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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1. 파주 ‘반구정’

풍류가 따로 있나… 임진강 갈매기 벗삼아 詩 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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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대표하는 청백리 황희 정승은 87세에 은퇴하고 90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반구정에서 갈매기 벗하며 유유자적했다. 미수 허목, 심산 김창숙 선생 등의 반구정기가 편액으로 남아있는데, 지금의 반구정은 현대에 다시 지은 것이다.
조선을 대표하는 청백리 황희 정승은 87세에 은퇴하고 90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반구정에서 갈매기 벗하며 유유자적했다. 미수 허목, 심산 김창숙 선생 등의 반구정기가 편액으로 남아있는데, 지금의 반구정은 현대에 다시 지은 것이다.

황희 정승은 크게 두 차례 국왕을 거슬러 핍박을 받았다. 첫 번째, 고려가 망하고 조선조에 출사하지 않았다. 두 왕조를 섬기지 않겠노라며 두문동을 나오지 않은 고려의 유신 70여 명에 황희도 포함된다. ‘두문불출(杜門不出)’ 그러나 황희 정승은 그들의 추천으로 대표 출사해, 조선이 기반을 닦는데 참여했다. 두 번째, 태종이 양녕을 폐하고 충녕을 세자로 세울 때 극력 반대했다. 태종은 대로해 이조판서 황희를 폐서인하고 귀양 보낸다.

인생을 포기할 나이인 쉰여섯의 황희, 4년을 근신하다가, 다시 불려 올라와 자신이 반대하던 충녕대군 즉 세종을 모시게 된다. 마침내 그는 6조 판서와 좌ㆍ우의정을 거쳐 18년 영의정으로 조선 왕조의 기틀을 다지고, 87살에 은퇴해 갈매기[白鷗] 벗하며[伴] 지내다 3년만에 세상을 눈을 감았다. “오제신후사, 지수일염자(吾齊身後事, 只守一廉字)” 몸은 죽어도 청렴 하나는 꼭 지킨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사회가 황희에게서 청백리만 배우려 한다면 그만큼 큰 오류는 없을 것이다. 소와 농부, 공작새, 옳다 옳다, 많은 일화만큼이나 오늘의 한국 사회는 황희 정승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은 많다.

황희 정승 동상동상의 글은 국어학자 이숭녕 교수가 짓고 역시 김충현 선생의 글씨다.
황희 정승 동상 동상의 글은 국어학자 이숭녕 교수가 짓고 역시 김충현 선생의 글씨다.

■ 인본사상과 통합의 정치, 황희 정승

통합은 정치의 목적이며 수단이다. 그러나 작금의 한국정치를 보면 편 가르기에 권력 다툼에만 혈안이 돼 있다. 창끝 같은 말과 칼끝 같은 행동으로 상대를 해치기에 여념이 없다. 황희는 조선조에 반대했고 후에 충녕대군의 세자 책봉에도 강경하게 반대했다. 태종과 세종은 그를 중용했으니 그 자체가 통합의 정치다. 중용된 황희는 조정을 원만하게 이끌어 세종조의 번영에 큰 몫을 해냈다.

인본 사상이다. 오늘날 민주사회에서도 정파마다 조직마다 순혈주의를 내세우며 성골 진골 따지고, 북한은 ‘백두혈통’ 운운한다. 몰지각한 일부 기업주는 임직원을 함부로 대하다 여론의 뭇매를 맞고, ‘금수저 흙수저’ 운운이 일상화됐다. 그런데 엄격한 신분 사회인 조선 초, 황희 정승은 노비에게 과거에 응시할 기회를 마련해주고, 천민의 사회적 처우 개선을 도모하는 등 만민 평등 정책을 폈다.

■ ‘법의 지배’와 실사구시의 정치

민주정치의 가장 큰 특징이 ‘법의 지배’요 예측 가능성이다. 황희 정승은 “법자만세공공지기 불가일시지술경개지야(法者萬世公共之器 不可一時之術輕改之也)” 법은 만대 이어져야 할 공공의 그릇이니 가벼이 고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기본법인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시대에 맞게 수정 보완하면서도 국정의 안정과 예측 가능성을 고수했다.

조선 중기의 학자 미수 허목(眉 許穆, 1595~1682)은 황희 정승이 ‘당사무대체 불문세정(當事務大體 不問細政)’ ‘큰일에 힘쓰고 자잘한 것은 따지지 않았다’고 평했다. 북방 야인과 왜(倭)에 대한 방비, 4군 6진 개척같은 외교안보가 ‘큰일’일 것이다. 그러나 황희 정승은 경세치용, 농법 개량과 양잠 장려, 강원도민 구휼 등 민생을 위한 실물 경제 정책까지 챙겼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면서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면서 정작 알맹이는 놓치는 우리가 반성할 대목이다.

앙지대 앙지대는 멈춰서 우러러 보는 자리라는 뜻이다. 원래 반구정이 있던 자리에 후대에 세운 것이다. 반구정보다는 앙지대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더 낫게 보일 수도 있다. 앙지대 중수기 편액은 시인 노산 이은상이 글을 짓고 명필 김충현 선생의 글씨다.
앙지대 앙지대는 멈춰서 우러러 보는 자리라는 뜻이다. 원래 반구정이 있던 자리에 후대에 세운 것이다. 반구정보다는 앙지대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더 낫게 보일 수도 있다. 앙지대 중수기 편액은 시인 노산 이은상이 글을 짓고 명필 김충현 선생의 글씨다.

■ 남원 대강리 명당(明堂)과 황희 정승의 발복

고려말 전라도 남원, 부잣집에 명당을 잡아주기로 했다가 사기꾼으로 몰려 죽도록 맞던 스님을 전 재산을 털어 구한 의인이 있었다. 스님은 부잣집에 주려던 대강리 명당을 은인에게 알려줬다. 스님은 조선 수도 한양을 점지한 무학대사의 스승 나옹선사였고, 명당을 얻은 의인은 강릉부사 황군서, 거기 묻힌 이는 부친 황균비였다. 황희 정승의 선대들이다. 풍수에서는 황희 정승과 후대의 입신 양명은 5백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큰 인물이 나올 명당 덕택이란다. 과연? 곤경을 처한 자를 돕는 의협심, 가문의 DNA가 발휘된 것은 아닐까?

■ 반구정의 재발견, ‘21세기 황희 정승’을 찾는다

지금의 반구정, 반구정을 내려다보는 앙지대도, 영정을 모신 방촌영당도 모두 1960년대 이후 지었으니 고택은 아니다. 그러나 야트막한 언덕에 넓게 펼쳐진 임진강과 넘실대는 서해 바닷물, 시원하다 못해 가슴이 서늘해지는 강바람 바닷바람, 그리고 시시때때로 날아드는 갈매기까지, 넘치는 자연만으로도 반구정은 들를 가치가 충분하다.

거기에 곳곳에서 인문학적 감성 있는 눈길을 기다리는 허목의 반구정기, 노산 이은상의 앙지대 중수기, 이숭녕 선생의 동상기같은 고급 콘텐츠가 덤 치고는 푸짐한 덤이다. 항일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은 ‘익성공은 진실로 이조 명재상이라 나라의 으뜸이시니…. 정자의 유무가 무슨 차이가 있고, 기념문의 유무가 그의 이름을 후세에 전하는데 또 무슨 차이가 있으랴(李韓明相國之首也 是亭之興廢何與於相公也 是記文有無又何與於傳後也)’고 읊었다. 소개하든 않든 알 사람은 알 것이다.

반구정에서 임진강을 바라보다 멀리 한강 상류 건너로 시선을 돌린다. 여의도, 눈에 아직도 몸싸움에 머물고 있는 국회가 눈에 밟힌다. 아직도 삿대질에 멱살드잡이에 몸싸움, 한탄스럽기만 하다. 오늘의 한국 정치 현실이 너무 각박하고 답답해, 편히 쉬셔야 할 6백년 전 어른을 다시 깨워 일으켜본다. 고택도 아닌 반구정이 <명가와 고택> 시리즈의 첫머리를 차지한 이유다.

방촌 영당 입구 방촌은 황희 정승의 호며, 영당은 영정을 모신 집이라는 뜻이다. 황희 정승의 인자하고 후덕한 모습을 접할 수 있다.
방촌 영당 입구 방촌은 황희 정승의 호며, 영당은 영정을 모신 집이라는 뜻이다. 황희 정승의 인자하고 후덕한 모습을 접할 수 있다.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사진=김구철 시민기자·경기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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