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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균의 사할린 견문록] 2. 코르사코프, 망향의 언덕에서

귀국선 타지 못하고 망연자실… 이방인으로 고단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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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강제징용자비
▲ 이중강제징용자비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조선농민 수십만 명을 본인과 가족의 동의 없이 징용해 이곳 사할린 탄광에서 강제 노역을 시켰다. 전쟁 말기 일본 열도로 석탄을 실어내지 못하게 되자 이들은 다시 큐슈 등 일본 본토광산에 분산해 강제노역하게 했으니 그 숫자가 15만 명에 이른다. 이 이중징용 광부들은 지옥 같은 노역장에서 무덤조차 없이 죽어야 했고 혹은 도망치고자 헤엄치다 사살되거나 바다에 빠져 죽기도 했다.

살아남은 동료가 죽은 이들을 일본인 몰래 묻어야 했고 평토 위에 돌멩이 하나로써 표지를 삼았으니 지금도 찾지 못한 무덤이 일본열도에 수없이 많다. 일본인들은 지금도 반인류적 만행을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피징용자들의 명단과 숫자조차 밝히지 않고 있다. 피징용자들의 후손들은 억울하게 돌아가신 부조(父祖)의 원한을 달래며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잔학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평화의 염원을 모아 이곳에 비를 세운다.

눈물 많은 나로서는 풀잎에 매달린 이슬방울처럼 굵은 눈물방울을 금세 걸치고 있었다. 눈물만큼 솔직하고 투명한 본성이 어디 있을까. 눈물은 참된 자아의 표징(表徵)이다. 1944년 일본은 전세가 기울고 사할린 탄광에서 물자수송이 여의치 않게 되자 사할린주 우글레고르스크 지역 14게 탄광을 폐쇄하고 한인 강제징용자들을 다시 일본 본토로 배치했다. 그 인원이 3천191명이었다고 하며 가족이 있는 인원은 1천명, 가족의 수는 3천500여명 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 숫자는 일본이 공개하지 않아 정확하지 않을 것이다.

추모비만 해도 15만명이라고 적혀 있으니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들 사할린 광부들은 한국에서 사할린으로 강제징용 와서 부모·형제와 생이별하였으나 다시 처자식과 영문도 모른 채 헤어져 일본 군수공업지대인 이바라카와 후쿠시마지역 등 13개 탄광으로 강제징용된 것이다. 사할린에서 간신히 삶터를 마련한 한인들은 다시 가족과 생이별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던 이중강제징용의 비극이다. 이때 태어난 2세들은 아버지 없이 얼마나 힘들게 자랐을지 짐작이 간다.

영화 군함도의 하시마 탄광은 들어가는 건 보았어도 나오는 것은 보지 못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곳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곳이었는가를 증거하고 있다. 이들은 작업현장에서 들꽃처럼 혼자 외롭게 죽었고 원폭투하에 희생되기도 했을 뿐 아니라 뿔뿔이 헤어져 행방조차 파악이 안됐다고 한다. 강제징용자비 옆엔 또 다른 비 사할린 희생동포 위령탑이 서 있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는데 복도에서 한인문화센터 김주환 원장님을 만났다. 원장님은 갑자기 찾아온 우리를 맞아줄 안내원이 자리에 없자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원장실로 안내했다. 원장님은 브리핑하듯이 현재 사할린의 지정학적 위치와 한인사회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다.

▲ 바이올렛 지붕
▲ 바이올렛 지붕

이곳 사할린대학엔 한국어과가 있으나 한인 3, 4세들은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고 하셨으며 이곳 문화원도 마찬가지라고 하셨다. 한인 3, 4세들은 한국말을 모르고 글도 쓸 줄 모르는데 그도 그럴 것이 배워봐야 취직할 곳이 없으니 러시아어 외에 한국어는 필요 없는 요인이라고 했다. 원장님은 알고 보니 수원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는데 내가 일전에 막걸리 한잔 나눈 동수원중학교의 경홍수 교장선생님과 같이 교직생활을 하셨다고 한다. 후배작가 경홍수 교장선생님이 지난달 기증했다는 목판그림은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듯 교육실 밖 복도에 따뜻이 전시돼 있었다. 후배의 작품은 매우 향수적인 1970~80년대 풍경이어서 이곳에 아주 잘 맞았다. 우리는 한인문화센터의 식당 한국관에서 점심식사를 맛나게 했다. 두레패 조직자처럼 어울리기와 대접하기가 몸에 밴 이성호 경기민예총지회장이 투명한 물병에 담아온 곡차를 슬그머니 돌렸는데 어느새 그 맛이 물맛처럼 싱거웠다. 보드카에 어느덧 길들여 진 탓일까.

식사 후 코르사코프로 간다. 사할린의 핵심 코스라면 강제 징용 온 한인들이 막장에서 힘든 노동을 해야 했던 브이코프 탄광과 해방이 되어 고국으로 가는 배를 타려고 각지에서 몰려온 한인들이 결국 귀국선을 타지 못하고 망연자실 여생을 보냈던 이곳 코르사코프일 것이다. 먼 동해 쪽 푸른 바다가 보이는 높다란 망향의 언덕에 한 맺힌 영혼처럼 기념비가 우뚝 서 있었다. 강제로 끌려와 첫발을 디딘 곳도 이곳이요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가 일제 패망 후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달려온 곳도 이곳이다. 항구에 모여든 한인들은 배를 탈 수 없다는 절망적인 소식을 듣고 얼마나 망연자실 했을까. 일본인만 빠져나가고 그들이 강제 노역 시킨 한인들은 남겨둔 것은 통탄을 금할 수 없는 일이다.

소련마저도 한인의 귀환을 허용하지 않았다니 오갈 데 없는 그들의 심정은 얼마나 외롭고 절망적이었을까. 더러는 바다에 빠져죽고 남은 사람들은 누구도 관심두지 않는 이방인으로 다시 고단한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송창 선생은 그만의 혜안으로 언덕아래 해안 초소로 추정되는 벙커를 발견하고 상상력을 발동하셨다. 이오연 작가도 그 뒤를 따르고 우리는 자연스레 언덕 위 해안 길을 따라 한인들의 발자취라도 느낄 수 있을까하여 걸었다. 송창 선생은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처럼 시종 카메라렌즈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예술가의 집요한 탐구적 자세는 결국 웅혼한 작품으로 탄생하여 그만의 조형세계를 이루게 되는 것이리라. 명작은 독창적 소재를 번뜩이는 순간적 상상력에 주입하는 적극성의 결과물이다. 풀숲엔 아망아망 이라는 한글물티슈의 비닐 포장이 눈에 띄어 메이드인 코리아가 세계적임을 실감케 했다.

경기민예총 해외문화예술탐방 단원들이 사할린 한인문화센터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경기민예총 해외문화예술탐방 단원들이 사할린 한인문화센터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망향의 한을 품고 지하에 묻힌 징용자들이 지금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한류의 영광을 보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조금 더 가자 빈민가 판자촌처럼 폐허가 된 집들이 일렬횡대로 늘려있었다. 대부분 문이 굳게 닫혀 있고 연통이 달려있는 것으로 보아 연탄불을 피우던 우리나라의 옛 판자촌을 연상케 했다. 우리는 이곳이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한인들이 귀국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견디었던 곳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해 보기도 했다. 송창선생의 카메라는 급기야 사격하는 자세로 돌변했고 더욱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메라 렌즈를 보는 폼이 소총의 가늠쇠를 보는 폼과 비슷하였는데 이 동작은 군대용어로 “서서쏴” 자세가 분명했다. 이오연 작가는 순간적으로 주먹을 굳게 쥐며 고약한 표정을 지었다. “일본 놈 다 죽일거야!”라는 결기일까?

이윽고 서양식 맞배지붕이 있는 한적한 시골마을이 나타났다. 간혹 목조건물이 보이는 게 일본의 잔재가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이 마을을 좀 더 접근하려다가 깜짝 놀랐다. 여러 마리의 개들이 일시에 짖기 시작했는데 조그만 것들이 엄청 깡다구 있게 짖어대어 시쳇말로 애 떨어지는 줄 알았다. 이때까지 우리를 따라다니며 안내하던 진돗개를 닮은 개 한마리가 아무런 대적을 않고 돌아서기에 우리도 황급히 돌아섰다. “야! 니들 자꾸 그러면 된장 바를 거야!”라는 나의 엄포에도 이 러시아 개들은 아무런 긴장감 없는 똥배짱으로 우리가 멀어질 때까지 단체로 짖어댔다. 쯧쯧, 철없는 러시아 개들…기념탑 아래로 가니 우리의 춤 팀들이 하얀 소복을 입고 추모의 퍼포먼스를 막 끝내고 있었다. 국화 한송이 바치고 긴 묵념 뒤에 돌아선다. 멀고먼 이국땅에 강제로 징용 와 억울하게 죽어 간 한인들의 망향가 사할린 아리랑은 이렇게 창작되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이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풍파 사나운 바다를 건너 한 많은 남화태 징용왔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철막 장벽은 높아만 가고 정겨운 고향집 막연하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이해균 수원민족미술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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