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을까? 책과 사진, 지폐와 신문, 휴지에 이르기까지 종이는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종이는 예술적 소재로도 탁월하다. 온갖 모습으로 변신을 잘하기 때문일까, 종이는 아이들과 유난히 친하다. 1층 체험장에 들어서니 모처럼 정겨운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자매가 가위로 둥글게 오린 색종이를 붙이고 있다. 그게 뭐니? 자매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포도를 만들어요. 멀찍이 간격을 띄운 건너편 책상에는 자매보다 나이가 더 어린 남매가 찢은 종이로 손거울을 장식하고 있다. 만들기에 심취한 아이들을 지켜보는 젊은 부부의 표정이 밝다. 안산 대부도에 자리한 종이미술관(관장 김은순)에서 아이들에게 놀이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스마트폰조차 빼앗지 못하는 것이 아이들의 그림이며 만들기이다. 문화학자 호이징가의 말처럼 인간은 놀이하는 인간(호모 루덴스)인 것이다. 어릴 적 우리가 그랬듯이 아이들은 종이와 친하다. 접고, 찢고, 구기고, 오리고, 색을 물들이고, 불에 태우고, 물에 불리고, 잇고 붙여 아이들은 자신만의 세계를 표현한다. 종이의 무한한 쓰임과 변신을 보고 체험할 수 있는 종이미술관은 어린이미술관, 공예품 만들기 체험장과 한옥 체험장을 갖추고 있다. 다양한 전통놀이시설을 갖춘 미술관 마당은 잔디도 깔려 있어 아이들이 맘 놓고 뛰어놀기에 좋다. 도시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경험해보기 어려운 한옥체험도 특별한 재미를 준다. 한옥의 대청마루에 누워 한옥의 재료를 살피다 보면 벽과 천장은 물론 방바닥까지 한지로 마감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한지는 한옥의 옷인 셈이다. ■ 종이로 아이들의 예술적 감각과 상상력을 깨우다 미술관에 들어서면 눈길을 사로잡는 두 가지 인상적인 설치미술과 마주하게 된다. 하나는 엘리베이터 옆에 설치한 장미꽃이다. 종이가 이처럼 아름다운 장미꽃으로 변신할 수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또 하나는 카페로 이어지는 복도를 가득 채운 수천 마리의 종이학이다. 학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관람객의 모습이 보인다. 최재혁 대표를 따라 2층에 있는 제1전시관에 들어선다. 2021 안산종이문화축제 기획 초대전 닥종이 인형의 해솔길 나들이가 열리고 있다. 강명순의 조각배는 조각달을 배경으로 웃통을 벗어젖힌 세 아이가 배 위에 앉아 있는 풍경을 표현한 멋진 작품이다. 김진희의 달마중도 재미있다. 커다란 보름달을 배경으로 장대를 든 오빠와 그 뒤를 따르는 여동생과 바둑이가 등장하는 이 작품을 비롯해 김현희의 파랑새, 김현경의 꿈꾸는 비단마, 김인숙의 왕과 왕비, 김미순의 보부상, 박혜순의 새참, 박경애의 비 오는 날, 범인자의 친구, 안설영의 그리운 얼굴, 이선화의 의좋은 형제, 이초연의 불꽃, 장덕희의 고릴라와 아이, 허소라의 해바라기 등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밝고 푸근하다. 길가에 채소를 벌려놓고 파는 노점상인 늙은 어머니를 표현한 송숙희의 울엄마에 등장하는 노모의 주름진 표정조차 환하다! 고단하고 삭막한 현실에 한 줌 위안을 주려는 작가들의 마음일 것이다. 이웃한 대부고등학교 학생들의 한지의상 작품전은 한지예술이 너무 먼 당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한지를 다루는 학생들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옥상 정원에 올라 대부도의 풍광을 감상하는 시간도 가진다. 최 대표가 야트막한 산 너머를 가리킨다. 저기 살짝 보이는 작은 섬이 제부도입니다. 어린이미술관인 제2전시관은 입구부터 아이들이 좋아하는 소재들이다. 토끼와 공룡 같은 동물과 쇠똥구리 같은 풍뎅이, 만화영화로 익숙한 로봇들이 반긴다. 닥종이로 만든 종이인형을 여기서 다시 만난다. 뒷짐을 지고 앞서가는 할아버지와 호박을 머리에 인 할머니를 흉내 내며 따라가는 손자와 손녀들의 표정이 즐거운 울하부지할머니란 작품이다. 옛사람들은 종이를 꼬아 바구니, 요강 같은 생활용품을 만들었다. 지금도 계승되고 있는 지승공예품에 한국인의 미적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천년을 간다는 한지를 만드는 과정을 소개하는 코너도 재미있다. 닥나무를 잘라 솥에 넣고 쪄 껍질을 벗기고, 검은 빛깔의 겉껍질을 벗겨내어 백닥을 만들어 씻고 말린 다음 다시 백닥을 삶아 표백하고 티를 골라내고 방망이로 두드려 잘게 만들어 물통에 풀어 넣고 대발로 한지를 떠 물을 빼고 건조시켜 다듬는 과정이다. 물론 등장인물을 비롯한 다양한 소품들은 모두 한지로 만든 것이다. 해마와 함께 잠수복을 입은 두 사람이 바닷속을 살피는 시원한 풍경이 등장한다. 물결에 흔들리는 산호초와 물고기를 쫓는 상어, 낙하산을 펼친 듯 말미잘 무리가 비상하고 있다. 바다 풍경을 보면서 잠시 무더위를 잊는다. 어린이미술관은 어른들도 동심에 젖어들게 한다. 정원에 나가면 나무와 꽃, 야외 조형작품이 어우러진 잔디마당이 펼쳐진다. 잔디마당에 마련된 전통놀이 체험장에서 고무줄놀이, 팽이치기, 사방치기, 천렵, 연날리기, 줄넘기, 비석치기, 윷놀이, 썰매타기, 숨바꼭질, 사물놀이, 백중놀이, 굴렁쇠, 바람개비. 제기차기 같은 전통놀이를 체험해 볼 수 있다. 체험장을 다시 둘러본다. 역시 아이들이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다. 아이들은 손으로 만지며 만들어보는 체험을 좋아한다. 일정한 비용을 내면 곰돌이 손거울, 산타요정, 종이 선인장, 라벤더 꽃병, 공주인형, 축구공저금통, 미니보석함, 도라지꽃 화분, 콩나물, 시루, 움직이는 강아지와 말, 춤추는 로봇 등 정말 다양한 작품을 전문 강사의 지도를 받으며 만들어 볼 수 있다. 물론 한지뜨기도 체험할 수 있다. 10명 이상의 성인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이 특별한 체험은 1주일 전에 예약해야 가능하단다. ■ 재미있어 다시 찾는 미술관 종이미술관은 문을 연 지 7년 되었다. 최 대표는 학교나 문화센터에 종이를 공급하면서 종이미술관을 설립할 뜻을 세우고 자금을 마련했다. 종이문화가 더 이상 발전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조바심, 소중한 우리의 자산이지만 사라져갈 것이기에 보존하고자 하는 바람이 그를 행동하게 만들었다. 종이를 주제로 한 작품 공모전을 열고, 15년 이상 작품을 모았던 것이다. 그가 기획한 몇 차례의 전시회는 2만명의 관람객이 찾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관의 지원을 받는 행사는 연속성을 갖기 어렵다는 현실의 벽에 부닥친다. 시장이 바뀌면 행사가 사라졌던 것이다. 미술관을 세우기로 작정한 또 하나의 이유는 지속적인 사업을 펼치기 위함이었다. 15년을 준비한 그는 마침내 8년 전에 땅을 매입하고 바로 공사에 들어갔다. 돈이 있다고, 예술을 사랑한다고 미술관을 운영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미술을 전공하여 관장을 맡은 부인과 호흡을 맞춰 성공적으로 미술관을 운영하지만 어려움도 적잖다. 쾌적하고 산뜻한 미술관을 꾸미려면 남모르는 어려움을 감수해야 한다. 넓은 잔디마당을 가꾸고 있는 그는 이 더운 날에도 풀을 뽑아야했다고 털어놓는다. 주말이나 공휴일에도 쉴 수가 없다. 그럼에도 즐겁게 일하고 있다. 작지만 재미있는 미술관, 다시 찾고 싶은 미술관으로 기억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요. 관람객들이 와서 멋지다고 감탄할 때, 아이들이 집에 안 가려고 할 때, 다음에 또 오겠다고 약속할 때가 가장 즐겁습니다. 종이미술관이 자리 잡은 대부도는 자연문화유산도 풍부하다. 섬이 마치 큰 언덕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은 대부도는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소나무와 모래사장이 아름답다. 문화유산도 풍부한데, 미술관과 가까운 대남초등학교는 가수 이미자가 부른 섬마을 선생님의 무대이다. 그래서 붙여진 길 이름이 섬마을선생님 해당화길이다. 더위가 가시고 걷기 좋은 계절이 돌아오면 대부도를 찾아 종이미술관을 둘러보고 섬 둘레길을 느릿하게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정치
김영호
2021-08-08 17: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