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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즉위 600돌_대왕의 꿈이 깨어난다] 7. 세종을 찾아 여주로

여주는 자연환경과 역사, 문화가 어우러져 여행하기 좋은 고장이다. 남한강과 수려한 산수가 뻗쳐 있고 신륵사, 국보 제4호 고달사지 승탑, 석축 산성 파사성 등이 있다. 세종대왕이 영면해 있는 영릉, 조선 마지막 국모 명성황후 생가도 있어 역사 테마 여행지로도 적격이다. 지난 2016년 편리하게 여주를 방문할 수 있는 방법이 생겼다. 바로 성남과 여주를 잇는 경강선 복선전철과 세종대왕 관광순환버스다. 세종대왕 관광순환버스는 여주 내 관광지를 연결한다. 성남과 여주를 잇는 경강선 복선전철과 함께 이용하면 수도권에서도 편하고 저렴하게 시티투어를 할 수 있다. 지난 3일 세종인문도시 여주를 찾았다. ■ 영릉, 현재 정비 공사 중이지만 세종대왕역사문화관, 효종대왕릉 볼 수 있어 세종대왕 관광순환버스를 이용하려면 여주역에서 표를 구입해야 한다. 방문 당일에는 매표소가 쉬어 버스 기사에게 표를 구입했다. 성인은 5천 원, 65세 이상ㆍ청소년ㆍ어린이 등은 3천 원으로 하루종일 관광지를 오가기에 저렴한 가격이다. 카드 결제는 되지 않아 현금을 준비해야 한다. 버스에 오르자 세종대왕과 여주의 관계를 다룬 소개 영상이 흘러 나왔다. 영상이 끝나자 운전기사는 여주시에 대한 역사를 간단히 승객들에게 말했다.운전기사는 “버스를 이용하는 관광객은 오전 10시~12시 가장 많으며 특히 전철 요금이 들지 않은 노인들이 많이 탄다”며 “3천원으로 여주시내를 왔다갔다하고 밥만 사먹으면 되니 1만 원으로 와도 남는 여행”이라고 설명했다. 남편과 함께 버스를 탄 여성 승객은 “적은 비용으로 여러 군데를 자유여행하는 것처럼 다 돌아볼 수 있어 편리하다”고 감탄했다. 10여 분을 달려 세종대왕릉(영릉)에 도착했다. 세종대왕릉 일부 구역은 현재 정비 공사가 진행 중이라 관람이 제한된다. 효종대왕릉과 이어지는 왕의 숲길을 지나 능침 구역을 볼 수 있었다.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였지만 우산을 쓰고 우비를 입은 학생 단체를 비롯해 방문객이 많았다. 현재 홍살문과 정자각을 지나는 ‘세종대왕릉 걸어가는 길’은 정비 공사로 인해 진입할 수 없다. 본래 홍살문부터 정자각은 직선도로로 나야 한다. 이번 정비 공사가 끝나면 한번 꺾어야 했던 세종대왕릉 홍살문~정자각 사이 길이 수정될 것으로 보인다. 올해 12월 31일까지 세종대왕릉 일부를 볼 순 없지만 세종대왕의 일대기와 업적에 대한 전시를 하고 있는 세종대왕역사문화관을 천천히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세종대왕릉과 이웃한 효종대왕릉 재실에는 천연기념물 제459호로 지정된 회양목도 눈길을 줄 만하다. 세종대왕 관광순환버스는 가 코스와 나 코스로 나뉜다. 이중 필수코스로 꼽히는 세종대왕릉, 신륵사와 함께 한글시장(5일장)에서는 환승이 가능해 노선을 오갈 수 있다. ■ 여주 역사문화 중심지가 된 신륵사… 비 와도 관광객 많아 비가 오는 날씨였지만 신륵사는 아름다웠다. 신륵사 입구를 지나자 색색 연등이 펼쳐졌다. 석가탄신일을 앞두고 들뜬 분위기가 느껴졌다. 관광객들은 흙탕길을 밟으면서도 신난 얼굴이다. 신륵사는 아름다운 남한강을 배경으로 자리잡은 유서 깊은 절이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고려 우왕 때 나옹선사가 입적하면서 유명한 절이 됐다. 중요 문화재를 많이 가지고 있다. 보물 제180호로 지정된 조사당, 제225호 다층석탑, 제226호 다층전탑, 제228호 보제존자석종, 제229호 보제존자 석종비, 제230호인 대장각기비, 제231호인 석등 등이다. 또 유형문화재 극낙보전 이외 부속건물인 구룡루ㆍ명부전ㆍ시왕전ㆍ산신당ㆍ등이 있다. 비가 많이 와 다 둘러보지는 못했지만 너른 남한강을 배경으로 한 사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다. 신륵사는 세종인문도시를 내세우는 여주시에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기도 하다. 바로 조선시대 세종대왕릉의 원찰이었기 때문이다. 원찰은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거나 자신의 소원을 빌기 위한 사찰이다. 조선시대는 죽은 왕 무덤 가까이 사찰을 뒀다. 세종대왕릉과 가까운 신륵사가 세종대왕의 명복을 비는 사찰이 됐다. 신륵사는 세종대왕과 여주의 연을 이어주는 절로 세종인문도시를 내세우는 여주에 의미가 깊다. 신륵사 바로 옆에는 여주박물관이 있다. 황마관과 여마관 두 동이 있다. 세련된 외형을 갖춘 여마관은 2017년 한국건축가협회 올해의 건축베스트7에 선정되기도 했다. 박물관은 신륵사, 고달사지, 영릉, 흔암리 선사유적지 등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역사실, 남한강 수석전시실, 조선 왕릉실 등 상설전을 통해 여주의 역사, 자연, 문화를 골고루 볼 수 있다. 여주의 역사문화콘텐츠를 살린 기획전도 펼치고 있다. 신륵사 일대는 오는 22일까지 열리는 제30회 여주도자기축제의 장소이기도 하다. 마침 축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축제는 ‘남한강, 세종대왕 그리고 천년도자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전시와 체험, 판매, 공연 이벤트 프로그램으로 꾸려진다. 신륵사에서 본 관광객들이 예쁜 도자기를 구입할 수 있는 도자세장으로 줄지어 들어갔다. 천년 고찰이 그 장소로서 지역 역사와 문화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올해 세종대왕 즉위 600돌을 맞아 9월 열릴 첫 세종대왕문화제도 영릉이 공사 중인 관계로 신륵사 일대에서 펼쳐질 예정이다. ■ 세종대왕 관광순환버스 타고 다양한 관광지로 달리는 재미 세종대왕 관광순환버스를 이용하면 유적지와 박물관, 수목원 뿐만 아니라 막국수촌과 여주 5일장, 여주아울렛 등에서 먹거리와 즐길거리를 함께 즐길 수 있다. 황학산수목원은 세종대왕 관광순환버스가 활성화되며 관광객 수가 크게 늘어난 한 곳이다. 황학산수목원서는 중ㆍ장년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수목원은 습지원, 석정원, 산열매원, 미니가든, 항아리정원 등 14개 테마정원을 갖췄다.27만3천183㎡ 대지에 목본 717종류와 초본 1천109종류 등 식물 총 1천826종류를 보유하고 있다. 산림박물관이 있고, 유아를 위한 체험 프로그램이 있어 앞으로 더 성장할 수 있는 관광지로 기대된다. 수목원 내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고 있던 관광객 K씨(55ㆍ여)는 “수목원 위치가 일반 대중교통으로 오기엔 힘들 것 같은데 관광순환버스를 타고 수목원에 쉽게 올 수 있어 좋았다”며 “역사와 관련된 장소 뿐 아니라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코스가 있어 더욱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아쉬운 하루를 마치며 버스 운전기사의 말을 떠올렸다. “세종대왕 관광순환버스 코스에 있는 관광지 한 곳을 한 시간 안에 둘러본다 해도 하루가 너무 짧아요. 다 둘러보려면 하루가 아니라 며칠 잡고 여행오는 걸 추천합니다”류진동 손의연기자 세종대왕 관광순환버스하루 8번·1시간 단위 운행 2개 코스 관광지 ‘한눈에’여주시는 ‘세종대왕 관광순환버스’를 지난 2016년부터 운영 중이다. 이 버스를 이용하면 여주시 주요 관광지를 쉽게 오갈 수 있다. 여주시는 지난해 4월 경강선이 개통한 후 운행 횟수를 두 배 늘려 하루 8번 운행하고 있다. 버스는 1시간 단위로 다닌다.코스는 두 개다. ‘가’ 코스는 여주역에서 출발해 신륵사, 목아박물관, 강천보, 금ㆍ은모래유원지, 황학산수목원, 명성황후생가, 여주프리미엄아울렛을 거쳐 다시 여주역으로 돌아온다. 1시간 가량 걸린다.‘나’ 코스는 가코스보다 30여 분 더 소요된다. 여주역~여주5일장~세종대왕릉~여주보~이포보~막국수촌ㆍ파사성~신륵사~여주역을 거친다.지난해 세종대왕 관광순환버스를 이용한 탑승객 수는 3만 4천여 명이다. 세종대왕릉, 신륵사, 명성황후 생가 뿐만 아니라 쇼핑을 할 수 있는 프리미엄 아울렛과 지역 먹거리를 즐길 수 있는 천서리 막국수촌 등을 연결하는 알찬 코스를 꾀한 결과로 분석된다.또 2016년 대비 지난해 25%이상 관광객이 증가한 황학산 수목원과 일반 대중교통으로 가기 힘든 천서리 막국수촌도 대표관광지로 발돋움했다. 손의연기자

[세종 즉위 600돌_대왕의 꿈이 깨어난다] 6. 여주에 흐르는 세종의 인문정신

‘임사이구(臨事而懼), 두려운 마음으로 일을 성사시켜라’ 세종실록에 등장하는 어구다.세종이 재위 31년에 한 말로 큰 일을 당하면 두려움과 같은 엄중한 마음을 지니고 지혜를 짜내 일을 성사시키라는 뜻을 담은 말이다. 대사(大事)에 임하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교훈을 준다. 이 말은 이달의 세종대왕이란 이름으로 세종인문도시 명품여주 홈페이지에 걸려 있다.여주시는 매달 세종의 어록을 발췌해 시민에게 알리고 있다. 여주와 세종대왕을 이야기하며 ‘영릉’을 중심에 뒀다. 여주는 더나아가 이제 세종의 인문정신을 본격적으로 입힌 정책과 문화콘텐츠에 집중하고 있다. ■ 세종의 사람 길러내는 교육… 세종의 ‘사가독서’ 여주에 꽃피워 세종의 업적이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 ‘사람’이다. 세종은 현명한 학자들이 모인 집이라는 뜻의 집현전(集賢殿)을 뒀다. 임금의 관심과 아낌없는 지원으로 유능한 인재들은 모여서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집현전 학사들은 유교가 기반이 되는 정치 제도와 정책을 연구했다. 뿐만 아니라 성리학, 역사, 지리, 의약, 천문 등 다 분야의 발전을 가져왔다. 이들의 업적 중 백성을 위한 것으로 우리식 학문 편찬을 꼽을 수 있다. 농업, 의학에 관한 책을 중국에서 가져와 그대로 쓰고 있었지만 조선 사정에 맞는 책을 발간해 백성들의 삶을 바꿔놓았다. 세종이 발탁한 인재들이 중심이 됐다. 여주시는 ‘세종인문도시 명품여주’만들기를 추진하며 세종인문학 인재 배출을 목표로 잡았다. 이를 위해 세종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며 세종학 학술회의를 열고 세종을 다룬 책들, 통섭학으로서의 세종학, 한글, 세종리더십과 청년 등을 논했다. 더 나아가 다양한 연령대를 위한 인문학 교육을 열고 있다. 보건소는 ‘세종의 밥상머리 교육’을 통해 올바른 식습관을 알려주는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세종대왕 아카데미 강좌를 통해 ‘세종과 인권’, ‘세종 리더십’, ‘여주시민 집헌전’ 등을 운영한다. ‘세종과 인권’은 여주시정신건강증진센터에서 펼쳐진 프로그램이다. 세종대왕의 애민정신과 생명존중 정신에 초점을 두고 정신보건사업의 비전을 제시한다. 만성정신질환자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변화를 도모해 다양한 지역 구성원이 함께 갈 수 있도록 꾀했다. 여주시민 집헌전 강좌는 세종에 대해 전반적으로 배워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인간 세종, 세종의 즉위와 정치, 국가 경영, 세종실록 등을 알아본다. 전문가 초청 특강을 통해 보다 세부적이고 전문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또 흔한 교육프로그램이라도 세종과 연계해 시민이 흥미를 가지고 참여할 수 있도록 설계한다. 곧 아이가 태어날 가정을 대상으로 한 태교 프로그램이 그 예다. 지난해 여주박물관이 운영했던 ‘우리아이 세종처럼’이란 프로그램은 세종 탄신 620주년을 기념한 태교 교실이다. ‘우리 아이의 무병 장수를 기원하는 배냇저고리 짓기’, ‘부귀공명을 바라는 엄마의 마음을 담은 민화 그리기’, ‘고전명언과 세종대왕의 어록, 태명을 캘리그라피로 써보기’ 등 세종을 입혀 특별함을 더했다. 청소년을 위한 프로그램이 풍성하다. 세종인문 초ㆍ중ㆍ고 교재를 만들어 체계적으로 접할 수 있도록 했다. 자유학기제 수업과 연관시켜 청소년이 지역의 구성원이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청소년 세종 오락(5樂) 캠프’는 세종리더십을 주제로 또래들과 여러 주제를 이야기하고 활동하게 한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세종을 친숙하게 만나고, 배울 수 있게 구성했다. 올해 즉위 600돌을 기념해서 여주 박물관은 평소 관심을 갖기 힘든 ‘국왕의 즉위식’에 대해 알아본다. 국왕의 즉위의례, 역사, 상징, 기록, 국왕의 하루, 현대 의미를 살펴보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 세종의 이야기를 문화 콘텐츠로 살려내다 세종대왕이 통치한 시기는 문화예술이 꽃피운 때이기도 하다. 세종은 문화예술에 조예가 깊은 임금이었다. 유명한 일화가 있다. 세종이 새해맞이 연주회에서 편경(국악기 중 타악기) 연주를 들었다. 세종은 “아홉 번째 소리가 음이 약간 높은 듯하구나. 어찌된 일인가?”라고 물었다.이때 총 음악감독이었던 박연이 깜짝 놀라 직접 편경을 살펴보니, 아홉 번째 돌에 먹물이 아직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박연이 직접 먹물을 갈아 없애니 음이 제대로 나왔다고 한다. 이렇듯 세종은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박연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잘 어울리는 악기를 만들고, 음악의 기준이 되는 표준음을 정해 실제 많은 노래를 작곡했다. 우리식 음악인 ‘신악’을 몸소 만들고 ‘정간보’라는 악보를 개발하기도 했다. 여주시도 문화를 귀히여긴 세종을 본받아 콘텐츠로 문화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지난해 도내 31개 시군 중 15번째로 문화재단을 출범시켰다. 세종인문도시 명품 여주를 지향하는 중점 기관으로서다. 여주세종문화재단은 올해 본격적인 문화예술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예술가 지원, 시민문화예술 활성화, 문화예술교육 등을 기획 중이다. 또 세종대왕 즉위 600돌을 기념해 특별한 공연을 기획했다. 바로 창작 뮤지컬 1446이다. 한글 창제, 인재 등용, 과학 기술 발전 등 세종의 수많은 업적보다 그 뒤 숨겨진 내면의 고통과 고민을 담아낸 작품이다. 웰메이드 창작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지난 2월에는 영국 웨스트엔드 앤드류 로이드 웨버 ‘The Other Palace’에서 워크숍과 리딩 쇼케이스를 가져 해외 성공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지난해 10월에는 한글디자인포럼을 열고 한글 산업화를 위한 방안을 논했다. ‘한글 디자인’의 정책적 연구를 지원한 것은 전국 지자체 중 여주시가 처음이다. 이 자리에서는 한국 최고의 디자이너들이 한글과 디자인, 세종대왕과 여주시를 연계한 도시환경 및 한글 산업화를 위해 진행한 연구를 발표했다.포럼 회장을 맡은 한기웅 강원대 교수는 “세종대왕께서 여주에 영면해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여주는 그 어느 도시보다 혜택 받은 도시”라며 “이번 포럼이 여주만의 산업을 한글과 세종대왕을 연결하는 출발점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 즉위 600돌 기념하는 세종대왕문화제…지역 대표 축제로 거듭날까 올해 ‘제1회 세종대왕문화제’가 오는 9월 15~19일 열린다. 세종대왕 즉위 600돌을 맞아 대규모로 준비된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글학회, 외솔회, 세종대왕나신곳성역화국민위원회, 한글문화연대 등 주요 국내 세종대왕·한글단체도 함께 한다. 세종대왕 즉위일인 1418년 음력 8월10일을 그레고리력 기준 양력으로 환산해 날짜를 맞췄다. 세종대왕릉 원찰(願刹)이었던 신륵사 인근 여주도자기축제장에서 펼친다. 도내 지자체 중 수원화성문화제와 오산독산성문화제 등이 대표적인 관광 축제로 꼽힌다. 여주시는 첫 세종대왕문화제를 앞두고 다른 지자체의 우수사례를 벤치마킹하며 만반의 준비를 했다. 올해 세종대왕문화제는 단일 행사로 그치는 게 아니라 한글날인 10월 9일까지 행사를 이어간다. 세종대왕 주간을 잡아 여주시민의 날, 도전! 독서골든벨, 한글날 문화제, 각종 체육대회, 전시회 등을 꾸린다. 여주 세종대왕문화제가 여주 시민, 더 나아가 경기도민의 축제가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류진동, 손의연기자

[세종 즉위 600돌_대왕의 꿈이 깨어난다] 5. 여주에서 만나는 세종

세종대왕 즉위 600돌을 맞아 세종을 다방면에서 조명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세종과 관련된 고리가 있는 지자체들도 앞다퉈 행사나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중 여주는 영릉(英陵)을 품고 있어 세종과의 연관성이 가장 짙다.이에 여주는 지난 2015년부터 ‘세종대왕의 도시, 세종인문도시 명품 여주’를 기치로 내걸고 시정을 진행해왔다. 단순한 행사나 사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무원과 시민이 세종의 정신을 바탕으로 삼는 데 의의가 있다.■ 여주, 세종대왕 정신 이어받아… 세종대왕의 정책이 지금까지도 주목받는 이유는 ‘인문정신’때문이다. 인문은 즉 사람의 문제를 다룬다. 세종은 백성의 문제를 정확히 꿰뚫은 군주였다. 그에게 정치는 특별한 것이 아닌, 백성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터전을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세종은 ‘사람다움’을 위한 복지정책부터 국방정책까지 단계별로 시행해 합리적으로 추진해나갔다. 따라서 앞서 추진한 정책이 그 다음 정치의 바탕이 돼 더욱 탄탄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먼저 단군 사당을 정비해 국가 정신을 바로잡아 구심점을 만들었다. 백성의 건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질병과 의학을 최우선으로 한 정책을 펼치고, 그다음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농업정책을 행했다. 이후 국가 안정을 위해 국방정책을 통해 국토 정비를 했다. 무엇보다 빛나는 것은 백성의 삶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된 과학기술 발전과 ‘훈민정음’이다. 물시계, 해시계, 측우기 등을 만들고,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는 세계 최고의 문자 ‘한글’을 창제했다. 그 때문에 백성들은 보다 편히 농사를 짓고 일상생활을 할 수 있었다. 농사 짓는 방법을 담은 책인농사직설의 편찬 과정만 보더라도 세종이 백성의 삶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였는가를 볼 수 있다. 당시 중국의 농사책을 이용했기에 조선의 농업생산량은 낮았다. 세종은 이 문제점을 파악하고 직접 궁궐 안에 논을 만들어 농사를 지으며 연구했다. 태종 때부터 농사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 정리하고 이를 책으로 만들어 가르치고 보급하게 했지만 차이가 있다. 태종 때는 주로 옛 책에 있는 지식을 정리했지만 세종은 직접 관리들로 하여금 농사 현장에 나가 실용적인 농사지식을 다루도록 했다. 이렇듯 임금이 백성을 아끼는 마음으로 행동에 나서자 태평성대가 시작됐다. 세종은 올바른 근간의 중요성을 몸소 보여준 임금이다. 이때문에 여주시는 세종의 정신을 이어받아 다양한 정책을 운영하고 있다. ■ 세종 정치 잇기 위해 조례 제정한 여주 세종이 재위 기간인 32년 동안 펼친 정치는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여주시는 ‘세종인문도시’를 전체 기조로 삼아 행정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세종인문도시 명품 여주’를 내걸고 세종대왕이 그렸던 무늬를 따라가는 발걸음을 시작했다. 2015년 기초계획을 수립하고 지금까지 차근차근 이행해왔다. 2016년에는 행정을 직접 하는 공무원을 대상으로 세종의 어록을 소개하고 관련 덕담을 나누는 정책을 시행했다. 작은 것부터 단계적으로 시작해나간 것이다. 이어 시민·공무원에게 세종인문 교육을 총 43회 펼쳐 관심을 환기했다. 여기에는 4천 197명이 참여했다. 세종인문도시를 구현하기 위해 기관, 단체, 시민, 청소년 등 각계각층의 의견을 듣고 간담회를 열었다. 그결과 2016년 7월 1일 세종인문도시 명품 여주 선포식을 개최할 수 있었다. 또 같은해 12월에는 여주시 ‘세종인문도시 명품 여주’ 조성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기까지 했다. 조례의 기본 이념은 세종대왕의 정신이 배어나는 시민이 행복한 사람 중심의 도시, 시민 모두가 세종대왕을 배우고 익혀 자연스레 세종대왕을 이야기할 수 있는 도시, 곳곳에 세종대왕의 향기가 나는 도시, 세종대왕의 정신을 이어 받아 ‘생생지락’을 구현하는 창의적인 경제도시 등을 실현하는 것이 목표다. 여기서 ‘생생지락’은 세종이 백성을 행복하고 편안하게 하고자 한 치적으로 즐거이 생업에 종사하고 삶을 즐기는 것을 뜻한다. 조례에 따르면 세종인문도시는 단순히 공무원과 시민이 인문학 교육을 받는 것이 아니다. 여주시는 도시 환경, 문화관광, 학문, 교육, 경제 분야 등이 발전할 수 있도록 필요한 사업을 추진하고 시민은 세종대왕의 정신을 배우고, 이에 대한 소양을 갖출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해야 한다고 돼 있다. 교육, 관광, 복지, 자치까지 아우르는 개념이다. ■ 세종의 도시 만들어가고 있어 세종인문도시의 추진사업의 전략은 크게 3가지다. 성숙된 세종기반, 지혜로운 세종학문, 창의적인 세종경제 등이다. 제1전략인 성숙된 세종기반 마련을 위해 조례 제정, 각종 위원회 구성, 세종문화재단 설치, 여주박물관 세종관 운영, 주요 공원의 테마화, 세종마을 만들기 등을 진행했다. 제2전략인 지혜로운 세종학문을 통해서는 세종인문학 강좌와 세종리더십 교육, 초중고 교재 가발, 성인문해교육, 노인 자살방지 교육프로그램 등을 운영했다. 특히 평생교육과 사회복지 개념이 더해진 데 의미 있다. 제3전략인 창의적인 세종경제는 더욱 발전적이다. 세종대왕 문화관광과 관련한 스토리텔러를 양성해 활용하고, 시민홍보운동과 세종인문ㆍ관광 UCC공모를 시행해 짧은 기간에도 불구 여주시민의 관심까지 끌어들였다. 또 관광콘텐츠를 충분히 만들어내기 위해 한글거리와 세종약선힐링타운을 조성하고, 세종대왕숭모제전과 한글날 행사를 확대했다. 이중 눈에 띄는 것은 단연 뮤지컬 1446이다. 뮤지컬은 세종의 업적 뿐만 아니라 인물 자체를 조명, 인간 세종의 내면에 초점을 뒀다. 지자체가 만든 웰메이드 창작물로 일찍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또 올해 열릴 ‘세종대왕 즉위 600돌 문화제’ 준비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세종인문도시 여주의 큰 도약이 기대된다. 여주는 세종대왕과 관련한 유ㆍ무형 자산을 가지고 있다. 여주 입장에서 세종대왕의 성체(聖體)가 묻힌 ‘영릉(英陵)’이라는 자산은 매우 귀중하다. 관광 뿐만 아니라 문화콘텐츠, 정책으로도 발전시킬 수 있는 명분이 되기 때문이다. 여주시의 인구는 12만 여 명이다. 아직은 작은 도시지만 세종의 정신으로 특별함을 일궈나가는 중이다. 대왕을 품은 여주의 꿈이다. 류진동ㆍ손의연기자

[세종 즉위 600돌_대왕의 꿈이 깨어난다] 4. 여주에 잠든 세종의 의미

대왕이 묻혀 있는 여주. 세종대왕릉인 영릉(英陵)은 여주를 돌아볼 때 꼭 둘러봐야 하는 곳이 됐다. 여주의 빼놓을 수 없는 관광지이기도, 학생들의 필수 견학 장소이기도 하다. 지역의 명소라는 시각에서 벗어나 세종이 여주에 왜 잠들었는지, 세종이 여주에 어떻게 영향을 끼쳐왔는지 살펴본다.■ 임금이 찾는 고을 여주 세종대왕이 옮겨온 후 여흥이었던 여주는 격이 상승됐다. 이때부터 여주와 세종대왕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었다. 세종대왕이 여주에 잠든 순간부터 세종대왕의 정신은 여주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과거에서부터다. 세종 뒤 후대 왕들은 세종대왕릉에 참배하기 위해 여주를 찾았다. 여주는 왕이 찾는 고을이 됐다. ‘임금이 영릉(英陵)에 배알(拜謁)함으로 인하여 여주(驪州)에 거둥하니, 백관이 흥인문(興仁門) 밖에 나가서 대가(大駕)를 전송하였다. 광주(廣州)의 율현(栗峴) 냇가에서 주정(晝停)713) 하고, 저녁에는 같은 고을 낙생역(樂生驛) 앞들 파오달(波吾達)에서 머물렀다.’ (성종실록 12권, 성종 2년 10월 8일) ‘아, 대행 대왕이 하늘로 떠나신 그 다음달 병술일에 우리 사왕 전하(嗣王殿下)께서 애지(哀旨)를 내려 삼공(三公)·구경(九卿)과 관각(館閣)·삼사(三司)의 신하들로 하여금...뿐이다 하였다. 영릉(寧陵)과 영릉(英陵) 배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천에서 행차를 멈추고는 윤음(綸音)을 내려 광주·이천·여주 세 고을 부로(父老)들을 개유하고, 대가가 지나는 연도의 백성들에겐…’ (정조실록 1권, 부록 / 정조 대왕 행장) 성종대는 조선 최고의 태평성대 시대로 꼽힌다. 세종대왕과 무관하지 않다. 조선 초 세종의 치세가 성종에 이르러 꽃을 피웠다. 정치, 경제, 법, 과학, 문화, 복지 등 세종이 다분야에서 이룩해놓은 업적 덕분이었다.정조는 세종대왕과 닮은 점이 있다. 과학을 중시하며 백성을 위하는 애민 정신이 투철한 왕이었다. 그도 여주에 발걸음했다. 조선의 성군으로 불리는 성종과 정조가 세종대왕릉을 방문해 그 정신을 되새기고 계승했다는 기록은 의미 있다.정조의 ‘영릉(英陵) 국내(局內)에 흙을 채울 때의 고유문(告由文)’과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에 전알한 날의 윤음’은 정조의 시문집인 홍재전서에 실려 있다. 세종을 존경하고 닮고 싶어하는 정조의 마음을 알 수 있어 유의미하다. 또 정통성 확보와 왕권 강화의 목적도 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중종도 영릉에 행차했다 ‘모든 거둥에 관한 일을 사초(史草)에는 반드시 다 쓰겠으나, 이번에 능에 참배하는 일은 날마다 전교한 것부터 정승(政丞)에게 수의(收義)하고 정승이 아뢴 일과 해사(該司)가 아뢴 일과 영릉(英陵)에서 제사를 거행한 뒤에 환궁(還宮)할 때까지 한 일을 모두 상세히 써서 아뢰면 또한 이것을 뒷날의 규례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중종실록 63권, 중종 23년 9월 13일) ‘제릉(齊陵)에 제사를 지낸 뒤에 경덕궁에서 양로연(養老宴)을 열어야 한다. 전에 영릉(英陵)에 행행하였을 적에는 과천(果川)과 용인(龍仁) 지방에 모두 양로연을 베풀었다. 이번에는 개성부와 풍덕(豊德) 지방의 노인은 경덕궁에서 잔치를 베풀고 장단(長湍)·파주(坡州)·고양(高陽) 지방의 노인은 통제원(通濟院)에서 잔치를 베풀라는 것을 예조에 이르라.’ (중종실록 80권, 중종 30년 8월 7일) 중종은 1506년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왕이다. 본인이 직접 주도한 반정이 아니었기에 개혁을 추진하고자 해도 한계가 있었다. 중종이 단순히 참배만을 위해 세종대왕릉을 찾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 중종은 영릉에서 행한 제사부터 궁으로 돌아갈 때까지 상세히 기록해 훗날 왕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했다. 주목할 점은 선대 왕릉 행차가 백성에게 선정을 베푸는 계기가 된 것이다. 중종은 경기도 개풍군에 있는 조선 태조의 정비 신의왕후릉에 제사 지낸 뒤 양로연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여주 영릉을 방문했을 때 과천과 용인 지방에서 양로연을 베푼 사례를 들었다. 양로연은 조선시대 노인을 공경하고 풍습을 바로잡기 위한 잔치다. 특히 세종은 양로연을 열며 80세 이상이면 천민도 참석하게 했다. 이렇듯 백성과 노인을 위하는 세종의 마음은 후대까지 전해 내려왔다. ■ 신하와 민중의 정신적 지주 된 영릉 영릉은 후대 왕 뿐만 아니라 신하와 백성의 정신적 지주가 되기도 했다. 많은 신하가 영릉을 오가며 시를 남겼다. ‘여주(驪州) 고을 산 빛이 구의산 흡사하니 / 黃驪山色九疑同 두 분 성군 의관이 여기 이곳 묻혔어라 / 二聖衣冠葬此中 고개 돌려 바라볼 제 고금의 한 아련하여 / 回首冥冥今古恨 저무는 강 동녘에서 봄바람에 노 멈추네 / 春風輟棹暮江東’ (‘왕릉을 바라보며’, 김창협) ‘일만 산이 구의산을 향하여서 조아리니 / 萬山朝拱九峯疑 신성한 분 천년토록 길이길이 생각누나 / 神聖千秋永孝思 솔과 잣은 울창하여 하얀 학이 둥지 틀고 / 松柏晝陰巢白鶴 앵두 복숭 봄에 익어 누런 꾀꼴 울어 대네 / 櫻桃春熟黃 원로들이 갱가 부른 중화 임금 날인 데다 / 歌元老重華日 사신들이 시를 짓는 한 무제의 시절이네 / 作賦詞臣武帝時 활과 칼은 몇 차례나 가는 세월 겪었는가 / 弓劍幾回經歲月 텅 빈 전각 바라보매 슬픔 금치 못하겠네 / 却瞻虛殿不堪悲’ (‘영릉의 정자각을 봉심하다’, 정두경) 위 시들은 조선 후기 문신들이 지은 시다. 세종대왕이 승하한지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나서 여주 왕릉을 지나며 쓴 시다. 세종대왕을 떠올리며 드는 소회를 담은 내용이다. 조선 선비들은 주자학을 충실히 따른 세종대왕을 존경하고 본받고자 했다. 선비들은 여주를 찾아 이런 마음을 시와 글 등 작품에 담았다. 이와 동시에 왕릉을 둘러싸고 있는 여주의 자연을 노래했다. 왕릉을 품고 있는 여주의 뛰어난 경관이 드러난다. 두 시에서 공통으로 나오는 ‘구의산’은 중국의 최고 임금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순(舜) 임금이 묻힌 산이다. 김창협과 정두경은 세종대왕이 잠든 여주를 구의산에 빗대 표현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영릉에 대한 다른 흥미로운 언급이 있다. 바로 임진왜란 때 경기도순찰사로 왜적과 싸운 ‘성영’의 이야기다. 그는 임진왜란 때 어려움 속에서 군사를 모집하던 중 영릉 앞에서 각오를 다졌다.실록에는 그가 왕 앞에서 “영릉(英陵)을 배알(拜謁)하고 통곡하며 네 번 절하고 물러왔는데, 그것은 당시 어리석은 백성들이 조정(朝廷)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가끔 무리한 말들을 많이 하므로 군대를 이끌고 선왕(先王)의 능침(陵寢)을 배알하여 대중의 뜻을 통일시키고 대의(大義)를 밝히려 하였던 것이다”라고 밝혔다고 적혀 있다. 전쟁이 끝난 후 성영은 이런 자신의 행동이 예에 어긋나는 망령된 것이라며 파직을 청했지만 왕은 이를 물리쳤다. 선조가 성영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했을 것이라 감히 추측할 수 있다. ■ 여주, 매년 세종대왕릉에서 제사 지내며 정통성 확보…활용 가능한 콘텐츠도 풍부 여주 세종대왕릉에서는 매년 제사가 열린다. 지난해 세종대왕탄신 620돌 숭모제전을 치렀다. 여주가 가지고온 정통성은 현대 활용할 수 있는 문화·역사 콘텐츠의 바탕이 되기도 한다. 여주시는 지난 2015년부터 ‘세종인문도시’를 표방해 세종대왕과 관련한 여러 행사와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여주를 이야기할 때 세종대왕을 빼놓을 수 없다. 세종대왕을 이야기할 때도 여주를 빼놓을 수 없다. 영릉이 여주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랜시간 세종의 정신이 여주를 기점으로 전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류진동 손의연기자

[세종 즉위 600돌_대왕의 꿈이 깨어난다] 3. 세종대왕이 여주에 잠들기까지

조선 왕릉은 지난 2009년 6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총 40기가 18개 지역에 흩어져 있다. 그중 세종대왕이 묻힌 여주 영릉(英陵)은 조선 왕릉 중에서도 대표적이다.영릉은 한국 역사에서 세종이 첫손에 꼽히는 임금인 만큼, 조선 왕의 무덤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왕릉이다. 세종대왕릉이 여주로 천장(遷葬, 무덤을 다른 곳으로 옮김)된지 549년. 세종이 여주에 잠들기까지 그 과정이 평탄하진 않았다. 조선 역사에서 왕릉이 천장하는 사례가 종종 있는데 영릉도 그렇다.■ 세종은 왜 여주에 잠들었나 세종대왕은 소헌왕후 사이에서 낳은 여덟 번째 아들인 영응대군 집에서 승하했다. 이후 미리 정해 놓은 장지에 묻혔다. 세종 28년 먼저 세상을 뜬 소헌왕후가 있는 곳이다. 본래 영릉(英陵)은 서울 대모산 자락에 있었다. 세월이 많이 지나 현재 구 영릉이 있던 자리를 정확히 파악하고 못하고 있다. 1970년대 발굴 당시 영릉과 관련한 석물들을 발견했지만 묻혀있던 자리를 찾지 못했다. 구 영릉은 세종의 부왕과 모후의 무덤인 헌릉(獻陵) 인근에 조성했다. 1445년 세종 27년에 헌릉 서편에 묘자리를 확정했다. 당시 우의정 하연, 예조판서 김종서, 우참찬 정인지 등 관리가 명나라의 풍수지리서를 참고해 산릉(국장을 하기 전에 아직 이름을 정하지 않은 새 능) 자리를 정했다. 조선시대 왕릉을 정하는 데 풍수지리가 중요한 기준이었다. 소헌왕후가 훙하고 묘자리에 대해 풍수지리가 불길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에 세종은 “선영 곁에 장사하는 것만 하겠는가”라고 강행했다. 영릉의 풍수에 대해 문종대부터 논의가 있었다. 세조대에도 영릉 개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세종대 중국 문물 수입 과정에서 풍수 서적이 많이 들어왔고 이후 연구가 활발히 진행됐다. 세조는 풍수지리를 가장 깊게 연구한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영릉(英陵)을 개장(改葬)할 것을 의논하게 하고, 신숙주(申叔舟) 등에게 명하여 경기(京畿)에 가서 땅을 가려 정하게 하였었는데…(중략) 산형도(山形圖)를 보고 이내 안효례·최호원 등을 불러 길흉(吉凶)을 변론하게 하였더니…(중략) 모두 우물우물하고 길흉(吉凶)을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므로, 명하여 의금부(義禁府)의 옥(獄)에 가두게 하고 아울러서 파직(罷職)시켰다.(세조실록 42권, 세조 13년 4월 5일) 이 기록에는 영릉 천장을 의논했으며 그 자리를 서울과 가까운 경기에 두려고 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 장지를 정하는 데 풍수를 중요시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어 예종대 신숙주, 한명회, 서거정 등이 영릉을 옮기기 위해 지리서를 참고해 자리를 논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명회가 옛 임강현 터(경기 북서부)에 능침을 쓸 만하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오랜 논의 끝인 예종 즉위년 12월 26일, 천장지는 여흥(현재 여주)으로 결정됐다. 여주의 풍수지리에 대해서는 조선 제24대 왕인 헌종대 논한 기록이 남아 있다. 산릉 도감(山陵都監) 당상인 조형과 민유중이 여러 산을 살펴보고 들어오니, 상이 희정당에서 인견하였는데, 우의정 김수흥도 입시하였다. 상이 차례로 여러 산의 우열을 하문하니, 김수흥 등이 여러 지관(地官)의 말로 대답하기를, “화접동(花蝶洞)의 형세가 꽤 좋지만 혈(穴)위에 10여 개의 옛무덤이 있으니 쓸 수 없을 듯하고, 영릉(寧陵)의 백호(白虎) 밖 첫 번째 언덕이 영릉에 비교해 낫지만 마무리되는 마당이 작으니, 모두 영릉(英陵) 안쪽 홍제동(弘濟洞)의 순수하게 좋은 곳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현종개수실록 27권, 현종 14년) ■ 천하명당에 자리잡은 영릉 영릉은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에 있다. 조선 왕릉의 공간구성에는 특징이 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는 공간인 정자각을 중심으로 세 부분이다. 재실 등이 자리하는 진입공간,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과 제례로, 수복방, 수라간이 배치된 제향공간, 언덕 위 봉분을 중심으로 곡장과 석물이 조성된 죽은 자의 공간 등이다. 영릉도 조선 왕릉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여주 경관과 영릉은 감탄이 나올 만큼 잘 어우러져 있다. 북성산이 주맥이다. 능 뒤에 솟은 칭성산은 병풍을 두른 형상 같다. 또 작은 산맥들이 왕릉을 향해 엎드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모란반개형의 명당으로 모란꽃이 반쯤 피어난 형상을 하고 있다. 이곳으로 천장해 조선왕조가 100년 더 연장됐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명당 자리로 꼽힌다. 천장과 관련해 여주에 내려오는 전설도 흥미롭다. 세종대왕이 여주에 온 필연성과 까닭을 담고 있는 이야기다. 우의정 이인손이 죽자 후손들이 좋은 자리를 고르기 위해 지관을 찾았다. 지관은 자리를 잡아주며 “어떤 일이 있어도 봉분과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그러나 자손들은 이를 잊었다. 조정에서 영릉 천장론이 대두돼 각지에서 지관을 풀었고, 한 지관이 여주 능서면을 찾았다. 갑자기 온 소나기가 멎자마자 자신이 찾던 명당을 발견했다. 앞에는 북성산이 신하가 엎드린 모습으로 있고, 작은 산들이 겹겹이 둘러있었다. 회룡고조형의 대명당이었다. 이인손의 후손은 봉분을 세운 것을 후회하며 묘를 옮기려고 땅을 파헤쳤다. 그러자 ‘이 자리에서 연을 날려 연이 떨어진 자리에 이장하라’고 적힌 비기(秘記)가 나왔다. 후손은 비기대로 했고 이인손의 묘는 능서면 신지1리에 있다. 이런 전설이 아니더라도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뿐만 아니라 효종대왕과 인선왕후, 세종의 누이인 경안공주까지 여주에 묻혀 있다. 여주가 역사적으로 좋은 기운을 가지고 있는 땅으로 인정받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류진동·손의연기자 [인터뷰] 정해득 한신대학교 교수“왕·왕비 함께 묻힌 최초의 합장릉 큰 의미” 정해득 한신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는 조선 왕릉능역 전체를 조선 왕릉으로 봐야 한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조선 왕릉제도 전반을 연구하며 제도의 발전 과정을 규명했다. 정해득 교수에게 영릉(英陵) 이야기를 들어봤다. -세종대왕릉의 의미를 이야기하려면 먼저 조선 왕릉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 세 가지 의미가 있다. 한 왕조의 왕릉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제향이 복원돼 이뤄지고 있다. 또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고 경관이 우수하다. 왕정국가에서는 전란이나 후왕조에 의해 왕릉이 많이 파괴되기 때문에 조선 왕릉처럼 남아 있는 건 드물다. 보통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려면 시신이 묻힌 공간을 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기록이 남아 있다.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어 그런 과정이 필요 없었다. 영릉도 천장 과정이나 당시 몇 사람이 동원됐는지 같은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영릉을 여주로 천장한 이유는 무엇인가. 세조는 정통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왕위에 올랐다. 정통성을 보이기 위해 어떤 형태로든 왕실 사업을 해야 했다. 자신이 풍수지리를 공부했으니 그 이야기를 거론했을 거다. 실록을 제외하고 조선 전기 서적이 없어져서 당시 여주의 풍수지리에 대해 논한 구체적인 기록을 찾기 힘들다. -여주 영릉의 특이사항은. 여주 영릉은 서울에서 가장 멀리 있다. 조선 왕릉은 관례상 서울로부터 100리 안에 두는 걸로 돼 있다. 그 기준이면 수원, 파주, 화성, 여주 등 경기도 권이다. 남한 땅에서 현재 기준으로 영월 장릉이 가장 멀지만 나중에 봉릉한 것이다. -영릉이 왜 중요한가. 최초 합장릉이다. 조선 왕릉 중에서도 영릉이 중요한 이유는 한 봉분 안에 왕과 왕비가 최초로 함께 묻혔다. 그 전까지는 봉분 하나에 왕, 다른 하나에 왕비가 있었다. 세종은 주자가례와 명나라 능묘제도를 심층적으로 연구해 조선 왕릉에 적용하고자 했다. 그래서 부부합장을 실현했다. 사람이 한시에 죽지 않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합장릉을 만드는 것이 어렵다. 이런 형태는 영릉과 함께 정조와 효의왕후가 합장된 건릉이 대표적이다. 이념 상 주자가례를 지향하지만 실질적으로 실천한 왕은 둘이 대표적이다. 손의연기자

[세종 즉위 600돌_대왕의 꿈이 깨어난다] 2. 사람에 뿌리둔 정책 펼친 세종대왕

세종대왕 즉위 600주년이다. 올해 세종대왕을 조명하는 행사와 사업이 다수 진행될 예정이다. 즉위 600주년이 아니라도 세종대왕은 가장 많이 언급되고 주목받는 역사 인물 중 한명이다. 그를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 책은 꾸준히 나오고 있다. 근래에는 위인으로서 세종을 다룬 작품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조명한 작품이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지난 2008년 방영한 KBS드라마 대왕세종은 대군 시절 ‘이도’라는 한 인물이 왕으로 어떻게 성장하는지 집중했다. 2011년 방영한 SBS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도 무겁고 진지한 위인의 모습이 아니라 고민하고 갈등하며 신하에게 욕하기도 하는 세종의 모습을 상상했다.두 작품은 세종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켜 대중의 공감과 호평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민본주의와 인문정신에 기반을 둔 세종의 다른 정책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남성 중심 유교 사회…여성을 하찮게 여기지 않은 세종 세종대왕이 펼친 ‘환과고독(鰥寡孤獨)’ 정책은 여성과 노인, 고아 등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기 위함이었다. 남성 중심의 유교 국가인 조선이었지만 세종은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살뜰히 살피고자 했다. 지금 봐도 획기적인 ‘출산휴가 제도’는 심지어 천민 계층인 여자 노비에게도 적용됐다. “옛적에 관가의 노비에 대하여 아이를 낳을 때에는 반드시 출산하고 나서 7일 이후에 복무하게 하였다. 이것은 아이를 버려두고 복무하면 어린 아이가 해롭게 될까봐 염려한 것이다. 일찍 100일간의 휴가를 더 주게 하였다. 그러나 산기에 임박하여 복무하였다가 몸이 지치면 곧 미처 집에까지 가기 전에 아이를 낳는 경우가 있다. 만일 산기에 임하여 1개월간의 복무를 면제하여 주면 어떻겠는가. 가령 그가 속인다 할지라도 1개월까지야 넘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상정소(詳定所)에 명하여 이에 대한 법을 제정하게 하라.” (조선실록, 세종실록 50권 세종 12년 10월 19일) 당시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세종은 이를 제도화했다. 남편 노비에게는 부인을 돌볼 수 있는 간호휴가 한달을 주기도 했다. 또 여성이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정책을 펼쳤다. 세종대왕의 아버지인 태종 때에도 ‘의녀제도’는 서울인 한양에만 있었다. 세종은 이 의녀제도를 전국으로 확대했다. 여성들은 병을 앓고 있어도 남자 의사에게 신체를 보이는 것을 꺼렸다. 내외하던 풍습때문이었다. 그래서 병이 악화되고 죽는 일이 잦아지자 세종은 전국 관아의 노비 중 젊고 영리한 아이들을 제생원에서 교육시켜 지방에 다시 보내도록 했다. 각별히 친했던 누나인 경안공주가 출산 중 사망하는 일이 일어나자 의관인 노중례에게 지시해 태산요록을 편찬해 보급하기도 했다. 노중례는 여러 의서를 참고해 임신과 분만, 출산 전·후, 어린이 치료와 간호 등 부녀자에게 필요한 의학 지식을 수록했다. 또 그냥 지나칠 수 있었던 어느 여자 양민 약노의 사례를 크게 받아들여 형벌에 대한 기준을 정해 제도화했다. 이 양민 약노는 주문을 외워 사람을 죽인 혐의로 투옥됐는데 살펴본 결과 고문을 이기지 못해 거짓 자백을 한 결과였다. 세종은 여노비의 사례를 가볍게 지나치지 않고 재조사를 실시해 조치했다. 여진족을 토벌한 당시에도 포로인 여진족 여성에게 의식주를 제공하고, 이들과 남자들이 다른 공간에서 지낼 수 있도록 했다. 이런 대우로 인해 주변 여진과 일본, 중국의 사람들이 조선 백성으로 살고 싶다며 집단귀화한 일도 있었다. ■ 장애인 복지에도 힘쓴 성군 조선 전기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후기에 비해 비교적 차별받지 않고 살았다. 세종 또한 당시 장애인을 위한 선진적인 정책을 시행했다. “독질(篤疾) 이 있는 사람으로서 아들 하나가 있는 사람은, 나이 비록 70세가 되지 않았더라도 또한 시정(侍丁)한 사람을 주고, 그 중에 90세 이상이 된 사람은 그 집의 부역을 면제해 주니, 그것이 양로(養老)의 의리에는 극진하지 못한 것 같다. 부모가 나이 70세 이상이 된 사람과 독질이 있는 사람은 비록 나이 70세가 차지 않더라도 시정(侍丁)한 사람을 주고, 만약 여러 아들이 먼저 죽었으면 여러 손자 가운데서 시정 한 사람을 주고…” (조선실록, 세종실록 57권, 세종 14년 8월 29일) 시정은 ‘나이 많은 어버이를 보양(補養)함으로써 국역을 면제받은 사람’이다. 세종은 장애가 있거나 병이 위독한 사람의 아들이 부모를 돌볼 수 있도록 국역을 면제해줬다. 아들이 먼저 죽으면 손자까지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범위를 넓히는 등 각 백성의 사정에 맞게 조율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최초로 시각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기술교육을 시행했다. “명과학(命課學)을 하는 장님을 나이 젊고 영리한 자 10인을 골라서 서운관(書雲觀)에 소속시키고, 훈도(訓導) 네댓 사람을 두고 사흘마다 한 번씩 모여서 그 업(業)을 익히게 하소서.”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07권, 세종 27년 3월 5일) 조선 시대 시각 장애인의 많은 수가 점술가로 일했다. 세종 때는 운을 점치는 학문에 대해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교육시켰다. 두각을 보이면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또 박연이 맹인 악사의 어려운 생활을 알리자 세종은 맹인 악사에게 일 년에 두 번 주던 돈을 네번으로 늘려 지급하기도 했다. 혼자 사는 여자 맹인(盲人) 29명이 북치며 “나라 곡식을 꿔 먹었지만 가난한 탓으로 갚지 못하니 닥나무로 만든 종이로 대신 바치겠다”고 호소하자 세종이 흔쾌히 호조에 소원을 들어주라고 명한 기록이 남아있다. ■ 민본·인문 정신 바탕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만 나라가 평안하게 된다. 내가 박덕(薄德)한 사람으로서 외람되이 생민의 주가 되었으니, 오직 이 백성을 기르고 무수(撫綬)하는 방법만이 마음속에 간절하여…” (조선실록, 세종실록 21권 세종 5년 7월 3일) 세종대왕은 ‘나라의 뿌리는 백성’이라는 말을 가장 잘 실천한 군주다. 훈민정음 창제, 측우기·해시계·농사법 보급 등 과학 기술 발전, 군사를 튼튼히 한 업적뿐만 아니라 백성의 삶을 살뜰히 챙긴 세심한 정책이 돋보인다. 세종은 여성과 장애인, 노인 등 약자를 배려하는 정책을 폈지만 매번 수월하게 진행되진 못했다. 때때로 신하들의 반발이 거센 탓이었다. 출산휴가를 시행할 당시에도 신하들은 사대부에게 없는 출산휴가를 하찮은 노비에게 주냐 반대했지만 세종은 이를 물리치며 제도화했다. 사대부에게는 부인을 보살펴 줄 가족이 있지만 노비는 그렇지 못하다는 게 이유였다. 또 시각장애인 점복사(점치는 사람)인 지화에게 종3품 벼슬을 내릴 때도 신하들의 파면 요구가 있었다. 이 또한 세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세종은 높은 위치에 있지만 낮은 곳을 바라보며 굽어 살필 줄 아는 사람이었다. 파격적인 정책은 세종의 굳은 의지가 있어 가능했다. 굳은 의지는 백성이 중심이고 사람이 먼저라는 민본·인문 정신에서 나왔다. 류진동 손의연기자 [인터뷰] 조성문 여주세종문화재단 상임이사“세종은 근본적으로 사람을 사랑한 군주”사회적 약자를 배려한 세종. 그의 정책은 당시 파격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정책 추진 과정에 대해 세종대왕을 연구해온 조성문 여주세종문화재단 상임이사에게 들어봤다.-지금 봐도 파격적인 정책들이다. 세종대왕이 사람중심 정책을 추진한 이유는. 유교를 숭상했던 국가는 기본적으로 공자나 맹자 사상을 이어받는다. 정통 유학사상을 보면 그 나라의 주인을 백성으로 본다. 세종은 누구보다 책을 많이 읽고 공부한 군주다. 그 가르침에 충실했다. 세종은 다른 군주와 다르게 굉장히 백성 친화적인 일들을 펼쳤다.백성이 튼튼해야 나라가 튼튼할 수 있다라는 생각으로 백성 사랑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전제군주 시대 민주, 평등, 국민, 개인에 대한 개념이 없던 때 근본적으로 사람차별에 대해 남다른 개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천민을 보고도 하늘 천(天)을 쓰는, 하늘이 내려준 천민이라고 정의했다. 백성이 자기와 똑같은 위치에 있는 인간, 사람이라는 것에 방점을 두고 32년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차별에 대한 생각이 다른 왕들과 다른 것 같다. 세종이 최초로 노인을 위한 양로연을 개최했다. 한양성에 80세 이상 노인을 모이라고 했다. 이때 신하들이 반대했다. 80세 이상 노인 중에서는 벼슬을 내려놓은 양반이 많은데 양반과 천민이 같은 자리에 앉아 임금의 잔칫상을 받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세종이 간단하게 이야기했다. 자신이 양로연을 베푸는 이유는 저들의 신분을 구분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이듦을 존중하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천민도 전부 참석하게 했다. -당시 반발이 있었을 텐데 세종이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던 배경은. 강한 의지도 있고 근본적으로 인간을 사랑했다. 다방면을 통해 정책을 수립했다. 옳은지 그른지를 가렸다. 집현전에서 젊은 학자들이 옛날 법 등 고전에서 근거를 찾도록 했다. 또 한시적으로 상종서를 뒀다. 중대사가 있을 때 벼슬을 그만둔 노인 등 원로들이 검토하게 하는 거다. 집현전과 상종서를 두고 현재 관리들이 하는 것을 검토하며 좋은 답안을 얻어냈다. 이때문에 권위로 신하들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자세하게 알게 했다. -이런 정책들은 백성의 삶에 어떻게 다가왔나. 세종은 의논해가며 정책을 만들었다. 공법 개혁만 봐도 세종의 정책 추진 과정을 볼 수 있다. 공법 개혁은 세종 때 시작해 성종 때 완성했다. 오랜 기간이 걸린 이유가 있다. 당시 조선 인구가 300만 명 정도인데 17만 5천 명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중 과반수가 찬성했음에도 세종은 반대하는 사람들이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누구나 소외받지 않는 정책을 펴 백성들의 삶의 질이 크게 향상됐다. 류진동, 손의연기자

[세종 즉위 600돌_대왕의 꿈이 깨어난다] 1. 프롤로그-왜 세종인가

“공을 쌓고 인(仁)을 쌓아 나라를 세우고, 덕을 닦아 후손에게 복을 내림을 깊이 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부왕(父王)이 그를 계승하여 20년을 내려오시다가, 근일에 병에 걸리시어 청정(聽政)하시기 어려우매, 이에 덕이 적은 이 몸에 명하여 대업을 이어받게 하시었습니다. 생각하옵건대, 위로는 조종(祖宗)의 유업을 계승하지 못할까, 아래로는 신민(臣民)의 기대에 맞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리하여 재삼 사양하였으나 마침내 부왕의 윤허를 받지 못하고, 이에 영락 16년 8월 초10일에 공손히 대위를 받자왔사오니, 이로써 감히 고하나이다.” (조선왕조실록 중 세종실록 1권) 600년 전 왕위에 오른 세종의 이 말을 시작으로 세종 르네상스가 펼쳐졌다. 1418년 즉위한 이후 세종이 통치한 32년 동안 조선은 정치, 경제, 군사, 문화, 과학 등 다 분야에서 발전을 이끌어냈다.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히는 훈민정음 창제를 비롯해 물시계·해시계·측우기 등 과학 기술을 발전시켰다. 이는 곧 학문 분야뿐만 아니라 농업과 의료, 교육 분야의 발전으로도 이어졌다. 이 배경에는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민본주의가 있었다. 또 사람을 중시하는 인문학이 밑바탕이 됐다. 세종의 업적은 무엇보다 세대, 지역, 이념 등으로 사분오열된 현 시대에 던지는 교훈이 크다. 그의 포용의 리더십은 현 시대는 물론 미래 세대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이 될 수 있다. 본보는 세종 즉위 600돌을 맞아 세종대왕릉이 있는 세종인문도시 여주를 찾아, 세종의 민본주의와 인문정신 등 업적을 재조명해, 급변하는 시대에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 세종대왕 여주에서 영면 경기도 여주시에 세종대왕이 잠들어 있다. 여주시 능서면에 있는 영릉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영릉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 왕릉 중 하나다. 조선 왕릉은 18개 지역에 흩어져 있고 총 40기에 달하는데 그중 여주에 있는 영릉이 대표적이다. 여주는 세종대왕의 외가다. 세종대왕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아들이다. 세종의 친모인 원경왕후 민씨는 여흥 민씨다. 여흥은 여주의 조선 초기까지의 지명이다.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여주 상류에는 여강 물줄기를 순화시켜 여주를 지켜낸 마암이라는 바위가 있다. 이 마암 굴 속에서 여흥 민씨의 시조인 민칭도가 태어났다고 한다. 원경왕후는 민칭도의 11세손 문도공 민제의 둘째딸이다. 원경왕후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여흥군은 1401년 한 단계 격을 높인 여흥부가 됐다. 어머니인 원경왕후는 조선 때 여주의 격을 높였고, 아들인 세종대왕은 여주에서 영면해 여주를 ‘세종대왕의 도시’로 만들었다 여주에 얽힌 모자의 연이 깊다. 절친했던 동기인 누나 경안공주의 묘역도 여주에 있다. 왕이 궁을 벗어나 외부로 나가기 어려웠음에도 세종이 여주를 방문한 기록이 역사적으로 세 차례 남아 있다. 세종은 강무에 참여하기 위해 여주를 방문했다. 조선 초기 강무는 군사의 조련과 사냥을 함께하는 무예연습으로 임금의 필수 업무로 꼽혔다. 태종 17년 태종과 세자, 두 대군이 여주를 찾았고 세종 1년 두 임금이 여흥 금당천 가에서 숙박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세종 3년에도 효령대군과 우의정 이원 등이 여흥 팔대숲에서 점심을 먹었다는 부분이 있다. 본래 세종의 묘는 여주가 아니라 서울에 있다. 세종과 소헌왕후 합장묘는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당시 광주)헌릉 서쪽에 쌍실로 조영됐다. 그러나 세조대 영릉의 터가 불길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후 예종때 지금의 여주 자리로 옮겨왔다. ■ 세종대왕과 인문학…사람이 중심 세종 정치의 바탕은 민본주의다. 민본은 말그대로 ‘백성이 근본’이라는 뜻이다. 사람이 중심이 되는 인문학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세종은 인문 전략을 펼친 군주였다. 칼과 활을 내세우기보다 책과 음악으로 인심을 얻었다. 복지부터 국방까지 단계별로 정책을 시행했다. 백성들의 건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질병과 의학을 최우선으로 하는 정책, 그 다음에는 나라를 안정되게 하는 국방 정책 등을 이어갔다. 신하들과 함께하는 경연(經筵)에서는 인문고전을 활용했다. 또 세종대왕은 백성에게 ‘밥이 하늘이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가장 중요한 사람의 문제를 꿰뚫는 것이었다. 백성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터전을 위해 법을 제정하고 더 나은 제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책을 통해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게 되는 길을 발견하며, 예의를 지켜 서로 겸양하는 나라가 되기를 꿈꿨다. 시간 개념을 보급하기 위한 해시계와 자격루 개발, 일상 소통과 기록을 위한 훈민정음 반포도 결과적으로 백성의 삶과 생각 수준이 향상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출발했다. 또 음악을 체계화하고, 다 분야에서 서적을 간행해 백성들이 ‘사람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했다. 삼강행실도 등을 편찬해 양보하고 존중하는 사회풍토를 만들기도 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까지 지정된 영릉이 있는 여주시는 지난 2015년부터 세종인문도시 명품 여주 기초계획 수립을 시행하고, 이어 2016년 7월 1일 세종인문도시 명품 여주 선포식을 개최했다. 영릉을 단순히 관광자원으로만 활용하는 것을 벗어나 세종의 인문정신을 문화, 교육, 도시재생 콘텐츠 등으로 활용하기 위함이다. 현재 여주는 관광, 문화예술, 교육, 교류, 농업, 도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종대왕의 인문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올해 세종 즉위 600돌을 맞아 국제학술대회와 한글디자인포럼 등 ‘세종대왕’ 콘텐츠도 확대하며 세종대왕문화제도 펼친다. 세종대왕 즉위한지 600년, 승하한지 568년이 지났다. 아직까지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과제다. 세종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가장 잘 구현한 군주로 꼽힌다. 인문학 열풍이 불 정도로 많은 사람이 현세에서 인문학을 답으로 꼽지만 구체적으로 방안을 제시하기는 어려워 한다. 이에 대한 답을 세종대왕의 민본주의와 인문정신에서 찾아야 한다. 본보는 세종대왕의 마지막 숨결이 깃든 여주를 찾아 세종을 만나 그 답을 묻고자 한다.류진동, 손의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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