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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지역 민중미술 이끈 소집단 활동가를 찾다] 2. ‘흙손공방’ 창립자 김봉준 작가

“권력 향한 민중의 외침 그림으로 그리며 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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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 공장이 밀집했던 부천에서는 노동 운동과 노동자들의 문화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 중심에는 노동자 맞춤 미술생산공방인 흙손공방, 그리고 김봉준이 있었다. 노동자들과 호흡하고 생존한 소집단 그룹 ‘흙손공방’의 창립자 김봉준을 지난 20일 성남 어느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다음 달 2일까지 경기도미술관에서 열리는 <시점時點ㆍ시점視點 - 1980년대 소집단 미술운동 아카이브>전을 말하며 “그동안 미술사에서 잊힌 인물이었는데 이제 작품이 조명받고 미술전시관에 전시되니 감회가 남다르다”며 말문을 열었다.

김봉준은 국내 미술사는 물론 노동운동, 민주화운동에서도 결코 가벼운 이름이 아니다. 집회 현장이 전시장이었고, 농민, 노동자가 있는 곳이 작업장이었다. 갤러리가 아닌, 현장에서 실천하는 예술가의 삶을 살아왔다. 그는 “젊은 시절엔 A급 수배자로 쫓기기도 했고, 나이 들어선 정권의 블랙리스트였다”며 “그럼에도, 독립된 예술가로 살며 여전히 민중과 함께 꿈을 꾸는 예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릴 땐 촉망받는 예술가로 탄탄대로의 삶이 예상됐다. 중ㆍ고등학교 때 서양화로 수채화를 그리다 홍익대 조소과에 입학했다. 시험만 치면 늘 A였다. 하지만 그에겐 캠퍼스 안 공부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탈춤반을 결성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우리 문화에 대한 갈증을 풀었고, 절에 가서 스님에게 불화를 3년간 배우기도 했다.

1980년 3월 ‘창작과비평’사에 들어간 그는 전화를 받다가 우연히 광주에서 걸려온 청년 학생들의 울부짖음을 듣게 된다. 전화 몇 통을 받다 보니, 서울 대학교 탈춤반 연합회 소속인 중에서 광주에 대해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됐다. 유인물의 초안을 쓰기에 ‘제격인’ 인물이 됐다. “그때부터 수배자가 됐어요. 매일 쫓기는 삶을 살며 함바집에서도 자고 판자촌 노동자 생활도 했어요. 하지만, 이런 시국에선 내가 민중과 함께하는 길을 택하는 것, 그게 옳다고 생각했어요.”

1년 뒤 포고령 위반이 없어지면서 풀려난 그는 시민, 민중운동을 다시 시작한다. 농민회에 들어가 농촌 문제를 알리는 <농사꾼타령>을 농민과 함께 만들어 1982년 출간했다. 또 그해 10월엔 한국 민중 미술계에 큰 영향을 미친 ‘미술동인 두렁’을 결성했다. ‘공동창작을 중시한다’, ‘있음에 머물지 않고 있어야 할 것을 지향한다’, ‘불화와 민화와 같은 우리 전통을 낡은 전통으로 보지 않는다’라고 발표한 ‘산그림’ 선언문은 당시 큰 파장을 일으켰다.

걸개그림 ‘우리는 하나’
걸개그림 ‘우리는 하나’

흙손공방은 ‘미술동인 두렁’ 이후 김 작가가 민중 속으로, 지역운동으로 들어가 실천의 예술가 삶을 실현하려는 의지였다. 이지녀, 엄경환 등과 함께 민주노동조합의 노동자에게 주문을 받아 미술품을 제작 납품했다. 1988년 연세대 학생회에서 주문한 이한열 추모비를 제작하기도 하고 그림 티셔츠, 머리띠, 걸개그림, 현수막, 노조간판, 달력, 기념판화 등을 만들어냈다. 여기엔 도시 노동자들의 가열한 노동해방 정서와 소외 정서가 반영됐다. 노동운동을 본격적으로 하면서 공방 안에 부천노동상담소도 만들어 소장으로 1년간 상담 활동도 했다. 그는 “문화예술로 노동자, 민중과 함께 건강한 도시의 시민 문화를 만들고 싶었는데, 건강이 급격히 무너졌고 공장들도 문을 닫으면서 1993년 여름 강원도로 떠났다”고 설명했다.

도피하듯 떠난 강원도에서도 그는 그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하며 끊임없이 창작활동을 이어왔다. 예술의 화두는 생태와 신화, 마을 등이었다. 세월이 흘렀어도 권력을 향한 민중의 외침을 끝없이 그림으로 그려냈다.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성주에 내려갔고, 작은 마을의 사드 배치 반대 투쟁과 100만 명이 모여든 촛불집회를 고스란히 붓 그림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1980년 광주부터 1990년 총파업시대, 2002년 붉은 악마, 2016년 광장의 시대, 촛불혁명까지 40년 민중사에 탱화와 신화가 한데 어우러져 그만의 작품세계가 구축된 셈이다.

지난해 5월엔 신작 전 ‘오월의 붓굿’을 광주 메이홀에서 열어 판화 60여 점과 회화 등을 전시했는데, 작품이 완판 되는 기록을 세웠다. 그해 말에는 그의 예술활동 40년을 돌아보고 기리는 ‘김봉준미술 40년 기념전, 민중미술로 어울리다’전도 열렸다.

그의 목표는 끝없이 창작활동을 하며 민중의 삶을, 희망을 그려내는 거다. 지난 40여 년 동안 해온 것처럼 말이다. “저는 리얼리스트도, 모더니스트도 아니에요, 꿈꾸는 미술인입니다. 앞으로도 꿈꾸는 미술인으로 예술인으로, 우리가 희망하는 세상을 그리며 살아갈 겁니다.”

정자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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