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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역사·문화를 기록하다] 完. 기록의 의미

기록은 역사를 만든다. 기록되지 않는 것은 역사화 할 수 없다. 기록 한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를 구성하고 만드는 것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문화 가치를 미래에 전승한다는 의미도 있다. 때문에 많은 지자체와 기관에서는 과거와 현재를 기록하고 있다. 경기문화재단도 경기도의 다양한 문화자원을 기록하는 사업들을 진행해왔다. 단순히 수집하고 보존, 관리하는 것이 아닌 활용할 수 있는 방법도 함께 제시했다. 재단 경기학연구센터가 2013년부터 진행한 경기마을기록사업은 급격한 도시화와 재개발 등으로 사라져가는 지역의 문화자원을 발굴해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 민간인통제구역 안에 위치한 김포 용강리마을, 다산 정약용의 삶이 묻어있는 남양주 마재 마을, 새마을 운동의 산실 남양주 봉안 마을, 남한에서 유일하게 비무장지대(DMZ) 내에 위치한 파주 대성동 마을 등의 어제와 오늘을 기록했다. 앞서 소개한 파주 금촌 마을 기록화 사업은 도시화도 그중 하나다. 파주 금촌 마을은 한국현대사의 질곡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경의선 금촌역의 개설로 금촌장이 생겨났고, 한국전쟁으로 인해 파주의 행정중심이 됐다. 여기에 미군 부대가 주둔하면서 지역 경제가 활성화 됐고, 수도권의 팽창으로 인구가 급증하면서 새로운 상권이 형성됐다. 지금의 금촌이 파주의 행정, 상업, 교통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들이기도 하다. 재단이 진행한 금촌 마을 기록화 사업은 급격화 도시로 옛 모습을 잃어가는 금촌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함으로써, 금촌의 또다른 내일을 위한 이정표가 됐다. 이지훈 경기학연구센터장은 경기마을기록사업는 도시화로 사라져가는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해 마을문화의 정체성을 밝히는데 그 목적이 있다면서 지역의 문화 콘텐츠 산업의 원천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주민들의 자긍심을 높이는데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재단 경기학연구센터와 연천군이 진행한 연천 유엔군화장장시설 기록화 조사 및 활용 연구도 상당한 가치가 있었다. 유엔군화장장시설은 6ㆍ25전쟁 당시 전사한 유엔군을 화장하기 위해 건립된 건조물이다. 인근 지역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고지전으로 유엔군 희생자가 많이 발생하자 이들을 위한 화장장 시설을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전쟁 중에 만들어진 화장장 시설로는 국내에서 유일하기 때문에 당시 상황에 대한 실증적 자료로써 그 보존 가치가 매우 컸다. 연천 유엔군화장장시설 기록화 조사 및 활용 연구는 유엔군화장장시설 자체의 물리적인 기록뿐 아니라 유엔군화장장시설이 가지고 있던 세계사적인 의미를 발굴해내고, 6ㆍ25전쟁 전반의 역사적 사실과 향후 발전 방향까지 함께 제시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 센터장은 연천 유엔군화장장시설은 수많은 나라가 이념과 국익을 걸었던 유무형의 흔적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실정이었다면서 특히 지역 경제의 발전논리에서 희생되고 있는 역사적 가치가 전근대에만 한정되지 않으며, 현대에 만들어진 유산들에도 해당된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강조했다. 경기북부 마을아카이브 프로젝트도 재단의 두르러진 성과다. 접경지역에 위치한 마을의 기록을 보존하고 정체성을 규명하기 위해 재단 북부문화사업단이 기획한 사업으로 동두천 턱거리, 연천 신망리, 파주 선유리 등 총 세 곳의 마을을 살펴봤다. 북부문화사업단은 마을의 단편적인 모습을 살피는 것이 아닌, 마을 속에 숨겨진 문화적 자원을 발굴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이에 프로젝트에 참여한 기획자와 작가들이 직접 마을에 머무르며 지역주민들과 함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 및 워크숍을 진행했다. 동두천 턱거리 마을에서는 공개워크숍을 진행했다. 한국의 근대공간은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가의 저자 김병섭 연구자와 리틀 시카고를 쓴 정한아 작가를 마을로 초청했다. 동두천에서 태어나고 자라온 김병섭 연구자는 이 자리에서 근대공간이 보존된 동두천의 구시가지를 문화를 통해 재생할 것을 제안했고, 정한아 작가는 리틀 시카고를 쓰기 위해 직접 미군클럽과 주변 인물들을 취재했던 내용을 함께 나눴다. 연천 신망리 마을에서는 핫-스팟이라 불렀던 이동식 사무소를 설치했다. 접으면 여행가방처럼 끌고 다닐 수 있고, 펼치면 테이블과 의자가 마련되는 것이다. 마을회관 앞이나 공터에 설치된 핫-스팟에 주민들도 새로운 방문객을 경계하기보다는 호기심을 보이며 먼저 다가왔다. 파주 선유리 마을에서는 수십년동안 같은 자리에 있었던 분식점 선유리를 중심으로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기지촌에서 생활하고, 연애하고, 일하고, 돈을 벌고, 자식을 낳아 길렀던 여성들의 삶을 논픽션과 픽션 사이에 담아 묵직하게 담아냈다. 이 센터장은 경기도에는 아직도 기록해야할 것들이 많다면서 앞으로도 각 지역의 형성과정과 그 특징들을 발견함으로써 근현대 경기도의 고유성과 역사성을 조명하고 향후 공동체의 미래를 조망할 수 있는 단초를 얻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송시연기자

[경기 역사·문화를 기록하다] 7. 화성 매향리

화성시 우정읍 매향리는 매화꽃 향기 퍼지는 동네라는 뜻을 가진 곳이다. 하지만 향기 가득할 것 같은 이름과는 달리 한국전쟁의 상흔을 그대로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6ㆍ25 전쟁 발발 이후 미군이 사격연습을 했던 쿠니사격장이 들어서면서 숱한 상처를 입었다. 빗발 치는 총알에 마을은 점점 황폐해졌고, 귀를 찢는 폭발음에 마을 주민들의 몸과 마음은 병들어 갔다. 폭격장은 20년 가까이 벌인 주민들의 투쟁 끝에 2005년 폐쇄됐지만, 여전히 마을 언덕 길 곳곳에는 크고 작은 포탄, 폭탄이 수북이 쌓인 풍경을 볼 수 있다. 미군의 폭격 연습이 멈춘 지 10여년이 지난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자연의 정화로 회복되고 있다. 이제 마을주민들은 매향리를 더 이상 역사의 비극이 아닌, 평화의 상징으로 기록하고자 한다. ■ 지독한 싸움 매향리마을에 폭발음이 들리기 시작한 것은 1951년 한미행정협정에 따라 매향리 인근 구비섬에 쿠니사격장이 생긴면서 부터다. 사격장은 약 2천410㎡로 해상사격장과 해안 지역의 육지사격장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태평양 미공군사령부 산하 한국 주둔 제7공군 51전투비행단에서 관할했다.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사격훈련이 실시됐는데, 연간 약 250일에 달했다. 일일 평균 11.5시간 동안 15~30분 간격으로 행해졌으며, 사격 횟수만도 1일 600회를 넘었다. 야간에도 훈련이 실시됐기 때문에 주민들은 훈련이 없는 주말에만 사격장 내 농지에서 농사를 짓거나 바다에 나가 일을 할 수 있었다. 소음과 폭발 여파 등으로 인한 주택 파괴, 소음에 따른 난청현상, 대규모 환경 및 연안어장 파괴 등 경제적 어려움은 물론 밤낮 가리지 않고 계속되는 폭격은 주민들의 생명을 위협했다. 실제 전문가들에 따르면 사격장이 건립된 이후 피해를 입은 주민만 713가구, 4천여 명이었다. 손목 절단 및 옆구리 부상 등 오폭으로 인해 중상부상을 당한 주민이 15명, 오폭사고와 불발탄 폭발로 인해 사망자가 12명이었다. 이 같은 피해가 계속되자 1988년부터 매향리마을 청년회에서 매향리 마을의 피해를 알리는 유인물을 작성해 주민들에게 배포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국방부, 경기도, 청와대 등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합동소음대책위원회 구성해 사격장 점거 농성, 환경단체와 연계한 사격장 폐지 및 피해보상 요구에 나섰다. 이후 2001년 주민 14명이 미군 사격장의 폭격 소음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고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승소하면서 20여 년 동안 진행된 사격장 철폐운동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다. 그리고 마침내 2005년 8월30일 사격장의 관리가 한국의 국방부로 이관되면서 미공군이 공군기지에서 철수했고, 주민들은 폭격 소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매향리 스튜디오 2016년 12월 개관한 매향리 스튜디오는 버려지고, 방치돼 무너져 가던 매향교회의 옛 예배당를 활용해 경기문화재단 경기창작센터가 조성한 공간이다. 매향리마을의 상처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곳이자, 상징적 공간이기도 하다. 1952년 세워진 매향교회는 오랜시간 주민들과 동거동락했다. 주민들의 사랑방과 아이들의 놀이방으로 자리하며 귀를 찢는 폭발음과 총알이 빗발치는 시간들을 함께 견뎌왔다. 그러던 중 미군의 오폭으로 지붕이 파손돼 새 예배당이 건립되면서 부터는 빈 공간으로 방치 돼 왔다. 점점 흉물스럽게 변해가는 이 곳을 경기창작센터가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탈바꿈 시킨 것이다. 경기창작센터는 무너진 예배당을 새로 만들어 내기 보다는 앞으로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의 장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이에 경기창작센터 입주작가인 이기일 작가가 로컬큐레이터로 기획단계부터 참여해 공간을 재생했다.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이후에는 매향리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획전을 비롯해 주민들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이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개관전 1951-2005 겨울 이기일 전(展)은 매향리스튜디오가 가진 상징적인 의미와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아냈고, 기획전 우리들의 농섬은 매향리가 간직한 아픈 역사를 보여줬다. 마을의 치유와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은 한국적 모자이크展과 매향리의 고통을 전국에 알린 전만규 씨를 모델로한 청년 전만규展을 선보이기도 했다. 오는 20일부터 내년 3월17일까지는 탈북 작가 선무(線無)의 개인전 반갑습니다. Bangabseubnida. nice to meet you.를 진행한다. 매향리 주민들이 겪어야 했던 암울한 현대사의 상처와 평화의 염원, 그리고 작가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보여줄 예정이다. 송시연기자

[경기 역사·문화를 기록하다] 6. 연천 유엔군화장장시설

연천 유엔군화장장시설은 경기 북부의 접경에서 벌어진 6ㆍ25전쟁의 기록이자 세계사의 큰 굴곡이었던 냉전의 산물이다. 남한과 북한, 중공군, 미군, 유엔군 등 수많은 나라가 이념과 국익을 걸었던 유무형의 흔적이 남아있다. 여러가지 이유들로 연구에 난항을 겪어오던 찰나 경기문화재단과 연천군이 진행한 연천 유엔군화장장시설 기록화 조사 및 활용 연구는 상당한 가치가 있었다. 유엔군화장장시설 자체의 물리적인 기록뿐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을 담았고, 향후 활용 방안에 대해서도 깊이있게 제시했다. ■ 기록의 의미 경기 북부의 접경 지역은 냉전 시기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남한과 북한, 중공군, 미군, 유엔군 등 다국적 군인들이 수년간 접전을 치렀던 만큼, 6ㆍ25전쟁의 역사적 시설물과 기억들이 곳곳에 산적해 있다. 연천군처럼 전쟁 이전 북한에 속해 있었던 수복 지역의 경우 더욱더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설물과 기억들에 대한 연구는 더뎌왔다. 현재까지도 한국, 미국, 유엔이 관여하는 군사적 요충지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물론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에 경기문화재단과 연천군이 지난해 진행한 연천 유엔군화장장시설 기록화 조사 및 활용 연구는 여러가지에서 그 의미가 깊다. 유엔군화장장시설은 6ㆍ25전쟁 당시 전사한 유엔군을 화장하기 위해 건립된 건조물이다. 현재 등록문화재 408호(2008년 10월 1일 등록)로 등록돼 보존관리되고 있다. 돌과 시멘트로 쌓은 십여 미터 높이의 굴뚝과 화장 구덩이를 중심으로 건물 2동이 연접해 구성돼 있다. 인근 지역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고지전으로 유엔군 희생자가 많이 발생하자 이들을 위한 화장장 시설을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전쟁 중에 만들어진 화장장 시설로는 국내에서 유일하기 때문에 당시 상황에 대한 실증적 자료로써 그 보존 가치가 매우 크다. 경기문화재단과 연천군의 연구는 유엔군화장장시설이 가지고 있던 세계사적인 의미를 발굴해내고, 6ㆍ25전쟁 전반의 역사적 사실과 향후 발전 방향까지 함께 제시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 연천 유엔군화장장시설 연천군은 경기도에서 가장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으로, 북한과 휴전선을 경계로 맞닿아 있다. 동쪽으로는 포천시, 서쪽은 파주시 장단면, 남쪽은 파주시와 동두천시, 북쪽은 강원도 철원군과 황해도 금천군에 접해 있다. 유엔군화장장시설은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에 소재한다. 동이리는 본래 마전군 군내면의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기존의 중부리ㆍ동부리ㆍ이동리를 병합해 동부리의 東자와 이동리의 梨자를 따서 동이리라 하고 연천군 미산면에 편입됐다. 유엔군화장장시설은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 610번지에 위치해 있는데, 지대가 높은 산골짜기에 터를 잡고 있다. 화장장시설로의 진입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동로에서 직각 방향으로 개설된 진입로를 따라 약 150m를 들어가면 다다를 수 있었지만, 현재는 진입로 초입부가 사유지인 관계로 원래의 진입로에서 남동쪽으로 40m 가량 떨어진 곳으로 옮겨 개설된 상태다. 진입로와 마동로 좌우로는 모두 경작지로 사용되고 있다. 화장장시설은 하부 벽체와 굴뚝을 제외한 상부 벽체와 지붕, 실내 시설 등 나머지 부분은 남아 있지 않다. 굴뚝이 있는 가로 방향 건물과 굴뚝이 없는 세로 방향 건물이 ㄱ자 형태로 맞붙어 있다. 건물이 들어선 대지의 지형은 대체로 평탄하나 서쪽 끝단과 동쪽 끝단이 약 1.0m 가량 차이가 난다. 굴뚝이 있는 건물은 벽체 중심을 기준으로 폭 11m, 길이 18m이고 실내 면적은 198㎡(60평)다. 남쪽과 서쪽, 북쪽에 하부 벽체가 남아 있으며, 굴뚝이 건물의 배면 중앙에서 서쪽으로 2.5m 치우친 위치에 있다. ■ 향후 발전 방향 이번 연구에서 전문가들은 유엔군화장장시설과 주변의 문화자원을 연계해 테마공원이나 관광벨트로 개발할 것을 제안했다. 이미 연천에는 안보와 관련된 문화자원이 상당하다. 열쇠전망대와 태풍전망대, 적의 활동을 관측하기 위한 최전방관측소인 승전OP, 1968년 김신조 외 30명이 남방 한계선을 넘어 침투했던 1ㆍ21침투로, 전쟁 이전에 서울과 원산을 오갔던 신탄리역 등과 연계한 탐방 프로그램 등을 개발한다면 각각에 내포된 가치가 더욱 부각될 것으로 기대된다. 아울러 우리나라 구석기 유적을 대표하는 전곡리 선사 유적지, 고구려가 지은 성곽인 당포성, 고려시대의 왕들과 공신드르이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숭의전지, 임진강 변에 위치한 주상절리 등과의 연계 또한 새로운 문화자원으로 얼마든지 활용될 수 있다. 송시연기자

[경기 역사·문화를 기록하다] 5. 파주 선유리마을

경기북부는 한반도 중심에 위치하며, 남과 북을 잇는 관문이자 분단의 접경지역이다. 군부대와 개발제한 등으로 인한 독특한 지역정체성을 지닌 곳이기도 하다. 경기문화재단 북부문화사업단은 경기북부 접경지역에 위치한 마을의 기록을 보존하고 정체성을 규명하기 위해 경기북부 마을아카이브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계속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는 시범사업으로 동두천 턱거리, 연천 신망리, 파주 선유리 등 총 세 곳의 마을을 살펴봤다. 작가와 기획자들은 문헌현장구술 조사와 지역주민들과 함께하는 프로그램 및 워크숍 등을 통해 마을 환경에 대한 기초조사는 물론 내외부의 변화 양상을 포착하고 문화적 자원을 발굴했다. 특히 그동안 소외됐던 경기북부 접경마을들을 조명하고, 가치를 재발견했다는 점과 우리 이웃의 삶을 기록하고 공유했다는 부분에서 높은 성과를 가져왔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파주 선유리마을은 달러가 날아다닌다고 표현할 만큼 성황했던 곳이다. 캠프 게리 오웬과 캠프 자이언트 등 미군기지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에서 돈을 제일 잘 버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도 했다. 이제는 미군이 떠난 자리에는 낡고 오래된 집만이 남아있지만, 마을사람들은 이것이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한다. ■ 파주 선유리마을 파주는 한강과 임진강, 두 강의 흐름이 만나는 도시다. 동북에서 남서로 향하는 광주산맥과 휴전선 경계 너머 마식령산맥 사이에서 서쪽으로 황해와 맞닿아 있다. 임진강 유역에는 감악산, 칠중산성, 오두산성, 심학산, 월롱산성, 봉서산성 등 산봉우리들이 연결된다. 한반도 내서는 경기도 서북단에 위치하며, 서울과의 거리는 약 40㎞정도 떨어져 있다. 도내 31개 시군 중 여섯번째로 면적이 넓다. 동쪽으로 양주시, 북쪽으로 연천군과 북한, 남쪽으로 고양시, 서쪽으로 임진강과 사천을 경계로 북한(개풍군), 서남쪽으로 한강을 경계로 김포시와 인접한다. 서울과 판문점을 연결하 는 통일로, 행주대교에서 한강과 임진강을 따라 임진각까지 연결된 자유로, 서울과 신의주를 잇는 경의선 철도가 파주를 경유한다. 문산읍에 속한 선유리마을은 문산역을 남쪽으로 도라산역을 북쪽으로 하는 중간지대에 자리한다. 문산역은 경의선 파주구간 중에 하나로 도라산역을 종착으로 한다. 조선시대에는 전국 6대 간선도로 중 하나였던 의주로가 선유4리를 지나 관북과 관서지방을 잇는 뱃길이 시작되는 임진나루까지 이어졌다. ■ 역사의 산증인 휴전 이후 1960년대 한반도는 남북의 대치 상황 속에 놓인다. 남한의 최북단에 위치한 파주에는 대규모 미군병력이 주둔하게 된다. 이때부터 파주를 비롯한 접경지역은 전통적인 농촌 사회를 벗어나 크게 변화됐다. 휴전회담 당시 선유리마을이 속한 문산에는 유엔군 대표단 본부가, 인근 용주골에는 미군 휴양 시설이 설치됐다. 미군과 관련된 경제활동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려는 사람들도 대거 파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선유리마을도 모든 경제활동이 미군기지인 캠프 게리 오웬(Camp Garry Owen)과 캠프 자이언트(Camp Giant), 캠프 RC4(Recreation Center #4)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1960년대 이렇다할 산업기반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류, 의류, 화장품, 가전제품, 가구상, 미장원, 구멍가게 등이 생겨나면서 지역경제가 활성화됐다. 또 지금도 흔히 도깨비시장으로 불리는 서울 남대문시장의 미제 물건 공급처가 바로 문산이었다. 마을 주민들의 기억에 따르면 1968년까지 서울과 문산을 오가는 경의선 증기기관차에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PX물품들이 객차와 화차 밑에 숨겨져 서울역까지 운반됐다. 오죽했으면 기지촌 여자들이 한 달에 버는 돈이 1억원이라고 할 정도였다. 달러가 날아다니고, 한국의 뉴욕이라고 불렸다는걸보면 어느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 선유리마을의 쇠락은 1969년 미국 닉슨(Nixon) 대통령의 괌 독트린(Guam Doctrine) 선언으로 주한 미군이 철수하면서 시작됐다. 1971년에는 문산 미 2사단이 동두천으로 옮겨가면서 미군 기지도 절반으로 줄게된다. 사람들도 하나 둘 떠나갔고, 가게들도 줄줄이 문을 닫았다. 옛 명성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록 점점 낙후돼 갔다. 여기에 1990년대 파주의 수도권 정비계획 실시되고 공장과 산업단지가 대거 들어서면서, 마을에는 또 다른 경계가 생겼다. 새로 들어선 산업단지와 아파트로 인해 사람들의 구성도 바뀌어 가면서 마을의 정체성도 잃어갔다. 하지만 선유리마을 주민들은 이것이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한다. 교하, 운정, 금촌 등 파주의 신도시 지역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인구가 모여사는 곳이 된 만큼 또 다른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 더욱이 남북 교류 중심지로 파주가 우뚝 서면서 통일ㆍ안보 관광시설 유치 등 새로운 기회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옛 모습은 잊혀지고 있지만, 선유리마을 주민들은 잊지말아야할 과거와 새로 시작될 미래를 사이에 두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송시연기자

[경기 역사·문화를 기록하다] 4. 연천 신망리마을

경기북부는 한반도 중심에 위치하며, 남과 북을 잇는 관문이자 분단의 접경지역이다. 군부대와 개발제한 등으로 인한 독특한 지역정체성을 지닌 곳이기도 하다. 경기문화재단 북부문화사업단은 경기북부 접경지역에 위치한 마을의 기록을 보존하고 정체성을 규명하기 위해 경기북부 마을아카이브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계속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는 시범사업으로 동두천 턱거리, 연천 신망리, 파주 선유리 등 총 세 곳의 마을을 살펴봤다. 작가와 기획자들은 문헌ㆍ현장ㆍ구술 조사와 지역주민들과 함께하는 프로그램 및 워크숍 등을 통해 마을 환경에 대한 기초조사는 물론 내외부의 변화 양상을 포착하고 문화적 자원을 발굴했다. 특히 그동안 소외됐던 경기북부 접경마을들을 조명하고, 가치를 재발견했다는 점과 우리 이웃의 삶을 기록하고 공유했다는 부분에서 높은 성과를 가져왔다. 두번째로 소개하는 연천 신망리마을은 경원선 신망리역 서쪽에 위치해 있다.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초토화됐다가 휴전 직 후 1954년 피난민 정착지로 지정되면서, UN군의 원조로 100채의 가옥 및 행정 시설이 건립됐다. 지금까지도 신망리마을 지키고 있는 주민 대다수는 눈앞에서 폭격과 전쟁을 목격했고, 이북과 이남의 정치를 모두 경험한 독특한 생애를 가지고 있다. ■ 아픈 역사의 산증인 신망리마을은 수복지구(收復地區)에 속한다. 수복지구는 북위 38도 이북 중 한국전쟁의 정전협정에 따라 대한민국에 편입된 군사분계선 이남 지역을 말한다. 연천군, 포천시 북부, 가평군 북면 일부와 강원도 철원군ㆍ김화군 일부(1963년 철원군에 편입)ㆍ화천군ㆍ양구군ㆍ인제군ㆍ양양군ㆍ고성군이 해당한다. 1953년 정전 당시에는 군정 하에 있다가 1954년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收復地區臨時行政措置法)이 시행되면서 대한민국의 행정구역으로 편입됐다. 수복지구에서는 물리적 휴전선이 세워지기 전까지 월남, 월북 사례가 잦아 가택 수색이나 고발, 사상 검증 및 처형 등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폭격이나 수색에 대비한 방공호도 집집마다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다수의 군부대가 빠져나간 지금까지도 주민 퇴각로가 지정돼 있을 만큼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또 군사적 이유로 개발이 제한돼 있어 군수경제에 크게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신망리마을은 휴전 직 후 1954년 피난민 정착지로 지정됐다. UN군의 원조로 100채의 가옥 및 행정 시설이 건립되면서 실향민들이 모여들었다. 실향민들은 선착순으로 입주했으며, 제비뽑기를 통해 살 집을 정했다. 이때 가옥이 1호, 2호, 3호 등으로 이름이 붙여졌기 때문에 가옥과 입주 세대는 현재까지도 1호집, 2호집으로 불린다. 가옥을 지어 마을이 형성됐지만, 많은 지뢰가 매장돼 있어 폭발 사고로 지인이나 친족을 잃은 경우도 다반사였다. 주민들은 이러한 척박한 환경에서도 농사를 짓고, 인근의 사격훈련장에서 탄피를 줍거나 미군이 먹다 남긴 음식물로 꿀꿀이죽을 만들어 먹는 등 어렵게 생활을 이어왔다. ■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 매일 밤 모이라고 해서 모였어. 그러면 그들은 우리에게 이북노래를 가르쳤지.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국 이게 북한 애국가야. 그리고 다시 올라갔다가 1ㆍ4후퇴 때 또 한 번 인민군들이 들어왔어. 내가 살고 있던 마을에서는 중공군은 못봤어. 이곳(연천)에 많이 왔다고 하던데. 그때 인민군들이 많이 죽었다지. 전쟁이 나니까 군인트럭을 타고 피난을 갔는데 그러니까 처음엔 연천 북면에 살다가 동두천으로 갔지 그리고 수원과 용인을 거쳐 다시 연천으로 돌아온거야. 남편이 인민군으로 징병되는 바람에 내 나이 20살때 헤어졌어. 딸이 뱃속에서 4개월 때인데남편과는 겨우 4개월 살았지 뭐야. 신망리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다.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이들은 상당수가 50년 이 넘도록 그대로 같은 집을 지키며 살고 있다. 수도권 지역의 사람들이 자유의 삶을 누리며 살아가는 동안 신망리마을 주민들은 접경지역의 역할을 하며 더딘 시간을 보내왔다. 인근 부대의 체조노래로 아침을 시작했고, 오랜시간 낮은 산과 밭고랑 사이로 들려오는 대남방송을 들어야했다. 그래도 마을 주민들은 새로운 희망이란 뜻을 가진 신망리라는 마을의 이름처럼 새로운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마음이 울적 할 때 들길을 찾아가면 아무도 없는 것 같아도 반겨 맞아주는 들꽃들이 있어요해맑고 향긋한 냄새 듬뿍 풀어내 즐거움을주고 희망을 안겨줘요라는 시처럼 지난 이야기들은 가슴에 묻은 채 오늘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송시연기자

[경기 역사·문화를 기록하다] 3. 동두천 턱거리

경기북부는 한반도 중심에 위치하며, 남과 북을 잇는 관문이자 분단의 접경지역이다. 군부대와 개발제한 등으로 인한 독특한 지역정체성을 지닌 곳이기도 하다. 경기문화재단 북부문화사업단은 경기북부 접경지역에 위치한 마을의 기록을 보존하고 정체성을 규명하기 위해 경기북부 마을아카이브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계속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는 시범사업으로 동두천 턱거리, 연천 신망리, 파주 선유리 등 총 세 곳의 마을을 살펴봤다. 작가와 기획자들은 문헌현장구술 조사와 지역주민들과 함께하는 프로그램 및 워크숍 등을 통해 마을 환경에 대한 기초조사는 물론 내외부의 변화 양상을 포착하고 문화적 자원을 발굴했다. 특히 그동안 소외됐던 경기북부 접경마을들을 조명하고, 가치를 재발견했다는 점과 우리 이웃의 삶을 기록하고 공유했다는 부분에서 높은 성과를 가져왔다. 첫 번째로 소개한 동두천 턱거리마을은 1951년부터 미2사단이 주둔, 전체 면적의 42%가 미군의 공여지인 곳이다. 한국전쟁과 주한미군 주둔에 따라 경제적 부흥과 쇠락을 지나오며 다양한 문화가 형성됐다. 내년에는 캠프 호비가 주둔하던 주한미군공여지가 전체 반환될 것으로 예고되면서, 또 다른 변화를 기다리고 있다. ■ 턱거리마을의 과거와 현재 턱거리마을은 북동쪽에 소요산 지류, 북서쪽에 어등산, 남동쪽에 해룡산, 남서쪽에 칠봉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마을 한가운데는 동두천천이 흐른다. 대대로 동두천천을 따라 논과 밭을 일구며 살았고, 일제 강점기에는 광산업이 발달하면서 관련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한국전쟁 이후 1954년 캠프 호비가 턱거리마을에 형성되면서 미군기지를 중심으로 한 생활권으로 변모하게된다. 기지촌의 중심적인 상업이었던 유흥가가 형성되고, 미군기지에 근무하는 군속을 포함해 다양한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대거 이주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턱거리마을은 전통적인 마을 공동체가 해체되고 기지촌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가 형성됐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점점 쇠퇴하기 시작한다. 한국경제의 성장에 따른 달러 값어치의 하락, 미군병사 급여의 본국 송환 유도, PX물품 유출 규제 강화, 미군기지 내 위락시설 설치 등이 원인이다. 미군병사가 나오지 않자 문을 닫는 가게들이 늘고, 거리가 쇠락하니 점점 슬럼화됐다. 2000년대 들어서는 동두천에 신시가지가 조성되면서 마을의 인구조차 줄어 그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마을 주민들은 공동체를 조직하고, 지역 발전을 걔획하는 동시에 자연환경과 옛 문화를 보존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캠프 호비가 주둔하던 주한미군공여지가 내년에 전체 반환될 것으로 예상되면서, 미군공여지의 공간활용과 이에 따른 지역 경제 활성화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턱거리마을 사람들 턱거리마을에는 마을주민들이 힘을 합쳐 만든 턱거리사람들 협동조합이 있다. 턱거리사람들 협동조합은 지역주민들의 자존감을 강화하고, 상호 신뢰성과 지역 공동체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조합의 활동 근거지가 되는 커뮤니티 아트 스튜디오(Community Art Studio)인 우리동네 놀이터 함께에서는 매년 턱거리노래자랑, 턱거리마을 바자회, 한글교실 프로그램, 광암동 마을잔치 등 다채로운 행사가 열린다. 무엇보다 턱거리마을의 소식을 전하는 터기리마을신문을 발행하고 있다. 터기리마을신문은 경기도 따복공동체지원센터와 동두천생활문화센터의 후원으로 2016년 12월1일 창간호를 발간했다. 터기리마을신문에는 지역활동가들과 주민들, 동두천생 활문화센터 시민기획단이 참여해 마을에 대해 이야기하며 함께 고민하고, 소통한다. 동두천 나눔의 집도 턱거리마을 사람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곳이다. 성공회에서 사회선교센터의 일환으로 2003년 세웠다.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을위해 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또 홀로 계신 어르신이나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이웃들과 결연을 맺고 반찬나눔, 의료상담, 주거상담 등을 진행하고 있다. 마을사람들과 전문가들은 턱거리마을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한국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긴 마을의 역사를 기록하고 미국 문화가 유입된 특성을 잘 활용한다면,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관광지로도 충분한 경쟁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지금 턱거리마을에서는 과거를 마냥 지우기보다는 무엇을 남기고, 어떻게 바꿔나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들이 이뤄지고 있다. 송시연기자

[경기 역사·문화를 기록하다] 2. 파주 금촌마을

한 지역의 마을에는 수 많은 이야기가 숨어있다. 그 이야기 담긴 지난날의 역사는 앞으로의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게하는 큰 원동력이 된다. 이에 많은 지자체에서 마을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경기문화재단도 지난해부터 급격한 도시화와 재개발 등으로 사라져 가는 지역의 문화자원을 발굴해 기록하는 경기마을기록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파주 금촌 마을 기록화 사업은 상당히 의미 있었다. 파주 금촌 마을은 한국현대사의 질곡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경의선 금촌역의 개설로 금촌장이 생겨났고, 한국전쟁으로 인해 파주의 행정중심이 됐다. 여기에 미군 부대가 주둔하면서 지역 경제가 활성화 됐고, 수도권의 팽창으로 인구가 급증하면서 새로운 상권이 형성됐다. 지금의 금촌이 파주의 행정, 상업, 교통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들이기도 하다. 재단이 진행한 금촌 마을 기록화 사업은 급격화 도시로 옛 모습을 잃어가는 금촌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함으로써, 금촌의 또다른 내일 위한 이정표가 됐다. ■ 새말이 쇠말로 현재의 금촌은 일제강점기 초까지 아동면(衙洞面)으로 쇠재(金陵), 새꽃(新花), 새말(金村), 풀무골(冶洞), 검산(檢山), 맥금(陌金) 등 6개 마을로 형성돼 있었다. 각 마을마다 7~80호 정도의 호 수가 살았다. 1905년 경의선 철로가 부설되기 전까지 금촌은 대부분 논으로 돼 있었는데 10여 호 미만의 농가가 있었을 뿐이었다. 경의선 부설 당시 새말에는 30~40여 호의 집들이 있었고, 현 금촌역 주변은 모두가 논이었다. 일본인이 역 이름을 정할 때 새말을 가리키면서 무슨 마을이야고 묻자 한 촌로가 새말이 라고 대답했는데 일본인이 이 말을 쇠말로 잘못 알아들어 금촌(金村)으로 명명 되었다고 한다. 금촌역이 생기자 금촌역 주변으로 인구가 집중되고 시가지를 이루면서 역명을 따라 이 일대 마을이름이 금촌(金村)이 되었다. 금촌의 땅이름과 관련해 파주지역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이야기다. 또 다른 유래는 김정호가 조선후기에 제작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나와 있다. 대동여지도에는 이 지역이 금성(金城)이라 표기돼 있다. 현재 법정동인 금릉동(金陵洞) 지역은 본래 교하군 현내면 지역으로 쇠 또는 금이 묻혀있다 하여 쇠자(金尺)ㆍ쇠재ㆍ금 성(金城)이라 했으며 금성천(金城川, 지금의 공릉천)은 수 많은 상선들이 드나들어 상업이 번창 했던 곳이었다. 금촌의 땅이름은 경의선 금촌역이 정해지기 전부터 이 지역에서 많이 불리던 금(金) 자의 지명에서 유래했을 가능성도 크다. ■ 금촌의 역사 금촌은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들과 마주하면서 많은 변화를 겪는다. 먼저 금촌역의 개설이다. 금촌역은 1906년 경의선 개통에 이어 개설된 역사(驛舍)다. 당시까지만 해도 금촌은 교하군 아동면에 속한 시골 촌락에 불과했다. 그러나 한국 최초의 급행열차인 신의주-부산 간 융희호의 운행이 시작되고, 금촌역이 개설되면서 금촌은 순식간에 교하의 중심지로 자리잡게 됐다. 한국전쟁도 금촌에 많은 변화를 가지고 왔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금촌에 피난민 임시수용소가 마련되면서 인구의 유입이 급속도로 증가한 것. 장단면 등지에서 남으로 월남한 피난민들은 모두 금촌으로 모여들게 됐고, 이들 중 상당수는 휴전 후에도 다른 곳으로 이주하지 않고 금촌에 남았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휴전선의 설치는 금촌이 파주의 유통과 행정의 중심이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앞서 금촌역이 개설되면서 역 앞에 금촌장이 들어서 있었지만, 조선후기부터 경기 5대 장시로 불렸던 봉일천장과 문산장으로 인해 크게 주목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휴전선 설치로 한강 하구와 임진강의 물길이 막히면서 봉일천장과 문산장이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고, 경의선을 배경으로 하던 금촌장만이 제 기능을 할 수 있었다. 때문에 금촌장이 경기서북부 지역의 유통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됐다. 아울러 행정기관이 대규모로 이전하게 됐다. 전쟁 이전 파주군의 행정기관은 대부분 문산을 중심으로 위치해 있었는데, 전쟁 중에 임시 이전했던 파주군청을 포함한 행정기관 등이 금촌(당시 아동면)에 완전히 머무르게 된 것이다. 미군 부대의 주둔도 금촌에 변화를 일으킨 주요 요인 중 하나다. 캠프 에드워즈(Camp Edwards)와 캠프 하우즈(Camp Howze), 캠프 스탠턴(Camp Stanton)이라 불리는 미군 2사단 공병부대의 존재와 비무장지대를 경계하던 미군 제7보병사단은 전쟁이 끝난 후 복구 시기에 금촌의 경제를 활성화 시키는 밑바탕이 됐다. 1990년대 후반에는 부동산 경기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수도권으로 인구가 계속 유입되면서 파주가 본격적으로 도시화되기 시작됐고, 금촌 역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다시 한 번 중흥의 기회를 맞게 됐다. ■ 지켜야할 금촌의 문화 유산 금촌이 있는 파주 일대는 그 역사가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파주의 동서를 흐르 는 임진강 연안을 끼고 있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선사시대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이는 임진강 연안지역 선사시대 사람들이 이곳에서 생활을 영위했음을 짐작케한다. 특히 금촌동과 인접해 있는 월롱면 덕은리 옥석동 일대에서는 주거지 및 빗살무늬토기, 마제 석촉 등이 출토됐다. 150편에 달하는 빗살무늬 토기 파편들과 고인돌 밑에서 발견된 주거지는 신석기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관아가 있던 마을이었다. 때문에 금촌에는 교하향교가 남아 있는데, 원래 1407년 갈현리에 창건했다가 이후 1731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했다. 현대에 들어서 1968년 담장을 보수했고, 1971년과 1973년에 대성전(大成殿)과 부속건물을 중수했다. 인물도 빼놓을 수 없다.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 정태진 선생은 금촌에서 태어났다. 1941년 6월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의 조선어사전 편찬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되기도 했다. 이후에도 꾸준히 조선어학회에서 조선말 큰사전 편찬과 대학 강의 활동을 전개했지만, 1952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정태진 선생의 생가터는 당시 주소로 경기도 교하군 아동면 금릉리 406번지인데, 지금의 주소로는 금촌2동 1018번지다. 당시 정태진 선생이 살았던 집은 멸실됐지만, 인근에 기념관으로 복원해 놓았다. 송시연기자

[경기 역사·문화를 기록하다] 1. 경기감영 경기감영터

경기도는 오랜 역사와 유구한 문화 자산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도시개발, 관리소홀 등의 문제로 사라지거나 제 모습을 잃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본보는 경기 역사ㆍ문화를 기록하다를 주제로 경기도의 역사 보여주는 문화 유산을 기록함으로써 경기도민에게 알리고 그 중요성을 환기시킬 계획이다. 앞서 경기문화재단도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 가치를 정립하기 위한 기록사업을 진행한 바 있다. 지난해 옛 경기도청인 경기감영, 연천 유엔군화장장시설, 파주 금촌마을 등을 조사하고 문헌, 영상 등으로 기록했다. 이중에서도 경기감영 기록사업은 상당히 의미있었다. 경기라는 지명을 얻었던 고려시대부터 경기감영이 설치된 조선시대, 그리고 근현대사 속의 경기도청까지 세세하게 살폈다. 특히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거쳐 지금의 경기도청이 설치되기까지의 여정은 한국 역사의 질곡을 보는 듯 하다. 재단은 경기감영을 조사하고 기록함으로써 경기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재조명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총 8회에 걸친 기획기사에는 경기감영을 비롯해 연천 유엔군화장장시설, 파주 금촌 마을 등 재단이 진행했던 기록사업의 성과물을 되짚어 봄과 동시에 새로운 역사 문화 유산을 소개하고, 전문가 제언 등을 실을 예정이다. 편집자주 ■ 고려시대 경기 개념의 성립과 조선시대 경기감영의 설치 올해는 경기(京畿)라는 지명이 생긴지 꼬박 1천년이 되는 해다. 1018년(현종 9) 왕경을 제외한 나머지 적현과 기현 12곳을 묶어 경기라 부르기 시작했다. 고려 현종대의 경기는 궁원전(宮院田)과 중앙관청의 공해전(公田) 등을 집중시켜 왕실과 관청의 경비 조달을 용이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치됐다. 경기는 1069년(문종 23) 양광(楊廣)교주(交州)서해도(西海道)로부터 39현을 이입해 총 52현을 관할하는 규모로 확대됐다 재축소됐고, 1390년(공양왕 2) 44현 규모로 다시 확대돼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가 설치됐다. 이 때의 경기는 좌도와 우도로 분리돼 통치됐다. 조선이 개국하고 새로운 도성이 건립되면서 경기의 범위는 재설정됐다. 1395년(태조 4) 본래 경기에 속했던 7개 고을을 서해도로 옮기고 양광도에 속했던 9개 고을을 경기로 옮겨 한양 중심의 경기 영역을 구축했다. 경기의 행정 사무를 도맡던 경기감영도 이 시기 설치됐다. 오늘날의 경기도지사인 경기관찰사는 역대 집권세력이 중요시한 자리 중 하나였다. 경기가 8도 중 가장 큰 도이자 외교와 국방상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종2품보다 품계가 높은 대신(大臣) 반열에서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경기감과 대궐의 거리가 가까운 탓에 경기관찰사의 업무에는 몇 가지 특이점도 있었다. 대궐에 입시해 왕을 친견하는 횟수가 잦은 편이었으며, 유지와 장계의 전달 및 처리 속도가 다른 도의 감에 비해 빨랐다. ■ 옛 경기감영의 모습 경기감영은 도성의 서대문인 돈의문 밖 약 250m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 돈의문을 등지고 나와 좌측으로 말을 관리하던 관청인 고마청과 우측으로 빈관(객사)을 지나면 경기감영에 이르렀다. 경기감영을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꺾으면 명나라와 청나라의 사신을 영접하던 모화관과 은문으로 이어지는 의주로가 나왔다. 의주로는 명과 청의 수도인 북경과 한양을 잇던 길로써 외방도로 중 가장 발달했다. 주요 교통로던 만큼 외침과 내란 모두에서 도성 수비의 요충지인 동시에, 유통과 상업의 측면에서 도 중요도가 높은 길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황토현(현 세종로사거리)에서 경희궁 앞을 지나 경기감영에 이르는 길의 폭은 약 17m으로 상당한 규모였다. 당시 경기감영의 모습은 경기감영도에 잘 그려져 있다. 작자 미상의 경기감영도는 조선후기 돈의문 밖을 그린 그림이다.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경기감영, 경기빈관, 경기중영, 고마청은 화면 한가운 데에 평행투시도법으로 그려져 있으며, 비교적 건축실상을 짐작할 수 있을만큼 상세하게 묘사돼 있다. 경기감영의 진입은 다른 감영과 마찬가지로 삼문(三門) 체계로 돼 있다. 포정문 중삼문 내삼문을 거쳐 선화당 앞마당에 이른다. 외삼문 내삼문을 거쳐 정청으로 진입하는 이문(二門) 체계였던 중앙관아와 비교하면 경기관찰사의 위상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 수원으로의 이전 경기감영은 1896년(고종 33)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13도제가 실시되며 수원으로 이전됐다. 1898년 남궁억과 나수연 등이 창간한 황성신문의 1902년 4월11일자에는 한성부는 평양대 문으로 정하고 이 부는 전 경기빈관으로 이전하여 이미 수리가 준공된 고로 본 월 11일에 들어가고 내부에 보고 하더라라는 내용이 실려있다. 이 기사에서 한성부가 들어서기 전에 평양대라 불리는 군대가 옛 경기감영 일대를 전용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으며, 1902년 4월께에는 한성부가 경기빈관 일대를 전용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 승정원일기 1901년(고종 38) 3월 기사에는 불러 올린 평양 제2대대가 머물 장소를 한성부로 옮겨 정하라라는 고종의 하명이 담겨 있고, 1902년(고종 39) 3월 기사 에는 한성부와 한성재판소는 전 기영의 빈관을 함께 써서 그대로 머물고, 불러올린 평양 제2대대가 주둔할 곳은 해부(該府) 안에 나누어 정하라라는 내용이 있다. 경기감영이 수원으로 이전된 직후의 전용 상황은 알기 어렵지만 1901년께에는 평양 제2대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1902년 4월부터는 한성부와 평양 제2대대가 경기감영 터를 함께 전용 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옛 경기감영터에서는 표지석만 세워져 있다. 송시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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