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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22-⑤ 신에게 바친 해골제단과 성스러운 우물

■ 촘판틀리 ‘촘판틀리(Tzompantli)’는 ‘해골 제단’이라는 뜻이다. 치첸이트사가 당시 아스테카 제국의 테오티우아칸 문화권과 교류가 있었다는 증거로 신에게 인신공희 제물로 바친 사람 머리뼈를 그대로 묘사해 놓은 모습을 하고 있다. 보통 베어낸 사람 머리를 막대기에 소시지 끼우듯이 끼워 줄줄이 세워 놓는 특이한 조형물을 촘판틀리라고 부르며 메소아메리카와 멕시코 지방에서 유행했다. 이 제단은 그 촘판틀리의 모습을 돌에 정교하게 새겨 놓은 모습이다. 그 잔혹성과 독특함 덕분에 치첸이트사의 명물이기도 하다. ■ 성스러운 우물 ‘성스러운 우물’로 마야 문명이 번성했던 유카탄반도는 전체가 거대한 석회암 평원으로 이뤄져 있다. 그 덕분에 석회암 침식 작용으로 군데군데 거대한 싱크홀이 생겼는데 이곳에 물이 고인 우물을 세노테라고 한다. 그중 치첸이트사에 있는 세노테는 지름 60m, 깊이 27m에 달하는 대형 세노테에 속한다. 야인은 이 세노테를 숭배해 제물을 이곳에 바쳤는데 발굴 과정에 호수 아래를 샅샅이 조사한 결과 수많은 옥, 보석, 도자기, 황금, 흑요석, 조개껍데기, 옷, 그리고 다수의 유골이 발견됐다. 인간을 이곳에 던져 넣어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는 증거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22-③ 신비의 피라미드 ‘엘 카스티요’

치첸이트사 단지에 들어서자 거대한 석조 건축물 ‘엘 카스티요’ 피라미드의 위용에 압도되는 느낌이다. 치첸이트사 대표 건축물이자 신전인 피라미드는 네 변의 길이가 각각 60m, 높이 30m, 9층의 계단식 피라미드로 꼭대기 신전 높이는 6m다. 뱀 신(神)인 ‘쿠쿨칸(깃털 달린 뱀)’을 섬기는 신전으로 밤낮의 길이가 같은 춘분과 추분 때 북쪽 계단에서 연출되는 독특한 효과를 볼 수 있다. 일몰 무렵 북쪽 면 계단 맨 밑에 있는 깃털 달린 뱀의 머리 조각 쪽으로 그림자가 드리우는데 그 형상이 마치 거대한 뱀이 치첸이트사 계단에 몸을 대고 땅으로 내려오는 듯해 일명 ‘쿠쿨칸 피라미드’라고도 한다. 신전 내부에는 차크물 석상과 재규어 형상의 옥좌가 놓여 있다. 피라미드는 9세기에 완성한 것으로 추정하는데 각 면에 있는 계단이 91개이므로 사면의 계단 총수는 91x4=364단, 여기에 정상의 1단을 더하면 365단이가 되는 신비한 건축물이다. 이 피라미드와 부속 6개의 건축물에도 예외 없이 깃털 달린 뱀이 새겨 있는 석주(石柱)가 있다. 신전 이름이 엘 카스티요인 것은 이 신전을 처음 본 스페인 병사들이 마치 성채를 닮았다 하여 ‘성(城)’이라는 뜻의 ‘엘 카스티요’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엘 카스티요 유적 특정 위치에서 많은 사람이 손뼉을 친다. 손뼉을 치면 그 소리는 신전 꼭대기에 반사돼 마치 새 소리를 연상시키는 메아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여행객들은 소리가 잘 나는 지점에서 누구나 한 번씩 손뼉을 치며 신비한 현상을 체험한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22-②치첸이트사 유적지 관람객 '북적북적'

칸쿤에서 치첸이트사까지는 프리미엄 고속버스로 약 3시간 소요될 정도로 가깝지 않은 곳에 있다. 여행객을 태운 볼보 버스는 터미널을 출발한다. 버스 탑승객은 대부분 치첸이트사를 찾아 떠나는 여행자들로 세계 곳곳에서 온 사람들이라 모습과 사용하는 언어가 각양각색이다. 버스가 칸쿤을 벗어나자, 아열대 지역 특유의 푸른 수목 지역이 펼쳐진다. 유카탄반도는 건조한 석회암 지대라 세노테를 알리는 이정표가 길가에 즐비하고, 이름이 알려진 곳은 각 나라에서 온 젊은이들이 물놀이를 즐기려 붐빈다. 버스에서 어제 탐방한 툴룸 유적지 여행기를 페이스북에 업로드하고 있는데, 통로 옆자리에 있는 멕시코 젊은 친구가 말을 건다. 젊은 남매는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길인데, 반도체·조선·자동차와 기계공업이 발전한 한국에 대하여 관심이 많고, 언젠가 기회가 되면 방문하고 싶다는 말과 함께 치첸이트사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쉬지 않고 들려준다. 치첸이트사는 유카탄반도에 있는 북부 마야 문명의 도시 중 가장 거대한 규모의 유적으로 ‘이트사족(族)의 우물 어귀’라는 의미이다. ‘치(Chi)’는 어귀를 의미하고, ‘첸(chen)’은 우물을 의미하며 ‘이트사(Itza)’는 당시 마야 문명에서 권력을 갖고 있는 귀족 혈통을 일컫는 말이다. 치첸이트사는 당시 종교· 군사· 정치· 상업의 중심지로 전성기에는 3만5천명이 거주했을 것으로 고고학자들은 추정한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22-① 마야문명이 남긴 최대의 유적 '치첸이트사'

인류 문명은 큰 강을 낀 평야와 살기 좋은 기후조건을 갖춘 지역에서 탄생했으나 고대 마야 문명은 메소아메리카 열대 밀림에서 탄생했다. 지리적으로는 멕시코 동남부,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북부, 벨리즈, 온두라스 서부, 유카탄반도 중심으로 광활한 밀림에서 번영했다. 마야 문명은 당시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발달한 언어 체계와 고도의 문화를 누렸으며 높은 수준의 예술·건축·수학·달력·천문학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은 멕시코 유카탄반도 최대 유적인 치첸이트사를 찾는 여정이다. 치첸이트사는 유카탄반도 북서부 도시 메리다에서 동쪽으로 약 110㎞, 칸쿤에서는 약 200㎞ 떨어진 곳에 있는 고대 도시이자 유적지다. 치첸이트사는 마야 문명이 남긴 세련된 유적 중 한 곳으로 가장 잘 보존돼 있고 유적은 마야 문명의 고전기 후기(600∼900년)에 지은 도시다. 어제 툴룸 유적을 탐방하고 너무 늦게 호텔로 돌아와 수면을 몇 시간밖에 취하지 못해 몸은 피곤하나 마음은 이미 멕시코 최고의 마야 유적 치첸이트사에 가 있다. 이른 아침 여명이 트자마자 호텔을 떠나 칸쿤 버스터미널로 향한다. 지리적으로 북반구에 속한 칸쿤도 1월은 겨울철이나 아열대기후의 해맑은 아침 기운은 싱그럽다. 터미널에 도착하자 이미 많은 여행자가 어디론가 떠나기 위해 옹기종기 모여 타고 갈 버스를 기다린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21-⑪ 칸쿤 가는 버스⋯ 아찔한 해프닝

오전 1시에 칸쿤 버스터미널에 도착했으나 대중교통이 없어 걸어서 숙소로 향한다. 호텔에 도착하니 로비 불이 꺼져 있고 출입문까지 잠겨 있다. 비상벨을 누르자 불이 켜지고 당직 매니저가 문을 열어준다. 상황 설명 없이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꼬리가 보이지 않게 방으로 향하는데 등 뒤에서 ‘굿나잇’ 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에 들어가 배낭을 내려놓자 쌓였던 긴장이 한순간에 풀린다. 서로 마주 보며 긴 헛웃음으로 힘든 하루 일정을 마무리한다. “많은 사람은 실수 때문에 실패하지 않는다. 그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시도하는 걸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프로 복서 조지 포먼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오늘 연이은 실수를 자책하기보다 위로하며 안주하지 않고 내일도 치첸이트사를 찾아 떠나려 한다. 여행은 부지런하고 용기 있는 자만이 즐길 수 있는 전유물인가. 아니다. 여행은 새로운 삶을 살고 싶은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자유롭게 도전할 수 있다. 그 길은 비록 무지개 길이 아니라 할지라도 여행에서 얻은 추억과 경험은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행복을 준다. 그리고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가지 않던 인생의 샛길에서 낭만을 즐길 수 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21-⑩ 순간의 해프닝이 주는 자유여행의 '묘미'

여유를 가지고 툴룸 푸에블로 버스터미널에 갔으나 칸쿤으로 가는 프리메라 플러스 버스가 결차돼 오후 11시에 일반버스만 있다고 한다. 대안이 없어 차액을 환불받고 막차를 예약한다. 서쪽 하늘에 검붉은 저녁노을이 을씨년스럽다. 자유 여행은 오늘처럼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할 때 슬기롭게 대처해야 한다. 남은 시간을 여유롭게 즐기려 마을 큰길을 따라 이곳저곳 기웃거린다. 마침 토요일이라 재래시장 앞 광장에는 라틴음악 연주가 한창이고, 여행객은 현지인과 어울려 춤을 추는 등 볼거리가 많다. 길옆 테라스 카페에 앉아 토속 맥주와 타코로 예정에 없는 곳에서 이국의 밤을 즐긴다. 버스터미널로 갔으나 버스가 도착하지 않았다. 네덜란드에서 온 젊은 친구가 멕시코에서 버스가 정시에 오면 비정상이고 늦게 오는 것이 정상이라고 투덜댄다. 10여분이 지나자 칸쿤으로 타고 갈 막차가 도착하고 내일 오전 1시쯤 도착한다고 알려준다. 버스에 타자 카리브의 수증기를 품은 구름은 어둠 속에 밤비를 뿌리고 피곤한 몸은 틈도 주지 않고 깊은 잠에 빠진다. 한 시간 이상 달린 듯한데 어느 지역에선가 버스는 정차하고 많은 승객이 짐을 챙겨 내린다. 잠결에 배낭을 메고 따라 내렸다. 순간 느낌이 이상하다. 칸쿤을 떠날 때 터미널이 아닌 것 같아 황급히 되돌아가 버스에 올라탄 후 앞 좌석 승객에게 이곳이 ‘칸쿤’이냐고 묻자 ‘한참 더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낭패를 볼 뻔한 순간이다. 순간의 해프닝은 시간이 지나면 색다른 추억이 되지만 버스가 떠났더라면 그날은 칸쿤으로 돌아갈 수 없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21-⑨ 해저 고대 문명의 흔적... 툴룸 유적지 ‘해저 동굴’

툴룸 주변에는 해저 고대 문명의 흔적이 남아 있다. 2020년 제로니모 아빌레스가 이끄는 수중 고고학 탐험대가 툴룸 유적지 해저 동굴을 발굴해 최소 9천900년 전에 살았던 약 30세 여성의 해골을 공개했다. 측정에 따르면 동굴에서 발견된 다른 세 개와 마찬가지로 해부학적으로 머리뼈의 크기는 중두(中頭)일 것으로 추정한다. 해골에 있는 세 개의 흉터는 그녀가 단단한 무언가에 맞아 머리뼈가 부숴졌음을 보여준다. 유적지에 먹구름이 밀려들고, 곧 어둠이 드리울 시간이다. 온 길을 되돌아 느릿느릿 툴룸 푸에블로로 걸어간다. 발걸음이 무겁다. 오늘 하루 걸음걸이 수가 3만보를 넘겼다. 배도 고프다. 가는 길에 만난 손수레 포장마차에서 침샘을 자극하는 냄새가 코끝에 닿는다. 마침 자전거 여행 중인 젊은 독일 부부가 부리토 맛이 좋다며 먹어볼 것을 권한다. ‘시장이 반찬’이라는데 엉겁결에 부리토를 주문해 허기를 해결한다. 이렇게 맛있는 부리토를 맛본 적은 없다며 엄지를 치켜세워 만족감을 표현하자 독일 청년과 포장마차 주인이 매우 흡족해한다. 포장마차의 부리토는 토르티야를 펼쳐 놓고 숯불에 구운 돼지고기, 양파와 고추 등 각종 채소에 소스를 듬뿍 뿌려 우리네 김밥처럼 돌돌 말아 싼다. 아이스콘 모양의 핑거푸드타코를 먹을 때 흘릴까 염려하는데 포장하듯 양쪽을 감싼 포장마차의 부리토는 먹기 편하고 맛도 일품이라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21-⑧ 자연 예술의 극치 ‘카리브해’

3시간여에 걸쳐 유적을 돌아보고 엘 카스티요 앞에서 카리브해를 바라보며 망중한의 여유를 즐긴다. 옥빛 바다가 이렇게 아름다울까! 백사장에서 뛰노는 어린이 모습에서 ‘천진난만’을, 가족과 연인들 모습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이보다 더 순수하고 아름다운 말이 있을까. 유적지 동쪽 해변은 카리브해에서 손꼽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엘 카스티요 아래 가파른 나무 계단을 이용해 백사장으로 내려가면 고운 백사장과 옥빛 바다가 기다린다. 해변에서 절벽 위로 바라본 성채는 자연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매혹적인 풍경이다. 툴룸은 이 지역의 다른 도시나 섬과 마찬가지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산호초 생태계인 ‘메소아메리카 배리어 리프’에 인접해 있어 주변 지역은 청록색 카리브 바다, 백사장, 세계적 수준의 스노클링 및 다이빙을 즐기기에 완벽한 장소다. 툴룸엔 564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고 전성기인 1200~1521년에 중요한 항구 도시 역할을 하며 카리브 해안을 따라 벨리즈까지 해양 상업을 통제했다. 1518년 스페인 정복자 후안 데 그리잘바가 이곳을 항해할 때 그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광경에 놀랐다고 한다. 그는 항해 일지에 “건물은 빛나는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해변 망루 꼭대기에서는 의식용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스페인이 정복한 지 불과 75년 만에 유럽에서 전염된 질병으로 인구가 줄어들면서 도시는 버려졌고 그 후 폐허가 됐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21-⑦ 견고한 성벽 자랑하는 ‘툴룸 유적지’

툴룸의 건축적 특징은 유카탄반도 동해안에 있는 마야 유적의 전형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건축물은 낮은 하부 구조에 바닥을 둘러싼 계단을 배치하고 출입구는 좁으며, 기둥은 지지대로 사용됐다. 벽체 상단에는 벌어지지 않게 몰딩 돼 있고 제단이 차려진 방 뒷벽에는 작은 창이 있다. 지붕은 기둥과 아치형 석조로 덮은 천장이 있는데 이런 유형의 건축물은 치첸이트사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유사하다. 유적지에 흩어져 있는 건축물과 성곽을 둘러본다. 툴룸 유적지 동쪽은 해변 절벽 위에 위치해 성벽이 없고 나머지 삼면은 바위와 흙을 사용해 성벽을 쌓았다. 성벽 높이는 3~5m에 이르고 두께는 8m로 매우 두터우며 길이는 총 740m에 이르는 상당한 크기의 성채다. 마야 시대 이 정도의 거대한 성벽을 쌓으려면 웬만한 신전 하나를 짓는 것보다 더 많은 양의 돌과 노동력이 필요했을 터인데, 이렇게까지 단단하게 성벽을 쌓은 이유는 이곳이 무역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적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보기 드물 정도로 견고한 성벽을 쌓은 덕분에 툴룸은 마야 도시 전체에서 가장 단단한 요새 중 하나로 평가한다. 성채에는 모두 다섯 개의 좁은 출입문이 있는데 북쪽과 남쪽에 각각 두 곳, 서쪽에 한 곳 있으며 동쪽은 해안절벽이라 별도의 문이 없다. 성벽 북쪽 근처에는 유카탄반도 일대에서 볼 수 있는 카르스트 지형의 수직 동굴인 작은 세노테(Cenote)가 성채에 신선한 물을 공급했다. 툴룸은 마야 유적에서 가장 유명한 요새 중 한 곳인데 가장 큰 특징은 인상적인 성벽이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21-⑥동부 해안 주요 상업항구 ‘툴룸’

이곳은 고고학적 관점에서 볼 때, 낮에는 태양의 이동을 관찰하고, 밤에는 별을 조망할 수 있는 높은 곳에 자리 잡았다. 마야인은 농사일을 시작하는 춘분과 수확 시기 끝자락인 동지를 알기 위해 태양을 관찰하고, 건축물은 매일 태양의 위치를 관측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방향을 잡았다. 벽화의 사원은 툴룸에서 가장 장식적인 요소를 유지하고 있다. 사원의 1층은 2개 사원으로 구성되고 내부 정면은 벽화로 장식돼 있으며 외부는 돌조각으로 장식했다. 정면 세 곳의 틈새는 조각품이 있고 그 중앙에는 하강하는 신과 인연을 맺은 인간의 모습이 표현돼 있다. 프리즈(frieze) 모양의 장식으로 치장한 상층 사원은 매우 단순하고, 벽체에는 빨간색의 손자국이 찍혀 있다. 사용한 물감 재료는 다양한 방법으로 얻었는데 빨간색과 검은색은 토양과 광물로 만들었고 파란색과 녹색 같은 다른 색은 시굴(試掘)해서 얻었다. 대궁전 옆에는 해안 무역에 대한 관리 관청이 있다. 툴룸은 마야지역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동부 해안에서 가장 중요한 상업 항구 중 하나였다. 그 영토는 독립적이었고 카시카즈고 또는 에캅(쿠치카발)의 일부를 형성했다. 통제 영역에는 Pole(Xcaret)과 Xala(Xelha) 같은 다른 중요한 항구가 있었다. 툴룸 정부는 군사적 지원을 받아 귀족, 전문가, 노동자로 구성된 사회를 통제하는 바타브(batab)에 의해 관리됐다. 게다가 해안 무역에 대한 관리 관청은 자신들의 영토인 바타빌(batabil)의 경제 행정관이기도 했다. 유적은 방문객으로부터 침식을 보호하기 위해 석조 구조물에 올라가거나 들어갈 수 없도록 장벽과 ‘진입 금지’ 표지판을 준수하도록 경고한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21-⑤툴룸 유적지서 만나는 기묘한 벽화

엘 카스티요 앞에는 비교적 상태가 온전한 대궁전이 있다. 툴룸의 주요 통치자와 성직자는 궁전처럼 돌로 만든 건물에 살았으나 성안 일반인은 바닥을 다지고 그 위에 목재나 강대 같은 오래가지 않는 재료를 사용해 지은 집에서 살았다. 성 밖 일반 사람들은 지역 외곽에 더 소박한 집을 짓고 살았다. 그들의 집은 나무, 덩굴, 종려나무, 갈대지붕 등 부패하기 쉬운 재료를 사용했으며 현재 이 지역에 서식하는 식물군과 매우 유사하다. 반쯤 폐허로 무너져 버린 강림 신의 사원으로 간다. 사원 이름이 기묘하게 붙은 이유는 신전 벽면 위쪽 프레스코화에 깃털이 달린 신이 거꾸로 떨어지는 모습이 새겨져 있어서다. 이 신은 깃털이 달린 모습에 화려한 관을 쓴 채 머리를 아래로 향하고 추락하는 형상인데, 이 신의 모습이 툴룸 유적 곳곳에서 발견되는 것을 보면 툴룸의 수호신이 아니었을까 추정한다. 프레스코화의 사원으로 가는 길에 크고 작은 이구아나를 만난다. 관람객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산책하듯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자연이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툴룸 유적지에서 엘 카스티요와 함께 가장 보존 상태가 양호한 사원 유적이다. 사원은 2층으로 지어졌는데 태양의 움직임을 추적하기 위한 관측소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문대답게 벽에는 마야의 ‘금성의 신’ 모습이 이곳에도 새겨져 있고 내부에는 프레스코 벽화 일부가 남아 있다. 그 때문에 프레스코화의 사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더 이상 입장이 허락되지 않아 볼 수 없지만 이 지역에서 시작된 ‘믹스테카 푸에블라(Mixteca Puebla) 스타일’이라 불리는 형식과 유사한 벽화를 동쪽 벽에서도 볼 수 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21-④ 신비로운 고대 건축물 ‘엘 카스티요’

두 사람은 해안에 도착했을 때 바위 절벽 위에 솟은 건축물을 보고 놀랐고, 유적지에서 AD 564년의 날짜가 새겨져 있는 초기 고전 비석(현재 대영 박물관 소장)을 보고 또 놀랐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이 고전 비석은 다른 곳에서 제작했던 것을 재사용하기 위해 툴룸으로 옮겼을 가능성이 높다고 책에 기록했다. 유적지에는 많은 석조 건축물이 산재해 있다. 단지에서 고고학적으로 가장 유명한 ‘엘 카스티요’, ‘대궁전’, ‘강림신(降臨神)의 사원’, ‘프레스코화의 사원’, ‘벽화의 사원’을 안내도에 따라 둘러본다. 먼저 중앙 구역에 있는 높이 7.5m의 피라미드 엘 카스티요로 간다. 엘 카스티요는 해안가 절벽 위에 있으며, 유적지에서 가장 큰 석조건축물이나 일반적인 마야의 중앙 신전에 비하면 큰 편은 아니다. 고대 도시 툴룸에서 엘 카스티요는 항구와 접해 있어 옥수수를 갈거나 빻을 때 쓰는 화강암∙사문석과 화살촉으로 사용하는 흑요석을 포함해 다양한 상품을 수출하고, 소금과 옥 장식을 수입하는 무역을 관장하는 건물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앞바다의 위험한 암초 지대를 통과하는 선박을 안내하는 등대 역할을 했다. 건물은 한 번에 지은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건물에 덮어씌워 개축하고 여러 차례 반복해 확장하며 세운 건물이다. 양식은 전형적인 마야의 후고전기로 맨 꼭대기 사원에는 뱀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이곳에 서면 숨 막히게 아름다운 카리브의 해안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21-③ 마야문명 '새벽의 도시' 툴룸

이곳은 멕시코 킨타나 로오의 주요 항구 역할을 했던 콜럼버스 이전 마야의 성벽 도시다. 유적은 카리브해의 유카탄반도 동해안을 따라 높이 12m 절벽 위 해안가 평지에 있다. 툴룸은 마야인이 건설해 거주했던 마지막 도시 중 하나로 13∼15세기에 번성했으며 히스패닉 이전 유적지다. 매표소에서 구한 유적지 지도를 보면 테오티우아칸 정도로 단지는 넓지 않으나 그 시절에는 제법 규모가 컸을 것 같다. 툴룸은 카리브해를 향해 동쪽을 바라보는 절벽 위에 자리를 잡아 마야인은 이곳에서 해 뜨는 것을 볼 수 있으므로 ‘새벽의 도시’를 의미하는 ‘자마(Zama)’라고 불렀다. 툴룸은 ‘울타리, 벽, 참호’를 의미하는 유카탄지역 마야어인데 유적지를 둘러싼 천혜의 성벽 덕분에 요새는 적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하는 데 유리했다. 그뿐만 아니라 툴룸은 육상 및 해상 무역로에 접근할 수 있는 항구라 흑요석(黑曜石) 무역의 허브가 됐다. 자료에 따르면 툴룸은 1518년 에스파냐 탐험대원인 후안 디아스가 처음 유럽에 알린 최초의 마야 공동체였다. 유적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미국 고고학자 존 로이드 스테펜과 영국 스케치 예술가 프레더릭 캐더우드가 ‘Incidents of Travel in Central America, Chiapas and Yucatan(1841년)’, ‘Incidents of Travel in Yucatan(1843년)’이라는 두 권의 책을 발간하면서 마야에 대한 탐구가 시작됐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21-② 툴룸서 마주한 싱그러운 풍광

칸쿤 버스터미널에서 프리메라 플러스 버스를 타고 툴룸으로 떠난다. 멕시코 버스 컨디션은 수준급이나 출발과 도착시간이 정확하지 않다. 북반구인 이곳의 1월 하순은 겨울철이라도 창밖 풍광은 아열대에 속해 길가 초목은 잎이 푸르러 싱그럽다. 중․북부 내륙과 달리 사막도 보이지 않고, 도로 주변은 아열대 식물이 숲을 이루어 따스함을 넘어 무덥다. 칸쿤에서 131km 떨어진 킨타나 로오(Quintana Roo) 주에 있는 툴룸 푸에블로(Tulum Pueblo)까지는 버스로 약 2시간 정도 고속도로를 달려야 한다. 몇 년 전 페루의 고대 수도 쿠스코와 마추픽추 등 여러 잉카 유적을 둘러본 적 있는데, 마야문명과는 지리적으로도 멀지 않아 문화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을지 궁금하여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툴룸에 도착한다. 유적지가 있는 마을답게 거리는 각 나라에서 온 여행객으로 넘친다. 터미널에서 유적지까지는 약 6km 정도 떨어졌는데,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운동 삼아 걷는다.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하이킹하기에 불편하지 않고, 주변 아열대 식물의 싱그러운 풍광은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유적지 북쪽 입구에 도착하자 이미 많은 관광객이 와 있다. 젊은이들은 유적 탐방보다 보드나 물놀이 기구를 들고 해변으로 달려가 수영과 파도타기를 즐기고, 현지인도 유적보다 아름다운 바다에 관심이 많은 듯 해변으로 향한다. 카리브 해변 절벽 위, 탁 트인 곳에 자리 잡은 툴룸은 천혜의 자연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처럼 환상적이다. 오후의 따가운 햇볕 아래 유적을 찾아 돌며 카메라에 담는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21-① 휴양도시 칸쿤 메소아메리카 문명 ‘눈호강’

멕시코 남부 유카탄 반도 끝자락 카리브해에 접한 휴양도시 칸쿤으로 떠난다. 멕시코는 국토가 넓어 도시 간 이동에도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칸쿤은 우리에게 휴양지로 알려졌지만 유카탄반도에는 툴룸, 치첸이트사 등 고대 마야 유적이 많이 있어 시간을 거슬러 올라 역사 속으로 떠나는 여행지로도 인기가 많다. 구시가지에 있는 호텔에 여장을 풀고 내일 아침 일찍 유카탄반도에 있는 마야 유적 툴룸을 탐방하기 위해 버스터미널로 가 승차권을 예매한다. 멕시코는 시기를 달리해 마야, 잉카, 아즈텍 문명이 공존했던 문명의 보고다. 이들 문명은 메소아메리카의 기원을 이해하는 데 필수 요소다. 하지만 오랫동안 유적을 연구한 고고학자조차 이들 문명이 가진 뛰어난 천문·수학 지식이나 건축기술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아직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마야 문명은 메소아메리카의 멕시코 동남부,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북부, 벨리즈, 온두라스 서부, 유카탄반도를 중심으로 번영했던 최대 문명권이다. 마야 문명은 아시아 문명권이 아니라 우리에게 비교적 관심이 적으나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발달한 언어체계와 수준 높은 문화를 누렸으며 예술, 건축, 수학, 달력, 천문학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마야는 문화 형성에 필수적인 경제적 수단으로 당시 도시국가 간 무역이 성행했다. 내륙 국가는 무기에 쓰이는 흑요석과 생활용품에 사용하는 목화 공급처였고 유카탄 북부 바다에 접한 국가는 소금 생산을 도맡았다. 하지만 마야족의 정확한 기원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알려진 것은 마야인들이 사원, 피라미드, 궁전 형태의 거대한 돌 기념물을 세우는 데 엄청난 시간을 투자했다는 것이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20-⑨ 오악사카, 혼합문화 '한눈에'

오악사카 지역에는 대성당을 비롯해 산토 도밍고 데 구즈만 교회, 고독의 성모 대성당, 산 필리페 네리 교회, 산 아우그스틴 교회, 누에스트라 세뇨라 데 라 메르세드 교회, 산타 카탈리나 데 시에나 수도원, 쿠일라판 데 게레로 수도원 등 많은 중세 종교건축물이 오랜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며 남아 있다. 오악사카지역에서는 몬테 알반과 미틀라를 비롯한 고대 문명 지역에서 자포텍과 믹스텍, 그리고 이스텍의 다양한 고대 유물을 접할 수 있다. 또 오악사카 대성당을 비롯한 콜로니얼시대 종교 건축물에서 중세 기독교 문화를 볼 수 있다. 멕시코시티를 비롯해 과달라하라, 과나후아토, 산 미겔 데 아옌데 등 여러 도시를 방문했지만, 멕시코의 혼합 문화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오악사카만한 도시가 없었던 것 같다. 멕시코는 미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어 미국화 돼가는 모습을 볼 수 있으나 전통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의 움직임도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는데, 바로 오악사카가 아름답고 전통적인 멕시코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멕시코는 고대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기억하고 꾸준히 전통을 이어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혼합문화 속에서 그들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는 나라다. 이처럼 역사와 전통을 잇고자 노력하는 노력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내일은 마야 문명의 치첸이트사와 툴룸의 고대 피라미드를 찾아 멕시코 동남부 유카탄반도에 있는 휴양도시 칸쿤으로 이동한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20-⑧ 유물관 가득히 채운 고요한 성스러움

대성당 내부를 둘러보고 교회 뒤쪽에 있는 유물관으로 발길을 옮긴다. 유물관에는 고독의 성모를 모시고 온 노새 몰이꾼 뮬레타와 노새에 얽힌 이야기를 판금한 조각품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대성당의 오랜 세월만큼 다양한 미사 전례 도구나 성의 등 교회 유물이 가지런히 전시돼 있다. 대성당 밖 소크라테스 정원 산책로에서 달콤한 아이스크림과 오악사카 전통과자를 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아담하고 깔끔한 교회 성물 판매소를 구경한다. 대성당 한쪽에는 예전에 수도원이었던 건물을 복원한 오악사카 데 후아레스 시립 궁전이 있는데 관람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게 돼 아쉽다. 콜로니얼시대 오악사카 지역에는 바실리카(대성당)와 이글레시아(성당), 도미니크회 아우구스티누스회 프란체스코회 등의 수도원과 수녀원의 종교건축물이 세워졌다. 에스파냐 카를로스 5세 국왕은 기독교화를 이루기 위해 재정을 지원했고 도미니크회는 기독교 복음화 활동을 이끌기 위해 선교부를 세웠으며 국왕은 원주민에게 노동권과 조공권까지 부여하며 영적 정복을 이끌었다. 믹스텍이 이 지역을 지배할 당시 사회는 카시케(caciques)라는 추장 같은 지배 계급과 마케우알레스(macehuales)라고 불리는 평민으로 나뉘었다. 이 이질적인 체제는 대부분 에스파냐 정복 이후에도 유지됐으며 지배 계급은 기독교로 개종하고 스페인 왕권에 대한 충성을 조건으로 많은 특권을 유지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20-⑦ 웅장한 바로크 양식 '솔레다드 대성당'

바로크 양식으로 지은 교회 정면은 아치 모양의 정문과 측면에 두 개의 입구가 있는 구조로 지진 발생 시 견딜 수 있는 강도와 구조를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관 전면에는 4개층에 석상이 있는데 성 베드로, 성 바오로, 성 아우구스티누스, 리마의 성스러운 장미, 십자가 옆에서 슬피 우는 성모 마리아가 있다. 그러나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대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구세주 잉태(수태고지·受胎告知)를 알리는 석상이다. 교회에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617년 베라크루스에서 과테말라로 가던 노새 몰이꾼 뮬레타가 오악사카에 도착한다. 마침 여분의 노새에 실려 있는 무엇인가를 발견한다. 몰이꾼은 산세바스티안의 은둔처에 도착하자 기진맥진한 노새가 넘어져 짐을 들어올려 일으켜 세웠으나 노새는 일어서다가 다시 넘어져 죽고 말았다. 세관원이 짐을 살피다가 ‘십자가 아래 성모’라는 표지판과 그리스도 형상의 부조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 사실을 바르톨로메 보호르케스 주교에게 알렸고 주교가 그곳에 교회를 세우라고 명령해 세운 교회가 바로 솔레다드 대성당이다. 바실리카 내부에는 당시 ‘십자가 아래 성모’라는 표징을 담았던 돌 상자가 보존돼 있다. 대성당 내부는 산토도밍고 교회처럼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면서도 중후한 종교적 의미를 잔잔하게 풍긴다. 제단 중앙에는 금박을 입힌 ‘고독의 성모상’을 볼 수 있으며 부조 상단에는 라틴어로 ‘고독의 성모’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 외에도 교회 안에는 여러 성화나 석상을 볼 수 있다. 성 아우그스티누스, 막달라 마리아, 성 테레사, 순교자 성 캐서린, 성 제롬, 성 우르술라의 엑스터시 등을 감상한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20-⑥ 수도원의 고즈넉한 석주들

산토도밍고 교회와 수도원 단지 건설은 1575년에 시작했으나 지진으로 파괴돼 방치됐다. 1608년 도미니크 수사들이 이곳을 찾았을 때 완성하지 못한 교회와 수도원은 10년 이상 걸려 1619년경 완성됐다. 교회 옆 묵주 예배당은 그 후 짓기 시작해 1731년 완공했다. 수도원은 도미니크 수도회의 이 지역 중심 수련원으로 150명에 달하는 수도자와 수련자들의 본거지로 사용됐고, 신학과 철학을 가르치는 도미니카교육센터 역할도 했다. 교회와 수도원 단지에는 박물관 외에 프란시스코 부르고아 도서관, 네스토르 산체스 정기간행물 도서관 등이 있어 오악사카 지역 문화 중심지 역할을 한다. 수도원 단지 부근 중세 건물에 있는 멋진 레스토랑에서 멕시코 전통음식으로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누에스트라 세뇨라 데 솔레다드 대성당으로 발길을 옮긴다. 오악사카시에는 오악사카 대성당을 비롯해 교회가 부족하지 않지만 현지인들은 ‘솔레다드’를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평가한다. 이 교회는 오악사카의 수호성인인 ‘고독의 성모’를 기리는 교회로 페르난도 베데스 신부가 설계하고 1682년 짓기 시작해 1690년 1차로 완성했고 외관은 앙헬 말도나도 주교의 도움으로 1717∼1718년 보완했다. 박태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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