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도박 사이트

"학교 반장·조회도 일제 잔재라고요?"

학교 반장, 조회, 주번이 일제강점기 시절의 잔재인 줄 전혀 몰랐어요. 14일 오후 1시 화성시 반송동 동탄복합문화센터 1층 로비에 마련된 일제 잔재 청산 보도전. 이곳을 찾은 시민들이 말없이 벽 한편에 전시된 동영상을 바라보고 있다. 동영상에 떠오른 농민층을 몰락시켰다, 과거의 교훈을 되돌아보는 거울로 등의 기사와 사진들이 눈길을 끌었다. 몇 번의 터치로 기사를 넘겨 볼 수 있는 키오스크(무인 단말기) 역시 보도전을 찾은 시민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시민들은 휴학계와 간담회도 일본식 한자어였네, 운동장 구령대와 교내 태극기도 일제 잔재구나라며 단말기 앞에서 발걸음을 떼질 못했다. ㈔경기문화관광연구사업단 주관으로 열린 일제 잔재 청산 보도전은 오는 21일까지 진행된다. 운영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앞서 사업단은 지난달까지 생활 속 일제잔재, 알아보고 알리고 없애고라는 대주제 아래 총 10차례의 기획보도를 경기일보에 게재했다. 이후 게재된 기사 내용을 더 많은 도민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보도전을 마련한 것이다. 이번 보도전은 ▲생활 속 일본 유래어 ▲문화재 일제잔재 ▲문화재 무형의 일제잔재 ▲식민문화 청산방법 등 4가지 주제에 맞춘 8개 기사를 디지털 방식으로 전시했다. 터치식 무인 단말기 형태로 전시된 기사들은 이용자들이 직접 신문을 보듯 버튼을 눌러 페이지를 넘겨볼 수 있다. 또 영상화된 기사ㆍ사진들도 도서관을 찾은 시민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보도전을 찾은 시민들은 평소 인지하지 못했던 유ㆍ무형의 일제 잔재들을 발견, 뜻깊은 시간이 됐다고 평가했다. 이날 보도전을 관람한 정훈진씨(61)는 공란(空欄)이나 당분간(當分間), 내역(內譯)도 평소 자주 사용하던 말들인데, 이렇게 많은 단어가 일제 잔재였는 줄 몰랐다면서 의식하지 않고 사용되는 일제 잔재 용어들이 많다는 걸 이번 보도전을 통해 알게 됐다고 말했다. 문화센터를 찾은 김송연씨(38ㆍ여)도 해방된 지 75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일제강점기의 유ㆍ무형문화재가 남아 있다면서 이런 뜻깊은 보도전이 더 활성화돼 많은 사람이 일제 잔재에 대한 현실을 알게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번 보도전은 오는 20일까지 수원시 선경도서관에서도 만날 수 있다. 보도전은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로 인해 입구에서부터 열 체크, 손 소독 등 코로나19 방역 지침을 지키는 가운데 진행되고 있다. 장건기자

[생활 속,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 대한민국의 ‘독버섯’

■ 친일파는 어떤 의미인가 타율적인 개항으로 우리 근대사는 외세 침탈과 민족적인 수난으로 점철됐다. 결과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식민 지배라는 치욕스럽고 비극적인 망국의 역사를 맞았다. 가혹한 식민통치에 따른 인적물적 피해는 상상하기 힘들 만큼 후유증을 남겼다. 반만년 찬란한 역사가 왜곡되는 가운데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이나 자긍심도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 자기 비하에 가까운 자괴심과 모멸감은 민족 장래에 대한 희망마저 깡그리 무너뜨렸다. 식민통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사람들을 흔히 친일파라고 한다. 일제가 동아시아 각국을 침략할 무렵 이에 가담하여 저들의 정책을 지지하거나 추종한 세력이 바로 친일파다. 일제의 식민지배와 광복 이후 이들은 반민족행위자로서 비난의 대상이었다. 특히 일제가 침략하거나 전쟁을 일으킨 지역의 국가에서는 부정적인 뜻을 담고 있다. 흔히 부일파(附日派), 종일파(從日派), 종일주의자(從日主義者)라고도 한다. 친일파라는 용어는 시대에 따라 뜻이 약간 달랐다. 이는 대한제국 성립을 전후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당시 친일파나 친일개화파는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을 개혁의 모델로 삼았던 정치 집단을 의미하였다. 을사늑약에 즈음하여 친일파는 일제 침략에 앞장서서 민족을 배반해 자신의 일신 영달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뜻으로 바뀌었다. 광복 이후 1948년에 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에서는 일본정부와 통모해 한일합병에 적극협력한 사람, 민족 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본 침략주의와 시책 수행에 협력한 사람, 독립을 방해하는 활동을 행한 사람 등을 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다. 친일파는 현재 친미파나 친영파와 같은 순수한 의미가 아니라 민족의 안위에 피해를 끼친 사람들을 지칭하는 부정적인 역사적 용어로 정착됐다. 친일파의 기준이나 범위에 대한 논란은 현재 진행형이다. 생존을 위해 소극적이거나 수동적인 협력을 한 사람도 이러한 범주에 포함할지 하는 문제가 쟁점 중 쟁점이다. 다만 이에 해당된 사람도 이후에 뚜렷한 항일투쟁이 행적이 확인되는 경우에 제외한다. ■ 친일파는 어떻게 분류하나 친일행위의 성격에 따라 친일파는 크게 지주자본가, 지식인, 종교인, 언론인, 경찰관료군인 등으로 분류한다. 친일 지주자본가들은 국방비비행기헌납금품헌납총독열전각(總督列傳閣) 건축 등 친일행위에 앞장섰다. 한편 도부읍면 의원이 되거나 친일단체 등에 가입선동하는 경제적인 수탈에 적극 동조했다. 민족 지성을 대표하는 지식인들도 친일행위에 나섰다. 이들은 조선문예회조선문인협회조선임전보국단국민총력조선연맹 등의 친일단체에 가입하여 각종 행사에 참가해 지원병학병 지원을 선동했다. 강연방송좌담회담화발표 등을 통해 내선일체황도정신 고취, 총력체제의 생활화나 내핍을 강조했다. 시소설수필논문 등의 친일작품을 썼다. 미술가 음악가 중에는 일제의 전시체제에 전쟁동원 분위기를 조성하는 그림이나 노래를 보급했다. 역사학자들은 식민사관에 입각해 한국사를 왜곡하는데 동참했다. 언론인과 교사 등도 일제 승리를 편파 보도하거나 알리는 등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지식인의 친일행위는 자기정체성 부정과 왜곡된 민족의식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식민통치의 말단 집행 요원인 경찰에 충원된 한국인들은 민족말살정책과 수탈정책을 직접 집행했다. 한국인에 대한 인적물적 수탈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사상범 등의 검거색출투옥고문을 자행했다. 직접적인 악행은 한국인 경찰에 의해 시행되어 민족 분열을 획책하는 결과로 귀결됐다. 관료층은 고등문관 출신의 고급관료와 면장면서기 등 말단관료로 구분된다. 고등문관 출신의 관료는 군수변호사검사 등을 하면서 식민체제에 기생하는 존재로 고등경찰과 함께 친일파의 대표적 존재였다. 말단 면장면서기와 동회직원들은 경찰과 협조해 식민통치의 인적물적 수탈정책을 직접 도우거나 집행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또는 만주군관학교 출신들과 같은 자발적으로 일제에 복무한 장교들은 대표적인 친일파 군인이다. 물론 일본 군인이 된 사람 중 민족의식을 가지고 항일운동과 연계한 경우도 있었다. ■ 전쟁협력단체로 전시체제 안전망을 구축하다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민간단체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정치적 성향이나 활동과 관계없이 조금이라도 민족적 색채를 지닌 단체는 내선일체를 구실로 해산시켰다. 이에 비례해 상당수 민간단체가 새롭게 조직됐다. 외형상 민간단체를 표방했으나 사실상 일제의 필요에 의한 조직된 전쟁협력단체였다. 대표적인 단체는 애국금차회지원병후원회대화숙황도학회조선임전보국단국민동원총진회대화동맹국민동지회 등이다. 정세 변화에 따라 급조된 단체로 활용 가치가 떨어지면 곧 해산되거나 국민정신총동원연맹과 국민총력조선연맹에 흡수됐다. 조선임전보국단은 한국인 유력자를 최대한 동원해 도별로 발기인을 구성하여 결성했다. 목적은 첫째로 아등은 황국신민으로서 황도정신을 선양하고 사상통일을 기한다. 둘째로 아등은 전시체제에 즉(卽)하고 국민생활의 쇄신을 기한다. 셋째로 아등은 근로보국의 정신에 기초하여 국민개로의 실을 거두기를 기한다. 넷째로 아등은 국가 우선의 정신에 기초해서 국채의 소화, 저축 이행, 물자 공출, 생산 확충에 매진하기를 기한다. 마직막으로 아등은 국방사상의 보급을 하는 동시에 유사시에 의용방위의 실을 거두기를 기한다.는 등이었다. 태평양전쟁 이후에는 한국인의 시국인식 강화와 전쟁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한 전방위적인 선전활동에 지식인과 종교인 등을 동원했다. 가장 일반적으로 활용한 선전 수단은 바로 시국좌담회였다. 좌담회 주요 내용은 전쟁의 원인과 진행 과정, 동양에서 일제의 위치, 구미 각국의 상황 등이었다. 특히 친일 지식인들은 민족 차별에서 벗어나 진정한 제국 신민이 될 수 있다는 논리에 빠져들었다. 식민지인이 아니라 제국 신민으로서 당당한 지위를 누릴 수 있다는 인식이었다. ■ 일제 잔재 청산은 우리 내면을 성찰하는 기회다 34년 11개월 동안에 걸친 세계사상 유례를 보기 힘든 가혹한 식민지배통치로 우리는 막대한 경제적 수탈과 강제동원으로 물적인적 피해를 입었다. 가시적인 피해보다 깊은 상처는 한민족 정신세계였다. 민족문화외 민족의식은 일제의 치밀한 계획 아래 말살오염됐다. 물질적 피해는 복구하기는 쉽다. 반면 한번 훼손된 정신문화를 온전히 치유하는 데에는 지속적인 노력과 아울러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해방 75돌에 즈음해 우리가 일제 잔재 청산을 외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건전한 정신문화 계승과 진전은 한류 열풍과 더불어 인류의 보편적인 실현하는 디딤돌로 다가오리라. 이제부터라도 모두 나서서 왜곡되고 오염된 민족문화의 온전한 복원에 동참하자. ■ 프랑스 사례를 거울로 삼자 우리 사회는 아직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한 잘못된 과거사 문제가 현안으로 대두되고 있다. 반면 나치지배를 받았던 유럽 각국은 부역자 처벌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프랑스, 벨기에,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등은 독일 치하에서 벗어나자마자 나치협력자들을 철저하게 처리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가해국인 독일도 1946년 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 등을 통해 나치지도부를 숙청했다. 서독이 승전국 서방국의 대열에 성공적으로 합류할 수 있었던 배경도 여기에서 찾아진다. 각국에 피해를 준 나치 전범을 철저히 처리해 후유증을 최소한으로 줄였기 때문이다. 국가와 민족을 배반한 나치 협력자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그들이 만든 썩은 종양이 결국에는 나라를 모두 부패시켜 프랑스를 망하게 만든다 국가는 애국적 국민에게 상을 주고 민족을 배반한 범죄자에게 벌을 주어야만 비로소 국민들을 단결시킬 수 있다. 프랑스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논리로 강력하게 주장했다. 프랑스는 국민과 정부에 의해 나치 협력자들에 대한 합법적인 처단이 행해졌다. 파리를 수복한 레지스탕스는 독일군이 물러간 뒤 이들을 재판하지 않고 처형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 개인적인 복수 등의 불합리한 면도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드골 정권이 들어선 이후 부역자들에 대한 즉결처분은 금지됐다. 당시 나치 협력자로 규정된 사람은 다음 3가지였다. △자유 박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프랑스의 패배를 악용한 투항주의자들. △프랑스 국민을 악의 길로 잘못 인도한 비시정권의 고위 관료들과 추종자. △나치 독일의 승리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협력한 사람. 최고재판소와 숙청재판소에 체포돼 조사받은 사람은 99만명, 5만7천100여건, 7천여명에게 사형을 선고해 약 800명을 사형을 집행했다. 2천802명에게 유기징역형, 3천578명은 공민권을 박탈했다. 시민재판소에서 11만 5천건을 재판해 9만5천명이 부역죄를 선고받았고, 공직자 12만여명은 시민재판소에서 행정처분을 받았다. 불행하게도 친일파 청산은 역사적인 흐름과 정반대 방향으로 진행됐다. 독립운동가들이 청산했어야 할 친일파한테 도리어 내몰리는 비극적인 순간이었다. 해방 이후 친일파는 식민지 시대보다 더 호화스럽고 안락한 생활의 연속이라고 해도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반면 독립운동가나 후손 등은 가난한 삶 속에 생계를 이어가며 숨죽여 살아야 하는 운명이었다. 이들은 분단된 상황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사회적인 영향력을 확대했다. 식민지배가 남긴 최악의 유산 가운데 하나이자 분단으로 인한 최대의 피해였다. 오죽하면 일제로부터 해방은 사실상 친일파를 위한 해방이라 하지 않던가? 김형목 사단법인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생활 속,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한 시론 (1)

■ 왜 일제 잔재 청산인가 현실정치에 몸담은 인사들은 토착왜구라는 비판에도 자신들 기득권을 지키는데 너무나 의연하다. 지금도 우리 사회는 그런데 우리의 일제 잔재 청산 논의는 흔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가 나치부역자를 처단한 사례와 비교한다. 나치에 의해 몇 해의 점령당한 프랑스는 부역자들 처단에 단호하고 철저했다. 우리는 몇 배나 긴 식민지배를 당하고 왜 이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냐고 개탄하기 급급하다. 식민지배가 길어질수록 부역자는 이에 비례하여 늘어나게 마련이다. 그런 만큼 저들을 처단하고 청산하는 작업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1940년 당시 프랑스는 국민국가가 확립된 지 오래된 상태였다. 적국과 협력하는 반국가행위에 대한 형법상의 엄격한 처벌조항은 이미 완비하였다. 반면에 을사늑약 당시 대한제국은 근대적인 국민국가가 아니었다. 황제를 배반한 대신과 지도급 인사들은 역적으로 비판을 받았을 뿐이다. 이른바 을사오적에 대한 처벌은 의열투쟁 일환으로 암살시도가 전부였다. 통감부 설치 이래 일제는 이들 신변 보호에 만전을 기울이는 가운데 처벌할 형법 조문은 깡그리 사라졌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친일청산이 반국가 아닌 반민족 행위를 대상으로 삼은 이유도 이와 결코 무관하지 않았으리라. ■ 남북분단과 625전쟁은 일제 잔재의 가장 커다란 생채기이다 해방 이후 독립국가건설론은 이념적인 대립과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세에 의하여 한민족이 바라는 방향으로 진전되지 않았다. 이념적인 갈등을 해소하려는 노력은 다수의 힘에 의하여 역사무대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에 너무나 역부족이었다. 강화된 냉전체제는 결국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에 각각 분단국가 수립하고 말았다. 이념적인 격화는 우리 현대사의 비극적인 625전쟁으로 귀결되었다. 소련 지원으로 군사력을 키운 북한은 새벽에 남침을 개시하여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단숨에 점령하였다. 국군은 병력과 열악한 무기 등으로 한 달만에 낙동강 부근까지 밀려 최후 방어선을 구축했다. 미국 주도로 개최된 유엔 안전보상이사회는 유엔군 파병을 결정하였다. 16개국으로 구성된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 성공하여 서울을 되찾고 압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북한의 요청으로 중국군이 개입하여 다시 서울을 빼앗겼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는 순간까지 전투는 계속되었다. 전쟁으로 인명은 약 450만 명, 남한의 43%의 산업시설과 33%의 주택이 파괴되는 엄청난 인적물적 손실을 초래하였다.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은 인적물적 손실과 더불어 불신감을 증폭시켜 적대감을 고조시켰다. 전쟁이 발발한 지 70년 지난 한반도는 영구적인 평화가 아닌 휴전 상태에 있다. 상호 신뢰에 의한 평화공존론 모색에 힘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에서 비롯된다. ■ 10월 유신은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총화이다 해방 이후 일제 잔재 청산에 실패했다. 이로 인해 일제강점기에 구축된 인적물적 토대를 허무는데 실패했다. 반민족적반민주적 지배구조나 의식은 온전히 유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친일 인맥은 각계에서 주류로 행세하면서 과거 청산을 저지하는 방해꾼이었다. 일제는 식민지 노예교육과 우민화 정책으로 한국인에게 노예의식과 패배주의를 만연시켰다. 민족자존의 의식이나 의지는 원천 봉쇄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폭압적인 관료제와 권위주의적인 법령체계로 헌병과 경찰 등은 한국인들에게 오직 순응과 복종만을 강요했다. 일제 잔재 중 가장 구조적이고 사회에 끼치는 해악이 큰 분야는 바로 법과 제도 의식 등이었다. 유신체제는 사상과 양심, 신체의 자유를 유린하는 가운데 획일적이고 억압적으로 사회를 통제하였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하에 시행된 각종의 국가주의적 시책은 식민지배정책을 답습한 결과였다. 황국신민의 서사와 교육칙어를 모방한 국기에 대한 맹세와 국민교육헌장, 주민통제를 목적으로 한 반상회나 치안유지에 관한 여러 법령 등은 이를 방증한다. 10월 유신은 식민지 지배구조의 재현이자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총화였다.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라는 미명하에. ■ 민족정체성을 일깨우는 가치기준이다 강제병합 110주년과 광복 75주년을 맞는 올해는 우리 근현대사를 성찰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야만적인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일으킨 장본인 일본은 잘못된 과거사에 대한 반성보다 오히려 정당화에 급급하다. 양심적인 세계인들이 공분하는 현실에도 전혀 반성하려는 기미조차 찾을 수 없다. 급속히 우경화하는 현실은 결코 간과해서 안 된다. 일제 잔재는 우리 사회에 고스란히 남아 고착되는 경향마저 보인다. 나아가 민족의 의식세계에 악영향을 끼치는 등 우려를 자아낸다. 우리 사회에는 유무형의 식민잔재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는 언어문화교육생활 등 일상사 전반에 걸쳐 민족의 의식세계까지 지배한다. 일제가 식민지배하면서 남겨놓은 부정적 유산을 너무 흔히 볼 수 있다. 의식하거나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일상사에 언저리에 잔존하는 현실이다. 황국신민서사탑관청건물 등과 같은 건축조형물 형태인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무형의 형태이다. 광복 60주년 기념사업으로 문화관광부는 일제문화잔재 지도 만들기를 추진했다. 이는 식민지배 가해자인 일본의 위정자와 극우세력에 의해 역사 왜곡과 우경화가 노골화하는 상황에 대한 자구책 일환이었다. 우리 내부 자성에 의한 자아 찾기라는 사실에서 크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해방 75년 동안 우리는 이를 청산극복하려는 노력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친일파 청산을 위한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은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런데 보수정권 출현으로 중단되어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일시적인 활동으로 과거 인적 청산을 위한 자료 수집에도 힘겨운 기간이었다.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는 정부가 하지 못한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여 연구자는 물론 사회운동가 등에게 잘못된 인물 평가를 되새기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이리하여 국가기관과 민간단체의 긴밀한 협조도 물론 정부를 비롯한 범시민적인 뒷받침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을 각인시켰다. ■ 올바른 정신적인 가치기준이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과거보다 현재와 미래가 중요하게 인식하는 분위기이다. 과거는 주목되지 않는 하찮은 것이나 현실보다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굴절되는 경우가 많다. 현재와 미래는 일상사와 관련하여 분명 중요하다. 올바른 현실 인식과 활동은 과거 잘못된 원인부터 밝혀내고 고쳐나가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만 한다. 특히 과거의 것들이 고쳐지지 않고 현실에 남아 있을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왜색은 시대와 상관없이 일본의 영향이 짙게 밴 문화 경향을 뜻한다. 저급하고 천박한 일본의 문화는 우리가 절대적으로 경계해야 할 대상임에 분명하다. 명백히 일제 잔재와는 다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 중대한 사안이다. 일제 잔재는 식민지시기에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로 벌인 모든 영역을 포함한다. 장기간에 걸쳐 구축된 식민지배구조의 유제라는 측면에서 엄연히 왜색문화와 차별성을 지닌다. 일제는 자신들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고 영속화시키기 위해 한민족 삶의 깊숙한 지배논리를 강요하고 합리화했다. 일본과 한국은 과거청산이라는 관점에서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일본은 종전 이후 군국주의 세력을 청산하지 못한 반면 한국은 친일세력을 청산하지 못했다. 일본은 민주주의를 표방하나 의식과 생활적인 면에서는 한창 거리가 있다. 광적인 집단주의는 이웃 국가에 대한 비수로 성큼 다가온다. 한국은 민주화의 역동성에서는 일본보다 앞서고 있으나 내부 분열이 심각하다. 일제 잔재 청산은 올바른 정신적인 가치기준을 세우는 지름길이다. 이미 친일세력은 대부분 죽었으며 법적인 책임도 소멸된 상태이다. 처벌이 목적이 아니라 올바른 진상규명을 통해 학문적역사적인 과거 청산이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 미래를 향한 힘찬 진군에 동참할 수 있는 든든한 밑거름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 남북통일을 향한 지렛대로 삼자 한국사회 발전상을 흔히들 한강의 기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 현실은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기에 충분조건이다. 더욱이 1990년대 이후 진전된 정치사회적인 민주화와 지방자치제, 한국문화의 세계화 등은 한국인의 저력과 위상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이와 과정은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순탄하게 진전되지 않았다. 많은 진통과 갈등이 수반되었으나 좌절하지 않고 묵묵하게 자기역할에 충실하였다. 이는 오늘날 대한민국을 이끌어온 든든한 에너지원이나 마찬가지였다.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지 훌쩍 75년이나 지났다. 거족적인 31독립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1년을 맞았다. 그때 함성이 우리 귀에 메아리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가슴이 뭉클하다. 그런데 외형과 달리 이면에는 잘못된 과거사 생채기도 주변을 기웃거린다. 바로 식민지배가 남긴 일제 잔재는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장애물로 공존하는 현실이다. 이 중에서 가장 가슴 쓰린 현실은 남과 북으로 갈라진 분단국가라는 엄연한 사실에 누구나 공감하는 공통분모이다. 평화로운 남북통일을 제2의 독립운동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연유한다. 김형목 사단법인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생활 속,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 ‘해방 75년’ 지금도 일제 그림자 속에 산다

■ 경기도내에 뿌리내린 친일잔재 경기도내의 친일문화 잔재조사에 관한 결과 친일 인물 257명(이흥렬, 현제명, 김동진, 이광수 등 문화계 15명), 친일 기념물(기념비 및 송덕비) 161개, 친일 인물이 만든 교가 89개, 일제를 상징하는 모양의 교표 12개 등이 도내 일제 잔재로 밝혀졌다. 엄청난 숫자이다. 실제로 경기도를 상징하는 노래가 친일작곡가 이흥렬에 의해 작곡됐음에도 우리는 수십여 년을 불러왔고,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변절자인 춘원 이광수가 한국 문학을 선도한 선구자로 칭송하고 있는 기념비가 남양주시의 봉선사 입구에 서 있으며, 안양시의 서이면사무소는 일제가 만든 건축물임에도 경기도문화재자료로 지정되면서 아무도 손을 못되게 되어 있다. 경기도내의 지명은 더욱 심각하다. 경기도의 조사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왜곡된 행정구역 명칭은 160개다. 왜곡 유형으로는 합성 지명이 117개, 숫자방위위치를 염두에 만들어진 지명 11개, 위상 격하 지명 2개, 한자어화 지명 3개, 일본식 지명 5개 등이다. 단일한 지명으로는 일산, 산본, 평촌 등 모두 우리의 얼과 민족성을 말살하기 위해 또는 의미를 폄훼하기 위해서 만든 지명들이다. 해방 이후 당연히 고쳤어야 함에도 지명변경에 따른 혼선과 예산을 핑계로 무관심과 방치 속에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생활 속의 남아있는 친일잔재 일상생활 속에 유형의 형태로 남아있는 친일잔재는 일제가 조성한 건축물이나 조각과 같은 예술품들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심각한 것은 해방 이후 청산되지 않은 친일파들에 의해 자신들의 과거를 합리화하는 방식으로 남겨놓은 유산들이다. 아산 현충사의 이순신 장군 영정이나 논개의 영정이, 국회 본회의장 입구에 있는 백범 김구의 조각상과 전봉준 장군의 동상이 친일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이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즐겨 부르는 노래들의 상당수도 친일파들에 의해 작사작곡됐고 심지어 지폐에 있는 한국은행 총재의 직인도 형식으로 남아있는 유형의 친일잔재이다. 그러나 생활 속에 남아있는 친일잔재는 주로 언어로 구조화돼 있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언어의 친일잔재는 일본과 자연스러운 교류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의도적으로 우리 민족을 비하하고 우리 문화를 말살하려는 의도 속에서 계획적으로 진행돼 온 것들이다. 대표적인 언어가 힘내자고 할 때마다 사용하는 파이팅이다. 파이팅은 영어이지만 이 단어의 출처는 일본군 출전 구호였다. 권투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Fight(파이트)를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화이또라고 부르며 출전하는 군인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는 데에서 시작한 것이다. 우리 민족이 강제로 징용을 끌려갈 때 눈물로 이별하면서 외쳤던 표현이 파이팅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대표적인 친일잔재이다. 이밖에도 우리의 생활 속에 무비판적으로 사용하는 짬뽕(초마면), 우동(가락국수), 가라(가짜), 기스(흠집), 사라(접시), 모찌(찹쌀떡), 망년회(송년회), 익일(다음 날), 가불(선지급), 유도리(융통성), 만땅(가득) 등 친일잔재는 차고도 넘친다. 건설분야나 당구장 같은 곳을 가보면 더욱 심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모두 우리 말로 개선할 수 있음에도 게으르거나 아니면 무관심해서 남아있는 친일잔재들이다. 그러나 생활 속의 친일잔재에서 가장 심각하고 또 가장 시급한 개선해야 할 곳은 학교생활 속에서의 친일잔재이다. ■ 학교생활에서의 친일잔재 일본의 주요 원료 수출규제에 반발해 전개된 일본제품 불매운동에 가장 앞장서서 실천한 이들은 청소년들이었다. 우리들의 청소년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자각한 역사의식의 발로였다. 이를 보고 기성세대들은 흐뭇함을 넘어서 건전한 다음 세대를 기대하게 됐다. 그러나 건강한 청소년의 교육현장에는 의외로 친일잔재가 넘쳐나고 있다. 청소년의 생활 속에 침투된 일본문화는 고사하고 학교현장에서 사용하는 명칭이나 교사들이 사용하는 용어 등에는 수많은 친일잔재가 있다. 지금도 사용하는 반장, 부반장은 일제강점기 때의 급장(級長) 혹은 반장(班長)의 호칭이었는데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그 시절 반장이나 급장은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담임교사가 지명해 담임교사의 대리자로 활용했다. 위계에 의한 질서를 강조하는 군국주의 문화의 소산이었다. 오히려 일본에서는 반장이라는 용어가 전후 학급위원(學級委員)으로 바뀌었지만 우리는 지금도 사용 중이다. 교장 선생님이나 상사가 아랫사람에게 하는 훈화(訓話)는 상사가 부하에게 훈시한다는 일제강점기의 군대 용어로 감시와 통제를 위해 사용하던 언어였지만 학교 행정에서는 오늘도 사용되고 있다. 이밖에도 학교에서 학부모들과 행하는 간담회는 일본식 한자어(懇談會:こんだんかい)를 한글로 표기한 낱말이며 사정회사정안 같은 표현도 일본어식 조어로 만들어진 용어이다. 또 결석계나 휴학계 등으로 사용되는 ~계(屆)라는 용어 역시 일본에서 공문서를 지칭하는 ~とどけ(屆)를 그대로 옮긴 표현이다. 학교행사에서 으레 사용되는 차렷이나 경례 등의 용어는 일왕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전형적인 군국주의 일제의 잔재이다. 수학여행이나 수련회, 소풍 등 정겨운 표현 역시 일제 잔재이다. 그것은 1907년부터 조선인들을 일본에 견학시켜서 일본문화를 익히고 일본을 동경하게 하고자 하는 의도로 만들어진 정책적 용어들이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문화탐방이나 문화체험활동 등의 대체용어를 사용하기를 권하고 있지만, 여전히 또 관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없어져야 할 학교생활 속의 대표적인 친일잔재이다. ■ 학교 속의 제도화된 친일잔재 학교생활 속에서 제도화된 친일잔재는 먼저 학교의 명칭에서 찾을 수 있다. 1995년 국회의 교육법개정에 따라 이제는 초등학교로 변경돼 완전히 없어진 국민학교라는 명칭은 너무도 오랜 시간을 사용해온 친숙한 호칭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변경되지 못한 명칭은 유치원(幼稚園)이다. 유치라는 단어의 뜻은 나이가 어리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수준이 낮거나 미숙하다의 뜻으로 사용돼 왔다. 즉, 어린이에 대한 무시를 전제한 호칭인데 어린이 존엄사상이 강했던 우리의 전통과는 큰 차이가 나는 표현이다. 한자문화권 국가 중에서 아직도 유치원이라는 명칭을 고집하고 있는 나라는 우리와 일본뿐이다. 광복회에서도 우리 아이들의 첫 학교를 일제 잔재인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은 대단히 통탄스러운 일이다. 이제는 오랜 시간 우리 삶에 스며들어온 일제 잔재에 문제의식을 갖고, 일제잔재를 청산하고 우리의 민족정신을 되찾기 위해 온 국민이 뜻을 모아야 한다고 했다. 이제부터라도 유치원은 어린이동산과 같은 고운 우리 말로 변경해야 할 때이다. 어느 교실 안이든 정중앙에 배치돼있는 태극기 역시 친일잔재이다. 교실 안의 태극기는 청소년의 애국심을 배양하는 주요한 형식이 돼 있지만, 이는 일제강점기에 교실마다 일장기를 액자에 넣어 게양하고 일제에 충성을 강요했던 것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자발적인 애국심이 아니라 강요와 형식에 의한 애국심의 강조는 국가주의와 권위주의의 산물일 뿐이다. 모든 학교 운동장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구령대 역시 친일잔재이다. 군국주의를 지향했던 일제는 모든 학생에게 항상 일왕에게 충성할 것을 강요했고 이를 위해서는 학생들을 획일적으로 그것도 주입식 방식으로 교육시켰다. 높은 구령대의 위에서 근엄한 표정과 엄한 목소리로 한결같이 학생들에게 호령하던 교장 선생님의 모습은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하나같이 학생들의 창의성과 자발성의 신장과는 거리가 먼 우리 교육현장의 친일잔재이다. 이밖에도 친일잔재로 남아있는 조회, 주번과 같은 표현들, 학교명이나 교화, 교목, 교표 그리고 친일작곡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교가 등도 하루빨리 청산해야 할 친일잔재들이다. ■ 법규제정과 국민운동으로 이어져야 현재 남아있는 친일잔재의 청산을 위해서 지자체마다 특위를 구성하고 교육청은 나름대로 조사와 함께 교육현장에서의 시정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지자체는 예산 배정을 하는 등 어느 때보다도 친일잔재 청산에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경기도 역시 여기에 발맞추어 나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나마 유형의 친일잔재는 이와 같은 외형적인 노력으로 어느 정도의 청산이 가능하지만, 무형의 친일잔재는 장기간의 수고와 노력을 요구된다. 따라서 우리는 몇몇 관련 법안을 제정하거나 청산을 위한 예산 배정 등에 그치지 말고 공청회와 토론회 그리고 전 국민의 참여를 통한 운동으로 확산되게 해야 한다. 민족정기를 회복하는 일에는 시공간의 게으름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임형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생활 속,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 무형의 친일잔재와 새로운 가치

■ 조정래 작가의 친일파 논란 최근 느닷없이 화제가 된 인물이 조정래 작가였다. 대하소설 『태백산맥』과 『아리랑』의 작가의 등단 50주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나온 친일파 언급 때문이었다. 그동안 질곡의 한국 근현대사를 뜨거운 민중적 시각으로 재해석하여 수많은 독자로부터 역사 이야기의 사표로 칭송되고 있는 원로작가의 발언이었기에 파급력이 컸다. 일본에 유학을 다녀오면 다 친일파가 된다고 한 그의 발언은 다음 날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고 조 작가를 비판하는 말과 글들이 쏟아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비난에 앞장서는 자들 대부분 일본에 대해서는 무언가 관계가 있는 세력이나 개인들이었다. 과거 일제 강점기에 친일의 부역을 했거나 아니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본에 경제적이든 학문적이든 아니면 또 다른 이유 등으로 빚을 지고 있는 자들이 그들이었다. 왜 그럴까? 무엇이 그들을 이처럼 반발하게 했는가? 실제로 조정래 작가의 발언은 앞뒤의 맥락을 잘라서 이해하면 분명 문제가 있는 발언이었다. 개인적인 이유로 일본을 의식해야만 하는 한 논객은 그렇다면 일본유학을 한 대통령의 딸도 친일파냐며 비판할 정도였다. 그러나 조 작가의 발언은 거두절미하고 이해하는 것은 무식한 까닭이거나 아니면 의도적인 왜곡일 수밖에 없다. 조정래 씨는 역사적 이야기 작가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따라서 그의 발언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여야 함은 당연하다. 더욱이 그날은 기자들의 질문이 일제 강점기 시절을 다룬 『아리랑』에 대한 대표적인 친일단체인 이승만학당의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의 비판에 대한 질문에서 나온 발언이었다. 당연히 조 작가는 토착왜구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일본유학을 다녀온 친일파들이자 민족반역자들이다라고 해석해야 한다. 알려진대로 그의 아버지 역시 일본 유학파였고 그 역시 무비판적인 친일이 아닌 다른 나라의 문화처럼 일본의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번 사태에서 분명히 드러난 사실은 우리 사회는 아직도 친일의 문제가 거론되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원인은 해방 이후 당연히 청산되었어야 할 친일청산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제재나 반성도 없이 살아남은 그들에 의한 조직적이고 또 치밀한 친일의 합리화 논리가 여전히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 눈에 보이지 않는 친일잔재 친일잔재란 제국주의 일본이 35년간에 걸친 식민통치 기간에 우리 땅에 남겨놓은 모든 형태의 부정적 유산을 말한다. 여기에는 건축조형물 형태나 제도, 형식 등의 유형의 형태로 남아있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우리들의 정신세계 즉, 의식과 감정 그리고 인식에 남아있는 무형의 유산들이다. 이들 무형의 친일잔재는 부지불식간에 우리들의 의식세계를 지배하면서 우리 사회의 암적 존재로 해를 끼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은 우리 민족에게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일관된 의도 아래 장기간에 걸쳐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강요하였다. 더욱이 대륙으로의 침략 야욕을 가지고 있는 일본은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조선지배를 영속화하기 위해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각 부문은 물론 민중의 삶 깊숙이 식민지배를 합리화하는 논리를 주입시키고 이를 구조화하고자 기도했다. 즉 일제는 자신들은 우등민족이고 우리 민족은 열등민족으로 격하시키기 위한 노예의식과 패배주의를 만연시킴으로써 민족자존의 의지를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그리고 폭압적인 관료제와 권위주의적인 법령체계를 채택하고 헌병ㆍ경찰 통치를 통해 우리 민족을 순응시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 일제는 우리 국토를 일본화시키는 것 못지않게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스스로 열등민족이라는 자기비하를 심어주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식민사관의 주입이었다. 우리는 아주 빈약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기에 선진적 문화국가인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의식이다. 그리고 지금 당장에 일본의 지배를 받는 이유도 조선의 망국적인 사색당쟁 때문이었다는 단순 논리를 주입하였다. 위대한 한글문자는 폐지되었고 이름마저 일본식으로 개명할 것을 강요하였다. 한국인은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는 이류 민족이라는 인식을 식민지 백성의 뇌리에 심어주는 것이었다. ■ 정신적 패배의식과 기회주의 우리들의 의식에 내재되어 있는 권위주의에 대한 동경(한국인에게는 그저 강하게 몰아붙이는 지도자가 필요해), 쉽게 자포자기하는 모습(한국인은 아무리 노력해도 일본에, 미국에는 못 쫓아가), 열등의식(그저 한국인은 때려야 말을 들어)과 같은 패배주의 정신이 심어진 것도 일제 강점기였다. 이런 의식은 지금도 남아 우리 주변에 있다. 어쩌면 친일잔재의 가장 큰 폐는 이렇게 우리 민족의 정신을 좀먹고 있는 패배의식일 것이다. 친일 또는 친일파라는 말은 우리가 일본에 나라를 강제로 잃기 전부터 쓰였던 말이다. 친일의 친할 친(親)자는 부모 자식의 사이처럼 볼꼴 못 볼 꼴을 다 드려다 본다는 친숙한 의미의 글자이다. 그러니까 친일이라는 말은 은연중에 일본을 어버이처럼 친하게 여기고 섬긴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한일병탄이 되기 전에 친일파란 말은 주로 이완용 같은 고위 관료들 또는 말단 공무원 중에 일본을 핑계로 민중을 수탈하는 자들(친일 연구가인 임종국 선생은 이들을 직업적 친일파라고 규정) 그리고 을사늑약부터 노골적으로 일본을 위해 일을 해 오던 일진회 관련자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일본은 어버이처럼 섬겨야 한다고 외쳤던 부류들이다. 친일파들은 일제 강점기에 눈부신(?) 활약을 했다. 그들은 관계, 법조계, 군, 경찰 그리고 학계와 문화예술계 등 분야를 막론하고 일본의 권력자들에게 기생하면서 활동했다. 순간순간의 이익을 좇아가는 기회주의적 속성은 이때부터 성공의 지름길이 되었다. 모든 것의 기준이 나의 이익에 매몰되는 사회가 된 것이다. 그들의 기회주의적 행동의 이면에는 늘 한국인은 열등민족이라는 패배주의가 있었다. 아직도 우리가 친일잔재를 논해야 한다는 것은 그들의 작업은 성공했다는 의미이다. 아니 그들은 아직도 살아서 우리들의 의식에 여전히 패배주의 의식을 강요하고 있다. 그러니 너도 기회를 잘 잡으라고 하면서. ■ 친일 인맥으로 유지되는 친일잔재 1948년 제헌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법률 제3호로서 제정하였다. 반민법은 제헌헌법 제101조에 의해 국회에 반민법 기초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민의를 수렴하고, 많은 논의 끝에 제정되었다. 반민법은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인 해방정국 시기에 제정되었지만 미군정의 반대로 보류되었다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국회에서 제정한 것이다. 그러나 왜적에게 나라를 팔고,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을 탄압하고, 일제에 협력한 악질 친일파ㆍ민족반역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반민법은 곡절 끝에 이내 무산되고 말았다. 살아남은 친일파들은 더욱 교묘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관료출신들은 법과 제도로, 군과 경찰은 일제 강점기 시절 배운 기술을 신생국가에 적용하면서, 경제인은 자수성가로 포장하고, 언론인은 시대상을 들며 어쩔 수 없었다는 논리로, 학자는 강단에서 논리적으로, 문화예술인은 그들의 무대에서 작가는 작품으로 승부를 본다며 끝없이 친일잔재의 청산을 방해하고 또 그 의식이 존속되도록 노력하였다. 해방 이후 우리 사회의 정의가 실종된 이유가 그 결과였다. 열심히 노력해서 얻는 지식과 부 그리고 지위가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취한 결과만이 목적이 되는 사회. 불로소득이 부끄러움이 아니라 오히려 능력으로 포장되는 사회. 서울 강남 지역의 아파트값이 어느 날 갑자기 올라도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비정상적인 사회, 나의 땀과 노력이 아닌 눈치와 권력의 향배를 따라서 움직이는 술수가 존중되는 사회. 과정보다 결과만이 중시되는 사회. 그리고 억울하면 너도 출세하라는 어처구니없는 말이 회자하는 사회. 모두가 무형의 친일잔재 결과들이다. ■ 새로운 정신적 가치가 필요하다 35년간에 걸친 세계사상 유례를 보기 힘든 가혹한 식민통치를 받은 우리 민족은 실로 엄청난 인적 물질적 피해를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가시적 피해도 컸지만 보다 깊은 상처가 남은 곳은 민족의 정신세계였다. 물질적 피해는 쉽게 복구할 수 있지만 한번 훼손된 정신세계를 온전히 치유하고 복원하는 데는 지속적인 노력과 함께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무형의 친일잔재가 눈에 보이는 친일잔재보다도 훨씬 무섭고 질긴 것이다. 일본이 심어놓은 세력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주요세력으로 남아있는 한 그들의 계획은 계속될 것이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자신들의 할아버지, 아버지의 행적을 부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더욱 합리화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자신들이 세워 놓은 가치를 최고의 덕목으로 만들고 있다. 그들의 반성과 참회의 길로 들어서기에는 너무 많이 나갔는지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직 늦지 않았다. 미래세대인 청소년층의 친일의식은 매우 약화되었다. 오히려 극일의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정치적으로 여전히 전근대적인 수준의 일본에 비해 압도적인 민주의식을 갖춘 젊은층이 이제는 경제면에서도 일본에 전혀 밀릴 것이 없다고 자신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에게는 최근의 영화 기생충이나 BTS 경우처럼 문화적 우수함이 넘치고 있다. 역시 미래세대는 과거세대보다 진보하고 있다. 앞으로 기성세대의 역할은 이들 젊은세대에게 친일잔재가 아닌 새로운 정신적 가치를 세워주는 일이 될 것이다. 임형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생활 속,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 친일파 기념물 보존해야 하나, 철거해야 하나

■ 해방 후 사라진 팔굉일우비 2008년 용인에서 발견 2008년 8월 경기도 용인에 있는 양지초등학교 앞 도로 공사에서 땅속에 묻혀 있는 비석 2개가 발견됐다. 이 비석은 친일파 송병준과 그 아들 송종헌의 공덕비였다. 대표적인 친일파는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은 인물들인데 이 두 사람이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송병준은 1907년 농상공부 대신으로 있으면서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일본이 고종을 강제 퇴위 시킬 때, 그리고 정미칠조약을 체결할 때 앞장섰기에 정미 칠적으로 지탄받은 대표적인 친일파이다. 송병준은 일제로부터 그의 친일 공적을 인정받아 1910년 자작이 됐고, 1920년 백작으로 승작 됐다. 송종헌은 아버지 송병준이 사망하자 그 작위를 물려받아 백작이 된 대표적인 친일파이다. 양지초등학교는 친일 거두 송병준과 송종헌의 기념비가 발견되자 이 소식을 용인문화원에 전했다. 2008년 9월6일 용인문화원 김장환 사무국장은 역사교사인 김태근과 흥사단 회원 등 이 비석에 관심을 가질만한 이들과 함께 학교로 달려갔다. 현장에 도착하니 비석은 학교 창고에 보관 중이었다. 이들 일행은 창고 문을 여는 동안 학교 정문 옆에 있는 넓적한 돌덩어리에 걸터앉아 기다렸다. 당시 이 돌은 목재 벤치와 나란히 놓여 있어서 시민들과 학생들이 별생각 없이 휴식을 취하는 석재 벤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이 앉아 있는 넓적한 돌덩어리에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돌의 상단에는 큰 글씨로 팔굉일우(八紘一 宇) 글자가, 그 옆에 작은 글씨로 삼위 백작 야전종헌 근서(三位 伯爵 野田鍾憲 謹書)란 글자가 한자로 새겨져 있었다. 돌의 측면에는 개교 30년 기념 소화 16년 9월1일 동창회 후원회 증정(開校 30年 記念 昭和 16年 9月1日 同窓會 後援會 贈呈)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야전종헌은 송종헌의 창씨명이다.이 비는 소화 16년에 세워졌으니 1941년 송종헌이 쓰고 당시 양지초등학교 동창회가 후원해 건립한 팔굉일우비였다. 현장의 용인문화원 일행은 팔굉일우비를 발견하고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해방 후 한국 땅에서 사라진 팔굉일우 비석이 처음 발견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팔굉일우비 일제의 조선 침략착취를 증거하는 역사적 기념물 팔굉일우는 1940년 일본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가 시정 연설에서 황국(일본 제국)의 국시는 팔굉을 일우하는 국가의 정신에 근거한다고 말한 데서 유래한다. 이 시기는 일제가 동아시아 전역을 침략한데 이어 태평양으로 침략의 마수를 확대할 때이다. 팔굉일우는 전 세계가 하나의 집이란 뜻으로 일본 제국주의가 그 들의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건 제국주의 논리이자 구호였다. 일제는 제국주의 침략을 미화하고 홍보하기 위해 1940년 일본은 물론 조선 전역에 팔굉일우비를 건립했다. 팔굉일우비는 일제의 조선 침략과 지배 그리고 조선인 착취를 증언하는 역사적 기념물이다. 해방이 되자 한국인들은 팔굉일우비를 그대로 둘 수 없었을 것이다. 땅에 묻거나, 비석을 옮기고 석재를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 비석 중 일부는 파손해서 폐기도 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팔굉일우비는 우리의 시야와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팔굉일우비가 역사에 다시 등장한 것은 근래의 일이다. 2011년 전라남도 목포여자중학교에서 운동장 공사 중 팔굉일우비가 발견됐다. 이 비는 현재 목포근대역사관에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2017년에는 전라남도 해남 마산초등학교에서 고인돌 상판으로 사용되고 있던 팔굉일우비를 학교 행정 직원이 점심 시간에 산책 중 우연히 발견했다. 용인과 해남의 비석은 그 긴 시간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심코 보고 넘긴 것을 매의 눈을 가진 이들이 발견한 것이다. 용인의 팔굉일우비는 해방 후 최초로 발견된 팔굉일우비이기에 역사적 의미가 크다. 양지초등학교에서 발견된 팔굉일우비와 송병준과 송종헌의 공적비는 발견 당시 용인문화원이 양지초등학교로부터 인수받아 현재까지 보관하고 있다. 이 비석은 민족문제연구소에 두 차례 대여돼 시민에게 공개됐고, 2019년 용인문화원이 주최한 용인시민 소장 문화재전 및 독립운동 100주년 기념 자료전에 친일 자료로 공개돼 관람객들로부터 큰 관심을 끌었다. 김장환 용인문화원 사무국장은 이 3개의 친일 기념물을 용인시가 건립 추진 중인 용인독립기념관이 완공되면 그곳에 넘겨 전시할 계획이라고 한다. 팔굉일우비는 국내에서 3개밖에 없는 유물이고, 송병준과 송종헌은 대표적인 친일파이기에 이 비석들은 역사적 가치가 높다. 독립기념관 개관 이전이라 하더라도 이를 전시, 교육 자료로 활용하는 것은 용인문화원과 용인시민, 그리고 용인시의 과제로 남아 있다. 경기도, 친일 및 일제 식민지 지배 관련 기념물 산재 경기도에는 친일파와 일제 식민지 지배와 관련된 기념물이 다수 남아 있다. 2020년 민족문제연구소 조사보고서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 용역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문헌과 현장 조사를 통해 확인된 일제 식민지 시대 및 친일 관련 기념물은 188개이다. 현장 조사 결과 현존하는 것이 139개이고, 나머지는 멸실됐거나 현존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운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 조사는 경기도 전 지역에 대한 전수 조사가 아니기에 추후 세밀한 조사를 하면 더 늘어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기념물은 친일파의 기념비와 송덕비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나머지는 수룡수리조합기념비와 같은 식민지 지배 기구를 기념하는 비, 수원 권업모범장 잠업시험소 여자잠업강습소를 나타내는 표지석 그리고 일본인 동상 등이다. 이 중 주목해야 할 것이 친일파의 기념물이다. 대표적인 친일파의 기념물로는 2008년 용인에서 발견된 백작 송종헌 영세기념비이 있다. 군수를 지낸 친일파의 기념비로는 남한산성 남문 비석 군에 남아 있는 강원달 광주군수 영세불망비, 안성군 대덕면 사무소 앞에 있는 최태현 안성군수 청덕애민송덕비와 서상준 안성군수 청덕불망비, 안성군 양성면 양성향교 앞에 있는 나호 안성군수 모성기념비가 있다. 기념비의 명칭에는 영세, 불망, 기념과 같은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 기념비를 세운 이들은 비석 주인공의 공을 영원히, 잊지 말고, 기념하자는 뜻에서 세웠을 것이다. 또 비석의 주인공은 자신의 공이 영원히, 잊혀지지 않고, 기념될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이제 이 비석은 그들의 기대와 달리 영원히 친일파의 친일 행위를 기억하는 역사적 증거물이 됐다. 돌에 새겼으니 바람과 비에 시달린다 해도 오랜 기간 사라지지 않고 친일파의 행위를 증언해 주는 역사적 기념물이 될 것이다. 친일 기념물 보존 식민지 체제 청산 증거물로 삼아야 일제 식민지 시대가 남긴 기념물을 어떻게 할 것인가. 철거를 주장하는 이도 있지만 일제 식민지가 남긴 유형의 기념물은 보존해야 한다. 다시는 되풀이돼서는 안 되는 역사, 그래서 우리 기억 속에서 빼버리고 싶은 역사이지만, 그 흔적을 지운다고 그 역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민족의 자랑스러운 유산만이 역사적 기념물이 아니다. 민족의 아픈 역사도 우리의 역사이다. 친일파의 기념물, 일제 식민지 시대를 상징하는 기념물은 우리가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증거물이다. 이들 기념물을 역사적 기념물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안내판을 설치해 친일파의 행적을 기록하고 이들 기념물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관람객에게 전달해야 한다. 그리고 일제 식민지 체제를 청산하고 극복하는 역사적 상징물로 활용해야 한다. 강진갑 역사문화콘텐츠연구원장前 경기대 교수

[생활 속,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 전통농업 뿌리까지 파괴한 ‘日 식민지 지주제’

■ 농업침탈과 식민지 지주제의 강화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을 강탈하여 농업침탈을 본격화하면서 농업연구기관을 이 땅에 세웠다. 경기도 교통의 요충지이자 행정의 중심 역할을 했던 수원 서호 옆에 1906년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을 세웠다. 수원은 조선후기 정조 임금 때 농업진흥을 위한 수리(水利)시설로 만석거(萬石渠)와 축만제(祝萬堤, 西湖)가 만들어지고 국영농장의 형태인 둔전(屯田)이 대규모로 조성되어 있었다. 일제는 이러한 농업 기반 시설을 빼앗아 투자비용의 절감과 1905년 경부선 철도 부설에 따른 교통의 편의(물류운송)로 그대로 이용하고자 했다. 권업모범장의 기능은 식민지 경영을 위한 새로운 농법의 실험과 연구였다. 권업모범장은 새로운 농업기술과 품종개량 등의 영농조건을 내세워 일본농법을 조선에 이식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수원에서 일본 볍씨를 우리 농민에게 재배시켜 그 결과를 고찰하여 식민지 농업 진흥을 도모하고자 했던 것이다. 수원에서는 권업모범장을 통해 여러 종류의 일본 개량종이 일본인 지주들에게 적극적으로 보급 되었다. 또한 개량종 우선배급, 농업기술관 파견 등의 각종 편의를 제공하여 개량종 재배자에 대해 특혜를 주기도 했다. 일본 품종들은 일본인들의 입맛에 맞는 다수확 우량품종으로 상품성과 가격이 보장된 것들이었다. 이 품종들은 일본인 지주회사를 매개로하여 상품화가 확대되었고, 미곡 무역상이나 농산물 유통업자를 통하여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수원에서는 일본인 지주회사들이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일제 농업정책의 충실한 수행자였던 일본인 지주들은 1906년부터 권업모범장 주변에 대규모 농장을 설치하여 경영하기 시작했다. 1906년 국무합명회사(國武合名會社)가 수원군 남부면(南部面)에 본부를 설치했고, 1907년에는 동산농사주식회사(東山農事株式會社)가 수원군 북부면(北部面)에 설치되어 본격적인 쌀농사에 돌입했다. 그리고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의 동척농장도 설치되었다. 동척농장은 전국적 규모의 국책농장으로 수원에서 1910년부터 수원출장소를 두고 농장을 운영했다. 동척은 수원출장소 사무실을 수원역 앞에 두었는데, 창고를 만들어 수확한 벼를 적재했다가 경부선을 통하여 전량 부산으로 운반한 뒤 일본으로 반출시켰다. ■ 수리조합사업과 「수룡수리조합기념비」 일제강점기 지주를 정책적으로 성장시키며 식민지 지주제를 강화시켰던 대표적인 사업 중의 하나가 수리조합사업이었다. 1920년부터 조선총독부의 주관 하에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이 실시되었다. 조선총독부 및 각 도(道)에서는 산미증식계획의 일환인 토지개량사업의 연도별 계획을 세우고 그 실행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수리조합사업은 전통적인 농업구조를 붕괴시키고 식민지 지주제를 강화시켰다. 그 결과 중소지주층이 몰락하고 대부분의 소작농의 처지에 있던 지역민들의 삶은 더욱 열악해졌다. 일제는 전통적인 수리조직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수리조합사업을 시행했다. 일제는 수리조합사업의 추진과 운용 과정에서 강제적인 설립과 배타적이고 반관적(半官的)인 운영방식, 과중한 조합비 부담 등으로 토지겸병과 농민층 몰락을 야기 시켰다. 수원과 용인에서도 1920년대 수리조합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대표적인 수리조합사업으로 1927년 수룡수리조합(水龍水利組合)이 인가되었는데, 그 결과 여천(원천)저수지와 신대저수지 두 개의 큰 저수지가 만들어졌다. 저수지 축조 후 「수룡수리조합기념비(水龍水利組合紀念碑)」가 세워졌다. 금석문의 경우는 대개 어떠한 사업이나 인물들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지는 것이 일반적으로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기념비 역시 일제의 식민지 경제정책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비문에서 보여 지고 있는 그 찬양의 내용을 떠나 비문의 내용에 담긴 사업들이 일제가 주장하는 것처럼 시혜(施惠)적 측면으로서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다시 한 번 되짚어 볼 일이다. 일제는 자신들의 치적(治積)을 자랑하고 조선인들에게 새로운 문명(文明)을 선전하고 싶어 했다. 이러한 선전활동의 진정한 목적은 일제의 침략성과 수탈성을 숨겨 조선인의 저항을 무마하고 식민 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귀결시켜 버리는 것이었다. 「수룡수리조합기념비」에 기록된 설립자는 중옥요준(中屋堯駿, 동산농사주식회사 대표), 가등준평(加藤俊平, 동양척식주식회사 대표), 곡희치(谷羲治, 국무합명회사 대표), 홍민섭(洪敏燮), 오덕영(吳悳泳), 오성선(吳性善), 강대련(姜大蓮, 용주사 주지)이다. 평의원으로는 고목덕치(高木德治), 곡희치(谷羲治), 고광업(高光業), 김현묵(金顯), 중옥요준(中屋堯駿), 오덕영(吳悳泳), 가등준평(加藤俊平), 오성선(吳性善), 차유순(車裕舜), 양성관(梁聖寬)들로 일제강점기 수원의 대표적인 친일 지주로 알려진 차유순, 양성관 등과 친일불교에 앞장섰던 용주사 주지 강대련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일본인 지주의 성장과 「치산치수지비」 일제강점기 식민지 경제 성장을 가속하던 일본인 지주들은 식민지 지주로서의 위상과 역할을 수행해 나갔다. 이러한 모습은 1941년 세워진 「치산치수지비(治山治水之碑」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 비석은 사면비로 원수형의 비신에 2단 비좌로 되어 있다. 전면의 치산치수지비의 큰 글씨가 행서로 새겨져 있는데 당시 경기도지사였던 일본인 칸죠 요시쿠니[甘蔗義邦]가 썼다. 그리고 비문의 내용은 일본어로 쓰여 있다. 이 글은 1939년 장두병(張斗柄)이 쓰고 1941년 세웠는데, 원래 어디에 세워놓았던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931년 4월부터 시작된 사방사업(砂防事業)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광교산 일대의 삼림이 벌목으로 인하여 황폐해지자 토사가 유출되어 매년 하천 바닥이 높아짐에 따라 수로가 막히고 난류가 유발되어 홍수 피해가 잦아지자 사업을 시작하였으며, 1934년까지 4개년에 걸쳐 수원읍, 일왕면, 반월면에서 행해졌음을 알리고 있다. 치산치수지비를 통해 보면 이 비석을 세우는데 참여한 기관 및 사람들은 수원군 일왕면장 광길수준(廣吉秀俊), 이석래(李奭來), 수원읍장 매원정웅(梅原靜雄), 일왕사방임시업조합장(日旺砂防林施業組合長) 이필상(李弼商), 동산농사주식회사 조선지점과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점, 윤태정(尹泰貞), 차태익(車泰益), 이봉래(李鳳來), 양근환(梁根煥)이 있다. 수원의 대지주였던 일본인 지주회사들과 조선인 관리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이득을 목적으로 앞의 수리조합사업과 마찬가지로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하는 것들 우리의 지난 역사를 잠시 되돌려 보면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농업이었다. 우리가 나라를 빼앗겼던 그 시절 침략자는 농업침탈을 가속화하였고, 그 잔재들은 아직도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일제강점기 부일협력을 하며 살아갔던 친일 지주들의 과오를 묻지 못했고, 그들의 진정한 반성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변명보다는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것이 필요하다. 이젠 유형의 친일잔재들은 없앨 것이 아니라 식민지 침략을 보여주는 역사적 산물로서 남겨 정확한 역사적 고증과 그에 따른 설명,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수원박물관에서는 지난 2013년 원천저수지와 신대저수지가 광교신도시 개발로 광교호수공원으로 탈바꿈 할 때, 버려졌던 수룡수리조합기념비를 박물관 야외 전시 공간 한편으로 옮겨왔다. 그것은 두 저수지가 일제강점기 축조되었던 이유, 해방 이후 수원 시민들의 추억의 공간이 되었던 원천유원지에 대한 역사를 정확히 설명하기 위함으로 교육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식민지의 유산은 없애서 잊어버릴 것이 아니라 남겨서 보고, 분명한 역사적 진실을 후대에 알려 잘못된 것을 반성하고 각인시켜 주는데 활용해야 한다. 그것이 친일청산과 올바른 미래로 가는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동근 수원박물관 학예연구사

[생활 속, 일재 잔재를 청산하자] 경기도 출신 친일의 군상(群像)

■ 군인은 국가의 정체 대한민국 대통령을 비롯해 고위공직자들 가운데 본인 또는 아들의 군복무 문제로 곤혹을 치룬 사례를 언론을 통해 자연스럽게 접하고 있다. 그만큼 분단된 대한민국에서 군과 관련된 문제는 가장 민감한 문제이자 중요한 사안이다. 군인은 그 국가의 정체(正體)이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일본은 대한제국을 침략하면서 친일적 군인을 만들어 내는 데 심열을 기울였다. 그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이면서 일본이 한국적(韓國籍) 군인으로 기억하고 있는 인물이 경기도 안성 출신의 홍사익이다. 그는 1969년 일본이 펴낸 일본 육군사관학교라는 책의 연표에도 영친왕을 비롯한 대한제국의 왕족과 함께 실려 있다. 그것은 오로지 그의 실력이었다. 몇 해전 소설가 이원규 작가가 저술한 [마지막 무관생도들]이라는 책을 보면서 한국근현대사를 공부하는 필자는 부끄러움을 크게 느꼈다. 무엇보다도 이원규 작가의 자료 접근과 소설가로서의 풍부한 상상력이 결합된 [마지막 무관생도들]은 소설이 아닌 지청천, 이응준, 홍사익에 대한 평전이었다. 그러면 왜 홍사익은 지청천처럼 일본군을 탈출해서 독립군에 투신하지 못했을까. 개인의 영달과 조국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결합된 천재 소년의 비극적 인생, 그것이 홍사익의 자화상이었다. 홍사익은 1889년 경기도 안성군 대덕면 소현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열 살때쯤 사서(四書)를 통째로 외워버려 인근 동리에서는 천재소년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16세 때 대한제국 유년학교에 입학했으며 1907년 무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동기로는 한국독립군의 맹장이자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이 있었다. 홍사익은 지청천과 무척 친하게 학교생활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속에 처해졌으며 마침내 홍사익을 비롯한 42명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홍사익은 강제병합 소식도 듣고 선배 김경천과 동기 지청천, 이응준이 모여 피로서 독립운동에 헌신하겠다는 다짐도 했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1914년 일본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당시 동기이자 가장 친한 친구였던 지청천은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했으며 그 때 부상을 당했다. 그리고 지청천은 선배 김광서(김경천)과 31운동 직후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활동한 후 청산리 전투와 자유시 참변을 겪으면서 한국독립군의 상징으로 성장했다. 홍사익은 지청전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원체 탁월한 천재였던 홍사익은 일본군에서도 고속승진이 확실한 일본 육군대학을 나오게 된다. 일본 육군대학은 출세의 보증수표이자 별을 달 수 있는 고속도로이다. 동기들 가운데 육군대학을 나온 사람은 없다. 1941년 홍사익은 소장으로 승진했으며 중국 화북지방에서 사단을 지휘했다. 그 때 한국독립군 가운데 윤세주를 비롯한 조선의용대원들이 태항산 지구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친구 지청천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군 한국광복군의 총사령관으로 조국 독립을 위해 자신을 불태우고 있었다. 홍사익은 다시 필리핀에 전속됐다. 거기에서 해방을 맞이하고 연합군에게 체포돼 1946년 9월26일 밤 전범으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경기도 수원 출신으로 홍사익과 함께 대한제국마지막 생도이자 일본 육사를 나온 안종인(안병범)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한국전쟁(6ㆍ25)에서 북한군과 대치하다가 자결했던 안병범이 바로 안종인이다. 그는 홍사익과 동기로서 1914년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그해 12월 큐슈의 구마모토 부대에서 근무했다. 1918년 시베리아 출병에 참가했다. 이때 함께 출정했던 충무공의 후예였던 일본 육사27기 이종혁은 독립군 탄압에 대한 죄책감으로 1920년대 탈출해 독립군이 됐지만 안종인은 해방 때까지 일본 대좌로서 훈장과 함께 특별하사금까지 받았다. ■ 예술가는 민족혼을 머금는다 위기의 시대, 국난의 시대의 예술가들이 존경받는 것은 민족혼을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데 있다. 남북이 만나서 가끔 함께 부르는 [고향의 봄]을 작곡한 홍난파는 그 곡이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친일음악가로 낙인찍혀 있다. 경기도 장단에서 태어난 윤효중은 도쿄 미술학교를 졸업한 수재였다. 그는 태평양전쟁이 극성이었던 1940년대 일제 침략전쟁을 찬양, 미화하는 조선미술전람회, 결전(決戰)미술전 등에 출품해 각종 상을 휩쓸었다. 1943년 열린 조선미술전람외에 천인침(千人針)을 응모해 조선총독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은 태평양전쟁에 나선 일본 군대의 무운장구를 기원하며 후방에서 끊임없이 바느질하는 한복 차림의 여인 전신상을 새긴 작품이다. 1944년에는 결전미술전에 [아버지 영령에 맹세한다]라는 작품을 출품했다. 이 작품은 전쟁에 나간 아버지의 뼛가루 상자를 앞으로 메고 있는 소년의 비애와 결연함을 아우르고 있으며 일본의 승리를 염원하는 내용이다. 1945년 1월에는 태평양전쟁에 출전한 가미카제를 기념하는 초상조각 작업을 시작했다. 조각가인 그는 일제의 전쟁에 동원된 민중들의 모습을 미화시키는 작품세계에 몰두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 법으로 친일을 변호하다 이명섭은 경기도 가평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6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했다. 1912년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서기과 서기 겸 통역생으로 법조계에 입문했다. 1914년 1월 조선총독부 판사로 임용돼 평양지방법원 영변지청 판사에 입명됐다. 그는 1919년 3ㆍ1운동 관련 사건을 잘 처리하였다고 상여금을 받았다. 1920년대와 그가 변호사로 개업하는 1937년까지 한국독립운동과 관련된 크고 작은 재판을 맡아 조선총독부로부터 훈장 서보장, 대례기념장을 받을 정도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자금 모금 김한필 사건, 흥업단 군자금 사건 등이 그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됐다. 해방 후 그는 미군정청 경성공소원 수석판사에 임명됐다. ■ 역사는 민족의 혼이다 오늘날 한국의 여러 텔레비전에서는 역사를 주제로 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역사는 미래를 밝혀줄 과거의 이야기이자 현재를 바라보는 거울이다. 해방 이후 한국사학계의 거두 이병도는 경기도 용인 출신이다. 그는 보성전문학교 법률학과를 졸업했으며 1915년 일본 와세다 대학 고등예과 문과를 수료했고 사학과를 졸업했다. 귀국 후 경성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원을 지냈으며 1925년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에 임명됐다. 조선사편수회는 식민사학을 집대성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그는 조선사편수회 촉탁으로 활동하면서 이마니시(今西)와 함께 조선사 제1편 신라통일 이전 등의 편찬을 담당했다. 이후 청구학회 위원, 1939년 11월 조선총독부의 지원으로 전국 유림단체를 연합해 총후봉공(銃後奉公)을 위한 정신운동에 나서도록 촉구했던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에 선임됐다. 그리고 해방을 맞이했다. 그는 해방 후 서울대 문리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역사학계의 권력으로 행세했다. ■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친일파의 흔적들 조선 헌종 때인 1844년 태어나서 1930년대까지 호의호식했던 수원 출신 김종한은 천수를 누리면서 조국을 배반한 고위공무원의 전형이었다. 그가 남긴 오염된 유산은 나 자신을 위해서는 공동체의 안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시그널이었다. 해방 이후 청산하지 못한 해방공간의 현재성이 오늘날 친일파 개념 규정에 어려움을 낳고 있다. 독립운동가들이 조국과 민족의 자유를 위해서 자신들을 희생할 때 친일파들은 비겁한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한국근현대사를 오염시켜 왔다. 역사의 뼈아픈 반성과 성찰이 보다 나은 미래를 밝혀 줄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후이다.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생활 속,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 청산되지 못한 아픈 과거 친일파 (1)

​​​​​​​■기억과 기념투쟁 2017년 친일파 인명사전을 주도적으로 펴냈던 국내의 한 연구소에서 일제강점기 식민통치기구 사전을 출간하였다. 발간사에서 기념해서는 안될 인물들을 기념하는 사회는 분명 정의롭지 못한 사회다. 기억투쟁은 곧 정의를 세우는 일이며라고 하면서 이 사전이 나오게 된 배경을 차분하면서도 강한 어조로 정리했다. 이 사전에는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식민통치기관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수록됐다. 그 가운데 중추원 항목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바로 이완용을 비롯한 권중현, 박제순, 이근택, 이지용 등 을사오적과 박영효, 송병준 등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들이다. 일제가 한국인을 보다 용이하게 통치하기 위해 키워 낸 친일파는 곳곳에 포진돼 있었다. ■대한제국의 몰락과 친일파 육성책, 군인들 1894년 동학농민군을 상대로 잔학한 학살을 자행했으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기 한반도의 물자와 인적자원을 강탈하고 훼손했다. 1910년 8월22일 이른바 한일병합조약의 위법체결로 대한제국은 마침내 그해 8월29일 일제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했다. 이른바 경술국치로 불린 치욕스러운 날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에게 경술국치는 생소한 역사적인 사건이자 용어이다. 제국주의 일본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비롯한 내정을 완전히 장악했으며, 1907년 8월1일에는 대한제국의 군대가 공식적으로 해산됐다. 여기저기서 대한제국 군인들과 일본군의 시가전이 전개됐다. 참령 박승환의 자결도 이 때 일어났다. 일제는 1909년 9월 대한제국 군부의 숨통을 끊고 한일병합의 토대를 만들기 위한 작업으로 육군무관학교를 폐교하려 했다. 그 선행작업으로 마지막 육군무관학교 생도들을 일본으로 데려가려는 계획을 세웠다. 1909년 8월 2일 학교장 이희두가 황제폐하가 군부를 폐지하고 무관학교를 폐교한다는 칙령을 내렸다고 하면서 칙령을 봉독했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의 종말이었다. 생도들은 통곡했다. 하지만 엄혹한 현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총 45명의 육군무관학교 마지막 생도들에게 일본으로 갈 것을 명했으며, 이들 가운데 김영섭만이 일본으로 가는 것을 반대하고 모든 검사에 불참했다. 총 44명의 육군무관학교 생도들은 일본으로 가기 위해 지식과 신체검사를 비롯해 적성검사를 차례로 받고 두 명을 제외한 42명이 일본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게 됐다. 1909년 9월3일 생도들은 일본 육군유년학교 생도들과 같은 정복을 입고 대한제국 소속임을 표시하는 오얏꽃 모표와 분홍색 금장을 달고 현해탄을 오가는 배에 조국의 미래를 짊어지고 올랐다. 일본으로 가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마지막 생도들의 성적순 제 1등은 유명한 소설가로 알려진 염상섭의 큰 형이었던 염창섭이었다. 물론 이들 가운데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 생도는 따로 있었다. 홍사익이었다. 그는 일본인들도 입학이 어렵다던 일본 육군사학관학교와 육군대학을 거쳐 일제 패망 시 일본군 중장에 오른 인물이었다. 조국을 외면했던 댓가로 그는 1946년에 A급 전범으로 처형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됐지만 일본 육사시절 그가 보여줬던 실력은 일본인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1909년 9월7일부터 대한제국 생도들은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예비학교인 육군중앙유년학교에서 극일(克日)한다는 자세로 한국학생반으로 편성돼 훈련받았다. 1910년 9월1일 대한제국육군무관학교 생도들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충격을 받았다. 대한제국과 일본이 합병한 것이었다. 이른바 경술국치이다. 한일병합 제1조 대한제국황제는 일본국천황에게 모든 권한을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양도한다라고 돼 있듯이 이제 무관학교 생도들은 더 이상 대한제국의 상징인 오얏꽃 모표를 달수 없었으며, 한인학생반도 없어졌다. 훗날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이 됐던 지청천과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강렬하게 전개했던 김경천, 전범으로 처형된 일본군 중장 홍사익, 대한민국 초대 육군참모총장이 됐던 이응준은 요코하마에서 독립투쟁을 위해 신명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두 명만이 독립운동에 자신을 바친다. 아니 육군무관학교 마지막 생도들 가운데 대부분은 친일의 길을 걸었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중국이 기억하는 그들의 국치일 오늘날 중국 대륙의 국치일은 9월18일이다. 1931년 일본제국주의가 만주를 본격적으로 침략한 날이다. 중국은 이때부터 1945년까지를 항일전쟁기로 부른다. 선양시(沈陽市)에 세워진 918역사박물관에는 중국의 전 국가주석 장쩌민(江澤民)이 쓴 물망국치(勿忘國恥)가 선명하게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항일전쟁시기 3천500만명의 중국인이 다치거나 죽었다. 비단 사람만 희생됐을까. 그들의 문화, 영토, 풍속 등도 상당 부분 훼손됐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이날을 국치일로 정한 것이다. 해마다 심양을 비롯한 중국 동북지방 대도시에서는 9월18일 오전 9시18분에 경적을 울려 이날이 국치일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처럼 한국과 중국에는 국치일이 모두 일본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중국은 용서는 하지만 절대 잊지는 말자고 강조한다. 왕징웨이(汪精衛)를 비롯한 한간(漢奸)에 대한 역사적 단죄, 만주국 황제였던 부의를 중생(重生)했던 무순전범관리소를 운영했던 중국인의 눈으로 보면 대한민국은 아직도 친일과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애써 우리의 현실은 중국과 다르다고 자위해 보지만 과연 우리의 자화상은 어떠한가. 경술국치, 나이 든 세대에게는 익숙한 용어이다. 하지만 용어일 뿐이지 실생활에서 전혀 느낌을 주지 못하고 있다. 하물며 청소년들에게는 잊혀진 세월이자 먼 옛이야기다. 기성세대는 한일관계를 의식해서 또는 과거이기 때문에 라고 얼버무리며 국치일에 대한 아픈 기억을 애써 봉합한다. 가슴 쓰린 현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깝고도 먼나라 일본에게 우리의 메시지는 정확하게 전달될 리가 없다.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친일의 역사 만주는 한국독립운동의 안전판이자 한편으로는 일제와 결탁한 세력들의 각축장이기도 하다. 독립운동가들은 어쩌면 일제의 감시와 탄압보다 밀정이나 친일파들의 눈초리를 벗어나야 했다. 그 고난의 삶을 어떻게 편안한 우리가 복원할 수 있을까. 독립운동은 나를 버리는 길이다. 그것도 온전히. 안중근, 윤봉길 의사가 그러하듯, 나를 버리고 온전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이 바로 독립운동의 소중한 자산이자 우리의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편안한 길은 어떠한가. 나를 버리기는 커녕, 세상의 악과 결탁해 나와 같은 이들을 더욱 힘들게 한다. 친일의 길을 그래서 정의나 공의와는 동떨어진 삶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변명이든간에. 2007년 민간단체에서 친일인명사전이 나왔다. 그 뒤 정부차원에서 친일단체 및 인명을 정리하는 작업이 마무리됐다. 아직도 법원에서는 친일과 관련된 줄소송이 판사들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정리되지 않는 역사의 갈무리 작업은 그만큼 지난하다. 2020년 7월 11일 대한민국 국군 영웅 백선엽 장군이 10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20대 만주국 조선인 특설부대 간도특설대에 근무했던 그가 해방과 한국전쟁 속에서 한국군의 영웅으로 자리잡았다. 어쩌면 한국군의 민낯 같다. 독립군과는 대척점에 있었던 인물이 해방 이후 미군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영달을 꾀했다. 뿐만 아니라 청빈한 삶을 살았고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군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사실은 한 개인의 삶이 어떠하게 조명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척도라고 할 수 있다. 역사의 역린을 한번은 헤집어서 그 상처의 환부를 도려내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것도 역사의 책무이다.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생활 속,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 2.무의식 속 자주 사용하는 일본어

행정법률 용어, 여전한 일본어 한자 사용 광복 75주년인 지난 8월 15일, 이 날은 국경일이라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한다. 이 날뿐만 아니라 31절, 개천절, 제헌절, 한글날도 국경일이므로 태극기를 게양한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쓰는 게양(揭揚)이라는 표현이 일본어 잔재라는 것이다. 한자식 표기이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말이라고 생각하고 무의식적으로 썼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말로 표현하면 무엇일까? 태극기를 올리다, 태극기를 단다라고 해야 올바른 표현이다. 이처럼 우리 생활에서 쓰이는 말 중에는 한자식 표현의 일본어가 적지 않게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잉꼬부부이다. 매스컴이나 언론에서 다정하고 금슬이 좋은 부부를 소개할 때나 우리 주변에서도 이러한 부부를 잉꼬부부라고 한다. 잉꼬부부에서 잉꼬는 일본어 잉꼬(鸚哥, いんこ)에서 가져온 말이다. 순화된 우리말은 원앙부부이다. 이와 같은 한자식 표현의 일본어는 의외로 많다. 한 해를 보내면서 아쉬운 점은 달래고 마무리하기 위해 모임을 갖는데, 이를 흔히 망년회(忘年會)라고 한다.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곤 하는데 이 역시 일본어이며, 우리말로 순화하면 송년회(送年會)이다. 이번 연말에는 망년회보다는 송년회로 한 해를 정리해 보자. 일본어 한자는 주로 행정 및 법률 용어와 일반 서식에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초등학교 수학 시간에 배우는 것이 가감(加減)과 승제(乘除)인데, 이는 더하고 빼기, 곱하기와 나누기이다. 승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가감이 일본식 표현이라는 것은 잘 모르고 여전히 그냥 사용하고 있다. 이외에도 가건물(假建物)은 임시건물, 공람(供覽)은 돌려봄, 감봉(減俸)은 봉급 깎기, 노견(路肩)은 갓길, 견학(見學)은 보고 배우기, 결재(決裁)는 재가, 고객(顧客)은 손님, 고수부지(高水敷地)는 둔치, 과세(課稅)는 세금 등 마치 우리말 같지만, 적지 않은 일본식 표현이 우리 생활에 쓰이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올바른 우리말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한자식 일본어 중에 우리말로 순화할 수 있는 것을 우선적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나대지(裸垈地)빈 집터, 나염(捺染)무늬찍기, 낙과(落果)떨어진 열매, 납득(納得)이해, 납입(納入)납부, 내주(來週)다음 주, 내역(內譯)명세, 노점(露店)거리가게, 다반사(茶飯事)예삿일흔한 일, 당분간(當分間)얼마 동안, 대기실(待機室)대합실(待合室)기다림방, 가계약(假契約)임시 계약, 가성소다양잿물, 가출(家出)집 나감, 견적서(見積書)추산서(推算書), 결근계(缺勤屆)결근신고서, 결식아동(缺食兒童)굶는 아이, 계주(繼走)이어달리기, 고객(顧客)손님, 고참(古參)선임, 공란(空欄)빈칸, 구보(驅步)달리기, 굴삭기(掘削機)굴착기, 기라성(綺羅星)빛나는 별, 마대(麻袋)포대자루, 명찰(名札)이름표 등 무수히 많다. 요즘은 코로나로 거리두기를 하고 있지만, 봄과 가을이면 화사한 꽃과 단풍을 보기 위해 들로 산으로 간다. 이때 버스를 대절하는데, 대절(貸切)이라는 것도 일본식 표현이다. 우리말로는 전세(專貰)가 더 적합하다고 한다. 일본어 잔재가 많은 건설과 인쇄 현장 건설과 토목, 인쇄 현장에는 특히 일본어 잔재가 많이 남아 있다. 이는 순화된 우리말을 사용하는 것보다 오래 전부터 입에 익숙해 현장에서 사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보니 일본어가 우리말처럼 공용되기도 한다. 그러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 공사 현장에서 많이 사용하는 표현으로 공구리 친다라는 말이 있다. 공구리(コンクリ)는 콘크리트의 일본어 コンクリト에서 줄어든 말이다. 공구리는 양회반죽 또는 원어인 콘크리트로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노가다(土方, どかた)도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우리말로 하면 공사판 노동자를 뜻한다. 그밖에 자주 쓰는 일본어와 순화한 우리말을 보면, 가쿠목(角木)은 각목, 가타(形)은 틀 또는 거푸집, 낫토(ナット)는 너트, 네지(螺子, ねじ)는 나사, 니빠(ニッパ)는 니퍼, 단도리(段取り, だんどり)는 채비 또는 단속, 단카(擔架, たんか)는 들 것, 데모도(手許, てもと)는 보조공 또는 곁꾼, 도끼다시(硏ぎ出し)는 갈기 또는 갈아 닦기, 도라이바(ドライバ)는 나사돌리개 또는 드라이버, 도란스(トランス)는 변압기, 메지(目地, めじ)는 줄눈, 멧키(鍍金, めっき)는 도금 또는 금 입히기, 판네루(パネル, panel)는 널빤지, 보루바코(ボルばこ)는 골판지 상자 등이 있다. 인쇄 현장에서는 교정스리(교정쇄), 도비라(속표지), 세네까(책등), 하시라(제목), 찌라시(전단지, 낱장광고), 구아이(물림여백), 하리(맞춤선), 호도시(자투리), 시야케(마무리), 소부(판굽기), 도무송(때냄기) , 조아이(장합), 시로누끼(희게 빼기), 돈땡(도려찍기), 하리꼬미(터잡이) 등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남용되는 일본어 잔재들 가끔 주변에서 쿠세가 좋지 않다라는 말을 듣곤 한다. 습관이나 생활태도 등이 좋지 않을 때 나이든 사람들이 사용한다. 쿠세는 일본어 くせ(癖)를 강하게 발음한 것으로 버릇이라는 뜻이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쿠사리를 듣다라는 말도 듣기도 하는데, 쿠사리(腐り)는 면박 또는 핀잔을 뜻한다. 나와바리(繩張り, なわばり)도 자주 쓰이는 말이다. 여기는 내 나와바리야라고 하는데, 여기는 내 구역이야이르는 뜻이다. 난닝구(ランニング)라는 말도 많이 사용되는데, 러닝셔츠의 일본식 표현이다. 이외에도 평소에 자주 듣거나 사용하고 있는 일본어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라이방(ライバン): Ray Ban의 일본식 표기로 보안경 또는 색안경, 레미콘(レミコン): ready-mixed concrete의 일본식 표현으로 회반죽, 레자(レザ): leather의 일본어로 인조 가죽, 레지(レジ): register의 일본어로 (다방)종업원, 리야카(リヤカ): rear car의 일본어로 손수레, 마후라(マフラ): muffler의 일본어로 목도리, 만땅(滿タン): 가득 채움, 맥고모자(麥藁帽子): 밀짚모자, 멜로극(メロ劇): 통속극, 몸빼(もんぺ): 일 바지, 무뎃뽀(無鐵砲, むてっぽう): 막무가내, 바케쓰(バケツ, bucket): 들통, 양동이, 백미라バックミラ): back mirror의 일본식 표기로 뒷거울, 백미러, 벤또(辯當, べんとう): 도시락, 비까비까(ぴかぴか)하다: 번쩍번쩍하다, 빤쓰(パンツ): 팬티, 쓰키다시(突き出し, つきだし): 곁들이 등등. 아무리 좋은 외래어보다도 한글이 더 휼륭 치매 예방에 좋다는 설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화투를 즐겨하는데, 그중에 고스톱이라는 것이 있다. 고스톱에서 많이 사용하는 고도리, 쇼당, 나가리 등은 모두 일본어로 새 다섯 마리, 담판, 무효 등으로 순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겠지만, 자주 쓰다보면 우리말이 훨씬 자연스럽지 않을까 한다. 차량을 운전하다 보면 타이어가 구멍이 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무심코 빵구 났다라고 한다. 빵구는 puncture를 일본어로 표기한 것인데, 이 역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일본어 잔재이기도 하다. 흔히 요즘 시대를 국제화 또는 세계화라고 한다. 외래어는 글로벌 시대라고도 한다. 그렇다보니 우리말보다는 외래어를 사용하는 빈도가 높아가고 있다. 어쩌면 외래어를 쓰는 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럽게 느낄 정도이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방송에서 너무 외래어를 남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로드맵, 테스크 포스, 데스노트 등 외래어가 언론계와 정치계에서 무분별하게 남용되고 있다. 더욱이 겐세이, 야지, 뿜빠이 등이 일본어 잔재가 여전히 사용되고 현실은 안타깝기만 하다. 거리를 걷다보면 어원조차 알 수 없는 간판의 외래어 표기는 마치 외국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이다. 한때 우리말 이름 짓기가 유행한 때가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고운 우리말을 이름에 넣어서 작명하고 있다. 최근 한글문화연대는 국어문화원연합회, 티비에스와 함께 함께 써요! 쉬운 우리말-우리말 고운말 사업을 펼치고 있다. 9월 1일부터 매주 평일 오전에 방송되는 우리말 고운말은 어려운 공공언어, 교통언어 등을 쉬운 우리말로 바꾸어 소개하고 있다. 9월 9일 방송에는 키오스크무인 단말기와 원스톱한자리, 일괄이라는, 요즘 많이 사용되고 있는 외래어를 우리말로 바꿔준 바 있다. 그동안 외래어가 너무 남용되어 우리말이 사라져가는 느낌이 없지 않다. 더욱이 일제강점이라는 불행한 시기를 겪은 상황에서 외래어뿐만 아니라 일본어 잔재까지 일상생활에서 남용되고 있다는 점은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한글이 세계적으로 가장 우수한 표기 수단 또는 문자이라고 한다. 이처럼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한글이 정작 우리 생활에서는 소홀하게 또는 천대받고 있지 않나 한다. 언어는 우리의 살아가는데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한국인으로 한글을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것이 과연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일까. 얼마 후면 한글날이 돌아온다. 아무리 좋은 외래어라도 우리말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우선돼야 할 것이다.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 성주현 숭실대 HK연구교수

[생활속,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 1.애매하다·망년회·땡땡이무늬… 당신도 쓰고 있나요?

어릴 적 어머니의 심부름 중에는 아지노모토(味の素, あじのもと)를 사오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 지금이야 맛을 내는 다양한 조미료가 워낙 많아서 고민을 하지만, 그때만 해도 이른바 아지노모토 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아지노모토는 인공조미료인데, 지금도 인터넷에서는 아지노모토 관련 상품들이 팔리고 있다. 아지노모토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개발한 인공조미료이다. 또 초등학교 시절에는 친구들과 함께 놀다보면 짱께미뽀라는 것을 많이 한다. 그런데 청년 시절 일본에 갔을 때, 일본 어린이들이 짱께미뽀를 하는 것으로 보고 이것이 일본어였구나 라고 했던 적이 있다. 짱께미뽀는 짱겐뽕(じゃんけんぽん)의 변형으로 우리말의 가위바위보이다. 1960년대 초에 태어난 필자는 어릴 적 생활 용어 중에는 일본어가 일상적으로 사용될 정도였다. 가이당(계단), 자부동(방석), 우와기(상의), 다마(구술전구), 다마네기(양파) 등등 몇 년 전 국회에서 겐세이(牽制, けんせい)와 야지(野次, やじ)라는 일본 말을 사용해서 한바탕 곤욕(?)을 치른 바 있다. 불필요한 일본어를 사용하므로써 국회의원들이 서로 얼굴을 붉히고 공방을 벌인 것이다. 겐세이는 견제를, 야지는 야유 또는 빈정거리며 놀림을 뜻하는 일본어이다. 광복 75주년을 맞은 현 시점에서도 우리 일상생활에는 일제의 잔재인 언어 즉 일본어가 여전히 남용되고 있다. 광복절이나 31절이 되면 매스컴이나 언론에서 일제강점기의 잔재인 식민청산을 부르짖고 있으며, 실제 식민청산을 위한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요즘 국제화 시대에 언어에 대한 식민청산은 다른 분야보다 관심을 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일제강점기 사용했던 언어도 점차 순화돼 가고 있다. 대표적인 분야가 행정용어이다. 지금도 각종 법률이나 판결문, 정부의 공시문 등을 보면 일본식 표현이 적지 않다. 관행적으로 사용하다보니 무의식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 국립어학원 발행 『일본어 투 용어 순화 자료집』에는 1천171개나 우리 일상 속에 스며든,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일본어는 얼마나 될까. 그동안 일본어나 일본어 투의 용어에 대한 순화는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광복 60주년을 맞는 2005년 국립어학원에서는 『일본어 투 용어 순화 자료집』이라는 책을 발행한 바 있다. 이 자료집에 의하면 순화 대상 용어가 무려 1천171개나 수록될 정도로 일제강점기 사용했던 일본어 또는 일본어 투 용어가 우리 사회에 일상화됐다. 이중 일상에서 사용하고 있는 일본어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가라오케(空オケ, からオケ)이다. 가라오케는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는 대중오락의 한 형태인데, 가라의 비어 있다는 일본어와 오케스트라의 준말 오케의 합성어이다. 즉 가라오케는 악단이 없는 가짜 오케스트라라는 의미이다. 가라오케는 녹음 반주라는 순화용어를 사용할 수 있다. 가라오케의 가라(空, から)라는 말도 많이 사용되는데 가짜라는 뜻으로 가라친다 또는 가라치지 말아라 등으로 쓰인다. 가부시키(株式, かふしき)라는 말도 자주 사용하는 일본어의 하나이다. 직장인들이 점심을 위해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각자 음식 값을 치룰 때 오늘 밥값은 가부시키하자라고 한다. 가부시키는 나눠 내기 또는 추렴이라는 순화 용어로 대체할 수 있다. 가케우동(掛け, かけうどん)도 많이 쓰는 말이다. 요즘도 일본식 음식점에서는 가케우동이 메뉴판에 올라있고, 이를 주문하면서 자연스럽게 일상생활에 스며든다. 우동(, うどん)이라는 말도 너무 일상화돼 일본어가 아니라 우리말로 착각할 정도이다. 가케우동은 가락국수, 우동은 국수로 순화해서 사용해도 충분히 의미 전달이 되는 데도 말이다. ■ 음식과 관련된 광범위한 일본어 남용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음식과 관련된 일본어도 생각보다 많다는 점이다. 대전에 가면 유명한 빵이 소보로빵이다. 맛도 좋고 유명세를 타고 있어서 필자 역시 대전역을 이용할 때면 소보로빵을 사곤 한다. 그런데 이 소보로빵(そぼろパン)이라는 말이 일본어였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별 의미 없이 사곤 했는데 아차 싶었다. 우리말로는 곰보빵이라고 하는데, 얼마나 좋은 표기인가 한다. 음식점에 가서 싱거우면 흔히 다데기를 달라고 하는데, 다데기(たたき)이서 온 말로 역시 일본어이다. 우리말인 다진 양념 또는 양념을 달라고 하면 어떨까 한다. 이외에도 무심코 사용하는 말 중에, 특히 먹는 것과 관련된 일본어 투 표기는 얼마나 될까 했는데, 생각보다 광범위 하게 우리 주변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그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고로케(コロッケ), 덴뿌라(天), 오뎅, 나베우동(鍋, なべうどん), 스시(壽司, ずし), 다시(出し, だし), 다쿠앙(澤庵, たくあん), 대하(大蝦), 돈가스(豚カツ, とんカツ), 돈부리(, どんぶり) 사라(皿, さら), 모찌(餠, もち), 벤또(辯當, べんとう), 복지리(鰒じる, ふぐじる), 사라다(サラダ), 센베이(煎餠, せんべい), 소바(蕎麥, そば), , 수타국수(手打-), 시오야키(鹽燒き, しおやき), 아나고(穴子, あなご), 앙꼬(子, あんこ), 야키니쿠(燒き肉, やきにく), 야키만두(燒き饅頭, やきまんじゅう), 오코시(, おこし), 와사비(山葵, わさび), 짬뽕(ちゃんぽん), 사시미(刺身, さしみ) 등이 있다. 이와 같은 일본어는 고로케는 원어인 크로켓, 덴뿌라는 튀김, 오뎅은 어묵, 나베우동은 냄비국수, 스시는 초밥, 다시는 맛국물, 다쿠앙은 단무지, 대하는 왕새우, 돈가스는 돼지고기 너비, 돈부리는 덮밥, 사라는 접시, 모찌는 찹쌀떡, 벤또는 도시락, 복지리는 복국, 사라다는 샐러드, 센베이는 전병과자, 소바는 메일국수, 소보로빵은 곰보빵, 수타국수는 손국수, 시오야키는 소금구이, 아나고는 붕장어, 앙꼬는 팥소, 야키니쿠는 불고기, 야키만두는 군만두, 오쿠시는 밥풀과자, 와사비는 고추냉이, 짬봉은 초마면, 사시미는 생선회로 순화하면 된다. 음식을 먹을 때도 한번쯤 생각해보고 주문을 해야 할 듯하다. ■ 대학생이 많이 사용하는 일본어는 구라(거짓말), 애매하다(모호하다) 등 그런데 육아에서도 일본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말을 배우는 시기는 대체로 두세 살 시기이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부모,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조부모, 고모나 이모 등으로부터 한두 마디 들으면서 말을 배운다. 그런데 이 시기에 많이 듣는 말 중에는 일본어 투 용어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가장 많이 듣는 말 중에 하나가 찌찌(乳, ちち)이다. 엄마들이 아이를 키우면서 찌찌 먹자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곤 한다. 찌찌는 젖이라는 일본어이다. 밥을 먹을 때도 맘마 먹자라는 말도 자주 사용하고 있는데, 맘마(まんま)는 어린이들이 먹는 밥의 일본어이다. 광복 70주년인 2015년 서경덕 교수 연구팀은 나라를 찾은 지 70년이 된 지금 상황에도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일본어 잔재들의 현 실태를 조사,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점차 우리말로 바꾸는 작업을 모색하기 위해 설문 조사를 기획한 바 있다. 그 결과 수도권 대학생들이 자주 사용하는 일본어는 구라였다. 구라(くら)라는 말의 뜻은 어학사전에는 거짓말을 비속하게 이르는 말이라고 돼 있지만, 일본어의 잔재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외에도 애매하다(모호하다), 기스(흠집), 간지(멋), 닭도리탕(닭볶음탕) 등도 많이 사용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설문조사에 의하면, 일본어 잔재에 대한 정보를 가장 많이 접하는 매체에 대해서는 인터넷,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 순으로 집계됐다. 이와 같은 일본어 잔재에 대해 우리말로 바꿔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60% 정도가 바꿔야 한다고 했으며, 일본어 잔재가 사라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에 대해서는 국민의 무관심, 일본어 잔재에 대한 교육 및 홍보부족, 정부의 무관심 등이라고 했다. 성주현 숭실대 HK 연구교수

정치 연재

지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