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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부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1-2. 대한민국 임시정부 살림꾼 연미당·파수꾼 엄항섭

프랑스 공무국 취직, 임정 요인 생계 해결·日 정보수집 항일투쟁 앞장
해방 후엔 김구 보좌하며 통일정부 수립 노력… 한국전쟁 때 납북돼
연미당, 월북가족 오해 속 고난의 삶… 우리 근현대사의 아픔 보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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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제조 왕백수 부인 백범 김구 왕백수 뒷줄 엄항섭 박찬익(1932년 상해).
폭탄제조 왕백수 부인 백범 김구 왕백수 뒷줄 엄항섭 박찬익(1932년 상해).

엄항섭이 1922년 졸업과 동시에 상하이로 돌아왔을 때에 임시정부는 내분으로 지리멸렬하는 분위기였다. 수립 초기에는 지사들이 몰려들어 북적됐으나 다들 뿔뿔이 흩어졌다. 대통령 이승만은 미국으로 돌아가 독단적인 행보를 걷었다.

■ 임시정부 파수꾼임을 자임하다

그런 이승만에 불만을 품은 국무총리 이동휘마저도 임시정부를 떠났다. 더욱이 항일투쟁 방법론을 둘러싸고 극심한 반목과 갈등은 수습하기 힘든 상황에 직면했다. 그야말로 임시정부는 유지하기 어려운 형국으로 내몰렸다. 특히 경제적인 곤궁으로 청사 집세는 물론 임시정부 요인들은 끼니마저 걱정해야 하는 극한 상황이었다. 반드시 임시정부를 유지해야 한다고 굳게 결심한 그는 프랑스 조계의 공무국에 취직해 요인들 끼니 해결에 앞장섰다. 나아가 일본영사관으로부터 임시정부를 보호하는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이는 단순한 생계 해결에만 그치지 않고 일본영사관 정보를 수집하려는 의도와 무관하지 않았다. 당시 상황을 <백범일기>에선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엄항섭군은 뜻있는 청년으로 지강대학을 졸업 후 자기 집 생활은 돌보지 않고, 석오 이동녕 선생이나 나처럼 먹고 자는 것이 어려운 운동가를 구제하기 위해 프랑스 공무국에 취직했다. 그가 프랑스 공무국에 취직한 것은 두 가지 목적에서였다. 하나는 월급을 받아 우리에게 음식을 제공해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왜(倭)영사관에서 우리를 체포하려는 사건을 탐지해 피하게 하고, 우리 동포 중 범죄자가 있을 때 편리를 도모해주는 것이었다.’

이처럼 엄항섭은 임시정부가 1920년대 중반에 당면한 극심한 고난을 극복하는 ‘윤활유’와 같은 청년이었다. 백범은 엄항섭에게 아버지와 스승과 같은 존재였다. 1926년 12월 국무령에 취임한 백범은 임시정부를 활성화 방안으로 헌법 개정에 착수했다. 헌법개정기초위원으로 참여해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 채택은 파격적인 행보였다.

 

연미당 엄항섭 큰 아들 엄기동 큰 딸 엄기선 모습.
연미당 엄항섭 큰 아들 엄기동 큰 딸 엄기선 모습.

■ 엄항섭 헌신적인 활동, 임시정부 존립 밑거름

많은 파란을 겪으면서 임시정부는 1940년 9월에야 충칭에 안착했다. 우선적인 과업은 임시정부 군대인 한국광복군 창설이었다. 가릉빈관에서 성대한 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식이 9월17일에 거행됐다. 중국국민당을 비롯해 외국사절 등 200여명이나 참석하는 등 항일투쟁 의지는 엄청나게 고조됐다. 행사를 주관한 주인공은 바로 엄항섭이었다. 그는 창설된 광복군의 의식주를 해결하고자 미주 교포들에게 재정 지원을 요청할 때도 앞장섰다. 미국에서 발행되던 ‘신한민보’는 임시정부의 외교활동과 군사적인 활동상을 교민사회에 자세하게 보도했다. 1944년에는 임시정부 선전부장을 맡아 이념을 초월해 항일무장 대오를 견결하게 만들었다.

임시정부가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존립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엄항섭의 헌신적인 활동이 있었다. 열정적인 활동은 임시정부를 유지ㆍ존립시키는 원천이었다. 그의 활동은 크게 드러나지 않으나 자신에게 맡겨진 소임에 최선을 다했다. 정파나 이념을 초월한 진지한 태도는 대동단결을 도모하는 밑거름이었다. 그에 대한 ‘임시정부의 파수꾼’이나 ‘젊은 일꾼’이라는 표현은 결코 과장된 미사여구가 아니다.

해방 후 엄항섭은 임시정부 요인과 함께 환국했다. 국내에서도 이전처럼 임시정부와 함께 활동하며 백범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군정하에서 임시정부 이름으로 활동할 공간은 너무나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단독정부 수립이 추진되자 이를 반대하며 남북협상에 동참했다. 남북에 이념과 체제가 다른 정부가 수립됨으로 결국 한민족은 적대적인 관계로 돌변하고 말았다. 더욱이 스승처럼 모시던 백범이 흉탄에 서거하면서 통일에 대한 희망도 사라졌다.

김구는 흉탄에 의해 서거했고, 김구의 평생 동반자였던 엄항섭은 장례식 때 추모사를 읽고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가슴 깊숙이 용솟음치는 슬픔을 느낀 사람은 바로 엄항섭이었다.

■ 부부 얼룩진 삶에서 남북분단을 실감한다

임정 요인 환국한 엄항섭은 조완구와 함께 김구의 측근으로 보좌했다. 문장에 뛰어나서 김구 명의로 발표하는 성명서나 국민에게 발표하는 호소문을 대부분 기초했다. 엄항섭은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는 등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1950년 한국전쟁 때는 북측의 ‘모시기 공작’ 대상으로 납북됐다.

이후 엄항섭 등 재북 인사들은 1954년 제네바 회담을 계기로 자신들의 통일 방안을 설명하기 위해 북측 대표 외에 자신들의 대표단 파견을 북측 당국에 요구했다. 그 결과 엄항섭과 권태양이 대표로 선발돼 모스크바로 파견됐으나 스위스 당국의 비자 발급 거부로 평양으로 되돌아왔다. 1956년 7월에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대회에서 주석단의 1인으로 참석해 상무위원 11인과 집행위원 29인 중 1인으로 선임됐다. 이후 ‘반당·반혁명 행위’ 혐의로 체포돼 1962년 7월30일 숨을 거둬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능에 묻혔다.

연미당 가족은 ‘월북가족’으로 오해받으며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연미당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자녀를 훌륭하게 성장시켰다. 경제적 어려움과 과로로 갑자기 찾아온 중풍으로 오랜 세월을 병마와 싸우다가 사망했다. 이들 가족의 삶은 우리 근현대사의 굴곡과 괴로움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들 부부와 같이 통일된 조국 땅에 유해를 모시는 일이야말로 남겨진 또 다른 숙제임이 분명하다. 부부 만남을 바라는 이유는 평화적인 남북통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 아닐까.

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 사진=애국지사연병환연병호선생선양사업회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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