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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40. 시흥 '소전미술관'

가을의 끝자락인데도 산 빛이 여전히 푸르다. 시흥은 물론 인천과 부천시민들도 즐겨 찾는다는 소래산 자락에 자리 잡은 소전미술관(이사장 이동섭)의 아늑한 풍경이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다. 미술관을 둘러싼 철로 된 야트막한 담장도 경계는 짓되 안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 소전미술관은 극동그룹 창업주이자 장학 사업을 위해 (재)소전재단을 설립한 故 소전(素田) 김용산(1922~2007) 회장이 평생 모은 도자기를 비롯한 고미술품과 조각, 회화를 기반으로 1996년 5월에 개관한 사립미술관이다. '평생 즐기고 모아온 우리 고미술품들을 사회에 환원키로 작심했다. 보잘 것 없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것들이다' 라고 설립자가 생전에 남긴 이 말 속에 소전미술관이 추구하는 정신이 담겨 있다. 내가 가진 좋은 것을 이웃과 나누고 함께 즐기려는 동락(同樂)의 마음이다. 미술관이 자리 잡은 대야동은 설립자 김용산 회장이 나고 자란 곳이다. 노년에 은퇴하면 살 생각으로 지은 별장을 미술관으로 개조했기 때문일까, 미술관에 들어서면 집처럼 편안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한동안 문을 닫았던 미술관은 2019년 6월 이동섭 이사장이 취임하면서 '어렵더라도 문을 열어야 한다'는 이사회의 뜻을 모아 1년 동안 준비하여 지난해 5월,다시 문을 열었다. 닫혀 있던 미술관 문을 열면서 어떤 다짐을 했을까? 매주 금요일마다 미술관을 찾아와 정원 가꾸기를 비롯한 허드렛일을 도맡아 한다는 이동섭 이사장이 홈페이지를 통해 전하는 인사말이 따뜻하다. 소수의, 가진 자의 미술관에서 시민의, 시민을 위한 미술관이 되겠습니다. 처음처럼!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소전미술관은 처음처럼 여러분 앞에 다가가겠습니다. ■ 도자기에 담겨있는 멋과 풍류 너른 정원이 일품이다. 이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기 위해 미술관 식구들이 여름 내내 많은 땀을 흘렸으리라. 미술관 마당에서 세계적인 조각 작품을 만나는 뜻밖의 기쁨을 맛본다. 마당가에 서 있는 엄지손가락은 1960년대 프랑스 누보레알리즘을 이끌었던 세자르 발다치니(1921~1998)의 작품이다. 어린 날 자주 보았던 낯익은 풍경이지만 분위기는 사뭇 다른 여인상 앞으로 다가간다. 오른손으로 어린아이를 안고 왼손으로는 과일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잡고 있는 여인을 표현한 고귀한 짐은 로댕과 함께 조각의 거장으로 불리는 에밀 앙투안 부르델(1861~1929)의 작품이다. 활 쏘는 헤라클레스로 우리에게 친숙한 부르델의 조각은 미술관 안에도 한 점 더 있다. 생각하는 베토벤은 청력을 잃은 상태에서 운명과 영웅 같은 위대한 작품을 창작한 베토벤에 대한 작가의 흠모와 존경심이 가득 담긴 작품이다.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며 베토벤을 조각하는 대가의 모습을 그려본다. 평화로운 동산으로 데려줄 것 같은 늘씬한 두 마리의 말은 여의도 한화생명빌딩의 물고기를 제작한 유리 공예가 심현지의 작품이다. 조각과 수석으로 단장한 정원을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해 미술관에 들어가기도 전에 벌써 마음이 흡족하다. 고요해서 좋다고 해요. 미술관을 찾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죠. 미술관 곁에 소래산 삼림욕장 옆에 있거든요. 삼림욕장을 찾는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어, 미술관이 있네하며 들어오는 분들도 있어요. 안예진 학예연구실장이 소전미술관의 독특한 분위기를 재미나게 들려준다. 1층 1전시실에서 특별기획전 상상을 따르는 주전자가 열리고 있다. 현대적 감각이 풍만한 작품과 마주한다. 스웨덴 출신의 작가 죠스타 그라스(1938~)의 샤먼을 위한 찻주전자는 제목만큼이나 주전자의 모양과 색깔과 디자인이 독특하다. 인체를 닮은 부드러운 곡선과 푸른 색감이 조화를 이룬 파란 불의 찻주전자는 독일 작가 베아타 쿤의 작품이다. 잠시만 바라봐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은 부드러운 선과 차분한 색이 전하는 힘이 아닐까. 특별전에서 만나는 외국 작가들의 작품에서 받는 자유로운 정신을 우리의 옛 도자기에서도 찾을 수 있을까? 푸른 바탕에 수양버들과 갈대가 실바람에 춤춘다. 청자 버드나무 무늬 병 모양 주전자에서 번지는 푸른빛과 부드럽게 흐르는 선에서 고려인의 자유롭고 개방적인 예술 정신을 만난다. 고려청자의 푸른 빛깔과 조선백자의 단아한 자태는 한국미의 극치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분청사기에 마음이 더 끌리는 것을 무슨 까닭일까? 분청사기는 들여다보면 볼수록 사랑스러운 그릇이다. 대범한 선과 담백한 색깔로 관람객의 눈길을 한꺼번에 사로잡는 분청사기 모란무늬 편병 앞에 선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도자기의 수요와 공급이 크게 늘어납니다. 이때 탄생한 것이 분청사기인데, 그동안 분청사기는 청자나 백자에 비해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지요. 그러나 분청사기는 청자나 백자보다 훨씬 자유롭고 재미있습니다. 고정된 틀에 갇히지 않고 자유로운 개성을 표출한 작품들이 많아요. 요즘 해외 경매에서는 재미있는 작품이 각광을 받습니다. 안 실장의 설명을 들으며 분청사기에 담긴 장인들의 분방한 예술 감각에 감탄한다. 상감, 인화, 박지, 음각, 철화, 귀얄, 덤벙이라는 일곱 가지 기법이 있다는 사실도 놀랍다. 상감은 그릇에 무늬를 그린 뒤 무늬 부분을 긁어내고 이곳에 백토나 자토를 넣어 유약을 발라 굽는 기법이다. 인화는 꽃 모양의 도장을 찍어 오목한 부분에 백토를 넣는 기법이며, 박지는 백토를 발라 무늬를 그리고 무늬를 뺀 나머지 백토를 긁어내는 기법이다. 음각은 백토를 바른 뒤에 선으로 새기는 기법이고, 철화는 백토를 바르고 철분이 많은 안료를 묻힌 붓으로 무늬를 그리는 기법이다. 귀얄은 풀비에 백토를 묻혀 표면에 바르는 기법인데 생동감이 넘친다. 덤벙은 그릇을 백토물에 담가 분장하는 단순한 기법이다. ■ 문화예술이 가진 즐거움과 고고함을 전달하는 미술관 소전미술관은 미술자료실도 갖추고 있다. 시민들에게 개방한다는 자료실을 둘러보며 놀란다. 우리 미술관에는 1만권의 책이 있어요. 미술관을 만들 무렵에는 도서관을 꾸밀 계획이었는데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그 시대 도록에 멈춰 있지만, 희귀하고 소중한 자료들이 많아요. 지금 자료를 디지털화하고 있습니다. 참, 이 공간에서 인문학 동아리 활동을 할 수가 있습니다. 미술관 기획과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안 실장은 학부에서 조각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예술기획을 공부한 전문기획자다. 소전미술관이 첫 직장이었어요. 2004년 봄날, 큐레이터를 뽑는다는 광고를 보고 면접을 찾았는데 마당에 핀 벚꽃이 너무 예뻤어요. 이곳에서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운 좋게 뽑혔지요. 당시에는 상설전시실만 있었습니다. 이후 한국수자원공사 박물관, 제주 아라리오뮤지엄, 유민미술관의 개관 큐레이터로 일했어요. 재개관을 준비하면서 소전에서 일했던 저를 떠올렸던 것이지요. 소전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만큼 애착도 각별하다는 안 실장은 2019년 10월부터 다시 근무하게 된다. 그는 소전미술관이 문화예술의 즐거움과 예술이 갖는 고고함을 동시에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접점을 찾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시민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마음, 문턱을 낮추고 재미와 교양을 갖춘 기획으로 시민들을 미술관으로 불러들이려는 소전미술관의 생각이 멋지다. 3천원이던 입장료를 1천원으로 낮춘 것도 이런 뜻을 담은 것이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9. 남양주 한강뮤지엄

아! 한강이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너무 시원하다. 남양주시 와부읍 경강로926번길 30 한강뮤지엄(관장 김난숙)은 2019년 9월에 문을 연 사립미술관이다. 예봉산(688.8m) 끝자락에 자리 잡은 미술관에서 마주 보는 산이 검단산(658.3m)이니 정약용 유적지와 실학박물관이 있는 두물머리도 가깝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하나로 합쳐지는 양수리부터 강폭이 좁아지면서 물살이 빠르다. 옛날 두미협이라 부르던 협곡을 지나 이곳부터 강폭이 넓어지며 물살의 흐름도 느려진다. 한강을 너무나 사랑해 호를 열수(洌水)라 했던 정약용이 고향 마현에서 배를 타고 서울로 가는 도중 청나라를 다녀온 자형 이벽에게 서양의 학문과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곳이다. 미술관 앞 버드나무숲이 무성한 작은 섬이 운치를 더한다. 겨울이면 천연기념물 고니를 비롯한 희귀한 철새들이 찾아오지요. 고라니가 헤엄을 쳐서 섬으로 들어가는 것도 직접 봤어요. 강물을 굽어보며 김난숙 관장이 들려주는 흥미로운 이야기에 빠져든다. ■ 예술과 놀며 생각하고, 생각하며 노는 즐거운 공간 개관하고 반년도 되지 않아 코로나19가 시작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다섯 차례의 기획전을 열었다니 미술관의 뚝심이 대단하다. 김 관장은 지역과 호흡하고 연대하는 일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남양주에서 노닐다-전시로 노닐다-정약용의 말전은 강변 야외를 무대로 펼쳐졌다. 정약용의 뜻이 늘 백성이라는 한 곳에 응집되어 있음을 상기시켜주는 김영원 작가의 그림자의 그림자(홀로 서다), 아이와 같은 백성들의 눈높이에서 펼친 다산의 정책과 저술의 시선을 표현한 한진섭 작가의 사색의 소녀와 행복하여라(돼지), 다산 정신이 담긴 말 한마디를 커다란 둥근 바위로 표현한 강인구 작가의 바위, 바다로 가는 길, 스스로 경계하고자 애쓴 다산의 마음 닦기를 터널로 표현한 김경주 작가의 마음터널, 기득권층과 맞서며 실학사상을 펼친 다산의 고난에 찬 삶을 표현한 효제인 작가의 In the End ver. 04, 부국강병을 비롯해 다산이 추구하였던 이상을 표현한 이항길 작가의 유토피아, 정약용의 얼과 뜻을 말이라는 언어로 시각화한 김동우 작가의 정약용의 말이 전시되었다. 당신에게 소비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진 SO, BE 展(2020.7)은 문제적인 전시였다. 김난숙, 김동진, 심지훈, 육효진, 원범식, 이지은, 한슬, 홍유영 작가가 참여하여 우리 삶 속에 깊이 파고든 소비문화의 현주소를 짚었다. 모든 것이 연결된 세상에서,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백인교, 이지훈, 심성희, 박진희, 안소현, 혜순향, 이상은 작가가 참여한 기획전 오늘, 약속이 없어요는 우리 시대의 소통의 부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전시였다. 코로나19라는 시대의 우울을 날려버리려면 우리의 생활을 단순하고 가볍게 해야 한다. 특별전 디스코디스코가 던지는 메시지가 선명하다. 당신의 심장을 뛰게 할 에너지는 무엇인가요? 디스코를 매개로 단순함과 경쾌함의 요소를 회복과 공존으로 시각화하여 공존하는 사회에 대한 고찰을 시도한 서자현 작가의 사랑 시리즈를 비롯하여 진귀원, MeME, 박종화, 김인, 김형기, 이아람 작가가 이 흥미로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한강뮤지엄이 운영하는 아트 레시피 마음의 쉼표라는 프로그램도 주목된다. 온라인을 통해 비대면으로 이루어지는 경험예술 프로그램이다. 오감을 자극하는 다도 마음 우리기 심신을 안정시키는 인센스 마음의 향 칼림바를 연주하는 마음의 울림 진정한 휴식의 의미를 찾는 명상 마음 들여다보기 쉼표체험을 통해 살펴본 나의 마음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드로잉 마음 팔레트까지 모두 다섯 가지를 체험한다. 드로잉을 제외한 나머지 프로그램은 미술관과 쉽게 연결 짓기 어려운 것들이다. 이처럼 한강뮤지엄의 생각은 열려 있다. 처음엔 개념적인 전시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미술관을 찾는 관람객 대부분이 모처럼 일상에서 벗어나 가벼운 마음으로 차를 마시며 담소하고 휴식을 취하는 것을 보며 생각을 바꾸었지요. 전시 기획을 담당하고 있는 김동우 부관장의 말이다. 이런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마련한 것이 오늘은 월차 전이다. 내년 3월18일까지 열리는 오늘은 월차전을 둘러본다. 미술관이 관람객에게 던지는 화두가 가볍다. 오늘은 나에게 어떤 휴식이 될지 전시를 통해 선물하는 나의 하루를 만나보자. ■ 쉼, 진정한 휴식은 어떤 것일까? 여름 휴가철인 듯 수영복을 입은 사람들이 풀장에 가득하다. 이상원 작가는 군중을 통해 새로운 시각으로 휴식의 본질에 접근하고 있다. 소중한 사람들과 보내는 행복한 순간 속 우리를 관찰하여 그 모습을 자세하고 밀도 있게 표현해내는 방식이다. 낡은 장난감들이 한 무더기 쌓여 있다. 작가는 장난감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어린 시절 아이들은 장난감 소방차를 들고 소방관이 되기를 꿈꾸고, 비행기를 들고 비행사가 되는 꿈을 꾸지요. 그러나 성장하면서 대부분 그런 꿈을 잃어버립니다. 어린 시절에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통해 잃어버린 꿈을 되찾자는 작가의 메시지가 담겨 있지요. 장난감 놀이에 대한 아이들의 욕망을 어른들의 쉼에 비유하며, 장난감 속에 담긴 인간의 욕구에 주목한 김용철 작가의 문제의식이 날카롭다. 이어지는 공간은 더욱 화사하다. 초록의 유칼리 숲 핑크색 유칼리 꽃 속에서, 핑크색의 플라밍고의 등을 타고 소풍을 떠나는 코알라가 무척 행복해 보인다. 릴리 작가는 온전한 휴식이란 개인적인 경험과 사유로 어우러진 삶과 쉼을 공유하는 과정이자 치유와 회복의 과정임을 알려준다. 2층 전시실에서 처음 마주한 작품은 온통 책 그림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면 책과 담을 쌓는다.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책은 점점 멀어지고 있다. 그런데 책이라니! 책이 휴식과 얼마나 가까울까? 서유라 작가는 책이라는 하나의 소재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정신적 쉼으로서의 갈망을 표현합니다. 김 관장의 설명이 진지함을 더해준다. 책과 가까운 것은 잠이 아닐까? 김이란 작가의 작품에는 잠을 자는 중년의 여성이 자주 등장한다. 그는 일상 속에서 만날법한 아줌마를 해학적이고 익살스럽게 등장시켜 괜찮아, 나도 이렇게 살고 있어라며 동시대 여성들에게 위로와 공감을 건네준다. 뜨개질을 하다가, 텔레비전을 보다가, 혹은 책을 보다가 드러누워 자고 있는 펑퍼짐한 몸매를 가진 중년의 여성은 아마도 작가 자신일 것이다. 소파에 앉거나 드러누운 세 자녀가 간식을 먹으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다. 소파에 기대앉은 엄마도 웃고 있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엄마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다! 엄마는 자녀들을 위해 쉬는 시간조차 일을 해야 하는 존재이다. 남편도 휴식이 필요한 존재인데 왜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을까? ■ 흐르는 강물처럼 길이 되는 곳 한강뮤지엄은 즐겁고 편안한 공간이다. 물론 체험 공간도 마련되어 있으니 주말에 아이들과 함께 와도 좋다.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기에도 썩 좋은 곳이다. 야외 전시장으로 활용하는 넓은 옥상도 봄부터 가을까지 관람객들이 즐겨 찾는 공간이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11시까지 관람할 수 있다. 대안공간 ㈜4LOG 대표를 지낸 김난숙 관장은 한강뮤지엄을 열기 한해 전인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때 대회의 성공을 기원하며 전시회를 열었던 기획자이자, 서울과 강릉에서 진행된 현재를 바라보는 시선2017- 한중일 현대미술작가 교류전에도 참여한 작가이다. 그의 가장 큰 바람은 후배 작가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한강뮤지엄은 작가에게 경계가 없는 공간이자 다양한 장르의 예술 통합이 이루어지는 곳이며, 실험적 예술을 추구할 수 있는 예술공장입니다. 실험정신이 강한 젊은 예술 작가들에게 열려 있는 곳입니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8. 양평 '구하우스미술관'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만나는 북한강을 따라 펼쳐지는 늦가을 풍경이 황홀하다. 양수역에서 자전거로 30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에 자리한 구하우스미술관(KooHouseMuseum, 관장 구정순). 짐작하듯 이 독특한 이름은 설립자인 구정순 관장의 성과 집이란 단어를 조합한 것이다. 구하우스는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미술관을 표방하며 2016년에 개관한 사립미술관이다. 구하우스는 미술관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전복하여 미술관을 집처럼 만들었다. 미술관을 설계한 이는 2014년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 건축전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건축가 조민석이다. 건물에는 설립자의 이념과 지향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가정집 분위기를 연출한 전시실은 서재, 거실, 침실, 복도, 다락 등으로 이름 붙인 10개의 공간에 회화를 비롯해 설치 미술, 조각, 영상과 사진, 빈티지 가구까지 현대미술 작품 4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집 안을 돌아다니는 기분으로 여유롭게 작품을 감상하라는 주인의 따뜻한 마음이 읽힌다. ■시대를 통찰하는 예술의 힘 최현진 큐레이터의 안내를 받으며 작품 관람을 시작한다. 10개나 되어 헷갈릴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까, 전시실에는 큼직한 아라비아 숫자가 붙어 있다. 2번 전시장에서 만난 구하우스 12회 기획전 데미안 허스트-새로운 종교전은 시대를 통찰하는 정신이 흐르고 있다. 영국 출신의 데미안 허스트는 1965년생인데, 그의 작품 가격이 피카소나 반 고흐의 작품을 능가한다고 한다. 존재의 삶과 죽음을 주제로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허스트의 전달 방식은 과격하지만 진지하다. 약품과 기독교적 상징들을 연결한 그의 작품은 현대는 의학이 중세의 종교의 역할을 대신하여 새로운 종교(New Religion)로 기능 하고 있음을 충격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현대미술의 화법은 예상을 뛰어넘는다. 다행히 1층에서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옆에 서재처럼 꾸민 3번방은 편안하다. 소파에 앉아 운치 있는 서가에 꽂힌 미술 서적을 꺼내 독서할 수 있는 곳. 관람객이 앉도록 놓아둔 의자와 소파는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애용해 더욱 유명해진 조지 나카시마의 작품이다. 프랑스의 조각가 자비에 베이앙(1963~)의 모빌은 애연가였던 근대건축의 아버지 르 코르뷔지에(1887~1965)를 오마주한 작품이다. 르 코르뷔지에가 피우는 담배 연기는 줄로 이어져 공중의 동그란 청색 모빌로 연결된다. 건축기술로 한 건물에서 개인의 욕구와 공동체의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주거양식의 창안에 평생을 바친 르 코르뷔지에는 집 같은 미술관을 표방한 구하우스의 지향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서재 옆에 붙어 있는 침실에는 앤디 워홀(1930?~1987)과 팝아트 작품이 걸려 있고, 침상 위에는 백남준(1932~2006)의 조각이 놓였다. 화장실엔 벌거벗은 남자가 변기 옆에 웅크리고 앉아 새장에 갇힌 새를 바라보고 있다. 중국 작가 핑이잉의 작품이다. 거실처럼 넓은 5번방은 생존하는 화가 중 가장 인기 있는 작가로 손꼽히는 데이비드 호크니(1937~)의 최신작인 Pictures onan Exhibition이 걸려 있다. 사진일까요, 그림일까요? 저 그림 속에 작가 호크니가 있는데 어디에 있을까 찾아보세요. 호크니의 작품이 걸려 있는 스튜디오 안에서 그림을 감상하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멜빵바지를 입고 담배를 들고 벽에 기대서서 젊은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살집이 풍만하고 선한 인상을 가진 사람을 가리켰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어, 바로 맞추셨네요! 저 드로잉 작품은 제작 과정이 좀 특별해요. 각기 다른 날짜에 스튜디오를 방문한 사람들을 여러 각도에서 찍은 수백 장의 사진을 디지털 합성해 대형 프린터로 출력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거든요. 그림일까 사진일까 궁금했는데, 눈치를 챈 큐레이터가 재치 있게 바로 알려준다. 팔십대 노인이지만 아이폰과 아이패드로도 즐겨 그림을 그린다는 데이비드 호크니도 영국 출신이다! ■ 우리 시대 가장 유명한 작가의 작품과 마주하다 2층 전시장에는 우리의 귀에 좀 더 익숙한 작가들의 작품들이 기다리고 있다. 피카소, 앤디 워홀, 백남준, 줄리안 오피, 막스 에른스트 같은 대가들의 작품이다. 한 곳에서 이런 대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다. 아담한 정원에는 가을꽃이 향기롭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난 산책로를 걸으니 보랏빛 건물이 반긴다. 게스트 룸이에요. 작가들이 생활하는 곳이죠. 볼 일이 없더라도 게스트 룸에 붙어 있는 화장실은 꼭 들어가 봐야 한다. 아름다운 컵들로 장식한 화장실 풍경은 한번 보면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2021년 전시공간활성화 지원사업으로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조지 몰튼-클락(George Morton-Clark)?신화, 영웅 그리고 미친 과학자전이 열리는 전시실도 독특한 공간이다. 2022년 1월16일까지 진행되는 이 전시를 통해 현대미술의 문법을 배울 수 있다. 조지 몰튼-클락. 그의 작품은 얼핏 어린아이가 스케치북에 휘갈겨 그린 낙서를 닮았다. 미키마우스, 톰과 제리, 도라에몽, 도날드덕, 쿠키몬스터, 핑크팬더, 호빵맨 등 동서양 대중문화 친숙한 캐릭터와 강렬한 단색과 원근 없는 평면적 구도, 비정형의 선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화면. 그 혼란을 뚫고 불쑥 떠오르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는 몰튼-클락의 예술 세계에 뿌리가 되는 모티프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회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이렇게 소개했다. 만화에는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연결고리가 있다. 배움의 기회가 많았던 유년 시절, 우리는 모두 만화를 보고, 그 캐릭터들과 함께 성장했다. 내게 만화 캐릭터는 추상화를 만들기 위한 일종의 그릇이다. ■ 창조적 영감이 샘솟는 젊은 공간 코로나19로 사립미술관들이 고전을 면치 못한 지난해와 올해에 구하우스미술관은 오히려 관람객이 배로 늘어났다고 한다. 설립자 구정순 관장이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한 것은 23세 때, 첫 직장에서 받은 보너스 20만원을 털어 국민화가로 불리는 박수근(1914~1965)의 작품을 구입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구 대표가 40년 동안 모은 소장품은 약 400점에 달한다. 미술관을 둘러보니 구 관장의 예술적 감각과 미감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구 관장은 기업의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CI(Corporate Identity)를 전문으로 제작하는 회사 디자인 포커스의 대표이기도 하다. 1983년 설립된 디자인 포커스는 KB국민은행, KBS, 처음처럼, S-OIL 등 국내 굴지의 기업 CI를 제작한 회사로 유명하다. 편히 쉬어도 좋을 나이에 전혀 새로운 분야인 미술관을 왜 시작했을까? 오래전부터 나이가 들면 미술관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컬렉션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청소년을 위한 미술관도 생각했지요. 미술은 의식주 안에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예술작품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공유하는 것이에요. 삶의 예술, 그것은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싶었어요. 집처럼 편한 분위기에서 미술품을 친근하게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설립한 것이지요. 제가 만든 커다란 집에서 다양한 창조적인 영감을 얻기를 소망합니다. 구하우스 소장 미술품은 개념주의 미술 작품이 많다. 현대미술은 역시 난해하다. 이를 이해하고 즐기려면 일정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첫 만남을 피하거나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작품에 붙인 설명문만 읽어도 작품을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구 관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반려견 융이 다가온다. 아직 한 살밖에 되지 않은 푸들인데, 순한 눈매와 날씬한 몸매가 사랑스러운 아이다. 양평 구하우스미술관은 무뎌진 감성과 굳은 생각을 푸릇푸릇하게 바꾸고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주는 회복과 재생의 공간이다. 미술관 가까운 곳에 황순원 문학촌 소나기마을과 잔아문학박물관이 있으니 함께 찾아보시길. 구하우스처럼 두 곳 모두 젊은 생각이 숨 쉬는 공간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7. 화성 '엄미술관'

세계문화유산 융릉과 건릉으로 이어지는 산자락에 자리 잡은 엄미술관도 가을에 물들어 있다. 화성 봉담 수원대 옆에 자리한 엄미술관(관장 진희숙)은 한국을 대표하는 원로 조각가 엄태정 서울대 명예교수의 작업실을 개조해 5년 전에 개관한 사립미술관이다. 설립자 엄태정 작가는 제16회 국전에서 조각으로 국무총리상(1967), 제2회 한국미술대상전 최우수상(1971), 1971년부터 국전 추천작가와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을 역임한 한국 조각계의 거성이다. 브라질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2년 연속 초청되었으며, 서울대 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독일 베를린 예술대학 연구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김세중 조각상(1989), 제7회 이미륵상(2012), 프리즈 런던 스컬프처 2019에 선정되었으며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인 그는 2013년부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조각은 내 안의 낯선 자를 만나 치유하는 과정 엄태정 작가는 현대 조각의 아버지로 불리는 루마니아 출신의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1876~1957)에 매료돼 조각을 전공하게 된다. 추상조각의 선구자로도 불리는 브랑쿠시는 뮤즈와 입맞춤, 무한의 기둥으로 유명한 작가다. 엄 작가의 예술관을 들어보자. 추상 조각은 사물의 형태를 모방하는 게 아니다. 사물을 사유하고 사물의 본질을 수행을 통해 찾아내는 일이다. 그는 조각을 통해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한다. 하나님, 치유의 하루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치유의 시간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송나라 성리학자 주희가 말한 격물치지도 엄 작가의 조각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세상의 무수히 많은 사물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으니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자기 지식을 확고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손재간만 부리는 조각은 예술이 아니다. 조각하는 사람은 조각을 하지 않아야 제대로 조각한다. 엄 작가의 예술관은 이처럼 철저하다. 생존 작가를 기념하는 미술관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작가의 이름을 건 미술관은 작가가 돌아간 후 만들면 의미가 없다. 오랫동안 작가가 작품을 위해 애쓴 공간으로 창작의 예술적 삶이 생생하게 스며 있어 미술관의 가치가 있다 진희숙 관장이 어떤 매체와 가진 인터뷰에서 들려준 말이다. 물론 예술적 성취가 돋보이는 작가 엄태정의 조각 작품을 나라 안팎에서 만날 수 있다. 대법원 앞에 법과 정의가, 서울 잠실운동장 앞에 웅비가, 서울대에 쌍학이 설치되어 있고, 독일 총리 공관에 영구 설치하게 된 청동-기-시대-97-9는 통일의 의미를 담은 작품이다. ■ 한국 조각계의 원로 엄태정 작가의 작업실이 미술관으로 거듭나다 아내로서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를 곁에서 도와 드려야겠다는 마음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진희숙 관장은 2016년 미술관을 등록하면서 화성시에 시립미술관도 하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일의 순서를 바꾼다. 바로 지역민들과 어떻게 하면 소통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에 집중한 것이다. 처음에 관장이 거만해 보이더라는 말도 들었어요.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였다면 내가 달라져야지 다짐했죠. 이웃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미술관에 들어와서 행복함을 느끼도록 마음을 쏟았습니다. 미술관 행사가 열리면 지역민들에게 먼저 연락해서 모이게 합니다. 전시에 대해 소개하고 느낌을 공유하고 소통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지요. 이제 사람들이 엄미술관은 가 볼만한 미술관이다, 우리 동네에 이런 미술관이 있어 행복해요라는 말을 한다고 해요. 프로그램도 훌륭하고 미술관 풍경도 멋지다고 소감을 밝히자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이곳은 4계절이 모두 좋아요. 여름은 여름대로, 앙상한 가지만 보이는 겨울도 좋아요. 눈 내릴 때는 풍경이 아주 좋습니다. 봄과 여름은 생명력이 엄청 느껴지는 곳이에요. 미술관을 운영하는 진 관장의 신념도 분명하다. 누구도 차별받지 않아야 합니다. 특별히 나는 농사일을 하는 분들을 좋아하는데 그분들을 따로 초대합니다. 옛날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으나 지금은 그분들에게 최고로 대접해 줍니다. 길가의 노숙자들도 찾아오기를 바라죠. 진 관장이 직원들에게 특별히 당부하는 말이 있다며 소개한다. 소외된 사람들에게 특히 잘해라. 진행하고 있는 프로그램에서 엄미술관의 철학을 읽을 수 있다. 코로나19가 시작되기 한해 전에 환경전과 죽음을 맞이하는 교육을 시작했는데 반응이 너무 좋아 놀랐어요. 불치에 병이 걸렸을 때는 어느 병원으로 가야 할 지에 대해서도 알려주는 우리 삶에 밀착된 프로그램이었죠. 몸으로 떠나는 여행 핸드팬 소리로 마음을 치유하다 마음으로 듣는 클래식 바흐를 만나다 바른 먹거리의 다음, 바른 바를거리 환경과 피부 그리고 우리의 초상 문화 등 흥미로운 프로그램이 가득하다. 문턱을 낮추었다 해도 미술관은 여전히 접근하기 두렵다. 이웃을 미술관으로 이끄는 비결은 무엇일까? 우리 미술관은 사람이 많이 찾아오는 미술관이 아니기 때문에 오시기만 하면 완벽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일방의 전달이 아니라 질문을 던져 관람객의 생각을 끌어내지요. 우리는 늘 준비되어 있습니다. 진 관장의 말대로 엄미술관은 전문 인력이 풍부하다. 학예사와 예비학예사를 비롯해 미술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춘 직원이 다섯 명이나 상근하고 있다. ■미술관은 창조적 생각의 문을 여는 공간 지난 5월에 2021 올해의 박물관미술관 출판상을 수상했습니다. 학예사가 챙겨주는 도록을 펼쳐보니 품격이 묻어난다. 현재 전시하고 있는 독일 작가 카타리나 힌스베르크의 작품전은 12월27일까지 진행하는데, 전시 주제는 드로잉의 선율, 맑은 공간이다. 종이 위에 그어진 선이 평면에서 입체로 3차원의 전시 공간으로 확장된다. 작가는 윤곽선을 오려내 종이 위를 벗어나 평면과 공간을 넘나드는 드로잉의 선을 구현해낸다. 독일과 프랑스에서 공부한 작가는 드로잉의 본질과 확장 가능성을 탐구해 온 작가로, 독일 자르브뤼켄 미술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수십 개의 붉은 줄이 치렁치렁 매달려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이 신비롭다. 작가는 50대 후반인데 평생 드로잉 작업만 하는 작가에요. 벽에 붙어 있는 평면 드로잉 작품에 액자가 없다. 작가는 액자를 끼우지도 않고 작가가 바로 작업한 현장의 느낌을 주려고 합니다. 10년 전 독일 쾰른에서 이 작가의 작품을 보고 평소에 보지 못한 작품이라 신선함과 깊은 인상을 받았지요. 한국에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는데 이번에 초대한 것입니다. 색실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가늘게 자른 종이다. 이어지는 해설이 재미있다. 관람하던 아이들이 만지다가 끊어지면 풀로 다시 잇습니다. 이런 방식이 참 좋아요. 생각을 확장하는 것이 현대미술의 장점입니다.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져요. 좋은 것만 느끼는 것이 정답은 아니다, 뭐든 상상하고 생각해봐라, 관람만 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끌어내는 것이 중요하죠. 수십 개의 종이 줄이 미풍에 가볍게 몸을 뒤척인다. 벽에는 색종이를 사각으로 오려낸 색종이가 붙어 있다. 떨어져 보면 평면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니 입체적이다. 계단을 따라 2층 전시실에 올라서자 커다란 화면의 모니터에서 색종이가 춤을 추며 떨어져 내린다. 조각이 전시된 야외 풍경도 멋있다. 작품을 안내하던 진 관장이 허리를 숙여 꽃잎을 잡고 말을 건넨다. 단풍이 이렇게 드네요. 참, 예쁘죠? 미술관 옆 재개발을 앞둔 낡은 건물이 보인다. 디자인은 우리의 전문 영역이잖아요. 참신한 아이디어가 많죠.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데 규정에 얽매여 의견을 묻지도, 건의를 받아들이지도 않아요. 엄미술관을 찾는 국내외의 유명 예술인들이 적잖다. 그럼에도 관에서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니 안타깝다. 엄미술관은 이미 역사적 공간이다. 미술관을 찾아 생각을 가다듬는 시간을 마련해보면 어떨까? 가까운 거리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융건릉과 아름다운 사찰 용주사를 함께 둘러보면 충만한 여행이 될 것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6. 용인 한국미술관

한국미술관(관장 안연민)에서는 5일 현재 두 개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용인시와 용인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아 오는 14일까지 열리는 제13회 안준섭 개인전 김량장동에서와 다음 달 10일까지 열리는 박민정 초대전-Scenery(풍경)은 2021 지역문화예술플랫폼 육성사업이다. 김량장동에서가 열리는 신관부터 둘러본다. 1층에 전시실 초입에서 마주한 한 작품 앞에서 발길을 멈춘다. 다 쓰고 버린 연두색 형광등 전구가 세워진 길모퉁이 낡은 건물 앞에 걸리버 여행기에 등장하는 소인국 사람들처럼 작은 사람들이 가득하다. 사람들의 몸짓이 제각각이지만 어떤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사람들 앞에서 팔을 번쩍 치켜들고 선동하는 투사도 있고, 사람을 때리는 장면도 보인다. 문득 궁금해진다. 마을 이름치고는 매우 독특한 김량장동은 언제 생겼을까? 2층에 올라서자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어두운 분위기가 사라지고 밝은 기운이 가득하다. 저 많은 색과 부드러운 선들은 어떤 기억, 작가의 어떤 내면을 보여주는 것일까? 160x180㎝의 김량장동에서란 대형 작품 앞에 선다. 전체가 밝고 따뜻하다. 어두운 빛깔조차 둥글고 굵은 붓 터치로 인해 부드럽게 다가오니 편안하다. 한가운데 흰 기둥이 서 있는 그림 앞에 다가간다. 어디서 보았을까? 익숙한 풍경처럼 느껴진다. 마침 미술관을 찾은 안 작가가 알려준 페이스북에 올린 작가의 말을 통해 겸재정선의 박연폭포란 사실을 확인한다. 나는 옛 그림을 좋아한다. 서재에 붙여진 그림도 겸재의 그림이다. 겸재는 맑고 담백하다. 그의 그림은 격이 있고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박민정 초대전이 열리는 본관은 규모가 작다. 작은 것도 때로는 힘이 될 수 있다. 코로나19로 사립미술관이 당면한 고통의 크기는 상상 이상이다. 문득 설립자 김윤순 초대 관장의 말이 떠오른다. 한국미술관의 규모가 작은 까닭에 IMF라는 고난을 건널 수 있었다. 김윤경 학예사의 안내로 박민정 작가의 작품을 둘러본다. 통나무를 켠 넓은 나무판 위에 파란 이끼가 얹혀 있고 염소가 한 마리 외롭게 서 있다. 나무의 다듬어지지 않은 껍질 부분은 땅을, 이끼는 풀밭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작품마다 왜 염소가 등장할까? 작가가 이탈리아에서 유학할 때 기차여행 중 차창 밖으로 들판에 노니는 염소를 자주 보았다고 해요. 혼자 있지만 외로워 보이지도 않고 마치 그곳이 본래 자기 자리인 것처럼 당당하게 서 있었다고 해요. 자신은 그렇지 못했는데 염소는 작가의 자화상 같은 존재입니다. 자신을 염소에 투영한 작가는 그 들판 위의 염소처럼 자신의 자리를 찾는 여정에 나섭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연과 함께 하는 자신의 자리를 찾게 됩니다. 푸른 나무, 단풍이 물든 나무 아래에도 염소가 서 있다.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으려면 얼마나 외로운 밤과 긴 시간을 견뎌야 할까? ■ 한국미술관을 설립한 미술계의 대모 김윤순 서울 종로구도 아니고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에 소재한 작은 사립미술관인데 한국미술관이라니, 너무 거창한 이름이 아닌가? 미술관에 들어서며 피어오르던 의문을 풀기 위해 책을 펴든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한국미술관 설립자 고 김윤순 관장의 회고록 비화(秘花) 그대 아직 꿈속인가(글마당, 2010)에 실린 논어의 한 구절이다. 회고록은 운명-내 인생의 모노드라마 인연-내가 만난 잊을 수 없는 사람들 회상-내가 만난 김윤순 관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 날개에 실린 저자의 이력이 흥미롭다. 1931년 함경북도 흥남에서 태어나 14 후퇴 때 월남. 거제도 피난 시 교편생활.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에서 문학 전공. 1978년 사단법인 현대미술관회(국립미술관 내)에서 본격적인 미술인생 시작. 1981년 현대미술아카데미를 개설. 1983년 종로구 가회동에 한국미술관을 개관 한국미술아카데미를 개설하여 현재까지 대중의 미술교육과 현대미술 발전에 힘쓰고 있다. 김 관장이 4년 전(2017)에 작고했으니 출판할 당시 현재형이던 문장은 이제 과거형이 되었다. 현대무용의 전설로 남은 최승희,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과의 특별한 인연 등 흥미로운 이야기와 진귀한 사진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설립자 김윤순 관장이 용인에 백남준아트센터를 유치하는 일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10대 시절에 무용계의 전설 최승희에게 무용을 배운 적이 있는 끼 많은 문학소녀였던 김윤순은 1970년대에 인사동 화랑가를 자주 드나든다. 새로운 작품을 입수하는 날이면 주변 사람들을 초대해 작품을 감상하며 새로운 정보를 공유한다. 그의 활동은 차츰 화가들과 화랑가로 알려졌으며, 국립현대미술관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78년 11월 국립현대미술관은 미술 인구의 저변확대를 위해 현대미술관회를 발족한다. 이때 김윤순은 미술관계자들의 추천을 받아 상임이사를 맡게 된다. 상임이사가 된 김윤순은 타고난 친화력과 추진력으로 현대미술관회 회원을 크게 늘려나갔고 미술관아카데미를 활성화시킨다. 미술관에서 열었던 미술아카데미 강의는 평생교육시설이 미흡했던 당시에 대단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아카데미를 거쳐 간 다섯 사람이 사립미술관을 열었을 정도니 그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다. 1983년 어떤 독지가가 내 놓은 가회동 건물이 계기가 되고, 현대미술관회 회원들이 운영기금을 내면서 한국미술관의 역사가 시작된다. 미술관으로 활용된 가회동 건물이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김중업의 작품이다. ■ 한국과 지역 미술을 꽃 피우는 대지, 한국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의 분관 격이던 한국미술관의 운영 책임을 김윤순이 맡게 되었는데, 여러 사정이 겹쳐 민간기구화가 되고 가회동 건물을 비워야 했다. 이후 한국미술관은 예술의 전당과 근처 빌딩 지하에 세를 들고, 1989년에는 다시 서초동으로 자리를 옮겨 가까스로 미술관을 유지하다가 1994년, 마침내 용인시 마북리에 터를 잡아 오늘에 이르게 된다. 미술관의 자랑을 들려주라는 주문에 안 관장이 미소를 짓는다. 우리 미술관의 자랑은 개관 때부터 30여 년간 문화예술아카데미를 운영하여 미술계의 지평을 넓혔다는 것입니다. 의미 있는 기획전도 꾸준히 열었지요. 1983년 3월 미술관 개관기념으로 연 한국인상전은 김흥수?김인승김환기이종우박상옥박수근이인성이중섭황술조조병덕최영림장리석장욱진 같은 한국현대미술의 거장들의 작품을 한자리에 선보인 특별한 자리였다. 이러한 기획은 1992년 한국화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전, 1999년 한국화 어제와 오늘전으로 이어진다. 1985년부터 임팩트 NOW란 이름의 한일교류전을 비롯해 국제교류전을 꾸준하게 열었던 점도 돋보인다. 한국 사회에 페미니즘이 갓 소개되던 1994년에 여성, 그 다름과 힘 전을 기획해 여전히 보수적인 한국미술계에 큰 파문을 일으킨다. 설립자가 타계한 2017년 이후 미술관의 운영을 책임지는 안연민 관장은 경기도박물관협회장을 지냈으며, 공로를 인정받아 2015년도에 국무총리상을 수상한 한국미술계의 중진이다. 우리 미술관은 1990년대에 여성, 그 다름과 힘 전을 비롯해 페미니즘을 열심히 소개하기도 했었죠. 그동안 250여 회에 이르는 전시회를 열었는데, 1990년대에 평균 10회 이상의 전시회를 열었지요. 그 기획력과 부지런함이 놀랍다. 이런 역사와 전통을 가진 한국미술관도 지금 위기를 맞았다. 수준 높은 미술 전시회를 기획하고,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민들의 문화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기여해 왔던 한국미술관도 코로나 정국으로 운영난에 허덕이고 있다는 현실이 안타깝다. 사립이지만 공립미술관을 대신해 그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온 한국미술관을 비롯한 사립미술관에 대한 대책 마련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5. 여주 경기생활도자미술관

한국도자재단 산하 경기생활도자미술관(대표이사 최연)은 개관 20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세련된 공간이다. 미술관 안으로 들어서면서 건축은 종합예술이다라는 말을 떠올린다. 사실 도자(陶磁)도 건축 못지않은 종합예술이다. 흙과 불, 미학과 과학과 정성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예술품, 천 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의 생활도자도 세종대왕이 노래한 뿌리 깊은 나무처럼 우람하게 뻗은 줄기와 무성한 가지에 풍성한 잎과 열매를 달고 있다. 고려청자와 분청사기, 조선백자로 명성을 잇던 우리 도자의 역사는 찬란하다. 16세기까지 도자를 제작할 수 있는 나라는 조선과 중국 두 나라뿐이었다. 그러나 도자기 전쟁이라 부르기도 하는 임진왜란 이후 일본이 조선을 추월한다. 그렇다면, 21세기 대한민국의 도자는 세계 일류라 부를 수 있는가? 여주 경기생활도자미술관과 이천 경기도자미술관, 광주 경기도자박물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경기세계도자비엔날레에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본다. ■ 11월은 경기세계도자비엔날레에 빠지는 달 지금 여주는 생활도자 축제가 한창이다. 10월 1일에 개막한 2021경기세계도자비엔날레 다시_쓰다, Re: start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올해로 11회를 맞은 2021경기세계비엔날레는 경기도가 한국의 도자산업을 선도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행사다. 안전한 관람을 위해 10시부터 18시까지 입장 인원을 제한해 진행하는데 1회 관람시간 60분을 기준으로 7회 운영되며, 오후 5시30분까지 입장이 가능하다. 다음 달 28일까지 이어지는 도자비엔날레는 물론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서도 관람할 수 있다. 비엔날레전시교류팀 김지수 큐레이터의 안내를 받아 생활도자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코로나로 인해 세계도자비엔날레 사상 최초로 모든 전시가 무료로 진행됩니다. 즐길 거리와 볼거리가 많으니 홈페이지(kicb.or.kr/visit)를 통해 예약하세요. 잔여분에 한해 현장관람이 가능하지만, 일찍 매진될 수도 있으니 서두르는 것이 좋겠지요. 참, 코로나19 안전한 관람을 위해 단체관람 예약은 받지 않습니다. 개막 첫 주부터 주말 전회차가 매진되는 등 시민들의 관심과 호응이 뜨겁다고 한다. 특별전 회복-공간을 그리다의 기획 의도는 무엇일까? 만 20년이 된 비엔날레의 역사와 포스트 코로나 이후 도자의 역할과 의미를 짚어보고, 건강한 일상과 생활방식, 관계, 소통, 문화, 경제의 회복을 희망하며 도자공예를 통한 개인들의 삶 변화와 행복을 나누려고 기획했습니다. 도자공예를 통해 코로나 시대에 적응하고 있는 우리의 식생활 문화가 건강해지고, 관람객들이 행복에 더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도자, 가구를 만나 은밀한 공간으로 스며들다 2021 경기세계도자비엔날레 여주 특별전시는 특정 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테이블 웨어 식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6개의 키워드로 풀어내고 있다. 전시실 입구에 열매처럼 매달린 전깃불이 따뜻한 빛을 선사한다. 첫째 공간은 오롯한+그릇하나인데, 구불구불한 강줄기를 연상케 하는 전시대가 시선을 끈다. 여주사람들에게는 남한강보다 더 친숙한 여강(驪江)이다! 도자 작품이 길고 푸른 탁자에서 빛을 내뿜고 있다. 짙푸른 강줄기를 연상케 하는 탁자는 목공예가 이용기의 작품이다. 목공예 작가와의 협업은 탁월한 선택이다. 이영호, 김종훈, 박병욱, 양수열, 최민록, 인현식 여섯 작가의 색다른 작품이 어우러져 생활도자의 품격을 드러낸다. 가정의 식탁을 연출한 사적인+공간을 거닐다는 은은한 조명과 얇은 천을 드리워 사적 공간임을 보여준다. 도자 작품인가 의문이 들 정도로 날렵한 와인 잔이 전시된 친밀한+문화를 마시다와 친밀한+시간을 마시다에서 가정의 평화가 연출되고 있다. 도자와 유리를 결합하는 작품도 흥미롭다. 공유의+여행을 그리다는 여행지에서 만난 풍경을, 10㎝+공간을 그리다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놓는 작은 받침대를 전시하고 있다. 소소한 일상에서 만족을 찾는 소시민들의 마음이 읽힌다. 2020-2021년 경기도자온라인페어에 참가한 작가 중에서 기획 선정하여 전시와 페어가 만나는 접점을 만들었어요. 관람객은 일상생활과 흡사한 환경에서 작품을 보고 사용할 수 있으며, 온라인에서 판매되는 상품과 작가의 대표 작품 세계를 가까이에서 자세히 살펴보고 스마트 스토어에서 구입할 수 있지요. 우리 삶과 밀접한 곳에서 작품을 가까이에서 보고, 만지고, 쓸 수 있도록 구성한 회복의 공간입니다. 1층 전시실에서 열리는 경기세계도자비엔날레 여주 특별전II에서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집콕 생활 속 아이들이 상상하며 놀고 치유할 수 있는 집을 꿈꾸며 미래의 예술가를 위한 세라믹하우스를 선보인다. 누군가의 엄마인 여성작가들의 손길로 채워진 전시공간에서 아이들을 위한 따뜻하고 다채로운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원색의 이미지와 풍부한 색채감,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도예작품들은 우리 주변의 일상 사물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인트로_비가 온다 뚝뚝 주방x놀이 상상x공간 감각x정원으로 구성되었다. 생활이 예술이 될 수 있는 경험을 놀이를 통해 만나볼 수 있는 공간이다. 일상에서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는 작가의 방법을 보여주고, 아이들은 미술재료와 감각놀이를 통해 작은 예술가가 된다. 눈으로만 감상하던 예술작품을 가까이 즐기며, 놀이하면서 작품을 탐구하는 창의력과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 생활도자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창조의 무대 한국도자재단 경기생활도자미술관이 여주에 자리를 잡게 된 역사적 배경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상품의 질과 가격에서 경쟁력을 잃고 일본 도자에 잠식되었던 한국 도자는 해방과 함께 부활한다. 한국의 도자 전통을 회복하고 명예 회복을 꿈꾸는 젊은 작가들이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옛 사옹원 분원이 있던 광주를 비롯하여 이천과 여주에 가마를 짓고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여주는 동국여지승람에 자기와 도기를 특산물로 꼽았을 만큼 일찍부터 도자가 발달한 고장이었다. 경기생활도자미술관은 2001년에 개관하여 2007년에 1종 미술관으로 등록되었다. 2001년 세계도자기엑스포2001경기도 행사를 시작으로 한국도자문화의 새로운 역사와 가치를 만들어 가고 있다. 만 20년 동안 이어온 경기세계도자비엔날레를 통해 여주는 생활도자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2012년부터 100명의 도예가 초대를 목표로 진행하고 있는 한국생활도자 100인전은 경기생활도자미술관의 대표전시이다. 한국도예계에서 정평 난 중견작가들과 다양한 시도와 예술성으로 재조명되어야 할 도예가를 소개하고, 현대도예에 대한 다양한 예술담론을 생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마련한 것이다. 올봄부터 여름까지 권역식, 김익영, 노경조, 이수종, 조정현 작가의 작품을 소개하는 한국생활도자 100인전-뿌리를 만나다-초청전Ⅸ이 열렸다. 작은 보따리에 든 다섯 권의 도록을 통해 생활도자미술관의 역사를 기록하는 미술관의 높은 기획력과 정성이 묻어난다. 생활도자는 우리 삶에서 어떠한 쓰임새로 사용되고 있으며 작가들의 작업세계는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를 조명하고 전망한 충실한 기록이 품격을 더해준다. 올해 여주 생활도자미술관은 20년 동안 사용하던 세계 대신에 경기로 개명하였다. 경기의 생활도자미술관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한 것이다. 남한강을 배경으로 신륵사관광단지 안에 자리한 경기생활도자미술관은 아주 시원한 풍경을 갖추고 있다. 미술관 주변에는 멋스럽게 조성된 쇼핑몰과 경기창작지원센터가 있다. 천 년 고찰 신륵사와 세종대왕 영릉, 효종대왕의 영릉 등 국보 1기, 보물 17점, 사적 3곳을 보유한 경기도의 문화유산답사 1번지 여주가 생활도자의 성지로 거듭나고 있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4. 고양 자동차디자인미술관 ‘포마’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자동차디자인미술관 포마(FOMA: Form of Motors and arts 관장 박종서)는 대한민국 최초의 사립 자동차 디자인 미술관이다. 이용익 건축가가 디자인한 미술관은 자연의 생태학적 순환원리인 패시브 공법이 적용되어 전기와 물을 생산하는 자급자족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설립자 박종서 관장은 현대자동차 디자이너로 일하던 1979년 포니정으로 불리는 정세영 회장의 배려로 영국왕립예술학교(Royal College of Arts)에서 한국인 최초로 수학하는 행운을 얻었다. 페라리 자동차를 만든 명인 스칼리에티에게 디자인을 배우고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현대차와 기아차에서 35년 동안 스쿠프, 티뷰론, 소나타, 산타페 등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자동차들을 연이어 선보이며 한국 자동차 디자인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2004년부터는 국민대학에서 10년 동안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2019년 디자인코리아 디자이너 명예의 전당 헌정 대상자에 선정되었으며, 대한민국산업디자인협회 회장과 대한민국브랜드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같은 형태의 차체를 여러 개 만들기 위해 사용되는 형틀의 음(-),양(+) 몰드. 양 몰드는 차량의 외부 곡선을 보여주고, 음 몰드는 뒤집어진 틀의 구조를 보여준다. 윤원규기자 ■ 자동차 디자인의 모든 것: 과거 현재 미래 2016년에 1종 사립미술관으로 등록된 포마자동차디자인미술관은 디자인 전공자와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신입사원들의 필수코스로 자리 잡았다. 자동차 선진국에도 자동차디자인을 주제로 한 미술관이 없어서일까,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리움미술관과 포마미술관을 연결하는 관광코스가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런데 놀랍게도 미술관의 진입로가 자동차는커녕 걷기도 불편한 좁은 흙길이다. 보고도 믿기 어려운 현실 앞에 말문이 막힌다. 주민들이 수십 년 동안 사용했던 도로의 주인이 바뀌면서 벌어진 황당한 일이다. 대한민국 자동차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자동차 디자인 전문의 1종 사립미술관을 이렇게 방치해도 될까? 고양시가 나서서 해법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미술관 전시실에 들어서면 커다란 앵무조개의 형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명함에도 새겨진 디자인이다. 1대 1.618의 황금분할이 자연에 있다는 사실을 깨쳐주려는 설립자의 철학이 담겨 있다. 자동차 디자인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페라리 제작 모형과 한국 최초의 고유 모델인 포니 목형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현대자동차에조차 남아 있지 않은 포니 원형의 1대 1 크기 엔지니어링 도면도 있다. 포니의 목형과 동판에 새겨진 설계도 앞에 선다. 포니는 한국 자동차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나 설계도가 남아있지 않아 박 관장이 심혈을 기울여 복원한 것이다. 전시실 중앙에 전시된 신형 스포티지 클레이 모형은 기아자동차가 기증한 것인데 실제 제품이 양산되기 전 모델이다. 전시실을 안내하면서 박 관장은 안목과 기초를 거듭 강조한다. 디자이너에게 가장 중요한 건 안목입니다. 안목을 키우려면 흙, 나무, 종이 등 기본 물질에 대해 알아야 하는데 이것은 학습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대학에서 디자인 공부를 한다는 것은 10년, 20년 후에는 못 쓰는 지식을 배우고 있다는 뜻이지요. 이를 지식의 반감기라고 하는데, 지식이 반감되지 않으려면 내 손으로 만든 기억이 있어야 합니다. 미래에는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것이 나와야 합니다. 쓸데없는 것,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고 떼어내는 디자인을 해야 합니다. 차의 형태가 지금과 같은 까닭은 앞쪽에 엔진과 미션이 들어가고 뒤쪽에 트렁크가 있기 때문이지요. 전기자동차라면 앞쪽이 비어도 되니, 현재의 자동차 모습일 필요가 없습니다. 크기도 지금처럼 클 필요가 없어요. 현재 패키지 레이아웃은 가솔린 자동차 위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미래에는 모양과 디자인이 모두 바뀌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테슬라도 그대로 하고 있어요. 관념에 묶여 제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도자기들이 정갈하게 진열된 공간이 상당한 운치가 느껴진다. 모자이크로 화려하게 장식한 기둥은 박 관장이 직접 만든 작품이다. 연구실로 올라가는 계단 벽에 수종사 은행나무를 그린 그림이 걸려 있다. 살펴보니 그림 하단에 박 관장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나무를 다듬어 만든 작품도 여럿, 눈에 띈다. 설립자의 예술적 향기를 미술관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예술 디자인 관련 외국잡지와 영문으로 쓰인 도록들이 가득 꽂혀 있는 책장에서 일본어 책 한 권을 꺼내 든다. 제목이 디자인 국부론이다. 일본인들은 일찍부터 디자인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철학을 세웠습니다. 이 책은 디자인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준 책입니다. 박 관장의 아들도 자동차 디자이너이다. 아버지처럼 RCA를 졸업하고, 페라리와 벤츠를 거쳐 현재 아우디에서 일하고 있다. 자녀 교육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아들을 키울 때 자연을 많이 접하게 했습니다. 아이가 커다란 종이에 그림을 그릴 때 나도 같이 그렸지요. 그런데 아들은 자기가 그린 그림들을 모두 버렸습니다. 내가 그것을 모아 유학 준비를 하는 아들에게 이게 네 진짜 그림이라며 건네줬지요. 덕분에 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아들은 이제 진실한 그림이 무엇인지 알고, 내게 많이 감사하지요. 박 관장은 모든 형태는 자연을 따른다는 생각을 담은 책 꼴, 좋다! 자연에서 배우는 디자인을 펴내기도 했다. 미술관 뒤에 있는 500평(1천652㎡) 규모의 정원을 영국의 채리티 가든(Charity Garden)처럼 가꾸려는 꿈을 가지고 있다. ■ 풍뎅이와 돌고래가 디자인의 샘 전시실 입구에 곤충과 나비들이 전시돼 있다. 곁에 돋보기도 놓여 있다. 관람객들에게 자연 고유의 색상의 신비로움과 다채로움을 보여주고 싶은 까닭이다. 미술관 입구에 네온사인으로 만든 카멜레온이 연신 색깔을 바꾸고 있다. 디자이너가 되려면 색에 대한 감각을 키워야 하기 때문이다. 박 관장은 아반떼와 티뷰론, 싼타페를 디자인할 때 풍뎅이의 선과 색을 많이 참고했다. 자동차 도색도 풍뎅이와 비슷한 색으로 입혔다고 한다. 자연의 색, 모양, 냄새, 촉감을 느끼고 이해할 줄 알아야 창의력이 커진다는 믿음이 확고하다. 유리, 나무, 금속, 흙, 관찰법 등을 알려주는 프로그램을 꾸준하게 운영하는 것도 이러한 신념 때문이다. 1984년쯤 돌고래 몸통에서 선을 딴 콘셉트카 디자인을 하나 만들었는데, 이를 본 미국 딜러들이 빨리 차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한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티뷰론이다. 티뷰론과 쏘나타3, 싼타페의 공통점은 돌고래 몸통에서 나온 매끈한 곡선입니다. 박 관장은 미술관을 열기 전 작업실에 틀어박혀 실제와 똑같은 크기와 모양으로 옛날 명차를 복원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바쳤다. 차체와 1대 1 크기로 목조틀을 만들고, 여기에 알루미늄판을 입혀 망치로 두드리는 손작업을 거쳐 1958년식 페라리250 테스타 로사, 1938년식 알파 로메오 같은 전설의 이탈리아 명차를 재탄생시켰다. 옛날 설계도를 뒤지고, 이탈리아 장인들에게 직접 물어가며 수제 방식을 복원했다. 그는 손과 연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창의력은 손과 머리에서 나온다. 우리는 미래를 일구기 위해 다시 손으로 그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자동차 디자이너는 흐름을 만들어내야 한다. 개성 있고 숙련된 표현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결코 일류가 될 수 없다. 포마미술관에서는 현재 유리 공예가 5인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미술관을 방문하려면 온라인으로 사전예약을 해야 한다. 오는 31일에 이예승 고려대 교수가 미디어 아티스트를 강의하는 디자인 콘서트가 열린다. 다음 달 20일에 진행되는 어린이 및 청소년들을 위한 무동력 모형차 레이싱 대회가 열린다. 17m에 달하는 초대형 슬로프 트랙 위에서 자신이 만든 모형 차를 출전시키는 대회로 아이들에게 인기가 높다.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싶습니다. 꼭 자동차와 관련된 꿈이 아니어도 좋아요. 과학자가 될 수도 있고 미술가가 될 수도 있지요. 그 꿈을 이곳에서 찾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연필로 꿈을 그리듯 이곳이 모두의 꿈을 그릴 수 있는 장소가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3. 용인 ‘안젤리미술관’

그림의 구도가 재미있다. 꿈을 꾸는 듯한 예쁜 눈을 가진 아이가 쓴 마스크에 커다란 고래가 한 마리 있고 좌우에 물고기와 잠수하는 아이가 있다. 대상(大賞)을 수상한 이 작품의 제목은 코로나 없는 노을빛 바다에서 고래와 나이다. 이 그림을 그린 아이는 초등학교 4년생인데 자폐증이 있어요. 지난해는 그림이 어두웠는데 그 사이 실력도 크게 늘었고 분위기가 한결 밝아져 깜짝 놀랐어요. 그림이 한 아이를 구원한 것이지요! ■ 그림에 깃든 아이들의 꿈, 안젤리미술관의 어린이 미술공모전 제6회 안젤리미술관 어린이 미술공모 수상작품전이 열리고 있는 안젤리미술관(관장 권숙자) 전시실에 들어서면 누구나 웃음을 짓게 된다. 그러다 웃음을 거두고 아이들이 세상에 던지는 항변에 움찔한다. 초등학교 1학년의 쓰레기가 우리를 아프게 해요란 작품을 보자. 그물에 걸린 새와 마스크를 낀 지구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다. 캔 뚜껑과 노끈 같은 쓰레기를 그림에 활용한 재치가 번뜩인다. 초콜릿이 쏟아지는 초코 분수대와 과자로 집을 지은 과자나라도 있다. 이집트 피라미드의 미스터리한 지하 공간과 요정의 가을 소풍처럼 아이들의 반짝이는 상상력과 순수한 동심을 마주하면서 위안을 얻는다. 공모전 주제 코로나19를 그림을 그리며 이기다에서 짐작하듯 안젤리미술관도 요즘 몹시 어렵다. 사립미술관 운영이 어렵다는 건 알고 있었지요. 코로나19까지 겪으니 그 어려움이 상상보다 훨씬 큽니다. 그래도 미술관을 통해 지역 문화 확산을 이룬다는 사명감은 내려놓을 수 없지요. 어린이 미술공모전을 여는 것은 아이들이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용덕저수지 옆에 자리 잡은 안젤리미술관은 건물만큼이나 주변의 풍광도 아름답다. 강남대학교 미대 교수로 37년을 재직한 권숙자 교수가 사비를 털어 2015년에 문을 연 안젤리미술관은 100여평 규모의 제1전시장과 제2전시장, 회의실,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카페, 결혼식을 열 수 있는 200여평 규모의 야외 공연장을 갖추고 있다. 30대 젊은 시절에 프랑스를 여행하던 중 샤갈미술관에 들렀을 때 한 줄기 햇살이 미술관 바닥에 평화롭게 깔린 모습을 보면서 미술관 건립을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안젤리는 이탈리아어로 천사들이라는 뜻인데, 미술관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만 아니라 선(善)의 역할도 수행해야 한다는 가치관이 담겨 있어요. ■ 그것은 선택된 길이었다, 권숙자의 예술 세계 권 관장은 미술관을 건축하는 도중에 큰 슬픔을 겪는다. 남편 곽연섭 비올리스트(로마 떼아트르 오페라극장)가 암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와 어머니까지 모두 여읜 것이다. 몇 년 사이에 사랑하고 의지하던 사람을 모두 떠나보낸 상실의 아픔을 견뎌내며 세운 미술관이기에 그 무게가 남다르다. 미술관 2층 카페에는 남편의 절친 테너 박세원(서울시오페라 단장) 서울대 교수가 남편과 함께 만들던 누드 피아노가 있다. 남편의 바람대로 미술관에는 언제나 아름다운 선율이 가득하다. 개관기념으로 연 한국대표작가 55인 초대전은 김병종, 최예태, 정관모 등 한국 미술을 발전시켜 온 전국의 원로, 중견작가 55인의 작품을 선보인 특별한 자리였다. 이후 매년 10회 전후의 전시회를 열 정도로 부지런하게 운영하고 있다. 올봄에 연 2021 부활 피어나는 삶7인의 믿음 소망 사랑의 그림 詩 전에 실린 인사말을 읽어본다. 기도하면서 그리는 그림, 기도하면서 가꾸는 일상, 기도하면서 바라보는 미래의 시선은 우리의 마음을 행복하고 보람 있고 가치 있게 다듬어 줄 것이다. 권 관장은 수필로 등단한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월간문학지에 작품을 발표하는 작가이다. 추경 사양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대학시절의 스승 서양화가 김창락(1924~1989)은 제자의 문학적 감수성을 일찍 알아보았다. 권숙자는 자기의 세계를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는 순수한 화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일찍부터 그의 소품들에서 솔직한 표현으로 된 나름의 특이한 작품세계를 보여주어서 주목을 받았는데, 그것은 그가 남달리 강한 문학성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다. 일찍이 그리는 일과 글을 쓰는 것은 내 숨결과 같은 것이라 고백했던 권 관장은 그동안 그린 그림과 수필을 모아 이 세상의 산책(2004)과 안젤로의 전설(2015)이라는 두 권의 책을 펴냈다. 1980년대 초반, 젊은 권 작가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낙동강 자락에 자리한 우망(憂忘)이란 마을을 찾았다가 소나무 위에 눈이 쌓인 모습을 본다. 여름날에 흰 눈이 쌓인 소나무라니? 사실 그것은 백로무리였다. 이날의 특별한 경험으로 그의 화폭에는 목이 긴 하얀 새들이 자주 내려앉게 된다. 내가 새를 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속엔 이상세계의 부분을 차지하는 또 다른 상징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세밀했던 묘사가 단순해지기 시작한다. 5~6년이 지나면서 작품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캔버스라는 전통 회화의 평면에서 벗어나 릴리프(부조화)로 재료의 다양성을 꾀한 실험정신이 작품의 독창성으로 발전한 것이다. 1991년 봄, 한 번 더 놀라운 일을 경험한다. 화실에서 혼자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밖에서 봄나들이를 떠나는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외로움이 엄습하더군요. 그리던 그림을 멈추고 멍하니 있을 때 갑자기 사방의 벽이 무너지는 환상을 경험했지요. 밖에 핀 꽃의 향기, 햇살, 바람이 무너진 벽을 통해 들어왔죠. 그 후부터 밖을 나가지 않아도 내 안에 모든 자연을 안을 수 있고 자연과 일체를 이루며 그림을 그리게 됐어요. 1977년과 1978년에 연거푸 국전에 입상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미술상,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상, 남송국제 아트페어 특별상(2008), 독일 괴테문화원 초대 최우수상을 수상(2010)했다. 서울, 수원,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등 국내외에서 26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한국현대미술 뉴욕초대전, 한러 현대미술 러시아 초대전, 한국의 전통과 회화 속의 회화의 단면전(호주 멜버런시 초대전), 루마니아 초청 한국현대 회화초대전(루마니아 국립미술관), 현대미술 정상 31인 초대전(경향갤러리)에 참여했다. 중견 작가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사회적 역할에도 충실했다.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양화 심사위원장(2012)을 비롯해 각종 공모전의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 미술관은 한 도시의 얼굴이자 품격이다 용인시 5개의 사립미술관 중 2곳(마가미술관, 이영미술관)이 최근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남은 안젤리미술관이나 한국미술관, 근현대사미술관담다 역시 형편이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이렇게 절박한 상황이지만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은 미미한 형편이다. 용인시가 박물관 미술관 진흥법에 근거해 2년 이상 된 사립미술관 박물관에 전기세, 교육세, 도로세 등 세제 지원 및 프로그램 운영비 등을 지원하고 있지만 제도적 지원책 마련이 시급해 보인다. 시민의 문화향유를 위한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 조례가 필요하다. 미술관은 그 도시의 품격을 드러내는 문화시설이다. 미술관이 도시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시민들에게 축복이자 위로가 된다. 안젤리미술관은 남녀노소 대중과의 소통을 통해 문화의 참된 의미를 각인시키는 장소입니다. 전시 외에도 미술교육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운영하고, 미술과 실내악이 어우러지는 시민을 위한 음악행사, 젊은이와 지역의 미술가가 함께하는 창조의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야외 잔디정원에서는 각종 문화예술 행사가 벌어지며, 카페에서 회원전도 열고 있습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편한 휴식도 취할 수 있지요. 이번 주말에도 결혼식이 열려요. 부디 이 혹독한 시련을 잘 이겨내고 처음 꾸었던 그 꿈이 속히 이루어지길 소망한다. 김준영(다사리행복학교)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2. 오산시립미술관

오산역환승센터 광장에서 미소를 짓게 하는 재미난 조형물과 만난다. 방귀대장 뿡뿡이가 책을 읽고 있고, 번개맨이 사람보다 몇 배나 큰 연필을 잡고 서 있다. 뿡뿡이가 앉은 의자 뒷면에 오산, 대한민국 교육도시라 쓰여 있다. 오산시립미술관은 교육도시 오산이란 이름과 썩 잘 어울리는 곳이다. 오산시립미술관은 2012년 문화공장 오산으로 시작해 2017년 미술관으로 정식 등록하고 지난 2020년 9월에 1종미술관으로 등록한 오산시를 대표하는 미술관입니다. 현대미술을 중점으로 연간 특별기획 전시와 어린이 체험 전시, 지역작가 초대전을 열고 있지요. 미술관 주변을 예술 공원으로 만들어 언제 어디서든지 전시를 감상할 수 있도록 조성한 것이 특징입니다. 위아름 큐레이터의 안내를 받으며 미술관으로 들어선다. 4천154㎡ 부지에 연면적 3천165㎡ 규모의 오산시립미술관은 1층 체험실과 2~3층에 전시실이 있다. 조각전시와 야외컨테이너 전시가 열리는 야외조각공원도 빠트릴 수 없다. 운송에 쓰이는 컨테이너를 개조하여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든지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 내일을 여는 미술관 코로나19는 미술관의 변화를 앞당겨 주었다. 2020년 하반기 기획전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미술전은 대면과 비대면이 가능한 전시였다. 이때 증강현실 기법을 활용하여 작가의 여러 작품을 수록한 AR책자를 만들어 오산시 관내 여러 가정과 학교와 여러 단체에 우편으로 배포했다. 거리 가로등, 현수막을 이용한 거리미술도 선보였다. 상상력과 창작력을 자극하는 전시도 기획했다. 올봄에 열린 三월 三인은 늦깎이로 그림을 시작한 영화배우 김규리, 2015년에 개최된 제56회 베니스비엔날레 병행전을 계기로 해외에도 알려진 중견 작가 임현락, 2020년에도 퍼포먼스를 선보인 작가 배달래가 참여한 전시였다. 시대적 문제의식도 놓치지 않는다. 올여름에 연 현대미술로 본 여성 인권 이야기 행진 #오산 전과 제주43의 진실과 평화-봄이 왐~수다가 이를 대변해 준다. 행진 #오산 전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지만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잊힌 여성독립운동가들, 강제로 끌려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일본군 위안부들의 고난에 찬 삶을 참여 작가의 시선으로 표현한 전시로 회화, 미디어아트, 설치 작품 등을 다양하게 감상하는 기회였다. 제주43의 진실과 평화-봄이 왐~수다는 전국의 작가 5인이 참여하여 입체적으로 제주 43의 진실을 알린 특별한 전시였다. 예술은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차려주는 희망의 밥상이기도 하다. 샐러리맨이 되고 싶은 샐러리맨은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인해 심신이 지친 현대인들에게 우리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지금 이 시기를 극복하자는 뜻에서 기획한 전시였다. ■ 빛의 화가들을 만나다 다음 달 말까지 열리는 특별전 교과서에서 만난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화가들은 19세기 미술사를 빛낸 인상파 화가 여섯 사람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원본과 똑같이 만든 복제품(레플리카)이라 감상하기에 충분하다. 제1전시실은 모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위아름 큐레이터가 모네의 인상, 해돋이 앞에 멈춰 선다. 1874년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가 개최한 살롱전에서 낙선한 젊은 화가들이 모여 낙선전을 열었습니다. 이 전시를 관람한 한 비평가가 모네가 출품한 인상, 해돋이를 보고 순간의 인상만을 그렸다며 조롱했지요. 이때 낙선전에 참여한 화가들을 인상파라고 부르게 되었고 인상주의라는 말이 쓰이게 됐습니다. 자욱한 안개를 뚫고 떠오르는 붉은 해가 인상적이다. 1877년 작인 생 라자르 역은 시대상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사진기와 튜브 물감의 발명과 함께 기차는 화가들에게 도시 교외의 자연에 나가도록 충동질했다. 모네를 성공으로 이끈 작품이 건초더미 연작이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일출 때의 건초더미와 일몰 때의 건초더미가 나란히 전시돼 있어 바로 비교해 볼 수 있다. 모네 하면 역시 수련이다. 죽을 때까지 수련 250여점을 그린 모네는 빛만큼이나 물을 사랑한 화가였다. 모네의 그림을 보다가 르누아르의 그림을 보면 느낌이 전혀 다르다. 모네와 달리 르누아르가 사람을 즐겨 그렸기 때문일 것이다. 책 읽는 여인과 두 자매 책 읽는 소녀에서 보듯 여인과 어린이를 사랑스럽게 표현한 르누아르의 작품 앞에 서면 절로 마음이 밝아진다. 전시실에서 흑백 영상으로 창작에 몰두하는 모네와 르누아르를 만날 수 있다. 심한 관절염으로 마비된 손목에 붓을 감아 그림을 그리는 르누아르의 뜨거운 예술혼에 감동한다. 제2전시실은 분위기가 또 다르다. 후기인상주의를 대표하는 고갱과 고흐, 세잔의 작품들은 훨씬 강렬하다. 해바라기와 밀밭, 별이 빛나는 밤 풍경을 즐겨 그린, 그러다 끝내 정신병원에서 쓸쓸히 숨을 거둔 빈센트 반 고흐의 불타는 예술혼, 문명을 거부하며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에 들어가 원주민들의 건강한 생명력을 담아낸 폴 고갱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에 감동하게 된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그의 작품을 마주하면 누구나 호흡을 고르기 마련이다. 천재 화가 피카소와 마티스의 존경을 받았던 세잔을 만난다. 그가 그린 사과 그림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현대 미술과의 만남도 두려워할 까닭이 없다. 익숙한 작품들만 전시한 것이 아니라 아르장퇴유의 센 강 지류(모네) 같은 작품도 있습니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 모네를 공부하다가 모네의 인간적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어요. 2012년 미술관을 개관했을 때부터 관람객에게 작품을 해설해주는 서인옥 도슨트의 말이다. 처음에는 1층에서 3층까지 오르내리며 홀로 해설을 맡았으나 현재는 4명의 도슨트가 일하고 있다. ■ 까마귀와 땅을 나는 용, 그리고 시민들이 가꾸는 정원을 거닐다 오산천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아름답다. 미술관 마당으로 나서자 컨테이너가 나타난다. 안을 들여다보니 그림이 걸려 있다! 미술 작가들의 창작활동에 비해 작품을 전시할 공간은 늘 부족하다. 야외컨테이너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 실무자들이 찾아낸 대안이다. 작가들에게 전시할 기회를 넓혀주려는 실무자들의 아이디어가 빛난다. 잔디밭에 거대한 용이 날고 있다. 머리와 꼬리 부분은 보이지만 몸 대부분은 땅에 숨겨져 있다. 푸른 잔디밭이 구름인 셈이다. 동판을 보니 2020 오산시립미술관 AR(증감현실) 정원이라 새겨져 있다. 지난해 가을에 열린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AR조각 정원-디지털처용무 전에 출품된 지용호의 작품인데, 작가가 미술관에 기증한 것으로 전염병을 물리치고자 하는 염원을 담아 삼국유사에 나오는 처용(處容) 설화를 모티브로 폐타이어를 이용해 제작한 작품이다. 어미 말과 망아지가 마주 보는 조각도 있다. 나란히 서 있는 돌기둥 위에 까마귀가 앉아 있다. 날개를 펼쳐 곧 비상하려는 놈, 날개를 접고 휴식하는 놈도 보인다. 태양 안에 산다는 삼족오(三足烏)와 반포지효(反哺之孝)라는 사자성어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까마귀는 고대인들에게 길조였다. 오산(烏山)이 까마귀와 인연이 깊다는 것은 그만큼 역사가 깊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천연기념물 수달이 돌아왔다는 오산천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를 걸으며 성큼 다가온 가을을 느낀다. 군락을 이룬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구역마다 정원지킴이가 정해져 있는 오산천 작은 정원이 정겹다. 쑥부쟁이가 무더기로 활짝 핀 곳에서 걸음을 멈춘다. 경기도지체장애인협회 오산지회가 지킴이를 맡은 정원 이름을 보고 놀란다. 지베르니는 43년간 가꾼 정원을 그리다 실명에 이른 클로드 모네의 정원이 있는 마을 이름이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1. 파주 영집궁시박물관

엊그제 새해가 시작된 것 같은데 벌써 시월이다. 옛사람들이 남긴 속담처럼 쏜살같은 세월이다. 화살이 1초에 70m를 날아간다니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을 비유하는데 썩 어울리는 표현이다. 덧없이 지나가는 것이 세월이라지만, 세상살이는 녹록지 않은 법이다. 그래서 사연 많은 인생살이를 활등처럼 굽었다고 했던가?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과 고단한 인생살이를 활과 화살에 비유했을 정도로 한국인에게 활과 화살은 친숙한 물건이다. 지난 15일, 파주 헤이리에 있는 영집궁시박물관(관장 유세현)에서 국가무형문화재 47호 궁시장 유영기 명인(名人)이 직접 화살을 만드는 과정을 시연하는 행사가 벌어졌다. 2001년부터 20년째 벌이고 있는 2021 영집전이다. ■ 6대째 잇고 있는 전통의 맥박 87세의 고령이지만 유영기 명인은 섬세하고 재빠른 손놀림으로 대잡이통에 넣어 뜨거워진 대나무를 졸대에 끼워 바루기를 반복한다. 이번에는 전승 조교이자 교육사인 아들 유세현 관장이 같은 작업을 시연한다. 숯불을 피운 대잡이통에 살대를 넣고 불에 달구어진 대를 졸대로 곧게 펴는 이 작업을 졸을 본다고 한다. 대나무 마디를 갈아 없애고 껍질을 벗겨 내고, 송곳으로 찔러 공기를 빼낸다. 활시위가 걸리는 오늬를 파고, 촉을 끼우기 위해 살대의 끝을 깎은 다음 오늬를 끼우고 부레풀을 묻힌 쇠심줄로 묶는다. 부레풀을 묻힌 깃을 붙이고, 촉을 끼운 뒤 다시 졸을 본다. 화살의 상태를 찬찬히 살펴본 다음에야 비로소 허리를 편다. 드디어 화살이 완성된 것이다.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매년 여는 공개행사이지만, 두 사람은 시작부터 끝까지 무려 3시간 동안 작업에 열중했다. 옛날부터 활을 만드는 장인과 화살을 만드는 장인이 따로 있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화살은 활 이상으로 제작하는 과정이 복잡하고 기법도 정교하다. 사대에서 과녁까지의 거리가 145m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왜 활과 화살을 만드는 장인이 따로 존재하는지를 이해할 것이다. 작업을 보조하던 손자 유호상은 물론 손녀 유소정도 가업을 잇기 위해 과정을 밟고 있는 전수자라니 놀랍다. 궁시장 유영기 선생의 고향은 파주와 가까운 장단면으로 현재 북한 땅이다. 예천은 활, 장단은 화살이란 옛말이 있을 정도로 화살로 유명한 고장이다. 유영기 선생의 부친은 한국전쟁 때 집문서를 두고 살 만드는 도구와 부레풀만 챙겨 피난할 정도로 장인 정신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부친의 장인정신을 오롯이 이어받은 유영기 명인은 전통 화살 제작에 몰두했을 뿐 아니라 단절된 활 관련 유물을 복원하는 일에도 정성을 쏟았다. 1960년에 국방사학회의 요청을 받아 신기전을 복원하여 현충사에 전시할 정도로 일찍부터 실력을 인정받았고, 전승이 아주 끊어진 편전 발사법의 복원했으며, 1998년 건군 50주년 기념축제에서는 쇠뇌와 효시를 제작해 육군사관학교에서 실연을 지도하기도 했다. 한국의 전통 궁시의 역사와 실기 및 제작법을 정리한 한국의 죽전(1977)과 우리나라의 궁도(1991), 궁시장 교재(2003) 같은 책도 출판했다. 이러한 공로로 유영기 명인은 2017년 자랑스러운 경기도 박물관인상 대상을 수상하고, 2020년에는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한다. ■ 화살에 깃든 장인의 숨결 유세현 관장의 안내를 받아 2021년 특별전 명궁 심재관전이 열리고 있는 박물관에 들어선다. 명궁은 활을 잘 쏘기로 이름난 사람이다. 대한궁도협회의 규정에 따르면 5단 이상이라야 명궁이라 칭할 자격을 얻게 됩니다. 45시를 쏘아 31시 이상을 과녁에 맞출 수 있는 실력이지요. 그러나 활 잘 쏘는 실력만으로 명궁이 되지 못합니다. 활을 쏘는 자세인 궁체와 평상시의 생활태도 등 여러 가지를 심의한 이후에 명궁의 반열에 오를 수 있습니다. 심재관은 1986년에 대한민국 최초의 9단 명궁입니다. 흥미롭게도 심 명궁은 가족 사랑이 지극했던 분이라고 합니다. 활쏘기에 빠져 살던 궁사가 세상을 떠나면 제일 먼저 활과 화살이 아궁이에 들어간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인데 특별하신 분이죠. 명궁의 손때가 묻어 있는 흑각궁과 화살을 살펴본다. 굵은 대나무에 용을 조각한 전통, 활쏘기에 필요한 물건을 넣는 복주머니 모양의 궁낭, 유엽전 촉을 끼우고 빼거나 바로잡을 때 사용하는 촉도리가 여럿이다. 그의 이름을 새긴 낡은 궁대, 나귀를 타고 눈 쌓인 겨울 산으로 사냥을 떠나는 궁사가 그려진 동양화에는 황학정 심사범을 위해 동운이 그렸다는 글이 있다. 가까운 사람들이 선물한 글씨와 활 소기 성적을 기록한 시지, 상장이 가득하다. 9단을 받고 찍은 기념사진과 활을 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비롯해 40~50년 전 활터의 풍경을 살필 수 있는 색 바랜 흑백사진들이 눈길을 끈다. ■ 활과 화살, 우리 역사와 문화를 지키다 상설 전시실에서 화살이 종류가 너무나 다양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새삼 놀란다. 화살의 촉도 참 다양하다. 끝이 V자 모양으로 벌어진 것, 도끼날처럼 생긴 것, 나뭇잎을 닮은 것, 방망이처럼 생긴 것, 도끼날 양쪽에 갈고리가 달린 것도 있고, 기호로 쓰이는 화살표 모양도 있다. 끝에 화약을 단 화살, 나무 혹은 뼈에 구멍을 낸 명적(鳴鏑)이란 화살도 있다. 조선시대에 여진족은 명적이 날아오면 귀신이 우는소리라 하여 아주 두려워했다. 효시라는 말은 공격 개시를 알리던 신호화살을 말한다. 화살의 머리 부분에 호루라기처럼 생긴 작은소리통을 달아 쏘면 공기마찰로 삐익 큰소리를 내며 날아간다. 뿔거리 화살은 동물을 사냥할 때 사용했던 것으로 뼈를 부술 정도였다고 한다. 이번엔 깃을 살핀다. 지금 만드는 화살은 수꿩 장끼의 꼬리 깃을 사용하지만, 과거에는 천연기념물로 보호를 받는 두루미나 독수리, 매의 깃도 사용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싸리나 버드나무로 만든 화살도 눈에 띈다. 대나무가 자라지 않는 북쪽에는 싸리나 버드나무 가지를 사용해서 화살을 만들었지요. 물론 삼국이 경쟁하던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표적을 쏠 때 화살 깃이 큰 것이 좋을까 작은 것이 좋을까? 얼핏 생각하면 짧은 것을 사용했을 것 같다. 하지만 적진을 달리며 동개라는 작은 활을 사용했던 기병들은 큰 깃을 단 대우전(大羽箭)을 주로 사용했다. 태조 이성계는 촉이 배처럼 생긴 화살을 즐겨 쏘았는데, 1380년 지리산까지 침투한 운봉전투에서 왜구 1만여명을 이끈 용감무쌍한 왜구 장수 아지발도는 아무리 쏘아 맞혀도 소용이 없다. 갑주를 입고 얼굴에 쇠로 된 가면까지 쓴 사실을 파악한 이성계가 아지발도의 투구를 겨냥해 화살을 날렸다. 투구가 땅에 떨어지는 찰나의 순간에 의형제 이지란이 아지발도의 이마를 쏘았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고려의 영웅으로 떠오른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위해 출전하다가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건국한다. ■ 살장이 아들이 전통을 잇다 궁시장 유영기 명인의 뒤를 잇는 유세현 관장은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하는 실험정신이 투철한 장인이다. 1983년부터 부친으로부터 가업을 계승하여 2006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전수교육조교로 활동하고 있는 유 관장은 2012년부터 매년 꾸준하게 살장이전을 열고 있다. 살장이전은 유세현 관장의 실험정신과 장인정신이 오롯이 녹아있다. 특별전의 이름을 살펴만 봐도 영집궁시박물관이 어떤 활동을 해 왔는지를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활, 동서양의 만남 세계 전통 활 화살 어제와 오늘 신기전-달리는 불에서 귀신들린 화살까지 대나무에 불어넣은 숨결 활! 보다 그리고 느끼다 휘파람을 부는 화살 전통활과 화살의 이해 살촉에게 묻다 체험을 통한 국궁 문화 우리의 활 각궁 최종병기 활 전통활쏘기 편사 옛 그림으로 보는 활 이야기 등 다양한 관점에서 우리 활과 화살의 역사와 문화를 두루 살폈다. 삼대가 한마음으로 세계 최고의 궁시박물관을 만들어가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0. 파주 아트린뮤지움

올망졸망한 산들이 미술관을 감싸고 있는 풍경이 여유롭다. 국화 화분이 늘어선 잔디밭에 불쑥 솟은 한 무더기의 빨간 맨드라미가 파란 하늘빛과 어울려 초가을의 정취를 더해준다. 파주시 광탄면 기산리 고령산 앵무봉 자락에 자리 잡은 아트린뮤지움(관장 배일린)은 현대미술 중심의 제1종 등록미술관이다. 미술관 바깥 풍경에 취해 있을 때 주영희 학예연구사가 다가와 인사를 건네며 카페로 안내한다. 커피를 마시며 배일린 관장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신촌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며 소마미술관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던 배일린 작가는 나만의 미술관을 갖고 싶어서 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기산미술관을 인수하고 남편 손대업 대표와 함께 1여년 동안 리모델링하여 지난해 1월에 아트린뮤지움을 개관한다. 미술관 이름에 들어 있는 린(麟)은 배 관장의 이름이다. ■ 아트린의 가을전, 가을에 봄날을 추억하다 1전시실은 매달 새로운 전시가 열리는 공간으로 아트린의 가을전이 열리고 있다. 2021 지역문화예술플랫폼 육성사업으로 기획한 이번 전시는 지난 15일까지 한국화가 5인의 작품을 전시했고, 16일부터 강복경, 김영숙을 비롯한 서양화가 9인의 작품을 이달 말까지 전시한다. 활짝 핀 노랑민들레꽃을 찾은 나비 한 쌍을 그린 봄의 대화(경도연), 작약꽃봉오리에 맺힌 빗방울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 여우비(김효순), 들판을 붉게 물들인 양귀비 피는 오월(박종순), 햇살이 눈부신 바다를 표현한 가고 싶다(양옥련), 푸르른 들녘을 그린 바람의 향기-청보리밭(서영란), 자연이 빗은 신비의 땅 그랜드 캐년(정을순), 연두와 초록이 어우러진 오솔길 저 너머(최운숙)도 계절이 봄이다. 씨 뿌린 봄을 기억하며 갈무리를 잘하란 메시지일까? 작가들은 대부분 파주지역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다. 상반기에 진행한 전시 목록을 살펴본다. 최은숙의 그리운 풍경 공감하기(1월)를 시작으로 김영애의 솔향기 속으로(2월), 한진영의 스프링 메디테이션(3월), 남윤희유종구유혜정이옥진의 민화! 향기를 입히다(4월), 고성익김률희김명자이형민정인완의 감응을 통한 인간성 회복과 치유-5인5색전(5월), 이윤영의 탈피 molting(6월), 박윤경의 스트로마톨라이트(7월), 김한연의 캔버스에 그려보는 또 다른 삶(8월)이 이어졌다. 매달 새로운 작품을 전시하기에도 벅찰 터인데, 9월과 10월에는 성인을 대상으로 자화상 그리기를, 어린이를 대상으로 자연화 그리기를 가르치는 나도 화가다라는 프로그램을 동시에 진행한다. ■ 티베트 탱화, 먹과 메탈로 인간 내면에 깃든 빛을 이끌어내다 20년 전 티베트 불화에 마음을 빼앗긴 배일린 작가는 죽음을 깊이 응시한다.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으므로 티벳 사자의 서를 비롯한 관련 서적을 통해 죽음을 공부하고 죽음을 묵상하며 죽음을 해석한다. 사람이 죽지 않으면 이 세상은 정리가 되지 않고 발전할 수가 없다. 죽음이 곧 진화라는 깨달음을 얻은 배 작가는 이러한 철학을 가지고 10년 동안 티베트 탱화 제작에 몰두한다. 십이지신상을 비롯해 그동안 그린 작품으로 프랑스 깐느 페어, 뭄바이 비엔날레 초대 작가로 참여했다. 미술관 2층은 배일린 관장의 작품을 오롯이 만날 수 있는 상설전시관이다. 빛과 어둠전의 2전시실, 향원익청(香遠益淸)전과 티벳탱화의 재해석전이 열리는 3전시실은 2000년 이후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작가는 빛과 어둠이라는 양면을 가진 인간 생명력의 아름다움을 먹과 메탈로 표현한다. 짙은 먹 바탕에 반짝이는 유선형의 철 조각 메탈이 나란히, 때로는 나선형으로 배열되어 있다. 가까이서 살펴보니 조각들이 모두 사람의 형상이다. 이것은 당신은 몇 번째 서 있습니까?라는 작품이다. 삶과 죽음,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화면이 담겨 있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하는 생명의 특성을 빛으로 표현한 것이다. 배 관장의 설명을 듣고 다시 살펴보니 종이 바탕이 쭈글쭈글하게 구겨져 있다. 삶의 고난과 마음의 고통을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경계에 서다란 작품이다. 빛이 어둠을 몰아낼 수 있고, 어둠이 빛을 잠식할 수도 있지 않는가? 향원익청관에서 만나는 연꽃들은 생명력이 넘친다. 잎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웅크린 여성이 보인다! 그림의 바탕을 장식하는 화려한 색채는 작품의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티베트 불화-탱화에 얽힌 사연에 빠져든다. 1999년 뉴욕에서 전시했는데, 수묵화를 들고 갔다. 관람하던 미국인이 당신 그림은 중국풍 그림이 아니냐?고 물었다.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관람객의 눈에 중국풍 그림으로 비치는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과연 작가생활은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며, 국제적으로 경쟁력을 가진 작가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인가 회의하며 방법을 모색하다가 티베트를 여행하게 된다. 티베트에서 탱화를 보고 해답을 얻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그려야 할 그림이다!라는 확신, 앞으로 동양의 종교화가 세계 미술의 새로운 역사를 쓸 것이란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탱화의 정석에서 보살은 이타행(利他行)을 실천하는 존재다. 보살은 베풂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보살은 무엇일까? 최고의 가치는 공감이 아닐까. 공감은 상대의 마음이 움직여서 아픈 상처를 딛고 다시 일어설 힘을 준다. 우리 시대의 보살은 공감이라는 말이 신선하다. 작업실 옆에 붙은 4전시실은 초기 작품을 살펴볼 수 있는 동양화전이다. 작품을 통해 작가를 사로잡은 의식의 흐름을 확인하는 일은 흥미롭다. 요즘도 자정까지 작업한다는 배 관장은 그림을 그리면서 스트레스를 풀어낸다고 한다. 14m 그림 그리려고 여기에 왔다. 십이지신상과 탱화를 뉴욕 구겐하임에서 전시할 계획이다. 1999년 작품전시를 위해 미국을 방문했을 당시 뉴욕 맨해튼에 있는 미술관 구겐하임에서는 피카소나 샤갈처럼 작고한 작가들만 전시하고 있더라. 그걸 보고 살아있는 사람인 나의 작품을 전시하겠다고 결심했다. 구겐하임 미술관 바닥에서 꼭대기까지 모두 내 그림으로 채우리라고. 하하! 배 관장의 웃음이 시원스럽다. ■ 마을로 내려간 미술관, 주민과 한바탕 어울려 보자 작가가 작품에 너무 심취하면 현실 감각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배 관장은 다시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하고 홍익대 미술대학원에 진학해 박사과정을 밟았다. 박사학위 논문 제목이 빛과 어둠의 관계 미학을 통한 생명력 표현 연구이다. 그는 다시 탱화예찬론을 편다. 티베트 탱화의 핵심은 보이지 않는 세계이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죽음을 뜻하기도 한다. 죽음의 세계를 어떻게 이미지화할 것인가? 빛과 어둠을 주제로 삼아 죽음의 의미를 풀어냈다. 탱화는 무궁무진하다. 내가 죽기 전에 고려 불화처럼 5m 탱화를 그려볼 작정이다. 코로나19로 개관하면서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개관 후 하루도 쉰 적이 없었다. 코로나19가 잦아들면 미술관은 더욱 바빠질 것이다.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더욱 활발히 운영하고, 음악회도 열 계획이다. 주민들하고도 잘 어울리고 있다. 농사지은 것을 바리바리 싸 들고 와서 주고 간다. 시골의 넉넉한 정서가 살아있다.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10년 후의 아트린뮤지움은 어떤 모습일까? 잠시 침묵하던 배 관장이 천천히 생각을 풀어낸다. 아트린에 가야만 볼 수 있는, 특화된 미술관으로 키우고 싶다. 수준 높은 좋은 전시를 유치하는 것이 핵심이겠다. 후배 작가들을 지원하는 사업을 확대해 나가고, 지역주민들에게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지역 미술관의 역할도 충실히 감당할 것이다. 물론 미술관의 문턱을 낮추는 작업도 계속할 것이다. 미술관 입구에 걸린 현수막에 새겨진 문장을 떠올린다. 마을로 내려간 미술관-주민과 한바탕 어울려 보자!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9. 안성 'DIMA아트센터'

가을꽃도 봄꽃 못지않게 화사하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별처럼 생긴 들꽃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가을엔 보라색 꽃들이 많구나! DIMA아트센터(관장 최원경)는 안성시 삼죽면 아늑한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동아방송예술대학교 엔터테인먼트관에 있다. 방송예술대학답게 건축미가 돋보이는 건물 벽에 2021 경기도 지역문화예술 플랫폼 육성사업 DIMA아트센터 특별기획전-정원(庭園)의 비밀이란 글씨가 새겨진 짙푸른 현수막이 걸려 있다. 우아한 장식을 한 미술관 문에 보라색, 주황색, 연두색의 나비들이 훨훨 날고 있다. DIMA아트센터의 자랑인 미디어 아트가 전시실 입구부터 시작된다. ■ 정원에서 치유와 안식의 비밀을 찾다 정원엔 숨겨진 비밀은 과연 무엇일까? 박은종 팀장과 김윤미 학예연구사를 따라 전시실 안으로 들어선다. 환하고 아늑한 공간에 아트센터가 소장한 작품 중에서 정원, 꽃과 관련된 서양화 15점이 전시되고 있다. 장미화가로 불리는 박영선의 백장미가 싱그럽다. 이주영의 붉은 장미와 이황의 꽃이 풍성하고 감각적인 반면 오승우의 꽃은 단아하고 차분하다. 김흥수의 4월의 교외와 봄의 향기 그리고 지리산 자락의 산수유는 제목처럼 부드럽고 환하고 따뜻하다. 박영선의 춘경과 봄 풍경은 물론 이수억의 산과 김인수의 풍경, 김영태의 도라지꽃 마을과 이승환의 풍경도 몽환적이다. 비밀의 정원에 전시된 작품들이 모두 밝고 환하다. 전시실 안쪽은 첨단의 기술과 따뜻한 상상력이 결합해 창조된 행복한 정원이다. 영상이 맺히는 천을 걸어 꽃과 나비들을 맘껏 어울리게 만들었어요. 바람이 부는 것 같은 느낌도 연출하고 방향제를 써서 향기도 맡을 수도 있지요. 오감으로 느끼는 정원입니다. 꽃은 재생, 희망을 느낄 수 있잖아요? 붉은 장미가 탐스런 꽃봉오리를 터트린다. 모란, 카네이션, 백일홍 같은 꽃들이 잇달아 활짝 피어나고 있다. 개화처럼 감동적인 순간을 달리 찾을 수 있을까? 절로 탄성이 새어 나온다. 학생들이 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합니다. 자리에 앉아보시죠. 박 팀장도 옆에서 거든다.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재료가 궁금하다. 가능하면 쓰레기가 나오지 않게 전시합니다. 가벽을 쓰면 쓰레기가 많이 나오는데, 이번에는 천으로 만들어 재활용할 수 있도록 했지요. 물론 앞으로도 재활용할 생각입니다. 환경과 생태를 지키고 회복하려는 마음이 아름답다. 정원의 비밀은 화사한 빛깔과 향기가 가득한 매혹의 공간이다. ■ 미디어아트와 결합해 전혀 새로운 감동을 선사하다 안성지역의 유일한 등록 미술관인 DIMA아트센터는 2013년 2월에 개관한 미술관으로 실내 전시실 1실과 야외 조각공원 1실로 구성되어 있다. 실내전시실은 개관 이후 연 2~4회의 전시가 교체 운영되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현재는 연 2회로 줄였다. 건물 안 야외에 있는 조각공원은 수준급이다. 한국 작가의 조각 30여 점이 전시된 조각공원은 상당히 수준 높은 작품들을 두루 감상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공간이다. DIMA아트센터는 국내외 작가의 회화 250여 점을 소유하고 있다. 회화, 조각, 사진 등 180여 점의 소장품 가운데서 조선말의 최고 화가로 꼽히는 오원 장승업의 국화와 흥선대원군이란 이름으로 더욱 친숙한 석파 이하응의 석란도가 있다. 남종화의 거장 의재 허백련의 매와 한국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청전 이상범의 산수화, 이당 김은호의 화조도, 운보 김기창의 청록산수, 월전 장우성의 자연과 사슴, 심향 박승무의 설경 같은 작품들이 있다. 소장품은 일상 속에서 예술 작품을 향유할 수 있도록 교내 시설물 곳곳에 비치하고 있다. 월요일에 쉬는 일반 미술관과 달리 DIMA아트센터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운영되고 있다. 지역에서 접하기 어려운 최신 기법인 미디어아트를 접목한 융?복합 전시로 진행하는 것이 DIMA아트센터의 특징이자 강점이다. 마을 어귀에 서서 넉넉한 그늘로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느티나무처럼 DIMA아트센터는 대학에 있지만, 안성시민을 비롯한 일반 관람객들에게 개방된 미술관이다. DIMA아트센터는 개관 이후 지금까지 26회에 걸친 특별기획전을 열어 지역의 대표적인 문화예술향유공간으로 자리를 잡았다. 2014년에 김건희 작가 초대전 산책-거닐다, 만나다, 느끼다 전과 소장품전 색을 입다, 정화석 작가 초대전 풍경, 자연을 보다를 진행하고, 2015년에 소장품전 겨울 너머 봄과 2015 공사립 박물관 ? 미술관 지원 사업인 사제, 붓으로 말하다와 소장품전 설악을 걷다와 예술, 미디어를 만나다 ? 물과 빛의 연주를 진행했다. 2016년에는 소장품 기획전 목우회, 자연을 품다와 특별전 물에게 세월을 묻다, 그리고 특별기획전 화花조鳥동動동動과 COLOR PLAY!!을 연달아 열었다. 상당수가 방송예술특성화대학의 특징을 살려 순수회화와 미디어의 결합을 시도한 전시회였다. 2016년부터 매년 미술작품과 미디어아트를 결합한 융복합 전시회를 개최해 지역민들로부터 꾸준한 호응을 얻고 있다. 2017년에도 소장품 기획전 풍경: beyound the view와 개교 20주년 특별전 함께할 미래 dima 20년, 특별기획전 사군자, 사유의 창窓, 특별기획전 월로: We Only Live Once를 열었다. 학생 전시회의 경우 아이디어 발상에서부터 작품 스케치, 제작에서 설치까지 전시의 모든 과정을 무대미술과 학생들이 주도하고 있다. 무대미술 분야의 풍요로운 미래를 엿볼 수 있는 기회다. 이처럼 DIMA아트센터는 미디어아트 등 최신기술이 접목된 현대미술을 선보이며 지역사회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융복합예술체험의 기회를 꾸준하게 제공해왔다. 2018년에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표창을 받았다. 대학 부설의 작은 미술관이 매년 3회 이상의 기획전을 꾸준하게 개최할 수 있었던 것은 학교 당국의 지원은 물론 안성시와 경기도의 지원이 따랐기 때문이다. 대학과 행정 당국의 지원은 계속되고 차츰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DIMA아트센터 관계자의 말처럼 문화에 대한 투자는 단기에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기 어렵지만 장기적인 지역 발전상을 조망할 때 문화예술은 빼놓을 수 없는 지표이기 때문이다. 올 4월에 연 인터랙티브 미디어아트전 SYNESTHESIA:공감각은 콘텐츠제작학과와 실용음악학과가 협업한 전시였다. 학생들이 관람객과 상호작용하는 미디어아트를 통해 새로운 예술적 체험을 제공하는 실험적인 전시였다. ■ 안성 출신의 작가 김흥수, 상징과 함축전 2016년 목우회-자연을 품다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목우회 회장 김흥수 화백과 연결되었는데, 이때 작품 기증 의사를 밝혔다. 자신의 작품이 DIMA아트센터에 소장된 사실이 확인한 작가는 자신이 60여년 동안 제작한 작품을 대학에 기증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안성이 고향인 김 화백은 프랑스 Le Salon Gold Medal 수상작인 노모를 포함한 구상, 비구상 작품 80여 점을 2017년과 2020년 2회에 걸쳐 DIMA아트센터에 기증하였다. 기증 작품 중 추상화를 중심으로 2018년에 상징과 함축전을 열고, 2020년에는 붓과 캔버스의 여행전을 열어 김 화백의 작품 세계를 집중 조명했다. 상징과 함축전은 2018년 경기도 플랫폼 육성사업 우수기관에 선정되어 도지사 표창을 수상하는 영예까지 안겨주었다. 앞에서 살폈듯이 김흥수 화백은 구상과 비구상, 즉 추상의 세계를 넘나들며 예술의 세계를 확장해 온 작가이다. 안성 출신의 화가가 안성의 문화예술기관에 평생의 작품을 흔쾌히 기증한 일은 미술관이 지역사회의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하는 문화적 자산을 마련하는 선순환의 사례로 꼽힌다. DIMA아트센터는 작지만 첨단의 실험정신이 충만한 알찬 미술관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8.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양주시 장흥면 산속에 자리 잡은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은 현대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미술관이다. 하늘에서 미술관을 바라본 미술관 전경이 놀랍다. 건축가 최성희-로랑 페레이라가 장욱진이 호랑이[虎]와 까치[鵲]를 그린 호작도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한 이 건축물은 장욱진의 작품세계를 고스란히 형상화해 놓았다는 평을 받는다. 2014년에 개관한 장욱진미술관은 국내외 전문건축가들의 주목과 찬사를 받았다. 김수근 건축상을 수상하고, 한국건축가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베스트7에 선정되었으며, 영국 BBC 2014 위대한 8대 신설(new) 미술관에 선정되었다. 건물 한가운데 마름모꼴의 정원이 있는 독특한 구조의 장욱진미술관은 지하1층, 지상2층 규모인데, 5개의 전시실을 비롯하여 영상실, 강의실, 아카이브 라운지를 아우른 복합적인 공간이다. 미술관 밖이 조각공원이란 사실과 계곡을 끼고 있다는 사실도 자랑이다. 미술관 바로 옆에 임진왜란의 영웅 권율장군의 묘가 자리하고 있어 역사적으로도 유서 깊은 곳이다. 새와 아이를 즐겨 그린 장욱진(張旭鎭, 1917~1990)은 박수근, 이중섭과 함께 우리나라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서양화의 거장이다. 충남 연기가 고향인 장욱진이 어떻게 양주와 인연을 맺었을까? 보통학교 3학년 때 전국 어린이 미술대회에서 일등상을 받고, 양정고보에 재학하던 1938년 전국 학생 미전에서 공기놀이로 최고상을 받으며 일찍부터 재능을 인정받은 장욱진은 일본 제국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다. 해방 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근무하고,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했으나 창작에 전념하기 위해 6년 만에 교수 자리를 벗어던진다. 서울을 떠나 전기불도 없는 양주 덕소에 작은 화실을 마련한 그는 1974년까지 양주에서 작품 활동에 전념한다. 이것이 양주시에 장욱진미술관이 세워지게 된 배경이다. 이후 서울 명륜동과 수안보, 용인 마북리에서 작품 활동을 하던 그는 1990년 74세로 운명한다. 장욱진이 자주 했던 나는 심플하다라는 말은 그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말이다. 한평생 10호 미만의 작고 단순한 그림을 즐겨 그렸던 장욱진은 어른 아이 모두가 좋아하는 국민화가다. ■ 진진묘, 아내의 시선으로 거장들의 예술세계를 조명하다 특별기획전 진진묘(眞眞妙)는 흥미롭다. 8월 24일부터 10월 24일까지 진행되는 진진묘는 장욱진을 비롯한 김기창, 문신, 민복진, 백영수, 이응노의 예술세계를 아내의 시선에서 조명한 기획이다. 장욱진이 서점을 운영하여 자신의 예술 활동을 지원했던 아내 이순경(1920~)의 초상화를 금동불을 연상케 하는 보살로 표현한 작품 진진묘를 비롯해 김기창의 화가 난 우향, 조각가 문신의 무제 시리즈, 조각가 민복진의 부인상, 서양화가 백영수의 가족, 서양화가 이응로의 군상은 아내의 영향력이 돋보이는 대표작품들이다. 김명훈 학예사의 안내를 받아 미술관을 둘러본다. 장욱진의 생애와 진진묘가 탄생한 사연을 그린 애니메이션 작품입니다. 김 학예사의 설명처럼 장욱진의 생애가 영상으로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안내 책자에 실린 장욱진의 말이 눈에 들어온다. 부부가 서로를 이해한다면 정신세계의 방향이 일치할 수 있습니다. 우리 부부는 대화 중에 깊이 공감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순경이 쓴 장욱진의 그림편지 선물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나를 생각 말고 그를 생각하는 마음과 행동으로 예술가를 좀 더 편하게 함에 내가 부족했던 게 아니었던지 하는 생각은 요즈음도 들 때가 있다. 누런 바탕에 그려진 그림은 마치 수묵화 같다. 화면 오른편 아래쪽에 놓인 그릇은 장욱진이 인사동에서 구입하여 부인에게 선물한 향합입니다. 해설을 들으니 그림이 더욱 새롭다. 매직 마커로 보살을 그린 작은 그림에도 진진묘라 쓰인 한글이 보인다. 혼인하고 그 이튿날부터 난 그림 그리구, 우리 노보살은 경전을 읽었어. 그 일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지. 후년이면 금혼식을 맞는데도 말이야. 장 선생이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저는 한쪽에서 불경을 공부합니다. 방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그림을 그리는 장욱진의 모습이 떠오른다. 장욱진은 작품 전시회를 아내에게 선물한다. 전시회 날짜를 결혼기념일 또는 아내 생일로 정했다니 그의 사랑법이 직설적하다. 김기창(1913~2001)과 박래현(1920~1976)은 한국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부부 화가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예술에 대해 간섭지 않고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할 것을 결혼 조건으로 제시했다는 박래현도 한국의 여성이었다. 밤중에 그림을 그려 부엉이라 불렸던 박래현은 두 눈을 부릅뜬 부엉이 일곱 마리로 탄생한다. 그림 제목은 화가 난 우향이다. 짐작하듯 우향은 박래현의 호다. 이들 부부는 1947년 한국 최초로 부부전을 개최한 이후 해외를 포함하여 13회나 거듭한 같은 길을 가는 예술가 부부였다. 프랑스에서 열린 국제 야외 조각전에 태양의 사자를 선보이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조각가 문신(1923~1995)은 파리에서 화가 최성숙(1946~)을 만나 이듬해 결혼한다. 문신이 72세로 별세한 이후 문신의 고향에 세운 미술관을 지키는 최성숙이 들려주는 말이 놀랍다. 나는 문신이라는 거목을 키우는 정원사입니다. 물도 주고, 벌레도 잡아주는. 우리 시대에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발언이다. 문신의 조각 작품은 풍만하면서도 단정하다. 최성숙은 이 조각들을 보는 순간 모델이 자신임을 바로 알았노라고 고백한다. ■ 양주, 문화예술의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양주 출신의 조각가 민복진(1927~2016)은 한평생 가족에 대한 사랑을 주제로 작업을 해왔다. 그의 작품 세계는 모자나 커플과 같은 가족의 사랑을 주제로 이루어졌다. 나는 모자상, 가족상을 만들면서 예나 지금이나 사랑의 공간을 창출했다. 이 인간애적 조각물이 시대를 초월한 전달자적 표상이 되어 모두의 가슴 속에 영원하기를. 민복진의 가족과 아내 이인훈의 초상인 부인상을 바라본다. 곧 개관할 민복기미술관에 전시될 작품이다. 이응노(1904~1989)는 한자와 한글, 원시 문자와 고대 언어 등 다양한 언어의 형태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진행한 세계적인 작가이다. 고암선생님은 내게 예술이 무엇인지 문을 열어준 사람이었어요. 아내 박인경(1926~)의 고백이다. 그의 울림이 크게 느껴지는 것은 박인경이 우리나라 최초로 미술학부가 설립된 이화여대 제1회 졸업생이자 한국여성화가 1세대를 대표하는 화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모자상으로 유명한 서양화가 백영수(1922~2018)의 가족은 자유롭고 평화롭다. 백영수가 아내 김명애(1948~)를 위해 그려준 별은 서정으로 가득하다. 별 보기를 좋아하는 아내가 겨울에도 매일 별을 보러 가자고 조르자 백영수는 별을 그려줄 테니 그만 나가라며 이 그림을 그려 선물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작품이다. 해도 재미난 작품이다. 춥고 습한 노르망디에 거주할 당시,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아내 김명애가 벌벌 떨면서 들어오자 따뜻하게 해주겠다면서 즉석에서 합판을 잘라 그린 작품이다. 김명애는 백영수미술관을 설립해 남편의 예술을 세상에 알리고 있다.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을 개관한 이후 2019년까지 5년간은 바탕을 다지는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2017년에는 장욱진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진행하고, 2019년에는 개관 5주년 기념전을 열었지요. 2020년 공립 박물관미술관 실감콘텐츠 제작 및 활용사업에 선정되어 10억의 지원비를 받아 미술관을 확 바꾸었습니다. 처음 찾는 관람객은 물론 이전에 찾았던 분들에게도 새로운 재미와 감동을 전달할 수 있도록 첨단 기술을 활용하여 새롭게 단장하고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민복진미술관을 개관하면 볼거리가 더욱 풍성할 것입니다. 미술관 관계자의 말처럼 산 깊고 물 맑은 양주시가 첨단의 문화예술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7. 파주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거대한 청동 인물상과 마주 선다. 아트센터 화이트블럭(White Block)을 찾은 관람객을 맞이하는 듯 두 손을 다리에 붙이고 정중하게 허리를 숙인 건장한 사내의 모습이 듬직하다. 산책로를 따라 갈대광장의 연못으로 향한다. 멀리서 보면 보일까? 하얀 건축물에 담은 건축가의 생각과 설립자의 마음이 궁금하다. 연꽃이 활짝 핀 연못에서 보니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화이트블럭은 책상 위에 펼쳐 놓은 하얀 도화지처럼 푸른 나무와 잘 어울린다. 미술관에 들어서니 안이 환하다.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드러내면서도 주변 환경과 자연스레 어울리도록 미술관을 설계한 건축가의 내공이 느껴진다. 2011년에 개관한 화이트블록(대표 이수문)은 연면적 1천600㎡의 지하 1층 지상 3층의 건물로 모두 7개의 전시공간을 갖추고 있다. 미국건축사협회로부터 젊은 건축가상을 받은 박진희 SsD건축 대표가 설계한 이 건물은 전시형태에 따라 전시장의 천장이 열리고 닫히며, 변형되어 미술전시에 최적화된 전시공간이다. 미래 새로운 형식의 미술작품과 미디어를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다. 아트센터 화이트블럭도 2012 미국 건축가 어워즈에 수상작으로 선정된 또 하나의 작품이다. 강은영 학예실장, 김유빈 큐레이트의 안내를 받아 회의실에 들어서니 이수문 대표가 기다리고 계신다. ■ 음악과 연극을 사랑한 끼 많은 경영인이 설립한 열린 미술관 매년 여섯 차례 정도 전시를 열고 있다. 작품 활동이 활발한 중진 작가에게 소홀한 면이 있어 중진 작가를 대상으로 한 개인전을 열고 있다. 강경구(2018), 서용선(2019) 등의 개인전 그것이다. 홍기원(2019), 이재훈(2020) 등 경기도 작가를 대상으로 한 개인전도 진행하고 있다. 작업 환경이 어려운 작가를 돕는 일에 힘을 쏟고 있다. 여기서 200미터 떨어진 곳에 매년 작가 4명이 입주하는 스튜디오 화이트블럭이 있다. 입주 1기 한지석(2019), 4기 김건일(2020), 3기 제이미 리(2021)의 개인전을 열었다. 학예실장이 자료를 찾으러 간 사이에 이수문 대표가 들려주는 사연이 놀랍다. 작가를 위해 천안에 작업공간을 마련해 매년 16명을 지원하고 있다고 하니 화이트블럭이 후원하는 작가가 20명이나 된다. 경기문화재단과 협력하여 경기 시각예술 창작지원 전시도 열고 있는데, 올해는 생생화화(生生化化)를 예정하고 있다. 시대적인 고민과 문제의식을 담은 주제기획전을 열고 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화가의 자화상(2018), 빛의 국면(2018), 회색의 지혜(2019),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은 2020년에는 검은 해를 기획했고, 올해는 한국화의 현대적 재해석(가제)을 기획하고 있다. 전문 비평가를 초빙하여 작가와 평론가가 비평하는 자리도 마련하고 있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미술체험 프로그램 산수에서 노닐 적에 어른을 위한 미술관도 운영했다. 2019년에는 노혜정의 진행으로 허브 드로잉 워크숍을, 2020년에는 이정배 이진주의 진행으로 화판부터 액자까지-나의 세밀화와 조가연의 진행으로 나의 풍경화-유화, 그리고 사색을, 2021년에는 제이미 리의 진행으로 Dear My -를 진행했다. 매년 미술대학을 졸업하는 청년이 2만3~4천 명이나 된다. 이 가운데 절반이 순수미술 전공자인데 그림을 그려 먹고 살지 못한다. 작가의 작품을 발표하는 전시 공간을 마련해 주는 일만큼 작업공간을 제공하는 사업도 필요하다. 여기서 200미터 떨어진 곳에 입주 작가를 위한 스튜디오 화이트블럭이 있다. 입주 작가 4명에게 1년 6개월에 걸쳐 개인에게 작업공간을 제공한다. 4년에 걸쳐 16명을 지원했다. 천안에도 공간을 마련하여 매년 16명의 작가가 입주하여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작가에게 도움이 되려면 기본적 지원이 필요하다. 작업한 것을 전시하고, 이후 활동까지 지켜보며 지원하고 있다. 아무튼 판을 벌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수문 대표의 이력도 흥미롭다. 이 대표는 경기고 재학시절에 밴드부와 연극반에서 활동하고, 서울대 공대에 진학한 후에도 연극을 계속했던 음악가이자 연극쟁이다. 군악대원으로 클라리넷을 연주하며 군복무를 마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단역배우로 출연했을 정도였다. 국내 주방 문화를 혁신한 전문 기업 하츠를 창업하여 크게 성공한 이 대표는 자신의 끼를 감추지 못한다. 경영인으로 분주하던 시절에 연출가 윤호진 씨와 함께 뮤지컬 본고장인 런던 웨스트엔드와 뉴욕 브로드웨이를 함께 다닌 뒤에 에이콤이란 회사를 설립해 제작한 작품이 창작뮤지컬 명성황후다. 무채색 작가로 알려진 차명희 씨는 서울대 미대 출신의 현역 작가로 그의 예술적 동지다. ■ 여성주의 작가 정정엽의 걷는 달 강성은 학예실장의 안내로 정정엽 작가의 스무 번째 개인전 걷는 달이 열린다. 전시는 걷는 달, 얼굴 풍경 2, 붉은 드로잉 등 세 가지 주제로 나눠진다. 민중미술 작가이자 여성주의 작가로 알려진 정 작가는 팥과 콩, 나물과 싹튼 감자, 벌레와 나방 같은 소외되고 연약한 존재들을 작업의 주제로 삼는다. 걷는 달에서는 만난 그림은 쓸쓸하고 고독하다. 죽은 새와 나란히 누워 있는 사람은 바로 작가 자신이다. 붉은 외투를 입고 바닷가 모래밭을 걷는 여성도 작가 자신일 것이다. 몸빼바지를 입고 줄지어 걸어오는 할머니들의 파마머리와 발걸음이 당당하고 유쾌하다. 얼굴풍경 2에선 작가의 자화상을 포함해 사진가 박영숙, 여성학자 김영옥, 시인 김혜순, 미술가 윤석남의 초상화, 여성학자 임옥희, 제주에서 농사짓는 최복인, 정의기억연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쉼터인 서울 마포구 평화의 우리집 쉼터에서 18년간 일한 고 손영미 소장, 장애인 인권운동을 하다 숨진 최옥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심미자, 영화비평가 권은선의 초상이다. 여인들의 초상은 모두 붉은색이다. 머리에 휘어진 철근이 나무처럼 어지럽게 돋아 있고, 콘크리트는 금가고 부서져 내리고 있다. 그런데도 눈을 감은 여인의 표정이 너무나 평안하다. 강 실장의 설명을 들으니 작가의 초상이란다. 작가가 내게 무엇을 말하려는지 가슴을 열고 한참 바라본다. 어두운 시대를 뚫고 고난의 세월을 견뎌낸 여성의 상처투성이 가슴을 들여다본다. 붉은 드로잉은 2006년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지워지다 전에서 선보였던 사회의 무관심과 폭력으로 사라지는 여성들을 그린 드로잉 작업과 신작 드로잉을 보여준다. 붉은색은 쉽게 잊히는 여성의 삶을 증언하기 위해 작가가 선택한 색이다. 걷는 달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그림 옆에 붙어 있는 작가의 말을 빌린다. 어두운 밤, 홀로 작업실 주변을 산책한다. 바람도 달도 별도 모두 나 하나를 위해 존재한다. 달은 나를 따라 걷는다. 정정엽의 걷는 달은 달빛 아래 자유롭게 걷고 싶은 작가 자신과 다른 여성들과의 연대를 그려낸 전시로 10월 31일까지 열린다. ■ 시선이 머무는 곳, 오래 머물고 싶은 곳 미술관을 둘러보며 이 대표가 들려준 말을 다시 생각해본다. 지난해부터 10년 후 2030년의 미술관을 준비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과 예술이 만나는 공간을 구상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엔 예술도 변하기 마련이다. 인공지능 로봇 홀로그램과 다양한 예술장르를 접목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가까운 미래에 변화할 환경에 잘 대응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고, 작가나 큐레이터가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프로 경영인의 자세일 것이다. 대표님이 멀리 내다보고 사업을 벌이기 때문에 길게 보고 일 할 수 있어 좋다. 장 실장의 말대로 화이트블록이 멀리 오래 가는 미술관이길 바란다. 실외로 연결이 돼 있는 1층 카페는 아늑하고 편안하다. 입장료가 3,000원인데, 차를 주문하면 입장료를 대신할 수 있다. 음식과 커피 맛이 좋다는 평이 많다. 환하고 탁 트인 공간은 관람객의 마음을 넉넉하게 해준다. 파주 헤이리 화이트블록은 오래 머물고 싶은 휴식과 충전의 놀이터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6. 양주 안상철미술관

양주시 백석읍 권율로 905번지에 자리 잡은 안상철미술관(관장 김철효)은 1950년대 후반 국전에 5회 연속 입상하고, 전통 산수화에 서구적 조형원리를 접목하여 실험적인 작품을 생산한 작가 안상철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06년에 설립한 사립미술관이다. 한국화의 지평을 넓힌 안상철의 작품은 지금 보아도 시선을 끌만큼 파격적이다.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1993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작고 작가로 선정되어 두 달 동안 작고작가전을 열었고, 이듬해에는 유족과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초기부터 말년 작품까지 망라한 유작전을 예술의 전당에서 열었다. 작고 10주년이 되던 2003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안상철, 수묵과 오브제를 열어 초기부터 후반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한자리에 펼쳐보였다. 안상철미술관 역시 안상철나희균 입체작품전-오브제의 재발견(2017)과 안상철의 채색문인화를 다룬 모란이 피기까지는(2020) 같은 작품전을 통해 작가의 폭넓은 예술세계를 재조명하고 있다. 안상철미술관은 건축물부터 작품이다. 작가의 아들인 건축가 안우성이 설계한 미술관은 작가가 생전에 추구했던 다양한 예술적 시도를 담아낸 건축물로 유명하다. 건물 동편엔 입체작품에 사용되는 목재를, 남쪽엔 수묵화와 호수를 의미하는 반사유리를, 서편엔 채색화 배경이 된 크라프트지를 의미하는 황토벽을, 북쪽엔 모든 재료를 통합하는 노출 콘크리트를 사용한 것이다. 자연지형을 살려 높낮이로 전시실을 구분시켜 언뜻 보면 하나의 공간처럼 보이도록 설계한 건물 디자인도 재미있다. ㄷ 자형 건물의 중앙은 소나무와 꽃이 있는 작은 정원이다. 호수가 마주 보이는 카페를 지나 1층 전시실로 내려가면 나무를 자르고 다듬고 채색한 안상철의 오브제 작품들이 기다리고 있다. 작품명 영(靈)이 암시하듯 고목(古木)에 깃든 신령한 기운이 뿜어 나오는 듯하다. 기록하고 기억하다, 나희균 10년의 시간(1959~1970)은 안상철 작가의 아내 나희균 작가의 작품 활동을 소개한 신문과 잡지의 기사를 곁들인 작품전이다. 파이프를 잘라 만든 설치작품과 네온관은 5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참신하다. ■ 부부 작가, 서로에게 자극을 주며 예술의 지평을 넓히다 경남 함안이 고향인 안상철은 부산 피난시절에 미국인 프랭크(Frank) 교수를 통해 전통 산수화의 시각에서 탈피하여 몬드리안, 칸딘스키 등의 추상적 근원을 이루는 점, 선, 면 등의 서구적 조형성의 기초를 배운다. 이상범, 노수현, 장우성, 배렴의 지도를 받으며 전통 산수화 기법을 익힌 그는 동양의 전통과 서구의 조형원리를 접목한 화풍을 선보였다. 국전에 출품한 그의 작품들은 당시 화단의 주류를 이루어왔던 산수화 풍에서 벗어나 있다. 서울대에 재학 중이던 1953년에 제2회 국전에 만추(晩秋)를 출품하여 입선하고, 1955년에는 구(丘)를 출품하여 입선한다. 1956년과 1957년에는 전(田)과 정(靜)을 출품하여 문교부장관상을 받았고, 1958년에는 잔설(殘雪)로 부통령상을, 1959년에는 청일(晴日)로 대통령상을 수상한다. 국전에 출품하여 수상한 4점 모두가 반복된 선율, 점묘에 의거한 공간창출이 드러나 보인다. 특히 청일(晴日)은 그의 관심이 추상적 세계로 들어서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1960년 34세의 젊은 나이에 국전의 추천작가로 참여하면서 동양회화의 현대화를 시도한다. 국전 추천작가로서 출품한 만연몽은 형태를 부정한 묵선과 점만으로 그려진 최초의 추상화이다. 이듬해에 출품한 몽몽춘도 파격적이다. 종이에 수묵의 추상적 필선과 작은 돌이 평면 위에 등장한 것이다. 이어진 靈-62에서는 화면에 바위를 붙이고 구멍을 내어 평면에 깊이를 만들어낸다. 부채꼴로 변신하고 괴목을 등장시켜 입체화의 변신을 거듭 실험한다. 1974년에는 벽에 걸던 작품을 입체로 바꿔서 대 위에 괴목과 바위를 나열한다. 산수화를 떠올리게 하는 이 작품은 동양화를 입체화한 것이다. 1960년대부터 분재에 심취한 그는 나무의 생명력과 형상의 자연성에 주목한다. 전통 동양화는 현실을 외면한 신선경이나 대상 그대로를 모사한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하면서 시작한 작업이 영(靈) 시리즈였다. 고목을 자르거나 새롭게 조합해서 입체적으로 재구성하고, 색을 칠하는 기법이 사용되었다. 안상철은 한국 현역화가 100인전(1973), 한국화 100인전(1986), 한국근대미술명품전(1992)에 참여했다. 운 좋게 미술관에서 나희균 작가를 뵙게 되었다. 미술관까지 전철과 버스로 와요. 1932년생이니 선생의 연세가 올해 90세인데도 얼굴이 곱고 허리가 반듯하다. 아직 대중교통을 이용하실 정도로 건강하시다.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1955년에 형부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로 날아가 파리국립미술학교에서 그림을 공부한다. 유학시절에 가깝게 지낸 김환기(1913~1974), 김향안(1916~2004) 부부는 그의 작품세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희균이한테는 좋은 것이 있어. 성격은 참한 것 같은데 그림은 거칠거든. 김환기가 그에게 준 편지의 한 구절이다. 1957년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귀국한 그는 대학 동창 안상철과 결혼하고 자녀 넷을 키우면서 작품 활동을 벌였다. 1960년대 기하학적이고 평면적인 조형기호로 구성한 작품을 제작하고, 1970년대엔 한국 최초로 네온관을 이용한 작품을 선보일 정도로 앞서 나갔다. 김환기의 눈이 정확했던 것이다. 평면에서 벗어나 입체 작품을 만들고픈 작가적 욕구는 부부가 닮아 있다. 그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나혜석(18961948)의 조카라는 사실도 놀랍다. 나희균은 시대를 앞서간 여인, 나혜석이란 글을 잡지에 기고하여 여성의 의식을 깨우려 애쓴 고모의 안타까운 생애를 추모하기도 했다. 얼마 전 환기미술관에서 수화가 만난 사람들- 나희균, 고요의 빛 전시회가 열렸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사람의 인연을 생각한다. 역사는 기록해야 합니다. 동행한 사진 기자의 요청에 따라 파이프를 잘라 표현한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며 작품을 설명해준다. 이 작품은 거리의 건축자재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시작되었지요. ■ 내일을 여는 작가의 실험정신-한국화, 시대를 걷다. 안상철미술관은 다양한 주제와 시각으로 한국화 분야를 조명하고 연구하는 전시를 진행해왔다. 작가 안상철이 1950년대에 우리 미술의 뿌리로부터 현대화를 부르짖으며 낯선 오브제 작품으로 화단에 충격을 던진 이래 우리 화단에서는 전통의 혁신이라는 가치를 공유한 수많은 작가들이 쉼 없이 달려왔다. 이러한 문제의식의 연장 선상에서 안상철미술관은 8월 25일부터 2021 특별기획전 한국화, 시대를 걷다를 전시하고 있다. 서울과 경기지역에서 활동하는 중견작가 10인-김성희, 김춘옥, 박민희, 소은영, 송근영, 양정무, 이미연, 이승은, 하정민, 하철경이 출품한 작품들은 예상대로 전통적인 한국화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1960년대부터 입체와 모빌, 추상 등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벌인 안상철의 정신이 느껴지는 10인의 작품에서도 지향과 개성이 뚜렷하다. 김철효 관장이 설명을 들어본다. 10인은 작가들은 선배 화가들이 고심했던 전통의 혁신을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통에서 자유스럽게 자양분을 얻어 즐거운 놀이의 장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이들에게 전통이란 지필묵으로 대변되는 산수나 문인화일 수도 있고 사군자 상징의 차용일 수도 있으며 조각보나 민화의 단순화 또는 색채의 감성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코 어둡거나 무겁지 않으며 침잠하는 분위기도 없다. 한국화의 전통성과 다양한 표현양식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사의(寫意)와 유희의 개념을 통해 되짚어보는 전시이다. 이종은 큐레이터의 보충설명에 따르면, 참여한 작가들은 60년대 추상운동을 했던 작가들이나 수묵화 운동으로 한국적인 가치를 추구했던 1980년대에 수학하여 전통의 현대화가 중요시되던 시기에 작가로 성장했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5. 성남 ‘큐브미술관’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에 자리 잡은 성남아트센터(대표이사 노재천)는 2006년에 문을 연 복합문화예술공간이다. 큐브미술관은 오페라하우스, 콘서트홀, 앙상블시어터와 함께 성남아트센터에 속한 공립미술관이다. 큐브미술관은 3개 전시실로 구성된 본관과 2개의 전시실로 구성된 반달갤러리가 있다. 큐브란 이름을 가진 까닭이 궁금하다. 여섯 가지 색의 플라스틱 주사위 27개로 된 정육면체의 각 면을 같은 빛깔로 맞추는 장난감을 말하는 것일까? 아트센터의 건물디자인이 큐브처럼 보입니다. 시민공모를 통해 확정한 이름이지요. 신창근 과장의 설명을 듣고 보니 웰컴 투 성남아트센터란 글귀가 새겨진 간판의 배경조차 큐브를 형상화한 것처럼 보인다. 반달갤러리 맞은 편 벽에 남자아이가 꽃밭에 물을 주고 있다. 성남의 문화예술을 풍요롭게 가꾸어갈 미래세대의 상징으로 읽힌다. ■ 성남미술은행, 미술인을 키우는 은행 2020년 신소장품전이 열리는 3층 상설전시실에 들어선다. 입구에서 성남미술은행(SNAB)이라는 흥미로운 이름과 마주한다. 신 과장이 성남문화재단에서 발행한 소책자를 건네준다. 성남미술은행은 저렴한 가격에 미술작품을 대여, 감상할 수 있는 아트 쉐어링 프로그램입니다. 지난해는 코로나로 타격을 입은 지역 미술인의 고통을 분담하고 상생하고자 지역 작가의 작품으로 한정해 계획보다 앞당겨 진행했지요. 지역 작가의 작품을 구입하여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소장한 미술품을 저렴한 가격에 빌려주는 사업이라니, 문화를 선도하고 있는 성남아트센터의 철학이 엿보인다. 굵은 붓으로 검은 먹물을 휘갈긴 듯, 여인의 치렁치렁한 머리가 출렁이는 듯 율동이 살아있다. 이현배의 검은 화면이 건네는 말이 강렬하다. 김호민의 캠핑 희망도-박연폭포와 한계령을 살펴보다가 입 꼬리가 올라간다. 한계령 산속은 물론 황진이가 놀았던 박연폭포 앞에도 텐트가 처져 있다. 산 위를 나는 비행기와 폭포 앞에 주차한 자동차, 전통과 현대가 잘 어울린다. 이윤정 작가의 독도와 기억의 층은 먹물을 머금은 레이스 끈을 통해 그려진 것임에도 산과 바위의 주름, 새가 자연스럽다. 모니터 안 유리컵에 신선한 오렌지 주스가 채워진다. 손을 뻗어 컵을 꺼내 주스를 마실 수도 있다! 장은의의 맛있는 그림이다. 열 개의 원은 둥근 접시에 담긴 아홉 개의 토마토의 신선한 빛깔이 기분을 밝게 해 준다. 이지연의 심심한 상상은 집을 선과 색으로 단순화시켰지만, 휴식이라는 집의 기능을 선과 색으로 표현하고 공간을 분리하고 연결되는 선을 통해 이웃과의 소통을 시도하려는 듯하다. 안현곤의 세렌디피티(Serendipity)는 가까이서 보면 영문으로 어지럽지만 조금 떨어지면 꽃이 보인다. 예측할 수 없는 상상이란 뜻처럼 늘 정착하지 못하고 고뇌하는 정체성의 부재를 표현한다. 귤과 무화과와 모과와 사과가 가득한 푸른 과원에 벌과 나비가 날고 무당벌레가 앉아있다. 과일나무숲에 노는 아이들의 응시하는 두 눈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작가별로 두 점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데, 한 점이 미술관에서 구입한 소장품이다. ■어제의 기억은 모두의 미래다 미래는 지금이다(The Future is Now)는 성남에서 활동한 작가 김태헌, 임홍순과 가천대 출신의 젊은 작가 모임인 신흥사진관(홍지연, 이해초, 황수라, 장유영)이 참여한 8?10 성남(광주대단지) 인권운동 50주년 기념전의 제목이다. 기념전의 내용을 파악하자 가슴이 저려온다. 살기 좋다는 분당과 판교를 품은 100만의 대도시 성남은 계획도시가 아니다. 성남은 한때 광주대단지로 불렸다. 50년 전, 성남은 광주군의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다. 1960년대 말, 서울은 만원이 되었다. 1960년대 후반 무허가 판잣집이 18만에 육박하자 서울시는 그중 5만 채에 살던 사람들을 강제로 광주군에 이주시켰다. 1971년 8월 10일, 광주대단지 주민 수만 명이 궐기대회를 열고 정부의 무계획적인 도시정책과 졸속행정에 반발하며 도시를 점거했다. 이렇듯 성남시는 공권력에 의해 하루아침에 벌판에 버려진 철거민들이 세운 도시다. 미래는 지금이다전은 쉰 살을 맞은 성남시의 역사를 돌아보며 도시의 미래를 성찰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810 성남(광주대단지) 인권운동 50주년 기념전이 열리는 2층 전시실에 들어서면 경직된 관공서 분위기가 풍겨난다. 중앙에 원형 평상이 놓여 있고, 벽에는 성남의 연대기가 그려져 있다. 부스 안에 놓인 물건 중에 눈에 익은 책이 보인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다. 100쇄를 넘게 찍은, 고전의 반열에 오른 소설책이다.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도 있다. 1970년대 도시빈민과 노동자들의 고난에 찬 삶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린 소설의 무대가 성남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전시실 한켠에 숫자가 가득한 커다란 천이 비스듬히 걸려 있다. 김태헌의 금광1동 수인번호에서 정부에 항의하다가 수감된 주민들의 분노가 느껴진다. 재개발로 사라진 과거 성남의 흔적들을 전시하는 공간도 이채롭다. 꽃이 그려진 의자와 지금은 볼 수 없는 1리터 용량의 커다란 코카콜라 빈병이 흘러가버린 과거를 잠시 우리에게 되돌려준다. 모란시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이 벽에 가득하다. 표정이 밝아 다행이다. 어두컴컴한 공간에 텐트를 연상케 하는 천이 드리워져 있고, 그 천으로 영상이 펼쳐진다. 이주 노동자, 탈북자, 여성 빈민 등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임홍순 작가의 고향이다. 그는 성남문화재단과 가진 인터뷰에서 가난, 고향, 집, 그리고 시민이 생각하는 성남은 어떤 곳인지를 물어보고 싶었다고 밝힌다.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긴다. 예술가의 임무는 무엇이며 역할은 어디까지일까? ■마주 보기, 집은 언제쯤 사람의 얼굴로 보일까? 지난해 첫선을 보인 성남중진작가전은 성남지역에서 활동하는 45세 이상, 60세 이하의 중진작가들의 작품세계를 재조명하고 작품을 시민들에게 알리고자 기획한 프로그램이다. 반달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문현숙의 FACE TO FACE전은 소통과 관계의 소중함을 생각하게 만든다. 2012년부터 2021년 지금에 이르기까지 작품의 변화를 읽을 수 있도록 주요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문현숙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집들은 점, 선, 면으로 단순화되어 있다. 초기작을 살피며 작가의 해설을 들으니 작가의 시선과 생각이 어렴풋이 그려진다. 캔버스 위에 두껍게 물감을 덧칠해 입체적으로 표현한 집들은 구상과 비구상의 경계에 놓여 있다. 작가는 집을 통해 사람과 사람, 나와 세상을 이으려 공을 들인다. 작가에게 집은 연결하고, 상상하고, 사이를 갖게 하고, 공유하는 대상이다. 집들이 모여 사람의 얼굴을 보여주고, 때로는 동물이나 특정한 현상이나 소리, 이미지를 발견하게 한다. 관람객의 시선에 따라 전혀 의도하지 않은 형상이 나타나기도 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사람의 마음과 닮아있다. 작가는 말한다. 서로의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표정들, 삶 속에서 나타나는 희로애락의 표정들. 그런 얼굴들이 함께 모여 또 다른 형상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과 그렇게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 삶의 모습을 담아내고자 했다. 작가의 최근 작품이 전시된 1층 전시실부터 관람하든 2층에 전시된 초기작부터 시작해서 작품이 변천해가는 과정을 살피든 마음에 드는 작품을 골라 오래 머물며 가까이서 혹은 멀리서 지긋이 바라보다 보면 그림 속의 집들이 말을 걸어올 것이다. 성남문화재단은 최근 전국의 문화예술기관 중에서 최초로 재생에너지를 활용한 친환경 축제 운영을 선언했다. 문화예술이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세상에 확산시켰듯이 우리 시대가 당면한 생태회복을 위한 행동에 앞장서기로 한 결정은 신선하다. 미술관을 나서며 큐브미술관의 전시계획을 살펴보며 새삼 놀란다. 매달 열리는 다채롭고 충실한 전시계획에서 성남예술의 미래가 보이기 때문이다. 김준영(다사리행복학교)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4. 가평 남송미술관

가평 백둔 계곡에 자리한 남송미술관은 쉼 없이 흘러가는 시냇물처럼 부지런하다. 매달 새로운 작품을 전시하려면 얼마나 부지런해야 할까. 새로운 작가를 세상에 알리는 일에도 열심이다. 남송미술관은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5월까지 6개월 동안 나는 대한민국의 화가다전을 6회에 걸쳐 진행했다. 90명의 한국 화가를 선정해 3년간 인터뷰 하고, 매월 15명씩 전시를 진행한 대장정을 마무리했지요. 상대의 눈을 응시하며 전달하는 남궁원 관장의 말투에 강철 같은 신념이 느껴진다. 2005년 개관한 남송미술관은 남궁원 관장의 아호이자 피아니스트의 꿈을 펼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딸 남궁송의 애칭을 따 붙인 이름이다. 450평의 4층 건물로 1층 전시실은 남궁원 작가의 전용 전시실이다.2층 전시실은 젊은 현대작가들의 작품과 소장품의 기획전이 전시되며, 3층에는 체험학습실, 4층에는 야외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다. 남송미술관은 외관부터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한민족의 기상과 멋이 깃든 성곽의 형태의 건물이 본관이다. 별관인 허수아비마을은 전혀 색다른 분위기를 보여준다. 건물 벽에 대형 초상화가 눈길을 끈다. 붓을 든 형형한 눈빛의 남자가 어딘가를 응시하는 사람이 바로 남궁원 관장(75)이다. 냉커피로 목을 축이며 카페 데자르에서 최준석 학예사가 들려주는 미술관 설립에 얽힌 사연을 들려준다. 우리 역사는 물론 세계사에도 해박한 최 학예사의 이야기에 빠져든다. 남송은 남궁원 관장의 아호이자 일찍 세상을 떠난 송이라는 딸의 이름을 조합해 만들었다는 사연을 들으니 가슴이 먹먹하다. 평일인데 손님과 관람객이 줄을 잇고 최 학예사의 휴대폰도 연신 울어댄다. 남궁 관장께서 본인이 직접 미술관을 안내해 주시겠다고 나서신다. 남궁 관장의 뒤를 따라 미술관으로 들어선다. 산속에 자리한 미술관이 시원하다. 1층 상설전시장에 들어선다. 널찍한 전시실 입구에 설치된 대형 모니터에서 작품을 해설하는 자막과 전통 민요 아리랑이 흘러나온다. 전시실 벽면을 가득 채운 연작 그림은 남궁 화백의 물감으로 쓴 자서전이다. 한국전쟁으로 부친을 잃고 어려운 시간을 보낸 유년시절부터 청년, 장년기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생애에서 만난 온갖 사연들이 밝은 표정으로, 때로는 어두운 표정으로 다가온다. 물감을 나이프로 찍어 그렸기 때문인지 화폭에 담긴 이야기가 더 강렬한 듯하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남송미술관을 설립한 작가 남궁원의 일생은 물론 그가 추구하는 인생철학도 읽을 수 있다. 허수아비마을에 있는 3m가 넘는 크기의 나무 허수아비. 별관인 허수아비마을은 더욱 매력적인 공간이다. 4천여 평의 너른 공간에 20여 년간 펜션과 연수원으로 사용했던 건물을 리모델링했기 때문에 전시관 공간이 아기자기하다. 목련관, 들국화관, 철쭉관, 진달래관을 비롯해 그랜드피아노가 놓인 아트홀 등 15개의 전시실이 있다. 잔디가 깔린 너른 마당 곳곳에 멋스런 조각 작품을 만난다. 지난 7월까지 14명의 작가가 참여한 청년신진작가전을 열었고, 현재는 소장품전이 열리고 있다. 원로 화가 정문규(1934~2021) 작품전은 특별한 전시가 되었다. 남궁 관장의 스승이기도 한 정문규 화백이 마침 이달 6일에 작고했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한국의 중견 화가들의 작품을 비롯해 남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남농 허건, 월전 장우성의 작품은 물론 피카소를 비롯한 외국의 유명 작가들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 딸에게 들려주는 아버지의 사랑 노래 특별한 공간을 마주한다. 먼저 세상을 떠난 딸 송이에 대한 사랑과 추억이 가득한 작은 집이다. 이 작은 집은 관람객들에게 묵상하며 기도하는 공간으로 활용될 것이라고 한다. 피아노 관련 잡지와 인형들이 빼곡한 방안 책꽂이에 딸 송이의 손때가 묻은 인형들과 연필로 그린 초상화도 놓여 있다. 서양화를 전공한 아들이 그려준 것이지요. 누나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자신의 골수를 이식해 주었던 아들은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현재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중견 화가이지요. 남궁 관장은 허수아비 철학이 담긴 허수아비 동화를 세상에 내놓기도 했다. 동화책의 주인공은 백혈병으로 하늘나라에 간 딸 송이다. 피아노를 전공한 딸 송이는 대학원에 다니던 26살에 갑자기 쓰러진다. 백혈병으로 밝혀져 파리에서 유학하고 있던 쌍둥이 남동생이 입국한다. 다행히 골수가 맞아 무사히 수술했지만 병이 재발한다. 한 차례 더 동생의 골수를 이식했으나 끝내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아빠 가진 거 있으면 그때그때 나눠줘. 지금 어려운 사람 굉장히 많아. 하나님이 언제 생명을 거둬 갈지도 모르는 일이야. 병실에 있던 딸의 당부였다. 기부를 준비하던 그는 딸의 부탁대로 백혈병 아이를 비롯해 어려운 이웃을 돕고 있다. 1947년 가평에서 출생한 남궁원의 인생은 녹록치 않았다. 전쟁으로 부친을 잃은 그는 삼촌 집에서 자란다. 유명 화가를 꿈꾸며 서울미대에 원서를 썼으나 강력한 반대에 부닥쳐 결국춘천교대에 진학한다. 인천교대를 거쳐 미술교사 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한 그는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과를 졸업하여 마침내 대학 강단에 설 정도로 강단과 집념이 대단하다.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에서 교사로 10년, 경원대학교 미대교수로 34년, 총 44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교육자의 길을 걸으면서도 남궁 작가는 한 번도 자신의 창작활동을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남궁원 관장은 44년 긴 세월을 교육자로서 우직하게 걸어 온 공로로 황조근정훈장을 수상한다.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부인 김순미씨는 작품 활동과 미술관 운영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든든한 동지다. 남궁미술관에서 펴낸 1968~2007 남궁 원 회화 40년은 작가 남궁원의 작품 세계와 남송미술관이 추구하는 지향점을 읽을 수 있는 화집이다. 남궁 관장은 대학에서 은퇴하던 2014년에 예술의전당에서 남궁원2막1장 전시회와 미술세계 갤러리에서 앵콜전을 열었다. 그의 작품의 일관된 주제는 허수아비다. 작가 남궁 관장에게 허수아비는 옛 시절의 아련한 향수이자, 자신의 작품세계를 구축한 예술관이다. 놀랍게도 그는 허수아비를 통해 삶의 철학을 세우고 인생의 방향까지 결정한다. 허(虛)는 비움과 나눔, 수(守)는 지킴, 아(我)는 키움, 비(非)는 세움이라는 의미입니다. 허수아비 철학은 내 안의 좋은 것은 나눔으로써 비우고, 나쁜 것은 버림으로써 비우자. 더불어 이 사회를 지탱하고 유지시켜주는 소중한 가치를 찾아 지키고, 마침내 참사람으로 바로 서자는 것이지요. 허수아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성을 인정받아 제5회 한국미술작가상, 제1회 통일미술대전 국무총리상, 2002년 코리아 아트 페스티벌 대상, 제5회 한국미술공로대상 등을 수상했다. ■ 허수아비에서 비움과 세움과 나눔의 미덕을 발견하다 남궁 관장의 이력도 화려하다. 서양화가로 대학교에서 34년간 미술과 교수로 재임했고 예총 경기도연합회장과 경기문화재단 이사, 경기도 문화예술위원, 안양문화예술재단 대표이사를 지냈다. 미술 인터넷방송-아트원 TV를 운영하며 미술계의 숨겨진 작가를 발굴해 작가의 작품세계를 대중에게 알리는 일에도 열심이다. 남송미술관은 지역의 문화예술발전을 위해 힘을 쏟고 있다. 허수아비 축제를 만들어 매년 전국아동미술제, 송이피아노콩쿨대회, 글짓기 대회 등 다양한 예술 행사를 열어 가평을 문화예술도시로 가꾸었다. 지역 작가들에게 작업실과 전시실을 제공하는 등 창작활동을 돕기 위해 지원하고 있다. 작가 소개는 물론 작품을 판매하는 일에도 적극 나선다. 남송미술관은 전통 회화에만 집착하지 않는다. 허수아비마을 곳곳에서 발견하는 조각을 비롯하여 미디어아트, 설치미술로 확장되고 있다. 끊임없이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남송미술관의 지향점은 허수아비 철학에 닿아 있다. 거꾸로 놓아진 사다리 그림 앞에서 그 의미가 무엇인지 들려주는 남궁 관장의 목소리가 따뜻하다.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사다리가 아니라 오르면 오를수록 넓혀져 가며 확장되는 사다리에 내일을 향한 희망의 메시지가 담겨져 있지요.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3. 안산 ‘종이미술관’

종이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을까? 책과 사진, 지폐와 신문, 휴지에 이르기까지 종이는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종이는 예술적 소재로도 탁월하다. 온갖 모습으로 변신을 잘하기 때문일까, 종이는 아이들과 유난히 친하다. 1층 체험장에 들어서니 모처럼 정겨운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자매가 가위로 둥글게 오린 색종이를 붙이고 있다. 그게 뭐니? 자매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포도를 만들어요. 멀찍이 간격을 띄운 건너편 책상에는 자매보다 나이가 더 어린 남매가 찢은 종이로 손거울을 장식하고 있다. 만들기에 심취한 아이들을 지켜보는 젊은 부부의 표정이 밝다. 안산 대부도에 자리한 종이미술관(관장 김은순)에서 아이들에게 놀이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스마트폰조차 빼앗지 못하는 것이 아이들의 그림이며 만들기이다. 문화학자 호이징가의 말처럼 인간은 놀이하는 인간(호모 루덴스)인 것이다. 어릴 적 우리가 그랬듯이 아이들은 종이와 친하다. 접고, 찢고, 구기고, 오리고, 색을 물들이고, 불에 태우고, 물에 불리고, 잇고 붙여 아이들은 자신만의 세계를 표현한다. 종이의 무한한 쓰임과 변신을 보고 체험할 수 있는 종이미술관은 어린이미술관, 공예품 만들기 체험장과 한옥 체험장을 갖추고 있다. 다양한 전통놀이시설을 갖춘 미술관 마당은 잔디도 깔려 있어 아이들이 맘 놓고 뛰어놀기에 좋다. 도시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경험해보기 어려운 한옥체험도 특별한 재미를 준다. 한옥의 대청마루에 누워 한옥의 재료를 살피다 보면 벽과 천장은 물론 방바닥까지 한지로 마감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한지는 한옥의 옷인 셈이다. ■ 종이로 아이들의 예술적 감각과 상상력을 깨우다 미술관에 들어서면 눈길을 사로잡는 두 가지 인상적인 설치미술과 마주하게 된다. 하나는 엘리베이터 옆에 설치한 장미꽃이다. 종이가 이처럼 아름다운 장미꽃으로 변신할 수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또 하나는 카페로 이어지는 복도를 가득 채운 수천 마리의 종이학이다. 학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관람객의 모습이 보인다. 최재혁 대표를 따라 2층에 있는 제1전시관에 들어선다. 2021 안산종이문화축제 기획 초대전 닥종이 인형의 해솔길 나들이가 열리고 있다. 강명순의 조각배는 조각달을 배경으로 웃통을 벗어젖힌 세 아이가 배 위에 앉아 있는 풍경을 표현한 멋진 작품이다. 김진희의 달마중도 재미있다. 커다란 보름달을 배경으로 장대를 든 오빠와 그 뒤를 따르는 여동생과 바둑이가 등장하는 이 작품을 비롯해 김현희의 파랑새, 김현경의 꿈꾸는 비단마, 김인숙의 왕과 왕비, 김미순의 보부상, 박혜순의 새참, 박경애의 비 오는 날, 범인자의 친구, 안설영의 그리운 얼굴, 이선화의 의좋은 형제, 이초연의 불꽃, 장덕희의 고릴라와 아이, 허소라의 해바라기 등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밝고 푸근하다. 길가에 채소를 벌려놓고 파는 노점상인 늙은 어머니를 표현한 송숙희의 울엄마에 등장하는 노모의 주름진 표정조차 환하다! 고단하고 삭막한 현실에 한 줌 위안을 주려는 작가들의 마음일 것이다. 이웃한 대부고등학교 학생들의 한지의상 작품전은 한지예술이 너무 먼 당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한지를 다루는 학생들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옥상 정원에 올라 대부도의 풍광을 감상하는 시간도 가진다. 최 대표가 야트막한 산 너머를 가리킨다. 저기 살짝 보이는 작은 섬이 제부도입니다. 어린이미술관인 제2전시관은 입구부터 아이들이 좋아하는 소재들이다. 토끼와 공룡 같은 동물과 쇠똥구리 같은 풍뎅이, 만화영화로 익숙한 로봇들이 반긴다. 닥종이로 만든 종이인형을 여기서 다시 만난다. 뒷짐을 지고 앞서가는 할아버지와 호박을 머리에 인 할머니를 흉내 내며 따라가는 손자와 손녀들의 표정이 즐거운 울하부지할머니란 작품이다. 옛사람들은 종이를 꼬아 바구니, 요강 같은 생활용품을 만들었다. 지금도 계승되고 있는 지승공예품에 한국인의 미적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천년을 간다는 한지를 만드는 과정을 소개하는 코너도 재미있다. 닥나무를 잘라 솥에 넣고 쪄 껍질을 벗기고, 검은 빛깔의 겉껍질을 벗겨내어 백닥을 만들어 씻고 말린 다음 다시 백닥을 삶아 표백하고 티를 골라내고 방망이로 두드려 잘게 만들어 물통에 풀어 넣고 대발로 한지를 떠 물을 빼고 건조시켜 다듬는 과정이다. 물론 등장인물을 비롯한 다양한 소품들은 모두 한지로 만든 것이다. 해마와 함께 잠수복을 입은 두 사람이 바닷속을 살피는 시원한 풍경이 등장한다. 물결에 흔들리는 산호초와 물고기를 쫓는 상어, 낙하산을 펼친 듯 말미잘 무리가 비상하고 있다. 바다 풍경을 보면서 잠시 무더위를 잊는다. 어린이미술관은 어른들도 동심에 젖어들게 한다. 정원에 나가면 나무와 꽃, 야외 조형작품이 어우러진 잔디마당이 펼쳐진다. 잔디마당에 마련된 전통놀이 체험장에서 고무줄놀이, 팽이치기, 사방치기, 천렵, 연날리기, 줄넘기, 비석치기, 윷놀이, 썰매타기, 숨바꼭질, 사물놀이, 백중놀이, 굴렁쇠, 바람개비. 제기차기 같은 전통놀이를 체험해 볼 수 있다. 체험장을 다시 둘러본다. 역시 아이들이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다. 아이들은 손으로 만지며 만들어보는 체험을 좋아한다. 일정한 비용을 내면 곰돌이 손거울, 산타요정, 종이 선인장, 라벤더 꽃병, 공주인형, 축구공저금통, 미니보석함, 도라지꽃 화분, 콩나물, 시루, 움직이는 강아지와 말, 춤추는 로봇 등 정말 다양한 작품을 전문 강사의 지도를 받으며 만들어 볼 수 있다. 물론 한지뜨기도 체험할 수 있다. 10명 이상의 성인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이 특별한 체험은 1주일 전에 예약해야 가능하단다. ■ 재미있어 다시 찾는 미술관 종이미술관은 문을 연 지 7년 되었다. 최 대표는 학교나 문화센터에 종이를 공급하면서 종이미술관을 설립할 뜻을 세우고 자금을 마련했다. 종이문화가 더 이상 발전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조바심, 소중한 우리의 자산이지만 사라져갈 것이기에 보존하고자 하는 바람이 그를 행동하게 만들었다. 종이를 주제로 한 작품 공모전을 열고, 15년 이상 작품을 모았던 것이다. 그가 기획한 몇 차례의 전시회는 2만명의 관람객이 찾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관의 지원을 받는 행사는 연속성을 갖기 어렵다는 현실의 벽에 부닥친다. 시장이 바뀌면 행사가 사라졌던 것이다. 미술관을 세우기로 작정한 또 하나의 이유는 지속적인 사업을 펼치기 위함이었다. 15년을 준비한 그는 마침내 8년 전에 땅을 매입하고 바로 공사에 들어갔다. 돈이 있다고, 예술을 사랑한다고 미술관을 운영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미술을 전공하여 관장을 맡은 부인과 호흡을 맞춰 성공적으로 미술관을 운영하지만 어려움도 적잖다. 쾌적하고 산뜻한 미술관을 꾸미려면 남모르는 어려움을 감수해야 한다. 넓은 잔디마당을 가꾸고 있는 그는 이 더운 날에도 풀을 뽑아야했다고 털어놓는다. 주말이나 공휴일에도 쉴 수가 없다. 그럼에도 즐겁게 일하고 있다. 작지만 재미있는 미술관, 다시 찾고 싶은 미술관으로 기억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요. 관람객들이 와서 멋지다고 감탄할 때, 아이들이 집에 안 가려고 할 때, 다음에 또 오겠다고 약속할 때가 가장 즐겁습니다. 종이미술관이 자리 잡은 대부도는 자연문화유산도 풍부하다. 섬이 마치 큰 언덕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은 대부도는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소나무와 모래사장이 아름답다. 문화유산도 풍부한데, 미술관과 가까운 대남초등학교는 가수 이미자가 부른 섬마을 선생님의 무대이다. 그래서 붙여진 길 이름이 섬마을선생님 해당화길이다. 더위가 가시고 걷기 좋은 계절이 돌아오면 대부도를 찾아 종이미술관을 둘러보고 섬 둘레길을 느릿하게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2.김포 보름산미술관

대규모 고층 아파트 단지 맞은편에 아담한 산속에 보름산미술관(관장 장정웅)이 자리 잡고 있다. 경기도 김포시 고촌읍 수기로 100-78 보름산미술관 앞마당과 건물 벽과 지붕도 보름달처럼 둥글다. 양옥과 한옥을 결합한 듯 독특한 미술관 건물 곳곳에서 흥미로운 조각을 발견한다. 용과 당초무늬와 연꽃, 사람의 얼굴 등 온갖 문양이 새겨진 조각은 바로 기와지붕을 지키고 있는 망와(望瓦)다. 미술관을 장식하는 수백 개의 항아리와 아담한 숲길에 묵묵히 서 있는 석인(石人)들의 표정이 넉넉하다. 장정웅 관장과 마주 앉았다. 여든에 가까운 연세지만 정정하시다. 미술관 이름을 보름산으로 지은 까닭이 궁금하다. 미술관 맞은편에 보름달처럼 생긴 작은 동산이 있었지요. 언덕 같은 작은 산이지만 정말 보름달처럼 둥글었던 보름산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요. 그 대신 미술관의 이름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남게 된 것입니다. 그림과 인연을 맺은 사연도 들려주신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 교사였던 부친의 심부름으로 풀무원 설립자인 원경선 선생 댁을 방문했다가 현관에서 운명처럼 한 폭의 그림과 만났지요. 소년이 만난 것은 한국 근대 화단의 거장 소정(小亭) 변관식(1899~1976)의 작품이다. 화가의 꿈을 키우던 소년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소정을 찾아가 배움을 청한다. 스승은 어린 제자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붓은 칼이다. 아주 날카로운 송곳 같은 칼이다. 날카로운 붓 칼을 들고 화선지를 자르고 찌른다는 생각으로 선을 그려라. 한국화의 기본을 충실히 익혀 홍익대 미대에 입학한 그는 동양화와 함께 건축을 배운다. 화가의 길을 반대한 부친과의 타협안인 셈이다. 당시 홍대 미대에서는 김중업, 김수근 등 한국 건축계의 대가들이 학생들을 가르쳤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의자를 만드는 회사 애신을 설립하여 100명의 사원을 거느린 중견기업으로 키웠으나 그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사업할 때 그림을 잊기 위해 전시장은 물론 신문 문화면도 넘겨보지 않았던 그는 석 달을 깊이 고민하다가 완강히 반대하는 부친을 석 달에 걸쳐 설득하고, 사업을 같이 시작했던 사원 세 사람에게 자신의 뜻을 밝히며 이들에게 16년 동안 가꾸었던 회사를 넘기고 빈손으로 나온다. 이 무렵 장정웅이 이상하다, 돌았다는 소문까지 퍼졌다고 한다. 벽장 속 깊이 방치했던 벼루와 먹 화구를 찾아낸 그는 전국을 돌며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렸다. 당시 즐겨 그린 소재는 유년의 추억이 깃든 바닷가의 풍경이다. 한동안 수석의 매력에 빠져 지내기도 하던 그는 1978년부터 망와와 30여 년간 열애에 빠진다. 이때 모은 것이 300여점이나 된다. 대학원에 진학한 장 관장은 고건축의 망와에 나타난 미의식에 대한 연구로 학위논문을 쓰고 미술관 설립을 준비한다. ■ 미술관이 설립되기까지 장다운 학예사를 따라 전시실에 들어선다. 천장에 매달린 광목천에 추상화 같은 그림이 새겨져 있다. 망와를 단순화한 이미지들인데 오랜 이웃들의 얼굴처럼 평안하다. 망와는 보름산미술관의 주요 소장품이죠. 암키와와 수키와로 지붕을 엇갈려 덮은 우리나라 전통 한옥 지붕의 마무리를 망와로 하지요. 보세요. 도깨비 형상의 망와 눈에 깨진 도자기 조각을 박아 넣었습니다. 달빛을 받으면 번쩍여서 귀신의 범접을 막는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해설을 들으며 집주인과 도공이 나누었을 대화를 상상해 본다. 미술관은 본관(지상 2층)과 별관(1층), 그리고 별도의 교육 시설과 사무동으로 나누어진다. 전시장과 교실, 카페와 서점으로 공간을 나누어 지역 커뮤니티 형성을 위한 복합문화시설로 사용하고 있다. 미술관의 주요 전시공간이 달과 해로 나뉜 것도 재미있다. 입구에 위치한 SPACE 달은 망와를 모티브로 한 작품들을 비롯해 미술관의 소장 작품들을 상설 전시하는 공간이다. 철도 받침목으로 만든 계단으로 올라서면 보이는 SPACE 해에서는 회화나 사진을 비롯한 평면미술 작품을 주제로 하는 기획전이나 특별전이 열린다. 다시 한 층으로 오르면 카페와 서점이 나타난다. 카페를 비롯해 미술관에 놓여 있는 의자들도 모두 장 관장이 손수 만든 작품이다. 오랫동안 합창단으로 활동할 정도로 노래를 좋아하고 가곡과 클래식 애호가이다. 개관 기념일인 5월30일이면 매년 작은 음악회를 여는데 지역주민들에게 인기 만점이란다. 보름산미술관은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지역의 문화커뮤니티로 자리매김하겠다는 뜻에서 내린 결정이다. ■ 가족이 만들어가는 지역문화 소통의 공간 고즈넉한 산책로를 거닐며 자연을 만끽할 수 있다. 윤원규기자 장큰별 학예연구실장과 장다운 전략연구소장은 장 관장의 뜻을 잇는 아들 형제다. 교육자였던 부친의 헌신과 강직함을 이어받은 장 관장의 두 아들도 아버지의 뜻을 잇고 있다. 디자인하우스 편집팀장으로 일하던 장다운 소장은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회사에 사표를 내고 보름산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보름산미술관의 전략과 전술을 짜는 사령탑을 맡은 셈이다. 기존의 전시 기능과 교육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미술관을 중심으로 넓은 의미에서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을 하길 바랍니다. 지역주민들이 갖고 있는 콘텐츠를 개발시켜주고 그것들을 네트워크 시키는 것이지요. 모두의 바람처럼 미술관이 소통의 공간이 되고 재미있는 동네가 되길 희망해요. 미술관 식구들은 지역사회를 위한 미술관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2021년 지역문화예술 플랫폼 육성사업으로 현재 진행하고 있는 전시회는 장안의 화제(?題) 고요한 휴가이다. 서울대학교 동양학과 출신의 김다운, 김유정, 김지민, 김지원, 이승은 등 5명 작가의 작품을 모은 것이다. 그림의 주제가 고요한 휴가란다. 코로나 시대를 반영하는 작품들이어서 그럴까, 색이 차분하고 선이 부드럽다. 보름산미술관은 꾸준히 소식지를 펴내고 있다. 38호까지 발행된 소식지를 살펴보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한다. 2021년이란 서기 대신에 을미년 신축년을, 몇 월 며칠 대신에 청명, 망종, 입하 같은 24절기가 적혀 있다! 여기서도 한국적인 것을 고집하는 보름산미술관의 철학을 확인할 수 있다. 3대를 잇는 기독교인 장 관장은 서양 흉내를 낸 종교화가 십자가가 자신의 마음에 가깝게 와 닿지 않았다며 특별한 작업을 벌였다. 짚, 풀, 소나무, 버드나무 같은 친근한 재료를 가능한 한 그대로 사용하여 십자가의 절망과 부활의 기쁨을 표현한 작품을 제작하여 한없이 낮은 자-장정웅 십자가 작품전(2016)을 열었던 것도 이런 믿음 때문이다. 그는 힘주어 말한다. 우리의 미감으로 우리 것, 우리 신앙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무술년 입하에 펴낸 소식지 26호에서 재개발로 지금은 사라져 버린 보름산 흑백사진과 장 관장이 쓴 수필 나의 살던 고향은?에 실려 있는 사연이 먹먹하다. 미술관이 서 있는 자리 50여m 앞에 있던 보름산이라는 아주 작은 언덕이 사라졌다. 너무 작아서 산처럼 보이지도 않지만, 예전 동네 사람들은 바가지를 엎어 놓은 것처럼 둥글고 불룩한 이 산을 보름산이라는 복스러운 이름으로 불렀다. 보름산미술관이라는 이름도 보름산에서 따 온 것이다다들 보름산미술관이 자리한 산자락을 당연히 보름산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백남준 선생이 비디오 아트라는 장르를 새롭게 미술사에 남겼다면 보름산미술관은 엉뚱하게도 지도 위에 보름산이란 지명을 새롭게 남겼다고나 할까. 올해로 개관 12주년을 맞은 보름산미술관을 가꾸어 가는 사람들은 장정웅 관장을 비롯하여 장다운, 이기준, 장큰별, 김민경, 이아람까지 모두 여섯이다. 보름산미술관 학교를 소개하는 글에 담긴 미술관의 지향점은 미술이 친구이자 재미있는 놀이터가 되는 것이란다. 이미 그래 왔던 것처럼 이웃들이 마실 나서듯 편히 찾아와 즐겁게 놀다가는 보름달처럼 넉넉한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1.포천 '한탄강 세계지질공원센터'

포천(抱川)은 시내를 품은 고을이라는 뜻이다. 강원도와 경계를 이루는 포천과 연천(漣川)에 시내를 가리키는 천(川)자가 들어 있다. 두 도시 이름에 나란히 들어 있는 천(川)은 한탄강(漢灘江)을 가리킨다. 북한 평강군 추가령에서 발원하여 철원을 거쳐 포천을 감싸며 흐르는 한탄강은 연천에서 임진강과 만나 서해로 흘러든다. 한탄강을 우리말로 풀어쓰면 큰 여울의 강이다. 주상절리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협곡 사이를 세차게 흐르는 한탄강은 래프팅하기에 적격이다. 일반 강과 달리 물길이 뭍에서 움푹 꺼져 들어간 한탄강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풍광은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었다. 50만년에서 13만년 전 사이에 북한 강원도 평강군의 오리산과 680고지에서 여러 차례 화산이 폭발하면서 분출한 용암이 옛 한탄강을 따라 철원, 포천, 연천 지역을 거쳐 임진강까지 110㎞를 흘러내리면서 만들어진 평평한 현무암 용암대지 위로 수십만 년을 흘러간 강물은 현무암을 깎아내고 20~40m의 깊은 협곡을 만들어낸다. 기둥모양의 현무암 주상절리 협곡을 비롯해 베개용암, 하식동굴과 같은 중요하고 아름다운 지형을 간직한 한탄강은 오랫동안 숨겨진 보배였다. 마침내 2015년에 국가지질공원으로 인정을 받고 2020년 7월에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등재되면서 한탄강은 비로소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유네스코 지질공원은 단일의 통합된 지리적 영역으로서 국제적인 지질학적 가치를 지니는 명소에 대해 경관의 보호, 교육, 연구,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전인적인 개념을 가지고 자연자원 및 문화자원과 연계하여 이용하는 곳이다. 유네스코가 인증한 세계지질공원은 2020년 기준으로 44개국에 161곳 있는데, 한국은 한탄강을 비롯하여 제주도(2010), 청송(2017), 무등산권(2018) 등 4곳이다.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은 한탄강의 지질과 생태는 물론 역사와 문화에 이르기까지 한탄강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곳이다. ■ 신비롭고 아름다운 한탄강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곳 2019년 4월에 개관한 한탄강 세계지질공원센터는 포천시 영북면 비둘기낭길에 자리 잡고 있다. 중복을 하루 앞둔 20일에 한탄강 세계지질공원센터를 찾았다. 화요일은 휴관일이라 방문이 망설여졌지만, 조한섭 팀장과 계영진 학예연구사는 관람객이 없어 안내하기에 더 좋다며 필자를 안심시킨다. 지질에 관한 지식이 부족하니 초등학생을 안내하듯 쉽게 설명해줄 것을 당부한다. 용암이 흐르기 이전의 암석과 지질, 용암과 하천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진 주상절리 협곡, 하식동굴, 폭포 등 한탄강이 간직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계영진 학예연구사의 친절한 설명에 이내 빠져든다. 집중해서 들으니 슬슬 귀도 열린다. 아시아에는 없다던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발견되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전곡리 선사유적지는 한탄강이 안겨준 보배 같은 선물이다. 역사 속에 등장하는 한탄강 이야기도 재미가 쏠쏠하다. 한탄강 곳곳에 후삼국의 영웅 궁예의 이야기가 남아있는 것은 태봉의 수도가 포천에서 가까운 철원이기 때문이리라. 현재진행형인 한민족의 최대 비극이라 할 분단은 역설적으로 한탄강의 생태를 잘 보존해 주었다. 멸종위기의 동식물들을 품어주었던 한탄강의 아름답고 건강한 자연환경은 포천의 자랑이자 미래다. ■ 생태와 인물이 어우러져 풍성한 이야기를 만들다 한탄강 지질생태 전시관은 한탄강의 과거와 현재를 담고 있는데 지질관, 지질문화관, 지질공원관으로 구분되어 있다. 용암이 만든 강이란 이름의 지질관은 지금의 한탄강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지질과 암석들을 보여준다. 용암이 흘러내리는 화산모양의 설치물이 시선을 끈다. 화성암을 구분하는 기준을 알려주고, 버튼을 눌러 가상으로 화산폭발 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제작한 전시물이다. 티타늄을 함유하고 있는 함티타늄자철석과 국내 3대 화강석의 하나인 포천석이 눈에 들어온다. 건축 재료로 널리 쓰이는 화강암은 마그마가 지하 깊은 곳에서 천천히 식어 만들어진 것이다. 반면, 곡식을 빻고 가는 데 사용했던 절구와 맷돌은 마그마가 지표 부근에서 빠르게 식어 만들어진 현무암으로 만들었다. 국내 최대 규모의 주상절리 협곡의 풍광은 사진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머리에 베고 자는 베개처럼 생긴 베개용암은 내륙에서는 세계적으로도 보기 힘든 것이란다. 현장에서 실물로 보면 더욱 좋을 것 같다. 화산재가 굳어져 만들어진 응회암으로 제작한 포천만의 고인돌도 눈길을 끈다. 삶이 흐르는 강이란 이름을 붙인 지질문화관은 한탄강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곳이다. 한탄강 주변에는 구석기ㆍ신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후삼국시대 한탄강을 호령했던 태봉국 궁예 이야기, 조선시대 한탄강의 풍광에 반해 그림을 그린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의 그림도 볼 수 있다. 한탄강은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끊임없이 찾았던 곳이다. 다시 태어난 강이란 이름을 가진 지질공원관은 한탄강의 현재 모습을 보여준다. 얼마 전까지 한탄강은 상수원보호구역,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묶여 사람들의 출입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생태와 지질이 잘 보존 되었다. 특히, 수달과 어름치 같은 천연기념물을 비롯해 멸종위기의 분홍장구채, 광릉요강꽃 같은 식물들이 사는 생태계의 보고이다. 철원-포천-연천을 가로지르는 한탄강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사랑을 받는 공간이 될 것이다. 한탄강은 협곡 위에서 보는 경관도 멋있지만 협곡에서 주변을 둘러보는 풍경은 더욱 멋있다. 여름철에 래프팅을 즐기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시간이 없다면 1층에 있는 4D 협곡탈출 라이딩 영상관을 빼놓지 말 것이다. 한탄강에서 소곤소곤은 지질센터가 펴낸 창작동화책의 제목이다. 계영진 학예연구사가 이 책이 발간되기까지의 과정을 들려준다. 한탄강의 캐릭터인 진이(응회암), 탄이(현무암), 천이(화강암)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 만들어졌지요.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지역의 초등학생들이 미술작품으로 동화장면을 만들었고, 이야기와 장면을 엮어 동화책 한탄강에서 소곤소곤이 탄생한 것입니다. 동화책이 완성되기까지 임미현 씨를 비롯한 여러 교사와 그림을 그린 학생들, 지질과 역사를 연구하는 지질센터의 연구자들까지 공동으로 제작한 방식과 과정이 감동적이다. ■한탄강, 다시 태어나다 지질공원센터 근처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537호인 비둘기낭 폭포를 비롯해 대교천 현무암 협곡, 고남산 자철석 광산, 지장산 응회암, 교동가마소, 멍우리 협곡, 구라이골, 포천 아우라지 베개용암, 백운계곡과 단층, 아트밸리와 포천석, 예부터 명승지로 이름 높았던 화적연은 꼭 챙겨 봐야 할 지질명소이다. 한탄강을 품은 포천은 인문학의 산실이자 보고이기도 하다. 살아서는 포천 가야 양반이고 죽어서는 장단 가야 양반이다라는 옛말이 있듯이 포천시에는 예로부터 이름난 선비와 대학자들이 많이 살았다. 특히 정조시대에 북학파로 활약하며 중국까지 이름을 떨친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는 포천을 사랑한 대표적 인물들이다. 영평현령을 지낸 박제가는 다산 정약용과 종두를 연구하여 최초로 시술한 인물로 영평에서 조선의 개혁안을 담은 진북학의를 저술하여 정조에게 올렸으며, 이덕무?박제가와 함께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한 조선 최고의 무사 백동수와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친 이서구도 포천에서 살았다. 한탄강은 이제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명소로 거듭나고 있다. 지난 4월16일, 한탄강 지질공원의 남북 공동조사 기본계획 수립 연구용역의 중간보고회가 경기도 북부청사에서 열렸다.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을 운영하는 경기도와 포천시와 연천군, 강원도와 철원군의 관계자들이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의 발전과 확대 방안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한탄강의 발원지인 북한권역에 대한 조사의 필요성이 제시되었다. 포천시는 지난해에도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의 지속 가능한 발전 목표라는 주제로 국제학술심포지엄을 열었는데, 이때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포럼은 한탄강의 초국경 지질공원 추진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포천시의 시정목표가 평화로 만들어가는 행복의 도시이다. 한탄강이 품은 자연과 문화를 남북이 공동으로 연구개발한다면, 세계지질공원센터는 지질과 평화의 전파지로 한국인은 물론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 지질센터로 거듭날 것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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