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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의 길 위에서] 문화의 도시 ‘토리노

토리노는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였던 도시다. 피에몬테주의 주도인 이 도시에서 올여름의 며칠을 보냈다. 토리노에서는 매일 아침에 눈을 뜨면 중앙시장으로 향했다. 유럽에서 가장 큰 야외 시장은 채소와 과일이 신선하고 저렴했다. 살구 1㎏, 납작복숭아 1㎏, 바질 한 단, 루콜라 한 묶음, 완숙 토마토 한 개, 모차렐라치즈 250g 한 통, 계란 다섯 알을 샀는데 총 1만4천500원. 서울이라면 최소 두 배는 줘야 하는 가격이었다. 마침 부엌이 딸린 아파트에 머물고 있어 매일 장을 봐 아침을 해먹는 즐거움을 누렸다. 바게트를 길게 잘라 모차렐라치즈와 잘 익은 토마토를 썰어 넣고 바질 잎 몇 장을 올리면 이탈리아 국기 색깔의 샌드위치였다. 아침을 먹고 나면 토리노의 엄청난 문화유산을 즐길 차례였다. 프랑스의 론알프스 지역(당시 사보이 지역으로 불렸다)에서 창설된 사보이 가문은 사보이아 백국에서 시작해 공국을 거쳐 사르데냐 왕국, 통일 이탈리아 왕국까지 건설했던 가문이다. 16세기 중반 이후 토리노는 사보이아 가문의 근거지였다. 토리노 혹은 튜린으로 불리는 이 도시는 피아트, 란치아, 알파로메오 같은 이탈리아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사실 나는 음식과 와인이 맛있기로 유명하고 슬로푸드 운동이 시작된 도시라고 해서 토리노를 찾았다. 토리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왔는데 첫날, 아름다운 바로크 건축물이 늘어선 산 카를로 광장에 선 순간부터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이 도시가 왜 소문난 관광지가 아닌 걸까. 무솔리니를 기용하는 바람에 이탈리아를 세계대전에 휩쓸리게 한 데다 쫓겨나서 망명 50년 만에 귀국한 사보이아 가문의 후계자들이 하나같이 한심한 인물들이라 이 도시를 기피하는 건 아닐 테고…. 장엄한 문화유적을 지닌 이 도시는 관광객이 적은 탓인지 시민들이 친절하고 여유가 있었다. 카페 성애자인 필자가 토리노의 명성 자자한 카페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카페 알 비체린. 커피에 초콜릿과 크림을 섞은 음료 비체린을 발명한 곳인데 무려 1763년부터 영업을 해왔다. 250년 역사가 깃든 카페는 작고 소박했다. 더 마음에 드는 점은 카페를 시작한 이는 남성이었지만 대대로 여성이 운영해 왔다는 사실. 여성이 가게를 꾸리는 일이 거의 불가능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쭉 그래왔던 덕분에 갈 곳 없던 여성들이(그 시절 카페는 남성 전용 구역이었다) 이곳에서는 편안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특히 바로 맞은편에 자리한 성소 콘솔라타 덕분에 더 안전하게 느꼈다나. 여성 경영의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마지막 여주인의 가족과 오래 일한 여성 직원들이 카페를 꾸리고 있다. 비체린은 손잡이가 없는 유리잔을 뜻하는데 이 음료가 이런 잔에 담겨 나오기 때문에 붙은 이름. 권위 있(다)는 잡지 감베로 로쏘는 2001년 이곳을 ‘이탈리아 최고의 바’로 선정하기도 했다. 유서 깊은 카페에 단골이 없을 수 없다. 이곳의 단골 손님으로는 알렉상드르 뒤마, 프리드리히 니체, 푸치니(라보엠은 토리노의 극장에서 초연됐다), ‘나무 위의 남작’을 쓴 이탈로 칼비노 등이 있다. 움베르토 에코는 아예 그의 소설 ‘프라하의 공동묘지’에서 이곳을 길게 묘사했는데, 이 카페의 냅킨에 소설의 그 부분이 적혀 있다. 필자는 에코의 글이 적힌 냅킨 한 장을 곱게 접어 가방에 넣었다. 아무튼 토리노의 대표 음료인 비체린을 원조집에서 마셔봤는데(안동소주를 안동 종가댁에 가서 마신 셈이랄까) 초콜릿 음료를 좋아하지 않는 나도 한 잔은 즐겁게 마실 수 있는 맛이었다. 에스프레소 위에 핫초콜릿, 그 위에 다시 크림을 부은 칼로리 대폭발 음료.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도 이 카페는 특별한지 조용히 기념사진을 찍는 이들이 보였다. 계산서를 받아보니 비체린 한 잔의 가격은 7.9유로. 우리 돈 1만2천원에 육박했다. 계산할 때 살짝 손이 떨렸다. 토리노는 니체와도 인연이 깊은 도시다. 말년까지 니체를 괴롭힌 정신질환이 시작된 곳이 바로 이곳. 니체가 토리노에 머물던 시절, 여느 때처럼 산책을 나선 그는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서 마부에게 얻어맞고 쓰러지는 말을 보게 된다. 그는 온 몸으로 마부를 가로막으며 말을 끌어안고 울다가 혼절했다. 이 일을 계기로 니체는 정신을 놓고, 10여년 간 정신병원에서 말년을 보내다 죽음에 이른다. 니체의 이 행동을 두고 여러 해석이 있지만 누구도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한다. 광장 근처 니체가 머물던 하숙집을 찾아갔다가 피를 나눈 남자에게 니체의 집 사진을 보냈다. 니체의 일화가 등장하는 영화 ‘토리노의 말’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으면서. 그는 자타공인 문학청년에 영화광이라 분명 봤을 거라 생각했다. 곧 답이 왔다. “토리노의 말 보다가 중도 포기. 타르코프스키보다 더 큰 희생을 요구하는 영화. 말과 인간을 함께 희생시키는 영화였다”는 말에 혼자 웃었다. 토리노에는 궁전이 많다. 이탈리아가 공화국이 된 후 사보이아 왕족은 망명을 떠났는데(97년 이후 귀국이 자유로워졌다) 그들이 남긴 궁 열 네 곳이 유네스코 유산으로 지정됐고 나는 다섯 곳을 방문했다. 가장 좋았던 곳은 토리노 외곽에 자리한 베나리아 레알레 궁이었다. 이탈리아 바로크 건축의 백미로 꼽히는데 광대한 정원의 아름다움으로도 유명하다. 역사적인 장소 곳곳에 현대작가의 작품을 전시해 더욱 생기 있는 공간이 됐다. 토리노에서 마지막으로 찾아간 박물관은 몰레 안토넬리아나. 토리노시의 건축적 상징인 이 건물은 형이상학파 화가 키리코의 그림에도 몇 번이나 등장한다. 1863년 건축가 알레산드로 안토넬리가 설계한 건물의 높이는 167.5m로 당시 유럽에서 가장 높은 석조 건물이었다. 토리노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줄은 긴데 영화 박물관 줄은 짧았다. 전망대를 빼고 영화 박물관만 둘러봤다. 토리노는 1896년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영화가 상영된 도시. 영화 박물관은 생각보다 재미난 곳이었다.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분야를 세세히 구분해 전시하고 최초의 카메라 장비며 촬영도구도 있고 영화 촬영의 과학적 배경도 친절히 설명해준다. 제일 재밌는 건 실제로 영화에 사용된 소품 전시였다. 해리포터의 지팡이부터 스파이더맨의 옷, 매트릭스의 총알 같은 것들. 토리노는 3박4일이 짧게 느껴질 정도로 볼거리, 먹거리가 가득한 도시였다. 이탈리아는 몇 번을 와도 늘 새롭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다음 도시 볼로냐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김남희의 길 위에서] 천상의 화원 ‘돌로미티’서 황홀한 여름날

여름의 돌로미티는 야생화 천국이었다. 금매화, 고산양귀비, 아네모네, 뱀무, 와일드제라늄, 미나리아재비, 불가리아장구채, 범의꼬리.... 어디를 둘러봐도 황홀한 꽃길이었다. 살아가는 동안 꽃길만 걷는 행운은 찾아오지 않았지만 여름날 며칠 정도 꽃길을 걷는 운은 주어졌다. 제주도 면적의 여덟 배 크기인 돌로미티 산길의 어디에나 들꽃이 피어나지만 그중 최고는 알페디시우시. 천상의 화원이 있다면 여기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한 가지 꽃만 집중적으로 심어 재미없는 인공정원이 아니다. 해마다 다양한 꽃들이 피고 지고, 그 씨가 떨어져 다시 피어나기를 반복하며 이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풍경을 만들어 왔다. 발을 디디는 곳마다, 시선을 두는 곳마다 펼쳐지는 끝없는 꽃길을 내내 두근거리며 걷게 된다. 이탈리아 북동부의 알프스산맥인 돌로미티는 3천m급 봉우리 18개, 12개의 빙하를 비롯해 수많은 계곡과 봉우리를 품었다. 최고봉은 3천343m의 마르몰라다. 올해가 세 번째 트레킹인데 그 장엄한 아름다움에는 조금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여기가 인간계인가 신계인가 싶은 의문이 들 정도다.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돌로미티가 인기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케이블카, 곤돌라, 체어리프트 등의 다양한 운송 수단으로 고도 3천m까지 쉽게 접근이 가능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시설을 갖춘 산장이 즐비하다는 점이 아닐까. 또 우리나라 산길마다 걸려 있는 현수막이 전혀 없고 덱이나 매트를 깐 길이 없는 점도 훌륭하다. 이정표 및 울타리는 꼭 필요한 곳에만, 주변 환경을 거스르지 않는 디자인으로 만들어져 있다. 한마디로 눈에 거슬리는 풍경이 전혀 없다. 올해는 2년 전과 똑같은 시기에 왔는데 일부 구간의 풍경이 완전히 달랐다. 7월인데도 눈이 뒤덮여 있었다. 라가주오이 산장에서 팔자레고 고개까지 걸어 내려오던 길도, 사소포르도이에서 피츠보에산을 향해 걸었던 길도 깊이 쌓인 눈으로 인해 걸음이 느려졌다. 한여름에 눈길을 걷는 일은 낭만적이지만 누군가 넘어져 다치기라도 할까 봐 신경이 쓰였다. 포르도이 고개에 머물 때 숙소 주인 나디아가 말했다. “올해는 날씨가 너무 나빴어. 6월에도 큰 눈이 왔고 정말 추웠어.” 문득 2년 전 여름이 떠올랐다. 우리가 돌로미티 최고봉 마르몰라다를 바라보며 트레킹을 하던 날, 전날 비정상적인 고온으로 빙하의 거대한 부분이 떨어져 내렸다. 그 사고로 11명이 사망했다. 이제 안전한 여행의 시대는 끝났음을 실감했다. 기후위기는 여행자의 안전도 위협해 언제 어디서 홍수, 폭설, 산사태를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그렇다 해도 여행을 멈추지 못하는 나는 그저 위험을 감수하며 다니는 수밖에. 광대한 돌로미티 중에서 인기 있는 지역은 베네토주와 트렌티노알토아디제주에 속한다. 이 중 후자는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영토였다. 독일어와 이탈리아어가 같이 쓰이는 곳인데 음식과 언어를 비롯해 오스트리아 문화의 영향이 짙게 남아 있다. 1차 대전 중에는 이 지역을 놓고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가 산악부대를 결성해 격전을 치렀다. 팔자레고 고개에서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면 고도 2천752m의 라가주오이 산장. 그 주변에는 그 당시 뚫었던 3㎞ 길이의 바위 터널이 그대로 남아 있다. 돌로미티의 상징과도 같은 바위 봉우리 트레치메디라바레도 근처의 로카텔리 산장도 산악전쟁의 무대였다. 새벽에 트레치메디라바레도로 일출 산행을 했던 날, 가이드는 산길에서 1차 대전에 쓰인 무기의 파편들을 주워 보여주기도 했다. 포르도이 고개에는 8천500명의 전사 군인이 묻힌 영묘도 있다. 사소포르도이를 비롯한 웅장한 바위 산군에 둘러싸인 영묘 주변에는 솔채꽃, 톱풀, 캄파넬라 같은 들꽃들이 침묵 속에 하늘거리고 있었다. 이제 전쟁의 참화는 간 데 없고 돌로미티는 그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을 뿐이다. 이탈리아이면서 이탈리아 분위기가 아닌 이 동네에서 나는 숙소의 주인이나 택시기사에게 짓궂은 질문을 던지곤 했다.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가 축구를 하면 누굴 응원해?” 그럴 때마다 망설임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당연히 이탈리아지!” 1950년대까지는 오스트리아계에 대한 탄압과 차별도 심해 어려운 시기를 견뎌야 했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라면서. 올여름에는 3주간 돌로미티에 머물렀다. 처음에는 내가 꾸리는 트레킹 그룹 방과후 산책단과 함께, 두 번째는 나 홀로, 마지막은 가족과 함께였다. 덕분에 새로운 길 몇 곳을 걸어볼 수 있었는데 그중 소라피스 호수의 물빛을 잊을 수 없다. 소라피스는 올라가는 길이 제법 험했다. 그 대신 숲이 한쪽으로 시원하게 뚫려 있어 장엄한 바위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크리스탈로, 포페나, 트레치메디라바레도 같은 산들이었다. 벼랑 위로 난 좁은 길에 쇠줄을 잡고 건너가야 하는 구간도 있었다. 1천928m 높이까지 두 시간 반을 오르고 나니 숨어 있던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모두의 입에서 탄성이 흘렀다. 이 세상 물빛 같지 않은 청명한 에메랄드 빛이었다. 소라피스 빙하가 녹은 물이 운반해 온 미세한 암석 먼지가 만든 옥색이었다. 산책단이 돌아간 후에는 혼자서 돌로미티의 작은 마을을 찾아가 머물렀다. 오르티세이나 코르티나담페초보다 덜 알려진 브릭슨, 골포스크, 산칸디도 같은 곳이었다. 혼자 다닐 때는 발걸음이 유독 가벼웠다. 책임을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걸을 수 있어 좋았다. 나흘 후, 서울에서 동생네 가족이 날아왔다. 돌로미티의 장엄한 풍경은 사춘기를 맞아 매사에 시큰둥하던 중 3 사내아이조차 핸드폰을 들고 사진을 찍게 만들었다. 아쉽게도 이번에는 트레킹이라기보다 ‘케이블카 산책단’이었다. 트레치메디라바레도 같은 곳은 4시간을 꼬박 걸어 그 풍경을 누렸지만 다른 많은 곳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짧게 걷고 다시 케이블카로 내려오는 식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안구 정화’가 된다며 다들 만족했지만 나는 좀 애가 끓었다. 저 산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데... 그래야 저 풍경을 몸에 새길 수 있는데.... 아이들과의 여행은 그런 욕심을 내려놓아야 했다. 내가 감동한 부분에서 아이들도 감동하기를 바라는 건 터무니 없는 욕심이었다. 그저 조카들과 돌로미티에서 여름날을 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했다. 언젠가 아이들이 이곳에서 보낸 여름 휴가를 떠올리며 미소 지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김남희의 길 위에서] 지중해 도시 니스에서 ‘샤갈의 블루’에 빠져

이른 아침의 항구에는 신선한 빛이 번져 가고 있었다. 나를 이곳으로 오게 만든 빛이었다. 부드럽고 투명하면서도 농밀한 빛. 시시각각 변하는 빛을 그려내고자 했던 인상파의 성지는 태양신을 숭배하는 나에게도 성지. 성지를 순례하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문제는 신전을 찾아온 신자의 드레스 코드가 영 틀렸다는 점. 신전의 기온을 오판한 탓에 계절에도 안 맞는 옷을 입고 벌벌 떨며 다니고 있으니. 4월의 지중해는 날씨가 좋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추울 줄이야. 올리브 나무가 자라는 곳이니 서울보다는 따뜻하겠지 싶었는데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후드티에 경량 패딩, 그 위에 바람막이 잠바까지. 거기다 스카프 칭칭 두르고 후드티의 모자까지 쓰고 다니는 패션 테러리스트가 됐는데도 추웠다. 내가 소설에서만 읽으며 로맨틱하게 상상했던 그 바람, 미스트랄 때문이다. 겨울과 봄철, 프랑스 남부에서 불어 지중해 북부로 올라가는 차갑고 강한 바람. 미스트랄에게 매일 뺨을 얻어맞으며 다니느라 얼얼할 지경이다. 어찌나 차가운지 손가락이 곱을 지경이다. 어느 날 아침 기온을 찾아보니 서울은 13도, 니스는 6도였다. 프랑스 최고의 휴양지라고 원피스를 비롯한 봄옷을 챙겨온 터였다. 내가 어찌 ‘프렌치 시크 룩’을 이기겠냐마는 나름대로 각오하고 넣어온 옷들은 트렁크에서 한 번도 나오지 못했다. 그런데도 해변에는 반바지에 반팔 티 차림으로 앉아 아침부터 술을 마시는 이들이 있었다. 체스판을 두고 마주 앉은 두 청년이 와인으로 병나발을 불고 있었다. 낮술은 몰라도 아침술은 좀 그렇지 않은가 생각을 하다가 이런 바다 앞에서라면 무죄지, 아무렴 무죄고 말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을 잊게 만드는 물색이었다. 햇빛도, 물빛도 눈부시게 빛났고 발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모래는 따스했다. 미세 먼지 없는 이 깨끗한 하늘과 공기만으로 여기까지 온 보상을 받은 것 같았다. 사실 휴양지를 좋아하지 않아 니스는 기대도 없이 들른 터였다. 30년 전, 처음 유럽 여행을 할 때 니스에서 몇 시간을 보낸 후 야간 기차를 타고 다음 도시로 이동한 적이 있었다. 당연히 니스에서 뭔가를 느끼기는 힘들었다. 여기가 왜 유명한 거지? 의문을 품고 지나갔을 뿐. 이번에는 사흘을 머물렀다. 샤갈 미술관과 마티스 미술관을 보기 위해. 샤갈, 이 복 많은 남자! 피카소와 동시대 화가인데 난봉꾼에 가까웠던 피카소에 비하면 첫사랑과 결혼해 아내가 먼저 죽을 때까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한 데다 살아서 자기 이름의 미술관이 건립되는 영광도 누렸다. 그가 프랑스에 기증한 종교화를 주제로 꾸며진 니스의 샤갈 미술관. 러시아계 유대인으로 태어나 프랑스에 귀화했지만 유대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던 샤갈답게 유대인들의 성경인 구약성서의 내용이 중심이다. 별 흥미가 안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미술관을 세 번 돌았다. 과연 색채의 마술사였다. 막 노을이 진 후의 밤하늘, 여름 햇살에 반짝이는 지중해의 물빛, 새벽녘 여명이 밝아올 때의 수평선. 이 모든 색을 부드럽게 섞어 놓은 것 같은 샤갈의 블루에 흠뻑 빠진 시간이었다. 이런 명작을 ‘직관’할 수 있다니 샤갈 못지않게 나도 복 받은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반면 마티스 미술관은 작품이 거의 다 일본에 대여 중이어서 텅 비어 있었다. 미술관이 아니어도 니스는 볼 만한 곳이 꽤 있었다. 오래된 항구도, 언덕 위의 콜린성도, 지중해가 보이는 살레야 시장도 저마다 다 아름다웠다. 살레야 시장은 카트를 끌고 가 과일이며 야채를 다 담아오고 싶었다. 무슨 시장이 이렇게 예쁜가. 무슨 과일을 이렇게 예쁘게 담아 놓나. 이곳에 일주일쯤 머물면서 매일 아침 장을 보러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바람에 제동을 걸어준 건 아찔할 정도인 니스의 장바구니 물가. ‘살레야 시장이라니. 사려야 살 수가 없는 시장이네.’ 이런 농담을 혼자 중얼거렸다. 하루 종일 걷고 돌아다니느라 점심은 니스의 특산인 쏘카(병아리콩을 납작하게 부친 간식으로 담백하고 고소하다)로 대충 때울 때가 많았다. 파스타 한 개에 물 한 병만 시켜도 4만~5만원인 물가라 식당 들어가기도 무서울 정도였다. 니스에 머무는 동안 근교의 에즈(Eze)에도 다녀왔다. 에즈는 해발 427m의 중세 마을로 월트 디즈니, 비욘세,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즐겨 여름을 보내던 곳이다. 마을의 모양이 독수리 둥지 비슷하게 생겼다 해서 ‘독수리의 둥지’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오전 9시 문을 여는 ‘이국 정원’에 가기 위해 이른 아침 길을 나섰다. 다육식물로 유명한 이국 정원은 잘 꾸며 놓은 산책로 사이로 다양한 선인장과 지중해 식물이 무성했다. 어디에나 지중해의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낭만적인 정원이었다. 정원만이 아니라 에즈는 마을 자체가 아름다웠다. 미로처럼 좁은 골목에는 무화과며 올리브며 부겐빌레아가 그늘을 드리웠다. 아직 햇살은 여름의 그것처럼 잔혹하지 않았다. 석회암으로 지어진 집들은 햇볕과 세월에 잘 익어 반들반들했다. 에즈는 딱 내 취향이었다. 그렇게 마을 분위기에 취해 돌아다니다가 생수병 수십개를 이고 지고 나르는 청년들과 마주쳤다. 건장한 청년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몇 번을 쉬면서 마을 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차가 들어오지 못하는 이곳에 사는 이들은 일상적인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인구는 2천명 남짓이라는데 거주하는 사람은 점점 줄고 대부분 숙박업과 관광업에 종사한다고 했다. 에즈만이 아니라 니스는 물론이고 남프랑스의 인기 있는 마을에 사는 이들은 누구나 저마다의 불편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밀려 드는 관광객, 치솟는 물가, 청년세대를 위한 주택의 부족, 쓰레기와 소음 같은 문제들. 새삼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나는 발소리를 죽이며 마을을 벗어났다. 지나가는 이의 예의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라 여겨 ‘제로 웨이스트’ 여행자가 되고자 도시락 통이며 물통, 수저와 장바구니를 배낭에 넣어 다니지만 내가 여행자로 사는 이상 어떤 곳에서는 존재 자체가 불편한 사람일 수도 있으리라. 에즈에는 니체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가 이곳에 머물면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썼기 때문이다. 마을에는 그의 이름을 딴 산책로가 있었다. 니체의 길을 따라 바닷가까지 내려갔다. 미안함은 잠시, 나는 어느새 앙티브와 칸 같은 주변 마을을 보기 위해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는 조금 더 길게 이 도시에 머물며 이번에 놓친 것들을 찾아내겠다는 탐욕스러운 눈빛을 하고서.

[김남희의 길 위에서] 샤토라코스트에서 만난 진정한 예술

4월 말, 남프랑스의 날씨는 변덕스러웠다. 미세먼지 없는 깨끗한 공기는 한결 같았지만 가는 비가 자주 흩뿌렸다. 와이너리 샤토라코스트로 향한 그날도 날씨가 오락가락했다. 엑상프로방스에서 북쪽으로 16㎞ 떨어진 샤토라코스트는 로제 와인이 주력인 와이너리다. 이곳을 유명하게 만든 건 와인이 아니라 예술작품이다. 2001년 엑상프로방스를 즐겨 찾았던 아일랜드 출신의 건축 재벌 패디 매컬린이 1682년 세워진 오래된 와이너리를 사들였다. 와인만큼이나 예술을 사랑한다는 그는 60만평에 이르는 포도밭과 숲 곳곳에 조각작품을 하나씩 들여놓기 시작했다. 20년이 흐른 후 이곳은 이우환, 알렉산더 칼더, 숀 스컬리를 비롯한 예술가들의 45점에 이르는 조각작품과 프랭크 게리의 음악당, 안도 다다오의 아트센터와 채플, 장 누벨의 와인 저장고, 오스카 니마이어의 갤러리 등이 들어선 거대한 미술관이 됐다. 한마디로 현대미술과 건축, 와인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곳이 된 셈이다. 나도 ‘건축과 예술의 길’을 걷기 위해 찾아갔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워킹투어를 신청해 가이드와 함께 예술작품을 둘러보고 와인 시음을 하는 걸로 나들이 계획을 짰다. 프로방스 대부분의 마을처럼 이곳 역시 대중교통으로 가기는 힘들어 택시를 불렀다. 택시가 주차장에 들어선 순간 안도 다다오의 트레이드마크인 노출 콘크리트의 높고 긴 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종교적 성소로 인도하는 듯한 계단을 올라가니 리셉션과 이어진 식당이었다. 잘 구워진 도미 요리로 맛있게 점심을 먹고 가이드 투어를 시작했다. 브라질, 영국, 스페인 등에서 모인 10여명이 가이드를 따라 두 시간의 산책에 나섰다. 러시아 출신의 젊은 가이드는 제일 먼저 인공 연못 위의 거미, 루이스 부르주아의 ‘웅크린 거미’부터 설명을 시작했다. 안도 다다오의 게이트 옆에는 데미안 허스트의 브론즈로 만든 거대한 인체 상반신 조각이 서 있었다. 마침 이곳에서는 데미안 허스트의 특별전이 열리는 중이었다. 너른 포도밭 위에 놓인 우아한 곡선의 돌다리조차 래리 뉴펠드의 작품이었다. 일생을 통해 유지해야 하는 균형에 대해 이야기하는 브라질 조각가 통가의 작품은 자석 위에 관람객들이 올려놓고 간 동전으로 새로운 작품이 돼 가고 있었다. 완만한 오르막을 지나 다다른 곳은 붉은색과 흰색이 강렬한 대조를 이루는 파빌리온. 공중에 아슬아슬하게 떠 있는 것 같은 이곳은 리처드 로저스(‘더현대 서울’을 설계한 건축가)의 작품이다. 파빌리온 안에서는 살아 있는 나비의 날개를 사용해 논란을 불러일으킨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도쿄 올림픽 경기장을 설계한 구마 겐고의 조각, 안도 다다오의 예배당 등을 거쳐 다다른 곳은 브라질 건축가 오스카 니마이어가 102세에 설계한 갤러리. 부드럽게 펼쳐진 지붕의 곡선이 주변 풍경과 잘 어울렸다. 이 공간의 주인공도 데미안 허스트였다. 생존 작가 중 이 사람만큼 악평과 호평을 동시에 받는 이가 또 있을까. 그는 ‘난파선에서 나온 믿을 수 없는 보물들’이라는 소설까지 썼는데 침몰한 선박 안에서 발굴된 일관성 없는 유물에 관한 이야기다. 그 소설에 기반한 조각작품들을 전시해 놓았는데 그를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도 기발하고 엉뚱해 흥미로웠다. 가이드와 함께한 두 시간은 믿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투어가 끝난 후 혼자 포도밭 주변을 돌아다니며 투어에서 생략한 조각을 하나씩 찾아다녔다. 와인숍에서 와인을 시음하고 로제 와인 한 병을 사들고 엑상프로방스로 돌아오려니 우버가 한 대도 없었다. 이럴 때는 리셉션에 가서 택시를 불러 달라고 하면 되지만 나는 운에 맡기고 약간의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와이너리 안쪽에서 작은 차가 나오기에 손을 들어 세웠다. 아뿔싸, 운전사도 젊은 남성인데 옆자리에도 젊은 남성. 보통 이런 차는 타지 않는데 운전석에 앉은 친구의 인상이 좋은 데다 와이너리에서 나왔기에 괜찮을 것 같았다. 알고 보니 샤토라코스트에 딸린 호텔의 식당에서 일하는 친구로 이름은 모아타미. 베르베르어로 ‘주체적 인간’이라는 뜻이란다. 모로코의 사막 마을에서 태어나 두 살 때 부모님과 스페인으로 이주했고 프랑스로 일하러 온지는 4년째. 엑상프로방스로 가는 20분 동안 나는 그의 시간당 임금, 월수입, 월세, 장래 희망까지 다 알아버렸다. “샤토는 시간당 11유로(1만6천원)를 줘서 임금이 후해요. 게다가 팁도 받을 수 있고. 근데 대중교통이 없어 너무 힘들죠. 처음 여기서 일을 시작했을 때는 하루 70유로를 벌어 택시비로 40유로를 썼어요. 그것도 나쁘지 않았어요. 인생에는 그런 시기도 있는 거니까요. 넘어지면 일어나는 법을 배우게 되잖아요. 처음엔 부엌에서 일했는데 좀 힘들고 지루했어요. 지금은 홀에서 서빙을 하게 돼 너무 즐거워요. 온 세계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이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어 좋거든요. 나는 스페인어, 아랍어, 프랑스어, 베르베르어를 할 수 있으니까요. 처음에는 돈을 벌고 싶어 스페인보다 임금이 높은 프랑스로 왔어요. 근데 이렇게 사는 삶이 재미있어 다음에는 영어도 배울겸 영어권 나라에 가서 일해볼 생각이에요. 다른 세상을 보고 싶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스물한 살의 청년은 삶을 향한 열정과 세상을 향한 호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 동안 어느새 엑상프로방스에 들어섰다. “오늘 너무 고마웠어요. 덕분에 즐겁고 안전하게 잘 왔어요.” “아니, 이게 뭐라고요. 도울 수 있을 때는 당연히 도와야죠. 내가 누군가를 도우면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도울 거고, 세상은 그렇게 좋아지는 거 아닌가요? 내 전화번호 적어 놓을래요? 여기 머무는 동안 혹시나 도움이 필요하면 무슨 일이든 연락해요.” 나는 그의 전화번호를 왓츠앱에 저장하고 차에서 내렸다. 샤토라코스트를 만든 패디 매컬린은 자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이곳의 진짜 예술가는 포도 재배자입니다.” 그곳에서 하루를 보낸 나는 그 말을 살짝 바꾸고 싶었다. “이곳의 진짜 예술가는 이곳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라고. 샤토라코스트는 모아타미가 없었다 해도 아름다웠겠지만 그의 다정함으로 인해 한 사람에게 잊을 수 없는 공간으로 남게 됐다. 우리는 누구나 한 번뿐인 자신의 삶을 소재로 작품을 빚는 예술가다. 모아타미는 내게 인생이라는 작품을 빚는 훌륭한 태도를 보여줬다.

[김남희의 길 위에서] 시칠리아 소울푸드 ‘스트리트 음식’

여행 다닐 때마다 달라진 한국 음식의 인기를 실감한다. 지금은 어느 나라에서든 김밥만 말아 팔아도 먹고살 거라는 소문이 돌 정도다. 유럽은 이제 작은 도시에서도 한식당은 물론이고 ‘K-mart’나 ‘K-food’ 같은 이름의 식료품점을 종종 볼 수 있다. 서울의 거리에서 떡볶이나 어묵을 먹고 있는 외국인의 모습도 더는 낯설지 않다. 음식은 한 나라를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이기에 편견 없이 어떤 음식이든 도전하는 이들을 보면 나까지 즐거워진다. 어떤 상황에서도 숟가락의 힘에 번번이 굴복하고 마는 사람인 탓에 낯선 나라를 여행할 때면 끼니마다 설렐 수밖에 없다. 예산을 아껴 한 번쯤 괜찮은 식당에서 기념할 만한 식사를 하는 일도 좋지만 그 나라 사람들이 즐기는 길거리 음식에 도전해 보는 일도 재미있다. 피자와 파스타로 세계를 장악한 이탈리아에서도 길거리 음식이 특별했던 곳은 시칠리아였다. 제주도보다 14배 가까이 큰 시칠리아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의 배경이 된 섬이다. 그리스와 로마, 비잔틴과 아랍, 노르만과 스페인 왕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명의 세례를 받은 이종교배의 산물이 시칠리아다. 이탈리아인데 이탈리아가 아닌 듯한 다층적인 문화야말로 시칠리아가 지닌 가장 큰 매력이다. 시칠리아의 ‘모든 것들은 마치 인간의 눈과 정신, 상상력을 유혹하려고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는 모파상의 찬사대로였다. 시칠리아에서는 흐르는 시간의 매분 매초가 아까웠다. 아침잠 많은 필자가 7시면 숙소를 나서서 오후 10시가 돼서야 돌아오곤 했다. 에트나 화산의 연기가 어디서나 눈에 들어오던 타오르미나, 고대 그리스 시대에 세워진 원형극장으로 유명한 시라쿠사, 아그리젠토에 남아있는 그리스 신전,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된 아랍-노르만 양식의 몬레알레 대성당, 17세기 말 대지진 후에 다시 지어진 바로크 타운들.... 눈을 두는 모든 곳이 경이로웠지만 오감을 자극하는 시칠리아 요리야말로 나를 사로잡았다. 이탈리아에서도 시칠리아는 ‘신의 부엌’이라 불린다. 속이 붉은 오렌지와 레몬, 올리브와 토마토, 신선한 해산물로 유명할 뿐더러 과일에 설탕이나 와인을 넣어 얼린 그라니타와 계피 과자 안에 크림치즈를 넣은 카놀리, 라구 소스 같은 다양한 재료를 넣고 튀긴 밥 아란치니가 시칠리아에서 태어났다. 특히 아랍인의 영향으로 시칠리아의 음식은 이탈리아 본토와는 다른 음식으로 재탄생했다. 시칠리아의 주도인 팔레르모에는 “길거리 음식 투어(Street Food Tour)’가 있었다. 재미있을 거라는 예감에 얼른 신청했다. 봄날 아침, 팔레르모의 대극장 앞에서 8명의 외국인과 현지인 가이드가 만났다. 가이드 나디아는 큰 목소리와 활발한 몸짓에 이탈리아인다운 열정이 배어 있다. 나디아는 눈앞의 거대한 극장 마시모 테아트로를 가리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피아가 시칠리아를 지배하던 1970~90년대 초반까지 마피아의 문화 말살 정책으로 극장은 내내 문을 닫았다. 그러던 어느 밤, 예고도 없이 극장의 문이 열렸다. 마피아들이 영화 ‘대부 3’을 단체 관람하기 위해서였단다. 마피아는 19세기부터 20세기 말까지 시칠리아인들의 삶에 고통스러운 기억을 문신처럼 새겨 놓았다. 팔레르모 공항의 이름이 마피아와의 전쟁을 벌이다 사망한 두 판사의 이름을 딴 것처럼 시칠리아에는 마피아의 어두운 그림자가 여전히 배어 있다. 마피아의 긍정적인 공이 하나 있다면 디저트 카놀리를 세계에 알린 점이 아닐까. 영화 ‘대부’에서 마피아 조직원은 살인 직후 부하에게 이렇게 말한다. “총은 버리고 카놀리나 챙겨!” 카놀리는 ‘대부 3’에서도 독이 든 디저트로 재등장했다. 시칠리아의 부엌이라 불리는 카포 시장에서 본격적인 음식 투어를 시작하기 전 나디아가 종이를 한 장씩 나눠줬다. ‘음식 여권’이었다. 여권에는 다양한 길거리 음식이 그려져 있는데 한 가지씩 먹을 때마다 도장을 찍어줬다. 첫 음식은 팔레르모에 살던 아랍인들이 만든 아란치니. 쌀과 치즈, 소고기를 주재료로 튀긴 주먹밥이다. 오렌지 아란치나와 비슷한 색깔이라 아란치니라는 이름이 붙었다. 갓 튀긴 오렌지색의 아란치니는 그야말로 ‘겉바속촉’이었다. 고기와 밥, 치즈가 놀랄 만큼 잘 어울리고 간이 딱 맞았다. 아란치니에 이어 파넬레와 카칠리가 나왔다. 파넬레는 병아리콩 가루와 파슬리를 물과 함께 반죽해 페이스트를 만든 후 납작하게 튀긴 것. 카칠리는 민트와 감자로 만든 크로켓. 카초(고환)에서 이름을 따왔는데 그 모양이 닮아서란다. 파넬레와 카칠리는 소금과 후추를 뿌려 먹거나 빵 사이에 끼워 먹는다. 고소하면서도 담백한 맛에 자꾸 손이 갔다. 스트리트푸드 투어의 시험대는 내장 버거 파니카메우사. 소의 허파와 비장이 주재료인 내장 버거는 거무스름한 비주얼부터 만만찮았다. 이 음식은 팔레르모 유대인들의 발명품. 장사 수완이 뛰어난 이들답게 자신들은 먹지도 않는 내장을 햄버거로 만들어 팔았다. “길거리 음식은 가난한 서민의 음식이라 극단적인 것들이 있어요. 원하지 않는다면 안 먹어도 돼요”라는 나디아의 말에 여덟 명 중 네 명이 포기했다. 나는 일행의 버거를 딱 한 입만 맛보는 용기를 발휘했다. 한 입으로 충분한 맛이었다. 입안에 남은 텁텁한 맛과 강한 냄새를 씻어내자며 찾아간 곳은 시장 부근의 오래된 선술집 타베르나. 로컬 와인을 파는 이곳에서 가장 인기 있는 술은 주정강화 와인 마르살라였다. 이 동네 남자들은 저렴하고 도수 높은 이 와인을 선 채 마신 후 나가곤 했다. 나디아가 준비해온 음식을 펼쳤다. 마르살라와 함께 스키티키오를 즐길 차례였다. 가볍게 집어먹을 수 있는 것들로 차린 일종의 피크닉 음식이다. 올리브와 치즈, 몬레알레의 빵, 매콤하게 절인 선드라이드토마토. 거칠고 딱딱하면서도 구수한 빵 몬레알레와 말린 토마토, 양젖 치즈가 놀랄 만큼 잘 어울렸다. 스트리트푸드 투어의 마지막 순서는 카놀리. 바삭하게 튀긴 계피향 나는 과자 안에 크림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리코타치즈를 채운 카놀리를 마지막으로 내 음식 여권에 모든 도장이 찍혔다. ‘미션 클리어’가 된 셈이었다. 다음날 아침 혼자 팔레르모의 어시장을 찾아갔다. 새벽 바다에서 갓 잡은 해산물을 가판에 쌓아놓고 나이 든 어부들이 큰 목소리로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삶의 활기가 펄펄 뛰는 시장 근처 식당에 앉아 아란치니를 주문했다. 수많은 침략과 마피아의 폭압에도 끝끝내 살아남은 시칠리아의 사람들처럼 나도 남은 날을 살아낼 차례였다.

[김남희의 길 위에서] 파타고니아의 매력에 푹 빠진 이유

누구에게나 마음에 품은 공간 하나는 있을 것이다. 그 땅에 닿기도 전에 영혼을 사로잡히고, 그 땅에서 돌아온 후에는 지우지 못하는 생채기처럼 그리움이 남는 곳. 내게는 지구 반대편의 멀고도 먼 땅 파타고니아가 그런 곳이다. 구글 검색을 하면 아웃도어 브랜드 이름이 먼저 뜨는 곳이지만 사실 그 브랜드의 창업자도 젊은 시절 파타고니아의 거벽을 오르내리며 그 땅과 사랑에 빠졌다. 한반도의 5배 크기인 파타고니아는 아르헨티나와 칠레 두 나라에 걸쳐 있다. 안데스 산맥, 고원과 평원, 무수한 빙하와 피오르 해안을 품었고 서쪽으로는 태평양, 동쪽으로는 대서양을 마주한다. 그 옛날 마젤란 원정대가 이곳을 찾아왔을 때 평균 신장이 180㎝에 이르는 원주민 테우엘체족을 보고 거인(patagon)의 땅이라고 부른 데서 이름이 시작됐다. 사실 파타고니아라는 명칭에는 명확한 지리적 경계가 없다. 아메리카 대륙 남위 40도 부근을 흐르는 콜로라도강과 네그로강 이남 지역을 말할 뿐. 그 이름이 내 인생에 처음 등장한 건 30대 중반일 때였다. 칠레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의 책 ‘파타고니아 특급열차’와 ‘지구 끝의 사람들’ 덕분이었다. 이 분야 고전으로 꼽히는 브루스 채트윈의 ‘파타고니아’는 내게 별 감흥을 일으키지 않았는데 칠레의 작가가 쓴 책에는 그 땅에 대한 애정과 깊은 이해가 살아있어 나를 흔들었다. 언젠가 그 땅에 가리라. 가서 그 땅의 바람과 햇살을 내 몸에 새기리라. 그런 다짐을 품고 있다가 40대 초반이 돼서야 파타고니아에 다다랐다. 도착하는 것만으로 이미 다 이룬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머나먼 땅이었다. 텐트와 식량을 이고 지고 다니며 혼자 캠핑을 했던 그 석 달은 내가 가장 멀리까지 나아갔던 시간이었다. 거대한 자연 앞에 단독자로 단단하게 선 듯한 기분이 들던 날들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과 모든 것을 날릴 듯 불어오는 바람 -실제로 토레스델파이네 국립공원에서 서양 남성이 날아가 다리가 부러지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하루에 사계절을 다 맛볼 수 있는 변덕스러운 날씨-파타고니아의 날씨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잠시만 기다리면 된다. 금세 다른 날씨를 보여줄 테니-. 인터넷이 터지지 않는 환경이 주는 막막한 고립감. 내가 살던 세계에서 이토록 멀리 떨어진 곳에 혼자 서 있다는 자유로움과 달콤한 고독. 그 땅의 모든 것이 기쁘게 내 영혼에 스며들었다. 올해 1월, 함께 여행하는 그룹인 방과후 산책단과 함께 세 번째로 찾은 파타고니아는 여전히 나를 뒤흔들었다. 그 땅의 날씨처럼 예측할 수 없는 정치적 상황이 나를 후려쳤다. 원래도 치안이 불안정한 대륙으로 손꼽히는 곳이 남미다. 수많은 사건 사고를 감당해야 하는 곳이다. 작년에는 페루의 시위로 국경과 공항이 막히는 바람에 일정과 루트를 현지에서 급히 변경해야 했다. 올해는 볼리비아가 시작이었다. 관광비자를 받는 일이 그토록 힘겨울 줄이야. 하루이틀 비자를 발급하다가 인지 소진으로 업무 중단. 인지가 올 때까지 보름 남짓 대기. 발급 업무가 재개되면 이틀 만에 또 소진. 다시 대기. 결국 출국 일주일 전에 오전 5시부터 줄을 선 후에야 겨우 비자를 발급받았다. 달러가 부족한 나라라 비자로 달러 장사를 한다는 말이 돌았다(서울에서 받는 비자는 30달러, 현지 도착 비자는 120달러였다). 무사히 남미에 들어섰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아르헨티나 사태가 터졌다. 지난해 11월 당선된 새 대통령이 페소화 가치를 54% 평가절하하면서 호텔비, 투어비, 식사비 모든 가격이 두 배 가까이 올랐다. 미리 해놓은 예약도 아무 소용이 없는 혼돈의 도가니였다. 가치가 떨어진 돈다발 무게에 휘청이면서 예정에도 없던 긴축 재정을 펴며 다녀야 했다. 치안은 불안정하고, 시차는 정반대고, 멀기는 너무나 먼 남미 대륙. 그런데도 나는 왜 계속 남미로 향하게 되는 걸까. 모든 계획을 무효로 만드는 예측 불가능성이 어쩌면 이곳의 매력일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더해 한 번 보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인간이 함부로 손대지 못한 장엄한 자연. 통제불능의 냉혹한 자연이 남아있는 이곳에서는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 특히 파타고니아의 주인이라고도 할 만한 거센 바람이 불어올 때면 더욱 인간의 나약함을 깨닫게 된다. 파타고니아는 나를 한없이 겸손하게 만드는 땅이다. 우리의 파타고니아 트레킹은 세 곳에서 보름 동안 진행됐다. 칠레의 토레스델파이네, 아르헨티나의 엘찰텐과 우수아이아. 토레스델파이네의 W 트레킹은 4박5일간 배낭을 메고 산장이나 텐트에 머물면서 걷는다. 그레이 빙하의 푸른 빛도, 프란세스 계곡에서 바라보는 바위 봉우리의 장엄함도 여전했다. 마지막 날에는 일출을 보기 위해 오전 3시 산장을 출발해 라스토레스 전망대로 향했다. 서로의 발자국 소리만이 사위를 채우는 길을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해 걸었다. 추위와 바람에 덜덜 떨며 해가 뜨기를 기다리던 어느 순간, 모두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태양빛을 받은 거대한 바위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새삼 이 행성에 인간으로 태어난 행운에 감사했다. 토레스델파이네가 장엄하다면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의 대표선수 격인 엘찰텐은 화려하다. 여기선 숙소에 짐을 두고 매일 다른 길을 걸을 수 있어 부담도 적다. 이곳 트레킹의 백미는 라구나데로스트레스 트레킹. 왕복 8시간이 걸리는 이 길의 끝에는 세 개의 호수 너머 3천m급 바위 봉우리 엘찰텐이 고생을 보상하듯 기다리고 있다.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의 또 다른 대표선수는 페리토모레노 빙하. 남극과 북극을 제외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빙하 중 가장 아름답다고 꼽는 빙하다. 아이젠을 차고 빙하 위를 걸으며 얼음의 성벽을 몸으로 껴안아 본 후에는 지구 최남단 도시 우수아이아로 향했다. 남극까지 1천㎞면 다다르는 곳이라 지구 끝까지 내려왔다는 어떤 우수 어린 감상에 젖게 되는 곳이다. 우수아이아 국립공원과 에스메랄다 호수를 걷고 난 후에는 배에 올랐다. 비글해협 투어를 하며 펭귄 무리와 보리고래들, 바다사자 떼와 가마우지를 만났다. 이 모든 트레킹을 하는 내내 자신의 페이스를 포기하고 후미를 챙겨준 분이 있었다. 꽃보다 사람이라고 했나. 혼자 하는 트레킹이 어딘가 비장하고 외로운 대신 세심히 풍경을 담을 수 있었다면 여럿이 함께 걷는 길은 유쾌하고 든든했다. 세상은 점점 살기 어려워지고 지구의 환경은 날로 망가져 가는데 여행을 하며 밥을 버는 일의 모순도 점점 나를 짓누른다. 토레스델파이네의 계곡이, 비글해협의 펭귄과 고래들이, 페리토모레노 빙하가 조금이라도 오래 남아 있으려면 내 발걸음이 멎어야 하니. ‘제로 웨이스트’ 여행자가 되기 위해 애쓰는 것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다음 여행지의 항공권을 검색하고 있는 나란 존재는 얼마나 이기적인가.

[김남희의 길 위에서] 편안한 웃음 담은 친절의 도시 ‘타이베이’

지난해 12월에는 타이베이에 다녀왔다. 다 간다는 지우편에도 안 가고, 다 본다는 101타워의 야경도 안 보고, 다 먹는다던 우육면도 한 그릇 안 먹었지만 나는 열흘의 여행으로 대만을 사랑하게 됐다. 도착한 날 저녁, 공항에서 시내의 숙소까지 가는 동안 트렁크를 끌고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할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가 가까이에 있어 이동이 쉬웠다. 이 도시에서는 장애인의 일상이 덜 고단하겠구나 싶었다. 다음 날 시내를 걸어 다니는데 모든 횡단보도의 보행 신호등이 길었다. 건너야 할 보도가 좀 길다 싶으면 70초, 짧으면 30~40초. 노약자도, 장애인도, 어린이도 신호가 바뀔까 종종거리며 애쓰지 않아도 되는 충분한 신호였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느껴지는 도시였다. 수출 규모로는 세계 15위, 국가경쟁력으로는 세계 7위인 대만인데 고층 빌딩 사이로 옛 건물이 종종 보이는 점도, 거리에 우람한 나무가 많은 점도 마음을 끌었다. 이 나라 사람들이 용수라 부르는 대만고무나무(반얀 트리라고도 불리는)의 근사한 위용을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저 고목들을 개발의 이름으로 잘라내지 않고 보호해 왔다는 것만으로 호감도가 상승했다. 겨울의 타이베이는 서울의 혹독한 기후를 피해 ‘피한’을 가기에 좋은 곳이었다. 12월 중순 타이베이는 낮 기온이 15~25도.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고 습도도 적당해 돌아다니기에 좋았다. 가는 비가 자주 흩뿌렸지만 타이중이나 타이난 같은 남쪽으로 내려가면 쾌청하다고 했다. 물가가 싸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큰돈 들이지 않고 지내는 일도 가능했다. 우선은 교통비가 저렴했다. 버스비나 지하철비가 600~700원. 길거리 음식의 천국이라 야시장이나 소박한 식당에서는 몇 천원에도 맛있는 식사가 가능했다. 타이베이 시민들은 친절했다. 억지로 만든 과한 친절이 아닌, 몸에 익은 자연스러운 배려와 담백한 친절이라 편안했다. 이야기를 나눌 때면 몸짓이 요란하지 않고 목소리도 높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대만 사람들은 모여 있어도 시끄럽지 않았다. 같은 푸퉁화(普通話)를 쓰는데도 방해가 될 정도로 떠드는 사람들이 없었다. 다들 매너가 좋아 어디에서도 불쾌한 경험을 하지 못했다. 처음 온 낯선 도시인데 여유로운 시민들의 태도 덕분에 나도 긴장이 풀렸다. 타이베이에서는 지인 S의 신세를 졌다. 그녀가 친구들과 차 마시는 공간으로 마련한 집에 짐을 풀었다. 대만국립사범대학 근처라 도보 5분 거리에 괜찮은 카페가 많았다. 나도 매일 오전에는 카페에 나가 원고를 쓰고 오후에는 타이베이 구경을 다니는 식으로 열흘을 보냈다. 틈틈이 S를 만나 밥을 함께 먹었다. 그녀가 데려가는 식당은 현지인들이 주로 찾는 식당이었다. 황금조개로 육수를 내는 샤부샤부 집, 뜨거운 콩국과 곁들여 먹는 계란전이 맛있는 시먼딩의 노포, 구팅 역 근처의 늘 손님이 가득한 채식 식당 등. 오래 한자리를 지켜온 작은 식당들이었다. 지도도, 가이드북도 없이 느긋하게 산책하기를 좋아하는 내게 타이베이 시내는 즐거운 곳이었다. 초고층 빌딩이 즐비한 시내에서도 한 블록만 걸어가면 나지막한 옛 건물이 나타났다. 도심 곳곳에 녹음이 우거진 공원이 있어 숨을 돌리기에도 좋았다. 내가 제일 좋아한 공원은 다안 삼림공원이었는데 딘타이펑에서 딤섬을 먹고 소화를 시키며 산책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대만은 우리보다 긴 50년의 일본 식민 지배를 받았는데도 격렬한 반일 감정이 별로 없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오래된 일본식 건물들이 고스란히 남아 운치 있는 식당이나 카페, 갤러리가 돼 있었다. 옛 공장을 개조한 복합문화공간도 많았는데 대표적인 곳이 송산 문화창의공원과 화산 1914 창의문화원구. 담배 공장을 개조한 송산 문화창의공원은 주변에 넓은 연못과 공원이 있어 가족과 함께 나들이 온 이가 많았다. 양조장이었다가 복합문화공간이 된 화산 1914 창의문화원구는 좀 더 아기자기하고 볼거리가 많았다. 영화관과 갤러리, 카페와 식당, 수공예품이나 예술 작품을 파는 가게들이 울창한 나무들 사이에 들어서 있었다. 마침 그 안의 꽃집에서 크리스마스 장식품 만들기 수업 공지가 붙어 있는 걸 보고 나도 참여했다. 타이베이 사람들 틈에서 프리저브드 플라워로 트리 모양의 장식품을 만들었는데 여행의 훌륭한 기념품이 됐다. 송산 문화창의공원도, 화산 1914도, 대만의 유명한 위스키 공장도 건물 자체에 격조가 있었다. 공장 건축물 경연대회라도 하는지 어떻게 공장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 걸까. 영화 ‘헤어질 결심’에도 등장하고 BTS의 멤버 누가 좋아한다는 카발란 위스키의 본고장이 타이베이에서 한 시간 거리인 이란에 있었다. 이미 어두워진 후에야 카발란 공장에 들어섰는데 건물의 자태가 심상치 않았다. 구리를 입힌 거대한 증류기가 늘어선 공장은 공상과학영화의 배경 같기도 했다. 이토록 근사한 공장에서 빈손으로 나간다는 건 무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결국 이 공장에서만 구매가 가능하다는 핑크빛 라벨이 붙은 위스키 한 병을 사고 말았다. 타이베이에서는 거리를 걷다 보면 사원이나 절이 자주 보였다. 불교, 도교, 유교, 민간신앙이 섞인 대만만의 독특한 사원에서 오가던 시민들이 향을 피우고 복을 비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건강에 어찌나 신경을 쓰는지 대화 속에서 본초강목이 튀어나오는 점도, 어디를 가나 온수를 내어 주는 모습도, 체온을 높이는 데 좋다고 알려진 약재가 온갖 형태의 먹거리로 만들어진 점도 재미있었다. 타이베이에서 내가 가장 좋아한 거리는 큰 재래시장이었다는 오래된 옛 골목과 상점이 늘어선 디화제. 100년 된 나지막한 건물에 깃든 상점에서 약재와 건어물, 말린 과일 같은, 100년 전에도 팔았을 상품들을 여전히 팔고 있었다. 영험한 월하노인이 연을 찾아준다는 하해성황묘에는 여행자들이 모여 향을 사르고 있었다. 저녁 무렵 디화제를 찾아가면 붉은 등이 켜진 상점들 사이로 퇴근을 서두르는 이들이 지나갔다. 종로의 피맛골도, 을지로의 골목도 다 사라져 버리고 오직 개발이라는 이름의 폭력만이 승자가 되는 서울의 도심이 생각나 부러움이 밀려 들었다. 옛것이 함부로 밀려나지 않고, 자연이 마구잡이로 파헤쳐지지 않는 이 나라는 작지만 큰 나라였다.

[김남희의 길 위에서] 알바니아, 범죄국가 편견 깨다

지난 10월, 2주간 알바니아를 여행했다. 알바니아에 간다고 하니 같은 질문을 반복적으로 들어야 했다. 왜 알바니아야? 알바니아에 뭐가 있어? 나 또한 알바니아에 대한 지식은 전무했다. 알바니아에 대해 알고 있는 거라곤 마더 테레사의 국적을 두고 알바니아와 북마케도니아가 서로 자국이라며 우긴다는 사실 정도였다. 사실 마더 테레사의 국적을 정확히 따진다면 ‘지금은 북마케도니아의 영토가 됐지만 오스만 제국의 변방이었던 곳에서 태어나 알바니아계 부모님 밑에서 자란 수녀’란다. 여행지로 알바니아를 선택한 이유를 굳이 꼽는다면 오래전에 봤던 영화 ‘테이큰’ 덕분이다. 영화에서 알바니아가 잔악무도한 범죄집단으로 그려지는 걸 보며 언젠가 알바니아를 여행하며 직접 사람들을 만나보겠다고 다짐했으니.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찾아간 알바니아는 여러 면에서 내 마음을 흔들었다. 우선 10월 중순인데도 25도를 넘나드는 온화한 날씨에 반했다. 하긴 아드리아해, 이오니아해, 에게해를 접한 나라니 유럽의 남쪽으로 꽤 내려온 셈이었다. 또 물가가 저렴하고 마주치는 사람들이 친절했다. 몸과 마음을 두루 편하게 만드는 도시였다. 심하게 무지한 상태였기에 티라나에서는 알바니아의 현대사를 배울 수 있는 곳을 주로 찾아다녔다. ‘벙크 아트 2’와 ‘나뭇잎의 집 박물관’ 같은 곳이었다. 40년 이상 알바니아를 통치했던 독재자 엔베르 호자의 공산주의 시절, 적대세력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감시와 도청, 불법 체포와 고문, 재판 없는 사형 등이 행해졌던 곳을 박물관으로 만들어 가혹한 과거를 기억할 수 있게 해놨다. 심지어 독재정권에서 비밀경찰로 일했던 이들의 이름과 직책, 얼굴 사진까지도 전시하고 있었다.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과거의 고통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존경스러웠다. 알바니아의 남쪽으로 내려가기 전에 들른 두 개의 도시는 내가 멋대로 ‘트윈 시티’라고 이름을 붙였다. 베라트와 지로카스터르. 닮은 듯 서로 다른 도시였다. 독특한 건축물로 두 곳 모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이다. 베라트는 집집마다 찍어낸 듯 네모난 창이 독특해 ‘천 개의 창을 가진 도시’로 불린다. 기독교 도시로 시작해 유대인 공동체도 거주했고 그 후 무슬림 다수가 된 도시다. 베라트에서는 꽤 오랫동안 기독교도, 유대인, 무슬림이 사이좋게 공존해 왔다. 나치의 기세가 서슬 퍼렇던 시절에는 무슬림과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집과 지하실에 유대인들을 숨겨줬다고 한다. 1944년 이 도시에서 알바니아 민족협의회가 열리고 엔베르 호자가 총리가 됐다. 그 후 도시의 운명은 달라졌다. 1950년대부터 이 마을은 공공의 적으로 간주된 이들의 유배지가 됐으니 말이다. 노벨상 후보에 오른 알바니아의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도 이곳에서 2년간 유배 생활을 했다. 허가 없이는 마을 밖으로 절대 나갈 수 없는 정치범 수용소였다고 한다. 지로카스터르는 지붕을 덮은 납작한 회색 돌 때문에 ‘돌의 도시’로 불리는데 서로 적대적이었던 두 인물이 태어난 곳이다. 회칠을 하고 돌로 지붕을 인 전통 가옥에서 독재자 엔베르 호자가 태어났고 28년 후 걸어서 4분 거리의 골목에서 ‘죽은 군대의 장군’을 쓴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가 태어났다. 호자는 자기가 나고 자란 이 도시를 ‘박물관 도시’라는 이름을 선포해 도시의 지위를 격상시켰다. 그래서일까. 이 도시는 공산주의가 무너진 후 알바니아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호자의 동상이 철거됐다. 카다레는 평생 전체주의를 비판하고 조국 알바니아의 암울한 현실을 소설로 그려내 세계적 작가가 된 인물이다. 그야말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는 호자의 집을 볼 때마다 소설의 줄거리가 하나씩 태어났을지도 모르겠다. 지로카스터르 요새에 올라 도시를 내려다보는 순간, 탄성이 터졌다. 뭐 이렇게 예쁜 도시가 있담. 마음에 쏙 드는 도시였다. 작은 마을이어서 어디든 걸어 다닐 수 있는 점도 좋았다. 골목마다 테이블이 놓인 카페와 식당이 이어졌다. 소박하면서도 아기자기한 맛이 가득했다. 엔베르 호자의 생가는 민속박물관이 됐는데, 호자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고 깔끔하게 복원한 옛 주택이었다.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들어선 이후 10% 넘는 극심한 실업률과 30%에 가까운 빈곤율로 인해 알바니아 사람들 사이에는 공산주의 시절에 대한 향수가 되살아나고 있다고 했다. 적어도 그 시절에는 교육과 의료, 주택이 무상으로 제공됐고 여성의 지위도 높았다면서. 이런 현상에 대해 이스마엘 카다레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공산주의 시절의 극단적인 폐쇄 정책과 어려운 경제는 사람들에겐 재앙이었지만 자연에는 축복이었던 걸까. 알바니아에는 놀랍도록 깨끗한 자연이 살아있었다. 티라나를 벗어나 북쪽으로 올라가면 푸른 산이, 남쪽으로 내려가면 맑은 바다가 기다리고 있다. 먼저 북부의 프로클레티예 산맥으로 올라가 알바니아의 아름다운 가을 산을 누렸다. 산이 얼마나 험했으면 이름이 ‘저주받은 산’일까. 그 험한 산을 비바람 부는 날 넘느라 고생도 좀 했지만 완벽한 날씨가 이어져 보상을 받은 것 같았다. 산에서는 단풍이 한창인 늦가을 분위기를 누리다가 바닷가로 내려오니 여름의 끝으로 되돌아온 것 같았다. 사란더에서 머문 숙소는 방 다섯 개짜리 작은 호텔인데, 두 아들을 그리스와 두바이로 유학 보낸 부부가 직원도 없이 꾸려 가고 있었다. 구글 리뷰가 좋은 숙소였는데 방에서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고 방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디저트까지 안주인 마리아가 직접 만들어 차려주는 아침 식사도 훌륭했다. 숙소의 식당에서 바로 해변이 이어져 저녁 노을을 보며 앉아 있거나 해 질 무렵 해변을 산책하기에도 좋았다. 다만 그 아름다운 해변 대부분이 ‘프라이빗 비치’여서 감동을 반감시켰다.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 중 하나가 해변이 누군가의 사적인 소유가 되는 일이다. 알바니아의 해변은 호텔과 카페와 식당이 전부 차지하고 있었다. 땅 따먹기라도 하듯 모래사장 위로 펜스를 쌓아 올린 풍경이 서글펐다. 공산주의 시절에는 적어도 이런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모습은 더 나은 알바니아로 향하는 과도기의 부작용이기를 바랄 뿐. 언젠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된다면 모든 선과 경계가 사라진 해변에서 모두가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풍경과 마주치게 되기를 바라며 알바니아를 떠났다.

[김남희의 길 위에서] 루마니아 곰을 찾아서

지난달에는 방과후 산책단과 함께 보름간 루마니아에 다녀왔다. 루마니아는 우리에게 낯선 나라다. 드라큘라 백작 정도가 떠오를 뿐이다. 나이가 좀 있는 사람이라면 기계체조 선수 코마네치, 축구팬이라면 ‘발칸의 마라도나’로 불렸던 게오르그 하지 정도가 더해질까. 나 역시 아무것도 모른 채 지난해 처음 루마니아를 찾았다. 루마니아는 빼어난 자연과 잘 보존된 전통문화로 나를 사로잡았다. 목조 교회나 채색 수도원, 산간 마을의 전통문화 못지 않게 루마니아의 자연이 준 감동도 컸다. 루마니아는 유럽 최대의 원시림을 보유한 나라이자 갈색곰과 늑대의 최대 서식지다. 그래서 산책단 프로그램에도 두 번의 트레킹과 곰 투어를 넣었다. 우리는 브라쇼브 외곽의 피아트라 크라이울루이 국립공원 근처로 향했다. 이번 루마니아 산책단의 하이라이트는 ‘곰을 찾아 떠난 하루’. 작년에 이 투어를 하면서 받았던 감동을 전하고 싶었다. 보통은 브라쇼브의 곰 구조 센터를 찾아가 야생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태가 돼 센터에 머무는 곰을 만나지만 우리는 야생의 건강한 곰을 만나겠다며 사전 허가를 받아야 들어갈 수 있는 숲을 찾아갔다. 이 지역의 전설이 된 가이드 단과 함께. 알루미늄 공장에서 일하던 어느날, 단은 마을 게시판에 나붙은 공지를 보게 된다. 시라소니 연구를 위해 이 마을에 찾아온 독일 학자들이 통역 겸 가이드를 구하고 있었다. 그들은 영어가 가능하고 주변 숲의 생태계를 잘 아는 지역 토박이가 필요했는데 단이 적임자였다. 그는 독학으로 익힌 영어가 훌륭했고 이곳 국립공원에 자리한 마을에서 나고 자란 어머니 덕분에 어려서부터 숲을 돌아다니며 주변 식물에 대해 다양한 지식을 쌓아온 터였다. 그는 시라소니 연구팀과 3년을 일하면서 생태계와 야생동물에 대한 지식을 쌓아 갔다. 거기에 더해 2년 간 와일드라이프 가이드 자격증과정을 마쳤다. 마을에서 13명이 함께 공부했지만 직업적으로 야생 탐사 가이드가 된 건 단이 유일하다. 단은 루마니아 최고의 가이드로 뽑히기도 했는데 그의 딸 다나도 가이드의 길을 가고 있다. 작년에는 그의 일정이 맞지 않아 딸 다나와 함께 이 투어를 했는데 올해는 그와 함께하게 돼 기대가 더 커졌다. 공산주의 시절 루마니아에는 COTA라고 불리는 야생 곰 개체수 조절 프로그램이 있었다. 국가가 관리하는 모든 숲과 산을 1만3천㏊ 규모로 나눠 사냥꾼 조합에 10년씩 임대했다. 사냥꾼 조합은 숲을 관리하고 지키는 동시에 곰이 적정 개체수를 넘어가면 사냥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았다. 조합은 주로 외국인에게 곰 한 마리당 1천만원 정도의 금액으로 ‘트로피 헌팅’권을 팔았다. 그 방식으로 1년에 400~450마리의 곰 사냥이 가능했다. 루마니아가 유럽연합(EU)에 가입한 후인 2007년부터 문제가 생겼다. 곰이라고는 아예 없거나 몇 마리 안 되는 대부분의 EU 국가 입장에서 곰은 보호해야만 하는 대상. 당연하게도 그들은 루마니아의 곰 사냥을 반대했다. EU의 규제로 인해 곰은 절대로 죽일 수 없는 대상이 됐다. 루마니아의 곰은 빠르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루마니아에는 고속도로가 거의 없다.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흑해로 가는 두 시간 남짓한 구간만 있을 뿐. 고속도로가 없는 덕분에 산이 끊기지 않아 광대한 영역을 필요로 하는 곰들이 빠르게 번식해 갔다. 곰은 순식간에 적정 개체수의 두 배인 8천마리로 불어났다. 먹이가 부족해진 곰이 도시로 나와 쓰레기통을 뒤지거나 마을의 양 떼나 과수원을 습격하는 일도 생겨났다. 지난 4년간 시민 17명이 곰에게 물려 죽기도 했다. 결국 루마니아 환경부 장관이 EU 각국의 환경부 장관을 루마니아로 불러 모았다. 루마니아의 현실을 보여주고 곰을 나눠 가짐으로써 고통 분담을 하자고. 당연히 다른 나라의 장관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난색을 표했다. 수많은 난상회의 끝에 결국 올해부터 EU는 루마니아에서 200마리의 곰 사냥을 예외적으로 허가하기로 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너도밤나무의 껍질에 붙은 곰 털을 만져보며 곰의 나이나 체구를 상상하고, 곰의 똥을 들여다보며 아침식사가 뭐였는지를 추측했다. 늑대의 발자국을 들여다보며 개의 발자국과 구별하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단은 마주치는 숲의 나무와 야생화, 야생버섯에 대해서도 자세한 설명을 해줬다. 어느새 간식시간. 단의 아내가 만든 엘더베리 주스와 생강빵이 어찌나 맛있던지 다들 감탄이 이어졌다. 작년에 단의 딸 다나와 이 투어를 하는 동안 맛있게 먹었던 너도밤나무 열매가 올해는 보이지 않았다. 너도밤나무는 6~7년을 주기로 해갈이, 예외적으로 열매를 많이 맺기, 평작을 반복하는데 올해 이 숲의 너도밤나무들은 열매를 하나도 안 맺었다. 이 열매는 곰이 아주 좋아하는 먹이라서 올해 너도밤나무 열매가 없다는 건 곰이 먹이를 찾아 마을로 내려올 가능성이 커졌음을 뜻한다. 마을과 산이 내려다보이는 양치기 캠프에서 준비해 온 점심을 먹고 산을 내려왔다. 이번에는 차를 몰아 야생 곰에게 먹이를 주는 곳을 찾아갔다. 특수 코팅된 유리로 만든 건물로 들어가 몸을 숨기고 곰을 기다리는 곳이다. 마침 딱 맞는 시간에 찾아간 덕분에 파크 레인저가 곰 먹이로 비스킷 한 자루를 뿌리고 있었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곰들이 나타났다. 어느새 일곱 마리. 작년에는 한 시간 반을 기다려 두 마리를 봤는데 올해는 들어가자마자 단체 미팅이라니 고마울 수밖에. 곰과의 거리는 직선으로 20m 남짓. 망원경을 쓰지 않아도 곰의 표정까지 생생히 보였다. 이 숲에는 60여마리의 곰이 있고 파크 레인저가 매일 먹이를 주는 곳은 세 곳이다. 그중 가장 많이 찾아오는 곳이 바로 이곳으로 매일 20~25마리의 곰이 간식을 먹으러 찾아온다. 공산주의 시절에 시작된 곰 먹이주기는 야생의 생태계에 최소한으로 간섭함으로써 곰이 마을로 내려오는 일을 막아준다. 실제 간식의 양은 곰이 필요로 하는 하루 먹이의 5%도 되지 않는다. 경이로우면서도 안쓰럽고,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뒤섞인 채 곰들의 ‘먹방’을 훔쳐봤다. 저 곰들은 인간의 탐욕 앞에서 제 서식지를 지키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부디 루마니아가 지금껏 그래왔듯이 곰들과의 공존을 이뤄낼 수 있기를 바라며 숲을 떠났다. 어디선가 먼 곳에서 늑대의 하울링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김남희의 길 위에서] 타지키스탄이 선물한 인연과 그르노블서 힐링하다

올해 7월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도시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프랑스 알프스 산자락 아래, 세 개의 산에 둘러싸인 도시 그르노블에서였다. 2019년 타지키스탄을 여행하다 만난 안느마리의 집이었다. 함께 만났던 욜란다도 파리에서 내려와 셋이서 7박8일을 보냈다. 올해 일흔하나인 안느마리와 일흔이 된 욜란다는 15년 전, 각자 혼자서 인도를 여행하다 만났다. 그 후 해마다 한두 달씩 여행을 같이 다니는 사이가 됐다. 그들은 여행 고수답게 전기도, 수도도 들어오지 않는 파미르 하이웨이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늘 위트가 넘쳤다. 쉰을 넘기면서 깨닫게 된 인생의 격언이 있다면 이렇다. “체력이 인성이다.” 체력이 떨어지는 만큼 정신도 위축되기 마련이다. 체력이 부족하면 여행에서도 사소한 일에 불만이 생기고, 짜증이 날 수밖에. 체력이 있어야 타인에게도 친절할 수 있다. 그들은 고단한 여정에도 지친 티가 전혀 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유쾌하고 다정했다. 그렇게 스쳐 지나는 인연인가 했는데 올여름 안느마리가 자기 집에서 일주일쯤 머물다 가라며 내가 있던 제네바로 픽업을 온 거였다. 그르노블에 도착한 다음 날, 점심을 먹으러 나간 길이었다. 시내 가판대에 배우 알랭 들롱의 얼굴이 찍힌 잡지가 보였다. “알랭 들롱 아직 살아있어?” “살아있는데 멘털이 별로야.” “왜?” “극우에 가까운 보수주의자인데 어리석기까지 해. 인종차별주의자기도 하고.” 그러다 화제는 프랑스의 정치 상황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프랑스는 이제 예전의 톨레랑스를 다 잃어버렸어. 매일 이민자나 난민을 공격해 대고, 점점 우경화되고 있어. 다들 겁먹은 채로 편견에 가득 차 언론과 정치인에게 휘둘리기나 하지.” “유럽은 과거에 우리가 저지른 짓들에 대한 책임이 있어. 난민을 받아들여야만 해.” 유럽인으로 산다는 일은 다른 세계에 빚 진 자로 산다는 거라는 어느 작가의 말이 생각났다. 그들의 이런 태도는 아마 여행을 통해 키워진 게 아닐까. 여행이란 결국 낯선 세계 속으로 뛰어들어 자신의 편협한 세계를 부수는 행위니까. 그들은 내가 오기 전에 일주일의 일정을 플랜 A와 플랜 B까지 짜 놓은 상태였다. 우리는 매일 그날의 일정을 정해 그르노블과 그 주변을 열심히 돌아다녔다. 그르노블은 프랑스혁명의 발원지라고 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활동도 주변 알프스를 무대로 치열하게 펼쳐졌다. 그르노블 시내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트램 정거장이었다. 정거장 유리 벽면에는 빅토르 위고의 장편 ‘웃는 남자’의 소설 내용이 가득 인쇄돼 있었다. 정거장 이름도 작가의 이름을 따서 ‘빅토르 위고’. 우리도 이런 정거장을 만든다면 문학의 향기가 곳곳에 피어날 텐데. 다음 날은 케이블카를 타고 19세기 요새에 올라가 파노라마로 그르노블을 조망하고 지역 예술가의 전시를 보고 내려와 레바논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는 그르노블 시립미술관으로 사이 톰블리 전시를 보러 갔다. 그는 낙서와 그림, 드로잉과 페인팅의 경계를 넘나든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 그가 영감을 얻은 시인과 작가의 이름이 아주 성의 없는 필체로 달랑 적힌 그림이 가득했다. 2015년 소더비에서도, 작년 하반기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도 그 낙서 같은 그림이 최고가에 낙찰되기도 했단다. 정말이지 세상은 넓고 취향은 다양했다. 진지함과 엄숙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가볍고 자유롭게 그려낸 선들이 시원한 해방감을 주기도 했지만 결코 우리 집 거실에 걸고 싶은 그림은 아니었다. 저녁을 먹고 공원에서 열리는 혁명기념일 기념 콘서트에 갔더니 온 도시의 사람들이 절반은 모여있는 것 같았다. 귓전에서 폭탄이 연달아 터지는 것 같은 하드록 음악에 혼이 나갈 것 같은 밤이었다. 그날 밤에는 집 테라스에서 불꽃놀이를 보며 하루를 마감했다. 어느 날 저녁에는 벨돈산 아래 마을에서 열린 ‘시네 콘서트’를 보러 갔다. 시네 콘서트는 영화 상영 중에 영화에 어울리는 음악을 라이브로 연주하는 건데, 프랑스에서는 오래된 영화들을 대상으로 대유행이란다. 영화는 내가 존경하는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의 다큐멘터리 ‘가셔브롬’. 그가 1984년 파키스탄의 8000m급 봉우리 가셔브롬을 등정할 때의 이야기다. 문제는 영화가 독일어에, 자막은 프랑스어. 한마디도 못 알아들을 수밖에. 대신 영화 분위기에 꼭 맞춘 기타리스트의 연주가 아주 흥미로웠다. 카루트시오 수도회의 봉쇄수도원을 찾아가 평생 작은 수도원에 스스로를 가둔 채 기도와 노동으로 청빈하고 숭고한 삶을 사는 수도사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 산자락에서 피크닉을 즐기기도 했다. 하루는 산골 마을 축제에도 참여해 대형 천막 아래서 주민들이 준비한 저녁을 먹고 안느마리의 친구들과 수다도 떨었다. 재즈 밴드의 음악에 맞춰 안느마리는 흥겹게 춤을 추고, 나와 욜란다는 와인을 홀짝이며 구경하다 자정이 넘어 귀가하기도 했다. 마지막 날에는 그르노블에서 50㎞쯤 떨어진 호숫가를 따라 한 바퀴 도는 하이킹에 나섰다. 숲과 호수와 평원이 이어지는 하이킹 코스가 지루하지 않고 아름다웠다. 프랑스는 혁명기념일 이후가 휴가 기간이라 아이를 데리고 걷는 프랑스 가족이 많았고 일광욕을 하며 책을 읽는 이들도 종종 보였다. 우리도 호숫가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여름철 태양이 선물하는 비타민D를 마음껏 흡입했다. 그르노블과 더불어 프랑스혁명의 발원지인 비질성에 잠시 들렀다가 귀가하니 모든 일정이 끝났다. 다음 날이면 나는 제네바에서 인천행 비행기에 오를 예정이었고, 욜란다는 파리로 돌아가 텅 빈 파리를 즐길 계획이었다. 에너지 넘치는 안느마리는 프랑스 남부의 어느 도시에서 열리는 탱고 페스티벌에 참여해 나흘간 탱고를 추며 보낼 예정이었고. 그들이 그르노블을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짠 덕분에 나는 그 도시의 속살까지 들여다볼 수 있었다. 더 근사한 곳을 찾아 멀리 가는 게 아니라 자신이 사는 도시를 세심히 누릴 수 있게 해준 시간이었다. 나는 늘 한 번의 여행을 통해 한 사람이 남으면 최고의 여행을 했다고 믿는데, 타지키스탄이 내게 남긴 건 안느마리와 욜란다였다. 육체적 나이를 전혀 의식하지 않기에 정신도 젊고 건강한 그들. 소박하게 살지만 예술을 향유하는 습관이 배어 있고, 낯선 이와 마음을 나누는 일에 경계심이 없는 사람들. 좋아하는 일은 망설임 없이 즐기고,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는 삶이었다. 그들 덕분에 허세나 허영 없이 나이 들어가는 일의 즐거움을 배운 일주일이었다.

[김남희의 길 위에서] 내가 머문 인상적인 호텔들

20년째 여행으로 밥을 버는 삶을 살아오는 동안 숙소는 나에게 애증의 대상이었다. 저예산 배낭여행자에게 비싼 숙소는 ‘넘사벽’. 싸구려 숙소들 중에서 최대한 깨끗하고, 안전하고, 분위기까지 좋은 곳을 고르기 위해서는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는 영문 가이드북에 의존하거나 그 도시의 관광안내소를 찾아가 숙소를 추천받았다. 그렇게 찾아간 숙소가 마음에 들면 다행인데, 그렇지 않을 경우는 지도를 들고 이 집 저 집 하염없이 돌아다니며 발품을 팔아야 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숙소는 인도 바라나시에서 머물렀던 숙소다. 1998년 첫 인도여행이었다. 그날 따라 바라나시에는 방이 없었다. 지칠 대로 지쳐 찾아간 화장터 근방의 숙소에서 방이 있다고 했다. 다만 직원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했다. 할 말을 참는 듯 좀 불편한 기색이었다. 그가 데려간 방은 관처럼 좁고 길었다. 선풍기조차 없는 방이었지만 다행히 창이 있었다. 괜찮겠냐고 묻는 직원에게 무조건 좋다 하고 짐을 풀었다. 지쳤던 나는 씻자마자 죽음 같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개운한 기분으로 눈을 떴는데 간밤에는 없었던 회색의 이불이 내 몸에 덮여 있었다. 몸을 일으키니 이불이 우수수 흩날리며 흩어졌다. 화장터의 장작이 타고 남은 재가 열어 놓은 창으로 날아든 거였다. 나는 밤새 그렇게 타인의 죽음을 내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셈이다. 혜초나 원효쯤 됐더라면 그 자리에서 도를 깨쳤을지도 모르겠지만 범인인 나는 그저 충격과 찝찝함으로 샤워실로 달려갔을 뿐. 아무튼 주머니는 가벼운 처지에 취향은 까다로워 숙소를 고르는 일은 늘 고단한 노동이었다. 그래도 여행이 길어지면 한 번쯤은 좀 무리를 해 괜찮은 숙소를 찾아가고는 한다. ‘괜찮은 숙소’에 대한 내 기준은 나름대로 엄격하다. 일단 다국적 체인 호텔은 피한다. 표준화된 서비스와 군더더기 없는 시설이 재미 없다. 그보다 중요한 건 ‘여행 누수’ 때문이다. 20만원을 이 호텔 숙박비로 쓴다 해도 모기업으로 빠져나가고 그 나라에 남는 비용은 훨씬 적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나라일수록 누수율이 심해 네팔 같은 경우는 70%가 넘는다고 했다. 또 숙소의 디자인 요소도 내게는 중요한데 다국적 체인 호텔은 특징 없는 고층 빌딩인 경우가 많다. 같은 금액이라면 규모가 작으면서 현지인이 운영하고, 개성이 살아있는 부티크 호텔을 선호한다. 다양한 방식으로 지구를 위하는 곳이라면 금상첨화. 그렇게 만난, 내 마음에 쏙 드는 숙소 몇 곳을 소개해 본다. 지난 3년간 해마다 찾아간 조지아의 룸스 호텔. 조지아인이 만든 호텔이다. 룸스 호텔은 수도 트빌리시와 산간 마을 카즈베기에 하나씩 있다. 트빌리시의 경우 수영장이나 사우나도 없다. 하지만 방의 실내 장식은 탄성이 절로 난다. 빈티지 스타일의 수전,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벽지, 철제 장식이 달린 침대, 가짓수는 많지 않지만 양질의 아침 식사. 무엇보다 책으로 장식된 로비가 매력적이다. 트빌리시의 룸스도 좋지만 카즈베기의 룸스 호텔은 내 ‘최애 호텔’이다. 일단은 압도적인 전망. 말이 필요 없다. 고도 5천54m의 카즈베크산을 방에서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다. 야외의 자쿠지에 몸을 담구고 앉아 카즈베크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의 모든 근심이 다 사라지는 것 같다. 아침형 인간이 되지 못하는 내가 이곳에서만큼은 테라스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 오전 5시 기상을 빼 먹지 않을 정도다. 겨울을 나기 위해 몇 년 간 계속 찾아갔던 치앙마이에도 내가 사랑하는 숙소가 있다. 호시하나 빌리지. 고바야시 사토미와 가세 료가 출연한 일본 영화 ‘풀’의 배경이 된 곳이다. 치앙마이 청소년들의 자립을 돕는 비영리기구 반롬사이를 운영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설립한 숙소다. 가운데 수영장을 배경으로 독채 방갈로가 여섯 채쯤 서 있다. 놀랍게도 이곳의 숙소는 전부 개인의 기부로 지어졌다. ‘클레이 하우스’는 한 청년이 1년간 머물며 혼자 힘으로 흙집을 지었고 ‘이치가와 코티지’는 이치가와씨의 기부로, ‘스이카 하우스(수박 집)’는 이름을 밝히기 싫어 하는 독지가의 후원으로 지어졌다. 이런 식으로 드넓은 부지에 독채 방갈로가 한 채씩 들어섰다. 방갈로에는 투숙객이 필요로 할 만한 모든 것이 준비돼 있어 일본인들의 세심함이 돋보였다. 저마다 다르면서도 조화로운 방갈로는 주변의 자연과도 잘 어울린다. 방에서도, 부엌 창으로도, 화장실 창으로도 정원의 꽃나무가 보였다. 부겐빌레아와 프란지파니, 코튼트리의 꽃들이 화려하게 피어 있었다.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완벽히 누릴 수 있었다. 날이 저물 무렵 노을을 보며 수영을 하거나 고양이들과 어울려 놀기. Pool호를 타고 나가 장을 보거나 자전거를 타고 마을 돌기.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쓰며 ‘멍 때리기’ 좋은 곳이어서 해마다 찾아가 2, 3일씩 머물고는 했다.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숙소는 그곳이 어디든 가톨릭 교회에서 운영하는 호텔이다. 수도원의 숙소들은 일단 공간적 특징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까지 든다. 작년 여름 이탈리아 메라노에서는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작은 호텔에서 머물렀다. 전망이 좋고 조용한 곳이었다. 방은 소박하고 간소한데 필요한 건 다 있었고,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다. 불필요한 장식이나 보이기 위한 사치스러움이 없어 수녀님들의 간결한 삶을 상상하게 되는 곳이었다. 역시 지난해 가을 헝가리에서도 수도원 호텔을 찾아갔다. 오스트리아와 가까운 마을 쇼프론에서였다. 1710년 세워진 수도원을 2009년 개조했는데 아름답고 안온한 공간이었다. 낮에는 숙소의 도서관에서 글을 쓰고, 아침에는 주변을 산책했다. 아침·저녁식사가 포함된 숙소의 가격은 예산을 가뿐히 초과했지만 그곳에서 누린 만족감은 가격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전통 건축을 활용한 숙소다. 루마니아 북부의 마을을 여행할 때 주로 그런 곳에 머물렀다. 그중에서도 브랩이라는 마을은 혼기가 찬 딸이 있으면 정원의 나무에 냄비를 매달아 놓는 재미난 풍습을 가진 곳이었다. 그 마을에는 전통 목조 주택을 개조한 숙소가 많았다. 내가 머문 곳도 120년이 된 목조 주택을 고친 곳이었다. 자수를 놓은 수공예품으로 장식한 컬러풀한 방이 아름다웠다. 숙소에서 일하던 안드레아는 아침마다 염소를 몰고 와 아침 식사를 건네주고, 다시 염소를 몰고 떠나곤 했다. 마침 가을이라 들녘에서는 건초 베는 일이 한창이었다. 저물 무렵이면 산처럼 쌓인 건초를 실은 마차가 하나둘 마을로 들어서는 모습이 그 어떤 종교화보다 신성해 보였다. 숙소 고르는 일이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지만 나도 잘 알고 있다. 좋은 숙소가 여행자의 몸과 마음을 얼마나 위로해 주는지를. 내일 다시 루마니아로 떠난다. 이번 여행에서도 몹시 지친 날에는 ‘호텔’이라는 작은 사치를 하룻밤 누려볼 생각이다.

[김남희의 길 위에서] 마음에 쏙 들었던 ‘안티과’서 온기를 느끼다

지난 3월에는 코스타리카와 과테말라에서 한 달을 보냈다. 두 나라 모두 커피가 여행의 큰 즐거움이었다. 커피 벨트에 속한 나라들이어서 어디에서나 신선한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어제까지는 코스타리카에서 커피를 마시고 오늘부터는 과테말라에서 커피를 마시다니 이 얼마나 복 받은 인생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과테말라의 첫 도시 안티과로 넘어갔다. 안티과는 종종 여행자들이 남미에서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을로 꼽는 곳이다. 실제로 이곳에서 남미 여행을 위한 스페인어 공부를 하며 몇 주씩 체류하는 배낭 여행자도 많다. 도시에 들어서는 순간,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 마음에도 쏙 드는 도시였으니. 내가 좋아하는 도시의 조건은 대략 이렇다. 중심지가 걸어다닐 수 있는 규모인 곳. 시야를 어지럽히는 고층 건물이 없는 곳. 고유의 문화가 살아있어 특색이 있는 곳. 분위기 좋은 카페나 맛있는 식당이 몇 개는 있는 곳. 주변에 큰 산이 있어 트레킹 전후 베이스캠프로 삼기 좋은 곳. 안티과가 딱 그런 곳이었다. 분홍, 연두, 하늘색 같은 파스텔톤으로 칠한 단층 건물이 검은 포석이 깔린 골목마다 이어졌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교회의 종탑 정도. 알록달록 화려한 색상의 치마에 앞치마를 두르고 중절모를 쓴 여성들이 골목을 오갔다. 지금은 인구가 3만명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지만 안티과는 250년간 과테말라의 수도였다. 1773년의 대지진으로 처참하게 파괴되는 바람에 수도의 역할을 넘겨야 했다. 덕분에 작은 마을 곳곳에 바로크 양식의 교회와 수도원, 대학 등 옛 건물이 남아 있었다. 오래된 건물을 개조한 스타벅스와 맥도널드조차 깜짝 놀랄 만큼 근사했다. 거리를 걷다 보면 연기를 내뿜는 화산의 이마가 어디에나 보였다. 광장 주변에는 고운 보라색 꽃을 화려하게 피워낸 자카린다 나무가 가득했다. 날씨는 매일 쾌청했고 덥지도 춥지도 않은 계절이었다. 중심가에서 걸어서 10분쯤 걸리는 곳에 방을 얻어 머물며 매일 골목을 돌아다녔다. 구글 맵을 뒤적여 커피가 맛있다는 카페를 하루에 하나씩 찾아다녔다. 여기가 어딘가. 해발고도 1500m의 비옥한 화산토, 작은 일교차에 활화산이 내뿜는 연기를 맡으며 자란 커피가 훈연한 듯한 맛을 내는 ‘과테말라 안티과 커피’의 고향. 산미를 좋아하는 내 취향이 아니라며 한국에서는 외면했는데 이곳에서 마시는 안티과 커피는 적절한 산미에 균형 잡힌 맛을 지니고 있었다. 정원의 그늘진 테이블에 앉아 싱그러운 커피 향에 취하고 있으면 격렬히 게을러지고 싶었다. 생산적인 일과는 담을 쌓은 채 동네나 어슬렁거리며 온갖 일에 참견하는 한량이 되고 싶을 뿐이었다. 부활절을 앞둔 안티과에서는 3월 첫 주부터 일요일마다 성상을 들고 행진하는 행사가 진행 중이었다. 거기에 더해 집이나 가게 앞을 색색의 꽃과 모래로 장식하는 일로 다들 바빴다. 나는 매일 은퇴한 노인처럼 그늘에 앉아 그들이 모래나 식물로 그림을 만드는 광경을 지켜보곤 했다. 1시간 거리의 수도 과테말라시티는 온갖 위험이 도사린 곳이라는데 이 마을은 어찌나 평화로워 보이는지 딴 세상 같았다. 남들 다 가는 화산 트레킹도 귀찮다는 이유로 포기한 나는 한량 흉내를 내며 매일 골목을 어슬렁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구글 맵을 뒤적이다 보니 박물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느릿느릿 골목을 걸어 별 기대도 하지 않고 찾아갔다. 박물관은 곧 호텔이기도 했다. 호텔 정원을 둘러보는 데 돈을 내야 한다니, 처음에 솟았던 거부감이 문을 들어선 순간 슬그머니 사라졌다. 지금껏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호텔이 눈앞에 있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수도원 중 하나였던 이곳이 1773년의 지진으로 폐허가 됐다. 무너지고 버려진 돌무덤만 솟아있던 수도원을 1989년부터 리모델링했고 지금은 6개의 박물관과 2개의 아트 갤러리를 갖춘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정원 전체가 유적이고 박물관이며 예술작품이었다. 복원된 수도원의 예배당도, 회랑도, 부엌이나 묘지도 새로 지은 호텔과 이질감 없이 어울렸다. 모든 모서리 하나까지 세련된 감각으로 세심하게 꾸며져 있었다.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며 외부인에게 개방된 모든 공간을 샅샅이 둘러봤다. 투숙객만 갈 수 있는 공간 앞에서는 한숨을 쉬고 돌아섰다. 하룻밤 잘까 싶어 알아보니 저예산 장기 여행자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이었다. 정신 차리자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돌아섰다. 며칠 후 나는 호텔을 다시 찾아갔다. 이번에는 투숙객으로서였다. 문턱 높은 호텔답게 체크인은 정각 3시부터. 방에 짐을 풀자마자 스파로 직행했다. 40도 온도의 자쿠지에 몸을 담그니 그간의 피로가 싹 풀리는 것 같았다. 피로를 푼 후에는 투숙객에게만 개방된 공간을 꼼꼼히 둘러봤다. 복도에도, 방에도, 작은 중정에도 지역 예술가의 조각이나 그림이 걸려 있었다. 통로에 아무렇지 않게 놓인 조각들은 죄다 300~400년 전 작품이었다. 거대한 갤러리에 들어온 것 같아 시간이 흘러가는 속도가 야속할 정도였다. 이렇게 개성적이고 아름다운 호텔이라니 놀라울 뿐이었다. 그날 호텔에 머물게 된 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간 큰 사람이 못 되기에. 제주의 지인 K님이 하룻밤 숙박비를 보내오셨다. 1년째 어머니 간호에 몸과 마음 전부를 쏟고 있는 상황인데 작은 경험을 선물하고 싶다며 마음을 건네주셨다. 호텔에 머물던 그 밤, 나는 전국 장애인 부모 연대에 호텔비만큼을 보냈다. 뜻밖의 선물을 받았으니 나도 작은 나눔을 돌려드리고 싶었다. 며칠 전에 읽었던 시한부 판정을 받은 김미하님 사연이 계속 마음에 걸리던 차였다. 발달장애인 남매를 둔 김미하님은 유방암 4기인데 남겨질 남매의 돌봄 서비스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분의 손을 이렇게라도 잡아 드리고 싶었다. 나처럼 당신도 혼자가 아니라고 속삭여 드리고 싶었다. 다정한 이들 덕분에 나는 팔자에도 없는 5성 호텔에 와서 장작 난로를 지핀 방에서 초가을의 ‘불멍’을 즐기는 호사를 누렸다. 창밖 분수대에서 흘러내리던 물소리는 밤이 깊어지니 조금씩 잦아들었다.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난 새벽, 정원으로 나갔다. 외부인이 없는 이른 아침의 호텔 정원은 부지런한 새들 차지였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거대한 나무의 우듬지마다 새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수백년 세월에도, 강력한 지진에도 살아남은 대리석 기둥에 손을 대 봤다. 뜻밖에도 돌은 차갑지 않았다. 희미한 온기마저 느껴졌다. 나를 둘러싼 세상의 온도 같았다.

[김남희의 길 위에서] 조지아 대자연의 깨끗한 기운... 온 몸에 새기다

지난 6월에는 한 달간 조지아에 머물렀다. 벌써 3년째인데 해마다 새롭다. 질리지 않는 조지아의 매력은 무엇일까. 바라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시원해지는 캅카스 산맥의 설산들, 다혈질적인 기질도 있지만 그만큼 소박하고 정이 많은 사람들, 나같이 저예산으로 다니는 이에게도 부담이 적은 저렴한 물가, 8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와인과 음식, 여성 혼자 돌아다녀도 안전한 치안 등. 매력을 말하자면 끝이 없다. 이 나라가 유럽 대륙 가운데에만 있었어도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관광대국이 되지 않았을까. 자연환경을 놓고 보면 누구는 ‘가성비 좋은 스위스’(이런 표현은 스위스에도 조지아에도 실례라고 생각하는 쪽이지만)라 하고, 음식을 얘기하면 누구는 이탈리아에 버금간다고 한다. 고평가된 프랑스 와인보다 이 나라 와인이 더 낫다고 하는 이도 있다. 비록 와인 한 잔이 주량이라 민망하긴 하지만 나 또한 조지아 와인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2015년 고고학자들의 발굴 이후 인류 최초의 와인은 이제 이란이 아니라 조지아라고 공인됐다. 조지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녀 니노도 많고 많은 나무 중에 포도나무 가지를 꺾어 십자가를 만들어 세웠다. 당연히 포도 문양은 조지아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장식 문양이다. 대문이나 창틀은 물론 벽지나 커튼에도 포도 열매나 줄기가 새겨져 있다. 이 나라에서 와인은 조지아 전통 방식과 유럽식 두 가지로 생산된다. 전통 방식은 ‘크베브리 와인’이라 불린다. 토기 항아리 크베브리에 포도 껍질과 씨까지 함께 넣어 발효시키는 내추럴 와인으로 조지아만의 독특한 저장법이라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조지아에서는 괜찮은 식당에서 와인 한 병을 주문해도 2만~3만원 정도다. “내가 쏠게” 소리쳐도 큰 부담이 없다. 올해는 트레킹만이 아니라 와인 기행도 했기 때문에 와인으로 유명한 카헤티 지역에 머물며 다양한 와이너리를 방문하기도 했다. 내가 가 본 가장 근사한 와인바는 트빌리시 시내에 있는 ‘8000 빈티지’. 이름처럼 8천병의 와인 리스트를 가진 곳이다. 이곳에선 판매가와 동일한 가격으로 매장에서 간단한 안주와 함께 와인을 마실 수 있다. 마치 도서관처럼 천장까지 짜 넣은 목재 선반에 와인이 가득했다. 소믈리에의 추천을 받아 엠버 와인 한 병과 레드 와인 한 병을 마시고 두 병을 사서 나왔다. 살짝 취한 탓인지 밤거리를 걷다 보면 트빌리시가 더 친근하게 다가왔다. 조지아에서는 미안해도 와인을 선물하고, 고마워도 와인을 건넸다. 간이 상하기 딱 좋은 나라였다. 조지아는 와인만이 아니라 빵도 맛있어서 빵순이인 나는 매일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아무것도 넣지 않고 화덕에서 갓 구운 따끈따끈한 빵 쇼티, 치즈를 듬뿍 넣고 구운 하차푸리, 송아지고기를 다져 넣고 구운 굽다리, 콩과 햄을 넣은 빵 로비아니. 프랑스인들이 종이 봉투에 바게트 담아 가듯이 조지아인들은 신문지에 쇼티를 둘둘 말아 집으로 갔다. 그 모습을 보면 어쩐지 내 마음도 따끈따끈해졌다. 하는 일 없이 와인만 마시고 있으니 제대로 한량이 된 것 같았다. 몸을 움직이고 싶다는 열망이 솟구쳤다. 자동차로 10시간을 달려 조지아 북부의 스바네티로 올라갔다. 이 지역의 가장 큰 마을은 메스티아. 우슈굴리까지 가는 3박4일의 트레킹이 이 마을에서 시작된다. 해발고도 1천500m에서 2천750m까지 산을 넘어 도착한 마을에서 자고, 다음 날 다시 산을 넘어 다른 마을로 향하는 일을 반복한다. 도중에 편의시설이라고는 전혀 없으니 점심도 민박집에 도시락을 싸달라고 해야 한다. 마을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산길을 호젓하게 누리며 대자연의 깨끗한 기운을 온 몸과 영혼에 새기며 걸을 뿐. 이 정도 풍경을 지닌 곳이 이렇게나 비어 있는 곳이 또 있을까. 하루 종일 걸어도 몇 명을 마주칠 뿐이다. 마지막 마을인 우슈굴리는 마을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이다. 조지아는 강대국 사이에 낀 지리적 요충지여서 온갖 침입을 다 받아야 했다. 그때마다 그들은 코슈키라는 탑으로 식량을 싸들고 들어가 사다리를 걷고 버텼다. 7세기부터 지어진 코슈키가 200여채의 오래된 집들과 함께 남아있는 곳이 우슈굴리다. 겨울이 오면 지금도 마을이 눈 속에 파묻혀 길이 끊어지고 고립되는 깊은 산골이다. 우슈굴리 출신 여성이 우슈굴리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 ‘데데’를 보고 나면 더 애틋하게 다가온다. 영화 속 일(집안끼리의 정략결혼, 튼튼한 여성을 향한 보쌈, 명예가 훼손됐을 때 죽음으로 복수하기)들이 일어난 건 불과 30여년 전. 더는 그런 비극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지만 우슈굴리가 세계문화유산이 된 후 마을은 다른 방식의 변화를 겪고 있다. 해마다 차량 렌트비, 승마비, 숙소비 등이 치솟고 있다. 여기저기 새로운 게스트하우스와 카페, 바가 문을 열었거나 공사 중이다. 관광객이 오지 않는다면 우슈굴리는 물론이고 우리가 거쳐온 자베시, 아디시, 이프라리 같은 마을은 곧 페허가 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그 마을들은 점점 빈집이 늘어나고 있지만 한 편으로 새로 게스트하우스가 문을 열기도 한다. 우리는 이 마을을 존속시키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이곳에 부정적인 영향을 몰고 오는 존재이기도 하다. 늘 이런 변화를 목도하면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생겨나곤 한다. 이 아름다운 산골마을들이 부디 변화의 몸살을 조금만 앓고 지나가기를 빌 수밖에. 우슈굴리를 떠나기 전날, 혼자 마을을 걸었다. 그동안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외진 골목들까지 걸어다녔다. 사람이 떠나 쇠락하는 빈집들 사이로 여전히 사람들이 사는 집들이 있었다. 검은 옷을 입고 털모자를 쓴 여인이 코슈키 탑 사이를 돌아 급히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나무 울타리 위에 널어 놓은 이불이 말라 가고, 말을 탄 소년들이 좁은 골목을 힘차게 달려나갔다. 언덕 위 천 년도 더 전에 세워진 교회의 마당에는 늙은 개가 오가는 이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창이 깨진 낡은 집, 버려진 페트병이 박힌 화단 구석, 미니카를 들고 혼자 노는 아이. 맥주잔을 앞에 두고 카페에 앉아 있는 청년, 집으로 가는 노인의 구부정한 어깨. 그 모든 풍경 위로 이우는 저녁 햇살이 골고루 내려앉고 있었다. 산허리를 감싸던 안개가 조금씩 걷히며 슈카라 빙하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치 작별 인사라도 건네듯. 어쩐지 애잔한 마음이 밀려와 그 풍경에 마음을 앗긴 채 나는 오래도록 서 있었다.

[김남희의 길 위에서] 자연과 함께하는 코스타리카

지난 2월 코스타리카에 3주간 머물렀다. ‘에코 투어리즘’으로 이름난 곳답게 자연과 문명이, 동물과 인간이 공존하려 애쓰는 곳이었다. 나무늘보를 비롯해 수많은 야생동물을 만나며 국립공원을 걸어 다녔다. 마지막으로 머문 마을 우비타에는 마리나 바예나 국립공원이 있었다. 혹등고래가 찾아오는 태평양 바닷가였다. 이동 시즌이 끝나 고래는 볼 수 없었지만 바닷가를 걷는 것만으로 마음의 주름이 쫙 펴지는 곳이었다. 인간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야생의 바다였다. 정해진 목적지도 없이, 시간에 쫓기는 일도 없이 발길이 가는 대로, 마음이 내키는 대로 바닷가를 걸어 다녔다. 우비타는 혹등고래만큼이나 2월의 히피 축제로도 유명했다. 여행의 최고 묘미가 사람을 만나는 거라고 믿으면서도 사람 많은 곳은 몹시 힘들어하는 모순적 성격 탓에 사람이 몰리는 곳은 피할 생각부터 한다. 이번에도 축제가 끝난 날부터 우비타에 머물기로 했다. 분명 축제가 끝난 후에 찾아갔는데 우비타에는 내 수준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가격의 숙소만 남아 있었다. 결국 쓰린 마음으로 2박에 50만원이나 하는 숙소를 예약해야 했다. 지금껏 나를 위해 머문 숙소의 최고가를 압도적으로 경신했다. 4성급 ‘에코 롯지’라는데 ‘어디 얼마나 친환경적인지 보자’ 이런 삐딱한 마음으로 찾아갔다. 시내에서 차로 10분쯤 걸리는 숲속에 자리한 숙소는 부근에 편의시설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열 채 남짓한 독립 방갈로 전체를 나무와 돌을 사용해 소박하게 지은 호텔이었다. 숙소의 온수는 태양열 에너지를 사용하고 당연히 환경을 위해 어디에도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았다. 30도가 넘는 더위를 선풍기만으로 버틸 수 있을까 싶었지만 뜻밖에도 충분했다. 또 생수병 소비를 줄이기 위해 정수된 물을 담아갈 수 있는 코너가 따로 준비돼 있었다. 무엇보다 식당과 로비에서 바라보는 태평양의 풍경이 환상적이어서 불순했던 마음이 쏙 들어갔다. 절정은 숙소의 트레일이었다. 49만평 넘는 정글이 호텔의 사유지였다. 숙소의 지도에는 트레일 세 개의 위치와 소요 시간이 소개돼 있었다. 제일 짧은 트레일은 국립공원 해변까지 이어지는 15분 거리였다. 썰물에만 접근이 가능해 로비에서 조수 시간을 확인하고 내려갔다. 조금 가파른 숲길을 10여분 내려가니 아름다운 바다가 저 홀로 저물고 있었다. 드넓은 모래사장에 사람이라곤 숙소에 머무는 프랑스인 가족뿐이었다. 수건을 깔고 누운 엄마는 책을 읽고, 아빠는 아이들과 모래놀이를 하고 있었다.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 붉은 해가 바다로 잠겨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사위가 고요해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귓전 가득 차올랐다. 다음 날은 작은 다리 세 개를 건너 계곡과 폭포를 지나 이어지는 ‘마늘 트레일’을 걸었다. 800년 된 마늘나무를 찾아가는 트레일이었다. 잎을 짓이기면 마늘 냄새가 난다는 마늘나무가 숲의 제왕 같은 자태로 서 있었다. 마늘나무까지 다녀오는 산책은 꼬박 한 시간이 걸렸다. 중간에 이구아나, 하울러멍키, 아구티 같은 야생동물을 만났다. 마지막 트레일은 내내 해변을 내려다보며 걷는 길인데 이 또한 한 시간 소요. 굳이 밖으로 나갈 필요 없이 숙소 안만 돌아다녀도 심심치 않은 곳이었다.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했을 뿐인데 이토록 가까이서 자연을 누릴 수 있다니 놀라웠다. 코스타리카는 국토의 51%가 숲이고 그중 절반 가까이가 원시림이었다. 28개의 국립공원과 자연보호구역이 차지하는 면적은 국토의 28%. 어디를 가든 울창한 숲과 깨끗한 바다가 가까이 있었고 사유지조차 걷기 좋은 산책로를 가진 공원이 많았다. 아레날 화산 국립공원이 자리한 라포르투나 마을만 해도 슬로스 와칭 트레일, 보가린 트레일, 비스타 아레날 공원, 미스티코 아레날 행잉 브리지 등 인기 있는 트레일과 공원 대부분이 사설이었다. 물론 승마를 즐길 수 있는 목장이나 커피와 초콜릿 투어가 가능한 개인 농장도 많았다. 코스타리카에서 말을 탈 기회가 두 번 있었는데 모두 목장이 소유한 거대한 숲과 평원 안에서 호젓하게 승마를 즐길 수 있었다. 이런 사설 공원이나 트레일은 당연히 입장료를 내야 하고 대부분 입장료가 20달러에서 시작했다. 아레날 화산을 바라보며 온천에 몸을 담그고 피로를 푼 다음 날, 사설 공원 ‘웰네스 파크’를 찾아갔다. 머물던 숙소의 주인이 운영하는 곳으로 숙소 손님은 입장료가 면제였다. 별 기대 없이 찾아간 공원은 고즈넉했다. 두 시간 남짓 걷는 동안 내내 나 혼자였다. 잘 가꿔진 길을 따라 정글로 내려가 폭포도 지나치고, 개울가도 걷고, 흔들다리 위에서 열대우림과 활화산도 조망했다. 걷다가 자주 멈춰서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야생동물을 찾아보려 애쓰면서. 무엇보다 벤치에 앉아 화산을 바라보던 시간이 선물 같았다. 이곳의 면적은 48㏊. 이 정도 면적에, 이 정도의 자연 지형을 사유재산으로 소유했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몇 대를 지켜온 숲이라 해도 대규모 위락시설이나 골프장으로 변하기 쉬울 것 같다. 5만1천179㎢ 면적의 코스타리카에는 겨우 12개의 골프 코스가 있을 뿐인데 그보다 두 배 남짓 큰 10만210㎢의 대한민국에는 525개의 골프 코스가 있다. 공원을 관리하는 자니를 우연히 만나 그와 함께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아버지가 소유한 이 숲을 동생과 둘이 관리한다고 했다. 트레일 주변의 잡초며 나무들은 제초제를 쓰지 않고 사람의 손으로 베거나 기계를 이용해 정리한다고 했다. 이곳에는 두 채의 숙박 시설도 있는데 요가나 명상을 하며 쉴 수 있도록 돼 있다. 자니는 30대 중반 전후의 젊은 나이인데도 식물에게도 말을 걸고, 그들이 고통을 느끼며 사람에게 반응한다고 믿었다. 당연히 요가와 명상에 심취해 있고, 우리가 먹는 음식이 곧 우리 자신이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공원을 나서기 전, 짓궂은 마음으로 물었다. 여기를 골프장으로 만들면 돈을 더 잘 벌 것 같지 않냐고. 그는 단호하게 답했다. “그럼 저 숲에 사는 동물은 다 어떡하고요?” 개발의 논리에 함몰되지 않고 천혜의 자연을 잘 지켜 관광대국이 된 코스타리카답게 자연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성숙했다. 부러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김남희의 길 위에서] 나의 여행 동반자 ‘토니 휠러’

봄꽃이 다 함께 피어나 당혹스러웠던 지난 봄날의 어느 저녁, 연희동에서 저녁 모임이 있었다. 밥은 편하게 먹고 살자는 신념으로 낯선 식사 모임에는 나가지 않는 내가 15명의 처음 보는 사람들과 저녁을 먹게 된 자리였다. 제법 오래 인연을 이어온 신발끈 여행사 장영복 대표의 초대와 더불어 그날의 주인공이 토니 휠러였기 때문이었다. 휠러가 누군가 고개를 갸웃거릴 이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배낭을 메고 혼자 세상을 떠돌아본 적이 있는 이라면 한 번쯤은 그가 쓴 가이드북에 기댔을지도 모른다. 론니플래닛 시리즈로 ‘배낭여행자의 바이블’이라 불리는 책이다. 나는 첫 여행을 했던 20대 초반부터 30년이 넘는 지금까지 가이드북이라면 영문판 론니플래닛을 고집해 왔다(영어는 더듬거리는 수준이지만 한글 번역판이 거의 없기에 어쩔 수 없다.) 내 여행 준비는 언제나 론니플래닛을 구입하는 일로 시작된다. 요즘은 집에서 볼 종이책과 여행지에서 볼 전자책을 동시에 구매하기도 한다. 그 론니플래닛 시리즈를 만든 사람이 휠러와 그의 아내 모린 휠러. 그들이 첫 장기 여행을 마친 1973년, 주변 사람들이 계속 숙소며 교통편 같은 질문을 해대는 통에 부엌 식탁에 앉아 쓰기 시작한 책이 론니플래닛이었다. 조 코커의 노래 중에 나오는 ‘러블리 플래닛’이라는 가사를 토니가 ‘론니플래닛’으로 잘못 기억해 책 제목이 됐다. 지구는 물론 사랑스러운 행성이지만 나는 외로운 행성이 더 근사하다고 여긴다. 답을 주지 않는 우주를 향해 끝없는 신호를 쏘아 보내는 고독한 행성의 거주민으로서. 사실 나는 장르 불문하고 어떤 책을 좋아한다고 해서 저자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저자와는 책으로 만나면 충분하다고 믿고, 좋은 책일수록 내가 쌓은 이미지의 성을 부수고 싶지 않기도 하니까. 하지만 지난 30년간 내 여행의 가장 가까운 동반자였던 가이드북의 저자를 만나 한 번쯤은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기도 했다. 배낭여행 1세대 여행사인 신발끈 여행사가 오랫동안 론니플래닛 독점 수입판매를 해왔던 인연에 더해 장영복 대표 본인이 열렬한 론니플래닛 키즈여서 만들어진 자리였다. 직접 만나본 휠러는 일흔여섯의 나이가 무색하도록 젊고 건강해 보였다. 무엇보다 그 나이쯤 살아온 사람의 얼굴에 드러나기 마련인 삶의 궤적이 만든 표정이 좋았다.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선하게 살아온 사람의 얼굴이랄까. 실제로 말하는 태도도 소탈하고 수줍었고, 이야기의 내용에도 과장이나 허세가 없었다. 그는 몇 년 전에 론니플래닛을 BBC 월드와이드에 넘긴 이후 플래닛 휠러 재단을 만들어 저소득 국가의 기후위기, 인권, 교육 활동을 돕는 일에 헌신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 중 인상적인 대목은 이렇다. “사람들이 나에게 가장 좋았던 곳을 물으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가장 이상했던 나라를 물으면 이곳을 꼽는다. 북한,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 나는 좋은 이스라엘 친구들도 있지만 그 나라는 정말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전적으로 공감이 가는 이야기였다. 나 또한 거의 30년 전에 팔레스타인 땅을 여행하고 이 땅에 평화가 돌아오지 않는 한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던 곳이다. 현재 팔레스타인 이스라엘의 상황을 봐서는 다시 돌아갈 날은 쉽게 올 것 같지 않다. 예루살렘을 비롯해 그 땅 전체가 비할 데 없는 유적지(여러 종교의 성지이기도 하고)이지만 나는 자신들만이 신에게 선택 받은 종족이라 믿는 이들의 자비 없는 신앙에 질렸다. 무엇보다 그 땅에서 일어나는 가장 슬픈 일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거주지를 ‘세계에서 가장 큰 개방형 감옥’으로 만들고 있는 장벽의 건설이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의 2022년 12월 보고서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서안지구 팔레스타인 땅을 가로막으며 쌓고 있는 분리장벽의 길이는 713㎞에 달하고 65% 이상이 완공됐다(이미 2004년 국제사법재판소는 이 분리장벽이 국제법 위반이라며 철거 권고 의견을 발표했다). 내가 운이 나빠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땅에서 내게 호의를 베푼 이들은 모두 핍박 받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었다. 오랫동안 탄압 받았던 민족이 다른 민족을 탄압하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주는 슬픔이 버거웠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안 가봤지만 여성 인권이 세계 최악이라는 점에서 별로 여행하고 싶지 않은 나라다. 북한은 굳이 말을 보탤 것도 없다. 세 나라 모두 인권과 평등을 비롯한 보편적 정의의 실현에 있어 심각한 문제가 있는 나라다. 여행이란 결국 자신만의 역사 교과서를 새로 쓰는 과정이다. 역사는 승리한 자의 목소리로 기록된 일방적인 이야기일 수 있기에. 나 역시 팔레스타인 땅과 중동지역 곳곳을 여행하며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패배한 자의 목소리로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시간이 없었다면 나만의 세계사 교과서를 쓸 수 없었을 것이다. 휠러는 기후위기와 관련해 여행의 미래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기도 했다. “비행기를 탈 때마다 죄책감을 느낀다. 하지만 인간은 타인을 만나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서로 만나야만 하는 존재다. 여행은 그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나 또한 비행기를 탈 때마다 부끄러워진다. 환경을 위해 내가 하는 다른 모든 노력(배달음식을 먹지 않고, 고기 섭취를 최소화하고, 환경단체에 정기적으로 기부하고, 여행 중 제로웨이스트를 실천하기 위해 애쓰는 일 등)이 허무하게 느껴지곤 한다. 그럼에도 여행을 멈추지는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자신은 없다. 여행은 나의 좁은 장벽을 넘어 다른 세상으로 나가는 문이자 내가 살아가는 이 행성과 사람들을 더 깊이 사랑하게 만드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내가 론니플래닛을 좋아했던 이유 중 하나는 어떤 나라의 역사적 사건을 다룰 때 견지하는 진보적인 관점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론니플래닛은 늘 신중하게 약자와 소수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왔다. 굳이 정치적 프레임으로 구분하자면 중도좌파의 시선이랄까. 정치적 역사적 사건을 기술할 때 가이드라인 같은 게 있었냐는 내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은 간명했다. “아마도 그건 나 자신이 그런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월이 흘러 할머니가 된 후에도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물론 ‘꼰대’는 이미 됐지만 ‘구제불능의 꼰대’까지는 되지 않기를 꿈꾼다. 언제나 더 많은 인권과 더 많은 평등과 더 많은 정의를 갈망하는 할머니가 되기를.

[김남희의 길 위에서] 튀르키예-시리아 지진, 연대의 손길 이어지길

지난 2월6일 튀르키예와 시리아에서 발생한 지진은 6만명 가까운 사망자를 남겼다. 12년째 내전 중인 시리아에는 멀쩡한 건물이 없다는데 알레포 성채를 비롯해 역사적인 유적들도 크게 훼손됐다. 내가 여행한 나라들이어서 소식을 듣는 순간 더 안타까웠다. 여행은 타인의 친절에 온전히 기대는 일이다. 물론 지금은 구글의 친절에 기대는 일이 많아졌지만 여전히 내가 여행을 하는 이유는 타인을 만나기 위해서다. 튀르키예와 시리아를 여행하는 동안 나는 얼마나 자주 이들의 친절에 기댔는지 지금 생각해도 뭉클해진다. 특히 시리아는 여행자들 사이에서 ‘중동에서 가장 친절한 나라’라는 평을 듣던 곳이었다. 시리아를 여행하는 내내 그들과 수십 장의 사진을 찍었고 수백 번의 환영 인사를 들었다. 기억나는 일화를 몇 개만 나열하면 이렇다. 모나와는 알레포의 버스에서 마주쳤다. 옆자리에 앉은 그녀가 내게 말을 걸었다. 어디서 왔는지, 오늘 뭘 할 건지 묻더니 저녁에 자신의 집에 놀러오라고 초대했다. 그날 저녁, 약속 장소에 좀 일찍 도착해 모나를 기다리는데 옆집에서 나를 불러들였다. 그 집에서 저녁을 얻어 먹은 후 모나의 집 정원에서 가족과 함께 차를 마셨다. 하마에는 유명한 배낭족 숙소가 있었다. 그곳의 매니저 압둘라는 늘 웃는 얼굴이었다. 영어며 프랑스어를 능숙히 구사하고 최선을 다해 손님을 돕던 청년이었다. 내가 끼니를 거르고 다니는 것 같으면 꼭 불러들여 그와 함께 두어 번 식사를 같이하기도 했다. 내 카메라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수리할 곳을 찾느라 수도까지 전화며 이메일로 갖은 애를 써주기도 했다. “난 라마단도 엉터리로 지키고, 하루 다섯 번 기도도 안 하지만 내 마음에는 어떤 미움도 없어. 중요한 건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비는 마음이 아닐까”라며 웃던 그의 얼굴이 생생하다. 보리밭 사이로 거대한 열주가 늘어섰던 아파미아에서는 피크닉을 나온 와르다 가족이 나를 불렀다. 풀밭 위에 근사한 상을 차리더니 나를 주저앉혔다. 손대는 것마다 내 앞으로 끌어다 놓거나 입에 직접 넣어 주던 그들. 흥 많은 그녀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지나가던 양치기 소년들이 미소를 띠며 지켜보기도 했다. 원형극장을 보러 간 보스라에서는 파티자 아줌마 손을 잡고 그 집으로 가야 했다. 메카를 그린 그림이 걸려 있던 방에서 그 집 식구들과 차를 마시고 올리브오일과 피타 땅으로 점심까지 먹고 나왔다. 시리아에서는 이런 일이 매일 일어났다. 마음만 먹으면 내내 걸식을 하며 다닐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튀르키예-시리아 지진이 발생했을 때 나는 남미에 있었다. 나의 여행 친구들인 방과 후 산책단 일행과 함께였다. 일행이 서울로 돌아간 후 혼자 남아 여행을 계속하던 나는 유엔난민기구에 튀르키예-시리아 지진 긴급구호 지원금으로 50만원을 보냈다. 그 금액은 당연히 내게도 적은 돈이 아니다. 연수입으로 따지자면 나는 중하층 정도일 것이다. 코비드 이후 생계를 위해 ‘n잡러’로 뛰면서 에어비앤비, 글쓰기 수업, 여행 가이드 등 다양한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있다. 그 무엇도 큰 벌이가 되지는 않지만 딸린 식구가 없고 여행을 제외한 다른 일에는 별 욕심이 없어 그럭저럭 살고 있다. 내 재산이라고는 살고 있는 빌라의 전세금이 전부다. 노후자금 같은 것도 당연히 없다. 제발 융자를 받아 집부터 사라는 조언을 친구들에게 종종 듣는 처지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돈이 생기면 들고 나가서 여행에 다 써버리고, 빈털터리로 돌아와 다시 돈을 버는 삶을 20년째 이어가고 있다. 살아 보니 알게 됐다. 건사할 식구가 없고 내 몸이 건강하다면 산 입에 거미줄 치는 일은 여간해서는 일어나지 않으며 없으면 없는 대로 또 어떻게든 살게 되고, 절박한 순간에는 꼭 누군가의 호의가 찾아온다는 사실을. 게다가 오십 중반이 되니 돈에 대해 내가 지닌 생각이 맞다는 사실을 점점 확인하게 된다. 돈은 움켜쥐려고 하면 할수록 빠져나가고, 나누고 베풀수록 내 손안으로 들어온다는 사실 말이다. 이번 남미 산책단이 끝나던 날 환율과 물가상승으로 도중에 더 받았던 100만원을 모두에게 돌려줬다. 사실 환율이 가장 높던 시기에 항공권이며 투어 예약 결제를 했기 때문에 굳이 돌려줄 이유는 없었다. 단지 내가 그 여행을 준비하며 적절한 노동의 대가라고 생각했던 금액이 내 수중에 남았고, 그렇다면 그 외의 돈은 돌려주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전부 합치면 1천만원이라는 큰 금액이라 반만 돌려줄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욕심 부리지 말자고 마음을 다독였다. 무엇보다 나는 먹여 살려야 할 반려묘나 가족도 없기 때문에 내 노동의 대가를 산정하는 일에 빡빡하게 굴지 않아도 되니까. 내 수고를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고, 내가 구현하고픈 여행의 방식을 최대한 존중해주며, 없는 것을 바라며 불평하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해 감동하고 고마워하는 지인들과 함께 여행하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감사했다. 하고 싶은 일만 하며 내 멋대로 살아와 나밖에 모르던 사람이 생계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하며 날마다 배우고 성장하는 중이다. 무엇보다 어렵고 힘든 때일수록 사람을 귀하게 여겨야 함을 깨닫고 있다. 지난 1월, 남미로 떠날 때도 내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 준 분들이 많았다. 오랜 독자로 인연을 맺은 분은 500만원을 건네주셨다. 조금 더 편하게 여행하고,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책값을 미리 내는 거라 생각해 달라면서. 지인 몇 분도 맛있는 밥 한 끼 사먹으라며 용돈을 보내 오셨다. 그분들 덕분에 혼자 남아 이어갔던 중미 여행을 좀 더 편하게 할 수 있었다. 과테말라의 안티구아에 머물 때는 박물관이 된 멋진 호텔을 구경하며 감탄한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 글을 본 지인이 하룻밤 머물라면서 30만원을 보내왔다. 나는 그 돈으로 내 팔자에는 없는 고급 호텔에서 하룻밤을 머물렀고, 다음 날 전국장애인부모연대에 30만원을 보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타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덥석덥석 받느냐고? 나도 처음부터 이러지는 못했다. 다만 여행을 하는 일 자체가 내게는 타인의 호의에 전적으로 기대는 날들이었고, 무수한 도움을 받으며 다니다 보니 조금씩 익숙해졌다. 무엇보다 내게 많은 호의와 응원을 건네주신 M선배님이 그러셨다. 이제껏 쌓아 놓은 것들 수금한다 생각하고 다 받으라고. 그렇게 생각하기는 어렵지만 따뜻한 마음으로 내게 내미는 손길을 이제는 거절하지 않는다.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다른 방식으로 갚으면 된다는 것을 알기에. 그렇게 돌고 도는 호의가 있는 한 어떻게든 살아갈 힘을 내게 된다. 튀르키예와 시리아 지진의 생존자들에게도 연대의 손길이 계속 이어져 그들이 이 고난 속에서도 삶을 지속해 갈 용기를 얻기를 간절히 바란다.

[김남희의 길 위에서] 내가 이탈리아를 사랑하는 이유

역병이 창궐하기 전 해, 가을날의 며칠을 이탈리아 페루자에서 보낸 적이 있다. 안정환이 선수로 뛰던 축구팀이 있고, 피렌체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근처에는 아시시, 산지미냐노, 시에나 이런 이름난 곳들이 있었다. 페루자는 한눈에 마음에 들었다. 도시의 규모가 걸어 다닐 만큼 작고, 역사와 문화가 깃들어 있고,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페루자의 중심지는 11월4일 광장. 산로렌조 성당 계단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하기 좋은 곳이었다. 13세기 조반니 피사노가 설계한 마지오레 분수, 산로렌조 대성당, 프리오리 궁전이 다 이곳에 서 있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오래된 박물관 같았다. 헤이즐넛을 채운 다크초콜릿 바치(Baci)를 100년 전에 처음 만들어낸 초콜릿 회사가 이 도시에 있었다. 나는 매일 바치 초콜릿을 까먹으며 도시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텍스타일 박물관에는 1801년 이탈리아에서 세계 최초로 개발된 컴퓨터 형식의 직조 기계가 있었다. 디자인을 그린 필름을 넣으면 기계가 그걸 읽어내고, 사람이 손으로 직조를 하는 방식이다. 그 오리지널 기계를 사용해 전통적인 방식으로 텍스타일 제품을 생산하는 공방이었다. 공방의 가장 오래된 기계는 1836년산. 이 공방의 모든 기계가 19세기 오리지널 제품으로 이탈리아에서 이런 방식으로 천을 짜는 곳은 이곳 하나만 남았다. 세 명의 직조 장인과 함께 이 공방을 이끄는 사람은 마르타. 한때 페루자에서 가장 유명했던 텍스타일 공방이 그녀의 고조할머니가 운영하던 곳이었다. 대를 이어오던 공방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그녀의 어머니대인 1993년 문을 닫았다. 1994년, 마르타의 아버지가 경매에 나온 교회 건물을 구입했고 마르타는 다음 해인 1995년 그 교회에 공방을 다시 열었다. 공방은 아름다운 기물로 가득 차 있어 공간 자체가 품격 있는 전시장 같았다. “내가 철이 없고 어리석었지.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몰랐으니까. 12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의 테이블클로스를 하나 짜는 데 최소 22일에서 30일이 걸려. 근데 이탈리아에선 이런 제품의 세금이 68%야. 상상해 봐. 세금 내고, 장인들 월급 주고, 스튜디오 운영 비용을 마련하려면 테이블클로스 하나에 5천~6천유로(최소 600만원)를 받아야 한다는 계산이 나오거든. 그걸 누가 살 수 있겠어?” 그럼 도대체 어떻게 꾸려 가느냐는 내 질문에 그녀가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다행히 내 남편이 치과의사야. 돈은 그가 벌어오고 난 이것만 운영하는 거지. 비즈니스와는 상관없이!” 내 짐작으로는 국가의 보조금이 있지 않을까 싶지만 어쨌든 별로 돈이 되지 않는 일을 긍지와 자부심만으로 운영한다니 대단할 수밖에. 부자들의 역할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다음 날에는 스테인드글라스 박물관을 찾아갔다. 1859년 화가이자 스테인드글라스 장인이었던 프란시스코 모레티에 의해 설립된 스테인드글라스 공방이었다. 설립자의 외가 쪽 5대손인 아나와 그 남편 조르지가 공방을 꾸려 가고 있었다. 공방은 15세기 건물이라 후기 고딕 양식의 인테리어가 남아 있었다. 전날 갔던 텍스타일 공방도 그렇고, 이곳도 이탈리아의 힘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힘들고 귀찮고 돈이 되지 않아도 묵묵히 가업을 잇고, 그 전통을 외부인과 공유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내가 이탈리아를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것들 때문이다. 이 나라는 어디를 가나 박물관이며 유적지였다. 이탈리아의 소도시에서는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그저 내키는 대로 돌아다녀도 어디에나 볼거리가 넘쳤다. 어지간한 도시의 동서남북 어디로 걸어도 고층 건물 한 채 보이지 않는다. 명품 매장이 궁전이었고, 카페가 수도원이었고, 젤라토 가게는 귀족의 저택이었다. 오래된 것들에 대한 존중,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집착. 속도와 성장 같은 것에 연연하지 않는 느긋함,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고자 하는 태도. 이런 삶의 방식이 어디에나 배어 있었다. 수백년 전의 모습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건 얼마나 고단한 일일까. 촘촘한 규제의 그물에 갇혀 살겠구나, 내 집이어도 내 땅이어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겠구나, 이 도시의 주민들은 그런 부분에 대해 나름의 사회적 합의를 이뤘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돌아다녔다. 사람처럼 도시도 지나치게 아름다우면 고통을 겪는데 이탈리아는 도처에 그런 곳이 많았다. 인류 전체에 보물 같은 나라니 극성을 부리는 소매치기 같은 건 그냥 눈감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탈리아에 살아본 사람들은 행정 처리의 비능률성, 사람들의 다혈질적인 성격 같은 걸 맹렬히 불평했지만 지나가는 여행자인 내게는 그저 모든 것이 좋아 보였다. 깔끔하고 조용한 북유럽의 도시들에 비하면 좀 소란하고 슬쩍 지저분하기도 한 이탈리아가 사람 사는 곳 같아 더 정겨웠다.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는 왜 평생을 이탈리아에서 사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격정을 표출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거든요.” 그러면서 덧붙였다. 독일에서는 불법주차를 하면 이웃이 바로 신고하지만 이탈리아에서는 불법주차를 하면 이웃이 와서 몇 시에 경찰이 단속 나오는지 알려준다고. 오래전 이야기라 이제는 다르겠지만 작가의 이 말도 내 외사랑을 부추겼다. 오랫동안 찔끔찔끔 이 나라를 드나들기만 했던 내가 드디어 결심했다. 내년 한 해는 이탈리아어를 공부하며 이탈리아에서 1년쯤 살아보겠다고. 노래처럼 들리는 이 나라 말을 더듬더듬 구사하며 이탈리아 곳곳을 여행 다니겠다고. 그 혼돈과 무질서와 비능률의 세계로 뛰어들겠다고. 돌이켜 보면 내 삶 자체가 계획, 능률, 효용 이런 단어들과는 관계가 없었다. 그저 마음 가는 곳에 몸을 두며 살아왔을 뿐. 다만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데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해짐을 깨닫는 중이다. 그러니 내 용기의 바구니가 텅 비기 전에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나라에서, 마음이 가는 도시에서 살아보는 일을. 학비와 생활비는 마련돼 있느냐고 묻는다면 먼 산을 바라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완벽한 준비를 마친 후에 무언가를 시작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서울의 우리 집을 장기 렌트로 내놓고, 적금 담보 대출을 받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일단 저지르고 보는 거다. 길을 나서면 늘 새 길이 열리곤 했으니 이번에도 일단 시작해 보는 수밖에. 가지 않은 그 길을 미리 상상하는 것만으로 올 한 해는 설레며 지나갈 듯 싶다.

[김남희의 길 위에서] 눈부시게 번듯한 오스트리아 수도 ‘빈’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북부 이탈리아를 지배했던 광대한 제국. 모차르트, 하이든,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하이든, 슈트라우스, 말러가 활약한 음악의 수도. 영화 ‘비포 선라이즈’. 아인슈페너. 이 정도면 짐작할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대해 말한다는 사실을. 지난해 어쩌다 보니 빈을 두 번 왕복했다. 여름에는 인스브루크와 잘츠부르크를 거쳐 빈까지 다녀왔고, 지난 가을에는 동유럽 여행의 시작과 끝이 빈이었다. 사실 나는 빈이라는 도시에 큰 애정이 없었다. 빈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단지 취향의 문제일 뿐. 이 도시는 내 취향에는 너무 화려하고, 깔끔하고, 질서정연하다. 거대한 제국을 통치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640년 수도로서 긴 황금기를 누렸던 도시. 몰락했으나 몰락의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 곳이 빈이다. 역시 대제국의 수도였던 이스탄불은 도시의 거의 모든 곳에서 몰락의 흔적을 마주하게 되는데 빈은 여전히 눈부시게 번듯하다. 아무래도 나는 무너지고 바스러지는 것들, 폐허로 남은 과거의 영광, 사라진 광휘, 이런 것들에 흔들리는 사람이어서 빈은 늘 심심했다. 과장되게 말한다면 로마의 혼돈 속으로 뛰어들고 말지 빈의 질서 속으로는 투항하고 싶지 않다고나 할까. 반듯하기만 해서 살짝 지루한 모범생을 보는 것 같다. 게다가 물가도 비싸 지갑이 얄팍한 여행자를 옹색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빈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축물은 모차르트의 결혼식과 장례식이 치러졌다는 슈테판 대성당도, 제국의 심장이었던 호프부르크 왕궁도 아닌, 영구 임대주택 훈데르트바서 하우스였다. 환경운동가이기도 했던 건축가의 철학이 드러난 공동주택은 부드러운 곡선과 다채로운 색상으로 시선을 끌었다. 이렇게나 재미있고 참신한 영구임대주택이라니! 가우디가 설계한 카사바트요의 서민 버전 같았다. 당연하지만 빈에도 올 때마다 나를 설레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클림트와 실레의 그림이다. 클림트의 그림은 이 도시와 잘 어울린다. 금가루를 아낌없이 뿌린 화사하고 관능적인 그림들. 그의 삶조차도 그랬다. 큰 고생은 해본 적 없이 거의 삶 내내 전성기를 누렸던 화가. 생긴 건 수더분한 동네 아저씨 스타일인데 수많은 여인과 염문을 뿌렸고,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은 채 자유연애를 즐겼다. 거기에 더해 영원한 연인 에밀리 플뤼게까지 있었던 복 많은 남자다. 사망한 후 14건의 양육비 청구 소송을 당하기도 했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키스’나 ‘유디트’ 같은 그의 대표작도 좋지만 나는 초록에 둘러싸인 작은 집들을 그린 그림을 더 좋아한다. 몽환적이며 에로틱한 클림트의 그림은 자연히 눈이 가지만 내 영혼이 이끌리는 곳은 실레다. 강렬한 선들, 어두운 색채, 기괴한 포즈들, 대범한 노출. 어딘가 뒤틀린 내면을 응시하는 것 같은 그림들이다. 서로를 존경하며 좋아했던 두 화가는 20세기 초 빈 미술의 황금기를 공유했다. 그 시절 빈에는 수많은 예술가와 철학자가 활약했다. 그림에서는 클림트와 실레, 코코슈카 같은 이들이, 건축에서는 오토 바그너와 요제프 호프만, 아돌프 로스, 디자이너 콜로만 모저, 문학의 카를 크라우스나 슈테판 츠바이크, 철학의 비트겐슈타인, 의학의 프로이트, 음악의 구스타프 말러 등. 그들은 카페 센트럴이나 데멜에 모여 저항을 도모하고, 관습을 거부하고, 인간의 심연을 응시했다. 때마침 빈의 레오폴트 박물관에서는 이들이 활약하던 1900년을 주제로 한 전시가 한창이었다. 빈에서의 마지막 날은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천천히 걸어다녔다. 걷다 보니 흰색 건물 위에 황금색 월계수 잎이 촘촘히 박힌 둥근 돔이 눈에 들어왔다. 빈 분리파의 성전 제체시온이었다. 낡은 인습에 빠져 있던 빈 미술가협회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며 결성된 빈 분리파. 귀족과 왕실, 부르주아만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예술을 추구해 노동자계급에게는 입장료도 받지 않았다는 곳. 그 시절의 빈은 지금보다 훨씬 활기찼을 것이다. 옛것과 새것, 전통과 혁신이 충돌하며 새 시대를 향해 열정을 쏟아붓는 예술가들이 있었으니. 제체시온의 지하에서 눈물을 쏟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베토벤 프리즈’를 보러 온 건 두 번째였기에. 베토벤 프리즈는 클림트가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의 마지막 악장 ‘환희의 송가’를 모티브로 만든 작품이다. 행복을 향한 염원이 적대적인 힘을 넘어 시를 통해 이뤄지는 과정을 묘사한 길이 34m의 프레스코화 대작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음악을 들으며 그림을 볼 수 있도록 한 편에 헤드폰 세트가 걸려 있었다. 헤드폰을 쓰고 맨 오른쪽 벽, 행복의 염원이 이루어지는 그림 ‘온 세상을 향한 입맞춤’ 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음악을 들었다. 노래도, 그림도 지나치게 생생했다. 귓전을 터뜨릴 듯 격렬하게 송가가 울려 퍼지고, 눈앞에는 클림트의 황금색이 빛나고 있었다. 부드럽고 상냥한 광채가 가득한 그림이었다. 노래가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갈수록 내 감정도 격렬히 고조돼 갔다. “환희여! 신의 아름다운 불꽃이여! 온 세상에 입맞춤을!” 합창단원의 노래가 절정을 향해 치달을 때 울음이 터졌다. 이 아름다운 세상을 더는 누리지 못하는 엄마 생각이 나서였다. 삶을 향해 온몸으로 입 맞추며 살았던 엄마. 두 달 전 세상을 떠난 엄마에게 이 그림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엄마는 클림트의 그림을 좋아했을 게 틀림없다. 함께 여기 나란히 앉아 쏟아지는 삶의 환희를 누리고 싶었다. 고단한 날들에도 살아있음의 축복을 매 순간 누리며 살았던 엄마는 사라지고, 남은 생에 아무런 미련이 없는 나만 살아있는 현실이 거짓말 같았다. 그토록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렇게나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낸 이의 의지는 또 얼마나 경이로운지. 눈물을 멈추지도 못하고 한바탕 울고 나오니 막혀 있던 가슴 한 편이 조금은 뚫린 것도 같았다. 사람이 위로해 주지 못하는 상처를 때로는 그림이나 음악이 어루만져 주기도 한다. 나는 그 찰나의 시간을 통해서야 뒤늦게 빈의 저력을 인정하게 됐다. 그날 오후에는 오스트리아 남자와 결혼해 빈에서 사는 지인을 만났다. 그녀는 이 도시가 살수록 좋은 곳이라며 극찬했다. 잘 갖춰진 사회보장제도에 더해 이 도시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가 있다고, 여기서 살기를 잘했다고. 나는 아무래도 빈을 사랑하게 된 걸까? 때마침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전시 티켓을 끊으려는 걸 보니. 늦가을 아인슈페너 한잔과 함께 빈의 정취에 빠져 봐야겠다.

[김남희의 길 위에서] 유럽의 ‘이동권’ 이야기

지난해 봄, 다시 카미노데산티아고를 걸었다. 이번에는 포르투갈의 포르투에서 시작해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로 향하는 14일의 여정이었다. 어느날 숲길에서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고 걷는 여성 순례자와 마주쳤다. 오르막은 아니었지만 길이 고르지 않았다. 유모차를 밀며 걷기에는 힘이 꽤 드는 길이었다. 나무 그늘에 앉아 쉬던 우리 일행이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다가갔다. 초콜릿을 건네니 그녀가 환히 웃으며 받았다. 포르투갈 길은 급한 경사가 없어 쉬운 길로 꼽히지만, 숲이 많았다. 배낭만 메고 걸어도 힘든 길을 아기와 함께 오다니! 그 용감한 결단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내면의 용기에 더해 그녀에게는 어떤 믿음이 있지 않았을까. 이 길에서 혼자가 아닐 거라는, 도움을 주는 선의의 손길이 있을 거라는 믿음 말이다. 그 믿음대로 그녀에게는 도움의 손길이 줄곧 이어졌다. 우리도 그녀의 유모차를 밀어주거나, 들어서 옮겨 주기도 했다. 도움을 받는 이도, 도움을 주는 이도 자연스러웠다. 우리가 산티아고에 들어선 다음날, 그녀와 아기도 타인의 친절에 기대 무사히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카미노의 정신이 오롯이 구현된 순례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가느냐가 중요하니까. 우리가 걷기에 급급해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그녀를 모른 척했다면? 제대로 카미노를 걸었다고 말하기 부끄러울 것이다. 그녀 또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오로지 혼자 힘으로 걸어야 했다면 좀 서글프지 않았을까. 그녀의 이야기를 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읽은 이가 질문을 남겼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자신도 그 길을 걸을 수 있겠느냐고. 전동휠체어로 카미노를 걷는 일은 외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런데 스페인에는 장애인들이 카미노를 걸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단체들이 있다고 했다. 전 구간은 아니더라도 카미노의 일부라도 경험할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모아 주는 단체가 활동하고 있었다. 카미노를 관리하고 유지하는 공공기관도 ‘모두의 카미노’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지점이라고 했다. 모두를 위한 카미노라니. 장애인도, 아이도, 노인도 걸을 수 있는 카미노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설렜다. 단지 구호로 끝내지 않고, 현실화를 위해 그들은 노력하고 있었다. 갈리시아에서는 모든 알베르게(순례자 전용 숙소)가 장애인 화장실과 휠체어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방을 하나씩 갖춰야 한다고 법으로 정해 놓았다. 실제로 우리가 머문 알베르게마다 장애인 화장실이 있었고, 알베르게 안에 턱이 없어 휠체어가 이동하기에 수월했다. 카미노가 끝난 후 나는 코로나에 걸려 스페인에 남아야 했다. 다행히 증상은 가벼웠다. 스페인은 격리 규정이 해제된 후여서 마스크를 쓰고 돌아다닐 수 있었다. 코비드 유목민이 돼 스페인을 떠돌았다. 스페인 남부 코르도바에서는 마침 안뜰 축제(저마다 정성껏 가꾼 자기 집 안뜰을 개방하는 축제)가 한창이었다. 안뜰을 공개한 집들이 표시된 지도 한 장을 들고 매일 남의 집 정원을 기웃거렸다. 지도에는 휠체어가 진입할 수 있는 집들이 따로 표시돼 있었다. 작은 도시 아빌라의 관광안내소에서 받은 지도에도 휠체어가 진입할 수 있는 모든 거리가 표시돼 있었다. 비단 스페인만이 아니다. 유럽의 미술관이나 상점은 휠체어 장애인의 접근이 가능한 곳이 많았다. 공공기관은 말할 것도 없다. 미술관에서 휠체어에 앉아 그림을 감상하는 이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그 뒷모습을 부러운 마음으로 바라보고는 했다. 아무렇지 않은 그 주변의 공기까지 부러웠다. 그들에게 시선이 멈추는 건 나에게 장애인 가족이나 벗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들의 모습에서 나의 미래를 상상해보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혼자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삶이 불가능해지는 날이 온다면? 그때 내 삶의 질을 떠올려 보면 암담해진다. 슬프게도 나에게는 믿음이 없다. 내 이웃이, 내 조국이 나를 보호해줄 것이라는 신뢰가 없다. 나에게 가장 절실한 국가의 역할은 장애인, 성소수자, 어린이, 노인, 여성, 이주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일이다. 우리는 모두 사회적 약자로 삶을 시작해 사회적 약자로 삶을 마감하기에. 선진국의 척도 또한 내게는 국가가 사회적 약자의 삶에 어떤 역할을 해주는가, 그 사회가 약자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가다.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기에 권리를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보호하는 나라를 꿈꾼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정당의 대표였던 이가 장애인 이동권 시위에 대해 막말 수준의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고, 언론은 아직도 “시민을 볼모로 어쩌고” 등의 헤드라인을 쏟아내는 나라이니. 선진국 진입을 자랑하는 지금에도 장애인들이 이동권 시위를 해야 할 정도로 우리는 그들에게 무관심했다. 화를 낼 일이 아니라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30년 전 처음 유럽을 여행할 때 의문이 들었다. 아니, 선진국이라면서 길에 왜 이렇게 장애인이 많은 거지? 인구 대비 장애인 수가 특별히 많아서가 아니었다. 인구의 10%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장애인들은 외출을 하지 못해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나라의 장애인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장애인을 비롯해 교통약자가 탑승할 수 있는 저상버스의 도입률은 현재 30%에 불과하다.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의 경우 휠체어가 탑승할 수 있는 시외·고속버스는 전체 노선의 4%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도 장애인들은 목숨을 버려 가며 싸워야 했다. 지난 여름, 밥벌이를 하느라 여러 번 바깥 나들이를 했다. 인천공항에 내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올 때마다 트렁크를 끌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장애인들의 목숨 값으로 생겨난 결과물에 무임승차하며 생각했다. 비장애인이 설계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장애인들이 포기하는 일 없이 더 끈질지게 싸워 주면 좋겠다고. 세상은 한 번도 저절로 나아진 적은 없었다. 우리 삶의 질은 언제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소수의 사람들 덕분에 향상돼 왔다. 그들이 싸울 때 함께 선로에 드러누울 용기는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있다. 지하철이 멈췄을 때, 평생 그 지하철을 타지 못하고 살아온 누군가의 삶을 상상해보며 30분이든, 세 시간이든 기꺼이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그 시위는 결국 내 미래를 위한 싸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김남희의 길 위에서] 에어비앤비 호스트로 산다는 일

바드 아우시에 갈 계획은 없었다. 호숫가의 뾰족탑 교회 풍경으로 유명한 할슈타트에 가던 길이었다. 할슈타트는 에니메이션 겨울왕국의 배경이 됐다는 소문으로 ‘오버 투어리즘’을 앓고 있었다. 인구 8백 명의 작은 마을이 수용할 수 없는 수의 관광객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그 대부분은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 넘쳐나는 쓰레기, 빈번한 사생활 침해, 치솟는 물가 등 주민 삶의 질이 현저히 떨어졌다. 마을 곳곳에는 한국어와 중국어, 일본어로 ‘쓰레기 버리지 않기’, ‘사적인 공간 침해하지 않기’, ‘소음 주의’ 등의 안내판이 붙어있었다. 머물기에는 여러모로 부담스러웠다. 당연히 숙박비도 비쌌다. 에어비앤비 앱에서 외곽의 숙소를 골랐다. 할슈타트에서 기차를 타고 이십 분쯤 가는 곳이 바드 아우시였다. 2천 미터 내외의 산들이 마을을 감싸고 있었지만 산골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에어비앤비에 올라온 알렉산드라의 집은 평이 꽤 좋았다. 에어비앤비는 공유 경제에 기반한 숙박업이다. 원래 의미는 자기 집의 남는 공간을 숙소로 내놓고 손님과 주인이 교류하는 곳이었다. 이 앱이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에어비앤비의 본래 의미는 퇴색하고 변해갔다. 자기 집이 아닌 아파트를 몇 채씩 빌려 세를 놓거나 전문 업체에 관리를 맡기는 ‘임대업자’들이 늘어났다. ‘비대면 체크인’에, 모든 응답이 문자 메세지로 이루어지는 일도 흔하다. 늘 혼자 다니느라 대화가 아쉬운 나는 가끔 에어비앤비에서 숙소를 고르곤 한다. 하지만 점점 주인 얼굴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런데도 버릇을 못 끊고 사람이 그리워질 때면 에어비앤비를 뒤적인다. 알렉산드라의 집을 예약할 때도 큰 기대는 없었다. 예약 후 받은 첫 문자의 내용은 도착 시간을 알려주면 기차역으로 픽업을 오겠다는 내용이었다. 기차역에서 숙소까지는 걸어서 13분.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나는 도착 시간을 알려줬다. 기차역으로 나를 데리러 온 알렉산드라는 내 또래의 여성이었다. 숙소로 가는 길에 그녀가 이 근처에 예쁜 호수가 있는데 둘러보고 가겠냐고 물었다. “당연히 가죠.” 우리는 호숫가에 차를 세워두고 호수 주변을 천천히 걸었다. 7월 중순의 오스트리아는 날씨가 좋았다. 시원한 바람이 산들산들 불었고, 하늘은 붓질 한 번으로 꽉 채운 캔버스처럼 푸른 빛으로 가득했다. 어디에도 마스크를 쓴 사람이 없어서 코로나 따위는 이미 사라진 것 같은 분위기였다. 호숫가의 카페에서는 결혼식 피로연에 온 이들이 라이브 연주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해변을 뛰어다니는 아이들 너머로는 작은 조각배 한 척이 천천히 흘러갔다. 마음이 몰랑몰랑해지는 풍경이었다. 그녀에게 손님과 자주 산책을 하냐고 물었다. “그러고 싶지만 바쁠 때가 많아 자주 못해요. 하지만 손님을 통해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해요.” 그녀는 어렸을 때 바드 아우시를 떠나 비엔나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고, 십 년 전 고향인 이곳으로 돌아와 에어비앤비를 시작했다. 소란스럽고 소비적인 도시에서의 삶에 지쳤다고 했다. 그녀는 녹색당의 열렬한 당원이었고 이 지역 위원장이기도 했다. 여행을 좋아하고, 낯선 문화에 호기심이 많고,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다는 것. 둘 다 싱글이며, 에어비엔비 호스트라는 점. 우리는 공통점이 많아서인지 이야기가 잘 통했다. 호수를 한 바퀴 걷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가 다시 물었다. “옆 마을에서 소방관 돕기 자선 바자를 하는데 가볼래요?”, “와이 낫.” 다시 차를 몰고 10여 분을 달렸다. 장터에는 옷과 가구와 그릇, 책 등 다양한 물건이 나와 있었다. 집집마다 무언가를 무료로 내놓고, 수익금은 전액 소방관들의 장비 마련을 위해 기부한다고 했다. 동네 청년들로 꾸려진 밴드가 음악을 연주하고, 전통옷 던들을 차려입은 청년들이 간이 주점에서 술과 음료를 팔았다. 나는 십자수를 놓은 테이블 매트와 방석 커버를 1유로씩 주고 샀다. 알렉산드라는 손님 방에 놓을 램프와 좋아하는 작가의 책 예닐곱 권. 천막을 쳐서 만든 주점에서 맥주를 마시며 물었다. “소방관들이 왜 기금 마련을 위한 바자회를 열어요? 국가가 보조를 안 해줘요?”, “이런 작은 마을은 국가 보조가 없어서 훈련도, 장비 구입도 알아서 해야 해요. 그래서 마을마다 소모품인 장갑이나 헬멧, 방호복 같은 장비 마련을 위해 바자회를 열고는 하죠.” 우리보다 훨씬 잘 사는 오스트리아마저도 소방관에 대한 처우가 좋지 않은 건가 싶었다. 우리는 각자의 전리품을 손에 들고 뿌듯한 마음으로 귀가했다. 다음날은 기차와 배를 갈아타고 할슈타트로 건너갔다. 이 지역 경제와 문화의 중심이었던 소금광산 투어는 꽤 알차고 재미있었지만, 마을은 딱히 볼거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사람이 너무 많았다. 어서 바드 아우시로 돌아가고 싶었다. 마을로 돌아와 그녀가 추천한 산책로를 걸었다. 할슈타트에서 나는 반갑지 않은 관광객일 수 있는데 이곳에서는 미움받지 않는 존재인 것 같았다. 일단 외지인으로 붐비지 않으니 부담이 없었다. 바드 아우시는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그녀가 왜 비엔나를 떠나 이곳에 정착했는지 알 것 같았다. 7박 8일의 짧은 오스트리아 여행 중 가장 충만했던 시간은 바드 아우시에서 보낸 이틀이었다. 그곳에 알렉산드라의 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외롭고 고단한 여행자의 어깨를 담담히 토닥여주는 손길이 있었기에. 나도 우리집 아래층을 여성 전용 에어비앤비로 활용하고 있다. 우리집을 찾는 손님의 대부분은 이삼십대 여성들. 평소에는 만날 일이 거의 없다. 아침을 먹는 자리에서 그녀들은 꽤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때로는 눈물을 떨구며 속내를 드러내기도 한다. 내가 모르는 그녀들만의 세상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럴 때면 앉은 자리에서 여행을 하는 것 같다. 내가 차려주는 밥상은 어쩌면 미끼인지도 모르겠다. ‘자, 나는 당신을 위해 이렇게 공을 들였어요. 당신도 무언가 내놓아보세요.’ 그렇게 말을 하는 일은 물론 없지만, 밥은 사람의 마음을 약하게 만든다. 한 공간에서 잠을 자고, 마주 앉아 밥을 먹는 것만으로 사람의 마음은 느슨해진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내내 누군가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한 사람을. 낯선 여행지에서 우리 마음의 빗장은 쉽게 헐거워진다. 스쳐 지나는 사람이기에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털어놓기도 한다. 예기치 않았던 그런 순간을 통해 어떤 해방감을 맛보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마음을 나누는 그 드물고 귀한 순간을 위해 오늘도 나는 에어비앤비의 문을 두드린다. 지금은 헝가리를 떠도는 여행자로 문을 두드리지만, 돌아가면 내 집 문을 두드리는 이를 맞이할 것이다. 그 양쪽 세계를 오가며 나는 여전히 꿈꾼다. 살아가는 일의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그 찰나의 소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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