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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균의 사할린견문록] 6. 사할린동포의 비극을 회억하며

사할린 향토박물관은 일본 성을 닮은 건축양식부터 일본풍 그대로다. 약 19만 점의 소장품은 야생 동물, 원주민의 역사와 민속품, 소련시절의 역사 등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무엇보다 지하 1층의 박제된 야생동물들의 날카로운 눈동자들은 살아있는 듯 선명했다. 전혀 지루하지 않는 현장감이 여느 박물관보다 흥미를 끌었다. 2층 한쪽에 전시된 한국인의 근대적 결혼식 사진은 진한 향수를 느끼게 했다. 축 결혼식, 이라는 글씨와 복 복자와 목숨 수자에 날짜까지 적혀 있어 누구일까 궁금하기까지 했다. 가만히 생각하니 결혼식의 수복(壽福)이라는 글씨는 늙어 파뿌리가 될 때까지 복되게 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닐까 싶다. 다음 행선지는 시립미술관이다. 이곳 광장 앞에도 안톤 체홉의 동상이 있었다. 빠삐용의 악마의 섬처럼 죄수들과 정치범수용소로 악명을 떨치던 제정러시아 시절의 사할린, 그는 모스크바에서 3개월에 걸쳐 이곳에 왔다고 한다. 건강도 좋지 않았던 30세, 시베리아 횡단열차도 없던 시절이었다. 오직 배와 마차로 힘든 노정 끝에 사할린에 도착한 그는 이곳을 슬픔의 틈새라고 했다. 그리고 모스크바로 돌아간 3년 후, 3개월간의 기록 사할린 섬 중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교도소에 방치했고, 기준도 없이 야만적으로 그들을 헛되이 죽어가게 했다. -술을 먹지 않고 미치지 않는 이상 이곳에 살기란 무척 힘든 곳이다. 안톤 체홉은 44세의 젊은 날 세상을 떠났다. 아내가 건네 준 포도주 한 모금 머금고 미소 지으며. -시립미술관입구에는 때마침 사할린 한인들의 기록사진이 전시되고 있었다. 1949년~2019년 고려신문 70년 사의 스크랩과 조선로동자 라는 신문, 레닌의길로 라는 소련공산당 싸할린주 위원회 기관지라는 한글판 신문도 눈에 띄었는데 1989년 전대협 대표로 베를린을 경유 평양까지 갔다가 판문점으로 돌아온 통일의 꽃, 민주열사라는 수식어를 가진 임수경 씨의 인터뷰사진도 있었다. 이곳 사할린이 오히려 남북한 통합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어 좋았다. 1990년 소련과 수교가 되고 국적기가 처음 사할린 땅에 내린 날 눈물을 훔치는 스튜어디스의 사진은 환영인지 환송인지, 뒤의 한인 인파들도 감격과 감회에 젖어있는 모습이 사할린의 아픔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렇게 트인 길로 한국의 연예인들이 대규모 공연을 하는 장면, 특히 수많은 관중 속에서 노래하는 젊은 가수 최진희씨의 공연 장면은 사할린 동포들의 가슴을 얼마나 적셨을까. 1990년 소련과 수교하기까지 무려 45년간 4만 명의 동포들은 고국으로부터 버려져 있었던 것이다. 흑백사진 속의 과거들이 아프고, 기쁘고, 감격스러워보였다. 그들에게 고국이 있다는 것은 어머니가 곁에 있는 것처럼 행복했을 것이다. 시립미술관에는 어제 만난 조성용 한인작가의 그림과 그의 러시아친구 작품이 전시 중이었다. 2층에는 한국작가와 북한작가의 작품이 동시에 전시되고 있었고 러시아 유명작가들의 소장 작품들이 신고전주의 풍으로 전시되고 있었다. 한쪽 방에 러시아의 고 미술품들이 전시되고 있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전혀 낯설지 않은 아담한 미술관이었다. 이덕규 시인은 이곳에 전시된 작품을 보더니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구멍 난 발을 설명하는데, 구멍이라는 공간적 개념을 구체적으로 나열하며 입 안 가득 거품을 물고 있었다. 그가 갑자기 도슨트가 되어 이유 없이 미술관투어 참여자가 된 불특정 몇 명을 대상으로 해설에 열중하는 순간, 조용히 밖을 나온다. 얼마를 걷지 않아 시청이 나오고 건너편에 레닌광장이보였다. 러시아의 어느 도시를 가도 레닌 광장이 있고 그의 동상을 볼 수 있는데 이곳에도 육중하게 레닌의 동상이 서 있었다. 마르크스 엥겔스를 잇는 러시아 공산당 및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의 창설자이자 혁명가인 그는 러시아의 시대적 국가관에서 조금씩 퇴출당하는 형세다. 과거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에서 독립된 국가에서는 레닌의 동상이 대부분 파괴되는 반달리즘이 만연해 있는데 이곳 광장에는 천안문의 모택동처럼 굳건히 중앙 광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어제 만나기로 한 러시아 작가 주화백이 나와 있었다. 하늘은 오랜만에 푸른빛과 하얀 구름을 평범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한 소녀가 까만 당나귀 등에 올라 토닥토닥 발굽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시장 구경을 가기 전 화가들만 따로 갈라져 작가 레지던시로 보이는 창작 공간을 찾아 나섰다. 꼬불꼬불 미로를 따라 들어가니 조성용 작가의 작업실이 나왔다. 그는 몹시 분주해 보였으나 우리를 위해 본인의 그림을 이것저것 들춰내며 간단한 설명까지 해주었다. 리얼리즘 작가이지만 나름 독특한 화풍을 견지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만나 알게 된 일행 중 한 사람에게 생선 몇 토막을 건네주었는데 저수지 지킴이 가물치보다 커보였다. 이걸 한국까지 가져가려면 아이스박스가 필요하리라. 우리는 모두 각자 쇼핑을 했다. 재래시장과 슈퍼마켓이 있는 상가 건물이 혼재하고 있었다. 갖가지 과일을 즐비하게 쌓아놓은 곳, 알록달록한 옷들을 매달아 놓은 곳, 우리나라의 시장 풍경과 다를 바 없는데 너무나 한가했다. 함께 한 마켓으로 가서 생선을 포장할 아이스박스를 찾는데 이 집 아가씨가 무척 친절하게 도와주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버지로 보이는 가게 아저씨가 보통형의 자기 딸을 가리키며 무어라 말하였다. 주화백의 통역은 놀랍게도 이랬다. 누가 말 한필 값만 주고 우리 딸 좀 데려가라고 하시요! 모두들 입가에 그윽한 미소를 흘리며 갑작스런 물건에 원인모를 입맛을 다시는 분위기였다. (가성비 좋은 물건을 발견했을 때처럼, 그러나 당혹한 뭐 그런) 마지막 투어를 공고하게 마치고 버스에 올랐다. 오늘 석식은 한국문화원의 한국관에서 대게 정식을 함께 했다. 만족할만한 식사였다. 천천히 가가린 공원을 가로질러 돌아온다. 잠시 공원벤치에서 휴식할 때 이덕규 시인이 또다시 일장 연설을 내놓았다. 황순원형(形), 김동인형, 서정주형 등의 연애관을 부처가 중생에게 전하 듯 설파했다. 나는 아무래도 황순원 형 같다고 생각했으나 다수가 이오연 민예총 수원지회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룻밤을 더 보내고 여장을 꾸린다. 간단히 조찬을 마치고 가가린 공원을 산책했다. 그런데 공원을 걷다말고 이오연 작가가 귀중한 발견을 한 듯 멈춰서 있었다. 호숫가에 한국 소나무 같은 노송이 한그루 서 있고 그 옆에 일본 신사처럼 생긴 비석의 기단이 보였다. 비는 잘려나간 듯 사라졌고 부근에 또 다른 비가 하나 서 있는데 王子池라고 새겨 있었다. 그는 이 한문을 왕 자지라고 천천히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처럼 해독하고 있었다. 일본 왕자가 다녀간 기념으로 이 호수를 왕자의 못이라고 했을까. 비의 뒷면엔 무어라 일본 글씨가 빼곡히 새겨져있었다. 일본의 잔재는 이 북방 사할린의 곳곳에도 마치 우리나라의 주요산맥 정상에 말뚝을 박아 정기를 끊으려 했던 것처럼 불편하게 남아있었다. 비행기에 오르며 생각한다. 사할린 인구 75만 중 아직 소수민족 중 가장 많은 2만 5천명의 한인이 산다고 한다. 한인1세는 1천여 명뿐이고 대부분이 2세, 3세다. 또한 2000년 이후 영구 귀국하여 정착한 700여 명의 동포들은 현재 경기도 안산시 고향마을에서 여생을 보내고 계신다. 이번 경기민예총 해외문화예술탐방은 3ㆍ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100주년이라는 의미 있는 해여서 더욱 가치 있는 여행이었으며 개인적으로도 사할린이라는 우리 동포들의 한 서린 흔적들을 꼭 한번 찾아보고 싶었다. 더구나 필자가 기획한 수원민족미술협회의 3ㆍ1운동 100주년 기념전을 돌아가면 바로 진행해야하며, 위원회별로 연말에 있을 사할린 탐방 결과물 전시를 준비해야한다. 배웅 나온 주명수 한인 작가의 잡은 손을 놓았다. 이 순간이 마지막일수도 있는 것은 강제징용을 갔던 수많은 한인이 그랬던 것과 같은 기약할 수 없는 일이다. 무언가 아쉬운 사할린이 상공에서 아스라이 사라진다. 죽고 사는 게 진정 물소리 같은 것일까. 운명이라기엔 너무나도 애잔한. 이해균 수원민족미술협회 회장

[이해균의 사할린 견문록] 5. 안톤 체홉의 발자취를 따라

사할린의 마지막 밤이다. 막바지 인생을 살면서 느낀다. 모든 행선지 모든 여행지가 마지막일수도 있다는 생각. 다음에 또라는 말은 공허한 허구임을 인식하고 산지 오래다. 맥주 바의 젊은 종업원은 한국의 여느 집 알바생과 똑같았다. 한인 3세 혹은 4세일 것이다. 단체 사진을 찍어주며 우리를 한바탕 웃겼다. 밝고 정감 있는 모습이어서 일행처럼 친숙한 분위기였다. 서툰 한국말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피의 흐름이 전해오는 듯했다. 이번엔 사할린의 주명수 화백이 한 곡조 뽑으신다. 러시아 노래인데 구슬퍼다. 그는 징용 온 아버지가 가끔 부르시던 한국 가요를 어렴풋 생각하며 촉촉한 눈망울을 붉히기도 했다. 가사는 잊었지만 멜로디를 기억해 내려고 이것저것 끄집어냈으나 우리에게 명확히 전달되지는 않았다. 아마도 고 남인수나 고복수의 어떤 노래였지 않았을까. 문득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 일잔 걸치고 돌아오시는 밤길에 부르시던 낙화유수가 떠올랐다.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잔디 얽어 지은 맹세야 세월에 꿈을 실어 마음을 실어 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자. 그러고 보니 모두들 자기 가족과 고향이 관련된 노래를 은연 중 부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주 화백의 아버지가 불렀을 노래야말로 마음을 적시는 진정한 망향가가 아니었을까 싶다. 집 떠나면 그리운 게 고향인가 보다. 하물며 젊은 청춘을 살아온 고국을 떠나 강제징용 온 한인들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노래는 근본적으로 살아온 시대와 문화와 인간의 근본적 향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새삼 든다. 우리는 미색 중절모에 단추 두 개를 풀러 놓은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펑퍼짐한 청바지를 차려입은 한인 2세 주명수 화백의 노래를 집중해서 들었다. 구릿빛 얼굴에 지그시 감은 눈, 우리는 그의 멋진 카리스마와 감회에 젖은 분위기에 마음껏 박수를 보냈다. 그는 외람되지만 백바지에 백구두를 신은 캬바레형, 또는 제비족 같기도 한 신파적이고 복고적인 멋을 풍겼다. 내일 우리는 주성용 화백의 작업실을 방문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아직 쉽사리 저물지 않는 푸르고 하얀 밤이다. 간밤이 잘 기억나질 않으나 옆방의 류 화백과 전 작가네 방으로 가서 준비 없는 해프닝에 엮여 무의식적 취중 객기를 발산했나 보다. 예술가들의 DNA는 정신적 파열과 복구를 거듭하는 태생적 습성을 버릴 수 없나 보다. 아침 일찍 길을 나선다. 오늘은 유즈노 사할린스크 제1공동묘역 한인강제이주희생자 합동묘비 참배를 한다. 묘역 입구 건너편에 한인 합동묘비가 잘 세워져 있었다. 그대여 잠시 걸음을 멈추고 여기 묻혀 고요한 이들의 목소리에 가슴을 기울여라. 한국근대사를 점철하는 비극 가운데서도 사할린 한인의 역사는 그 비극의 원형질이 다르다. 일제 강점기 사할린으로 끌려와 혹독한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가 해방을 맞았으나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이 땅에 버려져야 했던 이들.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신념을 끝내 잃지 않았던 사할린 한인의 슬픈 역사가 여기 서려 있다. 그들은 이 땅에 살아남았다. 비운의 한걸음 걸음마다 고통은 켜를 이루었지만 통곡을 희망의 땀으로 풀씨처럼 떨어진 이곳을 가꾸며 뿌리를 내렸다. 고향에의 그리움을 가슴에 묻으며 내일을 살아갈 지식을 길렀다. 울지 말라 어제를 위해 흘릴 눈물은 없다. 역사에 짓눌리며 조국에 잊히고 시대에 뒤엉키며 살아온 세월의 장엄함이여 고난을 넘어 왕생한 그들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가슴깊이 간직해온 고향주소를 차가운 빗물 속에 새기며 잠든 이름, 이름들. 민족사의 강줄기를 풀잎처럼 떠내려가며 온몸으로 살다간 이름을 기억하면서 여기 이 비를 세운다. 한수산 짓다 대략 이런 내용의 묘비명을 우리의 전문 낭독자 시인 박설희님이 읽는 동안 모두들 엄숙해 졌다. 천천히 걸어가도 좋으련만 버스기사는 우리를 묘역의 중앙까지 태워줬다. 버스가 선 곳은 어이없게도 일본인 합동 묘역 앞이었다. 일본인들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강제 징용에 강제 노역시킨 한인들을 버려둔 채 저희들만 사할린을 떠나더니, 억울하게 죽어간 한인들은 방치하고 저희들만 신사를 방불케 하는 합동 묘역을 만들어 놓았다니. 울분이 치솟는다. 한인들의 묘지는 일본인 합동묘역 좌우 뒤편 숲 속 잡초에 묻혀 있었다. 경상북도 상주군 고 학생 김의문, 묘주 경오, 경기도 안성군 수원 진리 종말, 고 학생 조재옥, 경상북도 월성군 천북면 동산리 박봉찬, 전북 임실군 계면 산수리 경주 김공 윤식 지묘. 한인 2세들이 부모님들의 어렴풋한 주소를 묘비에 적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모두가 정확해 보이지도 않았다. 안성군 수원 진리 라고 한 것을 보면 2세들이 정확히 부친이 전해온 고향을 기억하지 못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상상이 가지 않는 폐허 속의 공동묘지다. 거대한 머윗대와 이름 모를 노란 야생화가 무덤을 덮고 있었다. 참으로 슬픈 광경이다. 묘지마다 묘주가 적혀 있었지만 돌볼 사람이 점점 사라짐도 짐작할 수 있었다. 2세,3세,4세, 대를 내려가면 점점 1세들의 기억은 관심 밖으로 사라지리라. 쓸쓸한 묘지에 야생화 한 송이 바치고 돌아선다. 고르늬보즈두흐 전망대는 산 공기를 의미하는 해발 600m가 넘는 곳이다. 헐벗고 다듬어지지 않은 곳이었으나 케이블카로 정상에 올랐을 때 유즈노 사할린스크가 잘 보이는 확 트인 곳이었다. 정상에서 조금 더 걸으니 뒤쪽으로 높은 산들이 운무에 휩싸여 있어 마치 고산에 온 듯 아름다웠다. 좌측 언덕을 따라가자 스키장으로 사용하는 제법 가파른 슬로프가 있었다. 우리는 모두 이 산을 배경으로 가능한 모든 포즈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은 자신의 외면을 가장 구체적으로 공개하는 순간적이고도 영원한 기록의 리얼리즘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공유성이 없다면 스스로 피사체가 되는 것이 불필요하고 부질없는 행위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대부분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인, 그래서 남루한 표정도 자의적 합류가 불가피한 경우이지만 말이다. 산마루에서 마시는 커피는 맛 이외의 맛과 멋이 있고 고루한 낭만이 있다.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올 때 이덕규 시인이 갑자기 개마고원에 가서 머루 빛 눈동자에삼단 같은 머릿결을 한 북한처녀랑 귀리농사나 지으며 살고 싶다고 하여 한바탕 웃었다. 나는 답례로 벌어진 산딸기 같은 입술을 한 묘향산 처녀는 어떠냐고 했더니 모두가 입을 털어 막고 낄낄댄다. 조금 느끼했나? 버스는 러시아가 자랑하는 안톤 체홉의 책 박물관으로 간다. 러시아의 대문호 안톤 체홉이 사할린 섬(1895)이라는 책을 집필하며 3개월간 지낸 여정을 담은 박물관인 셈이다. 사할린은 19세기 말부터 죄수들의 유배지였는데 체홉은 직접 감옥에 까지 들어가 죄수들의 삶을 체험했다고 한다. 진정한 예술가는 체험과 경험에 의해서 예술적 영감을 받고 직관적 작위에 몰입하는 게 아닐까. 물랑루즈의 화가 로트렉처럼. 사실주의 작가 체홉을 생각하면 알랭드 보통이 미술(예술)은 경험을 보존하는 방식이다라고 한 것과도 일치하는 대목이다. 체홉은 굶주리며 철길을 만들고 탄광에서 막장생활을 하는 노동자들과, 원주민과 조선인의 역사까지, 마치 문학가이자 인류학자로서 의학기록서까지 남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할린의 여러 도시들은 그의 이름을 딴 박물관과 극장, 거리 축제, 공원연극제 등으로 그를 추모하고 있다. 마치 쿠바의 헤밍웨이 모뉴먼트를 연상케 한다. 이곳의 2층은 러시아 클레믈린 궁의 왕과 왕비 등이 애장하였던 보석과 장신구들이 전시돼 있었다. 화려한 각종 보석에 잠시 피로감이 왔다. 마치 아내와 함께 쇼핑센터를 갔을 때처럼. 다시 사할린 향토박물관으로 향했다. 이곳은 1896년 사할린의 첫 박물관이었으나 1937년 일본이 점령하여 카이츠카 요시오라 라는 일본 건축가에 의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이해균 수원민족미술협회 회장

[이해균의 사할린 견문록] 4. 브이코프 탄광과 가가린 공원 공연

고장 난 버스는 일어설 줄 모르고 시간은 표식 없이 떠내려갔다. 예술가 집단은 시간도 아랑곳 하지 않는 몰지각함이 있는 것일까. 이 상황에서도 각기 할 수 있는 장기를 풀어놓았다. 커다란 머윗대를 쓴 채 희로애락을 표정으로 연기하는 팀, 오카리나를 연주하는 팀, 조그만 병뚜껑에 보드카를 따라 마셔대는 팀, 풀피리를 부는 팀, 모두가 그냥 있지는 않았다. 얼마를 지났을까 하늘의 먹구름이 잔뜩 겁을 주고 있을 때 가까스로 교체투입 된 버스가 도착했다. 우리나라 보험회사의 서비스 차라면 금방 와서 해결했을 것이지만 이곳은 더뎠다. 새삼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가 세계적인 것 같다는 걸 이런 상황에서 느낀다. 시골 논두렁에서도 15분이면 짜장면을 시켜먹을 수 있는 위대한 배달의 민족인 까닭이다. 차는 다시 달렸고 우리의 한인 2세 가이드는 또다시 본인 가족의 사할린사를 이어갔다. 드라마 모래시계의 사운드트랙 쥬라블리(백학)도 멋지게 불렀다. 길가의 푸른 숲을 밀어내며 달리는 버스, 차창 밖 풍경은 이국적인 전통가옥들만 가끔씩 스쳐간다.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해 보았지만 시골 풍경은 모두가 그 나라의 전통가옥이어서 목가적인 향수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시골 풍경은 전통가옥이라고 하기 엔 다소 어정쩡한 풍경이어 아쉬웠다. 한옥도 양옥도 아닌 주택은 전통 격자문이 사라지고 미닫이문, 유리 창문, 목재 도어가 혼재되어 있다. 초기 새마을 사업은 아름다운 돌담을 모두 떴어내고 벽돌담을 쌓는다거나 초가집을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꿔놓았다. 슬레이트지붕의 석면은 환경에 큰 문제가 되어 지금 시골엔 철거도 할 수 없는 흉물이 되어있다. 남미와 동유럽의 빨간 기와지붕, 일본의 목조 가옥, 동남아의 수상가옥 네덜란드의 풍차마을들도 특색이 있다. 얼마를 달렸을까 비로소 브이코프(나이부치) 탄광이 등장했다. 높다란 선탄 라인이 엉켜있고 띄엄띄엄 주택들이 보였다. 모두가 떠나간 우리나라의 태백이나 사북 고환의 여느 폐광과 비슷한 풍경이다. 갱도 입구는 모두 폐쇄돼 들어가 볼 수 없었지만 가이드의 설명으론 이곳에 징용 온 한인들은 하루 2t의 석탄을 캐내어야 했다고 한다. 2t이면 상상이 가지 않는 엄청난 양이다. 쉴 새 없이 일해야 했던 그들의 고단했던 삶을 위로하며 우리는 준비한 국화꽃을 헌화했다. 오카리나연주가가 아리랑을 연주하자 모두들 따라 합창했다. 너무 슬퍼 떨리는 목소리였다. 나는 강제징용 온 동포들의 무슨 단서라도 느낄까 하여 흙속을 뒤져보았다. 붉게 녹슨 광물들만 여기저기 박혀있었다. 흙을 어루만져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다시 이곳을 떠난다. 그분들을 회억하고 추모하는 시간은 오가는 긴 시간에 비해 너무나 짧았다. 그놈의 버스가 고장 난 탓에 아쉽게도 공동묘지도 가보지 못했다. 이곳엔 탄광에서 일하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묻힌 공동묘지가 있으며 2018년 사할린 무연고 희생자 추모관을 완공하여 넋을 기리고 있다고 한다. 그나마 이국땅에 강제징용 온 그들의 외로운 죽음이 덜 외로울 것 같다. 이미 가가린 공연도 늦어졌으니 어쩔 수가 없다. 뒤돌아선 버스는 질주를 시작했다. 덜컹대는 도로는 포장의 거죽이 모두 달아나고 움푹 팬 속살을 드러냈다. 아주 오랜만에 60, 70년대 시골 비포장도로를 통학하던 추억이 생각났다. 뒷좌석에 앉으면 엉덩이가 디딜방아 찧듯 튀어 올랐다. 열대 우림 같은 숲이 빠르게 스쳐가고 간간이 목장도 보이는데 무엇보다 드문드문 나무전신주가 눈에 띄어 향수적이었다. 유채 같은 노란 야생화가 끝없이 펼쳐있고 흐르지 않는 철로는 군데군데 높다란 침목만 쌓였는데 무엇보다 양산만큼 커다란 머위대가 모든 들판을 장악하고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버스는 다시 호텔에 도착했고 우리는 가가린 공원의 공연장으로 갔다. 큰 대자보 현수막 천에 먹을 묻힌 전기중 작가는 눈을 감아도 꺼지지 않는 눈물이라고 썼다. 아득한 그리움은 꽃으로 피어나고 등의 주제문도 썼다. 나는 사할린 강제징용자들을 생각하며 얼굴 하나를 그렸고 그 옆에 그리움은 사랑으로 돋아나고라고 썼다. 어제 한인 식당에서 본 새 고려 신문의 내용그대로다. 신문에 실린 기사는 이랬다. 경기민예총 대표단 27명이 6월18일부터 22일까지 사할린을 방문할 예정이다. 민예총은 진보적 예술단체로 알려져있다. 경기민예총은 6월20일 오후 4시 유즈노 사할린스크시 가가린 공원에서 아득한 그리움은 꽃으로 피어나고란 문화행사를 열 것으로 전해졌다. 이 행사엔 유즈노사할린스크시 문화부가 협력한다. 주최 측은 사할린 동포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했다. 이어서 어제 한국문화센터에서 공연했던 한인3세들의 장고연주가 시작되었다. 난타와 비슷한 공연인데 16~19살 되는 청소년들이다. 공연은 정말 멋졌다. 젊고 박력 있고 흥미로웠다. 아니 어쩌면 우리가 준비한 풍물에 손색없는 파워와 변화무쌍함이 돋보였다. 이 공연은 현지인들에게도 많은 박수를 받았다. 다음 공연은 현대무용이다. 6명의 회원들이 신발을 벗어 던지고 무용수는 사할린 강제징용자들의 넋을 기리는 내용의 퍼포먼스인데 긴장감 있고 아름다운 표현이었다. 또 다른 무대는 은은한 한복을 차려입은 한인아주머니들의 공연이었는데 대중가요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췄다. 대중가요가 이렇게 멋진 구성이 되다니. 이곳의 한인들은 한 단계 비약한 현대적 느낌의 공연을 하여 놀라웠다. 아마도 서양인들과 살다보니 조금씩 진화한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보았다. 이어서 우리 공연단의 주특기이자 파이널공연인 강강수월래가 시작되었다. 현지인들도 달려 나와 어른아이 함께 손을 맞잡고 덩실덩실 춤을 췄다. 아무래도 강강수월래는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는 흥과 힘이 체면 없이 솟구치는 것 같다. 멋진 공연을 현지인과 한인들과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보다 행복한 순간이었다. 젊은 한인 공연단의 장고 팀은 아무래도 올 겨울, 아니면 내년 여름쯤 한국을 방문하여 함께 연습하고, 한국 고유의 국악을 배우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마음이 합쳐지면 언젠가 이뤄지리라. 우리는 함께 사진을 찍으며 다음을 기약했다. 오늘은 한식으로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생태탕이라고 해야 할까, 해물탕이라고 해야 할까, 오랜만에 시원한 국과 김치를 먹으며 보드카 몇 잔을 기울였다. 선비 같던 경기도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김종길 선생이 오늘은 전혀 마시지 않던 보드카를 잘도 받아넘긴다. 여기에 더해 자청해서 노래 한곡을 뽑겠다고 일어섰다. 노래는 의외로 성공적이었다. 푸른 물결 춤추고 갈매기 떼 넘나들던 곳. 내고향집 오막살이가 황혼 빛에 물들여간다. 어머님은 된장국 끓여 밥상 위에 올려놓고 고기 잡는 아버지를 밤 새워 기다리신다. 그리워라 그리워라 푸른 물결 춤추던 그곳. 아 아 저 멀리서 어머님이 나를 부른다. 그가 부른 어부의 노래가 비교적 괜찮은 호응을 얻은 것은 아마도 그의 고향 신안 앞바다를 그리워한 데서 감정 이입이 충분히 따라주었기 때문일 터이다. 이곳에서 나는 지난해 경기도 미술관에서 기획한 코리안 디아스포라, 이산을 넘어 에서 보았던 주명수, 조성용 두 한인 작가를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보드카를 내놓아 함께 마신 끝에 호텔근처의 맥주 바까지 함께 갔다. 이곳에서 마신 수제흑맥주는 일품이었다. 술은 화학적 기능과 생물학적작용 외에 사람과 사람을 익숙한 듯 이어주는 용기와 함께 은근슬쩍 속임수가 있어서 좋다. 나는 이곳에서 누가 시키지도 않은 상주 함창가 한 대목을 그만 결정적으로 꺼내 부르고 말았다.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 큰 아가/ 연밥 줄밥 내 따주마 우리 부모 섬겨다오 문어야 대전복 손에 들고 친구 집으로 놀러가자/ 친구야 벗님은 간 곳 없고 조각배만 남았구나. 후략 정성을 다한 나의 노래를 두고 A씨(의정부)는 짧아서 좋다고 했고, 누군가는 화를 내기도 했으며, 송창 선생은 가사를 문제 삼았다. 괜히 불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여러 가지구전 가사가 있으나 나는 공갈못 근처에서 시집오신 큰어머니가 가끔 부르시던 가사가 머릿속에 박혀있어 다른 가사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이해균 수원민족미술협회 회장

[이해균의 사할린 견문록] 3. ‘강제징용의 현장’ 브이코프 탄광 가는 길

우리는 한국식당 박대감집에서 고향 집 밥 같은 점심을 먹고 다시 한인 문화원으로 갔다. 이곳에서 자세한 안내를 받기로 했으나 준비가 안 된 관계로 2층 복도에 있는 사할린 한인사를 기록한 사진들을 감상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풍물 팀이 이곳 공연장에서 한인 공연단과 함께 내일 가가린 공원 공연을 앞두고 리허설 공연을 가졌다. 따라서 한인 관람객이 많지 않았고 오히려 우리들이 주 관객인 셈이었다. 한인 3세들로 보이는 네 명의 공연단은 장고를 치기 시작 했다. 이 공연은 예상을 뛰어넘는 멋진 연주로 연속해서 박수를 받았다. 그들은 모두 여성들이었고 우리의 국악을 난타 형식으로 연출한 퓨전 국악이라고 해야 할 만큼 가장 현대화된 연주였다. 이 네 명의 청소년들은 사라져가는 한국문화를 가장 잘 이어가는 멋진 전통예술의 계승자들이라고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은 이곳의 중년 여성들로 구성된 무용단의 공연이 펼쳐졌는데 개량 한복처럼 춤 또한 현대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어 세련미가 있었다. 이어서 우리의 풍물 공연이 이어져 흥을 더했다. 사할린 청소년들의 화려한 공연을 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늘 보아왔던 익숙함 때문일까. 현란한 큰 춤사위에 한인들이 푹 빠져들기를 가슴조이며 바랬다. 처음 한수 가르쳐 주겠다는 의욕이 너무 앞서 절제하지 못하는 듯 했으나 공연 말미의 강강술래는 압권이었다. 이곳 한인들과 우리들이 한데 엉켜 끈끈한 정을 잇기에 충분했다. 역시 우리의 춤은 함께 감응할 수 있는 즉각적 멋과, 미학적 품격이 있어 스스로 자랑스러웠다. 공연이 끝나고 우리의 풍물 팀은 함께 공연한 한인 청소년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교육할 의사를 표했고 주 사할린 한인회회장님은 우리에게 커다란 러시아 피자를 주문해주어 한바탕 친교의 파티가 벌어졌다. 한인문화센터는 구정, 어버이날, 추석, 등의 행사에 자주 이용되고 있다하니 다행이었다. 문학위원회는 이곳 한인문화센터에 그간 발행한 여러 권의 문학서적들을 기증했다. 아쉽지만 우리는 내일 가가린 공원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러시아 정교회와 승리광장으로 이동하는 도중 깔끔한 학교 하나가 있었다. 무슨 특수학교라고 했는데 이곳의 학생들은 대학에 가기까지 그러니까 1학년에서 11학년까지 모두 무료로 공부한다고 했다. 오히려 우리나라보다 교육복지가 더 잘되어있는 듯 했다. 러시아정교회 대성당으로 갔다. 가는 길목에 한 러시아인이 안녕하세요! 라고 소리치는 바람에 잠시 인사를 나눴는데 한국말을 비교적 잘하는 청년이었다. 그는 한국의 수원에서 용접기술을 배우느라 한동안 머물렀다고 했다. 세상 참 넓고도 좁다. 성당의 외관은 여러 개의 첨탑이 금빛과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었지만 내부는 더욱 화려했다. 77미터의 4층 구조라고 하는데 2만 3천명을 수용한다고 했다. 러시아동방정교회는 스탈린의 종교정책으로 부흥하여 러시아인의 75%가 신도라고 한다. 중앙의 샹들리에는 어떤 각도에서도 볼 수 있는 펜타장식으로 삼위일체를 의미한다. 천국을 상징하는 벽화, 모든 사람들이 출입할 수 있는 출입구외에 성직자들만 출입한다는 지성소가 있는데 항상 동쪽으로 향하는 건축양식이다. 이곳은 사진촬영이 자유롭고 초를 사서 올릴 수도 있었다. 특이한 것은 의자가 없고 서서 예배를 본다고 한다. 물론 큰 기념일은 앉아서 예배를 본다고 하는데 여자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입장하는 게 예의인 듯 보였다. 이곳의 촛불 아래에서 모두들 한번씩 기도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나도 두 손을 모았다. 그런데 기도가 집중되지 않았다. 아마도 그간 쌓인 죄가 너무 깊어 접속이 안 되나 보다. 정교회와 이웃하고 있는 광장이 전쟁기념관에 해당되는 승리광장이다.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예쁜 어린이들이 줄지어 들어갔다. 그 줄 뒤에 따라 들어가는데 이곳은 소지품 검색대도 있고 몸수색도 했다. 특이한 것은 웃통을 벗어 라는 것이다. 러시아의 전통 관습 같아 보였지만 느닷없는 지시에 기분이 좋을 수만은 없었다. 예전의 이곳은 탱크와 대포 등을 전시한 전쟁기념관이었는데 2년 전 모두 없애버리고 승리박물관으로 재탄생한 것이라고 한다. 1941년~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승전기념광장으로도 불려졌다. 광장 가운데는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역사상 가장 많이 생산되었다는 T-34 탱크가 하양받침대위에 오른 채 전시되어 허공으로 포신을 겨누고 있었다. 러시아는 2차 대전 때 나치 독일에 승리했지만 이곳 사할린은 미국의 원폭 투하로 일본이 항복하는 바람에 자동 해방이 된 격이다. 이 박물관은 전쟁 당시의 또는 그 이전의 러시아 역사를 함께 아우르는 전쟁기념관 역사박물관을 겸하고 있는 형태였다. 우리는 다시 한인문화센터에 있는 한국관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천천히 가가린 공원을 가로질러 호텔로 돌아왔다. 오늘 밤은 방 배정이 달라 원래의 2인실 방에서 묵게 되었다. 좋은 것을 좋게 느끼지 못한 어제 밤이 아쉽고 그립다. 하긴 아무리 좋은 방이 있으면 무얼 할꼬. 그 방이 그 방일 뿐이지. 이웃 방에 마실 갔다가 보드카 몇 잔을 축이고 잠자리에 든다. 손오공과 저팔계 같은 류연복, 전기중 이 두 분의 방 배정은 절묘한 것 같다. 날렵함과 우직함의 밸런스 같은. 나의 룸메이트도 선배에게 예의를 갖추는 예기치 못한 존경심이 있음을 발견하여 내심 흐뭇했다. 마음에 뜬 별빛 충만한 밤이다. 브이코프 탄광 가는 아침, 식사 후 가가린 공원을 잠시 산책한다. 산책은 욕망을 씻는 것, 여행은 목적지가 있지만 산책은 목적지가 없다. 소크라테스의 산책, 아카데모스의 정원에서 플라톤이 했던 산책,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철학학교에서 한 산책도 각기 다른 미학이 있다. 장그르니에는 그의 저서 일상적인 삶에서 칸트의 유익한 저녁산책은 규칙적인 휴식에 불과했지만 니체의 산책은 저작들을 탄생시킨 자양이었다고 했다. 내 그림은 내 마음의 통로다. 3ㆍ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일본지식인들이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야말로 한일 북일 관계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열쇠다. 상호 이해 상호 부조의 길로 나가야 할 때다 라고 일본의 위정자들에게 촉구한 신문기사를 본적이 있다. 일본 지식인들도 반성하는 과거사라고 보았을 때 강제징용배상문제는 반드시 일본이 받아들여야함에도 오히려 경제 보복을 하는 적반하장의 작태가 분하고 누추해 보일 뿐이다. 경제보복을 넘어서 과거의 정한론이 떠오르는 정치적 모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브이코프 가는 버스에 새로운 현지가이드가 등장했다. 한인2세 장년의 남자다. 강제징용 오게 된 아버지가 안타까워 숙부 숙모가 함께 따라나섰다니 그들의 가족애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실감하는 순간이다. 가이드의 아들(한인3세)은 어제 본 특수학교 김나지움에서 영어교사로 있다는 걸 강조하며 은근 자량을 하신다. 언뜻 김나지움이라는 말이 향수적으로 떠올랐다. 가만 생각해보니 학창시절 헤르만 헤세를 좋아해서 그의 수많은 책들을 읽게 되었는데 이 김나지움이라는 말과 수도원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했었다. 궁금하여 다시 확인해 봤더니 독일의 중등교육기관을 일컫는 말이 맞았다. 사할린은 슈클라(11학년제, 초중고교)라는 학년제가 있었다. 브이코프 까지는 유즈노 사할린스크에서 65㎞이며 1시간 30분이 소요된다고 했다. 도로는 예상보다 괜찮은 편이었는데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브이코프를 20여㎞를 앞두고 갑자기 버스가 덜컹대기 시작했고 결국은 문제가 발생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바퀴 축에 무엇인가 걸려 회전이 되지 않는 고장이 발생한 것 같았다. 일행은 대부분 내렸다. 이상한 것은 누군가가 걸어가자고 했을 때 모두들 자연스레 따라 걷는 것이었다. 도보로 1시간이 넘게 걸릴 길을 진짜로 걸어가는 대한의 건아들 참 대단했다. 결국 다른 버스가 온다고 하여 멀리 갔던 분들도 돌아왔지만 장시간 원치 않는 휴식을 하게 되었다. 이해균 수원민족미술협회 회장

[이해균의 사할린 견문록] 2. 코르사코프, 망향의 언덕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조선농민 수십만 명을 본인과 가족의 동의 없이 징용해 이곳 사할린 탄광에서 강제 노역을 시켰다. 전쟁 말기 일본 열도로 석탄을 실어내지 못하게 되자 이들은 다시 큐슈 등 일본 본토광산에 분산해 강제노역하게 했으니 그 숫자가 15만 명에 이른다. 이 이중징용 광부들은 지옥 같은 노역장에서 무덤조차 없이 죽어야 했고 혹은 도망치고자 헤엄치다 사살되거나 바다에 빠져 죽기도 했다. 살아남은 동료가 죽은 이들을 일본인 몰래 묻어야 했고 평토 위에 돌멩이 하나로써 표지를 삼았으니 지금도 찾지 못한 무덤이 일본열도에 수없이 많다. 일본인들은 지금도 반인류적 만행을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피징용자들의 명단과 숫자조차 밝히지 않고 있다. 피징용자들의 후손들은 억울하게 돌아가신 부조(父祖)의 원한을 달래며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잔학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평화의 염원을 모아 이곳에 비를 세운다. 눈물 많은 나로서는 풀잎에 매달린 이슬방울처럼 굵은 눈물방울을 금세 걸치고 있었다. 눈물만큼 솔직하고 투명한 본성이 어디 있을까. 눈물은 참된 자아의 표징(表徵)이다. 1944년 일본은 전세가 기울고 사할린 탄광에서 물자수송이 여의치 않게 되자 사할린주 우글레고르스크 지역 14게 탄광을 폐쇄하고 한인 강제징용자들을 다시 일본 본토로 배치했다. 그 인원이 3천191명이었다고 하며 가족이 있는 인원은 1천명, 가족의 수는 3천500여명 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 숫자는 일본이 공개하지 않아 정확하지 않을 것이다. 추모비만 해도 15만명이라고 적혀 있으니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들 사할린 광부들은 한국에서 사할린으로 강제징용 와서 부모형제와 생이별하였으나 다시 처자식과 영문도 모른 채 헤어져 일본 군수공업지대인 이바라카와 후쿠시마지역 등 13개 탄광으로 강제징용된 것이다. 사할린에서 간신히 삶터를 마련한 한인들은 다시 가족과 생이별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던 이중강제징용의 비극이다. 이때 태어난 2세들은 아버지 없이 얼마나 힘들게 자랐을지 짐작이 간다. 영화 군함도의 하시마 탄광은 들어가는 건 보았어도 나오는 것은 보지 못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곳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곳이었는가를 증거하고 있다. 이들은 작업현장에서 들꽃처럼 혼자 외롭게 죽었고 원폭투하에 희생되기도 했을 뿐 아니라 뿔뿔이 헤어져 행방조차 파악이 안됐다고 한다. 강제징용자비 옆엔 또 다른 비 사할린 희생동포 위령탑이 서 있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는데 복도에서 한인문화센터 김주환 원장님을 만났다. 원장님은 갑자기 찾아온 우리를 맞아줄 안내원이 자리에 없자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원장실로 안내했다. 원장님은 브리핑하듯이 현재 사할린의 지정학적 위치와 한인사회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다. 이곳 사할린대학엔 한국어과가 있으나 한인 3, 4세들은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고 하셨으며 이곳 문화원도 마찬가지라고 하셨다. 한인 3, 4세들은 한국말을 모르고 글도 쓸 줄 모르는데 그도 그럴 것이 배워봐야 취직할 곳이 없으니 러시아어 외에 한국어는 필요 없는 요인이라고 했다. 원장님은 알고 보니 수원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는데 내가 일전에 막걸리 한잔 나눈 동수원중학교의 경홍수 교장선생님과 같이 교직생활을 하셨다고 한다. 후배작가 경홍수 교장선생님이 지난달 기증했다는 목판그림은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듯 교육실 밖 복도에 따뜻이 전시돼 있었다. 후배의 작품은 매우 향수적인 1970~80년대 풍경이어서 이곳에 아주 잘 맞았다. 우리는 한인문화센터의 식당 한국관에서 점심식사를 맛나게 했다. 두레패 조직자처럼 어울리기와 대접하기가 몸에 밴 이성호 경기민예총지회장이 투명한 물병에 담아온 곡차를 슬그머니 돌렸는데 어느새 그 맛이 물맛처럼 싱거웠다. 보드카에 어느덧 길들여 진 탓일까. 식사 후 코르사코프로 간다. 사할린의 핵심 코스라면 강제 징용 온 한인들이 막장에서 힘든 노동을 해야 했던 브이코프 탄광과 해방이 되어 고국으로 가는 배를 타려고 각지에서 몰려온 한인들이 결국 귀국선을 타지 못하고 망연자실 여생을 보냈던 이곳 코르사코프일 것이다. 먼 동해 쪽 푸른 바다가 보이는 높다란 망향의 언덕에 한 맺힌 영혼처럼 기념비가 우뚝 서 있었다. 강제로 끌려와 첫발을 디딘 곳도 이곳이요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가 일제 패망 후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달려온 곳도 이곳이다. 항구에 모여든 한인들은 배를 탈 수 없다는 절망적인 소식을 듣고 얼마나 망연자실 했을까. 일본인만 빠져나가고 그들이 강제 노역 시킨 한인들은 남겨둔 것은 통탄을 금할 수 없는 일이다. 소련마저도 한인의 귀환을 허용하지 않았다니 오갈 데 없는 그들의 심정은 얼마나 외롭고 절망적이었을까. 더러는 바다에 빠져죽고 남은 사람들은 누구도 관심두지 않는 이방인으로 다시 고단한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송창 선생은 그만의 혜안으로 언덕아래 해안 초소로 추정되는 벙커를 발견하고 상상력을 발동하셨다. 이오연 작가도 그 뒤를 따르고 우리는 자연스레 언덕 위 해안 길을 따라 한인들의 발자취라도 느낄 수 있을까하여 걸었다. 송창 선생은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처럼 시종 카메라렌즈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예술가의 집요한 탐구적 자세는 결국 웅혼한 작품으로 탄생하여 그만의 조형세계를 이루게 되는 것이리라. 명작은 독창적 소재를 번뜩이는 순간적 상상력에 주입하는 적극성의 결과물이다. 풀숲엔 아망아망 이라는 한글물티슈의 비닐 포장이 눈에 띄어 메이드인 코리아가 세계적임을 실감케 했다. 망향의 한을 품고 지하에 묻힌 징용자들이 지금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한류의 영광을 보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조금 더 가자 빈민가 판자촌처럼 폐허가 된 집들이 일렬횡대로 늘려있었다. 대부분 문이 굳게 닫혀 있고 연통이 달려있는 것으로 보아 연탄불을 피우던 우리나라의 옛 판자촌을 연상케 했다. 우리는 이곳이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한인들이 귀국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견디었던 곳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해 보기도 했다. 송창선생의 카메라는 급기야 사격하는 자세로 돌변했고 더욱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메라 렌즈를 보는 폼이 소총의 가늠쇠를 보는 폼과 비슷하였는데 이 동작은 군대용어로 서서쏴 자세가 분명했다. 이오연 작가는 순간적으로 주먹을 굳게 쥐며 고약한 표정을 지었다. 일본 놈 다 죽일거야!라는 결기일까? 이윽고 서양식 맞배지붕이 있는 한적한 시골마을이 나타났다. 간혹 목조건물이 보이는 게 일본의 잔재가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이 마을을 좀 더 접근하려다가 깜짝 놀랐다. 여러 마리의 개들이 일시에 짖기 시작했는데 조그만 것들이 엄청 깡다구 있게 짖어대어 시쳇말로 애 떨어지는 줄 알았다. 이때까지 우리를 따라다니며 안내하던 진돗개를 닮은 개 한마리가 아무런 대적을 않고 돌아서기에 우리도 황급히 돌아섰다. 야! 니들 자꾸 그러면 된장 바를 거야!라는 나의 엄포에도 이 러시아 개들은 아무런 긴장감 없는 똥배짱으로 우리가 멀어질 때까지 단체로 짖어댔다. 쯧쯧, 철없는 러시아 개들기념탑 아래로 가니 우리의 춤 팀들이 하얀 소복을 입고 추모의 퍼포먼스를 막 끝내고 있었다. 국화 한송이 바치고 긴 묵념 뒤에 돌아선다. 멀고먼 이국땅에 강제로 징용 와 억울하게 죽어 간 한인들의 망향가 사할린 아리랑은 이렇게 창작되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이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풍파 사나운 바다를 건너 한 많은 남화태 징용왔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철막 장벽은 높아만 가고 정겨운 고향집 막연하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이해균 수원민족미술협회 회장

[이해균의 사할린 견문록] ‘망향의 恨’ 서린… 이역만리를 가다

여행을 삶의 목적처럼 희구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메마른 환경은 점점 현실의 상식 앞에 주저앉았다. 그림을 만들고 언어를 꿰매는 일조차 흥미를 잃었다. 목적 없는 자유처럼 인습의 리얼리즘에 엉켜 수년 동안 갇혀 산 이유이기도 하다. 시간은 반환되지 않고 신산한 삶은 끝이 없는 시작 속에 있다. 치매환자의 무소유 같은 의미 없는 형식은 재현하지 않겠다.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게 허무주의라고, 내용 없는 소유의 소비보다는 여행의 다양한 경험에 소비하고 싶다. 이끼 같은 매너리즘은 가라! 2019년 유월, 함민복 시인의 길은 유서요 몸은 붓이라는 비정한 길을 나는 비로소 경건히 나선다. 사할린이라는 익숙하고도 낯선 지명이 보국대에 끌려간 실경이네 아버지의 이야기가 흘러나오던 고향집 사랑방 이야기를 어렴풋이 당겨온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어머니는 내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 계셨지만 어머니의 눈은 이미 저 세상에, 어머니의 입은 이 세상에 속한지라 어떤 소리도 내게 건너오지 못했다. 다만 무엇인가 말이 되지 못한 안타까운 부르짖음만이 허공처럼 입술을 열고 내 곁에서 달싹이고 있을 뿐. 말이 되지 못한 말-이시영 지난 사월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의지였던 어머니를 영원히 작별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그 충격을 못 견뎌 앓아누우신지 15년 만이다. 말년에는 의식도 없이 연명하시다가 죽음의 순간 이시영의 시처럼 입을 달싹이며 황급히 부르짖던 안타까운 모습을 지울 수 없다. 나는 고아가 되었다. 나는 아직 상제(喪制)의 몸으로 사할린을 간다. 모국, 조국 이런 것들은 나라가 있을 때의 일이다. 나라를 잃은 것은 어머니를, 모국어를 잃은 것과도 같은 슬픈 일임을 사할린 강제징용자들의 생사의 현장에서 느껴 보겠다고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 비로소 자각한다. 병석에 계셨어도 어머님이 살아계실 때가 큰 힘이었던 것처럼 식민치하의 조국도 그 자리에 있으므로, 언젠가 돌아갈 것이라는 꿈만으로 그리웠을 것이다. 그런데 해방된 내 나라도 돌아갈 수 없는 애통함은 어떠했을까. 지금쯤 고향은 들판에 심은 모가 뿌리를 내리고 돌담의 앵두가 처녀의 볼처럼 여물어 있을 것이다. 뒤란의 늙은 감나무는 하얀 감꽃을 피우며 벌들을 들끓게 하리라. 밤꽃이 총각냄새를 뿌리고 발정 난 장미가 붉은 몸을 비틀어 대는 유월이다. 흐드러지진 수국, 창포 피는 단오에 창공을 차오르던 그네 생각도 그윽하다. 유월은 항일 6ㆍ10만세운동이 있고 6ㆍ10 민주항쟁 기념일이 있으며, 6ㆍ15남북공동성명기념일과 6ㆍ25한국전쟁기념일이 있는 호국보훈과 민주, 애국 항쟁의 달이다. 유월이 오면 국립현충원에 잠드신 아버님 생각이 고향 산자락의 뻐꾸기 소리처럼 그립다. 탑승객들은 대부분 발음이 새는 듯한 말들을 쏟아내는 러시아계 사람들이다. 더러는 몽골인과 한인들도 보인다. 사할린! 그곳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이며 어떤 심상의 landscape일까. 조용히 눈을 감는다. 2시간 50분이 지날 즈음 러시아 항공기는 사할린 공항에 서서히 내린다. 하 에서 바라본 유즈노 사할린스크(사할린의 주도)는 군데군데 바이올렛 붉은 색 지붕의 아파트가 보일 뿐 한적해보였다. 결의 분첩이라는 미스터리의 사진첩과 화태(樺太ㆍ사할린의 일본명, 카라후토)로 불리는 사할린의 다큐멘터리를 오기 전 본적이 있다. 사할린에 강제노역 온 젊은 동포들은 단정한 옷차림에 비정한 표정이었다. 어떤 정의로운 결의였을까. 긴장하고 망연자실했을 그들의 표정을 찾지 못한 것은 또 하나의 숙제로 머릿속을 혼란케 헸다. 일제는 패전과 동시에 그들이 러시아로부터 빼앗아 조선인을 강제노역시킨 남사할린을 자국민만 배에 싣고 빠져나갔다. 수많은 강제 징용자들은 이 허탈감에 일부는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고 아우성치던 남은 자들은 조선인이라는 신분을 드러내기가 불안하여 한해 두 해 안타깝게 주저앉아 살았던 것이다. 힘없는 조국은 귀국선을 띄우지도 못한 채 그들을 버려둔 결과가 되었다. 나는 이번 경기민예총의 해외문화 탐방 팀의 숙소인 가가린 호텔에 짐을 풀었다. 총 26명이 이 호텔을 사용한다. 나는 3인실의 방에 묵게 되었는데 태어나 이렇게 고급스러운 방은 처음이었다. 넓은 응접실과 편안하고 우아한 방, 샤워장이 욕실과 구분되어 있고 침대는 넓고 안락했다. 투명한 원형 샤워실을 이용하는데 갑자기 네 개의 샤워꼭지에서 차가운 물이 일시에 터져 나와 깜짝 놀랐다. 비데가 있는 변기는 한글 표시가 된 국산이었고 TV와 냉장고도 모두 삼성, LG여서 호감이 갔다. 전혀 이질적인 것이 없어 여느 한국의 호텔에 온 듯 편안했다. 게다가 삼면이 내다보이는 전망 또한 환상적이었다. 알고 보니 방 배정이 여의치 않아 우리만 로열 스위트룸을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저녁 식사는 부근의 식당에서 현지 식으로 하게 되었다. 중앙아시아 여행 때 주식처럼 먹었던 샤슬릭이 나왔는데 궁금한 보드카는 개별 주문해서 맛볼 수 있었다. 보드카 한잔이 속을 확 달궈줄 때 굵은 꼬치고기 한 덩어리가 부드럽게 목을 타고 내려간다. 오늘 밤은 아라비아의 왕처럼 기품 있게 잠들 것 같다. 새벽 4시에 잠을 깼는데 밖이 대낮처럼 훤했다. 잠들지 않는 밤. 창밖을 내다보니 자주색 지붕들이 내다보인다. 중국의 붉은색과 러시아의 붉은색은 차이가 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유화 물감의 차이니즈레드는 주색(朱色)이라고도 하는 인류 초기의 빨간색이지만 너무 튀는 느낌이 든다. 조금 과장하면 지시적이고 강한 느낌이라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성조기의 별이나 욱일기, 나치 독일의 하켄크로이츠기의 빨간색은 공격적이기까지 하다. 여기와 비교하면 러시아에서 주로 사용하는 붉은색은 그다지 강하지 않고 은은하며 바이올렛 적색에 가깝다.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도 사실은 그다지 붉어 보이지 않았다. 커턴 색을 비롯한 실내 장식에도 이 색이 주조를 이루는데 클래식하고 고상한 느낌이 든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는 너무나도 평화스럽고 조용하다. 어린아이의 숨소리처럼 포근해 보인다. 건물 전체가 빨간 불빛이 새어나오는 풍경도 이색적이다. 낮에 가이드가 말한 예쁜 아가씨들을 조심하라는 그 나이트클럽인 듯 보인다. 가는 곳마다 과감하게 노출한 여성의 사진이 보이고 TV 속의 노출 정도가 이곳의 개방 수준을 가늠케 한다. TV 방송은 우리나라의 KBS, MBC, SBS가 거의 생방송으로 방영되고 있었다. 이곳에서도 한국의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가 가장 인기 있다고 한다. 아마도 상처받은 도시인들이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치유의 이상향은 국경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 동경에 대한 대리만족 또한 건강한 삶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보편적 마음 산책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7시가 되어서야 아침 식사를 한다. 뷔페식인데 된장국도 있고 밥과 김치가 있어 좋았다. 초기엔 러시아인들이 이곳 한인들이 담가 먹는 김치 냄새를 무척 혐오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들도 즐겨 먹는다고 한다. 조식을 끝내고 처음 들린 곳은 사할린 한인 문화센터다. 이 건물의 건축양식은 애매하게도 동양적이라고 했지만 신사 느낌이 드는 일본양식이었고 한국적인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알고 보니 이 건물은 1993년에 설립되었고 2004년 일본정부의 재정지원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일본이 한인문화센터를 설립했다는 것이 의아했으나 일본의 붉은 십자가회원과 건설사 야마시타섹케이 주식회사가 합작한 것으로 보아 인도적인 종교단체와 기업이 일본정부(총영사)의 승인으로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잠시 마당 오른쪽에 세워진 사할린 한인 이중징용광부추모비 앞에서 함께 묵념하고 그들의 원혼을 달랬다. 비에 새겨진 추모의 글을 함께 간 박설희 문학위원장께서 낭독하는 동안 모두 숙연했다. 이해균 수원민족미술협회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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