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부부, 딸 둘과 사위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40여년간 펼쳐진 오광선ㆍ정현숙 부부의 항일 독립운동사는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든 한국근ㆍ현대사가 아닐 수 없다. 오광선은 1896년 5월14일 용인군 원삼면 죽능리 어현(일명 느리재)에서 아버지 오인수, 어머니 이남천 사이 4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로 초명은 성묵이다. 그의 아버지는 용인ㆍ안성ㆍ여주 등지를 무대로 사냥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1905년 이후엔 용인과 죽산 일대에서 일어난 의병활동에 참여했다가 일본 수비대에 체포됐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옥살이를 한 후 출감했다.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오인수는 여준이 설립한 삼악(三岳)학교에 아들 오광선을 입학시켰다. 부친이 옥살이하는 동안 오광선은 1911년 삼악학교의 고등과에 들어가 2년 후 졸업했다. 아버지는 출옥하자마자 서둘러 아들을 결혼시켰다. 신부는 산 하나 넘는 이웃 마을인 이동면 화산리 출신 정정산(당시 14세ㆍ후일 정현숙)이었다. ■신혼생활 이전부터 독립운동 다짐만주서 살자 이미 독립운동에 큰 뜻을 품었던 오광선은 신혼생활 와중에도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대표적인 민족사학이던 상동청년학원에 입학했다. 은사인 장지영의 소개로 잠시 한약국 급사로 일하다가 1915년 가을엔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했다. 베이징에 무사히 도착한 오광선 일행은 신규식의 도움으로 중국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자신의 이름을 광선으로 바꾸었는데 조선의 광복을 되찾겠다는 의미였다. 그는 6개월을 기한으로 폭탄제조법은 물론 군관이 되기 위한 특수훈련을 받았다. 중국 내전으로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어 방황하기도 했지만, 마침내 신흥무관학교에 무사히 도착했다. 오광선은 열심히 학업과 훈련에 열성적이어서 수석으로 졸업하는 영광을 안았다. 가족도 이주해 같이 생활하게 됐다. 당시 상황을 정현숙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20살이 되던 해(1919년) 봄 그이로부터 소식이 왔어요. 압록강 대안에서 200리 떨어진 곳의 신흥무관학교에 와 있으니 그리로 오라는 것이었지요. 간단한 살림도구를 챙겨 용인역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을 지나 명죽리에서 내렸어요. 거기서부터 육로를 한 달 동안이나 걸어 만주로 들어갔지요. 단란한 그녀의 가정생활이었지만, 눈물겨운 독립운동 뒷바라지의 시작인 운명이었다. 이 무렵 가족들 안전을 위해 현숙으로 이름을 바꿨다. ■대전자령전투 후 한인군관 양성 위한 교관으로 활동 일본군에서 탈출한 지청천이 신흥무관학교 교육훈련대장에 취임하자 오광선도 교관을 맡았다. 3ㆍ1운동 이후 독립전쟁에 대한 기대는 확산되는 분위기였다. 오광선은 서로군정서의 중대장, 대대장, 별동대장, 경비대장 등으로 각종 전투에 참전했다. 1930년대 초반 만주의 정세는 일본군의 침략 노골화로 매우 불안했다. 전쟁 발발의 위기에 대응한 재만 한인세력은 대동단결과 무장투쟁 역량 강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다. 이에 따라 지청천과 홍진 등이 민족대단결의 원칙을 내걸고 한국독립당을 결성했다. 오광선도 군사부 위원에 배치돼 의용군 중대장으로 활동했다. 길림구국군과 합류, 항일 공동작전을 펼쳐 대전자령에서 커다란 승리를 거뒀다. 1934년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 내 한인특별반이 편성돼 군관양성활동이 본격화됐다. 지청천이 총책임자로서 군사훈련을 지도했고 오광선도 교관으로 초빙됐다. 한인반은 한국독립군 출신과 김구 계열, 김원봉 계열로 나눠져 세력간 경쟁이 일어나면서 갈등이 쌓임에 따라 2기생을 배출하고 이듬해 중단되고 말았다. ■베이징서 비밀공작 전개하다 근거지 노출돼 체포 이후 오광선은 김구 주석의 지시에 따라 북경으로 파견돼 비밀공작대를 조직했다. 김구 주석은 만주에 독립기지를 재건할 목적으로 오광선에게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을 규합하려는 의도였다. 이에 오광선은 1936년 베이징서 금은방을 차리며 잠행했다. 텐진에서 난징으로 이동한 가족들은 임시정부의 요인들 가족과 합류했다. 이 무렵 아들 오영걸이 태어났다. 베이징에 홀로 남아 첩보활동을 펼치던 오광선은 마침 그곳에 방문한 일본 관동군 참모장인 도이하라(土肥源) 중장의 암살을 준비했다. 불행하게도 국내에 침투한 다른 공작원의 체포로 근거지가 노출되고 말았다. 만주군 보안대와 일제 경찰의 기습으로 체포돼 1936년 10월부터 2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당시 상황을 둘째 딸인 오희옥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김구 선생님이 우리 아버지한테 비밀공작 사명을 맡겼어. 청년 몇 명 데리구 가서 비밀공작하라고.아버지는 북경서 금은방을 잘했는데, 어떤 한국인 스파이한테 걸려서 별안간 다들 자는데 한밤중에 우당탕 쳐들어 와 담을 넘어서 잠옷 바람에 다 걸렸대요. 그중에서 한 사람 주머니에서 조그만 칼이 있었대요. 창칼 끈으로 끊고 뛰어내렸는데, 50미터 간 후에 우리 아버지가 마지막 총을 옆구리를 맞았대요. 겨우 기어가 중국집으로 들어갔대요. 오광선은 1938년 출옥한 이후 다시 중국으로 망명해 하얼빈 인근에서 항일 빨치산들과 만나 활동했다. 그는 만주 여러 곳을 편력하면서 지하활동을 꾀하다가 일제의 패망 소식을 들었다. 일제의 패망 소식을 들은 오광선은 곧 상하이로 건너가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을 만났다. 지청천은 그를 국내지대장으로 임명했다. 이후 오광선은 국군에 투신하기로 결심, 육군사관학교 8기생으로 입교해 이듬해 육군대령으로 임관됐다. 한국전쟁 당시 오광선은 전주지구위수사령관을 8년 동안 지낸 후 준장으로 예편했다. ■독립군 뒷바라지, 만주벌 독립군의 어머니로 자리매김한 정현숙 1900년 경기도 용인에서 고명한 딸로 태어난 정현숙(본명 정정산)은 엄격한 환경에서 자랐다. 1913년 부모님 결정에 따라 이웃 마을에 사는 오광선과 부부가 됐다. 결혼생활에 대한 달콤한 기대와 달리 빈곤한 시집살이는 고스란히 그녀의 몫이었다. 모진 생명을 지탱하고자 안간힘을 기울였다. 남편 오광선은 이듬해 새로운 변화에 부응하고자 상경했다. 이후 항일운동에 투신하고자 홀연히 중국으로 망명길을 떠났다. 남편의 무소식에 집안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어갔다. 더욱이 시부모 봉양을 비롯한 가정 대소사는 맡아야 하는 막중한 운명이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노력에도 생활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오광선과의 생활에서 마적단의 습격과 추위, 배고픔과 질병에 시달려야 했던 정현숙은 1924년 첫딸 오희영을, 2년 뒤엔 둘째딸 오희옥을 낳았다. 옥수수와 조를 심어 살림을 이어가던 정현숙 일가가 쌀을 구할 수 있을 때는 1년에 한 번, 설날뿐이었다. 교관인 오광선이 밤이건 새벽이건 갑자기 부하들을 데려와 밥을 먹여 집안의 식량은 매일 비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전혀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헌신적인 독립군 뒷바라지를 한 정현숙이 얻은 별명은 만주벌 독립군의 어머니였다. ■오희영ㆍ오희옥 자매를 여성광복군으로 키우다 이후 정현숙은 남편을 따라 중국 관내지역으로 이주해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그녀를 포함해 세 모녀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오희영은 먼저 한국광복군에 입대해 초모공작 등에서 활약했고, 동생 희옥도 공립중학교 3학년 다니다가 광복군에 지원했다. 이후 맏딸은 김구 주석의 사무실 비서 겸 선전부 선전원으로 활동, 경호업무를 맡고 있던 신송식과 혼인해 부부광복군의 모범을 보였다. 그녀도 한국혁명여성동맹에 가입해 독립운동가 자녀들에게 역사ㆍ한글ㆍ창가 등을 가르쳤다. 오광선과 정현숙 부부의 인생항로는 독립운동과 자유로운 대한민국 건설로 점철돼 있다. 광복 후 가족들은 극적으로 상봉할 수 있었다. 정부는 오광선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정현숙에게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두 딸, 맏사위 등도 독립유공자가 됐다. 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사진_국가보훈처 등 제공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문화
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2021-09-22 1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