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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3. 여주 보통리 ‘3대 판서댁’

멋과 실용 겸비한 ‘명문거족의 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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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마루 일반 대청과는 달리 삼면이 자연에 노출돼 되는 기거하는 이에게는 자연과 적극적으로 동화될 수 있게 한다. 주변 건물이나 방보다 한 단 정도 높이는 게 보통이라서 한옥에는 입체적 느낌을 부여하는 특유한 공간. 여유있는 사대부 집의 얼굴이라 할 수 있겠다. 김구철 시민기자
누마루 일반 대청과는 달리 삼면이 자연에 노출돼 되는 기거하는 이에게는 자연과 적극적으로 동화될 수 있게 한다. 주변 건물이나 방보다 한 단 정도 높이는 게 보통이라서 한옥에는 입체적 느낌을 부여하는 특유한 공간. 여유있는 사대부 집의 얼굴이라 할 수 있겠다. 김구철 시민기자

첫인상은 강하지 않았다. 일반 주택 사이 조금 높이 자리한 낡은 고택. 안이 들여다보이는 철망담에 관리인이 상주하니, 여주시가 나름 신경 써서 관리하는 셈이다. 조선 말 명성황후의 고향이요, 세종대왕 영릉이 있는 경기도 여주. 고택의 공식 명칭은 ‘보통리 고택’ 또는 ‘김영구 고택’, 밋밋하기 그지없고 아무 감동도 없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 보면 이야깃거리가 넘치는, 어마어마한 집이다. 할아버지 조윤대(曺允大), 아버지 조봉진(曺鳳振), 아들 문정공(文靖公) 조석우(曺錫雨) 3대 내리 대과 급제에 당대 명필로, 관찰사에 판서를 두루 지냈다. 할아버지는 당시 소론(少論)의 영수였다는데, 최소한 ‘여주 3대 판서댁’ 정도로는 불러야지 않겠나?

■ 멀리 한강을 내려다 보는 3대 판서댁

‘멀리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터전에 자리잡은 고대광실(高臺廣室)’, 아마 원래는 그랬을 것이다. 대문 달린 바깥사랑채와 행랑채가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사랑채와 작은사랑채, 안채와 곳간채가 ‘ㅁ’자를 이룬다. 남아있는 43칸만으로도 규모는 작지 않다. 가렴주구(苛斂誅求)가 판치던 조선 말임을 감안하면 3대 판서댁 규모로는 소박하다고 해야겠다. 집주인 조석우가 경상도 관찰사로 선정을 베풀었다는 송덕비가 경북 청도군에 남있고, 울산시 울주군 대곡리에는 마애송덕비(摩崖頌德碑)가 반구대 큰바위에 새겨졌다.

집은 산을 등지고 멀리 한강을 바라보는 정남향이니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좌향이다. 사랑채를 맨 앞으로, 대청 두 칸에 앞퇴를 두고 사분합 문짝을 달아 여닫게 했다. 대청 동편으로 사랑방 두 칸, 다음 마루 한 칸에 앞퇴가 이어진다. 대청 서편에 다시 방 두 칸, 그 앞에 내루(內樓, 다락) 한 칸, 사랑방 앞에는 한 단 높은 누마루가 시설돼 있다. 큰 사랑과 작은 사랑은 방과 마루를 곁들여 놓음으로써 겨울과 여름, 사철 쉽게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사분합 아래위 높이가 다른 마루방과 온돌방의 사분합. 사분합은 여름철이나 대청소를 할 때 완전히 열어젖뜨릴 수 있어 한옥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면서 한편으로는 개방성을 상징한다.
사분합 아래위 높이가 다른 마루방과 온돌방의 사분합. 사분합은 여름철이나 대청소를 할 때 완전히 열어젖뜨릴 수 있어 한옥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면서 한편으로는 개방성을 상징한다.

누마루는 일반적인 대청과는 달리 3면이 열려 자연과 인간이 하나로 소통하는 공간이다. 특히 여름에는 습기를 피하고 자연 풍광과 풍류를 즐기는 고급 공간이다. 대청의 분합(分閤)은 키가 크니 여름에 시원하게 개방할 수 있고, 온돌방의 분합은 키가 낮으니 겨울에 따스하도록 보온에 신경을 쓴 셈이다. 마루 앞퇴는 머름을 두고 한 단 높였다. 머름은 한옥 특유의 재미난 착상이다. 출입문이 없는 방에 창 아래 한 자 또는 자 반의 높이로 머름을 놓고, 팔걸이를 겸했다. 창을 열었을 때 바닥을 가려 프라이버시를 보호받는다.

사랑채가 끝나는 서편 중문을 기나 안마당으로 들어선다. ‘ㄷ’자로 둘러싼 안채는 모두 24칸이다. 남향으로 부엌, 안방, 대청을 일자 배열하고, 양 끝에 남쪽으로 날개를 달아 건넌방과 아랫방, 곳간을 두었다. 안방에도 내루를 두어 수납공간으로 활용하고, 대청에는 용 자 무늬의 분합문을 달았다. 안채 대청 동편에는 한 칸 마루방과 두 칸짜리 건넌방이 있고, 부엌 두 칸과 곳간이 이어진다. 부엌 동쪽으로는 방 두칸과 마루 한 칸의 작은 사랑채가 튀어나와 있는데, 앞에 반 칸 퇴가 뒤로 쪽마루가 놓였다. 이런 작은사랑채 배치는 아주 드물다고 한다.

서까래 촘촘하고 가지런해 깔끔한 인상을 주는 서까래. 쉽지 않은 작업을 위해 서울에서 소문난 명장을 불러 시공했음이 틀림없다.
서까래 촘촘하고 가지런해 깔끔한 인상을 주는 서까래. 쉽지 않은 작업을 위해 서울에서 소문난 명장을 불러 시공했음이 틀림없다.

■ 안목과 솜씨, 멋과 실용을 겸비하다

주초는 사다리꼴 화강석, 기둥은 각진 방주(方柱), 처마는 부연(浮椽)이 없는 홑처마다. 둥근 목재로 서까래 아래 길게 가로 놓인 도리(道里)를 썼으니 굴도리집이다. 목재는 옻을 칠하지 않은 백골(白骨)이고 담벼락은 마사토로 덧바른 재사벽(再沙壁)이며 마당에는 백토를 깔아 치장했다. 사랑채 앞에 선 비석에는 해시계라는 표지가 붙었는데, 원래는 분명 문자판이 있었을 것이나 마모가 심해 전혀 알아볼 길 없다. 사랑채 건물도 군데군데 붉은 벽돌로 수선한 자국이 남아 있어, 오히려 고택의 향을 날려보낸 것은 아닌지?

명당터를 고른 안목, 사랑채 한 칸을 다락으로 꾸며 실용성을 높인내루, 크기나 비례에서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반듯한 문 얼굴, 여유있는 사대부 제택(第宅)을 충실히 따랐다. 잘 가공된 석재, 세련되게 다듬은 목재, 흐트러지지 않고 가지런한 서까래와 시원스럽게 뻗은 추녀 등, 솜씨 좋은 당대 명인의 솜씨가 분명하다.

이 집의 유래로는 고종 때인 1860년 이조판서를 지낸 조석우가 지었다는 설과 영조 때인 1753년 해주판관을 지낸 증조부 조명준(曺命峻)이 지었다는 두 설이 대립한다. 어느 쪽이 옳든 임진왜란 전후로 거슬러 올라가는 영호남의 고택에 비하면 집의 역사는 짧다. 그러나 조명준 사후 아들 조윤대, 손자 조봉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조명준의 손자 즉 조석우의 아버지를 조용진(曺龍振)으로 소개하나, 이는 조봉진의 잘못이다.), 증손 조석우 판서 3대를 배출했으니, 역사의 무게는 물리적 시간보다 훨씬 무겁다.

조윤대는 두 차례나 3사 복합상소를 주도하는 등 직언을 서슴지 않는 현신(賢臣)이요 양신(良臣)이었다. 조봉진도 전라도관찰사 시절 둔전의 세제 문제와 관련해 민폐를 보고했다가 2년간 유배 생활을 했다. 조석우도 고조부 조하망(曺夏望, 조명준의 아버지)의 문집 『서주집(西州集』을 간행했다가 유생들의 항의로 파직당하는 등 할 말 하는 집안이었던 모양이다. 후손 조성환(曺成煥)은 청산리 전투를 막후 지휘하고 임시정부 군무총장(참모총장격)을 지낸 독립운동가로 건국훈장을 받았으니, 지도자의 DNA는 속일 수 없나 보다. 생각이 조금 다르다고 아예 입을 봉하려 하는 오늘날, 할 말 하는 인물, 그리고 그런 인물을 중용하는 풍토가 그립다.

순상조공석우유애비(巡相曺公錫雨 遺愛碑) 순찰사(巡察使) 조석우 공이 남긴 사랑을 기록한 비
순상조공석우유애비(巡相曺公錫雨 遺愛碑) 순찰사(巡察使) 조석우 공이 남긴 사랑을 기록한 비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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