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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40. 에필로그

천년 경기, 그 장엄한 한해가 마무리 되고 있다. 1018년 시작된 경기가 2018년을 맞아 경기 천년의 역사문화적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며 한 해를 시작했는데, 어느덧 1년여의 시간을 흘러갔다. 그렇다면 우리는 경기의 이름과 정체성이 드러난 지 천년이 되는 올해 경기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 그간 우리는 천년의 역사만이 아닌 경기로 이름 지어진 땅위에 존재하는 수많은 문화유산 중 우리 역사 속에서 최고의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을 찾았다. 그리고 이 문화유산의 숨결을 느끼고, 그 문화유산을 기반으로 한발 한발 나아간 역사의 발전을 되새겨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이 문화유산을 통해 경기 천년의 의미를 찾아냈다. 그 결과 우리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1018년에 처음 경기제도가 만들어지면서 현재의 경기지역이 한반도 중심부에 설정되며 우리 역사발전의 중추가 되었다는 평범한 듯 하지만 비범한 진실이었다. 경기지역의 문화유산은 동시대 최고의 문화 산물일 수 밖에 없고, 이 문화 산물은 오늘날 우리 경기지역의 도민들에게 상당한 자부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경기도는 고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였다. 더불어 시대의 격변기마다 정치변동을 해결하는 주역의 터전이었다. 특히 경기도는 한강을 중심으로 고대국가가 수립되었고, 이후 삼국간의 통일국가를 만들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와 같은 경기도의 지리적 특성으로 인하여 다양한 인물들의 탄생과 성장이 이어졌고 이를 통해 시대를 주도하는 사상이 태동되었다. 경기도가 국가의 중심지이기에 전국 각지의 인물들이 모여들어 지역의 특성들이 합쳐지면서 포용과 융합의 문화가 나타나고 소통이 자유로운 정체성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역사속에서 외세의 침입시에도 경기지역 백성들의 헌신적 희생과 투쟁으로 국난을 극복했으며 일제강점에 대한 항거 역시 경기지역이 가장 활발했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도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으로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기여하였다. 그래서 경기천년은 이제 단순히 경기도가 천년이 되었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의 미래 천년을 경기도가 이끌어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금 말하지만 우리나라 역사는 곧 경기도의 역사와 함께 했고, 경기도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의 핵심이었다. ■경기의 인물이 시대의 사상을 만들어 내다 경기지역은 최고의 문화유산이 만들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최고의 인물도 태어나게 했다. 경기지역의 대표적 인물인 황희는 성리학을 실학으로 인식하고 세종대 실용적 경세사상을 보여주었다. 그의 경세사상의 핵심이 인권존중과 민본의식, 개혁을 통한 백성의 불편과 고통 해소를 목표로 하고 있음과 더불어 구체적인 경세 정책으로는 기강 확립 방안, 치안과 국방강화책, 빈민구제책, 교육정책, 언론과 여론 중시의 5가지 측면으로 나타났다. 황희와 같은 파주 지역 출신인 율곡 이이 역시 실학을 추구한 인물이었다. 율곡은 경세학을 추구한 인물로 실천이 수반되지 않으면 학문과 지식은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학문은 실천적으로 현실에 적용이 되어야 그 존립 기반이 확보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처럼 이이는 성리학 전성기와 실학의 맹아기에 위치하여 성리학을 하면서도 실학적 사유에 앞장섰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경기지역의 실학과 개방성을 주도한 인물은 성호(星湖) 이익(李瀷)이다. 성호는 퇴계를 사숙하고 이기론이나 예학 등에도 상당한 조예를 가졌지만 그의 학문적 관심은 사회제도의 개선에 있었다. 정약용은 실학의 완성자라고 불리울 정도로 경기지역의 대표적 실학자이다. 그는 일찍부터 성호를 사숙하면서 가학으로 토목학, 건축학, 상수학 등 다양한 학문을 익혔다. 이러한 학문적 기반이 그를 실학자로 성장시킬 수 있었고, 정조시대 한강의 주교(舟橋) 설치와 화성 설계 등 개혁추진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이와같이 경기지역은 조선 유학의 기틀이 만들어진 곳이기에 그 사상의 맥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에 경기지역에서는 유교의 문화 산물이 대대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우리 역사 최고의 유교유산이 태동되었다. 포은 정몽주를 배향하는 용인의 충렬서원, 정암 조광조를 배향하는 용인의 심곡서원, 율곡 이이를 배향하는 파주의 자운서원, 오산의 궐리사는 조선 최고의 유교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경기지역의 최고 문화유산은 단연코 조선왕릉이다. 조선왕릉은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만큼 이미 국제적으로 인정된 최고의 문화유산이다. 600년간 지속되어 온 제례문화와 풍수적 가치를 두고 만든 왕릉의 조건 그리고 이를 기록한 의궤 등이 바로 조선왕릉이 우리 역사만이 아닌 세계역사에서도 인정받는 최고의 문화유산이 될 수 있었던 기반이다. 여기에 더해 정조시대 개혁의 상징인 수원 화성이 존재한다. 정조는 화성을 통해 새로운 나라를 만들려고 하였다. 화성을 기반으로 추진했던 정조의 개혁을 우리는 근대화의 시작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 경기 천년의 지속 이유는 무엇일까? 경기도가 천년을 역사와 문화의 중심으로 지속 가능했던 특별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는 당연히 한반도의 중심에 있으면서 한강과 임진강 등의 큰 강을 이용한 교통로와 대로를 통한 교류가 이루어진 것이 대표적이다. 이와 더불어 개방성, 창조성, 혁신성, 실용성 등이 항상 존재하였기 때문에 경기도가 천년만이 아니라 민족의 태동부터 오늘날까지 한반도의 중심인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경기지역은 한반도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그 동안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중앙에 수도 서울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며, 경기도만의 독자적인 발전계획을 수립하지 못한 채 수도권이라는 이름아래 주변으로 인식되어 왔던 것이다. 특히 개발제한구역, 수도권 정비계획, 군사시설 보호구역, 상수원 대책지역 등 여러 가지 규제로 인하여 대부분 지역의 개발이 제한됨으로써 경기지역의 잠재력이 온전히 발휘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는 우리 민족을 지켜왔다. 경기도는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외세 침입이 많이 존재하였다. 하지만 경기도민의 자주성으로 인하여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데 가장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몽고 침입시 용인 처인성과 안성의 죽주 전투에서 승리하여 위기를 극복하였고, 임진왜란 당시 고양 덕양산에서 행주대첩으로 일본군으로부터 한양도성을 탈환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만 자주성을 보인 것이 아니다. 병자호란 당시에 수원과 용인의 광교산에서 김준룡 장군의 승리가 있었다. 관군의 역할과 이 일대 백성들의 공동의 노력에 의한 결과였다. 일본에 의해 나라를 강탈당할 때 가장 격렬하게 항쟁한 곳이 바로 경기도였다. 이천수창의소를 중심으로 전국 13도 의병대가 조직되었고, 그 사령부가 바로 이천이었다.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전국 의병이 조직되어 일본과 투쟁한 것이다. ■ 경기 천년 이후의 천년 경기의 미래 경기는 우리 역사의 진보와 개혁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우리 역사상 최고의 개혁이라고 이야기하는 대동법(大同法)이 경기도에서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그리고 1791년(정조 15) 모든 백성들이 자유롭게 상업행위를 할 수 있는 개혁인 신해통공(辛亥通共)이 경기도에서 성공하여 전국으로 보급할 수 있었다. 이처럼 경기도는 오랜 역사속에서 위민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혁신의 터전이었다. 이러한 혁신의 정신과 실천을 새로운 경기 천년에서 지속적으로 계승하여야 할 것이다. 삼국시대 세계와의 교역 중심지가 오늘날 경기도 화성시의 당성(唐城)이었고, 고려시대에 전 세계 최고의 무역기지가 개성의 벽란도였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도 개성과 수원 그리고 안성은 국내 최고의 상업도시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경기도의 역사성과 실용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콘텐츠와 경제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 경제 활성화를 막는 규제를 과감히 철폐하고 세계인과 교류해야 한다. 세계의 주도권은 대서양에서 태평양 지역으로 옮겨오고 있어 21세기는 태평양시대가 될 것이다. 특히 한?중?일로 대표되는 동북아시아는 국제적 교류관계에 있어 지정학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러한 동북아 경제권의 중심에 있으며, 그 핵심역할을 담당할 곳이 바로 경기도 지역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경기지역은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남북 화해만이 아닌 남북통일이 된 후에도 여전히 한민족 역사의 중심무대일 수밖에 없어 그 중요성이 크다고 하겠다. 이를 위해 경기도의 정체성을 더욱 세밀하게 연구하고 보급하며, 이를 계승하는 문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경기 천년 이후 도 다른 천년 경기의 미래를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세계가 우리 경기를 기다리고 있다. 김준혁(한신대학교 정조교양대학 교수)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39. 우리 역사상 최고(最古) 무예서‘무예제보(武藝諸譜)’

2017년 10월 27일 『무예도보통지』는 제13차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 회의 심사를 거쳐 세계기록유산 목록에 올랐다. 오늘날 태권도의 원류와 책안에 그려진 그림이 단원 김홍도의 그림이라는 것이 인정되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대한민국과 함께 추진하여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래도 우리 민족의 기록유산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우리 역사의 쾌거이기도 하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는 그동안 체육사나 무예사에 있어서 더 나아가 국방사에 있어서까지 반드시 이해되어야하는 필수적인 저서로 알려져 있다. 『무예도보통지』는 잘 알려진 대로 조선의 22대 국왕 정조(正祖)의 명에 의해 이덕무, 박제가가 고증과 글쓰기를 하고 당대 최고의 무사인 백동수가 시연을 하여 1790년에 펴낸 무예서이다. 저자들과 시연자에 대한 명백한 기록이 있음에도 『무예도보통지』 및 관련된 사료에 김홍도가 도보(圖譜)의 그림을 그렸다는 기록은 없다. 그럼에도 북한이 김홍도가 그림을 그렸다고 주장하는 것은 증명된 사실이 아닌데, 이렇게 유네스코에 등재신청서 작성에 김홍도를 확정하여 신청한 것은 나름의 근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측면에서 남북 화해의 시대에 접어든 시기이니 북한은 김홍도가 『무예도보통지』의 그림을 그렸다는 근거를 제시해주면 참으로 좋을 것 같다. ○ 무예도보통지와 무예신보 사실 『무예도보통지』는 사도세자가 1759년에 간행한 『무예신보(武藝新譜, 무예신식(武藝新式)이라고도 불림)의 18기를 근간으로 해서 만들었다. 사도세자의 『무예신보』는 1598년에 간행된 『무예제보』를 근간으로 한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훈련도감을 설치한 조정은 군사를 육성하기 위해 새로운 무예서를 만들고자 하였다. 일본의 위력적인 검술 앞에 조선과 명나라의 군사들은 위축되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훈련도감 낭청인 한교(韓嶠)에게 명하여 왜구를 물리친 경험을 토대로 편찬된 명나라의 병서 『기효신서』에 나오는 곤봉 등 6가지 무예를 골라 자세와 동작을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풀이한 무예서를 만들고 이름을 『무예제보』로 지었다. 그러니 우리 『무예도보통지』의 원류는 곧 『무예제보』인 것이다. 그러나 『무예제보』는 한말 국내 사정과 서구의 침투 그리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사라져버렸다. 그러다가 『무예제보』가 프랑스 파리 동양어학교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최근 조선 무예서의 원류인 『무예제보』 초간본을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소장하게 되었다. 프랑스 국립파리동양어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무예제보』는 숙종대 재간행된 판본인데, 2017년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소장하게 된 『무예제보』는 1598년 초간본이다. 이는 한국 무예사 연구와 서지사(書誌史)에 있어 하늘이 준 선물이었다. 수원화성박물관이 경기도에 있으니 무예제보는 경기도 최고의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 무예제보의 무예 조선 최초의 무예서 『무예제보』 는 한명회의 5대손인 한교(韓嶠)에 의해 1598년(선조31) 10월에 간행되었다. 무예제보는 최초의 본격적인 무예서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책이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왜구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정립된 절강병법(浙江兵法)의 우수성을 인지하고 이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무기와 병법이 조선군에 적용하게 되는데 무예제보는 이러한 시대적 변화의 산물이다. 즉 기존의 병법을 새로운 병법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이전까지 경시되던 단병(短兵), 곧 창과 검을 다루는 살수(殺手)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이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무예서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기효신서(紀效新書)』에서 단병무예(短兵武藝)인 등패, 장창, 당파, 낭선, 곤봉, 쌍수도를 골라서 제(製)는 곡식(曲式),해(解)는 설(說), 습법(習法)은 제도(譜圖)로 고쳐서 편찬한 것이다. 그동안 『무예제보』의 경우 국내에는 원본의 존재유무가 알려져 있지 않고 유실되었다고 추정하였으며, 대략적인 내용은 『무예도보통지(武藝面譜通志)』의 원(原) 또는 증(增)이란 표시를 통하여 알 수 있었다. ○ 기효신서와 무예제보 한양을 수복한 선조는 유성룡의 건의에 따라 『훈련도감』을 만들고 도제조에 유성룡, 대장에 조경, 실무를 책임지는 유사당상에 병조판서 이덕형을 임명하여 군사들을 모집하여 삼수병(三手兵)을 육성하기 시작하였다. 사수(射手)는 활쏘기를 잘 하는 병사이고, 포수(砲手)는 총과 대포를 쏘는 병사, 그리고 살수(殺手)는 창검을 잘 쓰는 병사였다. 당시 사수보다 포수와 살수의 양성에 치중하였다. 이에 따라 거리의 아동들까지 포수, 살수의 무예를 놀이로 삼게 되었으며, 끝내는 아동대까지 편성되어 군사훈련을 받기에 이르렀다. 훈련도감은 선조 27년(1594) 2월에는 독립 군영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 무렵부터 한교는 『기효신서(紀效新書)』의 무예 중 특히 살수에 관한 내용을 번역하는데 주력하였다. 『무예제보』의 기예질의에 한교가 명나라 장수 허유격과 무예의 요체에 대해 질문하고 그 답을 얻는 대목이 나온다. 당시 허유격은 무예의 요체는 첫째 담력, 둘째 힘, 셋째 정예함, 넷째 빠름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한교는 조선에 참전한 명나라 장수들과 무예의 요체와 수련에 대해 논의 하고, 명나라의 『살수제보(殺手諸譜)』를 번역하였다. 평양성 탈환 직후 명나라 군대의 막사를 찾은 선조는 제독 이여송(李如松)에게 전투에서 승리한 비결은 척계광의 『기효신서』의 전법을 따랐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에 선조는 역관들에게 상급을 내려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구해 유성룡에게 전면서 번역하도록 지시하였다. 한교는 살수제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나는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유성룡은 나라가 위급하니 한교가 비록 상(喪)을 당했다 하더라도, 하던 일을 계속하여 『살수제보』의 번역과 함께 『기효신서』의 내용 중에도 미비점이나 난해한 부분을 명나라 장수들의 의견을 물어 명확히 해석하도록 하였다. 이는 특히 선조가 『기효신서』가 매우 높은 효율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교는 검법을 비롯한 무예의 여러 동작이 서로 연결되는 내용에 대한 해설서가 없었기 때문에 명나라 진중에 가서 명군들의 훈련을 관찰하거나 질문으로 의문점을 풀어갔다. 『무예제보』는 전쟁 중 시급하게 간행된 무예서로서,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곤(棍), 등패(?牌), 낭선(狼?), 장창(長槍), 당파(??), 장도(長刀)의 6기의 무예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중국 장도의 기원은 일본에 두고 있다. 장도는 왜구의 장도이며, 중국을 경유하여 조선에 도입되면서 쌍수도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무예제보』는 단순히 중국의 병서를 베낀 것이 아니라 한 단계 진화되었다. 첫째, 무예의 흐름을 정해 차례로 자세를 익힐 수 있도록 편집한 것이다. 둘째, 명나라 장수들조차 잃어버린 장창 12세법을 후보라는 이름으로 복원한 일이다. 셋째, 동작을 풀이한 보를 한글로 언해하여 한문을 잘 모르는 일반 병사들도 책을 볼 수 있도록 편찬했다는 사실이다. 자세와 동작을 한글로 풀이하는 전통은 『무예신보』를 거처 『무예도보통지』까지 이어졌다. ○ 무예제보의 세계기록유산 등재 1982년 한불협정에 의하여 프랑스에 있는 우리나라의 귀중한 문헌들을 들여오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프랑스 국립 파리 동양어학교 도서관에 있는 자료를 마이크로필름으로 복사하여 국내에 전해지면서 무예제보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하늘의 도움으로 국내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던 무예제보가 세상에 등장한 것이다. 『무예제보』를 소장한 수원화성박물관은 곧바로 국가지정문화재 신청을 하였고, 아마도 곧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곧바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추진할 예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무예제보』는 훈민정음해례본, 불조직지심체요절과 같은 전 세계 최고의 기록유산으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 김준혁(한신대학교 교수)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37. 조선의 대문호 허난설헌

광주 초월읍 지월리에는 조선중기 천재 시인 허난설헌(본명 초희, 1563~1589)의 묘소가 위치하고 있다. 1985년에 경기도 기념물 제90호로 지정됐다. 묘 오른쪽 시비(詩碑)는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全國詩歌碑建立同好會)에서 허난설헌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 시비(詩碑)에는 허난설헌의 시 가운데 어여쁜 딸과 아들을 가슴에 묻고 쓴 「곡자(哭子)」가 새겨져 있다. 허난설헌(許蘭雪軒, 본명 허초희, 1563~1589)은 조선의 대문호이다. 당나라 시인 이백이 “하늘과 땅 사이 홀로 서 있자니 맑은 바람 난설을 흩날린다”(獨立天地間 淸風灑蘭雪)고 노래하듯이 천지간에 1000여 편의 시를 흩날리고 꽃다운 나이 27살에 요절했다. 8살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천재 시인이자 대문장가였다. 매천 황현이 「매천집」에서 허씨오문장가(허엽, 허성, 허봉, 허난설헌, 허균) 중 “첫 번째 신선의 재주를 가진 이는 경번”(景樊, 字라고 하는 난설헌의 이름)이라고 평할 정도였다. 난설헌의 집안은 매우 개방적이고 자유스러웠다. 난설헌은 규방에 있으면서도 세상과 소통했다. 화담 서경덕(1489~1546)을 스승으로 둔 아버지 초당 허엽(1517~1580) 덕분에 100여 수의 유선시(遊仙詩)를 짓고 신선세계에 대한 책을 많이 읽으며 도가사상을 섭렵할 수 있었다. 오빠 하곡(荷谷) 허봉(1551~1588)은 난설헌의 문학적 재능을 아껴주고 이끌어 주었다. 때마침 오빠가 난설헌이 11살 때 문과에 급제해 그 이듬해 휴가 받아 집에서 독서(賜家讀書)하며 어깨너머로 배우던 난설헌의 글공부를 도왔다. 오빠는 친구 이달이 서얼인데도 난설헌의 스승으로 모셔 자유분방한 당시풍(唐詩風)을 배울 수 있게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오면서 손에 넣었던 두보의 「두율杜律」도 “두보의 소리가 동생의 손에서 다시 나오게 할 수 있을 것이다”고 기대하면서 건네주었다. 또한 난설헌이 무엇보다 문학적 감수성을 한껏 키울 수 있었던 것은 “누나의 시와 문장은 모두 하늘이 내어서 이룬 것들”이라고 누나의 천재성을 알아준 동생 허균(1569~1618)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난설헌은 꿈을 꾼다. 자기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신선세계를 향하는 난설헌의 꿈은 거침이 없었다. 벌써 8살에 꿈의 나라를 세우고 상량문을 발표한다. 상량문 첫 문장은 “대장부들에게 글을 지어 올립니다.”로 시작한다. 그럴듯한 명망으로 백성들을 핍박하고 손바닥으로 달을 가리는 벼슬아치들이 가난한 살림을 찍어내서 백성들은 편히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토로한다. 백성들이 바라는 것은 관리들이 난간 옆에 있는 소박한 아이가 춤을 추게 하는 숭고한 정치라고 말한다. 그러나 꿈을 꿀수록 현실은 무너져 내렸다.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인데도 연산군 이후 명종에 이르기까지 4대 사화로 피바람을 일으키더니 또 다시 붕당정치에 골몰하고 있었다. 유교적 가부장제 질서와 철저한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은 여성들로 해금 오직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자식 낳는 일에만 열중하도록 만들었다. 여성의 신분으로 시를 짓고 공부를 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 여파는 난설헌이 결혼하면서부터 다가오기 시작했다. 15살쯤에 결혼해 두 아이의 엄마가 됐지만 공부한답시고 기생집이나 드나드는 변변치 못한 남편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시어머니의 닦달과 시집살이에도 시달려야만 했다. 이런 누님을 보고 허균은 “나의 누님은 어질고 문장이 있었으나 그 시어머니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친정아버지마저 상주에서 객사하고 곧바로 어머니마저 죽고 말았다. 이듬해에는 그 어여쁜 딸마저 세상을 등져버리고 또 그 이듬해에는 어린 아들을 가슴에 묻어야만 했다. 억장이 무너졌다. “통곡과 피눈물로 목이 메었다.”(곡자) 마음 붙일 곳도 정 둘 곳도 없었다. 이런 처절한 환경 속에서 난설헌은 질곡의 세상을 시와 독서로 초월하려 애썼다. 난설헌의 불운한 처지는 세 가지 한으로 압축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작은 나라에 태어난 것, 둘째는 남자가 아닌 여자로 태어난 것, 셋째는 능력과 인품을 제대로 갖춘 남편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난설헌은 이 암울한 현실을 초월해야만 했다. 신사임당처럼 현모양처의 길도 아니다. 그렇다고 황진이처럼 뭇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그런 길도 아니다. 난설헌이 규방에서 한숨을 토하며 한을 품고 산 것만은 분명한 듯하지만 난설헌의 시선은 자신에 머물지 않고 인간을 바라본다. 궁사(宮詞)에서는 어린 티가 역력하지만 간택될 수밖에 없는 궁녀의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그것은 남이 아니라 자신이다. “어찌 알았겠는가 지금 내가 들어오게 될 줄을” 이라고. 이런 제도적 관습과 틀을 타파하려고나 하는 것처럼 난설헌은 궁녀가 아니라 왕의 조서를 받는 당당한 여상서(女尙書)로 등장한다. 남녀불평등의 시대에 진솔한 이야기로 자기 목소리를 낸다. 그런 속박을 돌파하려는 강렬한 주체의식을 표출한다. 주체적인 삶을 꿈꾼다. ‘감우(感遇)’란 시에서는 인간사의 흥망성쇠를 말하고 하늘의 이치(天理)를 자신의 언어로 얘기한다. 동쪽집 세도는 불길과 같아 / 높은 누대에 풍악소리 흥겨운데 / 북쪽 이웃 가난해 입을 옷 없으니 / 굶주리는 오막살이 신세라오 / 하루아침에 세도 집 기울자 / 오히려 북쪽 이웃을 부러워함이라 / 흥망성쇠는 때에 따라 바뀌는 것을 / 뉘라 하늘의 이치를 피할 수 있으리오 남을 보여주기 위한 시가 아니다. 자신의 시이다. 인간사의 일이다. 그래서 난설헌을 두고 여성이랄지 여류시인이라든지 하는 말은 큰 의미가 없다. 난설헌의 시선은 사회와 국가로 확장된다. 국가의 방위를 염려한다. “가위를 손에 쥔 아름다운 아가씨는 심지에 불 돋우어 밤새 군복을 짓고”(야야곡) 있고, 백성들은 “성을 쌓고 또 쌓으며” 환란에 대비한다. 군사들은 검을 빼어 들고 출정해 변방에서 뼈가 굳어지는 동안 말도 함께 단련된다. “장군은 북과 호각을 울려 변방의 위급을 알리지만, 나라님의 치우침이 한스러워 가슴을 비파를 뜯는 듯하다”(야야곡)고 한탄한다. 그래서 바둑 한판으로 온 천하를 승부에 걸었다고 한 수나라 황제를 질타한다. 난설헌은 새로운 세계를 창출하려 한다. 시들은 한결같이 난설헌의 생애와 사유를 응축한 결정판이다. “붉은 용이 끄는 수레를 꽃나무 아래 세워놓고, 자황궁 안에서 투호놀이를 구경하겠다”는 세상을 꿈꾼다.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은 벽제관에서 허균으로부터 그의 누이의 시를 건네받고 “이를 어찌 아녀자의 소리라고 비웃으며 빈축을 주겠는가”(1606)라고 「난설헌집」에 서문을 쓴다. 이렇게 난설헌이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동안 오빠 허봉은 율곡 이이를 탄핵한 후 선조에게 밉보여 산수갑산으로 유배길을 떠나더니 금강산 주변을 떠돌다 38살의 젊은 나이에 객사하고 만다. 청천벽력이었다. 난설헌이 꿈꾼 세계 역시 오지 않았다. 어느 날 깊은 잠에서 깨어나 “스물일곱 송이 아름다운 연꽃 달밤 찬 서리에 붉게 떨어졌네” 라는 시를 남기더니 1000여편의 시를 몽땅 다비(茶毘)하라고 유언하며 홀연히 선계(仙界)로 떠나고 말았다. 1000여편의 시 또한 다비식으로 장례를 치를 뻔했으나 동생 허균은 누이의 유언을 듣지 않고 213편의 시를 베껴 난설헌집으로 묶어 출간했다. 중국 사신들에게도 주옥같은 누이의 시를 소개해 대륙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일본에서는 1711년 난설헌집이 간행됐다. 한류(韓流)였던 것이다. 허난설헌은 제도적 모순을 붓으로 초월하려 했다. 개인적인 불운은 난설헌의 가슴을 새까맣게 태웠지만 결코 초월의지만은 꺾지 못했다. 끊임없이 새로운 평등한 세상을 추구했다. 여성에서 인간으로 인간개성의 해방을 꿈꾸었다. 가정에 그치지 않고 국가의 안위를 걱정한 대문호였다.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교산 허균이 율도국을 꿈꾸며 정치로 현실의 모순을 개혁하려 했다면, 허난설헌은 시로 자기 내면의 소리를 토해 내며 새로운 세상을 설계했다고 할 수 있다. 권행완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편집위원장(정치학박사)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36. 100년의 역사 간직한 안성 구포동성당

비봉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안성 구포동성당(九苞洞聖堂)은 1901년 대한제국시대에 건립된 천주교 성당으로 1985년에 경기도의 기념물 제82호로 지정됐다. 소나무가 서 있는 원형계단에 올라서면 빨간 벽돌로 단장한 로마네스크 풍의 고풍스런 구포동성당이 나타난다. 성당의 정면은 서양 가톨릭 성당 형식이지만 측면은 전통의 한옥처럼 보이는 특이한 건물이다. 성당의 외관은 팔작지붕 형태인 전통 한옥건축 양식과 서양식 종탑이 어우러져 있으나 안으로 들어가면 내부가 왕대공트러스 공법의 서양식 구조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구포동성당은 형태나 구조는 한국식이지만 서양의 바실리카교회가 가지고 있는 공간구성을 모두 갖춘 특별한 건축물이다. 아래는 성당에 세워진 안내판의 일부이다. “이 성당은 1901년 프랑스 신부 꽁베르에 의해 처음 건립됐다. 현재의 건물은 보개면 신안리에 있었던 동안강당의 목재와 기와의 일부를 활용해 1922년에 재건된 것이다. 평면은 긴 십자가형으로 날개채가 크게 돌출되지 않아 전체적으로는 장방형에 가깝다. 입구는 서쪽에 위치하며 중앙에는 회중석이 있고 동쪽 끝에는 제단이 있어 서양식 성당의 공간구조와 유사하다.회중석은 좌우에 고주(高柱)가 열 지어 서 있는 신랑(身廊)과 그 옆의 측랑(側廊)으로 구성돼 있다. 측랑 상층의 회랑(回廊)에는 난간이 설치돼 있으며, 측면에는 채광을 위한 고창이 나 있다. …지붕에는 서까래가 걸리고 한식기와가 올려 졌는데 처마는 비교적 짧다. 1955년에는 전면 입구와 종탑이 로마네스크 풍으로 개축됐다. 이 성당은 서양 가톨릭 성당의 형식을 따랐지만 재료와 결구에 있어서 전통적인 방식이 적용된 절충식 건물로서 성당 건축사 연구에 있어서 귀중한 자료이다” 한옥과 성당의 절묘한 만남 안성에는 언제부터 천주교 신자가 존재했을까? 1846년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했을 때 천주교 신자 이민식이 김 신부의 시신을 자신의 선산이 있던 양성 미리내로 옮겨 매장했던 사연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안성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이보다 훨씬 이전일 것이다.1866년 자국 선교사를 살해한 죄를 응징한다며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점령한 병인양요를 계기로 흥선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은 더욱 강화됐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도 심해졌다.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통상 요구를 강화하기 위해 충남 덕산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묘를 도굴하려 시도했던 사건은 대원군을 크게 자극해 서양 세력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더욱 굳히는 계기가 됐다. 신자들은 거센 탄압을 피해 금광면, 고삼면, 양성면, 서운면 일대로 숨어들어 교우촌을 형성하고 옹기를 빗고 숯을 구워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1876년 개항이 되면서 신자 수가 크게 늘어나 20년이 지난 1896년에 미리내 본당이 설립됐다. 1900년 10월 천주교 프랑스 선교사 안토니오 공베르(1875~1950, Antonio A. Gombert, 한국명 孔安國) 신부가 안성에 도착했다. 함께 입국한 동생 줄리앙 공베르 신부는 1901년 금사리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해 활동했는데, 신부 형제는 선교와 교육으로 헌신하다 한국의 흙이 됐다.1900년 8월 파리 외방선교회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동방선교를 자원했던 25살의 젊은 공베르 신부가 조선의 안성을 선교지로 선택한 것은 안성사람들에게 큰 복이었다. 안성은 조선 3대 시장으로 꼽힐 정도로 번화한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였기에 선교활동을 하기에 적합한 고장이었다. 공베르는 군수를 지낸 백씨(白氏)의 집을 사서 임시성당으로 사용했는데, 이듬해 2월 무렵 충청도 아산 공세리 본당에서 분할돼 정식으로 안성본당을 창설했다. 안성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은 구포리 현재의 성당터를 매입하고, 그 자리에 있던 기와집을 8칸의 성당으로 개조해 1900년 9월에 낙성식을 거행했다. 안성 구포동성당에서 보듯 초기 성당은 형편에 맞추어 기존의 한옥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일부분을 개조해 사용했다.목조 한옥식으로 지어진 성당은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1910년부터 서양식 벽돌조 종탑을 증축하거나 벽체를 벽돌로 바꾸는 등 한국과 서양의 건축양식을 절충해 개조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차츰 성당 내부의 기둥이 사라지고 수직·수평의 분절도 약화됐지만 외관의 종탑과 정면의 양식은 대체로 고수됐다. 안성 구포동성당은 화산성당, 신의주성당과 함께 이러한 시대적 경향을 잘 드러내고 있는 건축물이다. 1920년 주임신부인 공베르는 신도들과 함께 성당건립 운동을 벌여 1922년 3월에 로마네스크양식의 벽돌 성당건물을 건축했는데, 설계와 감독은 푸아넬(Poisnel, V.) 신부가 맡았다. 건축에 사용된 기와와 돌, 목재의 일부는 안성군 보개면 동안마을에 있던 30평짜리 유교 서원인 동안강당(東安講堂)을 헐어서 썼고, 기둥과 들보로 사용된 목재는 압록강과 서산에서 구해온 것이다.완공까지 신자들이 돌아가면서 땀을 흘렸다. 1925년에는 덕원수사원 목공부 출신의 원재덕이 뒷 벽면을 조각 장식으로 꾸몄고, 종탑부는 1955년에 고딕양식의 붉은 벽돌로 증축했다. 정면 5칸, 측면 9칸의 구포동성당은 전형적인 바실리카식 라틴십자형이다. 종탑부에는 세 개의 첨탑이 있는데, 높이 26미터의 가운데 첨탑은 사각형에서 끝이 팔각형으로 변형됐고, 좌우첨탑은 네모뿔로 돼 있다. 안성 포도와 근대 교육의 역사가 숨 쉬다 공베르 신부는 1909년 1월, 사립 초등학교인 안법학교(安法學校, 현 안법고등학교의 전신)를 설립했다. 자비로 운영된 안법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국어와 역사를 집중해서 가르쳤다. 안법학교는 1912년에 지방 최초로 여성교육을 실시했으며, 1927년에는 동아일보가 ‘순조선식으로 가르치는 안법학교’라는 특집기사를 실었을 정도로 한민족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교육을 고집했다. 학교 이름인 안법(安法)은 지명인 안성과 설립자의 국적 법국(法國, 프랑스)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안법학교는 1951년에 안법중학교와 안법고등학교로 분리됐다. 한편 안성 본당은 1919년 삼일운동 때 만세운동에 가담한 주민들을 성당 안에 보호하기도 했다. 프랑스에서 모금한 기금으로 전답을 매입해 소작 농민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가난한 농민들을 도왔고, 흉년이 들면 굶주리는 이웃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는 등 빈민구제 활동도 벌였다. 안성의 근대교육을 연 구포동성당은 안성을 포도의 고장으로 만들었다. 1901년 콩베르 신부가 미사용 포도주를 마련하기 위해 성당 앞마당에 고국 프랑스에서 가져온 포도나무를 심었다. 얼마 후 그는 안성의 토질과 기후가 포도재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하고 32그루의 포도묘목을 다시 가져와 심어 2그루를 살려냈다. 안성 구포동성당에는 당시 조성된 포도밭이 아직도 가꿔지고 있다. 포도는 선교에도 큰 도움이 됐다. 달콤한 포도를 먹기 위해 아이들이 성당을 드나들고, 약과 포도를 얻기 위해 병자들도 성당을 찾게 됐던 것이다. 현재 안성에는 900여 농가가 600여㏊의 면적에 포도를 재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베르, 안성을 빛낸 인물로 영원히 기억되다 구포동성당을 건립하고 안성에서 32년 동안 신자들을 돌보던 공베르 신부는 서울에서 신학생을 가르치던 중 1950년 7월 전쟁 중에 납북됐다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11월 세상을 떠났다. 세월이 흘러도 사람들은 그를 잊지 않았다. 2012년 5월, 안성문화원은 공베르 신부를 ‘안성을 빛낸 인물’로 선정하고 흉상을 제작해 성당에 설치하고 제막식을 가졌다. 본당에서는 1985년 6월 기존의 성당 건물이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문화재 보수 사업에 따라 성당을 크게 보수했다. 또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을 펼치던 2000년 1월 본당 명칭을 안성본당으로 변경해 옛 이름을 되찾고, 옛 성당 옆 터에 유물전시실과 연구실을 갖춘 지하 1층, 지상 1층의 기념관을 건축했다. 전시실에는 구포동성당 100년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진과 옛 성직자들이 사용했던 전례용구를 비롯해 각종 교리서와 성경 등이 전시돼 있다. 경기문화재단이 출간한 경기 문화유산 세계화 기초조사 연구라는 책의 세계유산 편에서 한옥절충형 기독교 유산에 해당하는 안성 구포동성당의 문화사적 가치를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안성 구포동성당은 경기도나 한국을 넘어 인류가 보존해야할 문화유산이라는 것이다. 이경석 한국병학연구소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35. 시대의 무거운 짐을 묵묵히 지고 간 ‘백헌 이경석’

“도를 어기고 명예를 구하는 것은 진실로 나쁜 것이지만, 도를 어기고 백성을 해치는 것에 비하면 차이가 있거늘, 하물며 백성을 위하는 것은 곧 국가를 위하는 것이니 어찌 백성과 국가가 나뉘어 둘이 될 리가 있겠습니까”백헌집 백헌 이경석(李景奭, 1695~1671)이 재상으로 활동했던 효종시대(1649~1659)는 앞 시대가 남긴 과제를 풀어야 하는 역사적 책무가 놓여 있었다. 한편으로 그 시대는 한 해 걸러 흉년이 찾아올 정도로 궁핍한 시대이기도 했다. 백성들의 삶이 곤궁하고 국가의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으나 북벌이라는 정책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병자호란은 이경석을 비롯한 조선의 지식인에게 영원히 아물지 않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임진왜란은 7년 동안 이어졌으나 승리로 마무리됐지만, 불과 45일 만에 끝난 병자호란은 진 전쟁이다. 패전으로 겪게 된 고난은 상상 이상이었다. 수십 만의 백성이 포로가 돼 끌려가고 변방의 성곽조차 조선 군사들의 손으로 허물어야 했다. 이보다 더욱 큰 충격은 국왕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항복한 일이다. 자신이 섬기던 왕이 적장에게 무릎을 꿇는 광경을 목도한 자신에게 삼전도의 치욕 못지 않은 일이 벌어질 줄은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1644년 오랑캐로 불리던 만주족은 자신들보다 100배도 넘는 한족의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청나라를 건설했다. 승자가 된청인들은 한족들에게 변발을 강요했다. 저항하던 유학자들 중 일부는 죽음을 불사하고 더러는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됐다. 이경석이 살았던 시대의 현실은 이처럼 엄중했다.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힌 이경석은 1617년 과거에 급제했으나 벼슬을 얻지 못했다. 당시 권력을 장악한 북인들은 인목대비의 폐모찬성론을 올리게 했는데 이에 불응했기 때문이다. 인조반정(1623) 이후 치러진 과거에 다시 급제한 이후에야 종9품 승문원 부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절박한 상황 속에서 논쟁보다 인화(人和)가 우선임을 알았던 이경석은 관리들의 상의를 벗어 추위를 무릅쓰고 성을 지키는 성을 지키는 군졸들에게 나눠 줬다. 식량과 땔감이 떨어지고 강화도가 함락됐다는 보고를 받은 인조는 마침내 항복을 결정했다. 삼전도에서의 항복의식은 참담 그 자체였다. 서울로 돌아온 이경석이 도승지의 신분으로 전후 수습에 힘을 쏟고 있을 때 운명적인 일이 벌어졌다.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34. 삼봉 정도전의 삼봉집 목판

삼봉 정도전(1342~1398)은 동아시아 2천여 년의 유학사에서 유일하게 유교 국가를 세운 유학자이다. 유학의 비조 공자도, 공자의 맥을 이은 맹자도, 신유학의 태두 주자도, 그 누구도 유교 국가를 건설하지는 못했다. 유교 국가 조선 건국의 기획자이자 유교문명의 설계사 삼봉 정도전의 위패를 봉안한 문헌사(文憲祠)와 삼봉기념관은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에 위치한다. 삼봉기념관에는 정조 15년(1791)에 제작한 삼봉집 목판이 현재 보존되고 있다. 목판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2호로 지정(1988년 5월 7일)된 지 30년이 되었다. 글자를 새기는 각자(刻字) 양식은 양면에 양각(陽刻)이고 반엽(半葉, 반엽은 한 면) 10행으로 1행이 20자로 새겨져 있다. 목판의 재질은 배나무이고 목판의 규격은 길이 56㎝, 폭 21㎝, 두께 3.6㎝이다. 삼봉집은 1385년(우왕 11년)에 양촌 권근(1352~1409)의 양촌집에 ‘삼봉 정도전의 문집의 서’라는 서문이 수록된 것으로 보아 이때 처음 간행된 것으로 보이나 그 실체는 전하지 않는다. 태조 6년(1397)에 아들 정진(1361~1427)이 시문 약간을 모아 2권으로 간행한 것이 최초로 알려졌다. 초간본의 탄생이다. 정도전은 초간본이 간행된 직후 1398년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해 조선건국의 일등공신임에도 조선정치사상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저자의 저술은 말할 것도 없다. 이후 60여 년이 흐른 세조 10년(1464) 세조는 삼봉의 증손자 정문형(1427~1501)을 경상도관찰사로 임명한다. 정문형은 이듬해 7월 초간본에 실린 시문 이외의 경제문감, 조선경국전 등 여러 저술까지 7권 4책으로 엮어서 안동에서 삼봉선생집을 간행한다. 이것이 중간본이다. 성종 18년(1487)에는 경제문감별집 등을 모아 120여 장의 목판에 8권 8책으로 속간한다. 중간속간본이라 할 수 있다.그 후 300여 년이 지난 정조 15년(1791) 정도전이 정치적으로 아직 복원되지도 않는 상태에서 정조는 규장각에 삼봉집을 간행할 것을 지시한다. 이로써 삼봉집은 다시 발간되고 268판으로 제작되어 현재 삼봉기념관 목판고에 보존되기에 이른다. 다만 268판 중 20여 개의 소실된 목판을 복원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고서야 체계적인 관리를 할 수 있었다. 1865년(고종 2)에는 경복궁의 전각들이 차례로 완성되자 고종은 조선 건국을 설계하고 수도 한양 건설을 주도했던 정도전의 업적을 ‘유학도 으뜸 공로도 으뜸’(儒宗功宗)이라 높이 평가해 특별히 훈봉(勳封)을 회복시키고 문헌(文憲)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린다. 정도전이 죽은 지 480여 년 만의 일이었다. 삼봉 정도전이 다시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삼봉집에는 정도전의 정치철학과 국가경영전략이 녹아 있다. 보통 유학자들의 문집과는 다소 다르다. 삼봉집은 허허벌판의 백지에 새로운 유교 국가의 꿈을 그린다. 백성이 보이고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문명의 길을 제시한다. 정신문화의 축의 전환을 모색한다. 이 때문에 삼봉집은 새로운 국가를 개창하고 임금이 불인인지정(不忍人之政)의 왕도정치를 해야 하는 경복궁(景福宮)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종묘, 오른쪽에는 사직단을 세운 것으로부터 시작해 왜 경복궁을 경복궁이라고 이름 불러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까지도 자세하다. 시경(詩經) 주아(周雅)편에 ‘군자께서 만년 장수하시고 큰 복(景福)을 받으시기를’이라는 시구를 인용해 경복궁이라고 새 궁전의 이름을 짓고 있다. 왕의 침전으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강녕전(康寧殿)은 서경(書經) 홍범편에서 오복 중 강녕을 당호로 삼았다.강녕을 뽑아들면 장수(壽), 복(福),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은 다 따라오기 때문이다.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잃으니’ 반드시 생각하고 정치하라는 뜻으로 왕의 집무실을 사정전(思政殿)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게으르면 황폐되는 것은 필연의 이치이며, 어진이를 구하는데 부지런 하라(勤於求賢)’고 해 근정전(勤政殿)이라고 명명한다.정도전은 날마다 일하는 일상의 건물, 드나드는 문, 잠자는 침전 등의 공간에 철학을 부여했다. 공자는 일찍이 논어 자로편에서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하지 못하고, 말이 순하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이처럼 정도전은 왜 여기서 잠을 자고 왜 이곳에서 근무하는지 누구를 위해 정치를 해야 하고 어떻게 행정을 해야 하는지를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건물만 봐도 깨닫도록 작명한다. 또 지금 내가 처해 있는 공동체가 요구하는 그 철학과 사상을 실천하도록 이름을 명명한다. 하나하나의 건물들의 집합체에 불과한 물리적 공간에 철학을 부여함으로써 유교 국가를 이끌어가는 심장부로 재탄생시킨다. 인(仁)을 흥하게 하는 동대문(興仁之門), 예(禮)를 숭상하는 남대문(崇禮門) 등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나타내는 사대문 역시 마찬가지다.이 때문에 한양은 유교 국가의 철학을 물리적으로 구축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몇 해 전 행정수도로 세종시를 건설해 현재 40여 개의 중앙행정기관 등이 세종시로 이전했다. 그러나 그 기획에는 600여 년 전 정도전이 경복궁과 한양에 국가의 비전과 통치철학을 부여했던 것과 같은 문명적 비전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신축건물과 부동산만 있을 뿐이다. 철학이 없다. 정도전은 물리적인 건축물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1394년 태조의 명을 받고 주(周) 육관(六官)의 이름을 모방해 조선의 법전으로 조선경국전을 지어 올린다. 조선경국전은 국가경영의 철학을 제시한다. 그 첫 번째는 보위를 바루는 일이다.(正寶位) 그 보배로운 위(位)를 지키는 핵심은 인(仁)이다. 백성이란 나라의 근본이며 임금의 하늘이어서 임금은 인(仁)의 정치를 해야 한다.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백성들은 서로 모여 살게 되면 음식과 의복에 대한 물욕이 밖에서 공격하고 남녀에 대한 정욕은 안에서 공격해 동류일 경우에는 서로 다투게 되고 힘이 대등할 경우에는 싸우게 되어 서로 죽이기까지 한다.그러니 통치자는 법(法)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서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평화롭게 해 주어야만 민생이 편안해지는 것이다” 조선의 새로운 군주는 인(仁)과 법(法)으로 국가를 경영할 것을 제시한 것이다. 이 조선경국전은 경국대전의 모태가 되었으나 경국대전에는 조선경국전이 제시했던 정치철학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유교 관료제의 형식만 남아 있다. 또한 고려말은 가난한 사람은 송곳 꽂을 땅도 없었다. 여기에 혹독한 관리들의 수탈에도 시달려야만 했다. 백성은 더욱 곤궁해지고 나라는 더욱 가난해졌다. 정도전은 이를 타개하기 위한 이론적 작업으로 고려 지배체제의 사상적 지주였던 불교의 사회적 폐단과 사상적 비합리성을 불씨잡변을 통해 비판한다. 유교문명으로의 전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경제문감 별집에서 군주의 치도(治道)를 정리하기 위해 최고의 성군이라고 일컫는 요순에서부터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 원나라, 고려까지 139명의 군주를 분석한다. 결론은 이렇다. 왕조별로 이렇게 많은 군주가 등장해서 정치했는데 탁월한 군주는 요임금과 순임금 정도이다. 나머지 대부분의 군주들은 보통군주들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보통군주들이다.만약 보통군주들이 국정을 운영하면서 실패라도 한다면 그 대가는 고스란히 백성이 떠안게 된다. 그러니 과거시험을 통해 관리로 선발되어 국가경영에 대해 이미 검증된 재상들이 그 경륜을 살려 군주와 함께 정치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 정도전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보통군주들의 시대에 재상과 간관 등은 어떠해야 하며 백성의 근본으로서 지방 수령들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경제문감을 지어 밝힌다. 그 임금을 요순같이, 그 백성을 요순 때의 백성과 같이하고자 함이었다.삼봉집 목판은 정도전의 정신적 생명이다. 정치적 사유의 집적물이다. 조선이 탑재된 조선 500년의 주춧돌이다. 유교문명의 꿈이 내장된 칩이다. 정도전의 문명 기획은 지금도 한국인의 정신문화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역사는 삶이다. 권행완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편집위원장(정치학박사)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33. 광주 조선백자요지

예술사를 공부할 때 흔히 “도자기만큼 좋은 자료는 없다”고 한다. “도자기만큼 한 나라의 문화와 기술의 척도를 제공해 주는 예는 없다”고 한 저명한 예술평론가의 말도 같은 맥락이다. 도자기는 전 시대에 걸쳐 나타나는 생활용품이자 예술품이기 때문이다. 흔히 토기라 불리는 질그릇의 역사는 단군조선보다 더 오래되었다. 그러므로 고려청자나 조선백자도 단군조선부터 조선후기까지 수천 년을 이어온 질그릇의 역사 흐름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너른 들판을 배경으로 태어난 백제의 질그릇에 한국 도자기 특유의 모양과 빛깔을 가지고 있다. 호(壺) 또는 항아리로 불리던 백제의 질그릇은 모양과 선과 빛깔이 둥글고 넉넉하며 부드럽고 따뜻하다. 이러한 특징은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로 이어진다. 통일신라에 유약을 입힌 그릇이 만들어졌는데, 이러한 기술을 바탕으로 고려시대에 청자가 탄생되었다. 그릇 속에 깃든 한국의 미학 조선의 과학기술이 절정에 달했던 세종 연간(1418~1450)에 경기도 광주에 사옹원(司饔院) 분원(分院)이 설치되었던 사실은 주목된다. 이때부터 광주는 무려 400여 년 동안 명품 백자의 생산지로 명성을 떨쳤다. 백자는 1280도에 제작되는 청자보다 더 높은 1300도의 고온으로 제작된다. 얼핏 화려한 청자에서 소박한 백자로의 변화는 예술적으로 퇴보한 것이 아닐까 싶지만, 사실은 기술의 진보가 뒷받침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분청사기가 활발하게 제작되었는데 세종실록지리지에 전국 185개소의 도기소가 기록된 것을 봐도 당시 얼마나 많은 도자기가 생산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초기의 가마터는 번천리ㆍ우산리ㆍ도마리ㆍ무갑리에 있고, 중기의 가마터는 선동리ㆍ상림리ㆍ신대리ㆍ금사리가 있다. 특기할 것은 1752년(영조 28)부터 남종면 분원리에 고정되어 1884년(고종 21)에 민영화하기 전까지 가마터가 운영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곳에서 순백자ㆍ상감백자ㆍ철화백자ㆍ청화백자는 물론 청자와 분청사기 같은 여러 종류의 도자기가 생산되었다. 분원리 가마터를 비롯한 ‘광주 조선백자 요지’(廣州 朝鮮白磁 窯址)는 1985년에 사적 제314호로 지정되었다. 광주 조선백자 요지는 최근에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광주처럼 400년 이상 긴 세월을 국가가 도자기 생산을 주도했던 사례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광주에는 보존 상태가 좋은 85개소의 가마터를 비롯하여 290여 개소의 가마터가 있다. 광주는 서울과 가깝고 한강을 이용하여 백토와 자기를 운반하기 쉽고, 수목이 무성한 무갑산과 앵자봉이 있어 땔나무를 조달하기 좋았기 때문에 사옹원의 사기제작소인 분원이 설치되었다. 도자기를 제작하려면 좋은 백토는 물론 땔나무가 충분해야 했다. 분원은 설치 초부터 땔나무의 조달을 위해 분원시장절수처(分院柴場折受處)라는 산지를 지정 받아 관리했다. 분원은 약 10년에 한 번씩 수목이 무성한 곳으로 옮겼는데, 한번 분원이 설치되어 땔나무를 채취한 곳은 수목이 다시 무성해질 때까지 비워두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18세기 초 분원은 금사리에 약 30여 년간 운영되다가 1752년(영조 28)에 분원리로 이전되었다. 남한산성면 번천리 일대에서 정교한 상품의 백자, 청화백자편이 수집되었다. 이곳에서 초기의 백자, 청화백자, 청자의 사발ㆍ대접ㆍ접시ㆍ호ㆍ병ㆍ합ㆍ잔 같은 다양한 그릇이 출토되었고, 16세기 중엽부터 설백·청백의 백자를 비롯하여 청화백자ㆍ철회백자ㆍ청자가 제작되었다. 17세기에는 가마의 제작시기와 장소 및 가마의 변천을 알 수 있는 간지가 새겨진 백자가 출토되었다. 18세기 초에는 오향리요지와 1752년 분원으로 옮겨가기까지 금사리요지가 있었는데, 금사리요지에서는 우수한 청화백자가 많이 만들어졌다. 조선 도공의 영광과 슬픔 그런데 이 시기 조선왕조실록에 충격적인 사실이 실려 있다. 1697년(숙종 23) 윤3월, 분원에 살고 있는 백성 39명이 굶주려 죽어, 광주부윤 박태순을 추고했다는 기록이다. 이처럼 조선 최고 품질의 백자를 만들었던 분원에 소속된 일류 도공들조차 흉년이 들면 살아남기 어려울 정도로 생활이 궁핍했던 것이다. 양반사대부들의 무리한 요구는 도공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세월이 지나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1783년 10월, 정조가 경기도에 암행어사를 파견해 민생을 어렵게 하는 병폐를 수집하도록 지시하면서, 특히 광주 사옹원 분원에서 관원들이 과외로 자기를 요구하지 못하도록 각별히 살필 것을 지시했다. 1795년(정조 19) 8월, 정조는 경기감사에게 사옹원 제조가 관례로 굽는 자기 외에 기묘하게 기교를 부려 제작한 것들을 별도로 구한다는 사실을 보고 받고 이런 특명을 내렸다. “분원의 폐단으로 말하면, 백성들과 고을에서 감당해내지 못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고 기기묘묘하게 만들어내는 일이 날이 갈수록 성해져 백토(白土)와 청회(靑灰)를 공급하느라 먼 지방에까지 피해를 끼치고 있다. …만약 명령을 위반하는 폐해가 발생할 경우에는 해당 관원을 즉시 그 지방에 정배하고 나서 장계를 올리도록 하라. 만약 혹시라도 덮어두었다가 적간할 때 드러날 경우에는 경기 감사가 중하게 처벌받는 일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조는 이 내용을 현판에 새겨 사옹원과 광주 분원에 걸어두고 늘 보면서 지키도록 명을 내렸다. 국왕의 이러한 관심과 배려로 이 시대의 문화는 최고의 수준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잠시 일본의 사정을 살펴보자. 17세기 초까지 백자를 만드는 기술은 최첨단의 기술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군대 안에 공예부를 조직하여 도공을 사로잡고 도자기를 쓸어갔다.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하는 까닭이다.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의 도공들은 전혀 새로운 환경에 놓이게 되었다. 지방 영주인 다이묘들의 지원을 받으며 자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일본에서 찻잔은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성 하나와 조선 찻잔 하나를 안 바꾼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이런 환경에서 조선 도공들은 자신의 이름을 건 도자기를 빚으면서 도자기 산업을 일으켰다.일본에서 ‘도자기의 아버지(陶祖)’로 추앙을 받는 이삼평은 처음으로 일본의 백자를 완성했다. 거친 도자기 표면이 매끈한 자기로의 발전은 일본도자사의 대사건으로 기록된다. 이삼평이 막을 연 일본 자기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에도시대에 엄청난 규모의 도자기를 유럽에 수출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을 뿐 아니라 일본을 ‘도자기의 나라’로 각인시켰다.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한 배경에 조선 도공들이 존재했던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조선 백자의 고장, 광주 한강을 바로 앞에 둔 분원리 요지는 1752년부터 1883년 분원이 민영화되기까지 130년간 운영되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대부분의 명품 백자와 청화백자가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이처럼 분원리 요지는 조선후기 최대 규모의 요지로서 도자사(陶磁史) 연구의 귀중한 공간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그 자리에 초등학교를 지으면서 크게 파괴되어 이제는 그 흔적만이 남아 있다. 수많은 무명 도공들의 땀과 정성으로 조선의 미(美)를 창출한 이곳도 시대의 변화를 거슬리지 못했던 것이다. 조선 말 분원의 운영권이 민간에 넘어간 후, 20세기 초에는 백자 제작소로서의 운명을 다하고 말았다. 대량 생산된 값싼 일본 도자기들이 밀려들어오는 바람에 경쟁력을 잃었기 때문이다.분원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는 분원 도요지터로 오르는 길 주변에는 아직도 백자의 파편이 발견된다. 학교 뒤편에 분원의 책임을 맡았던 관리들의 이름이 새겨진 공덕비가 서 있다. 공덕비 뒤로는 최근 세워진 분원백자관이 자리하고 있다. 전시관은 작고 아담하지만 조선의 백자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분원이 문을 닫은 후, 일제강점기부터 도자 문화를 재현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광주는 물론 양질의 고령토가 생산되는 이천, 여주일대에 도자 예술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지금은 수백 개의 가마가 세워져 무명의 서러움을 딛고 자유분방한 예술혼으로 백자를 창조한 조선 도공의 맥을 잇고 있다. 광주에서 이천으로 이어지는 길목인 쌍령동에는 ‘무명 도공의 비’가 서 있다. 1977년 도공들의 높은 예술혼과 고귀한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다. “후손들에게 뛰어난 문화유산을 남겨주고, 온 곳으로 돌아간 처연하도록 아름다운 넋들이여. 흠모하나니 위로받을 지어다.” 이경석 한국병학연구소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32. 서오릉에서 숙종의 공과를 생각하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조선 왕릉은 조선역사의 얼굴이다. 왕과 그 시대의 역사와 문화가 왕릉에 오롯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태조가 잠든 건원릉부터 27대 순종의 유릉까지 27분의 임금들을 모신 왕릉은 모두 조선 제일의 명당에 자리 잡고 있다.효종이 묻힐 뻔 했던 명당은 사도세자가 차지했다. 정조는 아버지의 묘소를 천하제일의 명당에 모시면서 자급자족의 신도시 수원화성을 건설하여 문화군주로서의 정치력을 맘껏 발휘했다. 또한 우리는 흥선대원군이 부친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여 고종과 순종을 배출했다는 일화를 알고 있다. 대통령을 지낸 이조차 조상을 명당에 모셨기 때문이라고 하니 명당은 여전히 ‘살아있는 신화’이다. “생거진천 사후용인”이라는 말도 풍수와 관련되어 있다. 아쉽게도 명당을 신봉하는 문화는 공동체보다 내 조상, 내 부모, 내 가족을 앞세우는 개인주의 혹은 이기주의라는 병폐와 닿아 있다. 그렇지만 성역이었던 조선 왕릉은 현재 공원화되어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와 휴식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명당이라는 이름값을 제대로 하고 있는 셈이다. ■ 명릉에서 밝은 정치를 상상하다 총 44기에 이르는 조선 왕릉 가운데 동구릉과 함께 서오릉은 가장 여러 기의 왕릉이 모여 있는 곳이다. 서오릉의 중심인 명릉(明陵)은 숙종과 인현왕후, 장희빈 같은 역사적 인물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흥미로운 이야기와 숙종이 재위한 46년 동안의 정치사가 들어 있다. 따라서 화합과 협력의 새로운 역사를 써야할 우리 시대에 성찰해야할 역사의 교훈을 이곳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숙종(재위:1674∼1720)의 이름은 이순(李焞), 자는 명보(明普)이다. 1661년 8월 15일 현종의 맏아들로 태어나 1667년에 왕세자에 책봉되고, 1674년 14세의 나이로 조선 제19대 국왕에 즉위하여 재위 46년이 되던 1720년에 승하했다. 숙종이 재위했던 시기는 조선 중기 이래 계속되어 온 붕당정치가 절정으로 치달아 정치가 파탄이 나던 시기였다. 숙종의 정치적 특징은 ‘환국(換局)’이다. 환국정치로 왕권강화에 성공했으나 목숨을 건 정쟁과 여기에서 비롯된 공작정치의 폐해가 엄청났다. 당대는 물론이고 그의 뒤를 잇는 경종, 영조, 정조대는 물론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악영향을 미쳤다. 즉위 초 예론에서 승리한 남인이 정권을 잡았으나 1680년 경신환국으로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했다. 1689년 희빈 장씨가 낳은 왕자(경종)에 대한 세자 책봉 문제가 빌미가 되어 남인이 다시 권력을 잡았다. 그러다가 1694년 폐출되었던 민비의 복위를 계기로 남인은 정계에서 제거되는 대신 노·소로 분열되어 있던 서인이 재집권하는 갑술환국으로 이어졌다. 이후에도 노·소 사이의 불안한 연정이 지속되다가 1716년 노론 일색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소론에 대한 정치적 박해가 나타났다. 이 시기 남인은 청남·탁남으로, 서인은 노론·소론으로 분립하는 등 당파내의 이합집산도 무성했다. 이런 와중에 숙종의 미움을 받은 윤휴·허적·송시열·김수항·박태보 같은 명사들이 죽임을 당했다. 예송 논쟁으로 손상된 부왕의 권위와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려 한 숙종의 정국운영 방식의 결과였다. 숙종은 환국으로 정권을 교체하고 붕당내의 대립을 촉발시켜 군주에 대한 충성을 유도했다. 따라서 정쟁은 격화되었지만, 강화된 왕권으로 사회 전반의 복구정비 작업에 집중할 수 있어 상당한 치적을 남길 수 있었다. 특히 대동법을 전국으로 확대시켜 100년 동안 벌인 사업을 완성하고, 양전을 계속 추진하여 전국에 걸친 양전을 마무리했으며, 양인의 군포 부담을 2필로 균일화했다. 그리고 상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통용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상업발달과 민생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국방 분야에서도 다양한 사업이 이루어졌다. 대흥산성 등 변경 지역에 성을 쌓고 도성을 크게 수리했으며, 1712년 북한산성을 개축하여 남한산성과 함께 서울 수비의 양대 거점으로 삼았다. 또한 훈련별대와 정초청을 통합한 금위영을 창설하여 5군영체제를 확립했다. 이로써 임진왜란 이후 계속된 군제 개편이 사실상 완료되었다. 명나라에 대한 은공을 갚는다는 뜻으로 대보단을 세우고, 성삼문 등 사육신을 복관시켰다. 노산군을 복위시켜 단종으로 묘호를 올리고, 폐서인되었던 소현세자빈 강씨를 복위시켜 민회빈으로 정명하는 등 왕실의 관계를 재정립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300여 개의 서원과 사우가 건립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숙종은 민비를 내치거나 총애하던 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내리는 등 애증의 편향이 심하고 성격이 매우 급했다. 이러한 왕의 기질은 정치에도 영향을 미쳐 당쟁을 격화시켰다. 그러나 강력한 왕권을 수립한 숙종이 존재했기에 영조와 정조로 이어지는 문예부흥 시대를 열 수 있었다. 조선 19대 임금 이종(李倧)이 승하하자 신하들이 ‘숙종(肅宗)’이라는 묘호와 왕이 묻힌 능호를 명릉(明陵)이라 이름 지었다. 숙종은 6월 21일에 승하하여 12월 13일에 국장을 치렀으니 무려 6개월이 걸린 셈이다. 국장이 이처럼 오래 걸렸던 까닭은 왕릉을 조성하는 시간과 능지를 어디로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풍수 때문이다. 왕릉을 결정하는 일은 국가의 중대사였다. 풍수학은 조선의 양반사대부들의 필수과목이었다. 고산 유선도와 우암 송시열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숙종도 일찍부터 풍수에 일가견이 있었다. 1687년(숙종13) 10월, 원릉의 자리를 둘러본 숙종이 “무릇 일이란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한 것이거니와, 원릉을 전알하고 나니 내 마음이 시원해진다. …풍수들의 말 때문에 경솔하게 옮겨 모시기를 의논할 수는 없다.”며 천장을 하자는 풍수들의 의견을 일축하는 발언으로 확인할 수 있다. ■ 신라에서 조선으로 이어진 2천년 왕릉의 역사 예부터 왕릉은 죽은 왕이 잠시 거처하는 왕의 집으로 생각했다. 시조 박혁거세 왕릉부터 신라 초기의 왕릉은 모두 집처럼 지었다. 신라의 왕릉에 석물이 등장한 것은 제29대 태종무열왕릉부터이다. 제31대 신문왕릉에 병풍석을 세웠고, 제33대 성덕왕릉에 난간석이 등장했다. 평지가 아닌 산지에다 왕릉을 조성하기 시작한 것은 제35대 경덕왕릉부터이다. 왕릉에 산소(山所)의 개념이 나타난 것이다. 산기운을 받으려 산허리에 터를 잡으면서 왕릉의 봉분 크기가 줄어들었다. 제38대 원성왕릉인 괘릉은 병풍석과 난간석, 문인석과 무인석을 갖춘 최초의 왕릉이다. 이렇게 완성된 신라 왕릉의 양식은 고려로 이어졌다. 조선왕조는 고려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유교문화를 더했다. 따라서 유교와 풍수를 신봉했던 조선의 왕릉을 제대로 보려면 유교의 예제와 풍수택지라는 두 개의 창이 필요하다. 금천(禁川)을 건너 홍살문에 들어서면 왕릉으로 가는 긴 돌길 참도의 끝에 정자각이 자리 잡고 있다. 제물을 차리는 정자각 뒤쪽에 있는 둥근 언덕을 강(岡)이라 한다. 언덕이란 뜻의 ‘강’은 조선 왕릉에서만 볼 수 있다. 생명을 키우고 지켜주는 생기(生氣)를 저장하는 곳이다. 왕릉 뒷부분에 봉긋 솟아 오른 곳을 잉(孕)이라 하는데, 생기를 불어넣는 곳이다. 숙종이 묻혀 있는 명릉은 강과 잉의 특징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 형식보다 실질을 앞세우는 정책의 현장 사적 제198호 서오릉은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1470년(성종1) 10월, 이조에서 경기의 고양현을 승급시켜 군으로 삼았다는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서오릉이 능지로 선택된 계기는 1457년(세조3) 세자였던 원자 장(璋)이 죽자 풍수지리설에 따라 능지로서 좋은 곳을 찾다가 이곳이 추천되어 부왕 세조가 직접 답사한 뒤 경릉 터로 정하면서부터다. 그 뒤 1470년(성종1)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창릉(昌陵)이 들어섰고, 1681년 숙종의 비 인경왕후 김씨의 익릉(翼陵)과 1721년(경종1)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민씨의 쌍릉과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단릉을 아우르는 명릉(明陵)이 자리를 잡았다. 1757년에는 영조의 비 정성왕후 서씨의 홍릉(弘陵)이 들어서면서 ‘서오릉’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실록에 ‘서오릉’이 언급된 것은 1811년(순조11) 3월이다. 경내에 명종의 첫째아들인 순회세자의 순창원이 있으며, 숙종의 후궁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희빈 장씨의 묘가 1970년 광주군 오포면 문형리에서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명릉에서 눈여겨 볼 것은 인원왕후의 능침의 방향과 위치이다. 슬하에 자식이 없던 인원왕후는 연잉군(영조)를 친자식 이상으로 사랑했다. 인원왕후가 승하하자 친히 행록을 지은 영조는 능을 파격적으로 결정했다. 원래는 왕의 오른쪽, 즉 임금이 누운 우측에는 능침을 마련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으나 인원왕후의 능침은 숙종의 오른편에 있으며 위치도 더 높다. 백성들을 깊이 사랑한 실학의 군주 영조의 결단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형식이다.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31. 광명 영회원

소현세자가 17대 조선의 국왕으로 즉위했더라면 우리의 역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서양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던, 그리하여 조선을 변화시킬 세자의 스러진 꿈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 심양에서 활약했던 세자빈 강빈의 존재를 알게 되면 이러한 아쉬움은 더욱 커진다. 광명시 노온사동에 자리한 영회원(永懷園)은 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의 부인 민회빈 강씨의 무덤이다. 민회빈 강씨는 강감찬 장군의 19대손으로 본관은 금천이고 우의정이었던 강석기의 둘째딸로 1611년에 태어났다. 강석기는 서인 명문 집안으로 사계 김장생의 문인이었다. 광명시 노온사동은 500여 년 간 이어져온 금천 강씨의 세거지로 강석기선생의 호인 월당(月塘)도 이 지역에 전해져오는 연못에서 유래한 것이다. 민회빈 강씨는 1627년 만16세의 나이로 세자빈이 되어 소현세자와 결혼하였다. 충실하게 궁중의 법도를 배우며 조선 왕위에 오를 남편 소현세자를 따르던 민회빈은 병자호란 이듬해인 1637년에 남편 소현세자와 시동생 봉림대군과 그의 부인 장씨와 함께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간다. 심양에 도착한 강빈과 소현세자를 포함한 조선인 192명은 심양관소, 즉 심관(瀋館)에 거처했다. 이곳에서 소현세자는 국왕 인조의 대리자로서 많은 재량권을 행사하고 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강빈은 청나라가 밀거래를 요청해오자 이를 활용하여 뛰어난 장사수완을 발휘하였고, 소현세자가 청 황제의 수행으로 심양관을 비우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강빈은 세자의 역할을 대신해 조선에 보내는 장계까지 직접 챙기며 심양관의 실질적 경영자로 활약하였다. 청이 심관에 식량공급을 중단하고 직접 농사를 지어 생계를 해결하라는 요구를 하자, 강빈은 조선 관리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강빈은 청과의 거래로 축적된 상당한 부를 이용해 청나라에 끌려온 조선인들을 속환해 농장에서 일하게 하였다.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하고, 조선의 우수한 농사기술을 이용해 해가 거듭될수록 큰 수확을 이뤘다. 주목할 것은 심관의 재력을 바탕으로 청나라에 끌려온 수백 명의 조선인 포로들을 해방시켰던 일도 강빈이 주도했다는 사실이다. 1644년 청이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자, 소현세자와 강빈도 북경에 들어가서 두어 달 동안 머물렀다. 이때 천주교 신부이자 천문학자인 ‘아담 샬’과 역사적인 교류를 맺게 된다. 조선 포교에 뜻을 둔 아담 샬은 세자와 강빈에게 천주교 교리와 천문학, 서양의 최신 과학기술을 전하고 천문, 산학, 성교정도 등의 책과 여지구, 천주상 등을 선물로 주었다. 이러한 만남을 통해 서양의 우수한 과학기술을 부부가 이해하게 된 것이다. 이듬해,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는 8년간의 억류생활을 끝마치고 볼모생활동안 얻은 서양 책과 물건, 중국인 천주교 신자들과 함께 조선으로 귀국한다. 한편, 고단한 이국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세자 내외를 대하는 인조 임금의 태도는 의구심과 적대감으로 일관했다. 그것은 청나라에서 세자에게 전위하도록 압력이 있지 않을까 하는 문제와 함께 부왕의 기대와는 달리 세자의 친청적인 태도, 귀국할 때 비단 황금 등 많은 물화를 가져온 점, 특히 임금의 총애하는 비 조소용과 세자빈의 반목 등이 크게 작용한 결과였다. 이런 뜻밖의 상황 속에 소현세자는 귀국한지 두 달 뒤인 4월 26일 학질 진단 후 침을 맞고 34세의 나이로 급서를 하였다. 소현세자의 아들이 셋이나 있었음에도 인조는 소현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 후 강빈과 대립관계에 있던 인조의 후궁인 소의 조씨의 무고에 따라 민회빈 친가의 형제들을 모두 유배시켰다. 이후 강빈은 인조에게 조석 문안을 거부하는 등 갈등이 더욱 악화되었다.1646년(인조 24) 정월, 강빈 궁 소속의 궁녀들이 인조의 수라에 독을 넣은 혐의로 가혹한 고문을 당했는데, 강빈은 이 사건을 사주한 혐의로 별당에 유치되었다가, 1646년 3월에 사약을 받아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강빈의 죽음이후 노모와 4형제는 모두 처형을 당하고 세 아들마저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진다. 이 사건으로 노온사동의 금천 강씨 집안은 거의 멸망지화에 이르게 되었다. 경험하기 힘든 타국에서의 볼모생활을 전화위복으로 삼아 진취적인 자세로 삶을 개척해나갔던 여장부의 역경의 여정도 여기서 사그러지고 멈춘 것이다. 인조와 효종대의 조선왕조실록이 전하는 강빈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성품이 흉험하고, 행실이 좋지 않았다. 이재를 추구하여 많은 재물을 모았고, 그 재물로 사람을 잘 유인하였다.……세자가 강학을 폐지하다시피하고 무부와 노비들을 가까이하며 화리만을 추구하고 서양문물에 혹하는 등 많은 잘못을 범한 것은 대개 이 사람 탓이다. 세자가 병이 있는데도 잠자리를 같이할 정도로 음란하였고, 임금의 처소 가까이에서 큰소리로 발악할 정도로 불손하고 거겠다. …” 그러나 집권세력의 시각에서 바라본 이러한 평가를 관점을 바꾸어보면 강빈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탄생한다. 이재에 밝아 재물을 모으고 그것을 베풀어 사람을 주위로 모여들게 한 것은 오늘날 여성 CEO의 자질로, 중세적 부인의 도리를 과감히 벗어남은 현대적 여성 지도자의 면모로, 시대에 앞선 서양문물의 도입 의지가 소현세자의 잘못이라면 강빈은 남편의 꿈을 이해하고 함께 나눈 미더운 동반자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그녀의 음란함은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며, 불순하고 거센 성격이란 정당한 분노의 솔직한 표출로 바라볼 수 있다. 이 사건 이후 여러 해에 걸쳐 민회빈의 억울한 죽음을 복권시키고자 하는 노력들이 이어져 1718년 숙종대에 이르러 그녀의 무혐의를 인정하고, 민회(愍懷)라는 시호를 내려 복권시켰다. 억울하게 죽은 지 80년 만이었다. 세자빈이 죽은 후 금천(衿川)에 있는 강씨 집안 선산에 예장하였다. 그 후 1718년(숙종 44)에 숙종이 오랜 숙원을 풀어주었다. 강빈의 시호를 회복하고 봉묘도감을 설치한 후 원묘(園墓)로 개수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때 묘를 추봉(追封)한 뜻을 돌에 새겨 혼유석(魂遊石) 아래 전석(?石) 왼편에다 묻었다. 숙종은 승지를 보내 임금이 친히 지은 제문을 가지고 민회빈(愍懷嬪)의 묘에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사료에 기록된 영회원의 설치물들은 다음과 같다. 능침공간에 봉분 삼면에 곡장(曲墻)을 두르고 혼유석(魂遊石) 한 개, 명등석(明燈石) 한 개, 문인석(文人石) 한 쌍, 마석(馬石) 한 쌍, 양석(羊石) 한 쌍, 호석(虎石) 한 쌍을 배치하였다. 제향공간의 시설물은 다른 원과 동일한 형식의 정자각(丁字閣)을 비롯하여 수라청 두 칸, 수직방(守直房) 두 칸, 홍살문을 배치하였다. 능 주위로는 북쪽의 주산과 동북쪽의 산, 남서쪽의 평야와 경계를 이룬다. 진입공간에는 전사청 여덟 칸, 전사청 옆에 있는 제기고(祭器庫), 안향청(安香廳) 여섯 칸, 재실(齋室) 여덟 칸 등 제사 관련 시설이 있었다. 한편 1870년(고종 7)에 영회원(永懷園)으로 개호(改號)하였다. 한편 아쉬운 점은 현대에 이르러 영회원 주변의 토지가 민간에게 소유권이 넘어간 후 정자각, 홍전문, 재실 등이 훼손되어 능침 부분만 남아 있는 점이다. 또한 그 동안 비공개지역으로 폐쇄되어 시민들이 찾기에도 불편하였다. 그러나 최근 관리부처인 문화재청과 광명시에서는 보호구역을 정비하는데 나섰다. 사유지를 매입하고, 주변의 외래 수목을 제거하고, 무허가 건물을 철거를 하여 차츰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 2018년에는 훼손된 곡장의 정확한 위치와 규모를 알기 위해 발굴을 추진하고 있다. 앞으로 정자각, 홍전문, 재실터 등의 발굴이 완료되면 품격 있는 조선 왕실의 묘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더불어 못다 이룬 민회빈 강씨의 꿈도 오늘날의 우리도 같이 꿀 수 있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양철원(광명시청 학예연구사)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30. 양촌 권근의 입학도설

입학도설(入學圖說)은 성리학의 그림책이다. 대학이나 중용 등의 추상적이고 어려운 성리학의 철학을 쉬운 그림으로 설명한 책이다.양촌 권근(1352~1409)이 공양왕 2년(1390)에 저술했다. 입학도설에는 모두 40여 개의 도설이 실려 있다. 도설의 핵심은 ‘천인심성합일지도(天人心性合一之圖)’이고, ‘대학지도’, ‘중용수장분석지도’ 등이 대표적이다.이 도설은 남송 주렴계의 태극도 및 주자의 중용장구의 설을 참조하고 기타의 설을 절충하는 동시에 권근 자신의 견해도 제시했다. 진양 대도호부사 김이음(~1409)이 1396년 진양에 부임한 후 학생들로부터 입학도설을 얻어 보고 그 정교함에 감탄해 책을 간행하게 했다.국내외에 걸쳐 4~5종이 전해지고 있는데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는 1425년과 1547년 그리고 1929년에 발간된 판본이 마이크로필름으로 보존되어 있다. 입학도설의 저자 양촌 권근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사상가이자 정치가다. 조선 최초 문형(文衡)이자 삼봉 정도전과 더불어 유교 국가 조선을 유교 국가답게 하는 성리학적 이론의 근거를 마련한 이론가이기도 하다. 정도전이 조선을 창업하는 사상과 제도의 틀을 설계했다면 권근은 조선을 보다 안정시키는 수성의 사상과 제도적 기반을 다졌던 인물이다. 양촌 권근에게 많은 저술이 있으나 그중에서도 대표할만한 저술은 입학도설과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이라고 할 수 있다. 입학도설을 쓴 양촌 권근은 목은 이색의 문인이다. 권근은 스승인 목은 이색과 정치적 행보를 같이함으로써 정도전 등 혁명세력으로부터 극심한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 공양왕 2년(1390) 5월 윤이 이초가 명나라 황제에게 공양왕과 이성계가 군사를 일으켜 명나라를 치려 한다고 거짓으로 고하고 명나라의 힘을 빌려 이성계를 제거하려 했던 ‘윤이 이초의 난’에 연좌되어 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 등과 함께 청주옥에 갇혀 있다 갑자기 홍수가 나는 바람에 청주옥 바로 앞에 있는 은행나무에 올라 겨우 살아났다. 이후 전북 익산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된다. 이때 “초학자 한둘이 찾아와서 대학과 중용을 배우려 해 설명해도 분명히 이해하지 못했다”(권근의 서문) 안타까운 나머지 권근은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도록 철학을 그림으로 그려 “학생들이 질문하면 그에 대해 응답해 주었다. 그 문답한 내용을 기록해 그림 뒤에 붙이고 이름을 입학도설이라 했다”(서문) 유배지에서 조선성리학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설(圖說)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성리학의 철학적 내용을 그릴만한 것은 모두 그렸다. 그 딱딱한 철학공부를 그림을 그려 이해시켰다는 점이 기발하다. 변계량(1369~1430)은 “입학도설과 오경천견록은 유교의 경서 연구에 이바지함이 컸으며 후학에게 잘 이용되어 모든 사람에게 회자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거정(1420~1488) 또한 “입학도설이 후학들에게 성리학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고 강조했다. 퇴계 이황(1501~1570)은 그의 성학십도를 입학도설에서 그대로 채용했다.(퇴계전서 권7, 進聖學十圖箚) 입학도설은 한국 도설의 비조였다.(배종호) 유학은 전통적으로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추구했다. 입학도설은 하늘과 인간이 하나 되는 방법론을 제시한다. 성리학적 우주론과 인간관이 탑재되어 있다. 성인(聖人)이 되기 위한 공부론의 보고이기도 하다. 전체 모양은 마치 사람 같다. 입학도설에서 가장 핵심은 천인심성합일지도다. 이 도설은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에 의해 머리는 둥글게 몸은 네모로 그렸다. 인간의 심성을 이기(理氣) 선악(善惡)의 구도로 그렸다. 하늘은 인간의 마음에 하늘의 본성을 그대로 설정했다. 이것이 인의예지(仁義禮智)다. 또한 인간(人)이란 인(仁)이다. 인(仁)은 모든 선의 으뜸이다. 마음(心)은 사람이 하늘에서 받은 것으로 몸을 주관한다.천일심성합일지도의 오른쪽 길은 성인의 길이다. 사단을 거쳐 순수하면서도 그치지 않고 성(誠)을 다해 진실무망하게 본성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바로 성인(聖人)이라는 설명이다. 그래서 성인은 성(誠)을 지극히 해 도가 하늘과 같아지므로 하늘과 똑같이 크다. 군자는 성인으로 가는 본래의 길에서 욕심으로 약간 치우치다 다시 경(敬)으로써 정신을 집중하고 존양과 성찰로 수양하며 성인을 향해 길을 걷는다. 그림의 왼쪽 길은 마음에서 희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의 기(氣)의 영향을 받아 경우에 따라서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게 된다. 악의 길은 금수와 짐승으로 가는 길이다. 잔인해 인을 해치고, 탐욕으로 예를 해치며, 자기만 좋아하는 욕심으로 의를 해치며, 흐리멍덩한 것으로 지혜를 해친다. 그 어긋남이 금수와 멀지 않다.(其違禽獸不遠) 금수는 모두 옆으로 누워 있다.(禽獸皆橫) 머리를 하늘을 향해 들지 못한다. 유학은 인간이 짐승으로 추락하는 것을 가장 경계한다. 그러면서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未嘗無善) 입학도설은 어떻게 하면 인간이 짐승으로 추락하지 않고 성인으로 갈 수 있는지를 친절하게 그림으로 보여준다. 그것이 하늘이 인간에게 준 사명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 당위성을 날마다 순간순간 실천해야 하는 존재이다. 양촌 권근에 있어서 입학도설은 모든 사람이 성인이 되어야 하는 정치적 비전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권근은 유교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유교 국가 조선에 출사하는 것을 마지막 순간까지 주저했다.(최연식, 창업과 수성의 정치사상) 이것은 권근 자신이 시대적 변화와 요구에 어떻게 부응할 것인가를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고민하던 중에 현실 참여의 계기는 태조 이성계가 1393년 계룡산 행재소에서 환왕(桓王)의 신도비명을 지을 사람으로 권근을 지목해 소환하는 데서부터 비롯되었다. 또 1395년 명나라와 표전문 사건이 발생했을 때 명나라가 그 주모자인 정도전을 압송하라고 통보했으나 정도전은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이때 권근이 자청해 명나라에 가서(1396) 표전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고 돌아오면서 새로운 기회를 포착해 수성 정국의 중심적 정치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최연식) 권근은 “사군자(士君子)가 세상에 나서기도 하고 들어앉기도 해 그 법도가 일정하지는 않지만 요컨대 시기에 맞고 의리에 합당하게 할 뿐이다”(양촌집 권17, 贈孟先生詩卷序)라고 말한다.절의와 출사를 넘나들었던 권근의 정치적 사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볼 때 그의 정치적 사유는 순수성을 강조하는 백이형(伯夷型)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권근은 책임윤리에 따라 실천하는 이윤형(伊尹型)에 가깝다. 이 때문에 어지러운 난세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치세를 위해 출사하는 것은 선비로서 당연한 시대적 책임이다. 고려 말과 조선 초기 양촌 권근은 창업과 수성의 갈림길에서 수성의 길을 열러 준 대사상가였다. 우주와 인간의 도덕적 합일을 추구하는 천일심성합일론을 권력관계에 투영시켜 왕권을 도덕적으로 견제해 신권과 긴장관계를 해소하려 했다. 왕의 길은 천일심성합일지도의 성인으로 가는 오른쪽 길이어야만 했다. 입학도설은 그 길로 가게 하는 지도인 셈이다. 다른 길이 없다. 다시 대학의 치국평천하로 확장되고 홍범구주천인합일지도에 이르면 군주는 천도를 계승하고 인간의 표준을 세우는 황극을 건립한다. 책임윤리로 무장하고 조선에 출사한 권근은 태종에게 치도(治道) 6조목을 올려 “수성할 때는 반드시 절의를 다한 전대의 신하에게 상을 주어야 한다”고 건의한다. 태조대에 간신으로 평가받던 포은 정몽주를 절의의 축으로 세우기를 건의한 것이다.이후 정몽주는 조선정치사상사의 뿌리가 되고 지금도 충신의 화신이 되어 한국인의 심성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또한 목화로 백성에게 추위를 피할 수 있게 한 문익점을 배향하고 그 자식들을 중용할 것과 화약을 활용해 왜구를 무찌른 최무선을 배향하고 그 자식들 역시 중용되도록 태종에게 요청한다.국가경영에 꼭 필요한 절의와 실용의 두 축을 제시한 것이다. 절의와 실용의 두 축은 씨줄과 날줄이 되어 역사의 그물망을 짠다. 입학도설은 난세를 치세로 전환하는 국가의 백년대계를 설계하는 그림책이었다. 오늘날 국가경영자는 국가백년대계를 위해 이렇게 쉽고 간단한 그림책 하나 가지고 있나 묻고 싶다. 권행완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편집위원장(정치학박사)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음성군 제공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29. 반계수록에 담긴 꿈 _ 반계 유형원의 묘

“도에 뜻을 두고도 확고히 서지 못하는 까닭은 뜻이 기질로 인해서 게으르게 된 잘못이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들며 학문에 열중하지 못하고, 의관을 바르게 하고 시선을 정중하게 하지 못하며, 어버이를 섬김에 안색을 부드럽게 하지 못하고, 가정에서 생활할 적에 서로 공경히 대하지 못하는 이 네 가지 문제점은 외적으로 나태한 데다 심중에서 가다듬지 못한 때문이니 응당 깊이 반성해야만 가능하게 될 것이다.” -유형원이 21세 때 지은 ‘네 가지 경계함’[四箴]에서 스스로를 ‘책만 보는 바보’라 했던 이덕무가 제자 이서구에게 이이의 성학집요, 유형원의 반계수록, 허준의 동의보감을 가장 좋은 책으로 추천하며 읽기를 권했다. 이덕무는 규장각 초대 검서관으로 활약했던 조선 최고의 학자이고, 이서구는 정조와 순조시대에 판서와 정승을 지낸 빼어난 경세가였다. 이들과 어울렸던 연암 박지원은 허생전에서 허생의 입을 빌어 “유형원은 일국 군대의 식량을 능히 조달할 수 있는 인재로서 속절없이 바닷가에서 늙는다.”며 개탄하였다. 반계 유형원의 학문을 충실히 계승하여 실학을 집대성한 성호 이익(李瀷)은 이렇게 말했다. “조선 건국 이래 수백 년 동안에 현실적인 정책을 적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학자는 오직 이율곡과 유반계 두 사람 뿐이다. 그리고 이율곡의 제안은 대부분 실천이 가능한 것이었는데, 반계의 제안은 율곡의 제안을 더욱 발전시켜 근본적인 개선을 주창하고 있으니 그 뜻이 참으로 크다.” ■경기도에서 키운 위대한 꿈 반계 유형원(柳馨遠, 1622~1673) 선생의 묘소(경기도 기념물 제31호)는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석천리 정배산 자락에 있다. 뒤편에는 부친 유흠(柳欽)과 어머니 이씨를 합장한 묘가 자리 잡고 있다. 30여 평 규모의 묘역에는 장대석을 놓고 아래 단에 좌우로 문인석 1쌍을 세웠다. 1768년(영조4)에 세워진 묘비에는 “유명조선국진사증집의겸진선반계유선생형원지묘 증숙인풍산홍씨부좌(有明朝鮮國進士贈執義兼進善磻溪柳先生馨遠之墓 贈淑人豊山洪氏祔左)”라고 쓰여 있다. 비문은 1768년(영조 44) 당시 이 지역을 관할했던 죽산부사 유언지가 짓고, 판중추부사 홍계희가 글씨를 썼다. 담장은 1971년에 묘역을 정화하면서 설치한 것이다. 봉분 앞으로는 경계석이 가지런히 놓여 있으며, 혼유석과 상석, 향로석이 그 중간 부분에 걸쳐서 놓여 있다. 금관조복을 입고 있는 문인석의 꾹 다문 입술과 커다란 눈을 내리깔고 있는 모습은 보는 이를 웃음 짓게 한다. 이 문인석은 위쪽에 위치한 부모의 묘소에 있는 문인석과 비슷한 양식인데 사망 직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유형원의 본관은 문화, 자는 덕부(德夫), 호는 반계(磻溪)이다. 서울 정릉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흠(欽)은 그가 두 살 때인 1623년에 일어난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 복위를 도모했다는 유몽인의 옥사에 연루되어 28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조부모와 함께 살게 된 유형원은 다섯 살 때부터 외숙부 이원진과 고모부 김세렴에게 글을 배웠다. 여덟 살에 사서삼경의 대의를 깨쳤으며, 열 살 때 경전 이외의 제자백가까지 섭렵하여 대강의 요지를 알았다고 한다. 이원진과 김세렴은 어린 조카와 토론하다가 “옛날에도 이런 사람이 있었을까?”라며 감탄했을 정도로 총명했다. 유형원은 열세 살 때 성현을 사모하며 뜻을 오로지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쓰기로 결심하고 평생을 실천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15세의 소년은 조부모와 어머니, 두 분의 고모를 모시고 원주로 피난을 갔다. 전쟁이 끝난 후 조부모는 부안으로 내려가고, 자신은 어머니와 서울로 되돌아왔다. 이때부터 조부를 찾아뵙기 위해 부안을 자주 드나들었다. 1642년(21세)에 자신을 경계하는 ‘사잠(四箴)’을 지었고, 서울을 떠나 경기도 지평(현 양주)에서 살다가 이듬해에는 여주로 거처를 옮겼다. 이해 고모부의 사위인 이가우(숙종대의 학자 이서우의 형)와 산천을 답사하고 한 달 넘겨 집에 돌아왔다. 이 무렵부터 거의 해마다 팔도를 여행했다. 도보 여행은 물론 한강을 따라 뱃길로 경기도와 충청도를 거쳐 강원도와 경기도까지 여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기행일기, 여지지, 지리군서를 편찬했다. ■우반동에서 꿈이 영글다 32세가 되던 1653년에 전북 부안 우반동으로 이사했다. 그의 호 반계는 그 동네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이곳에 반계서당을 짓고 부강한 조선을 만들기 위해 궁리하고, 제자를 기르면서 49세까지 반계수록을 저술했다. 이 책의 핵심은 토지제도의 개혁이다. “왕도 정치는 백성의 재산을 조절하는데 있고, 백성의 재산을 조절하는 것은 토지의 경계를 바르게 하는데 있다. 후세에 왕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은 모두 토지제도가 무너진 데서 말미암은 것이었고, 마침내는 오랑캐가 나라를 어지럽혀서 백성이 도탄에 빠지는데 이르게 되었다.” 유형원이 추구한 학문의 자세와 목적은 ‘실사구시(實事求是)’ 네 글자였다. 순암 안정복이 정리한 연보에는 이런 기사가 나온다. “마음에 묘하게 부합되는 것이 있으면 밤중에라도 일어나 그것을 기록하였다.” 유형원은 우리나라의 지세에 유의하여 산천을 두루 살피고 도로의 원근과 관방의 지세를 파악하여 기록했다. 집에 있을 때도 공부에 지치면 집안이나 마을의 아이들을 데리고 산에 오르거나 바닷가를 산책하는 일을 낙으로 삼았다. 여행을 하면서 이름난 선비를 만나 학문을 논하는 특별한 즐거움도 누렸다. 단학수련의 대가로 알려진 청하 권극중(1585~1659)이나 미수 허목(1595~1682) 같은 선배학자를 찾아뵙고 배움을 청했다. 학문으로 주위에 이름이 알려져 44살이 되던 해에 재상이 자신을 천거하자 정중히 사양했다. “내가 지금 재상을 모르는데, 지금 재상이 나를 어떻게 알겠는가?”라는 것이 거절한 이유였다. 유형원이 북벌에 뜻을 두었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실천한 북벌은 매우 구체적이다. 연보에 따르면, 우반동에 살면서 자신이 구상한대로 큰 배 다섯 척을 만들어 집 앞 바다에 띄워 성능을 시험하고, 스스로 준마를 길러 말 타기를 익혔으며, 좋은 활과 조총 수십 자루를 구하여 마을 주민과 종들에게 사격을 가르쳤다. 이 때문에 우반동의 포수가 국내에서 사격 잘하기로 소문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이처럼 무예를 가르쳤을 뿐 아니라 기효신서절요, 무경초 같은 병서를 편찬했다. 또한 중국말을 배워 제주도에 표류했다가 서울에 온 한인들을 만나 중국의 사정을 알아보기도 했다. 유형원은 필생의 저서 반계수록을 통해 나라의 제도 전반을 개편하려는 열망을 품었다. 토지를 균등하게 배분할 수 있도록 전제의 개편을 비롯하여 세제와 녹봉제의 확립, 과거의 폐지와 천거제의 실시, 천인신분의 세습제 폐지와 기회균등의 구현, 관제와 학제의 전면 개편 같은 개혁 방안을 조목조목 제시하고 꼼꼼하게 대안을 제시했다.민생문제의 기본적 해결이 소수가 독점한 사유 토지를 국가가 전부 몰수하여 다시 합리적으로 분배함에 있다는 주장이 개혁의 핵심이다. 토지는 사방 100보를 1묘(畝), 100묘를 1경(頃=약 5,000평)으로 4경을 1전(佃)으로 하여 1전 내에 농민 네 명이 각각 1경씩 경작하고 조세를 바치며(소출의 15분의 1) 1전에서 병사 1명을 내되 농민 네 명 중에 가장 건장한 자가 병역에 복무하는 병농합일의 체제를 실행할 것을 주장했다. 소문을 타고 반계수록 필사본이 팔도로 퍼져나갔다. 책을 읽고 반계의 주장에 동의하는 학자와 정치가들이 여럿 나타났다. 이런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1770년 영조의 명으로 반계수록 26권이 간행될 수 있었다. 유형원이 힘써 주장한 토지공유제와 경자유전의 사상은 실학파의 사상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탐관오리와 지주들의 횡포에 시달렸던 농민들의 열망과 의지 때문이다. 갑오동학농민혁명은 이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지금, 오늘, 여기 이제까지 살펴보았듯이 유형원은 개혁의 핵심을 토지의 고른 분배에서 찾았다. 여기서 우리의 현실은 어떤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2018년 대한민국의 현실은 반계가 살았던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형편이 좋아졌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반계가 평생을 걸고 개혁하려 했던 독점의 문제가 더욱 강화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국가와 사회가 서둘러야 할 일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일이며, 장래의 주인인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심는 정책을 제도화하는 것이다. 그 일의 시작은 독점을 해체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물결을 만들어내는데 학자들도 이제는 목소리를 내야 하지 않을까. 오늘 우리가 반계선생의 사상을 살피는 까닭이다.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28. 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

우리는 가끔 고찰이나 폐사지에서 우뚝 솟은 돌기둥을 만나게 된다. 당간지주라 불리는 이 돌기둥은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걸어두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매다는 장대[竿]를 양쪽에서 지탱해주는 역할을 한다. ‘당’은 주로 비단 같은 천으로 만들고 ‘간’은 무쇠나 청동 또는 나무로 만든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당간지주가 여럿 남아 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당간까지 남아 있는 것은 안성 칠장사 철당간을 비롯하여 8기이며, 당간지주는 남북한에 100여 기 가량 남아 있다. 안양시 예술공원 입구에 보물 제4호로 지정된 중초사지(中初寺址)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삼층석탑과 나란히 서 있다. 현재 이 일대에 건물이 들어서 있기 때문에 절의 규모를 제대로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개울을 건너 경내로 진입하게 되어 있었던 것과 당간지주가 서 있는 곳이 절 입구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동서로 마주 서 있는 당간지주는 1천2백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이 자리를 지켰다. 지면보다 약간 높게 단을 만들고 그 중심부에 세워진 당간지주를 보수하면서 바닥을 조사한 결과 크고 작은 잡석과 흙을 혼합하여 기초를 다진 것을 확인했다. 긴 사각형 돌을 남북으로 놓은 간대석 가운데 원좌와 지름 34센티미터와 깊이 15센티미터의 원공이 당간을 튼튼히 받쳐주었다. 지주는 높이에 비해 너비와 폭이 작아 가늘고 기다란 느낌을 주고 있으며, 정상부는 완만한 경사로 다듬었다. 외면 상부를 1단 낮게 깎은 지주의 장식 수법은 동시대 경주지역에 건립된 당간지주와 형식이 비슷하다. 이것은 8세기에서 9세기까지 건립된 당간지주들에서 흔히 발견되는 장식 수법이다. 참고로 중초사지 당간지주는 안동 운흥동 당간지주와 많이 닮았다.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은 상·중·하의 세 곳에 간구멍을 뚫어 설치했다. 상부는 내면 상단에 장방형의 구멍을 마련하여 간을 장치했고, 중·하부는 관통한 둥근 구멍에 간을 설치하게 되었다. 동쪽 지주의 윗부분이 깨져 있는데, 해방 이후 인근 마을의 석수들이 석재로 사용하려다 생긴 자취라고 전해진다. 이 당간지주는 일제강점기 때에도 보물로 지정하여 보호했던 것으로 광복 후 1963년에 보물로 지정했다. 우리나라에 있는 당간지주 가운데 가장 먼저 보물로 지정된 것이다. 신라 흥덕왕 1년(826년)에 만들어진 이 당간지주가 특별히 주목을 받는 까닭은 바로 두 개의 지주 가운데 서쪽 지주의 서쪽 면에 123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보력 2년(신라 흥덕왕 1년 826년) 병오년 8월 6일 신축일에 중초사 동쪽 승악(僧岳: 삼성산의 신라 때 이름으로 추정)에서 돌 하나를 나누어 둘을 얻었다. 같은 달 28일에 두 무리가 시작하여, 9월 1일에 함께 이곳에 이르고, 정미년(827년) 2월 30일에 모두 마쳤다. 절주통(節州統: 승려의 최고 직인 국통 다음의 지위)은 황룡사의 항창화상이다.” 이 명문을 통해 이 당간지주가 세워진 연대, 중초사라는 이 절의 이름, 경주 황룡사와의 관계, 황룡사의 항창화상이라는 당대 신라의 유명한 승려를 알 수 있다. 덧붙여 당간기에는 신라식 속한문을 혼용한 곳이 있어 고대국어사 연구에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려 때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은, 현재 이 탑이 서 있는 곳에서 동북쪽 80미터 지점에 도굴된 채 무너져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세운 것이다. 처음에 보물 제5호로 지정되었다가 1997년에 재평가가 이루어져 경기유형문화재 제164호로 격하되었다. ■남북국 시대의 역사가 담긴 유적 유득공이 발해사에서 주장했던 대로 통일신라와 발해가 양립하던 이 시기를 ‘남북국 시대’라고 부른다. 잠시 이 시대의 불교역사를 살펴보면 중초사지 당간지주의 역사적 의미가 좀 더 분명하게 살아날 것이다. 호국불교의 성격이 강했던 신라 불교는 8세기 후반부터 왕실권력과 더욱 밀착되었다. 경덕왕 때 재상 김대성이 불국사와 석굴암을 창건하여 왕실의 권위를 한껏 드러냈다. 불교예술은 절정을 이루었으나 불교는 지배계급과 밀착하여 사치와 타락의 길로 빠져들었다. 골품제의 모순도 한계에 이르렀다. 귀족들의 권력다툼으로 왕권이 약화되고 진골세력이 몰락하면서 지방호족들이 득세하게 되었다. 지방호족이 성장하면서 이들의 지원 아래 새로운 불교 종파인 선종(禪宗)이 도입되었다. 선종은 수도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 호족세력의 후원을 받으며 급속하게 성장했다. 이 무렵 미륵하생경에 근거한 미륵신앙도 빠르게 퍼져나갔다. 미륵신앙은 사회악이 극한에 다다른 현실 속에서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는 낡은 삶을 버리고 모두의 이익과 안락을 지향하는 새 삶을 추구함으로써 비로소 미륵의 용화세계가 펼쳐진다고 믿는 신앙이다. 당나라는 몰려드는 여러 나라의 유학생들에게 빈공과에 응시할 수 있는 특혜를 베풀었다. 그런데 812년에 처음 실시된 빈공과의 합격자 8할이 신라유학생이었다. 이 정도로 신라와 당은 가까웠다. 그러나 후반으로 가면 ‘해동성국’으로 불렸던 발해가 신라보다 더 많은 합격자를 배출하게 된다. 중초사지 당간지주가 세워질 9세기 초반의 신라사회는 요동치고 있었다. 825년에는 고달산의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이들은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의 반란세력과 연합하여 신라 왕조를 타도하려고 투쟁했으나 좌절하고 말았다. 826년에는 승려 도의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보림사에서 처음으로 선종을 전파했으며, 홍척은 남원 실상사에서 선종을 전파했다. 당간지주 완공된 해(827)를 기준으로 1년이 지난 828년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장보고 장군이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상왕으로 이름을 떨치고, 증각대사가 지리산에 실상사를 창건했다. 6년이 지난 833년에는 대구 동화사에서도 당간지주(보물 제254호)가 제작되었다. 이처럼 중초사 당간지주가 제작되던 827년 전후에 선종이 시작되고, 실상사와 동화사 같은 대사찰이 건립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비추어보면 중초사도 이들 사찰에 못지않은 규모와 위상을 가졌을 것으로 진작된다. 그러나 동문선, 동국여지승람 같은 문헌에 중초사가 전혀 언급되지 않는 것을 보면 일찍 폐사가 된 듯하다. 중초사를 이은 사찰이 안양사이다. 이곳에 안양사가 들어선 것은 900년이다.■ 안양시를 있게 한 안양사 안양사가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태종 6년(1406) “어가가 금주(衿州) 안양사 남교에 머물렀다.”라는 기사이다. 태종 11년(1411)에는 정종이 안양사에 거둥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태종 17년에는 안양사에서 수원 부사와 과천 현감이 잔치를 벌였다는 기록도 나온다. 이를 보면 안양사는 한양의 근교에 위치한 사찰로서 왕과 양반사대부들이 즐겨 찾았던 명소였음을 알 수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세종 30년(1448)의 기사이다. 당시 세종은 궁궐 안에 내불당을 건립하여 유학을 신봉하는 신하들과 마찰을 빚었다. 이때 신하들은 삼성산 안양사 터에 큰 절을 다시 창건한다는 소문을 전하며 세종에게 내불당의 철거를 요청했다. 내불당으로 인해 “안양사가 중건되고, 불법이 다시 일어날 것 같아 두렵다”는 이유였다. 광복 후 이 주변이 논밭으로 개간되어 오다 1950년대 말 유유산업 부지가 되어 건물이 들어서면서 절터의 흔적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유유산업이 수도권기업 지방이전 정책에 따라 이전했다. 유유산업의 건물은 유명 건축가 김중업이 1950년대 후반에 설계한 것이다. 안양시는 이들 건물을 근대산업유산으로 활용해 부지 일대를 예술창작공원으로 조성했다. 이때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중초사가 아니라 안양사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를 발견하여 이곳이 안양사 터였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안양(安養)’이란 불교에서 아미타불이 주관하시는 서방정토 즉 극락세계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니 안양사는 극락으로 인도하는 절이라는 뜻이다. 이렇듯 안양시는 안양사가 있는 도시였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천현 조에는 안양사에 대한 설명이 있다. “안양사는 삼성산에 있다. 절 남쪽에 고려태조(왕건)가 세운 7층 벽돌 탑이 있고 김부식이 지은 비문은 결락되었다.” 이를 통해서도 이 자리에 본래 중초사가 있었으나 후삼국 시대(900)에는 안양사가 세워졌던 사실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중초사지 당간지주에서 약 500여 미터 떨어진 바위에 한 동자승이 종 치는 모습을 담은 조각이 새겨져 있다. 마애종(磨崖鐘, 경기지방문화재 제29호)이다. 마애불이야 널려 있지만 마애종은 이것이 국내 유일한 것이다. 이 마애종도 중초사나 안양사와 관련이 깊은 유물임에 틀림없으니 빠트리지 말고 살펴볼 일이다. 신라의 중초사는 고려의 안양사를 거쳐 조선 중기에 폐사 되었다가 근세에 포도밭으로 활용되어 사람을 불러 모으다가, 유유산업 공장이 들어서면서 김중업의 건축물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지금 이 터가 예술공원으로 산뜻하게 변모하여 시민들의 사랑을 받게 된 것도 명당이 내린 축복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26> 재치와 해학 ‘양주별산대놀이’

탈춤을 떠올리면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우스꽝스러운 탈을 쓴 광대의 익살스런 춤사위와 재담은 관객들과 호흡하며 웃음과 감동을 선사한다. 탈춤은 한국인의 흥과 신명을 한껏 드러내는 민중연희이다. 한국인의 신명과 활달한 몸짓, 익살과 풍자가 절묘하게 어울린 양주별산대(楊州別山臺)놀이는 1964년에 국가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됐다. 이밖에 경기도에는 송파산대놀이와 퇴계원산대놀이도 있다. 산대놀이의 춤사위는 부드럽고 우아하며 섬세한 경기도 무용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양주별산대놀이는 봉산탈춤, 안동하회별신굿탈놀이, 통영오광대 같은 탈춤과 무엇이 닮았고 무엇이 다를까. 양주별산대놀이는 본산대놀이가 사회풍자와 비판의식의 표현보다는 세련된 놀이기술에 치우쳤던 전통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얼핏 춤자랑, 말자랑 같은 장면에도 기존의 가치관을 뒤집는 주장이 감추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영재 유득공의 경도잡지를 보면 “연극에는 산희(山), 야희(野) 두 부류가 있는데 나례도감에 속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유득공은 산대희를 다락을 엮고, 사자와 호랑이 따위를 만들어 놓고 춤을 추는 놀이라고 했으며, 탈춤인 야희는 당녀, 소매로 분장하고 춤을 추는 놀이라고 했다. 당녀와 소매는 양주별산대에 등장하는 왜장녀와 소무의 전신이 아닐까 싶다. ■ 왜 양주일까 양주별산대놀이는 양주시 유양동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 유양리는 양주목의 관아가 있던 곳이다. 임진왜란 후 양주에 목사 유척기가 부임해 군사와 관내 주민을 위로하기 위해 한양의 본산대를 초청한 것이 산대놀이의 시초라고 전한다. 200년 전부터 양주에서는 매년 초파일, 단오, 추석 같은 명절이면 사직골의 딱딱이패를 초청해 산대놀이를 공연했다. 그러나 딱딱이패가 공연이 많아 여러 차례 약속을 어기자 을축이라는 사람이 중심이 돼 딱딱이패에게 놀이와 가면 만드는 법을 배워 스스로 놀이를 하게 된 뒤로 이 놀이가 이곳에 뿌리를 내리게 됐다. 더욱이 그때 양주에 있던 악사청의 악사들과 어울려 연습을 한 끝에 본래의 산대놀이에 못지않은 재주를 익히게 됐으나 내용과 형식이 본(本)산대놀이와 조금 달라 별(別)산대놀이로 불리게 됐다. 양주에서 별산대를 만들어 본산대를 초청할 필요가 없게 된 시기를 18세기 후반으로 보고 있다. 이와 관련해 1791년에 정조의 지원을 받은 번암 채제공이 특권 상인인 금난전권을 철폐하는 ‘신해통공’을 실시한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별산대놀이는 한양 근교의 신흥 상업도시 양주의 사상도고가 육성한 탈춤이다. 이후 정월대보름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도 마을 사람들이 모여 한바탕 크게 놀았다. 특히 초파일에는 놀이판을 벌이기 전에 먼저 줄불놀이와 관등놀이를 했다. 이 놀이가 끝나면 마을 북쪽의 불곡산 아래에 있는 사직골에서 별산대놀이를 시작해서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했다. 이렇게 전승되던 산대놀이는 6.25전쟁으로 탈과 옷, 도구가 모두 불에 타 버리고 놀이를 아는 사람들도 흩어져 그 맥이 끊길 뻔했다. 다행히 양주 출신인 김성대와 몇몇 사람이 정성을 쏟아 원형을 복원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 보존에 힘써 오늘까지 이어지게 됐다. ■ 양주별산대놀이의 특징 양주별산대놀이는 일반 탈춤과 만찬가지로 악기 연주에 춤이 주가 되고 노래가 따르는 부분과 몸짓과 재담이 따르는 부분으로 구성된다. 상좌, 연잎, 눈끔적이, 왜장녀, 애사당, 소무, 노장, 원숭이, 해산모, 포도부장, 미얄할미역은 대사가 없고 춤과 몸짓과 동작만으로 연기를 하지만 그 밖의 역들은 대사와 함께 춤과 몸짓과 동작으로 연기한다. 옴중과 취발이의 대사는 관중의 흥미를 가장 끌었다. 그러나 취발이의 대사는 너무 노골적이라 취발이가 등장할 무렵이면 부녀자 관객은 자리를 떠나는 것이 상례였다고 한다. 말없는 탈의 연기로는 노장이 가장 우수한데 대사 한마디 없이 춤과 몸짓만으로 소무와의 파계 과정과 희롱을 표현하고 있다. 공연은 보통 저녁에 시작하면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됐다. 그때그때의 흥과 형편에 따라 3, 4시간으로 줄이기도 했다. 산대놀이의 대사와 춤이 구전으로 전해지기 때문에 줄이고 늘이는 것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산대놀이의 반주 악기로는 삼현육각 즉, 피리 두 개, 젓대(대금) 하나, 해금 하나, 장구 하나, 북 하나로 구성된다. 하지만 꽹과리를 추가하는 수도 있고 때로는 피리와 장구만으로도 춤을 춘다. 증보문헌비고 권 64에 인조 원년(1623)에 궁중가례에 가면을 쓰면 비용이 많이 드니 목가면으로 바꾸어 매년 개작해 쓰기로 논의된 사실이 있다. 양주산대탈은 오래전부터 바가지탈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탈은 놀이가 끝난 후 사직골 당집에 보관하고 해마다 개작해 썼고 당집이 없어진 뒤로는 연희자의 집에 보관해 왔다고 한다. ■ 파계승과 몰락한 양반 놀이는 길놀이로 시작되는데 서낭대와 탈들을 앞세우고 풍물을 울리며 마을을 돈다. 낮 동안은 주로 부유한 집들을 들러 춤과 덕담을 베풀어 흥취를 돋우다가 밤에 탈고사를 지내는 것이 상례이다. 놀이 전의 고사에는 푸짐한 제물이 올라야 하고 제주를 음복해 취기가 오르면 놀이가 시작된다. 양주별산대놀이는 산대도감 계통과 같은 내용으로 파계승, 몰락한 양반, 무당, 사당, 하인 및 늙은이와 젊은이가 등장해 현실을 폭로하고 풍자, 호색, 웃음과 탄식 등을 보여준다. 주제는 크게 나누어 파계승 놀이와 양반 놀이와 서민 생활상을 보여주는 놀이이다. 이처럼 양주별산대놀이는 당시의 특권 계급과 기존 도덕에 대한 비판정신을 연출하는 민중극이다. 그러나 각 놀이마다 주제에 약간의 차이는 있다. 남녀 삼각관계의 설정에서 봉산탈춤, 오광대, 꼭두각시놀음은 남녀의 갈등을 강조해 영감과 미얄 그리고 그 첩과의 관계를 다룬데 비해 양주별산대놀이에서는 남녀의 갈등보다 양반과 평민의 대립관계에 역점을 두고 있다. 양주별산대놀이는 모두 8과장 8경으로 돼 있으며 22명 내외의 출연진으로 연회되고 있다. 등장하는 인물은 소무 2명, 가먹중 5명, 소무 4명, 원먹중, 완보, 옴중, 말뚝이, 연잎, 눈끔적이, 왜장녀, 애사당, 노장, 신장수, 원숭이, 취발이, 해산모, 샌님, 포도부장, 쇠뜩이, 도련님, 서방님, 신할애비, 미얄할미, 도끼, 도끼누이, 아들, 손자, 증손자다. 그리고 양주별산대놀이의 탈에는 말을 하는 유언탈과 말을 하지 않는 무언탈(멍추탈)로 나뉘어져 있다. 유언탈은 원먹중, 가먹중, 옴중, 신주부, 완보, 말뚝이, 신장수, 취발이, 조련님, 샌님, 쇠뚝이, 신할애미, 도끼누이, 도끼아들이 있다. 무언탈(멍추탈)은 첫째상좌, 둘째상좌, 눈끔적이, 왜장녀, 애사당, 손자, 증손자, 원소무, 가소무, 원숭이, 노장, 해산모, 서방님, 포도부장, 미얄할미가 있다. ■ 춤사위와 장단에 풍자정신 담아 산대춤에는 거드름춤과 깨끼춤, 두 종류로 돼 있다. 거드름춤은 염불곡으로 추는 춤이고 깨끼춤은 타령조로 추는 춤이다. 거드름춤이란 멋을 마디 속에 집어넣은 춤이고, 깨끼춤이란 그 멋을 풀어내는 것이다. 양주별산대에서도 춤과 음악, 노래, 덕담, 가사가 주가 된다. 반주되는 악곡으로는 영산회상, 염불곡, 느린 굿거리, 자진 굿거리, 느린 허튼타령, 중 허튼타령, 자진 허튼타령이 있다. 장단으로는 염불, 허튼타령, 느린 굿거리, 자진 굿거리, 세마치, 7채 맞음 등이 있다. 노래로는 등장가, 백구타령, 조기잡이, 야할타령, 염불타령, 둥둥타령, 넋타령, 시조 등이 있다. 양주별산대놀이는 여전히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전통을 잇는 예인들의 긍지와 자부심도 유난히 강하다. 이러한 양주별산대놀이의 내용과 형식을 살펴보면서 드는 생각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산대놀이의 춤사위와 대사에 묻어있는 비판의식과 풍자정신이다. 200년 전 우리 선조들이 겪었던 고민과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고민은 본질적으로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경기저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25. 일과 놀이와 삶의 절묘한 만남, 평택농악

흥겹고 푸진 농악은 한국인의 신명을 일깨워왔다. 꽹과리와 징, 북과 장구소리는 심장과 맥박을 요동치게 하는 힘과 흥을 가지고 있어 사람들을 신명나게 한다. 농악을 치면 농사일에 지쳐 있던 농민들의 얼굴에 생기가 돌고, 의젓하고 당당한 농군의 모습으로 변신하게 된다. 이처럼 한국인의 신명은 농악놀이와 함께 분단과 전쟁을 겪고도 경제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하게 한 저력으로 살아있다. 농악은 일과 놀이, 삶과 놀이를 구분하지 않은 한국인의 지혜가 녹아있다. 옛사람들은 농악놀이를 매구, 풍물, 풍장, 두레, 걸립 등으로 불렀다. 또 이를 구분하여 연주 예능을 중심으로 공연할 때는 매구친다, 쇠친다라 하고, 악기를 통해 말할 때는 굿물, 풍물이라 불렀다. 또 종교적 기능을 강조할 경우에는 굿, 지신밟기라 하며, 노동 예능으로 볼 때는 두레라 하고, 풍류로 해석할 때는 풍장이라고도 불렀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1-2호 평택농악 지난 7월 8일 평택남부문화예술회관에서 국가무형문화재 제11-2호 평택농악 예능보유자였던 이돌천 명인(1919~1994)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추모공연이 벌어졌다. 평택농악보존회에서 마련한 이날의 공연은 최은창 명인(1914~2002)과 함께 평택농악 초대 인간문화재였던 이돌천 명인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는 후배들이 정성을 모은 푸진 놀이마당이었다. 평택농악은 경기도 평택 지방에 전승되던 마을 두레패 농악에 경기 남부의 전문 연희패 농악이 결합되어 평택 팽성읍 평궁리를 중심으로 전승되었다. 소샛들이라는 넓은 들을 끼고 있는 평택은 풍요로운 터전을 배경으로 농악이 성행할 수 있었다. 특히 평궁리는 예로부터 지신밟기, 두레굿 같은 여러 농악이 성행했던 마을이다. 평택농악에서 무동놀이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특히 오무동은 난이도가 가장 높은 기예로 꼽힌다. 풍채 좋은 남성(밑동)의 어깨를 밟고 선 어른(중동)의 어깨 위에 어린아이(사미)가 서고, 좌우에 두 어린아이(무동)가 한 손으로는 어른(중동)의 손을 잡고 한 발로는 어른(중동)의 허리를 디디고 두 팔을 벌려 서서 다섯 사람이 하나의 탑을 이룬다. 어른의 대담한 걸음과 당당한 몸짓은 물론 세 아이들의 단아한 태도와 넉넉한 미소에 넋이 빠진다. 오무동 곡마단 2개조가 동시에 공연하는 것을 ‘쌍오무동 곡마단’이라 한다.■지신밟기, 두레농악, 걸립굿, 비나리, 난장굿 평택에서는 정초에 지신밟기, 여름철에 두레굿, 겨울철에 걸립굿에 농악을 크게 치고, 초파일에 듣대굿, 단오날에 난장굿을 쳐왔다. 지신밟기는 정초에 마을의 풍물패가 모여 집집마다 돌면서?풍물을?치고 지신을 밟아주며 쌀과 돈을 추렴하는 세시풍속으로 정월 보름까지 이어진다. 섣달에 풍물을 장만해 두었다가 정초에 지신 밟는 날 오전에 쇠꾼들이 서낭기를 앞세우고 풍물을 치며 당에 가서 당굿을, 마을의 큰 우물에 가서 샘굿을 치고 집돌이를 한다. 대문 밖에서 수문장굿을 치고 집 안으로 들어가 우물굿, 터주굿, 조왕굿, 고사, 마당굿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두레농악은 협업이 절실한 모내기부터 가을걷이에 이르는 기간에 이루어졌다. 짧은 시일에 품이 많이 드는 모내기를 할 때면 반드시 두레가 행해졌다. 이처럼 두레농악은 모내기에서 시작되어 세벌 김매기 때까지 행해진다. 세벌 김매기가 끝날 때쯤인 백중날에 ‘백중놀이’또는 ‘호미씻이’라는 이름으로 마을 공터에서 술과 음식을 차려 놓고 판굿을 하며 걸판지게 놀았다. 걸립굿은 크게 촌걸립패와 절걸립패로 나눈다. 촌걸립은 공동기금을 마련하거나 특별한 경비를 모을 필요가 있을 때 이루어진다. 초청된 전문연희패는 집집마다 다니면서 풍물을 치고 고사를 통해 축원을 해준 대가로 돈이나 곡식을 받았다. 거둔 재물은 걸립을 요청한 쪽과 연희패가 나누어 가졌다. 절걸립패는 사찰의 수리나 중수 같이 절에서 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절과 연희패 간에 계약을 맺고 행하는 걸립이다. 평택농악은 걸립을 주로 했던 전문연희패를 모체로 발전했기 때문에 고사소리(비나리)가 발달되어 있다. 평택농악의 초대 예능보유자였던 최은창은 당대에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비나리꾼이었다. ‘고사 잘하기는 최은창이요, 돈 잘 뺏기는 김복섭이다’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지신밟기나 걸립을 할 때, 화를 물리치고 복을 가져다주기를 비는 사설이 여러 군데 들어간다.이 중 짧고 간단한 것을 지신풀이라고 하며, 마지막으로 대청마루에 차려놓은 고사상 앞에서 하는 소리를 고사소리 또는 비나리라고 한다. 고 최은창 명인과 더불어 이성호도 고사의 명인으로 오늘날 사물놀이패 비나리의 원조라 불린다. 김용래, 김육동, 이영옥이 받아주는 뒷소리는 고사꾼의 소리를 푸짐하게 받쳐준다. 김용래가 치는 고사반주 북소리는 일찍부터 최고로 평가되었다. 난장굿은 정기 장날 외에 임시로 특별히 열리는 장날에 벌어진다. 풍성하고 넉넉한 명절을 맞이하기 위해 벌인 난장이 파일난장과 백중난장이다. 난장에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아 시장을 흥성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전문기예를 가진 풍물패를 불러다가 장터 한가운데서 놀게 하는 것이 난장굿이다. 이런 난장굿은 평택을 비롯해서 안성·오산·용인·수원 등 경기남부에서 자주 이루어졌다. 판굿은 굿패들이 여러 가지 놀이와 진풀이를 순서대로 짜서 갖은 기예와 재주를 보여주기 위해 벌이는 것으로 지신밟기나 걸립을 하면서 집집마다 마당씻이로?하던 농악놀이가 확대된 것인데 이 또한 전문연희패가 판을 주도했다.■명인 최은창과 이돌천 그리고 김용래 평택농악의 토대를 구축한 최은창 명인(1914~2002)은 평택에서 태어나 마을 두레패 상쇠에게 꽹과리를 배웠는데, 16세 때 두레패의 상쇠를 맡았을 만큼 기량이 뛰어났다. 이후 전문연희패에서 활동했으며, 직접 절걸립 행중을 꾸려서 전국을 무대로 활동했다. 평택농악을 결성하여 평택농악의 원형을 완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1985년 평택농악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받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최은창은 초대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최은창과 함께 평택농악을 이끌어 온 이돌천 명인(1919~1994)은 천안에서 태어나 12세 때부터 무동으로 농악을 시작했다. 1980년 평택농악을 결성할 때 합류하여 1985년 초대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현 인간문화재인 김용래 명인(1939~ )은 천안에서 태어나 13세 때 난장패에 사미로 들어가 처음으로 농악을 시작했다. 18세 때 상모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때 그를 가르친 스승이 바로 평택농악의 명인 이돌천이다. 1987년 평택농악 전수교육조교로 지정받았으며, 2000년 인간문화재로 인정받아 현재까지 평택농악의 보존과 전승에 매진하고 있다. 특히 무동놀이의 체계를 확립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사라진 무동놀이의 기술을 복원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일과 놀이의 통일 평택농악의 판굿은 입장 및 인사굿-돌림법고-당산벌림1-오방진-돌림법고-당산벌림2(찍금놀이·절구댕이법고놀이)-사통백이-돌림좌우치기-합동좌우치기-쩍쩍이춤(연풍대)-돌림법고-개인놀이-무동놀이-12발 채상놀이-인사굿의 순서로 진행된다. 주목할 부분은 당산벌림 2에서 놀아지는 찍금놀이와 절구댕이법고놀이이다.농사를 짓는 흉내를 내는 이 놀이는 두레농악과 연희농악을 연결시키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찍금놀이는 판을 이끄는 상쇠가 무동과 법고잽이들을 차례로 불러내 함께 노는 것이다. 삼채 첫 장단에 앉고, 두 번째 장단에 오른손을 땅에 짚었다 뗀다. 세 번째 장단에 왼손을 땅에 짚었다 떼고, 네 번째 장단에 양손을 땅에 짚었다가 다섯 번째 장단에 일어나는 순서로 진행된다. 이렇게 손을 번갈아 땅에 짚었다 떼는 것은 모내기하는 동작을 본 뜬 것이다. 버나돌리기는 쳇바퀴나 대접을 돌리는 묘기로 법고잽이들이 진행한다. 버나돌리기는 원래 남사당패 6개 놀이의 하나로, 다른 지역의 웃다리농악에서는 보이지 않는 버나놀이가 평택농악에서 연행되는 것은 평택농악과 유랑전문연희패와의 연관성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평택농악을 한두 번 보아서는 구성과 흐름을 파악하기 힘들다. 그러나 평택농악은 처음 보는 사람도 쉽게 빠져들 만큼 매력적이다. 역시 우리의 몸짓과 소리는 공연되는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듣는 게 가장 흥겹고 기분이 좋다. 농악의 흥겨운 가락에서 노동으로 지친 몸을 춤사위에 맡겨 생기를 되찾았던 선조들의 슬기가 그립다. 늦여름 더위가 절정이다. 평택농악의 흥겨운 가락과 활달한 춤사위에서 선인들이 누렸던 멋과 여유를 찾아보면 어떨까.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25. 최고의 외교 전략가 서희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는 우리 역사상 외교적으로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던 서희(942~998)의 묘가 있다.경기도 기념물 제36호다. 서희 묘역으로 가는 입구에는 서희의 신도비와 사적비가 방문자를 맞이한다. 상두산(象頭山) 서희 묘역은 전체적으로 3단 층계식으로 되어 있어 고려시대 묘제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묘소로 올라가는 첫 단은 네모진 공간이다. 두 번째 단 좌우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이 양쪽으로 한 쌍씩 세워져 있고 무덤 앞에는 장명등(長明燈, 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자리한다.맨 위 세 번째 단에는 서희의 묘와 부인 묘가 쌍분(雙墳)을 이루고 있으며 봉분 아래쪽은 2단 둘레 돌(護石, 능이나 묘의 봉토가 무너지지 않도록 봉토 아랫부분을 돌려 쌓는 돌)로 둘려 있다. 직사각형 모양의 쌍분 앞에는 각각 상석이 놓여 있고 쌍분 중앙에는 서희의 묘임을 알 수 있게 하는 묘비 1기가 1천 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 서 있다. 서희는 942년 고려와 거란 간 만부교사건이 발생한 바로 그 해에 태어났다. 만부교 사건은 태조 왕건이 거란이 외교 사절로 보낸 사신 30명을 섬에 유배시키고 낙타 50필을 만부교 아래 메어 두었다 모두 굶겨 죽게 했던 사건이다. 이로써 왕건은 거란과 적대적 관계를 분명히 밝혔다. 서희가 활동했던 10세기 동아시아 정세는 당(唐) 제국이 몰락한(907) 이후 파죽지세로 일어나 만주 일대를 장악한 거란과 중국 남방의 송(宋)나라(960) 그리고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936)가 각축전을 벌이는 형세였다. 거란은 송을 제압(991)하고 난 후 동아시아 최강의 패자로 등극했다. 거란의 다음 단계는 고려와 송의 관계를 사전에 차단하고 고려를 복속시키는 것이 외교적 과제였다. 고려 또한 서경 이북지역에 성을 쌓으며 국방력을 강화하고 사민 정책으로 백성을 이주시켜 영토화하는 북방정책을 추진하는 중이었다. 마침내 거란은 성종 12년(993) 10월에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쳐들어왔다. 거란의 제1차 침입이다. 두 나라 군사는 당시 동북아 최대의 전략적 요충지인 압록강 하구에서 대치했다. 거란군의 선봉은 고려 서북방 봉산군을 이미 기습 점령하고 고려군의 선봉장인 윤서안을 포로로 붙잡았다. 그리고 항복을 요구했다. 그는 “대국 거란은 이미 고구려 옛 땅을 차지하고 있는데 지금 고려가 그 영토를 침범하므로 이에 정벌하러 온 것”이라며 “거란은 사방을 통일했는데 아직 복속하지 않는 자는 기어이 소탕할 것이니 속히 항복하라”고 말한 것(고려사 열전 서희전)으로 알려졌다. 고려 조정은 먼저 이몽전을 대표로 보내 거란 측과 협상을 시도했으나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소손녕의 글을 본 서희는 80만 대군까지 이끌고 왔다면서 항복하라고 엄포만 놓는 소손녕의 의도를 꿰뚫어 보고 그 틈새를 노리고 있었다. 고려 성종은 조정 대신들을 소집해 국가안보전략회의를 주재했다. 적군이 우리 땅을 침략해 와서 국가의 안위와 백성의 재산과 생명이 경각에 달린 절체절명의 순간임에도 대신들은 겁을 잔뜩 집어먹고 군사들을 이끌고 항복하자는 항복론과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자는 할지론(割地論)만이 난무했다. 이에 성종은 할지론으로 결정한다.더불어 백성에게 나누어주고 남은 쌀은 적의 식량으로 사용될까 두려우니 대동강에 모두 버리라고까지 지시한다. 이 처참한 현실 앞에서 이지백은 “한 사람의 충신도 없어서 갑자기 토지를 가벼이 적에게 준다면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하며 할지론은 안된다고 임금에게 직언한다. 거란군은 이몽전이 돌아간 후에 고려로부터 아무런 회답이 없자 안융진으로 진격한다. 안융진 수비대 책임자는 발해 출신 중랑장 대도수였다. 안융진 부대는 처절한 싸움 끝에 거란군을 패퇴시키고 만다.이때 서희는 성종에게 “우리 영토를 적에게 떼어주는 것은 만세의 치욕이 될 것입니다…적과 더불어 한번 싸우게 한 뒤에 다시 논의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며 항복론도 아니고 할지론도 아닌 먼저 결사항전하고 나중에 협상하는 제3의 방안을 제시한다.또한 “먹을 것이 족하면 성(城)도 가히 지킬 것이고 싸움도 가히 이길 것”이라며 쌀도 못 버리게 한다. 이에 성종도 조정에서 대신들과 이미 결정한 정책을 뒤엎는다. 국가 최고 지도자의 고뇌에 찬 결단이었으리라. 성종은 “누가 적진에 들어가 세치 혀(三寸舌)로 적군을 물리쳐 만세의 공을 세우겠느냐”고 묻는다. 대신 중에 응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서희만이 강화회담에 홀로 나서기를 자청한다. 서희의 회담 상대는 동아시아 군사대국의 백전노장 소손녕이었다. 소손녕은 “나는 대국의 귀인이니 고려 사신은 절하라”고 윽박지른다. 기선제압이었다. 서희는 양국의 대신이 서로 만나는 자리에서 그리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응수한다. 두 사람은 두세 번 기 싸움을 되풀이한다. 그러다 서희는 아예 숙소에 들어가 누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소손녕이 대등한 의전 절차에 동의하자 서희는 그때야 담판에 들어갔다.소손녕의 요구 사항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첫째 너희는 신라를 계승했으니 옛 고구려의 영토는 거란에 속하므로 돌려줄 것. 둘째 송과 단교하고 거란에 사대(事大)할 것. 서희는 소손녕의 전략을 간파했다. 사태를 보는 눈은 예리했고 머리는 냉철했다.서희는 국호가 고려이고 고구려의 옛 수도 평양을 도읍으로 정한 이유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그 명백한 증거라고 반박한다. 또한 여진이 가로막는 압록강 주변의 땅을 고려에 주어야만 송과의 관계를 끊고 거란과의 사대의 길을 열 수 있다고 협상안을 제시한다. 다시 말하면 서희는 소손녕에게 거란이 영토를 양보하면 고려는 사대의 대상을 바꿀 수 있다고 역제안한 것이다.거란에 사대라는 명분을 주고 고려는 영토라는 실리를 챙기는 고도의 전략이다. 외교의 기준은 국익이다. 결국 거란은 서희의 설득력 있는 논리에 강동 6주를 내준다. 칼과 총으로 싸우지 않고 세치 혀로 강동 6주를 획득한 쾌거였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한민족이 압록강까지 영토를 확장한 역사적 사건이었다.그래서 한국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외교라고 가히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대도수의 승리와 서희의 굴복하지 않는 의기가 없었더라면 화친이 이루어지기는커녕 적의 끝없는 요구를 채우느라 갖은 고난을 겪었을 것”이라는 안정복의 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국방력은 외교, 경제 등 국가가 존재할 수 있는 가장 원천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는 주변 강대국의 사활적 이익이 걸린 전략적 요충지이다. 서희가 활동했던 10세기도 마찬가지다. 땅은 움직이지 않는다. 때문에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 또한 변하지 않는다. 여기에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등 주변 강대국이 존속하고 강대국 간의 갈등과 첨예한 이해관계가 존속하는 한 역사는 되풀이될 가능성이 농후하다.국가안보는 엄중하다. 강대국의 패권경쟁은 여전하다. 이런 동아시아 안보구조 속에서 남북분단의 비정상적인 구조를 타개하고 평화질서를 재구축하려면 서희의 탁월한 외교적 안목이 꼭 필요한 시점이다. 강대국은 힘으로 존재하지만 약소국은 지혜가 있어야 생존한다. 국제질서는 생물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중국은 고구려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는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다. 서희와 소손녕의 회담은 거란이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왕조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하는 역사적 사례이자 설득력 있는 논리 개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서희는 이천(利川) 사람이다. 이천시는 출중한 외교역량과 사명감으로 새로운 역사의 장을 창출했던 서희의 정신과 얼을 기리는 서희 문화제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올해는 9월 8일과 9일 양 이틀간에 걸쳐 열릴 예정이다. 서희가 21세기 우리에게 준 외교적 유산은 무엇인가.권행완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편집위원장(정치학박사)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24. 오리 이원익 초상화

“공(이원익)은 진정 장대한 체구에 근엄하고 씩씩한 모습이리라. 드높은 태산, 화악 같았으리라 상상했지만 실상은 섬약한 아래턱이며 불그레한 콧날에 어른어른 주근깨가 여기저기 박힌 모습이로다” 다산 정약용이 오리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의 초상을 보고 말한 글의 일부분이다. 다산이 초상을 보고 지은 글처럼 이원익은 섬약한 아래턱에 불그레한 콧날을 가졌으며 뺨에는 어른어른 주근깨가 여기저기 박힌 모습이었다. 업적으로 상상했던 이원익의 모습이 아니었기에 꽤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초상화를 그린 조선의 화가들은 인물의 모습은 물론 정신까지 드러내는 경지 즉, 전신(傳神)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화력을 초상화에 다 쏟아 부었다. 이러한 자세로 초상을 그렸기 때문에 대상 인물의 감추고 싶은 약점까지 모두 드러냈던 것이다. ■초상으로 만나는 청백리 이원익의 모습 국내에 알려진 이원익의 초상화는 모두 6점이다. 이 중에서 4점이 광명시 소하동 충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과 경북 영주의 소수서원에 1점씩 소장되어 있다. 문화재청이 2005년 7월 5일 충현박물관 소장된 오리 영정 중에서 ‘호성공신도상(扈聖功臣圖像)’을 보물 1435호로 지정했다. 초상화 속의 이원익은 오사모를 쓰고 흉배가 딸린 단령포의 대례복을 입은 전신의좌상(全身椅坐像)이다. 두 손을 소매 안에 넣고 곡교의(曲交椅)라는 의자에 앉은 모습인데 왼편얼굴을 포착한 구도이다. 이러한 형식은 공신이나 관료초상화의 전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앉아 있는 바닥에 진한 채색의 중국식 채담이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화려한 채색무늬를 위에서 본 것처럼 평면도식으로 그리고 측면에서 본 초상과 합성했다. 이러한 방식은 이 무렵에 제작된 공신 초상화의 전범이 되었다. 얼굴에는 음영 효과가 거의 들어가 있지 않고 얼굴은 선묘 위주로 되어 있으며, 족좌대 위에 흑피혜와 채전이 깔렸다. 오사모에 단령을 입은 좌안7분면(左顔七分面)의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으로 17세기 공신도상의 전형을 보여준다. 왼쪽 팔꿈치 뒤로는 단령 자락을 들고 앉음으로써 생겨나는 뾰족하게 세모꼴로 그려진 무가 보이는데, 이것 역시 17세기 정장관복본 초상화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크기는 167×89㎝. 한편 ‘경기도유형문화재 제80호 오리 영정’도 주목되는데 이 작품은 1595년 무렵 평양의 생사당에 모셔졌던 것이다. 이 영정은 일반 영정과 구도가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오리가 오른손에 부채를 쥐고 왼손에는 관대를 잡고 있는데 이것은 불교 고승을 그린 화상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이를 근거로 추측해보면 이 초상을 그린 이는 평안도에서 활동했던 화승(畵僧ㆍ불교승려 화가)일 가능성이 크다. 영주 소수서원에 오리 이원익의 초상이 모셔져 있는데, 이와 관련해 번암 채제공의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1794년 정조가 미수 허목(1595~1684)에게 크게 감동을 받아 채제공에게 명해 허목의 초상화를 가져오도록 지시했을 때 연천 은거당에 있던 초상을 서울로 옮겨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 화산 이명기에게 모사해 소수서원에 모시도록 했던 사실을 밝혔다. 허목의 영정을 소수서원에 모시면서 채제공은 이렇게 말한다. “오리는 선생(미수 허목)의 사우(師友)이자 지기(知己)임에랴!” 18세기 영남 사림들의 뜻으로 오리 이원익의 초상이 모셔져 있는 소수서원에 오리의 제자인 미수 허목의 초상을 모시게 된 것이다. ■오리, 3대에 걸쳐 여섯 번 영의정에 오르다이원익은 선조, 광해, 인조 3대에 걸쳐 의정부 영의정을 여섯 번이나 지낸 탁월한 경세가다. 1569년(선조 2년) 문과에 급제해 벼슬을 시작한 이원익은 사람과 사귀고 어울리기를 싫어해 공적인 일이 아니면 나오지 않았기에 그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다만 서애 유성룡과 한강 정구와는 평생 가깝게 지냈다. 삼사의 요직을 거치고, 1573년 성절사의 질정관으로 북경에 갔다가 명나라 관리들 앞에서 유창한 회화로 임무를 잘 처리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황해도 도사로 군적을 잘 처리해 황해도관찰사 율곡 이이의 주목을 받았던 일도 특별한 일이다. 이이의 천거로 정언이 되고, 승지로 근무하던 이원익은 벼슬에 물러나 한동안 야인으로 지내다가 1587년 안주목사로 부임해 행정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굶주리는 주민을 빠르게 구제하고 양잠을 통해 지역경제를 살렸으며, 군 복무 기간을 단축해 생업에 충실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안주는 물론 평안도민의 칭송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선조가 이조판서이던 이원익을 평안도 도순찰사에 임명한 것도 이런 일이 배경이 되었다. 이원익은 선조의 피란길을 열면서 흩어진 군사를 모으고 군대를 훈련해 왜적과 싸웠다. 1593년 1월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한 후에는 평안도 관찰사로서 전후 복구에 전념하는 동시에 지역 유림을 설득해 서원과 향교에 서검재(書劍齋)를 세워 군사 지휘관을 육성했다.1595년에는 우의정에 제수되어 경상 전라 충청 강원 4도 도체찰사로 떠나자 평양감영의 서리들이 생사당을 세우고 이원익의 초상화를 그려 생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올린 것은 이를 뒷받침하는 유명한 일화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확인한 이원익은 사람을 보내 생사당을 허물고 초상화만 수습해 오도록 했다. 도체찰사로 활약하던 이원익의 풍모를 한 세대 뒤에 태어난 남학명(1654~1722)이 이렇게 전해주고 있다. “이원익은 속일 수는 있으나 차마 속일 수 없으며, 유성룡은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 없었다” 이순신이 선조의 미움을 받아 서애 유성룡마저 비판할 때에도 그는 “경상도의 많은 장수 중에서 이순신이 가장 뛰어나다”라며 끝까지 이순신을 옹호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초대 영의정에 오른 이원익은 대동법(大同法)을 경기도에 시행하고 불합리한 세금제도를 고쳤으며 군사제도를 개혁했다.영창대군의 처형과 인목대비의 유폐를 적극 반대하다가 결국 강원도 홍천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자 여주에서 살았다. 1623년 봄, 인조반정으로 들어선 서인정권에서 의정부 영의정으로 등용되었다.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기필코 죽이려고 했으나 이원익은 대비를 설득해 광해군을 살렸다.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77세의 노구를 이끌고 공주로 피란하는 인조를 호위했다. 1631년 1월 인조가 승지를 보내 이원익을 문안하고 사는 형편을 알아오도록 했다. 승지는 “두 칸 초가가 겨우 무릎을 들일 수 있는데 낮고 좁아서 모양을 이루지 못하며 무너지고 허술해 비바람을 가리지 못합니다”라고 아뢰자 인조는 “내가 평생에 존경하고 사모하는 것은 그 공로와 덕행뿐이 아니다.이공의 청렴하고 간결함은 모든 관료가 스승 삼아 본받을 바이다”라며 5칸짜리 집 한 채를 지어 하사했다. 하지만 이원익은 “이것도 백성의 원망을 받는 한 가지”라며 받기를 거듭 사양했다. 이때 인조가 내린 집이 충현박물관 옆에 있는 관감당(觀感堂)이다. 관감당 옆에 그의 초상화를 모신 영우가 있다. 이곳은 영당이 있는 마을이라 해 ‘영당말’이라 불렸다. 충현박물관에는 이원익의 친필을 비롯한 여러 가지 유물을 살펴볼 수 있다. 박물관 근처 동산에 이원익의 신도비와 묘소가 자리 잡고 있다. 근처에 있는 광명시가 세운 오리서원은 공직자들의 청렴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공직자가 새길 네 글자 견리사치 이원익은 격동의 시대, 당쟁의 시대에 관리가 되었으나 오직 국가의 안위와 민생의 안정을 정책의 최우선으로 삼아 청렴한 몸가짐으로 공무에 헌신해 백성은 물론 정적들에게도 존경을 받았다. 3대에 걸쳐 6번 영의정에 올랐던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다. “천하의 일이나 국가의 일은 다만 공(公)이냐 사(私)냐 하는 두 글자에 달렸을 뿐”이라며 공에 충실해야 함을 강조했다. 말년에 이원익이 가까운 지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익을 보면 치욕을 생각했다” 이원익이 평생 스스로를 단속했던 ‘견리사치(見利思恥)’라는 네 글자는 공을 잃어버린 우리 시대의 공직자 가슴에 새길 말이 아닐까.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23. 성혼선생묘

‘창령성공휘혼지묘(昌寧成公諱渾之墓)’ 묘비에 새겨진 글은 간략했다.시호라든가 관직이라든가 하는 화려한 수식이 없다. 그냥 본관과 성명이 전부다. 성혼(成渾)의 본관은 묘비에 적은 대로 창녕(昌寧)이다. 자는 호원(浩原), 호는 묵암(默庵)우계(牛溪)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관직은 의정부 좌찬성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의 묘비는 간략했다. 간략한 묘비는 성혼 스스로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성혼은 죽기 전에 미리 자신이 쓴 묘지(墓誌)를 남겼다.묘지는 무덤에 넣는 글이다. 여기서 자신의 묘비에는 오직 다섯 자만 적으라고 했다. 묘 앞에 ‘창녕성모묘(昌寧成某墓)’라는 다섯 글자만을 비석에 새겨 넣어, 자손들이 무덤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의 성품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바로 겸손함이다. 성혼의 묘 아래쪽에는 아버지 성수침(成守琛)의 묘이다. 어머니 파평 윤씨(坡平 尹氏)의 묘도 나란히 있다. 아버지 성수침은 조선왕조실록에 졸기가 있다. 청송선생(聽松先生)이라 불린다는 내용의 졸기는 그의 아버지를 매우 높게 평가했다. 그의 졸기 말미에 성혼도 소개하고 있다. “아들 성혼은 가훈을 받아 선친의 뜻을 잘 이었고 학문에 힘써 게을리하지 않았다. 효행도 있어 바야흐로 행의(行義)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성혼은 1535년(중종 30)에 태어나,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대에 활동하다, 1598년(선조 31)에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는 원래 서울 순화방(順和坊: 지금의 서울 종로구 순화동)에서 태어났다. 파주에는 아버지 성수침을 따라와 거주하게 되었다. 성혼은 여기서 성장하고, 우계라는 호도 얻었다. 강릉에서 태어난 율곡 이이(1536~1584)도 한 고을에서 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 살 차이로 한 동네 친구였던 것이다. 성혼과 이이는 모두 백인걸의 문하생이었다. 백인걸과 아버지 성수침은 모두 조광조의 문인이었다. 성혼과 이이 두 사람은 모두 퇴계 이황을 존경했다. 이이는 이황을 찾아가 한번 만난 후 스승으로 여겼다. 성혼 또한 이황을 존경했다. 그의 문집 우계집의 첫 내용이 바로 퇴계 이황에 관한 것이었다. 기사년(1569)에 이황이 벼슬을 버리고 도산(陶山)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애석해 하는 시였다. 어려서 출중했던 두 사람은 이기론, 인심도심론, 사단칠정론 등 성리학의 주요 문제에 대해 학술토론을 했다. 두 사람의 토론은 이황과 기대승의 토론을 잇는 것이었다. 경상도에 사는 이황은 전라도에 사는 기대승과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성리학 이론을 발전시켰다.이황은 나이가 훨씬 적은 기대승과 진지한 학술토론을 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더욱 다듬었던 것이다.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대해, 이이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했다. 성혼이 묻고 이이가 답하면서, 이이는 자신의 이론을 더욱 다듬었다. 성혼은 이황의 편에서 이황과 이이의 이론을 절충했다. 두 사람의 토론은 이황과 기대승의 토론을 이어 조선 성리학 발전에 기여했다. 성혼은 벼슬에 나가는 것을 썩 즐기진 않았다. 관직에 나아갔다가도 오래 머물지 않고 곧 돌아오곤 했다. 오히려 후진을 양성하는 데 많은 힘을 쏟았다.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을 했던 조헌과 김덕령, 인조반정의 주역인 이귀와 김자점 등도 성혼의 제자였다. 제자이자 사위였던 윤황의 아들·손자가 바로 윤선거·윤증 부자이다. 그밖에 황신, 신흠, 정엽, 안방준, 강항, 최기남 등의 제자가 있다. 제자 가운데는 이이의 제자와 중복되기도 했다. 우계학파를 넓게 잡으면, 장유, 최명길, 박세당, 조익 등도 포함된다. 조선 유학 사상사에서 퇴계학, 율곡학이 뚜렷하고, 또 한쪽에 남명학이 있는 데 비해, 우계학은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약해 보인다. 그러나 성혼의 제자들을 살펴보면,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성혼과 이이는 모두 서인의 학문적 지도자로 추앙을 받게 되는데, 나중에 서인에서 갈라진 소론의 인물들을 보면, 모두 성혼과 연결된다. 그리고 박세당과 같이 사문난적으로 몰린 사람이나 양명학자들은 모두 성혼과 연결된다. 이러한 결과는 성혼의 학문이 절충적이고 개방적인 데서 연유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계학을 다시 볼 대목이다. 실록에는 평생의 벗이자 학문 파트너였던 이이가 성혼을 평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만약 견해(見解)의 우월을 논하자면 내가 약간 나을 것이나, 행실의 돈독함과 확고함은 내가 따르지 못한다.” 논리는 접어두고, 선비로서의 면모를 인정해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성혼의 글을 보면 매우 겸손한 성품을 엿볼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색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선조실록에 보면, 죽었다는 사실만 기재한 후 부정적 평가를 약간 덧붙였다. 첫째, 일찍이 은사(隱士)라는 명성이 있었으나 만년에는 공명(功名)에 빠졌다는 지적이다. 지적이 다분히 악의적이다. 둘째, 기축옥사의 일을 거론하고 있다. 여러 사람을 구하지 않았으며, 특히 최영경(崔永慶)의 죽음도 그대로 보기만 하고 구해주지 않았다며 정철과 함께 나쁜 짓을 하여 모두 미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축년(1589) 정여립의 옥사 때 정철이 주동이 되어 많은 동인들이 피해를 입었다. 이때 정인홍은 동문수학한 최영경을 구원하려고 노력했는데, 이에 미온적인 성혼에 대해 감정이 나빠졌다. 실제로는 성혼이 최영경을 구원하려 노력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효과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성혼에게 공격의 화살이 쏟아졌다. 이후 정인홍을 비롯한 북인은 동인의 한 갈래였는데, 성혼을 적대시했다. 그리고 이는 이귀와 같은 성혼의 제자가 정인홍을 적대시하게 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선조실록에서 성혼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았던 것은 실록을 북인이 중심이 되어 편찬했기 때문이다.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들은 이러한 실록에 불만이 많았다. 그리하여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성혼의 졸기를 긍정적인 내용으로 바꾸어 기술해 놓았다. 고매한 성품을 지녔다는 점, 이황을 존경하고 사숙했다는 점, 이이와의 학술토론을 통해 성리학에 관해 밝힌 바가 많았다는 점 등을 소개했다. 그런데 여기에 선조 임금의 후대가 두터웠으나 임진왜란 때 이홍로의 모함으로 시들해졌다는 점도 소개하고 있다. 그의 일생에서 두 가지가 문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기축옥사 때의 처신과 임진왜란 때의 처신이다. 성혼선생 묘 옆에는 우계사당이 있다. 좀 내려가면 우계기념관이 있다. 큰길로 나아가면 우계로이다. 우계로는 옛 의주로(한양-신의주)에 해당한다. 필자가 이곳을 찾아오면서 일부러 옛 의주로의 자취를 밟아 왔다. 찌는 여름 무더위에 자동차를 몰고서였다. 폐쇄된 벽제역부터 옛 의주로의 노선을 따라 혜음로로 접어들었다. 혜음로는 78번도로였는데, 중간에 56번 도로로 바뀌었다. 좀더 넓고 새로 포장된 도로로 나왔다가 계속 가니 어느새 다시 78번 도로이며 도로명은 우계로였다. 혜음로 길가에 쌍미륵불 용암사가 있었다. 잠시 주차하고 절에 들어가보았다. 그 안에는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 있었다. 불상을 거대한 바위에 자연스럽게 조각해 놓았다. 특이한 게 불상이 둘이었다. 두 불상이 나란히 있는 게 정겹다는 느낌도 들었다. 78번 도로를 따라 좀더 놀라가니 윤관 장군의 묘역이 나왔다. 용미리 마애이불입상도 고려시대 불상이요, 윤관도 고려시대의 인물이다. 서울에서 의주로를 따라 가면 먼저 고려의 도읍인 개성을 지나게 된다. 두 왕조의 도읍 사이에 있는 도로인데도 실감할 수 없는 것은 바로 남북 분단의 접경지역에 가까워서일 것이다. 성혼묘역에서 우계로로 나와 북쪽으로 더 나아가니 임진각이 나왔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도망갈 때 이 길을 갔을 것이다. 선조가 파주를 지나 임진강에 이르렀을 때 성혼의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옆에 있던 이홍로가 가까운 마을을 가리켰다. 선조가 나와보지도 않는 성혼에 대해 괘씸하게 생각해서, 이후로 그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다고 한다. 나중에 후대 문인들이 그를 문묘에 배향하려 했을 때 극렬한 반대에 부딪혔는데, 이때 반대 명분이 바로 이 사건이었다. 당시 성혼의 마을은 좀더 떨어진 곳이었고, 성혼은 집에 없었다고 한다. 사실관계에 따라 매우 억울한 누명일 수 있는 것이다. 임진각에서 북쪽을 바라보다 자유로를 통해 한강을 바라보며 귀가했다. 분단의 상황이 개성과 서울 사이의 오랜 역사를 압도하는 느낌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분단의 상황은 잠깐이요, 개성과 서울 사이의 역사는 언제 그랬느냐 하는 거처럼 복원되리라 기대해 본다. 그렇게 되면 성호선생 묘역의 주변 분위기도 달라질 것이다. 성혼에 대한 평가는 당쟁에 휘둘린 경향이 있다. 그는 학문적으로 성실하고 독선적이지 않았다. 관리로 나아가서도 권력욕에 빠지지 않고, 늘 처사로서의 겸덕을 갖추었다. 성혼은 조선 중기 선비의 전형이다. 김태희 다산연구소 소장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22. 미륵의 고장 안성

안성은 전국적으로 미륵이 많기로 유명하여 미륵의 고장이라고도 불린다.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16구 이다. 삼죽면 기솔리 석불입상, 죽산면의 매산리 석불입상처럼 거대불인 경우도 있고, 대덕면 대농리 석불입상, 용화사 석조여래입상처럼 작은 불상도 있다.안성 시내의 아양동 석불입상처럼 시내에 있어 마을 주민들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도 있으며, 서운면 동촌리에는 포도 과수원 비닐하우스 안에 위치하여 잘알려지지 않은 곳도 있다. 안성 미륵은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사람이 조각한 것이 아닌 평범한 형태의 불상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투박한 솜씨에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단순화시켜 얼굴모습도 아주 친근해 보인다. 미륵은 안성에서도 죽산지역에 많이 몰려 있는데 죽산은 봉업사지를 비롯하여, 장명사지, 장광사지, 미륵당, 칠장사 등 많은 고찰이 위치하여 제2의 경주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많은 사찰이 있었다. 많은 불교문화재가 있는 만큼 또 미륵도 많이 산재해 있다. 경기도에서 가장 큰 미륵은 죽산 미륵당의 매산리 석불입상(경기도유형문화재 제37호)과 일명 쌍미륵이라고도 불리는 기솔리 석불입상이다. 매산리 석불입상은 고려시대 불상으로, 태평원이 있던 곳에 있어 태평미륵이라고도 한다. 태평미륵이 세워진 죽산면은 몽고군과의 전쟁에서 송문주장군이 승리를 하였던 곳이다. 지역에서는 송문주장군의 우국충정을 추모하고 명복을 빌며, 태평성대를 기원하기 위해 태평미륵을 건립하였다는 말이 전해진다. 송문주 장군은 1235년 몽고의 고려 3차 침입 때 죽주방호별감으로 있으며 몽고군을 물리쳤다. 송장군은 죽주의 주민들과 죽주산성에서 15일간 전투를 하여 승리를 이끌었는데, 이에 대하여 고려사절요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몽고군사가 죽주에 이르러 항복하라고 타이르므로 성안의 군사가 출격하여 ?아 보냈더니, 다시 와서 포를 가지고 성의 사면을 공격하여 성문이 포에 맞아 무너졌다. 성안에서도 포로써 그들을 역공격하니 몽고군사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또 인유(人油), 소나무 홰, 쑥풀 등으로 불을 놓아 공격하므로 성안의 군사가 일시에 문을 열고 출전하니, 몽고군사 가운데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몽고군사가 온갖 방법으로 공격하였지만 무릇 15일 동안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고, 공격에 사용하던 병기들을 불살라 버린 뒤 물러갔다.” 이렇듯 용맹하고 신출귀몰한 전술로 몽고군을 격퇴하자 성안의 백성들은 송문주 장군을 ‘신명(神明)’이라고 우러러보았다. 몽고군을 물리친 공으로 나라에서는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에 임명하였고, 후에 장군이 세상을 뜨자 죽주민들은 성안에 사당을 세워 지금까지 제를 올리며 그 뜻을 기리고 있다. 이렇게 작게는 죽산 주민을 위하여 크게는 우리나라를 위하여 큰 공을 세운 장군을 위하여 미륵을 세우고 추모하고 있다. 죽산지역의 영웅을 위하여 사당을 세워 제를 올리며 추모하는 것도 모자라 미륵을 세우고 추모할 정도로 주민들과 가까운 것이었다. 삼죽면 국사암에는 기솔리 국사암 삼존불이 있는데 이를 궁예미륵이라고 한다. 그리고 바로 아래에 있는 쌍미륵도 궁예미륵이라고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궁예는 통일신라 말기 신라 47대 헌안왕(또는 헌강왕)의 서자로, 외가에서 5월 5일에 태어났다. 이때 지붕에 긴 무지개와 같은 흰빛이 나와 위로 하늘에 닿았는데, 천문관이 ‘오’자가 거듭된 중오(重五)일에 태어나 나라에 불길하다고 해석하였으므로 왕이 죽이라고 하였다. 아기를 포대기 속에서 꺼내어 누각 밑으로 던질 때 유모가 몰래 받다가 손으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어지게 되었다. 이후 다른 곳으로 도망가서 살던 유모에게 자신이 왕족이란 사실을 듣고 세달사로 들어가 무술을 연마하고 불교 교리를 익힌다. 성년이 된 891년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 궁예는 제일 먼저 죽주의 초적 기훤에게 찾아갔다. 이 말은 당시 죽산이 안성 근처의 중부지역에서는 가장 큰 세력이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기훤이 궁예에게 좋은 대접을 해 주지 않자 이듬해 기훤의 부하인 원회?신훤 등과 결탁하여 원주의 양길에게 갔다. 그 이후 전투에서 승승장구하여 결국 태봉국을 건국하고 왕이 되었다. 이때부터 궁예는 스스로 미륵의 화신이라고 주장하며 미륵신앙을 정치이념으로 삼아 태평성대의 이상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궁예가 죽산에 머문 기간은 비록 1년 남짓이었지만 미륵부처의 출현을 바랐던 안성 사람들에게 남긴 인상은 매우 컸을 것이다. 이에 마을에서는 불상을 세우고 궁예미륵으로 모시고 있다. 신라말기부터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지고, 지방 호족들의 쟁투가 일어나면서 일반 민중들은 사회적 혼란을 겪게 된다. 이러한 때 민중들은 어려운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부처의 출현을 기대하였다. 중요한 교통로에 위치한 안성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더 큰 혼란을 경험하였고 이에 따라 미륵부처에 대한 갈망은 더욱 강해졌기에 곳곳에 미륵을 세우고 새로운 시대가 오기를 염원했던 것이다. 서운면 동촌리 미륵은 포도밭 비닐하우스 안에 위치하여 접근이 쉽지가 않다. 키는 약 2m가량의 훤칠한 높이인데 밭 가운데에 2구의 미륵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작년 봄 몹시 가뭄이 심할 때의 답사갔을 때 마을 주민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 미륵은 키가 꽤 커서 쉽게 올라갈 수가 없다. 마을아이들이 이 미륵에 올라가서 놀면 비가 온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 같은 가뭄에 왜 아이들이 미륵에 올라가서 놀면 비가 올텐데 올라가지 않냐고 묻자 요즘 시골에는 그곳에 올라가서 놀만한 아이들이 없다고 답하였다. 시골마을의 인구감소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어쨌든 마을의 미륵은 엄숙한 신앙의 대상으로서 뿐 만 아니라 어린아이들의 놀이터로 친숙하게 우리들에게 다가와 있다. 홍원의 안성시 학예연구사 ■미륵이란? 석가모니의 뒤를 이어 56억 7천만년 후에 세상에 출현하여 석가모니불이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이다. 도솔천의 내원궁에 보살로 있다가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고 중생들을 구제 할 것이라고 석가모니불이 예언하였다. 미륵불상이 봉안된 불전을 용화전이라고 부른다.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21. 우리 역사 최고의 불교사원 고달사지(高達寺址)

우리 역사상 최고의 문화유산이 경기도에 가득하다. 가장 오래된 것과 가장 뛰어난 유산 모두를 최고라는 말로 표현한다면 단연코 최고의 문화유산으로 선정할 곳은 여주 고달사지이다. 이곳이 불교 문화유산이기에 불교 문화유산으로서 최고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올바르지 않다. 왜냐하면 그곳에 존재하는 모든 문화유산이 우리 역사에서 가장 높은 경지의 정신과 기술 그리고 품격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적 제382호인 여주 고달사지에는 크게 4개의 문화유산이 존재한다. 국보 4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달사지승탑, 보물 6호로 지정되어 있는 원종대사헤진탑비, 보물 7호로 지정된 원종대사혜진탑, 보물 8호로 지정된 고달사 석불대좌이다. 한번 이야기해보자. 우리 산하에 참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존재하고 그 문화유산이 존재하는 역사적 터전을 사적이라는 이름으로 지정하고 있는데, 그중 국14호와 보물6, 7, 8호가 동시에 존재하는 곳이 얼마나 있겠는가! 문화유산의 가치를 단순히 국보와 보물의 순위로 이야기하는 것은 올바른 것은 아니지만 최소 10호 안에 들어가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멀리 여주의 남한강가 혜목산 자락에 있는 고달사지는 예사로운 곳이 아닌 수준이 아니라 우리 역사상 최고의 문화유산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기천년을 맞이하면서 당연히 새롭게 조망해야 한다. 필자가 처음 고달사지를 찾아간 것은 1986년 10월초였다. 가을이 다가오고 있는 그때 학과 가을 정기답사로 고달사지를 가게 되었다. 혜목산에서 내려오는 시내물을 빨래터로 두고 있는 작은 마을과 함께 누렇게 익은 벼가 가득한 논 가운데 있던 석불대좌와 원종대사혜집탑비의 귀부와 이수는 충격 그 자체였다. 역사에 대한 관심은 있으나 제대로 알지 못하는 대학 1학년의 어린 눈에도 이 석물들은 보통 석물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역사에서 이만한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도 어린이들과 성인들 모두 고달사지의 문화유산을 처음 본다하더라도 감동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곳에 고달사 혹은 고달선원(高達禪院)이라 이름붙인 절집이 자리하게 된 것일까? 지금 현대인들의 시각으로 보자면 이곳은 교통의 요지라고 할 수 없다. 머지않아 드론을 이용해서 사람들이 아이언맨처럼 날아다닐 수 있는 세상이니 혜목산 자락은 오히려 불편한 곳이다. 그러나 고려시대 이곳은 남한강가에 위치하여 뱃길을 이용하여 남경인 한양과 수도인 개성으로 가기 원활한 지리적 위치에 있다. 그래서 고달사는 신라 하대로부터 고려시대 전 기간에 이르기까지 번성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고달사는 고려시대에 지금의 도봉산 영국사인 도봉원과 문경의 봉암사인 희양원과 함께 3대 사찰로 이름을 떨쳤던 대찰이었다. 사(寺)라는 이름대신 원(院)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단순히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는 공간만이 아닌 길을 떠난 모든 중생들의 휴식처로서의 기능까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한강을 통해 장사를 하여 이문을 남기고자 하는 상인, 새로운 문물을 보고자 청운의 희망을 가지고 길을 떠나는 청년, 가족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불공드리러 찾아오는 백성 등 다양한 이들이 이곳 고달사 아니 고달원에서 잠을 청했던 것이다. 단순히 승려들의 수행만을 위한 것이 사찰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부처를 받드는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래서 고달원은 그 뜻을 실천하기 위해 길을 나선 모든 중생들의 삶의 안식을 위해 절집을 개방하고 그들을 맞이한 것이다. 이러한 의도로 운영된 절집이었으니 몇 백년간 고달사는 사람으로 가득하였을 것이다. 고달사지에 들어서면 사람들은 두 가지에 놀라게 된다. 첫째 절터가 매우 넓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곳에 남아있는 문화유산의 엄청난 가치 때문이다. 이 궁벽진 산골에 그것도 폐허가 되어버린 이곳에 앞서 이야기했던 국보 4호와 보물 6, 7, 8호의 문화유산이 있다는 사실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래서 경기도에서는 이곳의 중요성을 인식해 1990년 후반에 마을을 이주시키고 발굴조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10여년 이상의 발굴을 통해 고달사의 원래 규모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그로인하여 고려시대 전국 최대의 사찰이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새로 발굴된 고달사지를 입구부터 절터의 중심부로 오르다 보면 처음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보물 8호로 지정된 석불대좌이다. 아마도 고달사의 주존불이 놓여져 있던 자리일 것이다. 부처님을 모시는 대좌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것으로서, 거대한 ‘통돌’을 찰떡 주무르듯 깍아 윗부분과 아랫 부분을 화려하게 피어난 연꽃으로 다듬은 조각과 웅장한 모습은 고려인들의 웅혼했던 호기를 마음껏 보여주고 있다. 부처가 곧 다시 부활하여 이 자리에 앉아 삼라만상의 온갖 진리를 토해놓을 것만 같다. 약간 위로 올라가면 보물 6호로 지정된 고려 광종대 원종국사 혜진탑비가 있다. 비신은 1916년 일본인들에 의해 도괴되어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국립중앙박물관의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가 2016년 여주시립박물관을 개관하면서 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그래서 몇 년전까지 고달사지에는 귀부(거북이 받침 돌)와 이수이무기 형상의 머리돌)만 존재하다가 문화재청에서 비신을 똑같이 복제하여 귀부, 이수와 연결하여 원형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참으로 잘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혜진탑비의 거북이 받침돌은 상상할 수 없이 힘찬 모습이다. 거북의 몸에 용의 얼굴, 당장이라도 세상을 집어 삼킬 듯한 모습은 고려왕실의 자주적 힘을 보는 듯하다. 이 탑비가 완성된 것은 광종 26년 서기 975년으로 당시 국왕이었던 광종은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왕이었다. 중국에 사대하지 않고 자주국가를 건설하여 고려의 위용을 높이고자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탑비는 왕실에서 특별한 승려를 위해 제작하는 것, 결국 광종대의 고려의 자주국가의 꿈과 이상 그리고 힘이 이 거북의 모습에 그대로 나타난 것이라 하겠다. 이곳을 지나 동쪽 야트막한 고갯길을 오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웅장하고 기품있는 승탑(부도)이 모습을 드러낸다. 국보4호로 지정된 고달사지 승탑이다. 승탑의 주인공을 알 수 없기에 다만 고달사지에 있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이 붙게 되었다. 이른바 팔각원당형의 원형으로 걸작 중에 걸작이다. 신라말에 인간도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종(禪宗)이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불덕(佛德)이 높은 고승들의 다비식 이후 사리를 봉안하는 탑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는 불교계에서 새로운 혁명이었다. 인간의 지위가 곧 부처의 지위까지 확대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새로운 세계관에 의해 만들어진 거의 처음의 승탑이 바로 이곳 혜목산에 자리잡은 승탑인 것이다. 그러니 어찌 경외롭지 않겠는가? 높이가 3.4m에 달하는 거대한 승탑은 단지 크다는 것에서 놀랄 뿐만 아니라 그 절묘한 솜씨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된다. 형태는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으로 여러 개의 돌로 짠 지대석에서부터 탑신과 옥개석까지 모두 8각형이다. 특히 가운데 돌의 거북머리와 네 마리 용의 웅장함과 그 과감한 표현 방식이다. 거북을 중심으로 용과 구름무늬를 둘렀는데 거북머리의 험상궂게 생긴 모양새와 모발이 사실적이다. 용머리도 험상궂은데 크게 벌린 입에 비해 눈은 작아 보인다. 여의주와 구름무늬의 현람함 또한 아름답다. 고달사지 부도가 있는 자리에서 평지로 내려오면 당시 고달사를 고려시대 삼대 사찰로 만든 장본인인 원종국사의 승탑이 있다. 이 승탑 역시 보물 7호로 지정되어 있다. 앞서의 국보4호인 고달사지 승탑과 매우 비슷하지만 팔각원당형에서 변형이 이루어진 상태이다. 승탑의 기단부에 조각된 용이 공손하게 위의 고달사지 부도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제자의 겸손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승탑의 주인공인 원종국사는 죽기 전 열반송으로 “만법(萬法)이 모두 공(空)이니 내 장차 떠남에 한마음으로 근본을 삼으니 너희들은 힘쓸지어다. 마음이 생기면 법(法)도 생기고 마음이 없어지면 법도 없어지나니 어진 마음이 곧 부처라”를 남겨 놓았다. 지금도 이 열반송은 한국 불교사에 명 열반송으로 꼽히고 있다. 고달사는 웅장하지만 너무도 아름다운 곳으로, 경기의 불교문화의 정수가 오롯이 담겨있는 곳이다. 경기 천년의 역사속에서 경기 불교의 진정성을 맛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의 가치가 더욱 깊이 연구되어 진정한 고달사, 아니 고달선원의 모습을 더욱 밝혀지기를 기원한다. 그래야 과거 경기천년 역사가 빛난고 미래의 경기천년에 발전이 있는 것이다.김준혁(한신대학교 교수, 한국사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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