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도박 사이트

[시 읽어주는 남자] 병보다 지독한 병

카지노 도박 사이트

병보다 지독한 병

                                          페르난두 페소아

 

병보다 지독한 병이 있다.

아프지 않은 아픔도 있지, 영혼조차 안 아파,

그런데 다른 아픔들보다 더 심하게 아픈.

꿈꾸긴 했지만 현실인 삶이 가져오는 것보다

더 현실적인 고통이 있지, 그리고 그런 감각도 있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것들

우리 삶보다도 더 우리 것인 것들.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있는지,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존재하고, 느지막이 존재한다,

그리고 느지막이 우리의 것이다, 바로 우리이다…

넓은 강 흐릿한 신록 위로

갈매기들의 하얀 굴곡…

영혼 위로 부질없는 날갯짓

과거에도 아니었고 앞으로도 될 수 없는, 그리고 그게 전부.

포도주나 한잔 더 주게,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니.

느지막이 깨닫는 삶의 뜻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 2018, 문학과지성사.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한 생을 사는 게 적절한 일일까? 이런 물음은 쓸데없는 일로 치부된다. 이름이 곧 그 사람이라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명이나 필명을 한두 개 사용하는 경우는 이해되지만, 그 이상을 넘어서면 사기꾼이나 범죄자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포르투갈의 천재 시인 페르난도 페소아는 70여 개가 넘는 이명(異名)으로 시, 소설, 희곡 등의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왜 그리 많은 이름을 사용했을까? 이유를 명확히 알 수는 없겠지만, 언뜻 이해는 간다. 한 사람의 삶을 속박하고 규정하는 게 이름의 한 속성이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다는 어느 대중가요의 가사처럼 우리의 삶은 하나의 ‘나’로 수렴할 수 없는 낯설고 복잡하고 다양한 ‘나’로 얽혀 있다.

페소아의 시 「병보다 지독한 병」은 내가 아프다고 느끼는 것보다 더 아픈 일들이 있고, 심지어 ‘아프지 않은 아픔’도 있다는 사실을 통해 내가 이미 알고 있는 혹은 감각하고 있는 ‘나’의 세계란 지극히 협소한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것들/우리 삶보다도 더 우리 것인 것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태를 시인은 ‘병보다 지독한 병’에 빗댄다.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그것들은 ‘느지막이’ 인지된다. 삶의 참뜻은 늘 ‘느지막이’ 인지될 수밖에 없다는 자명한 사실로 인해 우리 삶은 쓸모없고, 그 무엇도 될 수 없다는 게 시인의 생각인 듯하다. ‘부질없는 날갯짓’이 ‘우리’이고 그게 ‘전부’라는 그의 허무는 “포도주나 한잔 더 주게,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니.”라는 구절로 압축된다.

페소아의 말처럼 인생은 아무것도 아닐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삶은 하나의 ‘나’가 부르는 독창이 아니라 다수의 ‘나’가 부르는 합창이다. 그는 「경계 있는 영혼은」이라는 시에서 “나는 여럿이며 나의 소유가 아니다.”라고 진술했는데, 이는 소유할 수 없는 다수의 ‘나’, 그것이 바로 ‘우리’라는 것을 뜻한다. 페소아가 70개의 이명을 쓴 것은 하나의 이름으로 소유할 수 없는 삶의 다양함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리라. 따라서 아무것도 아닌 삶은 없다.

신종호 시인

© 경기일보(committingcarbicide.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