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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부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2-2. ‘제시의 일기’에서 독립의 염원 담은 최선화·양우조

양우조, 한국광복군 발전에 적극 이바지... 임시정부의 존재 국제사회에 알리려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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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1940년 9월17일 충칭)
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1940년 9월17일 충칭)

최선화(이명 최소정)의 남편인 독립운동가 양우조는 1897년 3월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명진 호는 소벽인데 중국에서 활동할 때는 양소벽양묵이춘삼데이비드 영(David J. Young)이라는 이름을 썼다. 상하이를 거쳐 미국 유학을 떠난 양우조는 방학 동안 탄광과 사탕수수 농장 등지에서 학비를 벌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열정적인 학구열로 MIT 공대와 폴리버 공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우리나라에 방직회사를 세우겠다며 이 분야를 전공했다. 바쁜 학창 시절에도 대한인국민회흥사단재미유학생학우회에서 활동하는 가운데 민족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한국광복군 결성 당시에는 총사령부 참사 겸 정훈처장으로 광복군 발전에 이바지했다. 국제사회에 임시정부 존재를 알리는 일에도 열성적이었다. 충칭 한국인기독교청년회이사 겸 덕육지육부장으로 활약하다가 1946년 5월에 귀국했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된 이듬해 사망했다.

■ ‘제시의 일기’에 부모로서 인정을 나타내다

이 책은 임시정부 가족들의 일상사와 독립에 대한 염원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기록물이다. 육아에 관한 내용뿐만 아니라 시대 상황에 대한 설명은 인간미 넘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일전쟁 시기에 일본의 공습을 피해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이동하는 긴박함과 위험을 생생하게 시기별로 정확히 기록했다. 암울한 질곡 속에서도 독립을 염원하는 희망의 불씨는 여기에서 활활 타올랐다.

1938년 7월4일 아침 10시 정각, 최선화ㆍ양우조 부부의 딸이 태어났다. 제시가 처음으로 최선화를 “엄마”라고 불렀을 때 감회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아이가 내게 엄마라고 불렀을 때, 나는 ‘나눔과 희생’, ‘사랑과 책임감’을 동시에 느꼈다. 엄마의 역할이 어렵고 힘들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또 8월30일에는 “오늘 비로소 얼굴을 마주하고 정면으로 제시를 안아줬다. 언제부터인지 제시는 스스로 머리와 목을 바로 세우고 있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아기의 모습이 대견스럽다.”

불안한 피난 생활에도 때때로 망중한을 즐겼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독립전쟁으로부터 긴장감을 해소하려는 일환이었다. “우리 식구 3명은 저녁에 공원으로 산보를 가려고 나오다가 용성중학교 여학생 주최로 ‘구망극사’에서 연극을 한다는 광고를 봤다. 흥미 있는 일이었다.…박수 소리를 들은 제시는 기분이 좋아 쉬지 않고 박수를 치며 재롱을 부려 옆에 앉은 손님들에게서 칭찬을 많이 들었다.”

 

최선화양우조 일가(1941년 충칭)
최선화양우조 일가(1941년 충칭)

■ 일본군 야만성 폭로임시정부 요인들 일상사 기록

최선화ㆍ양우조 부부는 12월15일 류저우에서 일본군 공습을 피해 천연동굴로 황급히 뛰어들었다. 곧이어 대대적인 공습이 있었다. 굴 밖으로 나왔더니 처참한 광경이었다. 집 앞뒤ㆍ오른쪽ㆍ왼쪽이 불바다를 이루고, 참혹하게 된 시신도 많이 눈에 띄었다. 시시각각으로 자행된 공습으로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1940년 3월14일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인 이동녕(李東寧)이 하루 전 작고했다. 교민들 충격은 너무나 컸으며 최선화도 예외가 아니었다. 9월13일에는 치장에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상황이었다. 남편은 한국광복군 성립전례식 준비를 위해 충칭으로 떠났다. 공습경보로 제시를 안고 들에 나가 2시간 괴로운 잠을 청하곤 했다. 이국땅에서 피난 생활은 여린 마음을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염원은 2년 후에 이뤄졌다. 절박하고 간절한 소망인 조국 해방이 이뤄졌다. 1945년 8월10일에는 “상오 10시(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일본이 무조건으로 동맹국에 투항했다는 소식이 충칭에 도착한 것은 오늘, 10일 저녁 8시쯤이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웬일인가 밖을 내다보니 사람들이 일본이 망했다고 한다. 이 소리를 듣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 오며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가슴이 뛰고 너무 어지러워 자리에 가서 누워야 할 정도였다. 이런 식으로 일본의 패망을 만나게 될 줄은 정말 생각하지 못했다.”

이어진 소식은 절망적이었다. 8월13일 순간적인 기쁨은 커다란 실망감으로 되돌아왔다. 신탁통치에 대한 소식은 임시정부 가족들을 긴장시켰다. 바람과 달리 ‘진정한’ 해방이 아니었다. 더욱이 급변하는 시국으로 제시를 학교에 입학시키려던 계획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교민들을 모아 귀국시키는 중요한 과업은 이들 부부의 몫이었다.

■ 귀국길도 어려운 여정의 연속

귀국길도 쉽지 않았다. 충칭에서 상하이로 이동해 1946년 4월26일에야 귀국선에 올라 제주도를 거쳐 29일 부산 앞바다에 무사히 도착했다. 기나긴 ‘피난 생활’은 끝나 고국산천을 바라보며 감격스러운 순간을 맞았다. 약 10년간 독립운동가 아내로서 생활을 청산하고 해방된 조국으로 귀국했으나 전염병 창궐로 배 안에서 대기해야 하는 현실이었다.

최선화는 헌신적인 아내이자 다정다감한 어머니였다. 역사 무대에서 크게 빛을 발하지 못했으나 결코 과소평가할 문제는 더욱 아니다.

두 딸의 재롱에 미소 짓고 조그만 생채기에도 마음을 졸이던 평범한 가족. 나라를 빼앗긴 민족으로 전쟁의 포화 속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현실은 너무나 가혹하고 잔인했다. 중일전쟁 이후 삶과 죽음의 공존을 여실히 보여주는 기록은 애잔하게 다가온다. 반면 제시와 제니 자매를 바라보는 부모로서 애틋한 사랑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독립운동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의연함, 한국 동포들 사이의 따뜻한 정뿐만 아니라 한중 선각자들의 우정과 중국인들 도움 등도 담담하게 담았다. 임시정부 이동 상황과 요인들 생활상,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과 염원이 그대로 느껴진다.

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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