한 저항력이 강하여 부리기 적당하다는 설명이 떠올라서 그렇다. 역사를 들먹이지 않아도 아버지들의 등에 올려진 짐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안다. 또한 그 무게가 얼마나 무겁고 버거운 것인지도 능히 짐작한다. 부림을 당하는 아버지들의 수고로움에 고마움보다 불만을 먼저 드러내 아버지들을 고립시키는 게 작금의 세태인 것 같아 안타깝다. 이윤학 시인의 시 「휘파람」에 묘사된 아버지의 삶은 반농반어와 지게로 응축된다. 반농반어는 사계절 내내 한시도 쉴 수 없는 아버지의 고단한 삶을 환기한다. 지게는 고단함의 무게를 짊어져야만 하는 아버지의 거친 숙명을 표상한다. 화자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있겠다라는 시어로 추측하고 회상한다. 추운 겨울날 물 빠지는 대소쿠리 지게를 지고 일어서는 아버지의 끙 소리는 읽는 이의 가슴을 저민다. 아버지의 삶이란 저 끙 소리 하나로 다 집약된다. 화자는 끙 소리로 일어선 아버지가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두 다리로 버티다 바짓가랑이가 터지는 소리를 먼 곳에서 생생히 듣는다. 끙과 바짓가랑이 터지는 소리는 식구들을 먹여 살리려는 강단(剛斷)의 음상이다. 누군가를 불러내는 부엉이 소리처럼 아버지의 끙과 바짓가랑이 터지는 소리는 자식들의 따뜻한 미래를 불러낼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춥고, 시리고, 아픈 힘듦과 버팀의 시간이 담겨 있다. 이윤학 시인의 시 「휘파람」은 과잉의 수사로 아버지의 삶을 미화하거나 폄하하는 소란스러운 시들과는 다른 결을 보인다. 무거운 짐을 짊어진 역사의 당나귀들로 아버지들을 일괄해 비유하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시선의 과잉 때문이다. 지나침이 없이 적절한 거리에서 아버지의 삶을 끙 소리로 응축해내는 시인의 절제된 시선과 언어가 시 「휘파람」이 갖는 깊은 매력일 것이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절, 뚝, 절, 뚝

절, 뚝, 절, 뚝 -나희덕 다친 발목을 끌고 향일암 간다 그는 여기에 없고 그의 부재가 나를 절뚝거리게 하고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는 동안 절, 뚝, 절, 뚝, 아픈 왼발을 지탱하느라 오른발이 더 시큰거리는 것 같고 어둔 숲 그늘에서는 알 수 없는 향기가 흘러나오고 흐르는 땀은 그냥 흘러내리게 두고 왼발이 앞서면 오른발이 뒤로, 오른발이 앞서면 왼발이 뒤로 가는 어긋남이 여기까지 나를 이끌었음을 알고 해를 향해 엎드릴 만한 암자 마당에는 동백이 열매를 맺기 시작하고 그 빛나는 열매에는 손도 대지 못하고 안개 젖은 수평선만 바라보다가 절, 뚝, 절, 뚝, 내려오는 길 붉은 흙언덕에서 새끼 염소가 울고 저녁이 온다고 울고 흰 발자국처럼 산딸나무 꽃이 피고 《야생사과》, 창비, 2009. 언제부터인지 하염없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왜 이러지? 하며 소진된 의지를 탓해보지만, 그 탓조차도 하염없다에 매달려 끌려다닌다. 남들은 주체, 독립, 열정 등과 같은 힘센 언어들에 올라타 세계를 달려가고 있는데, 나는 어찌 그 반대인지 곰곰이 따져보니 원인은 의지의존증(意志依存症)에 있어 보였다. 한마디로 의지만 믿고 따랐다는 이야긴데, 정작 삶은 내 의지와 전혀 다른 곳에서 펼쳐진 게 대부분이었으니 하염없을 만하다. 우리가 의지를 가지는 한 인생은 고통이고, 세계는 최악이 된다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적(?) 말에 마음의 문을 반쯤 열 수밖에 없는 사정은 삶의 많은 부분이 어긋남에 걸쳐져 있기 때문이다. 나희덕 시인의 시 ?절, 뚝, 절, 뚝?은 어긋남의 하염없음을 너무도 절절히 읊고 있다. 다친 발목을 이끌고 향일암을 오르는 화자를 보며 아프면 가지 말지, 라는 얕은 생각을 해보다기 오른발이 앞서면 왼발이 뒤로 가는 어긋남이/여기까지 나를 이끌었음을 알고라는 구절에 이르러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 어긋남이 우리 삶을 여기까지 이끌고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결핍과 부재가 우리를 절뚝거리게 하지만 그래도 가야 하는 게 삶이다. 메우고 채우려는 욕망이 아니라 비우고 버리려는 하염없음의 의지로 향일암을 오르고 내리는 그 시간의 아픔을 시인은 절, 뚝, 절, 뚝이라는 네 글자에 온전히 담아낸다. 스타카토처럼 또렷하게 끊어지는 고통의 발걸음을 디뎌보지 않은 사람은 새끼 염소가 저녁이 온다고 우는 것과 산딸나무가 꽃을 피우는 것의 기막힌 내막을 모를 것이다. 의지 때문에 고통이 생긴다고 말했던 쇼펜하우어는 의지가 없다면 세계도 없다는 말도 했다. 어쩌란 말인가. 다친 발목을 끌고 절, 뚝, 절, 뚝 하염없이 가는 수밖에. 나희덕 시인의 시를 읽으며 어긋나야 걷게 되고, 아파야 알게 된다는 것을 절감해 본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봄비

봄비 함민복 양철지붕이 소리 내어 읽는다 씨앗은 약속 씨앗 같은 약속 참 많았구나 그리운 사람 내리는 봄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개가 가죽 비틀어 빗방울을 턴다 마른 풀잎 이제 마음 놓고 썩게 풀씨들은 단단해졌다 봄비야 택시! 하고 너를 먼저 부른 씨앗 누구냐 꽃 피는 것 보면 알지 그리운 얼굴 먼저 떠오르지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창비, 2013. 그리움으로 연결된 약속 어김없이 또 봄이 왔다. 꽃들이 다투어 피고, 냉이며 쑥이 들판에 지천인데 마음은 겨울 들판처럼 휑하다.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봄이 이리 냉랭해진 걸까? 곰곰이 되짚어보아도 시원한 답이 없다. 애써 떠올린 게 고작 사람살이의 온기가 식어 그런 것 같다는 식상하고 궁핍한 생각뿐이었는데, 시인 함민복이 꽃피는 것 보면 알지라며 궁핍의 소로(小路)에 길목을 터준다. 그랬다. 핀 꽃을 즐길 줄만 알았지 그 꽃이 어떻게 피는지를 늘 지나쳤었다. 큰 것만 보고 작은 것은 보지 못했으며, 그리움보다 서운함을 먼저 내세웠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았을 것은 당연하다. 한 때 약속이란 지켜지기보다 깨지는 것에 그 의미가 있다는 거친 논리를 남들에게 전하기도 했는데, 아마 그런 억견(臆見)을 나는 패기와 동급으로 견주지 않았나 싶다. 패기는 정도(正道)에서 나와야 한다. 꽃이 피는 것은 씨앗의 약속이다. 약속을 지켜 꽃을 피우는 씨앗의 바른길, 그것이 봄의 세상이 아닐까? 씨앗의 약속이 맺어지려면 또 다른 약속이 있어야 한다. 꽃이 씨앗의 약속이라며, 씨앗은 봄비의 약속이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의 약속이 되어 하나로 이어지는 게 그리움이다. 그리움으로 연결된 약속들에는 선후(先後)가 없다. 하여, 택시! 하고 너를 먼저 부른 씨앗은 누구냐는 시인의 물음에 나는 아무도 먼저 부르지 않았고 아무도 늦게 부르지 않았다고 답하고자 한다. 마음 놓고 썩는 그리움의 단단한 약속들이 봄의 은유다. 너를 위해 내가 썩는 것이 약속이다. 그래야 꽃이 피고 그리운 얼굴이 떠오를 것이다. 약속함으로써 세상은 빛나고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시 '봄비'를읽으며 절감한다. 우리는 서로의 약속이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경쾌한 유랑

경쾌한 유랑 이재무 새벽 공원 산책길에서 참새 무리를 만나다 저들은 떼 지어 다니면서 대오 짓지 않고 따로 놀며 생업에 분주하다 스타카토 놀이 속에 노동이 있다 저, 경쾌한 유랑의 족속들은 농업 부족의 일원으로 살았던 텃새 시절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가는 발목 튀는 공처럼 맨땅 뛰어다니며 금세 휘발되는 음표 통통통 마구 찍어대는 저 가볍고 날렵한 동작들은 잠 다 빠져나가지 못한 부은 몸을 순간 들것이 되어 가볍게 들어 올린다 수다의 꽃 피우며 검은 부리로 쉴 새 없이 일용할 양식 쪼아대는 근면한 황족의 회백과 다갈색 빛깔 속에는 푸른 피가 유전하고 있을 것이다 새벽 공원 산책길에서 만난 발랄 상쾌한 살림 어질고 환하고 눈부시다 《경쾌한 유랑》, 문학과지성사, 2011. 통통통, 삶을 횡단하는 눈부신 리듬 도시의 삶은 목적 달성이라는 것으로 압축된다. 목적 없이 돌아다니는 것은 낙오를 증명하는 것으로 여겨지기에 급한 일이 없어도 급한 것처럼 뛰어다니는 게 도시인들의 모습이다. 목적이라는 긴급한 명령 앞에서 산책이나 소요(逍遙)나 유랑이라는 말을 운운하는 것은 생활의 절박을 방기하는 무책임한 처사로 취급되는 게 요즘의 세태다. 목적은 과정의 연속이지 꼭 이뤄야 할 절대 과업은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목적이 없을 때 목적은 분명해진다.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돌아다니는 산책과 소요의 가벼운 삶이 목적의 짐을 지고 바쁘게 돌아다니는 도시의 무거운 삶보다 더 많은 성취와 풍요를 제공한다는 것은 내심(內心)으로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 사실을 터놓고 말하는 이들이 시인이다. 시인들은 산책하는 자들이다. 무거움 속에서 경쾌함을, 고됨 속에서 발랄함을 찾아내는 발견자들이다. 이재무 시인의 시 ?경쾌한 유랑?은 생업과 살림과 노동에 묻어 있는 힘겨움과 피곤함의 중력(重力)을 맨땅을 통통통 튀며 경쾌하게 새벽 거리를 횡단하는 참새들의 날렵한 동작을 통해 상쇄함으로써 어질고 환한 삶의 리듬을 발견해 낸다. 노동의 중력을 한 음절씩 끊어내며 스타카토로 연주되는 삶의 경쾌함이란 독수리의 비상처럼 거대하고 웅장한 움직임은 아니다. 거대한 것, 이를테면 떼 지어 다니거나 대오를 짓는 행동은 허위일 가능성이 크다. 진실은 가볍고 작다. 노동이 놀이가 된다는 것은 거창한 의미가 아니다. 가볍고 날렵하고 수다스러운 참새들의 몸놀림처럼 약간씩만 튀어 오르는 탄력성을 가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통통통. 그렇게 작은 움직임과 리듬으로 세계의 무거움을 가볍게 횡단하는 행보가 시인이 말하는 눈부신 삶의 모습이 아닐까? 자유를 위한 비상은 커다란 날개보다 몸을 가볍게 들어 올리는 들것 하나면 충분하다. 걷는 사람은 뛰는 사람보다 많은 걸 본다. 걷되, 목적 없이 천천히 걷는 산책자는 더 많은 걸 본다. 본다는 것은 발견한다는 것이고, 발견한다는 것은 가벼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좋은 삶이란 곧 경쾌한 유랑이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귤

귤 -박목월 밤에 귤을 깐다. 겨울밤에 혼자 까는 귤. 나의 시가 귤나무에 열릴 순 없지만 앓는 어린것의 입술을 축이려고 겨울밤 자정에 혼자 까는 귤 우리 말에는 가슴이 젖어오는 고독감을 나타내는 형용사가 없지만 밤에 혼자 귤을 까는 한 인간의 고독감을 나타내는 말이 있을 수 없지만, 한밤에 향긋한 귤향기가 스민 한 인간의 가는 손가락. 《박목월 시전집》, 민음사, 2003. 방문하기엔 좋고 머물러 있기엔 쓸쓸한 고독 고독은 병(病)이고, 약(藥)이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고독은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함과 부모 없는 어린아이와 자식 없는 늙은이라는 두 가지 뜻으로 설명하는데, 이는 아무래도 고독을 피해야 할 병의 상태로 파악한 사회적 인식의 소산인 듯하다. 언론매체들이 고독사라는 극단의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그러한 인식과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독이 꼭 그렇게 받아들여지는 것만은 아니다.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리크 입센(Henrik Ibsen)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간은 고독 속에서 혼자 서는 인간이다.라 말했다. 하지만, 고독이 강한 인간의 조건이라는 그의 언급을 평범한 사람들이 선뜻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강하다는 것이 모든 삶의 존재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영국의 극자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고독은 방문하기엔 좋은 장소이나 머물러 있기엔 쓸쓸한 장소다.라 말했는데, 이는 고독에 내포된 부정과 긍정의 두 측면을 잘 조화해 설명한 것이라 여겨진다. 박목월 시인의 시 ?귤?에 표현된 고독은 조지 버나드 쇼의 말처럼 방문하기엔 좋으나 머물러 있기엔 쓸쓸한 정취를 동시에 드러낸다. 밤에 갖는 혼자의 시간이 없다면 성숙의 계기란 있을 수 없다. 고독함으로써 이 세계에서의 삶은 비로소 선명해지고 진지해진다. 밤에 혼자 귤을 까는 시인은 고독하다. 그것은 자신의 예술적 고뇌와 생활의 불편을 들여다보는 성찰의 모습이다. 자신의 시가 귤나무에 열릴 수 없다는 생각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세계에 대해 시인으로서 갖는 좌절을 의미한다. 앓는 자식의 입술을 축여주기 위해 귤을 까는 행동은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다는 무력을 지시한다. 밤에 귤을 까며 느끼는 좌절과 무력의 고독감은 어떤 말로도 표현 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귤향기가 베인 손가락처럼 선명하게 보이고 느껴지는 삶의 실체이기도 하다. 한 인간의 손가락에 스민 향기로서의 고독은 시에 대한 사랑이자 자식에 대한 사랑, 나아가 삶 그 자체에 대한 사랑이다. 그래서 귤 까는 밤의 쓸쓸함은 향기롭다. 고독이 없는 삶은 향기 없는 꽃과 같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구름

구름 -천상병 저건 하늘의 빈털터리 꽃 뭇 사람의 눈길 이끌고 세월처럼 유유하다. 갈 데만 가는 영원한 나그네 이 나그네는 바람 함께 정처 없이 목적 없이 천천히 보면 볼수록 허허한 모습 통틀어 무게 없어 보이니 흰색 빛깔로 상공 수놓네. 《천상병 전집》, 평민사, 2018 내려놓는 삶의 경지 아이들은 흘러가는 구름에서 숨어 있는 뭔가를 하나씩 찾아낸다. 누구는 강아지를 찾아내고, 누구는 선생님의 회초리를 찾아내기도 한다. 어떤 아이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만두라며 입맛을 다신다. 그렇게 숨겨진 보물들을 하나씩 찾아내 자기 것이 맞다고 서로 우긴다. 그러는 사이 구름은 시험문제를 내듯이 또다시 형체를 바꿔 아이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구름이 낸 문제를 맞히려고 고개가 아플 정도로 하늘을 바라보던 그 시절이 인생에서 가장 순수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프랑스의 과학 철학자이자 문학 비평가였던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공기와 꿈>이라는 멋진 책에서 다음같이 말했다. 길게 뻗치는 구름을 향해 커다란 코끼리야! 코를 길게 해보렴.하고 아이가 말하면 구름은 복종하지 않는가. 참으로 멋진 통찰이다. 어린 시절 내가 봤던 구름은 나의 소원을 여지없이 들어주는 알라딘의 요술램프였다. 그랬던 구름이 어느 때부터 시들해졌다. 하늘 위 구름보다 눈앞의 어떤 것들에 치이고 시달려 늘 발밑을 보며 걷는 게 어른의 삶인 것 같다. 어른이 되어 문득 올려다본 하늘의 구름이 예전처럼 코끼리야, 하면 코끼리가 되던 그때의 구름일 수 있을까? 천상병 시인의 시 〈구름〉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해본다. 천상병의 구름은 하늘의 빈털터리 꽃이고, 갈 데만 가는 영원한 나그네다. 그의 구름은 가난하면서도 자유로워 보인다. 정처 없고 쓸쓸해 보이지만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세속의 탁한 경계를 넘어선 정신의 맑은 구름이다. 유유하고, 허허하고, 가진 것 다 내려놓은 저 가벼운 구름의 경지에 이르려면 얼마나 많은 것을 버려야 할까.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더 빨리 내달리려 하는 게 도시의 삶이다. 버리기보다는 소유에 급급한 게 우리의 일상이다. 그렇다고 그런 일상을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버리는 건 어렵지만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한다. 목적 없는 삶은 자유롭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 그 자체를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갈 곳만 가고 불필요한 곳은 가지 않는 것이 목적 없는 삶의 자유다. 그것을 천상병 시인은 갈 데만 가는 영원한 나그네로서의 구름에 비유한다. 가야 할 곳을 위해 불필요한 것을 버리는 결단이 바로 삶의 고귀함일 것이다. 고귀란 드물고 힘든 일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 구름을 보며 보물을 찾듯이 찾다 보면 자기만큼의 순수로 내비쳐질 것이라 믿는다. 다시 고개를 들고 하늘의 구름을 봐야겠다. 신종호 시인

[시 읽어주는 남자] 설야(雪夜)

설야(雪夜) -박용래 눈보라가 휘돌아간 밤 얼룩진 벽에 한참이나 맷돌 가는 소리 고산 식물처럼 늙으신 어머니가 돌리시던 오리오리 맷돌 가는 소리 《먼 바다》, 창비, 1984. 이젠 잃어버린 밤의 서정 눈 내리는 밤만큼 고요하고 적막한 풍경은 없다. 설령 눈보라가 휘몰아쳐 소란할지라도 눈을 보는 마음은 적요하다. 날리는 눈은 끝내 어딘가에 쌓여 세사(世事)의 흔적을 한 겹씩 차분히 덮어가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게 집 밖의 자잘한 풍경들이 눈에 파묻혀 하얗게 지워지면 집 안의 풍경이 오롯이 돋아난다. 이때 보는 집 안의 면면들은 유난히 따스하고 정겹다. 눈 내리는 밤, 안방 알전구 밑에서는 어머니가 바느질하시고 형제들은 아랫목 이불 속에서 키득대며 장난을 치거나 흑백텔레비전을 보며 귤 한 알을 아껴 먹던 그런 모습들. 그런 소담의 풍경은 이제 찾아볼 수가 없다. 보일러가 일상화되고, 전기가 풍족해 방마다 실내등이 있는 것은 물론이요 텔레비전도 서너 대씩 비치되어 있어 가족들이 한 데 모이기 힘든 게 요즘 세태다. 사정이 그러하니 눈 내리는 겨울밤의 아날로그적인 정취나 향수를 말하는 것이 필경 구닥다리처럼 보일 수밖에 없어 다. 가난했지만, 한없이 따뜻했던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것은 파편화되고 개인화된 지금의 날들이 더없이 냉혹해서일 것이다. 박용래 시인의 시 「설야?는 적막하고, 아득하고, 눈물겹다. 불과 8행의 짧은 시지만 고산 식물처럼 늙으신 어머니의 기나긴 삶에 깃든 애환의 사연이 맷돌 가는 소리에 농축되어 있어 그 여운의 폭이 길고 진하다. 화자는 맷돌 가는 소리를 오리오리로 표현해 떠올리데, 그 음상(音像)이 마음 저 안쪽까지 깊숙이 파고들어 좀체 사라지지 않는다. 오리오리는 참 많은 느낌을 담고 있다. 윗돌과 아랫돌이 밀착해 내는 가까운 소리로 들리기도 하고, 문득 오리(五里)라는 먼 거리로 느껴지기도 한다. 눈보라 치는 겨울밤 화자와 어머니가 한 방에 앉아 마주했던 적막의 시간을 걷어내는 사랑의 소리로 다가오기도 하고, 서로 아픔을 헤아리는 울음으로 맴돌기도 한다. 가족을 위해 잠도 자지 않고 한참이나 맷돌을 돌리시던 그때의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혼자 빈방에 앉아 어머니를 회상하는 화자의 마음은 오리(五里)만큼이나 아득하고 쓸쓸해 보인다. 고된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식구들과 한 방에 모여 앉아 밥을 먹으면서 희로애락을 공유하던 밤의 온기는 이제 사라진 것 같다. 밤의 서정(抒情)이 사라진 시대는 차갑고 인공적이다. 박용래 시인의 시 설야는 우리가 잃어버린 밤의 서정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가깝고 소중한 것은 어두워야만 보인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것은 밤에 보는 식구들의 얼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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