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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9. 남양주 궁집

영조가 지어준 집… 막내딸 향한 ‘애틋한 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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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누마루 지붕의 곡선, 가지런한 서까래와 누마루를 높이 받치는 잘 다듬은 주초, 무늬 살이 깔끔한 분합문까지 겉으로 사가요 단청이 없다 뿐 궁궐의 한 전각이라 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사랑채다.
부드러운 누마루 지붕의 곡선, 가지런한 서까래와 누마루를 높이 받치는 잘 다듬은 주초, 무늬 살이 깔끔한 분합문까지 겉으로 사가요 단청이 없다 뿐 궁궐의 한 전각이라 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사랑채다.

공주님 살던 곳은 사가(私家)라도 남자가 드나들기 어려운가? 두 번 허탕치고 세 번째 발을 디딘다. 한번은 부슬부슬 비까지 내렸다. 날씨가 아주 화창하니 오늘은 일이 술술 풀리려나? 남양주 궁집, 조선 영조의 막내딸이며 정조의 막내 고모 화길옹주가 시집가 살던 집이다. ‘공주’는 정실 왕후의 딸이요, ‘옹주’는 후궁의 딸이다. 1997년 8월 영국 다이애나 왕세자빈(嬪)이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나서 벌어진 호칭 논쟁이 기억난다. 당시나 지금이나 언론은 다이애나를 ‘왕세자비’로 호칭한다. 후비빈(后妃嬪)의 원전인 중국 황실의 품계에서, 후(后)는 황제의 정실 부인이다. 비(妃)는 왕이나 태자의 정실, 황제의 선임 후궁을 지칭한다. 빈(嬪)은 왕세자의 정실, 왕이나 황제의 후궁이다. 한국 언론은 희한하게도, 끝없이 한국 괴롭히는 일본은 ‘천황’이라 부르고 영국은 ‘여왕’이라 한다. 왕의 아들은 세자니, 찰스는 왕세자고 다이애나도 왕세자빈이 맞다. 그런데 다이애나가 어이없게도 왕세자 ‘비’가 되었다. 하기야 ‘사단장 부인은 군단장’이고, 찰스는 조롱의 대상이고, 다이애나는 연민의 대상이니….

격조 높은 궁집

임금이 나라의 자재와 장인을 내려줘 지었다 해서 궁집이다. 격조 있다. 단청만 없을 뿐 모든 게 궁궐 건물로 느껴진다. ‘공주 50칸’, 당시 법도에 따라 칸 수를 꽉 채웠다. ㅁ자형 안채는 부엌 4칸, 방 3칸에 앞퇴를 한 칸 더 놓았다. 정면 가운데 안방을 두고 양편에 대청과 부엌이다. 안방 앞에서 대청으로는 퇴로 동선을 잇는다.정침 좌우 날개는 방과 곳간을 들이고, 남행랑에는 곳간과 중문이 있다. 우측 날개채에 건넌방과 부엌이 있는데, 부뚜막에는 무쇠 솥 2개가 걸려 있다.

좌측 날개채에 아랫방과 광이 있고, 사랑으로 연결된다. 사랑채는 ㄱ자 형으로, 방 두 칸 외에는 모두 마루를 깔았다. 서남쪽 끝에는 돌출시켜 날아갈 듯 처마선이 고운 누마루가 있다. 누마루는 한 칸, 장초석으로 주초를 놓고 잘 다듬은 장대석 기단을 얹어 품위를 높였다. 사랑채 북쪽, 안채 큰 부엌 뒷문 앞에 3단 장대석을 높이 쌓은 기단 위에 우물을 팠다. 우물의 허드렛물은 돌기단 아래 구멍으로 흘러 사랑채 뒤편으로 빠진다.

 

가로 봉창이 보이는 안채 부엌. 안채 쪽 담은 벽돌을 구워 단정하게 마감했다. 오른쪽 살짝 보이는 건물이 사랑채인데, 퇴가 달려있어 바로 안채로 건너갈 수 있다. 3단 석재를 받쳐 장독대를 놓고 그 뒤로 우물을 팠다.
가로 봉창이 보이는 안채 부엌. 안채 쪽 담은 벽돌을 구워 단정하게 마감했다. 오른쪽 살짝 보이는 건물이 사랑채인데, 퇴가 달려있어 바로 안채로 건너갈 수 있다. 3단 석재를 받쳐 장독대를 놓고 그 뒤로 우물을 팠다.

궁집과 영조, 화길의 생모 문씨

궁집 주인인 화길은 비운의 공주다. 13살에 시집가 6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생모 문씨는 사약을 받았다.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으니 봉호[和吉]와는 반대다.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은 화길(和吉)했다. 막내로 태어나 시집가서도 아버지 영조의 총애를 누렸고, 생모의 수난을 보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신분 낮은 무수리 소생인 영조는, 이해하기 힘든 기행이 많았다. 외아들은 죽이고, 딸만 편애했다. 후궁도 천출을 총애해, 12명 딸이 정비 소생은 하나도 없었다. 시집간 화평, 화완을 궁내 머물게 하고, 화평이 딸을 낳다 죽자 한동안 정사를 내팽개쳤다. 또 과부 며느리 조씨(세자빈 현빈)를 자주 찾았다. 시아버지는 며느리 근처도 가지 않던 상례를 무시하고. 해진 뒤에도 과부 며느리에게 야식을 청하고, 현빈 조씨가 버선발로 부뚜막에서 밤을 구워 바쳤다.

화길의 생모 문씨가 승은(承恩)을 입는 과정도 그렇다. 1751년 말, 현빈 조씨가 죽자 57살의 영조가 빈소를 찾아 현빈의 시비를 건드린다. 시아버지가 며느리 빈소 옆에서! 금지옥엽이 왜 천것을? 실록에 직접 언급은 없지만, 낮은 신분의 궁녀들이 승은을 입는 것은 의외로 세수간이었다. 한복 정장을 입고 재래식 화장실에서 생리 현상을 해결해보면 안다. 누가 거들고 붙잡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 그래서 왕조 시대에는 자주 세수간에서 역사가 이뤄졌다. 얼마나 냄새가 나면, 승지가 문씨의 책봉 교지에 옥새를 누르라는 왕명을 거부했을까?

문씨는 잔머리가 비상했고 손도 재빨라, 김상로, 오빠 문성국 등과 결탁해 사도세자를 무고해 죽게 만들고 궁내 인삼을 도둑질해 썼다. 문씨가 대가를 치른 것은 1776년 영조가 붕어하고 세손 정조가 즉위한 뒤였다. 폐서인 돼 사가로 내쫓기고 오빠와 어머니는 관노비로 내쳐지며, 국상이 끝나자 마침내 사사된다. 정조는 5년 전 화길의 장례식 비용 10만 냥까지 감사했다. 어진 임금 정조도 생부 사도세자에 대해서는 맺힌 것이 정말 많았던 모양이다.

 

이건한 강감찬 장군 사당. 1974년 서울 종로구 동숭동(지금이 대학로)에 있던 서울대학교 법대, 문리대를 포함해 용두동 사범대학 등이 관악캠퍼스로 옮기면서, 관악구 낙성대에 있던 강감찬 장군의 생가 유적들도 헐릴 운명에 처했다. 이병복 선생 부부는 낙성대에 있던 강감찬 장군의 사당을 이곳으로 옮겨와 연당 옆에 지었다.
이건한 강감찬 장군 사당. 1974년 서울 종로구 동숭동(지금이 대학로)에 있던 서울대학교 법대, 문리대를 포함해 용두동 사범대학 등이 관악캠퍼스로 옮기면서, 관악구 낙성대에 있던 강감찬 장군의 생가 유적들도 헐릴 운명에 처했다. 이병복 선생 부부는 낙성대에 있던 강감찬 장군의 사당을 이곳으로 옮겨와 연당 옆에 지었다.

궁집 영역의 가치와 부부 예술인의 안목

아랫사람들이 거처하던 초가 2채를 물리고, 그 자리에 일본 작위와 훈장을 받은 친일파 송병준의 고택(용인집)이 옮겨 들어섰다. 맞은 편에는 1974년 서울대가 관악으로 옮기면서 허물게 된 강감찬 장군의 낙성대 사당이 옮겨 세워졌다. 멀찌감치 등 돌린 단정한 정면 7칸의 건물은, 대원군과 함께 안동 김씨 세도 정치를 종식한 조 대비씨의 친정집(군산집)이다. 군산집은 앞에서 보면, 계단식 객석을 갖춘 고풍 찬연한 옥외 공연장이다. 유쾌한 반전이다. 풍수에서 바람은 막고(藏風) 물은 받으라(得水) 했는데, 20년 전 아파트가 들어서고 나서 궁집은 물길이 끊기고 연당은 말랐다. 예산 쓰든 모금하든 물길은 잇고 연당은 채우면 좋겠다.

옮겨온 군산집, 용인집, 강감찬 사당, 경내 조성된 물길과 돌무지개 다리, 갖가지 고목까지, 궁집은, 한번 걸음으로 고려 중기에서 조선 영조와 구한말을 거쳐 왜정까지 천 년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귀한 장소다. 작고한 연극인 이병복, 화가 권옥연 선생, 부부 예술원 회원은 무의자(無衣子)재단을 설립해 귀한 유산을 넘겼다. 공시지가 70억 큰 재산을 기울여 외골수로 자연과 문화를 다듬고 모아 보존한 두 선생께 감사를 드린다. 복권 수입으로 문화재나 천연유산을 매입해 보전 관리하는 영국 내셔널로터리(National Lottery)를 벤치마킹하면 어떨까?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들을 고종으로 지명하고 나서, 안동김씨 세도 정치를 종식한 조 대비의 친정집 일부를 옮겨온 ‘군산집’. 정면 7칸, 측면 2칸에 날개까지 모두 20칸 가까운 당당한 건물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들을 고종으로 지명하고 나서, 안동김씨 세도 정치를 종식한 조 대비의 친정집 일부를 옮겨온 ‘군산집’. 정면 7칸, 측면 2칸에 날개까지 모두 20칸 가까운 당당한 건물이다.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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