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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절, 뚝, 절, 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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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뚝, 절, 뚝

                                        -나희덕

 

 

다친 발목을 끌고 향일암 간다

그는 여기에 없고

그의 부재가 나를 절뚝거리게 하고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는 동안

절, 뚝, 절, 뚝,

아픈 왼발을 지탱하느라

오른발이 더 시큰거리는 것 같고

어둔 숲 그늘에서는

알 수 없는 향기가 흘러나오고

흐르는 땀은 그냥 흘러내리게 두고

왼발이 앞서면 오른발이 뒤로,

오른발이 앞서면 왼발이 뒤로 가는 어긋남이

여기까지 나를 이끌었음을 알고

해를 향해 엎드릴 만한 암자 마당에는

동백이 열매를 맺기 시작하고

그 빛나는 열매에는 손도 대지 못하고

안개 젖은 수평선만 바라보다가

절, 뚝, 절, 뚝, 내려오는 길

붉은 흙언덕에서 새끼 염소가 울고

저녁이 온다고 울고

흰 발자국처럼 산딸나무 꽃이 피고

《야생사과》, 창비, 2009.

언제부터인지 ‘하염없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왜 이러지?’ 하며 소진된 의지를 탓해보지만, 그 탓조차도 ‘하염없다’에 매달려 끌려다닌다. 남들은 주체, 독립, 열정 등과 같은 힘센 언어들에 올라타 세계를 달려가고 있는데, 나는 어찌 그 반대인지 곰곰이 따져보니 원인은 ‘의지의존증(意志依存症)’에 있어 보였다. 한마디로 의지만 믿고 따랐다는 이야긴데, 정작 삶은 내 의지와 전혀 다른 곳에서 펼쳐진 게 대부분이었으니 하염없을 만하다. 우리가 의지를 가지는 한 인생은 고통이고, 세계는 최악이 된다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적(?) 말에 마음의 문을 반쯤 열 수밖에 없는 사정은 삶의 많은 부분이 ‘어긋남’에 걸쳐져 있기 때문이다.

나희덕 시인의 시 ?절, 뚝, 절, 뚝?은 ‘어긋남’의 ‘하염없음’을 너무도 절절히 읊고 있다. 다친 발목을 이끌고 향일암을 오르는 화자를 보며 아프면 가지 말지, 라는 얕은 생각을 해보다기 “오른발이 앞서면 왼발이 뒤로 가는 어긋남이/여기까지 나를 이끌었음을 알고”라는 구절에 이르러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 어긋남이 우리 삶을 여기까지 이끌고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결핍과 부재가 우리를 절뚝거리게 하지만 그래도 가야 하는 게 삶이다. 메우고 채우려는 욕망이 아니라 비우고 버리려는 하염없음의 의지로 향일암을 오르고 내리는 그 시간의 아픔을 시인은 ‘절, 뚝, 절, 뚝’이라는 네 글자에 온전히 담아낸다. 스타카토처럼 또렷하게 끊어지는 고통의 발걸음을 디뎌보지 않은 사람은 새끼 염소가 저녁이 온다고 우는 것과 산딸나무가 꽃을 피우는 것의 기막힌 내막을 모를 것이다.

의지 때문에 고통이 생긴다고 말했던 쇼펜하우어는 의지가 없다면 세계도 없다는 말도 했다. 어쩌란 말인가. 다친 발목을 끌고 ‘절, 뚝, 절, 뚝’ 하염없이 가는 수밖에. 나희덕 시인의 시를 읽으며 어긋나야 걷게 되고, 아파야 알게 된다는 것을 절감해 본다.

신종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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