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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용의 더 클래식] 국민주의 음악의 선구자 그리그

1843년 6월 15일 노르웨이의 베르겐 태생인 그리그에게는 스코틀랜드의 혈통이 이어져 있었다. 조상이 스코틀랜드에서 노르웨이로 이주해 왔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피아노의 기초를 배웠으며, 노르웨이의 바이올린 주자 올레 불의 권유로 1858년 당시 유럽 최고의 음악 명문인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입학했고, 그 4년 동안에 리히터 리츠 라이네케 벤쨀 모셀레스로부터 작곡법과 피아노연주법 등의 교수를 받은 그리그였지만, 그리그는 어디까지나 스칸디나비아 기질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독일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의 4년간의 유학은 그리그가 앞으로 국민주의 음악의 선구자로서 기틀이 다져지게 되는 순간이었다. 1863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코펜하겐으로 돌아간 그리그는 후에 이탈리아에서 다시 유학을 하게 된다. 로마에서는 리스트와 절친하게 지냈다. 1879년에는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에서 피아노협주곡을 연주하여, 피아노 연주자로서 또한 작곡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그리그의 부인은 소프라노 가수였으므로 그리그의 가곡은 쉽게 보급될 수 있었다. 그리그는 1885년부터 세상을 떠나던 1907년까지 20여 년간을 트롤드하우겐에서 지내며 봄에는 작곡을, 여름에는 대자연 속에서 산책을, 가을과 겨울에는 전 세계를 돌며 연주회를 하며 지냈다. 생의 마지막은 영국으로 초청 연주를 가는 길에 맞이했고, 그의 유해는 피오르드의 아름다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묻혔다. 노르웨이의 자연을 닮은 그리그의 음악은 오늘날 노르웨이 최고의 관광 상품이 되었다. 피오르드를 보기 위해 탄 유람선에서는 당연히 그리그의 음악이 관광객을 맞이한다. 끝없는 호수, 기암절벽, 만년설 등 노르웨이 특유의 아름다운 자연은 그리그가 만든 고운 선율과 어우러져 빛나는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다. 정승용 작곡가ㆍ지휘자

[정승용의 더 클래식] 노르웨이의 아름다움을 음악에 담은 그리그

살아생전 대중의 많은 인기와 명성을 얻었던 그리그는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기 위해 노르웨이를 떠나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성악가 니나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그녀는 그리그에게 훌륭한 음악적 파트너가 되었고, 그리그가 작곡한 가곡은 니나의 음성을 통해 제일 먼저 검증 되었다. 가곡 작곡을 전공하고 싶다는 젊은 음악도가 그리그를 찾아와 가곡을 작곡하게 된 동기를 묻자 내가 가곡을 작곡한 동기는 내 아내가 소프라노 가수였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한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 주옥같은 가곡들의 탄생 배경은 모두 소프라노를 아내로 둔 덕분이었던 것이다. 피아노 협주곡 작품16, 페르퀸트로 명성을 얻은 그는 1885년부터 베르겐에서 조금 떨어진 트롤드하우겐에 집을 짓고 쇠약해진 몸을 요양하며 전원생활을 즐기게 된다. 교향곡이나 오페라 같은 대작보다는 피아노 소품이나 성악곡에 관심을 쏟았던 그는 가끔 라이프치히, 로마, 파리, 런던 등지를 여행하며 자신의 작품을 연주했다. 물론 그의 모든 작품에는 노르웨이의 아름다운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래서 그는 노르웨이 음악 대사의 역할을 하면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것이다. 1895년 그리그 부부의 은혼식에는 세계 각지로부터 축하 메시지가 날아들었고, 고향 베르겐 시에서는 그에게 피아노를 증정하기도 했다. 정승용 작곡가ㆍ지휘자

[정승용의 더 클래식] '페르 귄트'의 성공이 그리그에게 가져다 준 명성

노르웨이 국가보다 더 자주 불리는 솔베이지의 노래는 그리그가 작곡한 시극 페르 귄트 중 제2모음곡의 4번째 곡이다. 그리그를 일약 최고의 작곡가로 만들어준 페르 귄트는 한 통의 편지로부터 시작된다. 인형의 집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노르웨이 문학가 입센. 그는 노르웨이에 실존했다는 페르 귄트라는 인물에 북유럽 전통 신화를 배경으로 환상적인 희곡 페르 귄트를 썼다. 그리고 자신의 극시 페르 귄트에 필요한 극음악을 만들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그리그에게 보낸다. 페르 귄트의 세 번째 판이 곧 출판될 예정입니다. 나는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려 합니다. 당신이 이 극에 필요한 음악을 작곡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를 수락한 그리그는 31세에 작품에 착수하여 다음해 여름 1875년에 완성한다. 약 1년에 걸쳐 이 대작을 만들어낸 것이다. 최고의 작가 입센이 극을 쓰고, 뛰어난 작곡가 그리그가 음악을 만들고, 천재 화가 뭉크가 포스터를 제작한 이 시극 페르 귄트는 3박자를 고루 갖추고 1876년 처음 연주되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동시에 그리그는 큰 인기와 명성을 얻게 되었다. 행진곡, 무곡, 독창곡, 합창곡 등 모두 23곡으로 구성된 시극 페르 귄트. 그리그는 그 중 특히 뛰어난 곡을 골라 연주회용 모음곡으로 만들었다. 페르 귄트 제1모음곡 작품46, 페르 귄트 제2모음곡 작품55가 바로 그것인데, 이 곡들에는 노르웨이의 정서가 풍부하게 묻어난다. 제1모음곡은 아침, 오제의 죽음, 아니트라의 춤, 산왕의 궁전에서, 제2모음곡은 신부 납치와 잉글리드의 슬픔, 아라비아의 춤, 페르 귄트의 귀향, 솔베이지의 노래로 이 여덟 곡은 모두 유명하여 널리 연주되고 있다. 또한 그리그는 평생토록 단 한 곡의 피아노 협주곡을 만드는데, 피아노 협주곡이 그것이다. 그리그가 20대 중반에 만든 이 유일한 협주곡은 그 시대 피아노의 달인으로 전 세계에 이름을 날린 리스트가 극찬한 작품이다. 심지어 리스트가 직접 보며 꼼꼼하게 평을 해 줄 정도였다고 한다. 정승용 작곡가ㆍ지휘자

[정승용의 더 클래식] 독일에서 정식 음악 교육을 받은 그리그

1843년 6월 15일 노르웨이의 베르겐 태생으로, 그리그의 조상이 스코틀랜드에서 노르웨이로 이주해 왔기 때문에 그리그에게는 스코틀랜드인의 혈통이 이어져 있었다. 그리그는 6세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음악 교육을 받았는데, 그의 어머니는 당시 베르겐에서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통했다. 그리그가 9세 되던 해, 외할아버지가 남겨 준 커다란 저택에 어는 알 부모님의 친구였던 당대 이름난 바이올리니스트인 올레 불이 방문했다. 그리그의 연주를 지켜본 올레 불은 어린 그리그의 음악적 재능이 심상치 않음을 대번 눈치 챘고, 독일 라이프치히로 음악 유학을 떠날 것을 권했다. 그래서 그는 1858년부터 4년간 당시 유럽 최고의 음악 명문인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 공부를 하게 된다. 그 4년 동안에 리히터, 리츠, 라이네케, 벤쨀, 모셀레스로부터 작곡법과 피아노연주법 등의 교수를 받았다. 그렇지만, 그리그는 어디까지나 스칸디나비아 기질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4년간의 독일 라이프치히에서의 유학은 그리그가 앞으로 국민주의 음악의 선구자로 기틀이 다져지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그는 독일에서 다진 음악적 기틀 위에 예로부터 내려오는 민요의 멜로디를 삽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그를 민족주의 음악가로 부르는 데에는 바로 이런 음악적 특색을 자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대표적 명곡 솔베이지의 노래의 멜로디도 바로 이런 민속음악에 기초를 두고 있다. 1862년 노르웨이 베르겐으로 돌아온 그는 도시의 공해와 소음을 피해 외딴 마을에 자리를 잡고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로 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34세부터 본격적으로 작곡에 전념하게 된다. 정승용 작곡가ㆍ지휘자

[정승용의 The 클래식] 조국 노르웨이의 아름다운 자연을 담은 그리그의 음악

피오르드, 기암절벽, 만년설 등 노르웨이 특유의 아름다운 자연은 그리그의 음악 속에 생생히 숨 쉬고 있다. 고운 선율과 어우러져 빛나는 보석처럼.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벌어지던 때였다. 독일의 군대는 소련의 군대를 초토화시켰고, 소련의 패배는 불 보듯 뻔했다. 온통 화염에 휩싸인 전쟁터에는 군인들의 주검이 흩어져 있었고, 한마디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런 아수라장의 전쟁 통에서 한 소련 병사는 우연히 어떤 곡을 듣게 된다. 처연하고 구슬픈, 그렇지만 아름답기 그지없는 노래를 들으며 병사는 힘겨운 전투에서 이겨낼 힘을 얻었다. 악몽 같은 전쟁 속에서 한 병사에게 삶의 희망을 안겨 준 그 곡은 다름 아닌 그리그의 솔베이지의 노래였다. 그 겨울이 지나 또 봄은 가고, 그 여름이 가면 더 세월이 간다. 세월이 간다. 아! 그러나 그대는 내 님일세. 내 님일세. 내 정성을 다하여 늘 고대하노라. 늘 고대하노라. 사랑하는 남자를 기다리는 여인 솔베이지가 부르는 구슬프고 아름다운 노랫말은, 그리움이 묻어나는 선율과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더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명곡이 되었다. 한 젊은이에게 구원의 메시지가 된 음악을 만든 작곡가 그리그! 노르웨이 베르겐의 부둣가 출신 그리그의 음악에는 시리도록 아름다운 북구의 정서가 진하게 배어 있다. 특히 어부 출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둔 그는 베르겐 바닷가에서 훗날 음악가의 감수성을 키워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예순 살 생일에 이렇게 말했다. 내 작품은 베르겐의 아름다운 자연과 활기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나는 바다 냄새라면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내 음악은 선창에 올라온 싱싱한 생선 맛과 같습니다. 정승용 작곡가ㆍ지휘자

[정승용의 THE 클래식] 절망적인 현실의 희망이 되어 준 차이콥스키의 음악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주법에서 대단한 진보를 보여 주며 러시아 음악사를 새롭게 개척해 나간 차이콥스키는 음악적 발전을 이룬 동시에 삶의 추락도 맛보고 있었다. 음울한 성향을 가졌던 차이콥스키는 제자였던 밀류코바와 결혼하자마자 파경을 맞았고, 더욱 악화된 신경증은 그에게 나쁜 생각을 품게 하여 급기야 생을 포기하게끔 몰아갔다. 물론 자살 기도는 실패에 그쳤지만 그만큼 그의 삶은 파괴되고 상처의 골은 점점 깊어만 갔다. 그렇지만, 그의 절망적인 생활을 붙들어 희망을 심어 준 것은 역시 음악이었다.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 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등 발레 음악의 수작을 차례로 내 놓았고, 대작 교향곡 4번에 이어 교향곡 5번, 교향곡 6번을 발표한다. 특히 교향곡 6번 비창은 그가 남긴 최후의 작품이자 최대의 걸작이다. 불과 12일 만에 완성된 이 대작은 1893년 10월 차이콥스키의 지휘로 초연되었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청중의 반응은 매우 시큰둥했다. 스스로 평가하기를 일생일대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말했던 그는 분명히 청중에게 거는 기대가 컸을 테니 이에 상반된 반응은 그를 슬프게 만들었다. 그리고 비창이 연주된 지 불과 일주일 남짓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생을 마감한다. 결국 비창은 차이콥스키의 진혼곡이 된 것이다. 그의 추모 연주회에 다시 연주된 이 작품은 그곳에 모인 청중 모두 울리고 말았다. 곡 전체를 아우르는 절망과 우울함이 청중의 가슴에 그대로 닿아 눈물을 자아내게 한 것이다. 그때부터 오늘까지, 러시아의 정서를 바탕에 깔고 서구를 향해 뻗어나간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슬프도록 아름다운 선율이 되어 전 세계인의 가슴 깊숙한 그곳까지 파고들어 감동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정승용 작곡자ㆍ지휘자

[정승용의 THE 클래식] 숨어 있던 만학도 차이콥스키의 음악 열정

지나치게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을 가진 차이콥스키는 조금 늦은 나이에 음악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의 부모님은 그를 음악가로 키우기보다는 법률을 전공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공무원이 되길 바랐기 때문에, 그의 음악적 재능과 감성은 무시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음악을 사랑했던 어머니의 성향을 그대로 받은 그는 공무원 일을 그만두고 1861년 스물한 살 나이에 안톤 루빈슈타인이 설립한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여 음악 수업을 받게 된다. 숨어 있던 음악성은 그곳에서 빛을 발하게 되고, 3년 후인 1864년부터는 안톤 루빈슈타인의 동생인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이 설립한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10년 동안 교편을 잡게 된다. 하지만 그의 음악 인생은 절대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족족 퇴짜를 맞는 등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런 그는 충격에서 벗어나고자, 현실을 피하기 위해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고, 이때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그것은 바로 부유한 폰 메크 부인과의 인연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음악가를 후원하는 돈 많은 미망인, 이것이 바로 차이콥스키와 폰 메크 부인과의 관계이다. 평소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무척이나 좋아한 폰 메크 부인은 13년 동안이나 차이콥스키를 경제적으로 후원했다. 이런 폰 메크 부인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가졌던 차이콥스키는 교향곡 4번을 만들어 그녀에게 바쳤다. 그리고 이들의 각별한 우정은 그가 이 곡을 작곡하는 도중 그녀에게 보낸 편지와 이 교향곡의 표지에 적힌 나의 가장 좋은 벗에게란 말에서 잘 드러나 있다. 나는 이 작품을 당신에게 바치고 싶어요. 당신은 이 속에 당신의 생각과 느낌이 담긴 것을 분명히 찾아내리라고 봅니다. 이렇듯 그는 어떤 곡을 만들기 시작할 때마다 그때의 심정을 담은 편지를 곧잘 그녀에게 보내 자신의 생각과 느낌들을 전하곤 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참 미묘하고 의문스러운 부분이 많았는데, 그것은 이들이 단 한 번도 만남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려 1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을 오로지 편지로만 왕래했던 것이다. 정승용 작곡가ㆍ지휘자

[정승용의 더 클래식] 버림받을 위기에 처했던 빛나는 두 협주곡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단번에 연주 거절을 당한 이 두 작품은 오늘날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는 차이코프스키의 대표곡이자 음악사를 통틀어 손꼽히는 협주곡에 드는 명곡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그러나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은 언제나 있는 법이다. 독일의 명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였던 한스 뵐로라는 사람은 이 피아노 협주곡의 악보를 받아들고는 무척이나 감동한 나머지 미국으로 연주여행을 떠나 직접 초연하기에 이른다. 청중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고, 후에 이 곡의 진가를 뒤늦게 깨달은 루빈스타인도 그에게 미안함을 표했다. 또한 차이코프스키가 남긴 단 한 곡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아우어에게 거절당한 이후 한동안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작곡된 지 4년 후인 1881년 빈에서 아돌프 브로즈키란 바이올리니스트와 세계적인 악단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의해 초연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피아노 협주곡 초연 때와는 달리 반응은 매우 차가웠다. 그것은 이 길고 어려운 작품을 처음 연주하는데도 불구하고 리허설이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혹평은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이런 혹평에도 이 곡이 바이올린 협주곡의 걸작이란 믿음을 잃지 않은 바이올리니스트 브로즈키 덕분에 그 후에도 자주 널리 연주되었다. 그 결과 청중의 사랑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애초 연주 불가능 판정을 내렸던 아우어조차 이 작품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이 곡의 위대한 해석자가 되어 자신이 연주함은 물론 제자들에게도 가르침을 전하게 된다. 한스 폰 뵐로와 아돌프 브로즈키가 차이코프스키 작품들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뒤늦게라도 루빈슈타인과 아우어가 이 작품들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우리는 협주곡에서 최고로 빛나는 두 곡을 모르는 채 살아가야만 했을 것이다. 정승용 작곡가ㆍ지휘자

[정승용의 더 클래식] 차이코프스키! 광활한 러시아의 아름다운 서정!

러시아의 정서를 바탕에 깔고 서구를 향해 뻗어나간 차이코프스키의 음악. 그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선율은 전 세계인의 가슴 깊숙이 파고들어 감동으로 자리 잡고 있다. 차이코프스키는 절망과 불행한 상황 속에서 이 곡의 작곡을 시작했다. 그의 얼룩진 삶에 끈질기게 실처럼 따라다녔던 것은 신경쇠약 증세였다. 성공보다는 실패에 더 민감했던 차이코프스키는 그가 음악의 구세주라고 생각했던 모차르트와 자기 자신을 비교하며 형식미와 구성력의 부족함을 특히 한탄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 항상 비판하고 회의했던 그는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1번에 대해서도 확신을 하지 못하던 중, 1874년 그의 스승이자 당시 러시아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손꼽히던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에게 이 작품을 보냈고 그의 의견을 기다렸다. 그러나 루빈스타인에게 비참하리만큼 혹독한 평만 되돌려받았다. 도대체 이것을 음악이라고 만들었는가? 이 작품은 엉뚱하고 기괴하며 거북스럽기 그지없는, 한마디로 구제불능의 곡일세! 피아노로 연주하기에도 적절하지 못하고, 작품의 독창성도 전혀 찾을 수 없네! 그로부터 4년 후인 1878년 차이코프스키는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레오폴트 아우어에게 악보를 주면서 초연을 부탁했다. 그러나 아우어는 그에게 쓰라린 좌절만 안겨줬다. 차이코프스키가 내게 보여준 협주곡을 우정의 표시로 받아들였다. 나는 작곡가에 감사하다고 말했고, 우리 둘은 곧바로 연습을 해보았다. 첫 번째 연습에서 작품의 전체적 맥락을 파악하기는 어려웠지만, 1악장 2주제 선율의 서정적인 아름다움과 슬프게 변화하는 2악장 칸초네타의 매력이 느껴졌다. 나는 초연하겠다고 약속했고 차이콥스키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악보를 주었다. 그런데 악보를 자세히 보니까 이 협주곡이 가진 엄청난 가치에도 전체적으로는 손 봐야 했다. 작곡가는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차이코프스키에게 돌아온 답변은, 이 작품은 연주할 수 없는 곡이오. 당신이 이 작품을 바이올린에 맞게 고치지 않고는 그대로 연주할 수는 없소. 정승용 작곡가ㆍ지휘자

[정승용의 THE 클래식]도.레.미.파.솔.라.시.도 의 기원

음악을 배울 때 가장 처음에 접하게 되는 음계! 과연 어떻게 음계가 만들어 졌을까? 종교적 색깔이 조심스럽지만, 필자는 음악의 가장 기본 요소인 음계의 기원에 대해 다뤄보려 한다. 약 1000년 전 이탈리아의 성직자 겸 음악가 구이도다레쵸가 세례자 요한 탄생 축일의 저녁기도 라는 곡의 가사에서 첫 머리를 가져왔다고 한다. Do는 Dominus라는 단어의 약자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뜻하는데, 음계에서 도로 표시한다. Re는 Resonare에서 왔는데 울림 즉, 하나님의 음성 이라는 뜻이다. 음계에서 레로 표시한다. Mi는 Miragestorum 즉 하나님의 기적이라는 단어의 약자다. 음계에서는 미로 표시한다. Fa는 Familituorum 즉 하나님의 가족들, 제자들의 약자다. 음계에서는 파로 표시한다. Sol은 Solvepolluti 즉 구원 하나님의 사랑의 약자이다. 음계에서는 솔로 표시한다. La는 Lavii 즉 하나님의 입술 또는 사도들의 약자이다. 음계에서는 라로 표시한다. Si는 SancteIoannets 즉 성 요한의 약어다. 음계에서는 시로 표시된다. ?음계의 원 뜻을 찾아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과 연결돼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며 모든 입술을 통해 하나님의 기적을 선포하는 내용으로 돼있다. 도로 시작해 도로 끝나는 도레미파솔라시도는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요한계시록 22:13) 화음 중 가장 으뜸이 되는 도 미 솔은 하나님의 기적 같은 사랑을 의미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악보를 읽기 위해 모든 사람이 사용하는 도레미파솔라시도라는 음계가 이렇게 만들어지고 이런 의미가 있다는 게 너무도 놀라운 사실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정승용 지휘자ㆍ작곡가

[정승용의 THE 클래식] 나이 들어서도 변치 않는 베르디의 오페라에 대한 열정

우리는 가끔 갑자기 벼락부자가 되거나 출세한 사람이 돌연 변하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한다. 겸손했던 사람이 되기도 하고, 어려웠던 시절은 금세 잊어버리고 더한 욕심을 부리는 좋지 않은 모습을 본다. 하지만 베르디는 이런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베르디는 출세했다고 해서 허세를 부린다거나 자신의 생각만 옳다고 우기지도 않았다. 베르디는 더 욕심 없이 조용히 살기를 희망했고, 실제로도 그런 삶을 살며 장수를 누린다. 그리고 끊임없는 창작활동이 계속된다. 베르디는 기다릴 줄 아는 작곡가였다. 아이다를 발표했을 때 베르디의 나이는 이미 58세였다. 이 대작 오페라 아이다가 호평 받은 이후 작품 활동을 멈춘 듯했지만, 그는 창작을 멈춘 것이 아니었다. 훌륭한 대본가를 기다렸던 것이었다. 그리고 아이다 발표 후 16년이 지나고서야 오페라 오델로를 발표했다. 그때 베르디의 나이는 73세였다. 그러나 노익장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다시 6년 후 베르디는 자신의 26번 오페라 파르지팔을 내 놓으며 그의 건재함을 세상에 과시한다. 오페라에 대한 끊이지 않는 열정은 그의 삶을 지탱시켰고, 88세의 삶을 온전히 오페라에 헌신하며 보냈다. 베르디의 음악은 조건 없이 대중 속에 받아들여지는 매력을 갖고 있고, 오페라를 구성하는 극적의 효과가 두드러지게 뛰어나다. 그의 작품 곳곳에 표현되고 있는 인간의 모습들은 백 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그것은 방부제보다 더 생생하게 하는 그 무엇을 베르디가 작품 속속들이 뿌려 놓았기 때문이다. 베르디가 작곡한 26개의 오페라 중 대표작으로는 리골레토, 춘희, 일 트로바토레, 라 트라비아타, 아이다, 오델로, 파르지팔, 가면무도회 등이 있다. 정승용 지휘자ㆍ작곡가

[정승용의 더 클래식] 시골 소년이 이룩한 이탈리아 오페라의 황금기

베르디는 이탈리아 파르마 근교 부세토란 작은 도시에서 선술집 점원의 아들로 1813년 10월10일 태어났다. 집안 형편은 무척 가난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이 남달랐던 베르디를 눈여겨본 부유한 상인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아마추어 음악가였던 바레치였다. 바레치는 베르디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 본격적으로 음악공부를 시켰는가 하면, 더 훌륭한 음악 선생을 만나게 해 주기 위해 음악의 도시 밀라노로 보내 그곳 음악원에 입학을 시키려 했다. 그러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실력과는 상관없이 입학을 거절당한다. 하지만 밀라노에 입성한 것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는 3년간 밀라노에 머물며 최고의 극장 일원이던 라비냐 선생을 만나 그분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 보다 음악적으로 성숙해진 베르디는 스물한 살에 다시 고향 부세토로 돌아와 그곳에서 음악감독 직을 맡게 되고, 2년 후 결혼도 한다. 상대자는 자신을 후원하던 바레치의 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좌절의 시절을 맛보게 된다. 작은 마을에서 음악감독을 맡으며 오페라를 작곡했던 베르디는 밀라노에 작품을 들고 가보지만 별 호응을 얻지 못한다. 오페라의 실패는 그를 좌절시키지만, 사실 그보다 더한 절망이 이미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아들을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아내를 잃게 되었던 것이다. 불행은 한꺼번에 밀려온다는 말은 베르디의 상황에 바로 들어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절망하던 그에게 햇살이 내리쬐게 된다. 오페라 나부코로 그는 자신을 가리고 있던 어두운 그늘을 말끔히 거둬 내고 오페라의 샛별로 자리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3대 오페라라 불리는 리골레토, 일 트로바토레, 라 트라비아타를 발표하며 명실공히 이탈리아 오페라의 황금기를 이룩한다. 정승용 작곡가지휘자

[정승용의 THE 클래식] 오페라의 황금 손, 비바(Viva)! 베르디

88세까지의 삶을 온전히 오페라를 위해 헌신했던 베르디! 그의 작품 곳곳에 표현되고 있는 인간의 모습들은 백 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오페라 작곡가로 이탈리아에서 큰 명성을 얻고 있던 베르디는 이집트 총통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되었다. 베르디 선생! 우리 이집트는 수도 카이로에 새로운 오페라 극장을 건립할 예정입니다. 마침 수에즈 운하가 완공되어 개통식도 되었으니 겸사겸사 그것들을 기념할 만한 멋진 오페라 한 편을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예술의 조예가 깊은 이집트 총통의 간곡한 부탁임에도 베르디는 수차례 거절한다. 하지만 이집트 측이 보내온 구체적인 대본의 줄거리를 접하자 새로운 음악 아이디어가 샘솟았고, 그는 마침내 대단한 오페라를 세상에 내놓게 된다. 에티오피아의 공주 아이다와 이집트 장군 라다메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담은 오페라 아이다를 탄생시킨 것이다. 오페라의 왕, 베르디! 오늘날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절찬리에 공연되는 뮤지컬 아이다. 이 작품의 원조는 바로 오페라였고, 그것을 만든 사람은 오페라를 사람들에게 널리 알린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였다. 가사, 대사, 무대 미술, 연기, 연출, 조명, 발레 등 모든 예술이 한데 모인 예술의 종합선물세트인 오페라는 극을 통해 인간의 속내를 탈탈 털어 보여 주었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게다가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 일 트로바토레, 오텔로 등 오페라의 걸작을 수없이 남긴 그는, 한마디로 오페라 제조기, 오페라 공장이라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정승용 작곡가지휘자

[정승용의 The 클래식] 걸작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왈츠의 명곡을 참으로 많이 남겼는데, 그 중 가장 아름다운 걸작은 단연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일 것이다. 이 곡의 작곡 배경은 곡의 느낌과 사뭇 다르게 우울한 상황 속에 비롯된다. 흔히 말하는 빈 기질은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행복한 마음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싶어하는 낙천적이고 온화한 빈 사람들의 일방적인 성향을 말하는데 이 곡이 그것을 잘 담아내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오스트리아의 국가보다 더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음악으로 여겨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죽을 때까지 750여곡을 남겼는데 빈의 자연과 생활 주변의 일상 등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왈츠의 소재를 얻었다. 빈 숲 속의 이야기, 술과 여자와 노래 왈츠, 봄의 소리 왈츠 등이 그 좋은 예들이다. 그리고 그는 당시 춤을 추기 위한 가벼운 음악으로 분류되던 왈츠란 장르를 예술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음악사적 업적을 남겼다. 그래서인지 그가 이끄는 오케스트라단이 왈츠를 연주하는 공연장 맨 앞자리에는 브람스, 리스트, 바그너 같은 대단한 음악가들이 앉아 그의 예술적 왈츠를 진지하게 감상했다. 일생을 왈츠와 함께 한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 그러나 그는 춤에 있어서는 쥐구멍을 찾아야 할 만큼 소질이 없었다. 속된 말로 몸치였던 것이다. 춤곡은 잘 만들면서도 정작 춤 솜씨는 없었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스트리아 빈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지금도 빈 시립공원에서 그 자신의 바이올린으로 왈츠를 켜고 있다. 물론 100년 전과 달리 황금색 동상의 모습으로 서 있지만, 어깨를 들썩거리게 하는 그의 경쾌한 왈츠 선율은 여전히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 놓곤 한다. 정승용 작곡가ㆍ지휘자

[정승용의 The 클래식] 아버지보다 뛰어난 음악가로 성장한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상황이 이렇다 보니 왈츠에 대한 경쟁은 치열했고, 그 속에서도 아버지인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인기를 독차지하며 명성을 쌓아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장남인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이 세계에 뛰어들려 한 것이다. 화려함 뒤 그늘이 많은 음악가의 삶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아버지는 자신과 같은 길을 걸으려 하는 아들이 못내 걱정스러웠고 결국 이를 완강히 반대하게 된다. 아들아, 음악가의 길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 줄 아느냐. 너는 제발 상업에 종사해서 돈을 많이 벌기 바란다. 그러나 아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물러설 수 없었다. 자신의 왈츠에 대한 열망과 의욕을 꺾을 수 없었다. 게다가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데뷔하던 당시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혼한 상태였고 이미 다른 여자와 살림을 꾸린 아버지를 대신해서 그는 어머니와 동생을 돌봐야 했다. 생계를 위해서라도 음악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꼭 이루어야 했다. 아버지를 피해 어머니의 지원 아래 바이올린과 작곡법을 익힌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폭발적인 데뷔 무대를 시작으로 빈 왈츠계를 단숨에 주름잡게 된다. 그의 나이 겨우 열아홉에 일어난 일이다. 그의 이름을 딴 소규모 오케스트라단과 함께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연주회가 열릴 때면 빈 사교계의 고매한 귀족 부인들조차도 한순간 무너져 버리곤 했다. 그는 언제나 오빠부대를 몰고 다녔고 그를 둘러싼 스캔들 또한 무성했다. 이는 그가 늘 사람들의 중심에 있었고 그만큼 인기가 높았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아들이 음악가의 길을 가는 것을 반대했던 아버지는 나날이 커지는 아들의 음악적 성공을 지켜보았다. 부자간의 대립은 184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자연스럽게 끝이 났다. 아버지가 이끌던 오케스트라와 아들의 오케스트라가 흡수 통합되면서 진정한 아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정승용 작곡가ㆍ지휘자

[정승용의 더클래식]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

1844년 10월 15일. 오스트리아의 빈 시내는 대낮부터 술렁거렸다. 다른 날과 사뭇 다른 분위기가 빈 시내를 휘감고 있었다. 이유는 바로 저녁에 있을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데뷔 연주회였다. 음악가였던 아버지의 반대에도 아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당시 춤추던 도시로 불리던 빈에서 화려한 데뷔를 시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언론은 이런 기사를 썼다. 잘 가라, 란너여! 아버지 슈트라우스여, 안녕(Good bye)! 안녕(Hello), 아들 슈트라우스야! 요제프 란너와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19세기 초, 빈에 휘몰아친 왈츠 열풍을 이끈 쌍두마차였다. 요제프 란너에 의해 왈츠는 급격히 발전했고, 곧바로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주도하게 되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다크호스로 등장한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그들의 자리를 차지하기 전까지 일이다. 왈츠의 아버지란 아버지의 명성보다 더 높은 왈츠의 왕이 된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그 명성에 걸맞게 수없이 많은 왈츠의 걸작을 남기며 빈을 더욱 춤추게 만들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19세기 초 오스트리아 빈에 왜 춤판이 벌어졌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당시 혼란스러웠던 사회, 정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1814년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앞으로 유럽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회의가 한창이었다. 온 유럽을 혼란으로 몰고 간 프랑스 혁명의 기운과 나폴레옹이 마구 헝클어 놓은 유럽의 지도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빈의 재상 메테르니히의 주도 아래 열린 이 회의는 겉으로는 평화회의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각국이 영토를 어떻게 나눠 먹을 것인가와 서로 간의 이익으로 대립하고 있었다. 절충은 쉽지 않았고, 회의는 난관에 부딪히기 일쑤였다. 그래서 이 냉랭한 분위기를 바꿔 보고자 무도회를 열었던 것이다. 그런데 화려한 무도회에 도취된 참석자들은 회의는 뒷전이었고 사교와 춤에만 열중했다. 회의는 제자리걸음인 가운데 무도회는 나날이 화려하게 변해갔다. 당시 언론은 빈 회의는 춤만 춘다며 비아냥거렸고, 이 빈 회의의 왈츠의 물결은 결국 빈 시내마저 뒤덮어 버린 것이다. 이때부터 빈 시내에는 연간 700여 회의 무도회가 열리게 된다. 정승용 작곡가ㆍ지휘자

[정승용의 더 클래식] 신중한 음악가 브람스의 진지한 음악

성실하고 정직했던 음악가 브람스. 대부분 음악가들이 미래를 지향해 나아가는 가운데, 그는 홀로 뒤돌아 과거의 음악을 지향했다. 특히 그는 선배 음악가 베토벤에 대한 존경이 대단했다. 그가 처음으로 내 놓은 교향곡이 구상한 지 무려 15년 만에 완성된 것 역시 베토벤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다. 내 등 뒤에는 항상 베토벤이 거인처럼 버티고 있음을 느낀다. 그것은 참으로 나를 부담스럽게 만들고, 내가 감히 그 거인에 버금가는 작품을 쓸 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아홉 개의 교향곡 속에 방대한 우주를 담아낸 베토벤. 그를 능가하는 교향곡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란 강박관념이 브람스를 그토록 오랜 세월 고뇌하게 한 것이다. 하지만 다행이 그 길고 긴 고뇌의 산물은 베토벤의 교향곡만큼 훌륭했고 많은 이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브람스의 친구이자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한스 폰 뵐로는 그의 교향곡을 칭해 베토벤 교향곡 10번이라고 불렀다. 비록 대단한 칭찬이기는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브람스만의 개성과 고유한 특징이 없이 베토벤의 것을 따라했다는 의미로 들려 브람스는 마냥 좋게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튼 하나를 하더라도 제대로 정확하게 하고 싶었던 그의 성격 때문에 그는 함부로 교향곡을 쓸 수 없었고, 그는 죽는 날까지 단 네 편의 교향곡만을 남겼다. 사랑보다 더 큰 우정을 나누었던 클라라가 죽은 이듬해인 1897년 간암으로 죽음을 맞이한 브람스. 고전 형식의 뼈대 위에 신선한 예술미와 새로운 기교의 살을 붙여 절대음악에 정진했던 그는, 현재 빈 외곽 공동묘지에 평생 사이좋은 우정을 나누었던 친구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나란히 묻혀 있다. 정승용 작곡가ㆍ지휘자

[정승용의 더클래식] 깊은 우정이 낳은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바이올린 협주곡의 최대 걸작이라 손꼽히는 작품들에는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걸작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남긴 작곡가들은 일생 바이올린 협주곡에는 오로지 그 작품 하나밖에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베토벤, 멘델스존, 차이콥스키가 그러했다. 여기 브람스가 남긴 바이올린 협주곡 작품77도 그러하다. 이들 네 사람이 남긴 바이올린 협주곡은 앞으로 다시 나오지 못할 걸작으로 불리며 지금까지도 4대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변함없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곡은 당대의 명 바이올린리스트이자 브람스와 음악적 동반자로 변치 않는 우정을 나눈 요아힘에게 헌정되었다. 작곡 동기 또한 요아힘과 음악적인 생각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곡은 우스갯소리로 흔히들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이 아니라 바이올린에 거역하는 협주곡이라고도 말한다. 오케스트라의 반주가 당당하고 음향이 중후하여 마치 교향곡처럼 작곡되어 있다는 점, 바이올린 독주 부분에서 손이 큰 요아힘을 염두에 두고 작곡한 만큼 큰 음정을 곧잘 사용하고 있어 손이 작은 연주자가 연주하기에는 어렵다는 점 때문이다. 어쨌든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에게 바쳐진 이 작품은 1879년 1월 1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역사적인 초연 무대를 가지게 된다. 찬란한 기교를 자랑하는 요아힘의 바이올린 독주와 열의에 찬 브람스의 지휘로 초연된 이 작품은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 성공에 힘입어 요아힘은 여러 도시를 순회하며 이 곡을 연주했고 자기의 주된 레퍼토리로 삼았다. 그리고 벨기에 출신의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오이겐 이자이도 이 작품을 자신의 주요 레퍼토리로 선택해서 빈번하게 연주하기에 이른다. 또한 요아힘의 제자들도 스승의 영향으로 앞다투어 이 곡을 연주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이 걸작은 전 세계 속에 일파만파 퍼지게 되었다. 정승용 작곡가ㆍ지휘자

[정승용의 THE 클래식] 브람스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 음악으로 승화

브람스의 생애는 그의 음악과 무척이나 닮았다. 독일의 북부 항구 도시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브람스는 더블베이스 연주자인 아버지에게서 음악적 재능을, 아버지보다 17세 연상의 어머니에게서는 성실한 성품을 물려받았다. 음악적 재능이 남달랐던 그는 또한 깊은 신앙심과 강한 애국심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는 그의 창작 활동에 크나큰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자기반성이 심했던 브람스는 어린 나이에 비해 많은 작품을 썼지만,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불구덩이에 집어넣어 한 줌의 재로 만들어 버리곤 했다. 자신에게는 너무나 고지식하고 엄격했던 그였지만 반대로 주위 사람들에게는 관대하고 인정이 많았다. 특히 평생을 마음속으로 연정을 품었던 스승의 아내 클라라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브람스가 슈만 부부를 만난 다음해인 1854년, 슈만은 정신병에 시달린 나머지 급기야 강물에 투신하여 자살을 시도했고, 정신병동에서 2년여 투병하다 끝내 죽음을 맞이한다. 슈만이 자살을 기도했을 시기부터 클라라가 생을 마감하던 순간까지 브람스는 평생을 독신으로 생활하며 오로지 클라라와 그녀의 자식들을 지극 정성으로 돌보게 된다.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절망에 빠져 있을 클라라를 위해 작곡도 하게 되는데, 슈만 주제에 의한 변주곡 작품 9번가 처음으로 그녀에게 헌정한 작품이다. 클라라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그녀를 웃게 하는 것이 브람스에게는 참으로 큰 보람이고 기쁨이었다. 이것은 결국 그녀에 대한 사랑임이 분명하였겠지만, 그는 애써 부정하려 했다. 그것은 스승 슈만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고 싶은 마음 때문이며, 클라라에 대한 존경심과 깊은 우정에서 나온 것이라 믿으려 했다. 그렇게 40년 가까이 클라라만을 마음속에 담았던 그는, 거기서 샘솟는 모든 힘과 열정을 작곡에 쏟았다. 죽음이 임박한 클라라를 위해 만든 곡 4개의 엄숙한 노래는 세상을 하직하는 그녀에게 브람스가 바치는 마지막 존경과 사랑의 선물이었고, 브람스의 사랑은 모두 그렇게 음악으로 승화되었다. 정승용 작곡가ㆍ지휘자

[정승용의 더클래식] 순수한 사랑의 낭만주의자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브람스는 헝가리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을 하노버에서 만나면서 생활이 전환된 후 요아힘과 연주 여행하면서 바이마르에서 프란츠 리스트를 만났고 요아힘은 편지를 써서 로베르트 슈만에게 브람스를 소개했다. 브람스와 슈만 부부는 뒤셀도르프에서 만났다. 1853년 9월 30일, 독일 뒤셀도르프의 이름난 작곡가 슈만의 집에 스무 살의 무명 작곡가가 문들 두드렸다. 그날 젊은이의 방문을 두고 슈만의 아내이자 뛰어난 피아니스트 클라라는 이런 내용의 일기를 적었다. 오늘 함부르크에서 굉장한 음악 천재 브람스가 집으로 찾아왔다.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놀라운 음악적 재능을 갖춘 청년 브람스는 그날 슈만 부부와 만남으로써 인생의 커다란 전환기를 맞게 된다. 당시 슈만은 작곡활동 외에도 음악신보라는 신문을 발간하며 음악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특히 그는 젊은 음악가를 발굴하여 널리 알리는 일에 주력하고 있었다. 젊은 브람스의 재능에 감탄을 금치 못한 슈만은 주저 없이 음악신보에 자신의 생애 마지막 평론이 되어버린 새로운 길이라는 제목의 평론으로 브람스를 소개했고, 악보 출판사에 브람스의 초기 피아노 작품을 추천했다. 누구보다 성실하고 정직했던 음악가 브람스! 강직한 부드러움을 가진 브람스의 순수한 음악이 따뜻함으로 사람들을 위로 할 것이라는 것을 슈만은 이미 보고 있었던 것이다. 브람스에게 한 줄기 찬란한 햇살을 내려준 슈만. 그와의 운명적인 만남은 젊은 브람스에게 기름진 음악 토양을 제공하게 된다. 첫 만남 이후 브람스와 슈만, 그리고 슈만의 아내 클라라는 절대 따로 놓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가 맺어진다. 슈만과는 사제관계로, 클라라와는 평생을 마음으로만 사모하는 짝사랑의 관계로 말이다. 정승용 작곡가ㆍ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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