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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부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4. 제암리학살사건에서 희생된 홍원식ㆍ부인 김씨

제암리서 울려 퍼진 만세소리… 목숨 건 항일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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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4월15일은 제암리 학살사건이 일어난 지 102년째 되는 날이었다. 3ㆍ1운동 당시 일본 군인과 경찰은 평화적인 만세 시위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제암리, 고주리, 수촌리 일대에서 벌어진 집단 학살은 상상조차 어려운 참혹한 현장이었다. 일제의 식민지배는 이러한 상황과 맞물려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각종 충격적인 사건들은 양심적인 세계인들의 공분을 자아냈다. 그럼에도 잘못된 과거사에 대한 반성은커녕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 일본이다. 이는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이며, 우리는 용서와 화해는 하되 역사적 사실을 잊지는 말아야 한다.

폐허가 된 제암리 정경
폐허가 된 제암리 정경

■충청남도와 경기도 서해안 일대에서 의병장이 되다

홍원식(洪元植)은 1877년 10월13일 경기도 남양군 공향면 제암동 넘말(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에서 아버지 홍순화(洪淳華), 어머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학을 공부한 후 대한제국 시위대 군인이 돼 서소문 병영에서 근무했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사건을 구실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킨 후 대한제국의 마지막 보류인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해산군인들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목숨을 건 ‘서울시가전’을 전개했다.

수세에 몰린 홍원식은 해산군인을 이끌고 근거지를 옮겼다. 그가 지휘하는 소난지도 의병진은 면천성을 공격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난지도를 중심으로 활빈당의 일종인 수적(水賊)의 근거지는 바로 이곳이었다. 이들은 배를 이용해 충청남도와 경기도 서해안 일대를 오가며 맹렬하게 싸웠다. 피해 소식에 수원지역 의병진은 10여 척 배를 나누어 타고 들어와 밀고자를 색출하는 연합작전을 일궈냈다. 수적의 의병진 영입은 전투력 향상과 더불어 신분적인 갈등을 극복할 수 있었다. 반면 일제 토벌대의 보복은 참혹했다. 선원이나 부상당한 의병까지 살육하는 학살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일제의 화력 집중으로 의병항쟁은 불리한 상황에 직면했다. 의병진을 해산한 후 1914년 3월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홍원식은 기독교 권사가 돼 학교를 세우는 등 항일의식을 일깨웠다. 제암리 교회의 안종후와 천도교인 김성렬 등과 함께 구국동지회도 조직하는 등 지도자로서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화성에 폭발하듯 울려퍼진 만세운동

수원 읍내에서 시작한 만세운동은 3월 중순 화성지역으로 파급됐다. 평화적인 만세운동이 지역사회에 확산하면서 점차 폭력적인 양상으로 전환되는 분위기였다. 3월28일 송산면 만세시위에 해산을 종용하던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野口廣三)는 총을 발포했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시위군중은 “일본순사를 죽이라”고 외쳤다. 기세에 억압당한 노구치는 도망치다가 돌과 곤봉 세례를 받고 즉사했다.

3월31일 정오경에 발안 장터에 모인 천여 명의 함성은 천지를 진동하는 투석전으로 이어졌다. 일본군 수비대는 칼을 무자비하게 휘둘러 이정근은 현장에서 사망하는 등 부상자가 속출했다. 흥분한 시위군중은 일본인 가옥이나 학교 등을 방화ㆍ파괴했다. 다음날 발안 인근의 마을 주민들은 산 위에서 봉화를 올렸다.

수촌리 이장 백낙렬, 수촌 제암리 교회 김교철 전도사, 석포리 이장 차병한, 주곡리 차희식 등은 4월3일 만세운동을 추동했다. 우정면과 장안면 주민 2천여 명은 각각 면사무소를 부수고 화수리경찰관주재소를 불태웠다. 이를 저지하는 일본인 순사 가와바타(川端豊太郞)를 처단하는 등 극도로 긴장됐다.

■비참한 희생양이 된 부인 김씨

일본는 4월2일에 가장 격렬한 시위가 일어난 수원과 안성 지역에 대해 제1회 검거반을 구성했다. 4월5일에 편성된 검거반은 같은 달 14일까지 25개 마을에서 204명 검거와 290여 가옥을 방화했다. 이 과정에서 다수 사상자도 발생했다.

발안 장터와 고주리 만세운동에 대한 보복은 집단학살로 이어졌다. 4월13일 육군 보병 제20사단 79연대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가 지휘하는 11명이 발안에 도착했다. 4월15일 오후 2시경에 아리타는 부하를 인솔하고 일본인 순사 1명과 제암리에 살다가 나온 한국인 순사보와 정미소 주인 사사카(佐佐坂)의 안내로 제암리를 향해 떠났다. 아리타는 주민 중 15세 이상 남자들은 제암리 교회 안에 모이게 했다. 주민들이 모여들자 수비대는 교회 출입구와 창문을 봉쇄하는 일제히 사격한 후 후 불을 질렀다.

불이 난 것을 보고 달려온 강태성의 아내 김씨(당시 19세)는 군인에게 살해당했다. 홍원식 부인 김씨도 군인들의 총을 맞고 현장에서 사망했다. 저들은 인근 고주리로 가서 시위의 주모자인 천도교 김흥렬 일가 6명을 학살했다. 학살 증거를 없애려고 현장을 불태우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스코필드(한국이름 석호필) 의료선교사는 소아마비로 팔과 다리가 성치 않았으나 자전거를 이끌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처참한 현장을 사진으로 남겼다. ‘제암리의 대학살(The Massacre of Chai-Amm-Ni)’ 보고서는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영자신문 ‘상해 가제트(The Shanghai Gazette)’의 1919년 5월27일자에 게재됐다. 그는 시신을 수습해 공동묘지 입구에 안장함으로 주민들에게 커다란 위안을 안겨줬다.

■애틋한 인생역정이 복원되기를 바라며

제암리학살순국기념비
제암리학살순국기념비

정부는 1968년 홍원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 부인 김씨에게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당시 학살된 부인들은 흔한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다. 이들에 대한 실체를 하루빨리 밝혀야 하는 과제는 우리에게 남긴 몫이다.

1971년 제암리 학살사건을 다룬 영화 ‘두렁바위’가 촬영됐다. 1982년 9월에 유해 발굴 사업을 진행한 뒤 이듬해 7월에는 제암리 3ㆍ1운동 순국기념관과 기념탑이 건립됐다. 순국한 분들과 함께 애틋한 부부의 인생항로가 복원되기를 기대한다.

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사진=화성시 제공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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