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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경기도 박물관ㆍ미술관 다시보기] 40.파주 두루뫼박물관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란 말이 의미하듯 농업은 한국문화의 줄기이자 뿌리다. 일제강점기와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으로 농민들이 어울렸던 마을의 축제는 낭비와 미신으로 몰려 타파되었고 민속의 뿌리인 민간신앙을 미신으로 몰았다. 7천년의 농경문화가 근대화란 이름으로 사라지고 있다. 세상은 풍요롭고 편리해졌으나 인간은 더욱 고립되고 생태계는 파괴되었다. 옛 사람들의 생활방식에 오래된 미래가 숨어있다. 선조들이 사용하던 옛 물건에 생태적 지혜가 담겨있다. ■ 두루뫼를 향해 부르는 고향의 노래 유년의 추억이 담긴 고향의 풍경은 흑백 사진 속에나 남아 있을 뿐, 고향의 따스한 정서를 추억할 수 있는 공간이 우리 곁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파주시 법원읍 초리골에 자리 잡은 두루뫼박물관은 고향의 정서가 물씬 풍기는 공간이다. 1998년에 설립된 두루뫼박물관(관장 김애영)은 세월을 단숨에 거슬러 올라가 1970년대 농촌의 아늑한 풍경과 아련한 추억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박물관을 설립한 소설가 강위수(1941~ ) 선생의 고향은 파주 초리골에서 50여리 떨어진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 동장리 주산동(周山洞)이다. 두루뫼라 불리던 그의 고향마을은 한국전쟁으로 비무장지대가 되어 지금은 갈 수 없는 금단의 땅이다. 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귀환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단한 강위수 소설가가 도굴꾼 이야기를 쓰다가 토기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 영화촬영을 위해 농촌을 찾았다가 생활도구가 버려지고 집과 담장과 굴뚝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그는 새참을 나르던 소쿠리, 벼이삭을 훑어내는 홀태, 떡에 예쁜 무늬를 새기는 떡살, 거름으로 쓸 똥오줌을 담는 장군 같은 민속품을 수집했다. 무너진 초가집에서 구해온 문짝까지 대책 없이 물건들을 집으로 가져다 날랐다. 아내는 그런 남편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으나 사소하기 때문에 더욱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남편의 수집 동조하고 박물관을 세우고 관장까지 맡는다. 그렇게 모은 것이 6천점이나 되었다. 민속박물관을 세우기로 뜻을 모았다. 두루뫼라는 이름에 설립자의 고향 사랑이 묻어난다. 크고 작은 작은 독과 오지와 항아리가 옹기종기 앉아 있는 장독대는 박물관을 둘러싼 초지골 산자락과 잘 어울린다. ■ 1천500년의 시간을 아우르는 공간 너무나 다양하고 너무나 흔해서 역사유물로서의 가치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민속생활용품은 순식간에 사라져갔다. 눈 밝은 부부 덕분에 살아남은 귀중한 유물들이 박물관을 채우고 있다. 삼국시대의 도자기부터 타자기, 레코드판 같은 근현대 유물까지 1천500년의 세월을 아우르고 있는 상설전시실을 김애영 관장의 안내로 둘러본다. 박물관은 다섯 개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제1전시실은 토기와 도자기이다. 박물관 설립으로 이끌었던 토기답게 온갖 종류의 토기와 도자기를 볼 수 있다. 백제, 신라, 가야의 회색토기를 비롯해 고려청자와 조선의 분청사기와 백자까지 멋진 도자기를 살펴보며 질문을 던진다. 가장 좋아하는 유물이 어떤 것이에요? 뜻밖의 대답이 돌아온다. 이 굴뚝이에요. 김 관장은 뚜껑이 씌워진 한길 남짓한 굴뚝을 가리키며 웃는다. 굴뚝도 흙을 구워 만들었으니 토기의 일종이고, 아궁이의 불이 잘 타들어가게 하고 구들을 골고루 덥혀준 연기를 빨아냈으니 사랑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똥오줌을 논밭으로 옮기는 용기로 사용했기에 똥장군으로도 불렸던 장군을 입구에 나란히 진열한 것도 진풍경이다. 70년대만 해도 시골집에 한두 개는 있었지만 지금은 구경하기 어려운 특별한 물건이다. 작은 것에는 물이나 술 따위를 넣으나 큰 것에는 오줌을 담아 지게로 운반했다. 나무장군은 오지장군처럼 깨지지 않는 장점이 있어 공사장에서 물을 져 나르는 데에도 썼다. 수원화성을 쌓은 내력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에 장군 그림이 실려 있다. 실학자 유중림은 증보산림경제에 장군을 장분(長盆)으로 적었다. 열 개가 넘는 장군을 보면서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고 노래한 시인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가 떠오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2전시실은 사방이 온통 탈이다. 꼭두각시놀이에 사용하는 꼭두각시, 박첨지, 홍동지 탈을 비롯해 전 세계의 탈이 노려보고 있다. 온갖 표정의 탈을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하지만 오래 머물 수 없다. 안내하는 발길이 벌써 멀어진 탓이다. 뒤따라 도착한 제3전시실은 아기자기하다. 거울과 화장대 같은 규방용구, 저울과 됫박 같은 계량용구, 대패와 먹통 같은 목공용구, 가마니틀 같은 직조용구, 호롱과 등잔 같은 조명용구, 짚신을 비롯한 각종 신발 등의 의식주 관련 유물들이 전시관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짚신을 삼을 때 크기를 조절했던 신골은 정말 보기 드문 유물이다. 삼베를 짜던 베틀과 목화에서 무명실을 뽑던 물레도 여러 종류가 전시되어 있다. 제4전시실에는 설립자와 직접 관련된 1970년대 전후의 영화대본과 영사기가 전시되어 있다. 영화감독으로도 활동했던 설립자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이다. 한글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공병호타자기도 있다. 안과의사 공병호 박사가 1949년에 최초로 발명한 것으로 한글을 빠르게 입력할 수 있는 세벌식 타자기다. LP판이 빽빽하게 꽂혀있는 자리에서 김 관장이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LP판으로 지금도 음악을 감상할 수 있어요. 국문학을 전공한 김 관장은 서울 한복판에서 25년 동안 이화음악사를 운영했던 음악애호가이며 개인전을 열 정도로 여행사진작가로도 활동했던 경력을 가지고 있다. 아이스크림 장수가 들고 다니던 낡은 사각의 나무 상자에 담긴 사연도 재미있다. 흥미롭고 특별한 유물들을 자세히 살피려면 한나절로도 부족할 정도로 유물이 많다. 5전시실에서는 농기구와 축산용구들이다. 낫, 호미, 지게, 홀태 등 농사에 쓰였던 다양한 기구들로 채워진 공간에 들어서면 1970년대의 농촌으로 이끈다. 멍에를 멘 누렁소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서 있다. 박제된 소를 통유리 속에 전시하지 못해서 보존에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 다시 소를 박제하려면 얼마나 많은 수고와 비용을 들여야 할까. 비용문제로 귀중한 전시물이 부식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 방앗간부터 대장간까지 박물관 야외도 전시실이다. 방앗간, 헛간, 대장간, 너와집, 상여집이 있다. 무려 일곱 개의 장독대가 있고, 솟대와 장승 옆에는 두레박 대신 지하수를 끌어올리던 펌프가 설치되어 있다. 민간신앙을 알려주는 너와집과 망자를 무덤으로 태우고 가던 상여를 보관한 상여집도 무척 인상적이다. 박물관 곳곳에서 한국의 민속과 전통문화의 모든 것을 관람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설립자의 마음이 오롯이 느껴진다. 그러나 전시 공간을 넓히면 더욱 빛날 유물들이 너무나 많다. 무엇보다 보관시설이 낡아 어렵사리 수집한 귀중한 유물들이 손상되고 있다는 관계자의 말에 안타까움이 진하게 묻어났다. 그럼에도 두루뫼박물관이 그동안 걸어온 행적을 살펴보면 놀랍다. 국내 사립박물관 1세대로 출발한 두루뫼박물관은 경기도박물관협회 경기도박물관인상 대상(2013)은 물론 박물관인의 최고 명예인 한국박물관협회 자랑스런 박물관인상(2014)과 문화체육부장관 표창(2018)까지 수상했다. 2014년에는 경기도박물관협회가 주관한 제10회 경기도박물관인상 큐레이터상을 수상할 정도로 기획력도 탄탄하다. 우리 곁에서 사라져간 타자기, 녹음기, 전축 같은 물건들을 전시한 안녕, 아날로그 시대여(2010)를 비롯해 글자가 적힌 책옷비석을 모은 글자들의 세상(2011), 담거나 나르는데 사용했던 용구들의 변천사를 소개하는 담거나 나르거나(2013), 나무로 만든 각종 생활용품을 통해 나무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자 기획한 나무는 우리에게(2014) 같은 흥미로운 기획전을 꾸준하게 열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2020년 특별기획전의 주제는 유물 속에 사는 동물이다. ■ 정부지자체, 사립박물관 지원 나서야 코로나19로 사립박물관의 시름이 더욱 깊다. 사재를 털어 유물을 모아 전시하고 교육하는 사립박물관은 국가나 지자체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하고 있다. 한국인의 정신적 뿌리를 가르치는 일을 개인에게만 맡겨두는 것은 직무 유기나 다름없다. 정부와 지자체가 사립박물관 지원에 나서야할 때다. 두루뫼박물관은 추억 속에만 남아 있는 고향으로 안내하는 완행열차 같은 곳이다. 설립자 강위수 선생이 병상에 계신다는 소식은 뜻밖이다. 달 가고 해 가면 별은 멀어도, 산골짝 깊은 골 초가마을에 봄이 오면 가지마다 꽃 잔치 흥겨우리. 아 이제는 손 모아 눈을 감으라. 고향집 싸리울엔 함박눈이 쌓이네. 선생의 건강을 빌며 그가 평소 즐겨 부르셨다는 고향의 노래를 불러본다.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2020 경기도 박물관ㆍ미술관 다시보기] 39.양주 ‘조명박물관’

겨울은 춥고 쓸쓸한 계절이다. 밝고 따뜻한 빛이 몹시 그리운 것은 코로나19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조명박물관을 떠올리면 마음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2004년 양주시 광적면에 설립한 조명박물관은 이듬해에 등록박물관이 됐다.조명박물관을 세우고 지원하는 필룩스(주)는 2010년 중소기업문화경영 대상을 수상한 국내 토종 조명기업이다. 필룩스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문화메세나를 함께 하는 문화경영의 길을 뚜벅뚜벅 걷고 있다. ■ 빛, 색, 조명으로 이웃과 어울리다 조명박물관(관장 구안나)은 필룩스(주) 구내에 있지만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조명박물관이 벌이고 있는 사업은 전시, 교육에 그치지 않는다. 2006년부터 매년 어린이날에 여는 빛나는 어린이축제는 우리나라 3대 어린이축제로 꼽힌다. 5월5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무료로 진행되는 이날의 행사에 무려 2만~3만명이 찾아 즐기는 종합가족축제이다. 지역에 있는 예원예술대학교, 육군 26사단, 73여단, 5기갑여단, 양주경찰서, 양주소방서, 양주시자원봉사센터, 양주광적도서관 등 민관군이 함께 만드는 축제이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크다. 2006년부터 시작한 크리스마스 특별전은 박물관의 대표적인 전시이다. 2019년은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을 전시화한 눈의 여왕을 열었다. 그러나 올해는 단 한 사람의 관객도 만날 수 없다. 구 관장은 말한다. 올해는 새로운 특별전을 준비하지 않았다. 그래도 관람객들과 크리스마스의 즐거운 분위기를 함께 하고자눈의 여왕을 재구성해 개관을 준비했으나 코로나19의 확산으로 그마저 할 수 없게 됐다. 2018년에 진행한 국립민속박물관과의 공동기획전 은 조명기구가 우리 일상에 미친 영향을 주제로 우리 곁에 있는 조명과 우리 일상을 성찰해보는 기회가 됐다.2019년에는 20세기 디자인의 혁명을 주도한 바우하우스 100주년을 기념한 특별전 을진행했다. 1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사랑받는 바우하우스 철학과 가치를 고찰해 관람객들의 깊은 관심을 받았던 전시였다. ■ 빛의 과거, 현재와 미래-조명역사관 조명박물관을 설립할 때부터 함께 했다는 안상경 실장의 안내로 조명역사관을 둘러본다. 역사관은 조명기구를 시간순으로 전시하고 있다. 1만 년 전까지 살았던 크로마뇽인들은 횃불을 켜고 동굴에 벽화를 그렸다. 이처럼 예술은 빛과 함께 시작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조명의 역사를 알려주는 유물은 낙랑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제 고배형등잔과 토기등잔을 시작으로 가야, 삼국시대의 청동등잔과 이형토기등잔으로 이어진다. 온갖 종류의 등잔, 등잔을 올려놓는 등가, 등경 등 우리 선조들이 썼던 희귀한 등화구 유물들이 가득하다. 그중에서 조족등(照足燈)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발을 비추는 등이란 뜻을 가졌는데 안 실장의 설명을 들으니 더욱 관심이 쏠린다. 1876년 훈련대장 신헌(1810~1884)이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족등은 적진을 습격할 때, 강을 몰래 건널 때, 날씨가 어둡고 깜깜할 때에 사용하는 것이다. 들어서 적을 비추면 적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나는 능히 적을 알아볼 수가 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조족등은 손전등의 원조인 셈이다. 램프와 가스등, 배터와 전기가 운송 수단과 결합하면서 리, 기차등, 선박등 같은 교통조명으로 발전하면서 근대로 이끌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조명을 생각하면 발명왕 에디슨(1847~1931)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에디슨은 여러 번의 실패 끝에 1879년에 탄소 필라멘트를 이용해 40시간 동안 꺼지지 않는 백열전구를 만든다. 백열전구는 석유등이나 가스등보다 편리하고 안전하며 비용도 적게 들었다. 1910년 쿨리지가 텅스텐 필라멘트를 사용해 수명이 더 길고 밝은 백열전구를 대량생산하면서 백열등은 세계인의 밤을 밝히는 조명이 됐다. 우리나라의 조명 역사도 놀랍다. 1883년 미국을 방문한 보빙사 일행은 밤거리를 환하게 밝힌 전등을 보고 깜짝 놀란다. 1884년 귀국한 민영익이 고종에게 전등 도입을 건의하여 에디슨 전기회사와 계약을 맺고, 1886년 11월 전등기사 매케이(McKay)를 초빙하여 1887년 1월에 전기등소를 완공하여 양초 16개 밝기의 백열등 750개를 점등하게 된다. 백열등을 발명한 지 겨우 8년이 지났을 때다. 경복궁의 전깃불은 베이징의 자금성이나 일본의 궁성보다 더 빨랐다. 1900년에 한성전기회사가 종로에 가로등을 설치하면서 민간에서도 전기조명을 사용하게 된다. 1938년 수은등 내면에 형광물질을 바른 형광전구를 발명했는데 1955년부터 국내로 수입돼 1957년에 국산품으로 대량생산됐다. 조명역사관을 벗어나자 밝고 툭 트인 공간이 나온다. 분위기가 훤하다. 빛과 예술, 테크놀로지가 어우러진 라이트아트 전시장이다. 안 실장을 따라 옆문으로 들어서니 뜻밖에도 아담한 소극장이 나타난다. 단원들이 무대를 설치하고 연기를 한창 연습하는 중이다. 공연을 직접 보지 못하지만 공연을 촬영해 유튜브로 영상을 제공한다니 홈페이지를 접속해 보면 되겠다. ■ 빛으로 어둠을 밝히고 새로운 길을 열다-빛공해 사진UCC공모전 길에 전봇대가 서고 가로등이 켜지면서 어둠 속에 살던 도깨비가 사라졌다. 하늘의 별들도 쫓아낸 조명은 낮과 밤을 바꿨고 매미와 꽃까지 못살게 굴고 있다. 이런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 조명박물관은 오래전부터 뜻 깊은 사업을 벌이고 있다. 2005년부터 연 빛공해사진공모전이 그것이다. 빛공해의 실상을 널리 알리고 좋은 빛을 추구하자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환경부, 서울시와 공동으로 행사를 열어 인공조명에 의한 빛공해방지법을 제정하는데 기여했다. 현재 약 3천만원의 상금과 부상을 걸고 서울시와 빛공해사진UCC공모전을 진행하고 있다. 빛과 함께 놀고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조명놀이터 옆에 빛공해어린이전시장과 빛공해사진UCC공모전 전시실이 나란히 있다. 빛공해어린이전시실은 밝은 밤, 빛나는 숲 속 이야기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아이들이 빛공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친근한 숲 속 동식물과 빛의 공해를 살펴보는 공간이다. 박물관의 지원 사업 중에서 필룩스 라이트아트 공모전도 주목된다. 2008년부터 빛과 조명에 관심 있는 작가를 발굴하고 라이트아트의 미래지향적인 발전을 위해 여는 행사다. 그러나 올해는 이런 행사조차 열지 못했다. 지하 1층에 마련된 빛상상공간은 빛의 원리, 특성을 알아보고 빛이 가진 무한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전시장이다. 미로처럼 구성된 전시장 곳곳마다 테마를 가진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오로지 빛으로만 그려진 방, 숨을 불어넣는 작품, 무한히 확장되는 거울방, 그림자를 멈춰주는 벽, 발걸음으로 노래를 완성해보는 공간 등 빛 이야기들로 구성된 공간이다. 과학이 들려주는 빛이야기는 빛의 원리, 특성을 알아보고 빛이 가진 무한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전시장이다. 빛의 굴절, 직진, 회절, 빛과 색의 삼원색과 같은 빛의 기본 특성을 체험할 수 있다. 라이팅빌리지는 조명박물관의 유물을 캐릭터로 재탄생시킨 공간으로 귀여운 마스코트 빛돌이와 호롱이와 어울려 놀 수 있다. 박물관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크리스마스 특별전이다. 꼬마 눈사람의 겨울이야기(2016), 빨간모자와 늑대의 메리크리스마스(2017) 크리스마스 특별전 차갑고 따뜻한 겨울이야기 눈의 여왕(2019)은 관람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은 물론 친구, 연인 등이 함께하기 좋게 구성됐다. 박물관이나 갤러리에서 좋은 전시를 보여주는 것이 각박한 세상에 풍요를 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크리스마스 그냥 지나칠까 했는데 그나마도 안 되게 됐다. 구 관장의 말에서 관람객과 함께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짙게 묻어났다. 이제까지 열심히 달려왔다. 그래서 이제까지 지나온 것을 되돌아보고 점검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내년에는 코로나와 상관없이 전시를 열 계획이다. 경제 논리와 성장만 앞세우는 시대에 조명박물관의 행보는 미덥고 든든하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박물관은 개관할 때부터 온기를 나누는 사업을 꾸준하게 벌여왔다. 지역과의 연대를 소중히 여겨 대학과 시청, 소방서, 군부대 같은 이웃 기관과 힘을 합해 어린이날 행사를 준비하고 음악회를 열고 공모전으로 빛의 공해를 경계하고, 빛을 소재로 작가들을 후원하는 일에서 박물관이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성탄절이다. 삭막하고 혼란한 시대에 이 땅에 예수가 오신 까닭을 생각한다. 과연 좋은 빛이란 어떤 것일까. 예수는 가난하고 병든 자, 여자와 어린이의 좋은 이웃이었다. 그렇다. 예수는 눈부시지 않으나 주위를 밝고 환하게 비춰 주는 따스한 빛이었다. 김영호(병학연구소) / 사진=윤원규기자

[2020 경기도 박물관ㆍ미술관 다시보기] 38.고양 ‘중남미문화원박물관’

고양시 덕양구에 자리한 중남미문화원박물관은 미술관과 종교관, 연구실, 벽화, 4천여평의 정원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이다. 중남미문화원박물관에는 마야아즈텍잉카 고대문명과 스페인 식민시대 유물 3천여점을 비롯해 중남미 역사와 문화 관련 자료가 집대성돼 있다. ●중남미 2천년의 찬란한 역사가 숨 쉬는 곳 중남미로 불리는 라틴아메리카는 북미대륙의 남단에 위치한 멕시코에서부터 남미대륙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다. 카리브해에 흩어져 있는 작은 도서 국가들을 포함하여 총 33개국의 나라가 있다. 마야 왕국을 비롯하여 멕시코 고원지대에 터를 잡았던 아즈텍, 안데스의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던 잉카 제국을 이룩했던 이 지역은 17세기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 영국이 선점했던 북미지역을 앵글로아메리카로 구분하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지배했던 남미지역을 라틴아메리카라고 불렀다. 300년에 걸친 식민지배가 끝나고 중남미의 여러 나라들은 19세기 초에 대부분 독립했다. 현재 세계는 중남미의 잠재력을 주목하고 있다. 중남미문화원박물관은 라틴아메리카를 공부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중앙홀에 들어서면 스페인 양식의 돌로 만들어진 분수대를 볼 수 있다. 중남미에서는 스페인식 성당이나 큰 저택에 중앙홀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분수대를 즐겨 만들었다. 홀을 둘러가면서 사면의 벽에는 성화와 성물들,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중앙홀에 놓인 120년 된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는 문화원에서 열리는 음악제 때 사용하고 있다. 중앙홀 천정에는 나무로 조각한 금빛 태양상이 있다. 태양은 중남미 사람들에게 신앙의 대상이었다. 제1전시실은 토기실이다. 기원전 3천년 무렵, 멕시코와 페루고원지대에 정착한 인디오들 중 일부가 구운 토기를 사용하면서 신석기시대 문화를 열고 초기 토착문화를 정착시킨다. 금ㆍ동을 이용한 금속문화, 피라미드 건축, 모직, 면직 및 염색기술에서 뛰어난 예술성을 발휘했다. 인디오 문화는 기원전 1천년 전쯤 매우 세련된 토기를 생산했는데, 전시관에는 주로 멕시코-중미 일대의 토기가 전시되어 있다. 석기와 목기실로 구성된 제2전시실은 더욱 흥미롭다. 사람모양을 한 조각 석기인 쎄미 도끼, 방망이 같은 석기가 있다. 날개가 달린 뱀의 형상을 한 껫살꼬아뜰은 인디오들의 영혼과 물질을 혼합한 신비의 상징이다. 15세기 말 스페인이 정복할 당시에 도미니카 공화국 일대에서 수준 높은 문화를 꽃피웠던 따이노족의 의례용 의자인 두호도 여러점 전시되어 있다. 제3전시실 가면실에 들어서면 남미의 뜨거운 숨결이 한층 더해진다. 멕시코의 가면문화는 인디오들의 상징적 가면들을 영혼과 직결하는 문화로 발전시켰다. 인디오들은 일상생활로부터 잠시 자신의 정체와 영혼을 해방하고자 가면을 만들어 썼다. 나무, 가죽, 천, 토기 등 온갖 재료와 화려한 색으로 장식한 가면을 만들어 카니발 의식에 사용했다. 신, 마귀, 동물, 인어, 2중 가면, 천사, 나비 등 다채로운 가면들에서 그들의 생각과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입이 없는 가면이 있는데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뜻을 담고 있다. 제4전시실은 생활공예실은 농기구를 비롯해 다리미, 가구, 재봉틀과 같은 생활용품들과 악기가 전시되어 있다. 구리가 많이 생산되는 지역답게 구리 제품이 눈에 띈다. 표면에 망치로 두드린 자국이 무늬처럼 남아있는 물 항아리가 우리나라의 방짜유기처럼 정이 간다.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바호네스, 아코디언처럼 생긴 반도네욘 같은 악기에서 중남미인의 뜨거운 기질이 느껴진다. ●꿈을 현실로 만들다 중남미문화원박물관은 전 멕시코 대사 이복형 홍갑표 부부가 뜻을 모아 설립했다. 하지만 주역은 역시 홍 이사장이다. 팔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난 홍 이사장은 중학교 1학년 때 학비를 벌기 위해 신문팔이에 나섰던 당찬 소녀였다. 신혼 초, 국비 장학생에 선발되어 호주로 공부하러 떠난 남편을 지원하기 위해 걸레를 만들어 해군에 납품하고, 70년대에는 가발과 속눈썹 장사로 큰돈을 벌었던 수완가였다. 이때 사 들인 부동산은 중남미문화원을 건립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 무렵부터 홍 이사장은 고양향교 옆에 마련한 땅을 개간하기 시작했다. 문화원의 아름드리 큰 나무는 당시 홍 이사장이 심고 가꾼 것이다. 이 무렵 시골을 돌아다니며 반닫이, 경대, 삼층장, 고서화 같은 고미술품을 수집했던 그의 경험과 취미는 남편이 중남미 외교관으로 활동하게 되면서 중남미의 유물 수집으로 이어졌다. 이복형 원장은 아내 홍갑표 이사장이 골동품을 수집하던 때의 모습을 이렇게 회상한다. 골동품 시장에 가면 뛰는 것이 아니라 날아다니더라. 중남미의 고급 예술품들이 내전과 경제난으로 거리에 내몰리던 시절이었다. 유물을 구하려고 목숨을 잃을 뻔했던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내전 중인 엘살바도르에 많은 유물을 가지고 있던 미국인이 위험을 피해서 유물을 처분한다는 소식을 듣고 게릴라전이 벌어지는 도시 가운데를 지나갔던 것이다. 물론 홍 이사장이 유물 수집에만 열을 올렸던 것은 아니다. 홍 이사장은 외교관의 부인으로서도 충실했다. 남편이 코스타리카 대사로 있을 때 그의 헌신적 활동으로 교민사회가 튼튼하게 결속된 사실이 청와대에 보고되어 대사의 부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정부에서 표창을 받은 주인공이다. 1993년에 오랜 숙원이던 비영리재단 중남미문화원박물관을 설립하고 1997년에는 박물관 옆에 미술관을 세워 중남미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그림과 조각들을 전시하게 되어 문화원은 더욱 풍성해졌다. 그러나 곧이어 터진 IMF사태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는다. 한국에서 개인 재산으로 문화 사업을 벌인다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 결정인지 뼈저리게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30년 공직생활을 했던 남편의 퇴직금도 일시불로 받아 박물관 건립에 모두 써 버렸으니 연금도 없었다.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던 때 홍갑표 이사장은 이런 글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대 진정으로 원하는가?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을 잡아라. 무엇을 하든 무엇을 꿈꾸든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하라. 새로운 꿈을 꾸면서 절망에서 벗어나게 된 그는 남편에게 놀라운 제안을 한다. 박물관과 미술관을 설립하여 중남미의 문화와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했으니, 이제 중남미 국가들이 나설 차례라면서 각국의 조각을 기증받자고 한 것이다. 대사관에 협조 공문을 보내자 곧 반응이 왔다. 12개 나라에서 조각 작품을 기증하겠다고 약속했다. 배송 문제도 해결되었다. 한진해운에서 중남미로 수출하는 물량이 가고 오는 빈 컨테이너에 조각 작품을 실어 비용을 받지 않고 운송해 주었던 것이다. 조각공원이 완성된 2001년 11월 9일, 김대중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를 비롯한 많은 내빈이 참석해 축하해주었다. 이때의 일화. 청와대 경호실에서 보안문제로 오전부터 관람객 입장을 금지하도록 요청했다. 그러자 홍 이사장이 나섰다. 영부인의 내방도 중요하지만, 어린이를 비롯한 일반 관람객의 입장도 소중하니 관람을 막을 수 없다. 정부에서 나에게 시멘트 한 포대 준 적이 있느냐.며 끝내 자신의 뜻을 관철했던 사람이 홍 이사장이다. ●문화는 나눔, 중남미문화원은 나눔의 증거 이복형 원장과 홍갑표 이사장 부부는 문화원을 설립한 후 10여년을 미술관 지하에서 생활하다가 2011년 연구소를 건축하면서 비로소 지상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 원장은 자가용이 있지만 기름 값이 아깝다며 잘 타지 않고 버스나 전철을 이용할 정도로 검소하다. 그의 아내 홍 이사장은 더하다. 인터뷰 도중 자신의 옷을 가리키며 말한다. 이건 7천원, 겉옷은 1만원을 주고 산 것이에요. 이 원장은 89세의 고령이지만 오전에는 정원사, 오후에는 청소부가 되어 아이들이 흘린 휴지를 줍는다. 일을 마치면 연구실로 자리를 옮겨 인터넷으로 외신을 검색하고, 중남미 관계 서적과 자료를 찾아 읽는다. 외국 국빈이나 손님이 방문하면 능숙한 외국어(영어ㆍ스페인어ㆍ일어)로 박물관과 미술관, 종교관과 조각공원을 안내한다. 중남미문화원을 통해 민간 외교사절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이 원장은 2002년 한일월드컵 유치 집행위원으로 활동했으며, 2004년 세계 150여개국 회원으로 구성된 세계박물관대회 총회가 서울에서 열렸을 때 관계자들을 문화원에 초대하여 만찬을 열었다. 이러한 공로로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문화훈장 보관장을 받았다. 홍갑표 이사장은 새벽 3시가 되면 어김없이 일어나 묵상의 시간을 갖는다. 이때 되새기는 그의 좌우명은 중남미문화원박물관의 설립 정신이기도 하다. 문화는 나눔이다. 결코 소유가 아니다. 중남미문화원은 그 나눔의 결과물이고 증거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0 경기도 박물관ㆍ미술관 다시보기] 37.고양 ‘유진민속박물관’

흰 눈이 소복이 쌓인 장독대 옆에는 까치밥 서너 개가 빨갛게 달린 감나무와 맷돌, 절구가 놓여 있고, 마당 건너 헛간에는 지게와 싸리광주리, 둘둘 말린 멍석이 걸려 있다. 이것은 50년 전만 해도 흔히 볼 수 있었던 농촌의 겨울 풍경이다. 이제 한국은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부자 나라가 되었다. 그 사이에 천 년을 이어오던 세시풍습이 사라지고, 장독대가 사라지고 친정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장롱과 할아버지가 애지중지하시던 옻칠제기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요즘 아이들에게 1970년대의 시골 풍경은 수만리 떨어진 별나라만큼이나 낯설지만 흥미진진한 곳이다. ■ 자물쇠는 왜 물고기 모양일까?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에 터를 잡은 유진민속박물관(관장 유진구)에서 옛 사람들이 쓰던 다양한 물건들을 만날 수 있다. 튼튼한 가구에 달린 자물쇠가 물고기 모양이다. 왜 자물쇠가 물고기 모양일까. 물고기는 잠을 잘 때도 눈을 뜨고 자거든요. 그러니까 옛 사람들은 물고기 모양의 자물쇠를 만들어 물건을 잘 보관하려는 바람을 가졌던 것입니다. 1층의 상설 전시실부터 둘러본다. 안내하던 학예사가 여인의 방으로 꾸며진 곳에 멈춰 서더니 베개를 가리킨다. 베개에 새겨진 문양이 예쁘죠? 저 글자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라는 뜻을 지닌 목숨 수(壽)자를 나타낸 것이라고 알려주면 아이들도 금방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저것은 희(囍)라는 글자인데, 즐겁고 화목하게 살라고 기쁠 희(喜)자를 두 개나 새긴 것이지요. 여인들이 자수로 새긴 문양의 뜻을 들려주면 아이들도 금방 이해한다니 오색의 전통문양이 더욱 사랑스럽다. 선조들의 삶과 지혜가 담겨 있는 한국의 전통농업 코너는 절구, 풍구, 탈곡기 등 희귀한 농기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는 쌀을 재배하고 수확하는 농기구부터 가마니, 멍석을 짜는 자리틀도 있어요. 이것은 옛날 비옷인 도롱이에요. 대나무로 엮어 만든 통인데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다. 족제비로부터 병아리를 보호해주던 작은 닭장이란다. 짚으로 엮은 달걀 꾸러미는 아이들이 재미있어하는 유물이란다. 전시된 유물이 아이들에게는 하나같이 생소한 것들이라 눈빛을 반짝이며 귀를 기울인다고. 새색시가 시집을 갈 때 타는 꽃가마를 비롯해 전통혼례에 관련된 아름다운 의복과 우아한 장신구도 눈길을 끈다. 옛날에 떡 같은 다과를 만들 때 사용했던 사기떡살의 문양이 멋스럽다. 떡살을 보니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는 속담이 와 닿는다. 단체관람을 신청하면 학예사를 통해 자세하고 흥미로운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시골이 고향인 부모라면 아이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을 곁들여 들려주어도 좋을 것이다. 건물 중앙의 작은 정원에 고려시대에 만든 석탑이 우뚝 서 있다. 탑을 돌며 소원을 비는 탑돌이는 1천400년 전 선덕여왕도 참여했을 만큼 오래된 풍속이다. 전통예절과 다도를 배우는 다도실이 단아하다. 교육은 유진문화센터를 운영하는 송지연 관장이 담당하고 있다. 40년 넘게 유치원을 운영한 송 관장은 다도대회에서 장관상을 받았을 정도로 이 분야의 전문가다. ■ 문턱 낮춰 지역사회와 함께 성장하는 박물관 매년 마련하는 기획전의 주제가 흥미롭다. 속닥속닥 재미있는 음식이야기(2014), 우리 이렇게 만났어요(2015)는 절기에 따라 먹었던 우리의 음식문화를 살펴보는 흥미로운 기획이다. 2016년과 2017년의 기획전 주제는 문양 속에 담겨져 있는 소망이다. 기쁘고, 건강하고, 풍족하게, 오래 살라는 의미를 담은 이불과 베개, 병풍 같은 생활 소품들 전시하고, 관람객들에게 자신의 소망을 담은 문양을 만들어보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유도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2020년은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유진민속박물관도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다. 관람객이 크게 줄어드는 현실에서 박물관이 집중한 것은 온라인 전시와 교육콘텐츠를 개발하는 일이었다. 전통의 힘과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아이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체험형 교육 프로그램을 꾸준하게 개발하고 있다. 사실 사립박물관은 의욕은 있지만 재정 형편이 어렵기 때문에 실행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유진민속박물관은 공모에 적극 참여하여 지원을 받아내는 것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참신한 기획력으로 다수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4월에 박물관이 학예인력 경력인정기관으로 선정되었다. 박물관이 설립된 2009년부터 기획전시와 교육, 지역주민 참여행사 등 다양한 사업을 꾸준히 진행한 것이 인정받은 것이다. 현재 박물관에는 학예사 두 사람과 교육사 두 사람이 활동하고 있으며, 프로그램에 따라 특화된 외부강사진을 참여시키고 있다. 교육 프로그램을 총괄하는 유선영 실장은 학부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박물관학을 전공한 전문가다. 참신한 기획력으로 다양한 공모에 선정되어 박물관을 체험 중심의 교육기관으로 발전시킨 주역이다. 현재 유진민속박물관은 경기도,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박물관협회, 경기도교육청, 경기마을교육공동체 등에서 지원을 받아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블록으로 문양을 만드는 사업과 자개로 공예품을 만드는 사업을 시작했는데, 참여자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진행하지 못하다가 온라인 콘텐츠로 제작하고 인터넷으로 신청을 받았다. 우편으로 교재를 배달하여 비대면 영상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호응이 좋았다. 기대 이상의 반응에 깜짝 놀랐어요. 자개로 만드는 것은 처음일 것인데 판매를 해도 될 만큼 잘 만든 작품들이 많았어요. 2014년부터 인근의 성사중, 내유초, 고양 관산초, 원당초 등 지역 학교들과 MOU를 체결하여 지역 학생들에게 문화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할 기회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고양진로교육체험처(제26호, 2016년 지정), 창의지성 교육과정 배움 공동체(고양교육지원청)로 인정을 받아 역할을 확장하고 있다. 유진구 관장은 이런 전망을 밝혔다. 지역민들이 많이 찾는 박물관이 세계적인 박물관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지역사회에서 양질의 교육컨텐츠와 좋은 전시를 꾸준히 열어나갈 계획입니다. 유진민속박물관의 유진은 흐를 유(流)에 모을 진( ) 자를 쓴다. 흐르는 세월에 사라져가는 문화유산을 수집해 후대에 전승하려는 목적을 가진 유진민속박물관은 교육에 헌신한 부부의 의지로 설립되었다. 33년간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명예 퇴직한 유 관장과 40여 년 동안 유치원을 운영한 송지연 관장이 주인공이다. 유년기의 체험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확신한 부부는 주말이면 인사동과 황학동, 때로는 제주도까지 돌아다녔다. 아이들을 교육할 때 옛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 있는 자료들을 보여주면 과거 조상들을 잊지 않겠지요. 박물관 설립에 관한 질문을 던지자, 곁에 있던 유 실장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공을 굳이 따지자면 어머니가 70%, 아버지가 30%라고 할 수 있어요. ■ 박물관의 변신은 무죄 일편단심가에 담긴 고양의 설화 2020년 기획전시는 고봉에 피운 일편단심가이다. 일편단심가는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라며 함께 혁명하자는 이방원의 제안을 거절한 정몽주의 시조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를 말한다. 이 유명한 시조에 뜻밖의 흥미로운 사연이 숨어 있다. 고양이 백제 땅이던 시절 이곳에 살던 미녀 한씨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진다는 것이다. 박물관에는 한씨 설화(한씨미녀와 안장왕 이야기)를 벽화로 그려 놓았다. 이야기를 구성하고 벽화를 그린 이는 고양에 사는 김중석 그림책 작가다. 이처럼 박물관은 고양시의 정체성이 담긴 설화를 풀어내 관람객들에게 들려주기도 한다. 옥상으로 나가면 체험공간이 펼쳐진다. 맷돌을 돌려볼 수 있고, 아이와 아빠가 함께 제기를 만들어 실력을 겨루고 팽이를 돌릴 수도 있다. 학원과 스마트폰에 빠져 놀이를 잃어버린 아이들에게 케케묵은 전통놀이가 통할까. 염려와 달리 아이들은 이내 전통놀이에 빠져든다고 한다. 손가락만 움직이는 스마트폰과 달리 온몸을 사용하는 것이 전통놀이의 매력이다. 박물관 앞쪽에 위치한 유진문화센터는 방과 후 학습이 가능한 교실과 실내 수영장, 그리고 공연장으로 활용할 수 있는 커다란 카페를 갖추고 있다. 박물관은 온 가족이 함께 찾을 수 있는 나들이 공간입니다. 유익한 무료 체험학습이 많이 운영되니 지역주민들이 많이 활용하면 좋겠어요. 흥미롭고 유익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한다는 관계자의 말에서 문턱을 낮춘 박물관의 장래가 밝게 느껴진다. 즐겁게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보다 즐거운 일이 또 있을까. 관람객과 지역민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유진민속박물관의 변신은 계속되고 있다.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2020 경기도 박물관ㆍ미술관 다시보기] 36.이천시립월전미술관

이천시립월전미술관(관장 장학구)은 이천시 경충대로 2천709번길 185 설봉공원 내 설봉산(雪峰山) 자락에 위치한다. 이천시립월전미술관은 나라를 빼앗긴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과 6ㆍ25전쟁을 겪는 등 암울한 시대를 살다간 한국화의 거장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 1912~2005) 화백의 작품을 전시하고 그 작품세계를 조명하기 위해 건립된 미술관이다. 월전 장우성 화백은 1989년 한국 화단을 위해 월전미술문화재단을 설립하여 평생 그린 작품과 한국 전통 미술의 연구 및 우리 문화재의 보호를 목적으로 수집한 회화, 서예, 도자, 금속공예, 불교미술품, 국내외 고미술품 등을 재단에 기증하고 이를 발판으로 삼아 1991년 서울시 종로구 팔판동에 사립 월전미술관을 건립했다. 이후 평생의 업적이 사적(私的)인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공익(公益)을 위해 사용되기를 바라는 마지막 유지(遺志)를 남기고 2005년 별세했다. 이에 월전미술문화재단과 유족들은 그 뜻을 받들어 월전미술관 소장품 1천532점을 이천시에 기증함으로써 2008년 이천시립월전미술관으로 재탄생하기에 이른다. 이천시립월전미술관에 들어서면 건물 바로 앞에는 마치 굴곡진 역사를 보는 듯한 소나무 한그루가 비스듬히 서 있다. 월전 장우성 화백의 호를 딴 월전송(月田松)이다. 달(月)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둥근 광장 너머로 소나무(松) 밭(田)에는 빈 공간, 대지의 틈새, 문의 이미지-생명 등의 조각 작품들이 서 있다. 설봉산 여래(如來)계곡을 건너가는 물의 다리는 학이 비상하는 날갯짓을 모티브로 삼았다. 학이 광장이라는 둥근 달을 품고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려 할 때 월전송은 학의 부리와 같은 모양새로 탈바꿈한다. 평면으로 펼쳐져 있지만 한국화의 새로운 형식과 방향을 모색하려 했던 월전의 사유가 물리적으로 디자인되어 있는 듯하다. 건물은 크게 본관과 별관으로 구분된다. 본관 미술관은 전시실로 월전의 작품과 고미술 소장품이 상시 전시되는 2층 상설전시실 3칸과 1층의 기획전시실 2칸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술관은 학예사 3명 등 10명이 운영하는 중이다. 별관은 월전관으로 마치 살아서 붓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듯한 정교한 월전의 밀랍인형이 동양화는 붓을 들기 이전에 정신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물체의 외형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그 내면을 관조하여 자기의 심상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먹빛 속에는 요약된 많은 색채가 압축되어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테두리 밖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관람객의 발길을 붙잡는다. 별관 앞뜰은 조각공원이다. 일생을 그림에 사로잡혀 살았던 월전의 흉상 앞에 종이와 붓과 벼루, 지필연(紙筆硯)을 조각해 배치했다. 특히 문인화의 백미(白眉)라는 찬사를 받았던 〈가을밤의 기러기 소리 (1998년 작)〉를 화비(畵碑)에 새겼다. 연보비(年譜碑)에는 1912년 충주에서 태어나 2살 때 여주군 흥천면 외사리로 일가가 이사한 것에서부터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에게 그림을 수학하고,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1893~1950)에게 경사(經史)를 배운 내용, 화가로서의 작품활동과 업적 등 월전의 일대기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월전은 어려서 한학자인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회초리를 맞아가며 천자문을 떼고 동몽선습(童蒙先習)이며 소학(小學), 명심보감(明心寶鑑) 등을 두루 익혔다. 그러나 꽃만 봐도 가슴이 설레고 풀향기를 맡고도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또한 유난히 달밤을 좋아했다. 급기야 13~14살 때에는 그저 그림만 쳐다봐도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가 되었다. 초상화에 대한 관심은 이천 도립리 엄낙암(嚴樂庵)이라는 선비가 1년에 한 번씩 우암 송시열의 영정을 공개하는 영정봉심(影幀奉審)이라는 행사를 개최할 때 이 행사에 꼭 참석하는 할아버지를 매번 따라나선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림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의 일이다. 우암의 영정을 본 순간 나도 저렇게 그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며, 나도 커서 저런 초상화를 한 번 그려보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畵脈人脈)고 한다.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의 초상화는 물론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의 초상화도 그의 몫이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은 월전의 작품이다. 영정을 그리기 전에 충무공기념사업회 회장 유석(維石) 조병옥(趙炳玉, 1894~1960) 박사는 월전을 불러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의 징비록과 충무공전서를 읽고 충무공의 참모습을 찾아내기를 부탁한다. 또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선비 같다고 해서 나약한 선비로만 그리면 안 된다고 쐐기를 박는다. 그 순간 그것이 바로 담력이라고 포착하고 그 담력을 어떻게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눈빛에 위엄을 불어넣는 방법을 택한다. 또한 이순신 장군 종손 집에 사흘 동안 머무르며 후손의 얼굴 모습, 골격 등도 면밀히 살펴본다. 이렇게 순간의 섬광 같은 깨달음과 현장답사 등의 과정을 통해 충무공 이순신 장군(1953년 제작, 아산 현충사 소장)의 영정은 탄생한다. 이후 충장공 권율 장군(1970년 제작, 행주산성 충장사에 봉안), 다산 정약용(1974년 제작, 한국은행 소장), 강감찬 장군(1974년 제작, 낙성대 소장), 김유신 장군(1976년 제작, 진천 길상사 소장), 윤봉길 의사(1978년 제작, 예산 충의사 소장), 포은 정몽주(1981년 제작, 한국은행 소장) 등의 영정을 그린다. 1990년에는 장보고 장군 영정을 제작하여 중국 산동성 적산 법화원에 봉안한다. 이중 충무공 이순신 장군 영정을 비롯한 다수의 작품이 국가표준영정으로 지정된 상태다. 월전은 시서화(詩書畵)라는 세 가지 장르를 하나의 화폭에 농축시켜 담아내면서도 활달한 선(線)과 여백을 중시하는 문인화(文人畵)에 탁월했다. 학(鶴)과 인물화와 산수화 등을 먹의 농담(濃淡)으로 점, 선, 면을 화폭에 그리며 여백을 비웠다. 이를 통해 시, 서예, 그림을 온전히 갖춘 전통문인화의 계승에 그치지 않고 자기만의 회화세계를 구축하려 부단히 노력했다. 서울대와 홍익대 교수로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으며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을 역임하는 등 한국 화단에 끼친 영향이 상당하다. 그는 또 동물그림을 통해 현실에 대한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1998년에 그린 개싸움1은 인간사회의 비열함과 천박한 세태를 동물에 빗대어 비판한 그림이다. 그의 작품 중 백두산 천지도는 국회의사당에 걸려 있고, 한국의 성모와 순교복자 성화 3부작은 바티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새안塞雁은 대영박물관에, 홍매는 프랑스 문화성에 각각 비치되어 있다. 정부에서는 문화예술계에 끼친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1976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2001년에는 금관문화훈장을 각각 수여했다. 이천시립월전미술관에서는 지난달 26일부터 2020년 겨울 기획전으로 소나무를 주제로 두 달여에 걸쳐 송하보월松下步月: 달빛 비추는 밤 소나무 아래를 거닐다전을 개최하고 있다. 유윤빈 등 한국화 작가 9명이 소나무 작품 35여점을 출품했다. 권소영 작가는 3m가 훌쩍 넘는 20개의 소나무 패널에 먹으로 소나무를 그렸다. 작가는 나무에 박힌 자연 옹이를 화가의 그림 옹이로 되살려 자연과 인간의 몸짓을 조화시켰다. 유예진 작가는 자연의 본성 그대로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소나무를 비비 꼬아 만든 분재(盆栽)를 통해 뒤틀린 인간의 욕망을 고발한다. 기획전은 내년 1월31일까지 전시된다. 얼마 전 민족문제연구소는 월전 장우성 화백을 친일 인사로 발표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영정과 수많은 역사적 위인들의 영정을 그려 금관문화훈장까지 받은 인물이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천시립월전기념관에는 예술의 세계와 역사가 살아 숨 쉰다. 제1전시실의 세한송(歲寒松)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선비정신과 기개를 담았다. 소나무는 선비정신의 상징이다. 이천시립박물관과 세계도자엑스포센터도 근처에 위치하고, 호국영령들을 추모하는 현충탑과 서희(徐熙, 942998) 장군 동상을 에워싸고 이천 출신 애국지사들의 영령도 함께하고 있다. 산야에 뿌리박은 소나무는 그 잎 어느 하나라도 역사의 꿈틀로 꿈틀거린다. 역사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권행완(정치학박사다산연구소)

[2020 경기도 박물관ㆍ미술관 다시보기] 35. 남양주 ‘우석헌자연사박물관’

동서양의 귀족이나 부자들이 희귀한 물건을 수집해온 역사는 오래되었다. 유럽에서는 르네상스 이후 자신의 저택에 지질학과 생물학에 관련된 수집물들을 전시해놓는 유행이 시작되었다. 취미나 과시용에서 벗어난 최초의 자연사박물관은 1793년에 설립된 프랑스 파리의 국립자연사박물관이다. 영화 박물관이 살아 있다의 촬영지로 유명한 미국 뉴욕의 자연사박물관이나 진화론을 정립한 다윈이 수집한 표본들이 보관되어 있는 런던의 자연사박물관이 유명하다. 자연사박물관은 우주의 탄생비밀과 인류가 등장하기 전 지구의 모습은 물론 지구에서 탄생하고 사라져 간 수많은 생명체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떨까. 한국은 OECD 국가 중 유일하게 국립 자연사박물관을 갖추지 못한 나라이다. 박물관의 수는 세계 10위권 안에 들지만 국립 자연사박물관이 없다는 사실은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남양주 진접읍 금강로에 자리 잡은 우석헌자연사박물관은 단연 돋보이는 곳이다. ■광물은 신이 만든 시들지 않는 꽃 3천300㎡규모의 박물관 상설전시실에는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 등 시대별로 정리해 놓은 다양한 광석들과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암모나이트와 각종 원석 등 2천7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지구의 탄생부터 현재까지 46억년의 시간여행을 할 수 있도록 여섯 가지 색을 따라가는 구성과 관람자가 다양한 각도에서 유물을 관찰할 수 있도록 전면을 개방하는 전시 방식이 신선하다. 생명의 역사에서는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 등 각 시대를 대표하는 표준화석을 통해 생명의 기원과 역사를 이해하고, 다양한 종류의 화석들을 관찰하면서 생명체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나가도록 구성했다. 다양한 종류의 암모나이트가 하나의 모암에 보여 지는 표본은 암모나이트의 생태적 습성을 말해주는 화석으로 학술적 가치가 아주 높다. 검치호랑이 호석은 200㎝ 이상의 검치를 가진 신생대 홍적세 때의 타르 못에 빠져 만들어진 화석이다. 매머드의 이빨과 털이 전시된 공간이 멋지다. 사방에서 관람할 수 있는데, 특히 정면에서 보면 곧 튀어날 듯 유물이 입체적이다. 전시실을 안내하던 한 관장이 공룡알둥지 화석과 오비랩터의 유정란 화석 앞에 멈추어 섰다. 지구상에 발견되는 알은 거의 대부분 무정란이죠. 유정란은 1천개 중 2개 정도인데 이것이 유정란 화석입니다. 공룡알 화석만으로 전시된 곳 앞에서 다시 이야기를 이어간다. 세계적으로 27종이 발견된 공룡알 화석 중 우리 박물관이 22종을 보유하고 있어요. 공룡이 알을 품은 흔적이 남아 있는 화석도 있다. 공룡도 인간처럼 모성애가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어요. 모성애를 가진 공룡도 있었다는 한 관장의 설명에 놀라며 다시 화석을 살펴본다. 공룡 알 화석이나 우주에서 날아온 운석 하나에 수만 수십억 년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암석, 광물, 보석, 운석 등을 편광사진과 더불어 전시하고 있는 지구과학관은 더욱 강렬하다. 놀라운 빛을 발하는 보석광물과 희귀광물 앞에 서니 자연의 신비에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암석의 생성환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암석코너도 흥미롭다. 중앙의 보석코너는 황홀한 빛깔과 신비로운 모양의 보석원석들이 가득하다. 상설전시실을 나와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지구상에서 몸집이 가장 컸던 공룡이 전시된 야외전시실이다. 다양한 공룡 모형이 전시되어 있는 쥐라기 파크는 어린이들이 특히 좋아하는 공간이다. 다른 공룡을 잡아먹는 육식 공룡, 새끼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어미 공룡 등 다양한 공룡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2층 복도를 유리로 꾸며, 663㎡(250여평)에 이르는 아래층 수장고를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계단을 통해 1층으로 걸음을 옮긴다. 연간 1~2회씩 새로운 이야기들을 전달하는 기획전시실 맞은편에는 전 세계를 40년 가까이 탐험하며 수집한 수많은 표본들이 놓여 있는 수장고가 있다. 전면 유리로 국내에서 가장 큰 종유석을 비롯해 매머드의 머리와 검치호랑이 몸 전체를 복원해 놓은 표본 등 다양한 유물을 볼 수 있다. ■미쳐야 미친다 박물관 설립자 김정우 대표는 돌에 미쳤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광물 수집에 평생을 바쳤다. 금융기관 중역으로 일하던 그가 처음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수석이었으나 단순히 보기 좋은 돌보다 역사와 이야기가 담긴 광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1980년대부터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광물과 화석을 수집한다. 남미의 아마존 정글을 비롯해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인도네시아의 밀림에 이르기까지 방문한 나라만 해도 30개국이 넘는다. 죽을 고비까지 넘기며 수집한 것은 실로 엄청나다. 50톤이 넘는 중국의 종유석, 30톤이 넘는 인도네시아의 나무화석, 스테고돈(신생대의 코끼리과 동물) 화석 등 국내에서 보기 힘든 표본을 한국으로 들여왔다. 암모나이트 화석은 무려 4만점에 달한다. 한국희 관장도 처음에는 남편의 수집벽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예물시계까지 팔아 유물을 구입하기까지 했다니 오죽했을까. 하지만 아이들에게 실물로 자연을 배울 수 있는 교육 환경을 만들어주겠다는 남편의 열정에 그만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남편의 권유를 받은 아내는 박물관 운영에 전문성을 더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한 관장의 박사학위 논문의 제목은 대중 참여 프로그램이 뮤지엄 활성화에 미치는 영향: 우석헌자연사박물관 참여 프로그램을 중심으로이다. 논문의 주제처럼 한 관장은 박물관도 소통에서 참여로 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득 옛말이 떠오른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不狂不及]. ■아이들의 참여로 재능과 꿈을 발굴하는 4세대 박물관으로의 진화 박물관 설립은 남편이 했지만 관리와 운영은 제 몫이었죠. 남편이 공을 들여 수집한 좋은 자료로 아이들의 꿈을 키워주고 싶어요. 한 관장은 암기와 입시 위주로 진행되는 한국의 교육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교육 프로그램 개발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2015년부터 4년 동안 도교육청과 함께 진행한 사과나무숲 꿈의 학교는 학생들의 호응이 뜨거웠다. 사과나무숲은 인문학인 역사(史)와 자연과학(科)을 융합하는 교육으로 학생이 배움의 주체가 되고 학생이 원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프로그램이다. 대학 입시에 맞춘 교사 주도의 주입식 교육은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들일수록 큰 상처받고 깊이 좌절하면서 폭력적으로 되어갑니다. 아이 안에 모든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기에 교사의 역할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내재되어 있는 것을 끌어내는 것이지요. 한 관장은 아이들의 타고난 재능을 끌어내는 것이 교육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꿈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죠. 사과나무숲에서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입시현장으로 내몰리는 학생들을 위해 건너뛰고 잃어버렸던 교육을 되찾아주려 했어요. 올해 교육 프로그램이 꽉 차 있었는데 코로나19로 인해 프로그램을 전혀 진행하지 못했다. 막막할 때마다 옥상에 오른다는 한 관장은 자주 소명을 이야기했다. 그가 말하는 소명의식이 어려운 현실을 헤치며 최고의 박물관으로 만들어가는 힘의 원천일 것이다. 광물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그의 말이 아직도 또렷하다. 석기시대는 끝난 것이 아니다. 석기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간다.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2020 경기도 박물관ㆍ미술관 다시보기] 34.남양주 서호미술관

건축물은 종합예술품이라 할 수 있다. 작가들의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혼이 깃든 작품을 기획 전시하는 미술관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터를 잡고 땅을 다지는 것부터 주춧돌을 깔고 기둥을 세우고 창문을 내고 지붕을 이며 실내 인테리어를 진행하는 모든 과정에 주인의 생각과 바람이 곳곳에 스며들기 마련이다. 미술 작품을 보기에 앞서 그 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의 외관과 건물의 구조를 살펴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하나의 건축물은 건물을 지은 사람의 미의식과 내면의 풍경이 오롯이 담긴 종합작품이기 때문이다. ■ 흐르는 강물처럼 서호미술관(관장 홍정주)은 북한강이 흐르는 남양주시 화도읍 북한강로 1천344번지에 자리 잡고 있다. 20여년 전, 서울 인사동에서 갤러리 서호를 운영하던 홍 관장은 지방의 학생들이 미술 작품을 보기 위해 서울까지 오는 것을 보면서 관람객에게 다가가는 미술관을 구상했다. 3년의 공사를 거쳐 2001년에 개관한 서호미술관은 홍 관장의 어머니(이은주, 87세)의 역할이 컸다. 이은주 여사는 1967년부터 서울 인사동에서 한국민예사를 운영하며 50여년 동안 전통 목가구를 제작한 사업가이자, 30여년 동안 한지 예술을 펼친 작가이기도 하다. 서호미술관은 한강의 흐름처럼 유유자적하다. 강호가도(江湖歌道), 북한강을 바라보며, 산수심원기(山水尋源記), 실타래, 풀어내다 등 기획전의 이름도 한강의 흐름을 닮았다. 2020년 지역문화예술 플랫폼 육성사업의 이름이 판, 접고 펼치다인데 문화예술판을 꽁꽁 얼어붙게 한 코로나 정국을 지혜롭게 헤쳐나갈 것이라는 선언처럼 들린다. 격자창이 멋스러운 1층 전시실은 사계절 변화하는 북한강의 풍경을 감상하기에도 좋은 공간이다. 5m 높이의 전시실은 대형 작품을 설치하기에 넉넉하고 관람하기에 편안하다. 원형 나무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오르면 100석 규모의 대형 레스토랑이 나타난다. 한옥의 들보와 서까래가 드러난 천장이 장관인 레스토랑 더 서호는 또 하나의 특별 전시실이다. 품격이 느껴지는 원목테이블과 장식용 소품들은 대부분 한국민예사에서 제작한 전통 목가구들이다. 예술의 멋과 음식의 맛은 아주 가까운 사이다. 식사 후 잘 가꾸어진 정원을 거닐며 조각 작품을 감상하는 일도 즐거운 일이다. ■ 초대 기획전 윤석경과 정혜례나의 Calling전 12월5일부터 서호미술관의 초대 기획전 윤석경과 정혜례나의 Calling전이 열리고 있다. 짐작하듯 이 전시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에 맞추어 기획된 것이다. 윤석경과 정혜레나 두 작가의 공통점은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Calling은 하느님의 부르심일 것이고, 전시된 작품은 그에 대한 작가의 응답일 터이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도예를 전공하고 도자골 달뫼를 운영하는 윤석경 작가는 한국예술치료학회에 소속된 1급 예술치료사라는 특별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대학원에서 입체미술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정혜레나 작가는 강원도 홍천에서 헬레나 조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두 작가 모두 19회의 개인전을 열고 100회 이상의 단체전에 참여한 중견작가들이다. 이들의 작품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십자가를 주제로 작품을 출품한 윤석경 작가의 작업노트에서 찾아본다. 작업은 할수록 탄력이 붙는다. 고로 신간 개념도 없다. 내가 여자고 늦은 나이라는 생각조차 없다. 그 순간 다른 이의 시선이나 의식조차도 개의치 않는다. 오직 작업뿐, 이 순간 너무 행복하고 나만의 시간, 세계가 좋다. 실패는 또 다른 기법을 가르쳐 준다. 잘못된 작업으로 인해 그동안 안 해본 기법을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작업 중 느끼는 감성, 감각은 나이와 상관이 없다. 오히려 살아온 연륜이나 작업을 해 온 세월로 인해 더욱 농축된 작업을 할 수 있다. 정혜레나 작가는 르네상스 시대를 연 최초의 인문주의자로 평가받는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정치가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1304~1374)의 확실한 사실인 죽음과 불확실한 사실인 죽음의 시간 어디서나 항상 임박해 있는 죽음 가운데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작가 자신의 일상과 사명의식을 고백하고 있다. 이른 아침, 맑은 햇살이 투명하게 내려앉은 저의 퀘렌시아(Querencia:안식처)인 작업실은 커피콩 가는 소리와 고요한 묵상으로 시작됩니다. 어제의 나는 소멸되고 새로운 자아의 탄생을 소망하는 시간은 그분이 허락하신 상상의 지평을 기웃거릴 수 있는 찰나입니다. 무심한 철판 위에 상상의 조각들이 뚜욱~뚝 떨어집니다. 작가는 하늘과 땅을 잇는 매개로써 존재의 의미를 갖습니다. 작가의 작업일지이자 고백록이라 할 작가노트를 읽으면 작품에 대한 이해의 깊이와 폭이 한결 넓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단조로운 삶에 변화를 주고자 하는 갈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작가들이 오랜 시간 인내하며 제작한 작품 앞에서 관객인 우리는 내면과의 대화를 시작하게 마련이다. 내면과의 대화를 통해 영혼의 안식을 얻기도 하고, 영감을 받기도 한다. 삶의 본질을 꿰뚫는 심안을 기르려면 미술 작품을 자주 마주할 일이다. 특히 신앙을 가진 작가의 작품은 잠들어 있는 인간 내면의 영성을 깨우는 힘을 발휘한다. ■ 양옥과 한옥의 조화, 미술관 본관과 서호서숙 서호서숙은 홍 관장의 할아버지가 남긴 고서를 보관하기 위해 경남 하동의 장원석 대목장을 초빙해 2018년에 지은 한옥이다. 서호(西湖)는 한학자였던 할아버지의 아호랍니다. 서호서숙은 마당을 활용하기 좋은 ㅁ자 구조가 특징이다. 섬돌을 딛고 방안으로 들어가니 수 백개의 조각을 이은 커다란 천에 달항아리를 표현한 작품이 걸려 있다. 대나무로 만든 자리에는 장식이 화려한 해주반과 12각호족반을 비롯한 여러 가지 반상이 놓여 있고, 벽에는 천에 염색한 작품이 걸려 있다. 고품격의 소가구들이 단정하게 전시된 대청마루를 지나자 안방이다. 혼례에 입었던 고운 한복이 걸려 있고 단아한 찻상이 놓여 있다. 건넌방 좌우에 운치 있는 나무 침상이 놓여 있다. 사랑방 책장에는 홍 관장의 조부의 손때가 묻어 있는 서애문집을 비롯한 고서가 가득하다. 개관을 기념해 여기, 지금이라는 주제로 전통과 현대의 간극을 아우르는 7인의 공예전을 열었던 사실을 들려준다. 서호미술관과 서호서숙은 할아버지의 정신적 유산과 어머니의 예술적 유산이 살아 숨 쉬고 있다. 홍 관장은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사로 일하면서 홍익대 대학원에서 조선왕조시대의 제구(祭具)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던 전통공예에 관한 전문가이다. 홍 관장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다양한 공예작품을 좀 더 자주 전시할 계획이라고 대답한다. 집안의 내력과 전공은 숨길 수 없는 모양이다. ■ 남양주, 강줄기를 따라 예술과 역사가 숨 쉬는 곳 남양주에는 서호미술관을 비롯해 수준 높은 미술관과 박물관이 여럿이다. 2018년부터 서호미술관을 비롯한 남양주의 실학박물관, 남양주유기농박물관, 모란미술관, 왈츠와닥터만커피박물관, 우석헌자연사박물관, 프라움악기박물관 등 7개의 박물관미술관이 남양주 문화시설 활성화 및 공동홍보에 관한 협약을 체결하고 남양주 뮤지엄 투어패스를 시작했다. 입장권 하나로 남양주의 대표 박물관을 모두 입장할 수 있는 사업이다. 아울러 전시가 끝나면 폐기되는 설치물이나 구조물의 재활용과 공유화 방법과 각 기관에서 관리하는 회원을 통합 관리하는 방안도 함께 고민하고 있단다. 소통과 협력으로 남양주의 문화예술의 지평은 더욱 넓혀지고 있다. 연말이다. 미술관은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내면과 마주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영원을 꿈꾸며 신의 부름에 대한 응답으로 빚어낸 조각가 윤석경과 정혜레나의 작품에서 오늘을 성찰하고 내일을 설계하는 데 도움이 될 메시지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오가는 길에 잠시 차를 세우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굽어보는 일도 빠트리지 말자.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2020 경기도 박물관ㆍ미술관 다시보기] 33. 가평 ‘설미재미술관’

가파른 언덕길을 오른다. 언덕 위에 올라서자 툭 트인 언덕에 미술관이 서 있다. 가평군 설악면 유명로. 첩첩산중에 자리 잡은 설미재미술관을 처음 찾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왜 이렇게 깊은 산중에 미술관을 세웠을까하는 의문과 이런 곳에 터를 잡고 미술관을 세운 사람은 누구일까하는 궁금증을 가지게 마련이다. 눈이 아름다운 언덕 위의 집이란 뜻의 설미재는 한번 들으면 잊기 어려운 멋진 이름이다. 야외에 세워진 조각 작품을 살펴본다. 고구마 이파리를 닮은 호미 날은 하늘을 향해 올라가 꿈틀대듯 숲을 이루고, 반짝이는 스테인리스 둥근 기둥 끝에 호박넝쿨처럼 나선형의 가는 줄기가 하늘로 오르고 있다. 야외 조각공원에는 20여점의 멋진 설치작품이 푸른 하늘과 숲을 배경으로 서 있다. 안재홍 작가는 대나무를 통해 인체의 조형을 표현했고, 전향섭 작가는 농기구를 가지고 농업과 예술의 소통을 조형물에 담아냈다. 설미재미술관(관장 추경)은 작지만 활동력이 왕성한 젊은 미술관이다. 매년 중견작가와 전시 기회를 갖기 어려운 신진작가에게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고 있으며, 전업 작가들이 상주하며 작품에 몰두할 수 있는 작업실을 갖추고 있는 것도 미술관의 자랑이다. 최근에는 미술관의 주도로 지역 기업과 힘을 합해 가평에서 미술시장을 여는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산골에서 미술시장을 연다는 발상은 어떻게 했을까. 설미재미술관은 알아 갈수록 흥미로운 곳이다. ■ 대안미술학교를 꿈꾸며 가평 산중에 미술관을 세우다 설미재미술관을 개관하면서 추 관장이 밝힌 발언에서 미술관의 설립 목적과 비전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 살며, 일하며, 느끼며, 창조하며, 토론하며, 나누는 새로운 미술발전을 위해 여기 설미재미술관에 작은 씨앗을 뿌립니다. 설미재 미술교육체험 프로그램은 직접 씨 뿌려 땀 흘려 가꾸며 대지로부터 배우고 명상을 통해 참자아를 발견하여 개인의 잠재적 창의성을 최대한 이끌어 내는 전문화한 자연친화적 교육프로그램입니다. 설미재 창작스튜디오에서는 작가 공동체를 활성화하여 생명사랑, 인간존중, 환경보호를 담보할 새로운 미적 가치관을 모색하고 정립해 나가는 장이 되고자 합니다. 오늘의 씨 뿌림이 자기 안의 세계를 발견하고 미래를 품어내는 21세기 예술가의 탄생으로 열매 맺기를 기대합니다. 미술관 관장인 추경 작가는 동아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미술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985년부터 6년 동안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조형미술학과 석사, 파리1대학에서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1991년에 귀국한 그는 서울에서 작업하며 동아대에서 강의하고 개인전을 여는 등 활발하게 활동해왔다. 20여회의 개인전을 연 전문작가이자 교육전문가이기도 한 추 관장은 1998년 문득 서울을 벗어나기로 작정한다. 조용한 작업실을 찾다가 우연한 인연으로 가평에 작업실을 얻게 됐다. 프랑스 파리의 그랑쇼미르와 같은 세계적인 미술학교로 키울 수 있는 국제미술대안학교를 세우는 꿈을 가졌지요. 세계적인 미술음악학교는 모두 대안학교에서 출발했거든요. 이러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추 작가는 문화예술에서 소외된 지역의 아이들을 미술관으로 불러들인다. 초등학생들이 대상인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중학생 위한 나를 찾아서 떠나는 미술여행, 다문화가정과 소외계층을 위한 무료미술체험교실, 장애인 미술체험 등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미술관과 거리가 아주 멀 것 같은 농민들도 미술관을 찾게 만들었다. 2017년부터 진행하는 설미재아트팜프로젝트는 농업과 예술의 소통을 꿈꾸며 기획한 프로그램으로 주민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이다. ■ 바람과 불꽃에서 인생을 배우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설악면 산중에 작업실을 마련한 작가 추경의 작품 주제는 바람에서 불꽃으로 건너뛰었다. 바람과 햇살, 비와 눈이 만들어내는 대자연의 기운을 느끼며 자연과 호흡하며 살았다. 오랜 시간 직관으로 자연을 관찰하고 명상하면서 주변 풍경을 온몸으로 느끼며 기억해왔다. 바람은 그 허허로움과 자유로움 때문에 20여년 간 내 작품의 주제가 되었다. 작가는 문득 자신이 그동안 한 주제에 너무 오래 매달려왔음을 깨닫고 2016년 개인전을 열어 바람을 결산하고 불꽃에 관심을 기울였다. 미술관에서 불꽃을 감상할 수 있다. 새로운 작업을 실험하던 어느 한겨울, 나는 작업실 난로의 타닥타닥 타고 있는 장작의 불꽃을 바라보면서 그 불꽃에 매혹되었다. 이때부터 불을 내 작업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작품을 실험하는 긴 산고의 시간을 보내면서 마침내 새로운 불꽃 작품이 탄생됐다. 동양사상에 해박한 작가의 설명이 이어진다. 내 작품의 주제는 세상을 이루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에서 기원한다. 흙과 물, 불과 바람으로 인해 대자연이 가능하고 생명체의 존재가 가능하다. 불, 불꽃을 통해 생명체가 발산하는 호흡, 혼과 같은 것을 시각화한 것이다. 작업 과정도 흥미롭다. 캔버스가 타지 않게 돌가루를 엷게 바른 후 아크릴 물감으로 밑 작업을 한다. 이때 불을 가까이 대면 물감의 질료성이 기화하거나 물결처럼 유동하면서 어떤 미지의 이미지가 태어난다. 완성된 밑그림 위에 숯을 뿌리고 한지로 전체를 매운 후 불로 태워나간다. 불꽃은 산소와 만나 캔버스 전체를 너울너울 흘러 다니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 ■ 2020 가평아트페어를 기획하다 미술시장 진입이 어려운 신진작가의 미술품 판로개척 지원과 국민의 미술문화 향유 및 미술품 소장문화 확산을 이끈다는 목표를 가지고 설립한 예술경영지원센터는 매년 예술단체를 선정해 지역 곳곳에서 열리는 미술 장터를 지원하고 있다. 설미재 조형연구소는 2020 가평아트페어의 사업 주체로 선정됐다. 지역작가와 신진작가들의 예술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기획한 가평아트페어는 2020년에 처음 시도한 사업이다. 경기도 가평을 비롯해 청평, 양평, 남양주 등 인근 소도시에서 활동하는 중견작가와 신진작가 50여 명과 함께 쉽고 친절한 전시라는 주제를 가지고 일상과 가깝기에 더 유쾌한 미술장터를 열었다. 현재 코로나19로 작가들은 어느 때보다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추 관장은 이 기획을 연 까닭을 이렇게 들려준다. 가평아트페어는 예술이 모두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는 의미 있는 자리를 만들고 가평을 대표하는 문화예술축제로 키워나갈 작정이다. 이 행사를 후원하고 작품을 구입한 지역의 기업들이 늘어나 가평아트페어가 지역의 축제로 탄탄하게 자리 잡기를 바란다. ■ 내년 2월 말까지 2020 소장품展 설미재미술관에는 비전 있는 젊은 작가들이 상주하고 있다. 현재 박중현, 정명화, 이근아, 하춘(서양화). 최성환(사진) 5명의 작가들이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뒤에는 산, 앞에는 개울이 흐르고 겨울에는 눈이 펄펄 내리는 이곳에 살다가 이 좋은 곳을 후학을 위해 써야겠다는 생각에 후배들과 화가 공동체를 꾸려 나가자는 다짐을 했다. 추 관장의 바람대로 설미재는 젊은 작가들이 기대는 언덕이 됐다. 겨울은 멈춘 것처럼 느껴지는 계절이지만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는 거룩한 시간이다. 설미재에 깃든 작가들은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며 작품 생산에 심혈을 쏟을 것이다. 설미재미술관은 지난 1일부터 2020 소장품전을 열었다. 내년 2월 말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는 12점의 강렬하고 다채로운 작품을 선보인다. 김원백 작가의 유전자로부터라는 작품은 생명체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진지하게 던지는 것이며, 김유섭 작가의 회화 작업은 다양한 첨단 재료의 특성을 살려 미래의 자연풍경을 표현한 것이다. 반추상화한 김종근의 풍경 작품, 한지를 겹겹이 바른 후 문자를 음각으로 파나가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허종화 작가의 평면 작품, 여인의 기억과 추억을 옷에 담아 판화형식으로 표현한 방인의 작가의 그녀의 기억이 있다. 그밖에도 안기호, 양경선, 이선희, 황호섭, 추경 작가의 작품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코로나로 침체되고 무거워진 발걸음에 던지는 응원의 메시지다. 설미재미술관은 멀게 느껴지지만 사실은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서울-춘천 고속도로 설악IC 유명산 방향으로 1㎞ 좌측 언덕에 있다. 대중교통은 잠실에서 직행버스(7000번)를 타고 설악터미널에서 내려 일반버스(32-11, 32-16 등)로 갈아타면 된다. 설악터미널에서 미술관까지는 버스로 10분 정도 걸린다. 관람은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가능하다.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2020 경기도 박물관ㆍ미술관 다시보기] 32. 의정부 백영수미술관

소요산행 1호선 전철을 타고 도봉산역과 의정부역 사이에 있는 망월사역에서 내려 스마트폰으로 미술관까지 거리를 찍어보니 600m가 나온다. 2번 출구로 나와 도봉산 방향의 골목길로 접어들어 5분쯤 걸으니 하얀 2층집 백영수미술관(관장 김명애)이 나타난다. ■ 몽당연필로 그린 백영수 드로잉전: 1부 주머니 속 이야기 터가 좋아서일까, 11월 하순인데도 미술관 담장에 빨간 장미꽃이 피어 있다. 고개 들어 미술관 외벽에 걸린 그림을 찬찬히 바라본다. 대형 캔버스에는 나무가 서 있는 언덕을 배경으로 엄마가 아이를 안고 있는 그림이 걸려 있고, 그 밑에는 철골로 만든 모자상이 설치되어 있다. 아담한 마당에도 모자상 조형물이 또 있다. 엄마가 아이를 안고 있는 모자상은 2년 전에 작고한 화가 백영수(1922~2018)의 분신인 셈이다. 박물관은 지난 18일부터 2020 지역문화예술 플랫폼 육성사업으로 백영수 드로잉전-1부 주머니 속의 이야기를 전시하고 있다. 김명애 관장이 다음 달 29일까지 열리는 드로잉전에 출품된 작품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그분의 모든 주머니 속엔 몽당연필이 들어 있었어요. 그런데 몽당연필은 스케치용 부드러운 연필심이 아니고 딱딱하여 가늘고 흐리게 써지는 것들이었어요. 작은 연필을 쥐고 그리는 것이 답답하고 안쓰러워 연필을 사서 정성껏 깎아 연필 통에 꽂아 놓으면 그것은 어느새 쓰레기통에 들어가 있어요. 스케치하기 좋은 연심의 연필을 톱으로 짧게 잘라 놓아도 여지없이 쓰레기통에서 발견되었지요. 그 후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시라고 두 손을 들어버렸어요. 휴대하기 좋은 스케치북을 사 놓아도 한 번도 사용하질 않고 영수증 뒷면, 휴짓조각, 냅킨, 작은 공책에 그렇게 흐릿하게 그렸어요. 왼손으로 몽당연필을 잡고 작은 종이에 그렸습니다. 드로잉전을 관람하기 전에 구효제 전시해설사의 안내로 작가의 숨결이 남아 있는 작업실부터 둘러본다. 마치 며칠 전까지 화가가 그림을 그린 듯 아기자기한 풍경이 펼쳐진다. 방금 김 관장이 들려준 열댓 개의 몽당연필과 붓이 가득 꽂힌 필통과 물감으로 얼룩진 팔레트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방 한가운데 놓인 의자는 조금 전까지 주인이 앉아 있었던 것처럼 편안하다. 작은 용기가 가득한 진열장을 유심히 살펴보자 구 해설사가 사연을 들려준다. 두 분이 모두 소금 그릇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지셨다고 해요. 여행하면서 사 모으신 것이라고 해요. 50년 전 부부가 살았던 아담한 집 뒤로 도봉산 봉우리가 우뚝 솟은 흑백사진이 보인다.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 미술관 주변에 건물이 가득 들어차서 이제는 예전의 멋진 풍경을 볼 수 없어 유감이다. 방안에 걸린 가족은 백영수 화백의 내면세계를 가장 잘 드러내 주는 작품이다. 작은 문을 열고 옆방에 들어서니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백 화백이 생전에 기도하고 주일 미사를 드리던 경당이다. 아치형 창문이 있는 경당은 밝고 아늑한 공간이다. 입구 맞은편 안쪽에는 십자가와 성모 마리아상, 성경책이 펼쳐진 탁자에 작가의 사진이 놓여 있다. 청색 목도리를 두른 사진 속의 인물은 온화한 눈길로 방문객을 맞이한다. 의자가 여럿 놓여 있고 좌우 벽에도 모자상이 걸려 있으니 작은 전시실인 셈이다. 전시된 드로잉 작품들은 대부분 손바닥만큼 작다. 모자상부터 작은 지면에 담긴 그림에 쓰인 글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너의 집이 어디냐 앞장서거라, 사랑이 무엇 눈물의 씨앗, 미라보 다리 세느강이 흐르고, 뾰쪽뾰쪽한 도봉산도 있고, 커다란 눈동자에 어린아이가 들어 있는 그림에는 손주라고 쓰여 있다. 어느새 곁에 온 김 관장이 들려준다. 이렇게 그려졌던 그림들은 얼마 후 대형 작품으로 탄생했지요. 백영수는 1960년대 전후부터 신문이나 월간지의 표지나 삽화를 많이 그렸다. 전시실 한쪽에는 그가 그린 표지삽화가 실린 1950~1970년대 잡지들이 전시돼 있다. 그 속에서 소월시집과 김광섭시집의 표지화는 물론 우리 시대의 고전 반열에 오른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문학과지성사)의 표지도 발견한다. ■ 엄마 품에 안긴 아이는 백영수 자신 백영수는 70년대부터 어머니와 아이를 소재로 그린 작품이 많다. 그림 속의 어머니와 아이의 얼굴이 예사롭지 않지 않다. 가로로 비스듬히 기울인 얼굴이 등장하게 된 까닭을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들려주었다. 6ㆍ25동란 중 낙동강 하류 지역에 피난을 갔는데 한 초가에서 예닐곱 살 정도 되는 아이를 봤어요. 지쳐 있는지, 기대 있는지, 아니면 누구를 기다리는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 장면이 너무 인상적인 거예요. 그 뒤로 인물을 그리면 정자세가 아니라 자꾸 갸우뚱하게 그려지게 돼요. 2011년 백영수가 귀국했을 때 공항에서 그를 의정부 작업실(현재의 미술관)까지 모신 평론가 김윤섭은 엄마 품에 안긴 아이가 누구인지 알게 된 사연을 이렇게 전해준다. 그날도 차 안에서 조그만 볼펜으로 무언가를 그리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어깨너머로 몰래 봤더니 역시나 모자상이었습니다. 아이를 업고 있는 엄마의 모습인데, 근데 희한하게 몇 년부터 몇 년까지라는 연도를 표기한 것은 알겠는데, 꼬마 아이 얼굴에 수염이 그려져 있었어요. 화백님께 꼬마 얼굴에 수염이 왜 있는 건가요라고 물었더니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씩 웃으시면서 아이일 때 한국을 떠났는데, 돌아올 때는 이 아이가 수염이 나 있어.이러시는 거에요. ■ 한 세기를 건너간 작가의 오롯한 흔적 1922년 수원에서 태어난 백영수는 두 살 때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머니의 품에 안겨 현해탄을 건너 일본 오사카에 정착한다. 유년시절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던 백영수는 오사카미술학교에 입학해 유화를 배운다. 1945년 미군의 폭격으로 살던 집이 사라지자 백영수는 어머니와 함께 맨몸으로 귀국한다. 일본인 여교사의 주선으로 목포고등여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던 그는 조선대학 박철웅 초대 총장의 초대를 받고 광주로 거처를 옮겨 천경자, 윤재우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로 대학에 미술과를 설립한다. 1947년 광주생활을 끝내고 서울로 상경한 그는 화신백화점에서 개인전을 열어 이응로, 남관, 이쾌대, 장욱진 같은 작가들과 교류하고, 같은 해 제1회 조선미술전(국전)의 심사를 맡았다. 이 무렵 잡지 국제보도에 실린 그의 그림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은 유엔 한국위원단 공보관 프랑스인 알베르그랑과 특별한 인연을 맺는다. 알베르그랑의 주선으로 1948년 덕수궁 석조전에서 광복 후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고 많은 작품을 팔아 생활의 안정을 얻는다. 1950년 전후에 백영수가 어울린 사람들은 박수근, 이중섭 같은 화가는 물론 박목월, 모윤숙, 조지훈 같은 문인들이다. 이 시절의 아련한 풍경은 그가 펴낸 검은 딸기의 거울(전예원), 백영수의 1950년대 추억의 스케치북(열화당)에 실려 있다. 특히 백영수미술문화재단에서 펴낸 성냥갑 속의 메시지에는 우리 귀에 익숙한 화가, 문인들과의 흥미로운 일화가 가득하다. 의정부에 작업실을 두고 활동하던 백영수는 1977년 프랑스로 이민을 떠난다.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던 요미우리화랑의 전속화가로 활동할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해외에 머물던 35년 동안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로마, 미국 뉴욕,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등 여러 도시에서 100여회의 전시를 열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벌인다. ■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빛나는 별 2011년 1월 백영수는 35년의 긴 외국생활을 정리하고 귀국길에 오른다. 외국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오랫동안 한국을 떠나 있었던 탓에 백영수의 작품은 국내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이런 사정을 안타깝게 여긴 광주시립미술관에서 2012년에 특별 초대전을 열어준다. 1947년 조선대 미술과를 창설로 맺은 광주와의 특별한 인연이 66년 만에 다시 이어진 것이다. 광주시립미술관에서 2013년까지 열린 백영수 회화 70년은 한국 문화계에 백영수를 알리는 전기가 된다. 2016년 서울 아트사이드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었는데, 그해 정부는 해외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인 백영수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수여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되는 올해에는 고향 수원에서 백영수를 초대했다. 지난 5월부터 8월까지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에서 열린 백년을 거닐다: 백영수 1922~2018은 코로나19로 관람이 제한되는 악조건에서도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젊은 관객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는 소식이 무엇보다 반갑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의 작품이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0 경기도 박물관ㆍ미술관 다시보기] 31.시흥 오이도박물관

시흥의 작은 섬 오이도는 일제강점기인 1922년 군자만의 시화갯벌에 대규모 염전을 만들면서 길을 만들고 철도역이 생기면서 육지가 되었다. 1970년대까지 오이도 주민들은 바닷가에서 소금을 만들고 굴이나 모시조개를 캐며 살았다. 그러던 오이도가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선사시대 패총(조개무지)이 무더기로 발견되면서부터였다. 오이도의 선사시대 유적지는 2002년에 국가사적 제441호로 지정되었다. 시흥시는 오이도의 선사시대 유적을 보존연구하고 역사문화와 교육의 구심점으로 삼기 위해 2019년 7월에 오이도박물관을 개관했다. 지상3층, 지하1층의 박물관은 상설전시관과 어린이 체험실, 교육실, 수장고를 갖추고 있다. 연천의 전곡선사박물관이 선사시대를 주제로 세운 박물관이라면 시흥 오이도박물관은 신석기시대를 특화한 박물관으로 첨단시설을 두루 갖추었다. 박물관에서 만나는 여러 가지 콘텐츠들은 감각적이며 말랑말랑하다. 놀이를 통해 역사를 배우고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오이도박물관의 자랑이자 강점이다. 오이도박물관을 둘러보면 박물관도 이렇게 진화하고 있구나! 놀라게 될 것이다. ■ 시민의 힘으로 지켜낸 오이도 유적 앞에서 소개했듯이 6천년의 역사가 켜켜이 쌓인 오이도 유적은 1960년에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인 패총이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오이도 유적은 수천 년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다. 1988년부터 2001년까지 서울대학교박물관의 발굴조사를 통해 오이도 섬 전체에서 12개의 신석기시대 패총을 비롯해 초기 철기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의 집터를 비롯한 생활유적과 유물이 발굴되었다. 그러나 오이도 유적이 처음부터 잘 보존된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시화지구 개발 사업으로 몇몇 패총은 지금 형체도 알 수 없을 만큼 파괴되었다. 2000년대 초 오이도 안말 지역에 대한 수자원공사의 개발 계획이 알려지자 오이도 주민과 시민단체들이 나섰다. 오이도 선사유적 보존을 위한 시민대책위원회를 결성한 시민들은 오이도 패총을 보존하자는 운동을 힘차게 벌였다. 시민들의 꾸준한 활동으로 마침내 2002년 4월1일 오이도 패총은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441호로 지정되었다. 시흥시는 2011년부터 오이도 유적을 정비하며 2018년 4월에 오이도 선사유적공원을 개장하고 이듬해 7월에 박물관을 개관하게 되었다. ■ 박물관은 놀이터다 1층 로비에 들어서면 눈길은 자연스레 밖을 향하게 된다. 바다가 한눈에 가득 들어오는 풍경이 좋다. 원형 기둥에 주렁주렁 달려 있다. 오이도 소망나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다. 오이도 사람들이 소망을 빌었던 당산나무를 형상화한 것이다. 움집처럼 생긴 둥근 천장을 보며 2층에 올라서자 아이들 세상이다. 벽에는 아이들이 그린 그림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손으로 모래를 파내자 알록달록 예쁜 조개가 나온다! 거북이와 물개와 물고기가 둘러싼 물속에 몇 마리 물고기들이 유유히 헤엄을 친다. 손을 뻗어 잡으려하자 물고기들이 재빨리 달아나 바위틈에 숨는다. 디지털이 구현하는 영상이지만, 어른도 아이처럼 즐겁다. 아이와 엄마가 함께 놀기 좋은 2층 체험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며 놀 수 있다. 놀이에 열중하고 있는 삼십대의 젊은 엄마와 대여섯 살쯤 되는 여자아이는 박물관이 즐거운 놀이터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간파한 모양이다. 아이와 엄마가 서로 화명에 나타나는 도토리에 손바닥을 대자 점수가 올라간다. 도토리 줍기 대회에 모녀가 참여한 셈이다. 3층 상설전시관도 최첨단 기기들을 동원하여 신석기 시대를 재현하고 있다. 2층 체험실과 3층 상설전시관은 전시와 체험을 고루 섞어 오감으로 역사를 이해하도록 꾸며졌다. 여느 박물관과 달리 모두가 입체적이며 감각적이다. 작살 체험, 포토 그래픽 토기 만들기, 토기 퍼즐 조각 맞추기, 주거 공간 체험도 인기가 높다. 6천년 전 오이도에 살았을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일상을 보여준다. 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한 여자들이 바위에 붙은 굴을 따고, 건장한 남자들이 창으로 멧돼지를 잡는 모습을 실감나게 재현하고 있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 현장 앞에 시흥에서 발굴한 관련 유물을 전시한 것은 참신한 발상이다. 밀랍인형으로 만든 신석기인들은 수천년 전에 펼쳐졌을 신석기 시대의 어느 날의 풍경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오이도박물관은 즐거운 놀이터다. ■ 6천년을 이어온 역사 6천년 전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가 따뜻하게 변화한 신석기시대에는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지형의 변화가 크게 일어났다. 육지였던 한반도의 일부가 바다에 잠기고 해안선이 생겨나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침엽수림이든 숲은 활엽수림으로 바뀌고 사람들은 삼면의 바닷가에서 물고기와 조개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숲에 들어가 도토리를 비롯한 나무열매를 줍고 조, 기장, 수수 같은 잡곡을 채집했다. 추운 기후에 살던 대형 동물들이 사라진 대신 멧돼지와 사슴 같은 동물이 살았다. 사람들은 활을 쏘아 노루처럼 날쌘 짐승을 사냥하고, 그물과 작살로 바다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았다. 우리나라 서해안과 남해안 곳곳에서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탔던 배와 이들이 사용했던 도구가 출토되었다. 흥미롭게도 오이도 선사유적에서 사람들이 오랫동안 거주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조개무지의 99%가 굴 껍데기인 것을 보면 오이도는 늦가을부터 초봄까지 이용한 야영지였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오이도에는 옛사람들이 살았던 수많은 흔적이 있다. 수천 년 세월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흑요석기는 비밀이 숨어 있다. 흑요석은 화산지대에서 나오는 것이니 이 흑요석은 백두산이나 한라산, 또는 일본에서 구해온 것일지 모른다. 날카로운 흑요석 화살촉은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먼 곳까지 여행했던 사실을 알려주는 유물이다. 전시실에서 만나는 유물은 자연을 기대 살았던 옛사람들의 땀과 눈물이 밴 물건들이다. 나무를 자르고 다듬던 돌도끼와 자귀, 단단한 뼈에 구멍을 뚫었던 돌끌, 곡식을 심기위해 땅을 일구던 돌괭이, 풀을 잘랐을 돌낫과 뼈낫도 있다. 상상력을 발휘하면 뼈로 만든 바늘 하나에서 선사시대 사람들의 일상의 모습을 그려볼 볼 수도 있다. 옥을 갈아 만든 꾸미개와 뼈를 갈아 만든 목걸이도 상상력을 부채질한다. ■ 빗살무늬토기에서 달항아리로 석기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살던 움막으로 들어가 보니 실내가 더욱 살뜰하다. 숯불이 타고 있는 움막 안에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시렁에는 막대기에 날카롭게 간 창이 놓여 있고, 바닥에 놓인 토기에 도토리와 밤이 가득 담겨 있으며, 사람들이 토기에 음식을 요리하고 고기도 굽고 있다. 토기는 가장 흔한 선사시대의 대표유물이다. 오이도에서 발견된 빗살무늬토기에는 다양한 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점을 찍거나 선을 그어 만든 문양은 원, 삼각형, 마름모, 빗살무늬 등 다양하다. 선사시대 사람들은 왜 토기에 촘촘하게 점을 찍고 가지런한 선을 새겼을까. 점을 찍고 선을 그으며 누구를 생각했을까. 상상력을 펼치면 깨진 토기 한 조각에서도 옛사람들의 삶을 그릴 있을 것 같다. 토기는 철기시대가 되면 항아리로 모양이 진화한다. 전시실에는 삼국시대에 제작된 항아리도 여럿 있다. 시흥 장현동에서 출토된 달항아리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도자역사, 곧 시흥에서 청자와 백자를 생산했다는 사실이다. 방산동 가마터에서 청자와 백자와 벽돌로 축조된 가마터가 발견되었다. 접시, 발, 완, 주자, 항아리 같은 청자와 백자가 함께 발견되었는데 청자가 훨씬 많다. 자기 생산과 관련된 갑발, 도지미, 갓모 같은 도구들도 함께 출토되어 이곳이 초기 고려청자 단지였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도자 유물 중에 앙증맞게 생긴 작은 그릇들도 있다. 박물관 준비부터 실무를 담당했던 학예사 김대홍 팀장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가 솔깃해진다. 아이들이 무덤에 넣은 부장품인 명기(明器) 앞에서 제게 묻습니다. 선생님, 옛날 아이들도 소꿉장난을 했어요? 고리자루큰칼, 투겁창, 도끼, 낫 같은 철리류와 시루, 항아리 같은 토기류가 발견된 무덤은 마한에서 백제로 통합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고려시대 사람들이 사용했을 것 같은 청동숟가락과 청동거울 밑에 조선시대라는 패가 놓여 있다. 청동으로 만든 생활용품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정수리에 튼 상투가 풀어지지 않도록 상투 위에 꽂아 머리를 고정시키는 동곳은 흔히 볼 수 없는 유물이니 친절한 설명이 있으면 좋겠다. ■ 시민들과 함께 하는 박물관 시화방조제의 시작점에 위치한 오이도박물관 앞 바다는 철새들의 낙원이다. 겨울이면 천연기념물 제326호인 검은머리물떼새를 비롯해 국제적인 보호종인 검은머리갈매기와 알락꼬리마도요 같은 철새들을 만날 수 있다. 시민들의 노력으로 갯벌이 살아났기 때문에 철새들의 먹이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김대홍 팀장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더니 대답이 소박하다. 모든 시민이 함께 하는 박물관이 되는 것입니다. 소박한 바람이지만 실행하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더군요. 김준영(다사리행복학교 행복지기)

[2020 박물관 미술관을 가다] 30.김포다도박물관

김포 운양역에서 7번 버스를 타고 30여분을 달려 김포다도박물관 정류장에서 내렸다. 박물관 입구에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다. 길 옆 밭에 황금빛의 민들레꽃이 지천으로 피어있다. 늦가을에 봄날의 화사한 풍경을 볼 줄이야. 풍수지리를 잘 몰라도 명당에 박물관이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알겠다. 여남은 마리 거위가 한가롭게 물질을 하는 연못 주변의 나무들이 스무 살 청년처럼 말쑥하다. 김포다도박물관(관장 손민영)은 한국의 차 문화를 널리 알리기 위해 2001년에 문을 연 사립박물관으로 3천여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3만3천㎡의 너른 부지에 조각공원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다도박물관을 왜 이처럼 외진 곳에 세웠을까. 안내를 맡아준 안정아 국장이 그 까닭을 들려준다. ■ 한재 이목과 김포의 차문화 초의선사의 동다송보다 300년 전에 다부(茶賦)를 지어 차의 아버지로 불리는 한재 이목 선생님이 김포 출신입니다. 그 분의 묘소와 사당이 여기서 가까운 애기봉 아래에 있습니다. 김포가 한국 차문화의 역사성을 오롯이 간직한 고장이기 때문에 이곳을 선택한 것이지요. 안국장은 설명을 이어간다. 그러나 선생이 지은 다부는 1980년대에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같은 유명 학자들과 차로 깊은 인연을 맺은 초의선사의 동다송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나 한재의 다부는 오랜 세월 묻혀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차의 산지로 널리 알려진 전라도 보성이나 경상도 하동과 달리 김포는 차 생산지도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차의 아버지로 불리는 한재 이목(寒齋 李穆, 1471~1498)은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에서 태어나 점필재 김종직 선생 문하에서 수업을 받고 19세의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했던 수재였다. 선비의 도를 실천하는 기호품으로 차를 즐겼던 한재가 지은 다부(茶賦)는 총 1천332자로 이루어졌는데, 차의 일곱 가지 효능과 차의 다섯 가지 공, 그리고 차의 여섯 가지 덕을 노래한다. 이중에서 차의 일곱 가지 효능을 이렇게 정리했다. 마른 창자가 깨끗이 씻겨 진다(장설腸雪), 신선이 된 듯 상쾌하다(상선爽仙), 온갖 고민에서 벗어나고, 두통이 사라진다(성두醒頭). 큰마음이 일어나고, 우울함과 울분이 사라진다(웅발雄發). 색정이 사라진다(색둔色遁), 마음이 밝아지고, 편안해진다(방촌일월方寸日月), 마음이 맑아지며, 신선이 되어 하늘나라에 들어선 듯하다(창합공이?闔孔邇). 이처럼 한재는 내 마음의 차(吾心之茶)를 노래한 한국 최고의 다인이다. 제1전시실에는 차 관련 다기를 비롯한 유물과 규방문화를 재현해 놓았고, 제2전시실에는 주로 30년 이상 된 근대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별 전시실에는 현재 3대가 그린 그림을 전시하고 있다. 현재 다도박물관은 소장하고 있는 3천여 점 중에서 3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다도박물관 곳곳에 손민영 관장은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손 관장은 오래 전부터 한국 문화를 외국에 알리는 일에 열정을 쏟았다. 그리스 아테네올림픽기념(2004), 오페라하우스에서 가진 호주 수교50년 기념(2008), 북유럽-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수교50주년 기념((2009), 터키수교50주년 기념(2017) 등 국제행사에 한국문화사절단을 이끌었다. 국제행사에서 차문화는 물론 도자기와 장신구, 조각보 등을 전시하여 한국의 미와 문화를 세계에 널리 알렸다. 박물관은 해마다 5월 셋째 주 토요일에 유치원 아이들부터 일반인 및 군인 등 특별계층과 함께하는 다례경연대회 전통문화큰잔치를 열고, 6월 첫째 주에는 전국한재차회와 한재 이목 선생을 모시는 한재당에서 헌공다례의식을 35년째 이어오고 있다. 또한 안양소년원을 찾아 차와 전통예절, 성년의식 같은 문화를 통해 인성을 함양하는 활동도 지난 20여 년 동안 꾸준하게 벌여왔다. ■ 이천년을 이어온 한국의 차문화 전시관 입구에 걸린 고려시대의 그림에서 한국의 융성했던 차문화를 엿볼 수 있다. 그림 속에는 젊은이가 무릎을 꿇고 앉아 발이 세 개 달린 화로에 부채질을 하고 있다. 전시실에서 처음 만난 소장품은 다부의 1천332자를 예서체로 쓴 서예작품이다. 그 옆으로 청동구리로 만든 솥과 무쇠로 만든 솥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물병은 생김새가 천차만별이지만 옛 장인의 미의식이 잘 전해주는 유물이다. 우려낸 차를 한 곳에 따르는 물그릇과 찻잔도 크기와 생김새와 빛깔이 다르지만 여유가 느껴진다. 조선 여성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규방도 눈길을 끈다. 얼핏 보면 자개로 장식한 것 같은 장롱을 비롯한 방안에 놓인 가구는 수를 놓은 것이다. 한국 여인의 바느질 솜씨가 그저 놀라울 뿐이다. 한국미를 물씬 풍기는 조각보를 전시한 통로를 지나면 제2전시실이다. 장식장에 가득한 찻잔들은 다인들이 봄가을, 여름과 겨울에 사용한 다기들을 달리 사용했던 사실을 알려준다. 그렇다. 겨울에는 잔이 두텁고 깊어야 온기를 오래 간직할 터이다. 눈길을 끄는 유물은 대추나무로 만든 귀면형 연이다. 차나 약재를 잘게 부수는 도구답게 반들거리는 손잡이에서 따스한 기운이 전해진다. 고려인들이 애용한 떡차는 차를 잘 다져 둥글납작하게 만들고 가운데 구멍을 뚫어 끈으로 꿰어 처마 밑이나 시렁에 걸어두고 숙성시킨 발효차였다. 돋을새김으로 꽃모양을 조각한 청자 주발인 청자양각화문완(靑磁陽刻花紋碗)은 고려 귀족들의 취향을 느낄 수 있고, 흑유양이병(黑釉兩耳甁)은 사람의 귀처럼 양쪽에 손잡이가 달려 있는 특이한 병이다. 쪽빛 청자보다 검은빛이 감도는 투박한 이 유물에 마음이 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풍로는 수십 년 전만해도 불을 피울 때 사용했던 생활도구였다. 한국의 산천을 닮은 것 같은 곱돌풍로는 박물관이 자랑하는 대표 유물의 하나다. 풍로는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바람을 불어넣어 불길을 세게 했던 풍로의 부드러운 질감과 짙은 색깔이 웅숭깊은 한국인의 마음을 닮은 듯하다. 한겨울이면 놋쇠 화로에 식구들이 둘러앉았다. 빨간 숯불을 피우면 아이들은 군밤을 굽고 어른은 찻잎을 넣은 주전자를 올려놓아 이따금 뜨거운 차로 몸을 덥혔을 것이다. 놋쇠 세발화로는 조선 선비처럼 단아하다. 전시실 곳곳에 걸린 글귀를 음미해 보는 것도 차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추사체로 판각한 다반향초(茶半香初)부터 음미해 보자. 차를 마신지 반나절이 지났는데 향이 처음 같다는 이 말은 동다송을 지은 초의선사와 같은 해에 태어나 돈독한 우정을 가진 추사 김정희가 남겼다. 무소유로 널리 알려진 법정스님의 글씨를 새긴 서각도 있다. 홀로 마신 즉 그 향기와 맛이 신기롭더라. 한재의 다부를 새긴 전서체의 서예와 이를 한자 한자 나무에 새긴 작품은 세월이 많이 흐르면 문화재로 보존될만한 명작이다. 고려 학자 이곡(1298~1351)이 지은 동유기에서 신라 화랑들이 차를 즐기며 심신을 단련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화랑들은 차를 나누어 마시며 서로 강하게 결속하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예로써 화합할 수 있었다. 화랑들이 사용하던 차 도구가 동해 바닷가에 여러 곳에 남아있는 것을 보았다.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를 다녀 간 뒤에 고려도경을 지은 서긍은 고려의 융성한 차문화를 이렇게 전한다. 고려인들은 차 마시기를 매우 좋아하여 다구를 더욱 잘 만드는데 금꽃이 있는 검은잔, 청자 작은 찻잔, 은화로, 세발 차솥 등이다. 서긍의 말을 입증해주듯 고려 때 강진에서 제작한 것으로 전해지는 고려청자 연잎찻잔은 예술성이 빼어난 유물이다. ■ 내 마음을 다스리는 차 한 잔 나누는 여유 김포다도박물관의 아름다운 풍경은 입소문을 타고 방송계에 알려져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 사용되었다. 장혁, 이다해 주연의 아이리스2와 신성록, 장나라 주연의 황후의 품격의 촬영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11월 중순이다. 마음이 바빠지는 때다. 차 한 잔의 여유가 필요한 때다. 고려인들이 후손들에게 다반사라는 말을 남겼듯이 우리도 바쁜 일상이지만 한 잔 차를 마시는 여유를 가지고 한해를 갈무리하면 좋지 않을까. 오래 만나지 못한 정다운 벗이 있거든 다도박물관에서 만나기로 기약하자. 벗과 차를 나누며 그윽한 만추의 정취를 가슴에 담아보자. 500년 전 한재 이목선생처럼 내 마음을 다스리는 차를 만나는 기쁨을 맛보시길.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0 박물관 미술관 다시보기] 양평 ‘잔아박물관’

글과 흙의 놀이터 잔아박물관 마당에 들어서자 열댓 명의 초등학생들이 우르르 밖으로 몰려나온다. 마스크를 썼지만 재잘대는 아이들의 환한 표정이 늦가을 햇살에 눈부시다. 아이들이 가득한 박물관 풍경이 신선하다. 아이들이 떠나고 난 뒤 그들이 머물렀던 공간을 살짝 들여다본다. 아이들은 나도! 돈키호테라는 주제로 마련된 2020년 박물관 길 위의 인문학 수업에 참여했던 것이다. ■ 서리 맞은 단풍잎은 봄날의 꽃보다 더 붉다 양평 서종면 사랑제길 9-9에 자리 잡고 있는 잔아박물관(관장 여순희)은 아이들의 표정처럼 밝고 따뜻한 공간이다. 박물관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글과 흙이 만나 화학 작용을 일으킨 까닭일 것이다. 잔아박물관은 마지막 아이라는 뜻을 가진 잔아(殘兒)라는 필명을 쓰는 소설가 김용만씨가 사비를 털어 설립한 문학박물관이다. 충남 부여에서 출생한 잔아 김용만은 명문 중고교를 졸업하고도 가정형편으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한때 자살을 꿈꾸기도 했던 젊은이였다. 온갖 직업을 전전하면서 문학에 대한 열정을 속으로만 불태우던 그는 49세에 현대문학에 늦깎이로 등단했다. 쉰을 넘겨 대학에 진학하여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박사과정을 수료할 정도로 문학에 대한 집념이 강했다. 대학 강단에 섰던 그는 문학도들이 편안하게 문학을 이야기하는 공간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이 과정에서 아내 여순희 작가의 도움이 컸다. 남편의 뜻을 순순히 따라주었고 이날까지 박물관을 함께 가꾸고 있다. 글과 흙의 놀이터에서 흙은 아내 여순희 작가를, 글은 잔아(김용만) 소설가를 상징하는 단어이다. 전시실에서 한 장의 사진과 마주한다. 잔아는 고인이 된 소설가 박완서와 평론가 김윤식 서울대 교수와 나란히 벤치에 앉아 있다. 세 사람의 등 뒤로 붉은 단풍나무가 서 있는 것을 보니 때는 늦가을이다. 고 김윤식은 생전에 잔아의 문학성을 높이 평가해주었다. 세계문학기행을 받고 작가에게 보낸 짧지만 긴 울림을 주는 편지가 사진과의 사연을 감동적으로 연결해 준다. 김윤식은 폭풍의 언덕편에서 공감을 표시하며 자신의 감상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오래전 저도 이곳에 들러 제법 긴 기행문을 쓴 바 있었소. 모든 것이 흘러가는 것. 세월 속에 문학이 살아 있음을 실감하고 있소. 편지 끝에 언제가 김사백의 그 박물관을 구경하겠다고 했던 김윤식 교수는 약속대로 소설가 박완서와 함께 잔아박물관에 들렀던 것이다. ■ 애나는 잔아의 분신이다 잔아 김용만 작가의 안내로 박물관을 둘러보다 떠올린 단어는 열정이다. 2020년 9월에 펴낸 잔아의 장편소설 애나(원제 미친 사랑)는 신문에 4년 동안 연재했던 것이다. 연재하면서 박물관 홈페이지에도 함께 올렸다. 2014년 6월에 올린 1회분의 조회 수는 1128회, 12월에 올린 마지막 91회의 조회 수는 1078회다. 신문지면과 인터넷으로 동시에 독자들과 만났던 작품이다. 범죄면에서는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잔인하다. 소설 미친 사랑의 첫 구절이다. 경찰전문학교 수사학 강의실의 풍경이 생생하다. 작가의 특별한 이력을 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젊은 날 그는 범죄현장을 수사했던 경찰관 경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박물관에 진열된 애나의 책 표지에 어떤 소설인지를 짐작케 하는 문구가 실려 있다. 사랑에 미친 광녀와 순정한 경찰관 출신 작가의 기구한 악연이 제3공화국 격동기의 수많은 사건들과 뒤엉킨 체험소설, 연재 중 엄청난 화제를 모았던 문제작! 여든 작가의 놀라울 만큼 단호하고 도발적인 말이 이어진다. 행복은 너를 타락시킨다! 악연의 뜻은 인연 자체에 대한 부정이었다. 찢어버리고 태워버리고 아주 없었던 걸로 하얗게 표백해 버리고 싶은 부정의 추억. 문학평론가 우찬제는 애나에서 인간의 숙명과 비극을 읽었다. 애나는 때로는 아프로디테를 닮은 뮤즈처럼 보이고 때로는 그 그림자인 팜므파탈처럼 보이기도 한다. 욕망의 미끄러짐이라는 숙명으로 인해 인간사의 비극은 얼마나 다채롭게 연출될 수 있는지 하는 문제들에 대해 여러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박물관 전시실에서 이 소설의 전신(前身)인 인간의 시간에 얽힌 사연을 찾을 수 있는 신문기사가 있다. 인간의 시간은 출판 당시 중앙일간지에 빠짐없이 소개될 정도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동아일보에 한가위에 읽을 만한 책으로 인간의 시간을 소개하고 있는데, 함께 소개된 국내 작가의 소설책은 깊은 슬픔(신경숙), 한 말씀만 하소서(박완서), 은어낚시통신(윤대녕)이다. 내친 김에 기사의 일부를 보면 김용만씨의 장편 인간의 시간은 한 여성의 이루어질 수 없는 비련을 그린 연애물이다. 우리 문단에서 드물게 보는 경찰출신 작가의 작품답게 한 형사의 생활을 통해 수사 일선의 다양한 풍경들이 묘사된다. 더불어 굴욕외교와 삼선개헌 반대시위, 김신조 사건 등 60~70년대의 굵직한 사건들이 흑백사진처럼 등장해 읽는 맛을 더해준다. 애나는 작가가 가장 애정을 쏟았던 작품인 셈이다. 새삼 작가의 얼굴을 본다. 열 살은 젊게 보이지만, 작가의 나이는 올해 여든이다! 그는 여전히 현역 작가이다. ■ 아름다운 인연과 특별한 사연을 만나는 공간 잔아 김용만의 문학관이 잘 드러나는 세계문학 기행은 1층 전시실에서 작가들의 흉상과 함께 만날 수 있다. 불멸의 작품을 남긴 작가들의 집필실과 그들이 살았던 집을 찾은 잔아의 사진과 관련 글이 걸려 있다. 그 아래에 전시된 아내 여순희 작가가 흙으로 빚은 해당 작가의 테라코타 흉상은 남편 잔아의 글과 조화를 이룬다. 1960년대 최고의 소설가로 꼽히는 김승옥의 친필원고도 인상적이다. 박물관을 방문한 김승옥은 자신이 외우고 있던 무진기행의 도입 부분을 직접 써서 남겼다는 것이다. 시인 박두진, 고은, 황동규, 소설가 최인훈, 최인호, 이문열 같은 문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은 작가의 폭넓은 인간관계를 잘 보여준다. 제1전시실 한국문학관은 우리나라 근현대 문학의 흐름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희귀본 서적, 한국을 대표하는 문인들의 사진과 육필원고가 전시되어 있다. 작고 문인들은 물론 김연수, 문태준, 함민복 같은 젊은 시인과 작가의 흉상도 전시되어 있다. 책으로 만났던 친숙한 작가들이 생생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제2전시실 세계문학관은 아이들에게 높은 이상과 지성의 정신을 길러주기 위해 대표적인 국내 작가는 물론 도스토예프스키, 헤밍웨이, 카프카, 빅톨 위고, 스타인벡, 에밀리 브론테, 찰스 디킨스 등 세계 문호들의 정신세계를 체험하도록 꾸며져 있다. 제3전시실은 어린이문학관이다.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아동문학의 다양한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다. 윤석중, 권정생 같은 아동 문학가들의 사진과 함께 동화책 속 이야기 장면들이 벽화로 꾸며져 있다. 한국 전래동화 속 이야기를 테라코타로 재현한 것도 재미있다. 잔아박물관은 어린이의 관람을 특히 환영한다.?김작가는 어린 시절에 문학을 가까이해야 하는 까닭을 이렇게 들려준다. 세상사는 수리적이고 논리적인 이성적 판단보다도 신비나 환상같은 감성적 느낌으로 해결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입니다. 세르반테스, 괴테, 헤밍웨이, 도스토예프스키, 셰익스피어?같은 대 문호들의 이름만 외우게 해도 어린 정신에 엄청난 문화충격을 주게 됩니다. 평론가들의 주목을 받고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잔아 김용만의 작품은 TV와 라디오 방송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첫 소설집인 늰 내 각시더(실천문학)은 KBS 단막극으로 방송되었고, 독서신문에 연재했던 장편 능수엄마(서정시학)는 KBS라디오 일일연속극으로 제작되었다. 앞에서 소개한 대로 그와 특별한 인연을 맺은 문학평론가 김윤식의 해설을 달고 출판된 장편 칼날과 햇살(중앙M&B)은 이청준, 김화영, 정과리 추천을 받아 동인문학상 심사작품에 선정되었던 작품이다. 이 작품은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금으로 일본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박물관은 이처럼 작가의 작품과 직접 관련된 것은 물론 초등학교 졸업사진과 첫 월급봉투까지 전시하고 있어 80년 거친 세월을 헤쳐 온 한 인간의 역정을 드라마처럼 감상할 수 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서 가까운 잔아박물관의 주변은 풍광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다. 잔아문학관을 들렀다 근처에 있는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도 함께 둘러보면서 만추의 정취에 빠진다면 가을이 떠나가도 아주 서럽지는 않을 것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0 박물관 미술관 다시보기] 이천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의 설립자 한영제 장로의 아호는 향산(香山)이다. 향산은 구약성서 아가서 4장 16절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에서 비롯되었다. 향산은 생전에 펴낸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2004) 도록 간행사에 박물관을 설립한 뜻을 이렇게 밝혔다. 역사는 향기입니다. 오래된 서책이나 골동품을 다루다 보면 그 특유의 냄새를 맡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도 역시 향기입니다. 한반도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기독교 신앙과 역사의 향을 찾아내 그것을 오늘에 되살려 많은 사람이 그 향을 맡고 용기와 지혜를 얻도록 돕기 위해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은 설립되었습니다. 향산은 2001년 11월, 이천시 초지리에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760㎡)을 개관했다.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유물은 18세기부터 625전쟁 전후까지 기독교 문화와 선교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들이다. 해방 전에 출판된 기독교 고문헌 5천여 점을 비롯하여 한국종교, 한국 민족운동 등 도서자료와 교회사 관련 사진, 작고 목회자들의 유품, 선교사 관련 마이크로필름, 성가 레코드판 등 10만여점의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기독교역사박물관은 1955년에 설립한 기독교전문출판사인 기독교문사를 뿌리로 삼고 있다. 기독교문사는 1985년에 펴낸 기독교대백과사전(전16권)으로 한국출판문화대상을 수상하고, 기독교대연감을 펴낸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기독교문사 대표 한영제 장로는 기독교백과사전을 편찬하면서 한국 교회사와 일반 종교사, 민족 운동사, 향토사와 관련된 귀중한 자료를 모았다. 하나둘 사라지는 귀중한 자료를 보존해 후대에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게 된 향산은 청계천 고서점과 일본의 고서점을 다니며 관련 사료를 수집했다. 그가 수집한 자료 중에는 국내 유일한 귀중본들도 많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외벽에 걸린 현수막에는 3ㆍ1운동 이후 기독교 민족운동이라는 주제와 이승훈, 조만식, 차미리사 세 분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이승재 학예사 안내로 박물관을 둘러보며 한국 기독교의 역사와 만나는 시간은 행복했다. 박물관 마당에는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마당에 평양 대부흥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2007년에 축소 복원한 평양 장대현교회가 있다. 교회 건물이 ㄱ자로 지어진 배경이 흥미롭다. 1907년 당시 평양 장대현 교회 출입문도 남녀 두 개였다. 예배를 볼 때도 커튼을 쳐서 남녀를 쳐다보지 못하게 했을 만큼 당시의 문화는 고루했다. 한국 교회는 유교 문화에 길들여진 한국의 문화를 크게 변화시켰다. 그 중의 하나가 한글 사용이다. ■ 한글과 기독교 한국기독교가 한글의 발전과 보급에 끼친 공헌은 상상 이상이다. 한글은 19세기 말 기독교를 만나면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2001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린 개관기념전 주제가 기독교와 한글이다. 19세기 천주교 박해의 기록인 척사윤음은 한글로 쓰여진 유물이다. 한국 기독교 140년의 역사를 오롯이 품은 성경과 한글도 한몸이다. 이수정이 한글로 번역한 마가의 전한 복음서 언해는 한글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라면 기억해야할 책이다. 1882년 신사유람단 일행으로 일본 도쿄에 갔던 이수정은 기독교에 입교하고 세례를 받은 후 미국성서공회의 지원을 받아 성경번역을 시작했다. 1884년부터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기 시작한 그는 이듬해에 신약 마가젼 복음서 언해를 출판했다.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이수정이 번역한 책을 수정하여 마가의 전한 복음서 언해를 펴냈는데, 이 책의 원본이 전시되어 있다. 초창기 한국 기독교는 한글의 발전과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1896년에 창간한 순한글 독립신문을 제작하던 주시경과 벗이었던 상동교회 목사 전덕기는 한글 보급의 숨은 주역이다. 주시경은 전덕기의 주선과 후원으로 상동교회와 황성기독교청년회를 비롯한 여러 기관에서 청년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던 것이다. 주시경이 지은 한글 문법책 말의 소리와 양계초가 지은 월남망국사를 번역한 책은 물론 전덕기가 한글로 번역한 기도서 일일의력도 전시되어 있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은 기독교의 한글사랑을 알려주고 있다. ■ 민족의 운명과 함께 한 한국기독교의 발자취 현관에 진열된 기왓장에는 특별한 사연이 숨어 있다. 민족시인 윤동주의 집터(연변 용정)에서 발굴한 기왓장인데, 십자가 문양이 또렷하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원이 명동촌에 큰 기와집을 지을 때 특별히 주문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박물관을 둘러보는 시간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한국기독교의 역사는 물론 한국근대사를 생생하게 알려주는 특별하고 흥미로운 유물을 자주 마주했기 때문이다. 이상재, 안창호, 윤치호가 운동장에서 나란히 서서 달릴 준비를 하고 있는 사진과 황성기독교청년회 하령회 사진은 흥미로운 역사를 알려주었다. 1910년 6월 한국 최초의 기독교 학생 여름 수양회가 열린 곳은 서울 근교의 사찰 진관사라는 사찰이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학생 46명과 연사 16명이 찍은 곳은 대웅전 앞이다. 사진 속에는 월남 이상재와 현순 같은 저명한 민족운동가의 얼굴도 찾을 수 있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은 매년 기획 전시회를 통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귀중한 자료를 공개해 왔다. 2001년부터 2020년 현재까지 개최한 특별전시회의 주제를 보면 소장 유물이 무엇이며 지향점이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회 기독교와 한글(2001), 2회 두고 온 교회 돌아갈 고향(2002~3), 3회 한국 초대교회 신앙생활(2003~4), 4회 민족과 함께한 복음선교 120년(2004~5), 5회 한국기독교 신앙 위인 120인(2005~6), 6회 사랑의 빛, 사회봉사의 향기(2006~7), 7회 옛 사진에서 읽는 새로운 역사(2007~8), 8회 푸른 눈에 비친 백의민족(2008~9), 9회 민족과 함께한 교육선교의 발자취(2009), 10회 민족의 횃불을 든 기독여성(2011), 11회 해방 후 기독교인들의 건국 활동(2012), 12회 엽서에 실린 복음과 선교 소식(2013), 13회 사진에 실린 교육 선교의 발자취(2014), 14회 종교개혁이 연 새 세상(2017~8), 15회 경기이천 기독교 1919(2018~9), 16회 백 년의 기억, 천년의 평화-북한 지역 3ㆍ1운동의 역사(2019), 17회 물산장려운동 100주년 기념 3ㆍ1운동 이후의 민족운동(2020)이다. ■ 초대 기독교 정신의 회복 대한민국의 출발점이 된 3ㆍ1만세운동에 기독교인들이 조직적으로 적극 참여한 일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일제가 화성 제암리교회를 비롯해 70여개의 교회를 방화하고 파괴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1919년 당시 한국의 인구가 2천만이었는데 이중 기독교인은 20만이었다.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중 기독교인이 16인이다. 1919년 6월30일까지 교인 2천190명과 교역자 151명이 구속되었다. 일경에 체포되어 죽임당하고 지독한 고난을 겪은 투옥자의 20%가 기독교인이었던 것이다. 일제는 일찍부터 교회를 민족운동의 소굴로 지목했다.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조직한 신민회가 이를 잘 말해준다. 신민회 출신인 김구, 안창호, 이동휘, 이승만, 이회영, 신채호, 현순 같은 이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민족운동에 전념했다. 임정 요인과 무장투쟁에 앞장섰던 독립군의 상당수도 기독교인들이다. 만세운동 이후 국내에 있던 기독교인들은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박물관은 이와 관련된 희귀한 유물과 다양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은 선교 초창기에 약자의 편에 서서 낡은 문화를 변화시키고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던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다. 기독교의 역사를 통해 한국 기독교의 방향이 어느 곳을 향해야 할지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 시작은 한국의 기독교가 초대 기독교의 정신을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0 경기도 박물관ㆍ미술관 다시보기] 27.부천 ‘로보파크’

우와! 대여섯 살의 꼬마 관람객들과 함께 자리한 어른들도 탄성을 연발한다. 사람 모습의 로봇이 어느새 자동차로 변신했다. 마스크를 착용해도 아이들의 환한 표정은 보기 좋다. 이번엔 자동차가 사람 모습으로 변신한다. 아이들의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는 이 로봇의 이름은 휴머노이드 변신로봇이다. 이번에는 파란 눈을 깜빡이는 로봇이 마술 쇼를 펼친다. 거리두기로 의자 가운데를 비우고 아이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네 손가락을 가진 파란 눈의 로봇이 마술을 부린다. 로봇이 앞에 놓인 컵을 들어 컵 안이 비었음을 보여준 뒤 컵을 내려놓았다가 다시 컵을 들자 그 속에 공이 들어 있다! 로봇의 연기가 제법이다. 로봇이란 말은 체코의 극작가 카렐 차페크가 1902년에 쓴 희곡 로섬의 만능 로봇에서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오늘날 로봇은 외부 환경을 스스로 인식하고 상황을 판단하여 자율적으로 동작하는 기계장치를 말한다. 로봇은 우주 탐험에 활용되고 있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화성에 보낸 탐사로봇 로버(Rover)는 화성에서 관찰한 데이터를 수집하여 지구로 전송하고 표본을 획득한 자료를 분석하고 간단한 결정도 스스로 내릴 수 있는 첨단 로봇이다. 산업 현장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인간이 하던 일을 로봇이 대신하고 있다. 조립 공장에서 리벳을 박고 용접하고 자동차 차체를 도색한다. 자동차 생산라인에 투입된 산업용 로봇들은 용접하거나 구멍을 뚫는 등 단조롭게 반복되는 작업을 쉬지 않고 정확히 수행한다. 로봇은 방사성 물질이나 유독 화학 물질을 취급할 때 방호복을 입지 않고도 작업하는 것이 가능하다. 인간이 작업하기에 가혹한 환경에 로봇이 투입되고 있다. 청소로봇을 비롯해 로봇은 어느새 우리 일상으로 파고들었다. 로봇은 가정으로도 확대될 것이다. 장애가 있거나 노령으로 인해 체력이 약해져 있는 사람들이 가족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독립하여 혼자서 생활하도록 돕는 로봇의 출현도 멀지 않았다. ■ 미래로봇 인재 양성의 산실 2005년 12월에 개관한 로보파크는 부천테크노파크 4단지 401동 로봇산업연구단지에 소재하고 있다. 1, 2, 3층에 2천850㎡(850평) 규모의 전시관에는 부천에서 연구개발을 통해서 만들어진 100여점의 신형 로봇을 보고 체험할 수 있다. 신세대들에게 로봇에 대한 꿈과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설립된 국내최초의 로봇전문 과학박물관인 로보파크는 미래로봇 인재를 양성하는 로봇전문교육을 실시하는 곳으로도 널리 알려진 곳이다. 매년 치러지는 로봇경진대회와 로봇문화축제에 국내외의 로봇 마니아들이 몰려들고 있다. 로보파크를 찾는 관람객이 연간 6만명에 이를 정도로 반응이 좋다. 부천시는 기초 지자체로선 처음으로 로봇산업을 지역특화산업으로 육성하기 시작하여 현재 로봇생산량의 10%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로보파크가 자리 잡은 이 건물에는 16개의 로봇 기업과 13개의 연구기관이 입주해 있다. 이처럼 부천은 선진 로봇기술을 가진 첨단 도시의 위상을 갖고 있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 부천산업진흥재단, 경기 TP, 전자부품연구원 등이 참여하여 2004년부터 2009년까지 5년 동안 지능형로봇산업의 기반조성을 위한 차세대 지능형 로봇인력양성사업이 진행되었다. 국내 최초 지능형로봇 상설전시관인 부천로보파크는 로봇산업을 홍보하고 미래 인재육성에도 힘을 쏟고 있다. 이처럼 부천시는 로봇과 함께 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혁신도시로 자리 잡았다. 로봇은 인공지능(AI)과 함께 우리 사회의 변화를 선도하고 있다. 부천 로보파크는 이러한 시대의 변화와 흐름에 따라 로봇기술을 제일 잘 활용하는 국가를 실현하기 위한 로봇활용 저변확대와 미래 로봇공학자 육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김미영 로보파크 차장은 로보파크의 교육적 역할을 특히 강조했다. 한해에 5천여명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이곳에서 로봇 관련 교육을 받는다. 로봇아카데미는 정부(교육부)로부터 로봇관련 진로체험교육기관으로 인증된 프로그램으로 국내 최고 수준이다. 현재 운영하고 있는 교육으로는 박물관협회가 주관하는 2020 길 위의 인문학 사업-로봇 인문학을 만나 윤리를 찾다!와 경기도 부천교육지원청에서 주관하는 경기 방과 후 마을학교 프로그램이 있다. 한편 박물관에서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로파스(동아리)와 전시연계 교육이 있다. 특히 올해 12기를 맞은 로파스 교육은 로봇조립과 프로그래밍 같은 심화교육을 중심으로 진행하는 대표적 교육 사업이다. 김 차장은 그 성과를 이렇게 요약했다. 로보파크에서 진행한 로봇 교육에 참여했던 아이가 카이스트에서 로봇을 전공하는 대학생으로 성장하여 다시 찾는 모습을 보면서 큰 보람을 느낀다. 로보파크는 매년 로봇댄스대회와 휴머노이드 대회를 열고 있다. 2015년에 열린 제17회 국제로봇올림피아드 세계대회는 20개국 1천200명이 참여했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이 행사는 부천을 로봇도시로 국내외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대회를 열지 못했지만 내년에 열릴 제4회 대회는 13개 종목에서 1천100여명이 참가할 예정이다. 로봇문화축제, 판타지아 과학페스티벌 같은 과학관련 행사를 동시에 열 계획이다. 2005년부터 매년 어린이날에 로봇과 함께 가족단위로 어우러지는 부천 로보파크 어린이날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다. 전국어린이 로봇그림 그리기대회와 바람개비 만들기같이 가족이 함께 즐기며 참여할 수 있는 행사가 진행된다. 로보파크 로봇교육생들로 구성된 로파스 봉사단의 휴머노이드 댄스 같은 다양한 공연이 펼쳐지는 흥겨운 마당이다. 로보파크에서는 연 2회의 특별기획전을 통해 과학과 문화가 융합된 체험형 전시를 진행하고 있다. 올해는 2020 지역문화예술 플랫폼 육성사업의 하나로 특별기획전인 로봇과 함께하는 지역 상생 프로젝트-로봇, 시장에 가다!를 9월부터 10월21일까지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전시했다. 첨단산업의 대표 주자인 로봇을 전시하는 부천 로보파크가 부천시내의 15개 전통시장과 함께 한 참여형 전시였다. ■ 우리 삶을 변화시킬 로봇 로보파크 1층에 들어서면 안내 로봇 로피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4D 영상관에 들어서자 원숭이 로봇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인데 4차원 영상 장면에 따라 관람석이 앞뒤로 움직이고 바람도 나오는 좌석에 앉으니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입체 영상이 눈앞에 펼쳐진다. 2층 제2전시관에서는 로봇의 역사부터 원리, 현황, 변화 과정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로봇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상상할 수 있고 로봇이 어떻게 만들어지며 인간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는지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로봇을 직접 작동시켜 볼 수도 있다. 로보파크 체험실에서는 댄서 로봇 로보 노바와 화가 로봇 픽토, 얼굴 로봇 미스터 페이스도 만날 수 있다. 미래에는 오감을 갖춘 로봇의 출현할 것이다. 아바타 로봇, 실버 케어 로봇, 가사 로봇, 개인화 서비스 로봇, 자율주행 비행 로봇도 속속 출현할 전망이다. 다리, 빌딩, 터널, 철도, 공항, 항만처럼 사회 기반시설물의 유지보수와 관련한 안전점검을 로봇이 수행하게 될 것이다. 이미 의료분야에서는 원격수술 로봇이 활용되고 있다. 인간의 손보다 훨씬 정교하게 수술을 진행한다는 소식을 심심치 않게 접하는 시절이다. 이제 곧 농장이나 건설 현장에 투입할 로봇도 등장할 것이다. 4년 전, 인공지능 알파고와 바둑 천재 이세돌과의 대결은 우리에게 커다란 충격을 던져주었다. 미래학자들은 대한민국이 광복 100주년이 되는 2045년에는 인간지능과 인공지능이 비슷해지는 과학기술발전의 대전환을 이룰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의 보편화도 그리 멀지 않았다는 전망이다. 로봇의 현재와 미래를 예측해보는 시간은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로봇에게 인간의 생존이 위협 받을 우려가 없지 않다. 부작용을 경계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문명의 이기를 적절히 활용하는 방향으로 로봇이 진화해야 될 것이다. 로보파크에서도 이런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다. 박물관협회가 주관하는 2020 길 위의 인문학 사업의 주제가 바로 로봇, 인문학을 만나 윤리를 찾다!이다. 로봇과 인공지능의 연구에 인문학적 교육을 빼놓지 않는 까닭이다. 김준영(다사리행복학교 행복지기)

[2020 경기도 박물관ㆍ미술관 다시보기] 26.양평군립미술관

■세 번 놀라다 양평군립미술관(관장 배동환)은 군립이라는 선입견을 시원하게 벗겨준다. 미술관 초입부터 신선한 발상으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미술관 입구에 예쁘게 색칠한 세 개의 컨테이너는 작은 미술관이다. 지역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여 지역민과 관람객들을 예술의 세계로 인도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수행하는 공간인 셈이다. 알루미늄주물에 채색한 백재현 작가의 그들이 남긴 흔적 작품. 홍보문화기획팀 이승근 선생의 안내로 미술관을 둘러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개관부터 현재까지 기획 전시한 내용이 무엇인지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책자들로 빼곡한 책장이 발길을 붙들었다. 미술관이 만만치 않은 이력을 한눈에 짐작할 수 있다. 빨강과 파랑 원색으로 칠해진 전시장 벽면은 작품에 시선을 집중하게 하는 마력을 가졌다. 흰색이 주는 안정감 대신 원색이 전달하는 강렬한 효과가 놀랍다. 매번 전시할 때마다 공간 분할을 새롭게 하여 이전에 방문한 관람객들에게도 새로운 기분이 들도록 배려합니다. 고정된 것처럼 인식되는 대상을 색과 분할로 변화를 주어 새로운 공간으로 만드는 발상이 참신하다. 밝고 쾌적한 지하 전시실을 둘러보고 2층 전시실로 올라가는 복도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가슴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이 어디선가 본 듯한 중년 사내를 닮았다. 철망으로 만들어진 몸통 속에 손금이 생생한 커다란 손이 있고, 심장이 있어야 할 곳엔 주먹만 한 돌이 들어 있다. 작가의 의도가 머릿속에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 사내는 아침에 거울 앞에서 본 사내다. 그 뒤로 예쁜 날개가 달린 인조인간이 서 있다. 우리 시대를 풍자하는 것일까. 역시 철로 된 여인은 차갑다. 모서리에는 안내를 돕는 직원이 단정하게 서 있다. 전시 작품을 해설하는 영상이 상영되고 있어 잠시 발길을 멈춘다. 섬세한 배려가 엿보이는 장치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우스꽝스럽게 생긴 두 남자상을 지나 2층에 들어서면 전시공간이 펼쳐진다. 포근한 느낌을 주는 신화적인 그림과 잔잔하게 일렁이는 물살에 햇볕이 반사되는 것 같은 세련된 그림 한 점이 붉은 벽면에서 사내에게 말을 걸고 있다. 그 옆에는 파란 벽에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봄날의 따뜻한 풍경을 표현한 그림들에서 계절마다 달라지는 시간의 흐름을 되새겨 본다. 전시실 곳곳에는 의자가 놓여 있다. 마음에 드는 그림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내면과 말 걸기를 시도해 보라는 미술관의 배려일 듯싶다. ■문턱이 낮은 행복한 미술관 세상에, 매년 8번이나 기획전을 열고 있다고요? 이처럼 수준 높은 기획 전시를 매년 여덟 차례나 열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 궁금증은 이형옥 학예연구실장을 만나면서 풀린다. 미술관 직원이 아홉 명뿐이지만, 모두가 자가가 맡은 분야의 전문가이면서 그 이상의 역할을 해내고 있습니다. 그럴 것이다. 전국 최고 수준의 미술관으로 인정을 받는 비결은 미술관 구성원들이 부단히 발품을 팔고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며 노력해야 가능할 것이다. 최신의 미술 동향이 어떤지, 어떤 작가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꼼꼼하게 파악하지 않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인구 12만의 친환경 도시 양평은 인구비례 예술인이 가장 많이 활동하고 있는 문화예술의 고장이다. 수려한 자연과 서울과 가까운 소도시라는 지리적 환경이 작가들을 양평으로 불러들였다. 양평을 문화예술의 고장으로 각인시킨 공로의 절반 이상은 양평군립미술관이 아닐까. 양평군립미술관은 2011년 12월에 개관하여 다양한 프로그램과 수준 높은 현대미술기획과 창의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2019년 말에 누적관람객수가 130만을 넘어섰을 정도로 사랑을 받고 있다. 양평군립미술관은 봄, 여름, 가을, 겨울마다 특별기획전을 열고, 다양한 기획전시를 열고 있다. 앞에서 소개했듯이 연간 8개의 전시기획과 전시연계 창의교육 및 문화공연, 별별 아트마켓은 미술관을 상징하는 프로그램이다. 양평군립미술관이 이룬 성과는 눈부시다. 짧은 기간임에도 2014년과 2015년에 경기도 내 공사립 미술관 187개 중 평가사업에서 최우수 기관으로 선정되었고 2018년에는 제14회 자랑스러운 박물관인 큐레이터상을 수상했다. 2019년과 2020년 연속으로 문화체육관광부 문화가 있는 날 지역특화프로그램이 선정된 동네방네 예술가 사업은 지역의 작가들이 지역주민과 어린이들에게 큰 인기를 받은 프로그램으로 2020년에도 재선정되어 현재 진행되고 있다. 양평군립미술관은 미술의 초보자도 접근하기 쉽고 관람하기 자유로운 낮은 문턱의 미술관을 지향하며 다시 오고 싶은 미술관, 생각하는 미술관이 되고자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양평군립미술관은 기획 전시의 비중이 매우 크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작가를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는 미술 작가를 파악하고 작품 경향과 흐름을 분석하여 매번 알찬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이형옥 학예연구실장은 양평군립미술관을 국내 최고수준으로 끌어올린 주역이다. 세종문화회관 전시팀장과 성남아트센터에서 미술 전시를 담당했던 경험을 가진 그는 양평군립미술관의 지역적 특수성을 살려 9년째 미술관을 지휘하고 있다,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그의 전시 기획력이 탁월한 것은 입증되었다. 우리나라의 주요한 공공 미술관의 예산과 인력에 비교하여 양평군립미술관이 펼쳐온 기획전시의 풍부하고 충실한 내용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그가 미술관 직원들과 함께 펼쳐낸 격조 높은 전시 기획력은 관람객들의 발길을 붙들고, 이들을 다시 불러들이는 강력한 힘이다. 이 실장은 휴관일이면 서울 인사동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주요한 전시를 찾아 작품을 만난다. 좋은 기획을 위해 헌신하고 시간을 아낌없이 투자하는 것이다. ■다시 찾는 미술관 양평군립미술관은 양평지역 주민이나 여행객들이 쉽게 찾을 수 있는 지리적 환경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미술관을 다시 찾는 것은 미술관의 전시내용이 결정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양평군립미술관은 특별하다. 대중들은 현대미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양평군립미술관은 대중들의 막연한 두려움을 없애도록 친근한 작품을 위주로 전시를 구성하고 있다. 관객의 반응을 세밀히 살펴 무엇을 보완하고 무엇을 빼야 할 지도 고민한다. 한해에 기획전을 8회나 연다는 것은 정말 성실하고 깊은 애정이 없으면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전시회를 하나 기획하려면 준비하고 구성하는데 걸리는 시간과 노력과 비용과 정성은 실로 엄청나다. 양평군립미술관이 벌이고 있는 전시연계교육도 주목된다. 주말어린이창의예술학교를 비롯하여 특별교육, 맞춤형교육, 문화가 있는 날 교육, 별별 아트놀이, 미술관 탐험대에 6,046명이 참여했다. 찾아가는 창의예술교육, 찾아가는 예술공연 등 대중과 만나는 작업도 적극 벌이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문화가 있는 지역특화 프로그램인 동네방네 예술가는 찾아가는 예술가, 작가의 작업실, 꼬물꼬물 예술놀이, 미술관 해프닝, 미술관음악회 등에 지역작가와 주민이 신나게 어울리는 문화공동체를 만들었다. 이처럼 양평군립미술관은 특별한 기대를 갖지 않고 방문한 군민이나 여행자들에게 지역미술관이란 편견을 깨고 현대미술의 재미와 역할을 느낄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지역 정체성을 든든하게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양평지역작가 아카이브를 구축하면서 작고 서양화가 하인두를 비롯해 서예가 여원구, 조각가 정관모, 한국화가 류민자 등 15인의 작가를 심도 있게 연구하고 전시한 이들의 자료를 영구 소장하고 있다. ■희망 꿈, 미술관의 장래 양평군립미술관의 성공은 대도시에 비해 열악한 환경에 있는 전국 시군의 미술관을 자극하는 선한 영향력을 끼쳤다. 지역에서도 참신한 기획과 열정으로 대도시 못지않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문화경영의 성공사례를 선보인 것이다. 이형옥 예술감독은 미술관이 거둔 성과를 직원들에게 돌렸다. 그동안 거둔 성과는 우리 미술관이 추구하는 미술정책에 동의하고 헌신하는 직원들의 혼이 담긴 열정이 만들어낸 결과물입니다. 양평군립미술관은 공간 분할과 색채의 변신으로 이전에 미술관을 찾았던 사람들에게도 새로움을 선사하는 곳이다. 가을이 절정을 향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지친 심신을 충전하는 데는 호젓한 여행이 좋다. 다행히 1단계로 조정되었으니 국내여행은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양평은 가을여행지로 최적격이다. 양평 여행 중에 양평군립미술관을 꼭 찾아보길 바란다. 기대 이상의 기쁨을 안겨줄 것이라 확신한다. 여행과 미술관 관람은 답답한 가슴을 씻어주고 엉킨 머릿속을 밝혀줄 묘약이 될 것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 사진=윤원규기자

[2020 경기도 박물관ㆍ미술관 다시보기] 25.여주박물관

여강으로 불리는 남한강은 여주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다. 아름다운 여강을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는 여주박물관은 힘차게 달리는 검은 말(驪馬)이다. 2017년 한국건축가협회상을 수상한 신관 여마관은 마암(馬巖)의 전설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강 건너 영월루 아래 절벽에 있는 바위 마암에서 누런 말(黃馬)과 검은 말(驪馬)이 나왔다는 전설이다. 여주, 강에 새긴 역사라는 여주박물관 소개 글이 암시하듯 남한강과 여주는 한몸이나 다름없다. 1997년에 여주군향토사료관으로 출발한 여주박물관은 2016년에 여마관(신관)을 신설하면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여주지역의 출토유물이 한자리에 모아지게 된 것이다. 여주박물관은 지역의 역사를 알려주는 풍부한 유물 관람과 다양한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 남한강과 함께한 여주의 유구한 역사를 한눈에 신관인 여마관 1층 로비에 들어섰다. 내부 인테리어도 외벽 못지않게 세련되어 보였다. 박보경 학예연구실장이 특별전에 관심을 가지고 방문한교육장에게 안내하는 동안 로비에서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의 비신(보물 제6호)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정갈한 해서체의 글씨가 마치 어제 새긴 것처럼 선명하다. 비신이 박물관으로 돌아오게 되기까지의 흥미로운 과정을 읽으며 박물관 사람들의 수고와 보람을 생각해 보았다. 보름 전 전화로 약속을 잡으면서 국립민속박물관과 함께 특별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었다. 특별전을 개관하게 되었으니 다행입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박 학예연구실장은 방문객을 반갑게 맞으며 2층으로 이끌었다. 여주역사실 앞에서 간추린 여주의 역사를 시작으로 1시간 넘게 안내해 주었다. 입구의 연표는 여주의 역사를 한눈에 살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연양동과 흔암리 구석기와 청동기유적에서 출토된 돌도끼와 돌화살, 물고기를 잡을 때 썼던 어망추 같은 유물을 통해 여주가 아주 옛날부터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고장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매룡동과 연양동에서 발굴한 호박구슬과 회청색경질바리에서 삼국시대 사람들의 예술적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연꽃 모양의 잔과 국화와 학 문양을 새긴 접시와 대접은 고려인들의 예술적 감각이 잘 표현된 유물이다. 여주는 도자의 고장이기도 하다. 천년 세월의 여주도자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중암리 고려백자가마터에서 발굴된 숱한 조각들은 고려인들의 멋과 취향을 알려준다. 고려시대에 선종사원으로 번창했던 고달사와 원향사, 현재까지 사세를 유지하고 있는 신륵사는 여주가 불교의 문화를 간직한 고장임을 알려준다. 원향사지에서 발굴된 동종 청동소종에서 통일신라시대의 품격을 엿보게 된다. 여주는 명문가가 많은 고장입니다라는 관계자의 말처럼 12대에 9명의 정승을 배출한 남양 홍씨, 왕비 둘을 배출한 여흥 민씨, 영의정과 대제학을 여럿 배출한 해평 윤씨가 여주에 터를 잡았던 가문들이다. 임진왜란 때 남한강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원호 장군과 효종이 북벌을 추진할 때 병조판서로 활약한 원두표를 배출한 원주 원씨 문중에서 기증한 유물이 눈에 띈다. 원두표가 신었던 가죽신의 크기가 놀랍다. 저도 처음 봤을 때 크기에 놀랐어요. 겨울에버선을 덧신고 신었기 때문에 이리 크다고 해요. 설명을 들으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관대, 시호 교지와 교지함은 보존 상태도 아주 좋다. 고장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느끼도록 선조들의 귀중한 유물을 박물관에 기증한 결정에서 명문가의 품격이 느껴진다. 익사공신 윤승길의 초상화에 얽힌 사연도 흥미롭다. 임해군의 역모를 사전에 제압한 공신들에게 광해군이 하사한 초상화로 1613년경에 그려진 것인데, 1623년 인조반정으로 모두 회수했기 때문에 이 초상화가 유일한 익사공신 초상화라고 합니다. 수백 년 세월이 흘렀지만 초상화에 그려진 조선 관료 윤승길의 눈동자와 수염이 생생하다. ■ 세종과 효종의 능을 모시고 정조가 방문하다 여주는 세종대왕의 영릉과 효종대왕의 영릉이 있는 고장이다. 두 기의 왕릉이 있는 고장이지만, 그 자부심은 어느 고장보다 높다. 역사 속의 인물 중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세종의 위엄은 여주의 유명세를 더해 주었다. 1469년 세종의 손자인 예종 임금이 여주 서쪽 북성산으로 천릉하면서 목으로 승격시키고 고을 이름을 여주로 개명했다. 약 200년 뒤에 세종의 영릉(英陵) 옆에 효종의 영릉(寧陵)을 조성했다. 효종이 서거한 지 120년이 되던 1779년에 정조가 여주를 방문했을 때 세종의 영릉 앞에서 우리나라의 예악문물은 모두가 영묘의 제도가 아닌 것이 없다면서 여주의 풍요로움을 이렇게 말했다. 본주(本州, 여주)에는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는 집안이 많이 있으므로 즐비하게 번화한 것이 서울과 다른 것이 없고 마을이 부성하고 인물이 선명한 것이 마치 저자 가운데에서 보는 것과 같으니 서울로 통하는 큰 고을이라 할 만하다 천장은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국가행사의 하나였다. 이런 까닭에 효종의 영릉 천장에 관한 절차를 그림으로 기록한 효종영릉천릉도감의궤는 반드시 꼼꼼하게 살펴야할 필요가 있다. 명성황후가 쓴 한글 편지와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책가도 병풍이 사람의 발길을 붙든다. 정조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던 책가도 병풍은 멋과 품격을 두루 지닌 문화재이다. 책을 사랑했던 왕 세종과 정조를 떠올리게 하는 유물로 그림 속에 깃든 뜻까지 새긴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여주의 의병항쟁과 31운동과 독립운동, 근현대의 교육 산업 교통 새마을운동 건설공사 등 여주의 발전과 여주 사람들의 일상을 소개한 근현대 자료실도 볼거리가 풍부하다. 현재 우리의 생활과 비교해 볼 수 있어 아이들에게 설명하기에 좋은 곳이다. ■ 여주, 영릉을 품다 구관인 황마관은 여주의 특별한 세 가지를 전시하는 곳이다. 여주 출신의 소설가, 여주 남한강의 수석, 그리고 세종대왕 영릉과 효종대왕 영릉이 그것이다. 우리나라에 대하역사소설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소설가 류주현의 고향이 여주다. 조선총독부와 대원군을 비롯한 많은 작품을 남긴 작가의 생애와 작품세계, 수집한 고미술품은 물론 문인들과 교류한 흥미로운 자료들도 만날 수 있다. 작가가 쓰던 안경과 구두까지 기증한 유족들의 갸륵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2층 조선왕릉실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 왕릉의 역사와 특징을 설명한 공간이다. 태조부터 숙종까지 역대 임금들의 글씨를 모은 열성어제어필과 다섯임금어필첩 그리고 세종대왕 영릉의 관리문서, 영릉을 지킨 참봉관련 문서 등 흔히 볼 수 없는 유물을 볼 수 있으니 영릉을 참배하기 전후에 둘러보면 좋은 곳이다. 황마관 지하층에는 남한강 수석전시실이 있다. 수석의 산지로 유명한 여주 출신의 김정식씨가 57년 동안 수집한 수석을 전시하고 있다. 황마관에는 지난 10월 12일부터 2020 K-mu seums 지역순회 공동기획전 여주, 영릉을 품다가 열리고 있다. 여주박물관은 2019년 10월 국립민속박물관의 2020 K-museums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2020년부터 국립민속박물관과 공동으로 전시를 준비했다. 국립민속박물관의 예산을 지원받아 노후화된 황마관 2층 전시실이 새로운 전시 공간으로 탄생했다. 여주의 역사와 여주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영릉이 주제다. 여주로의 천릉 이후 여주와 여주사람들의 삶이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살펴보는 흥미로운 기획이다. 1부 영릉, 여주에 오다는 왕릉이 여주로 온 과정과 변화를 살피고 있다. 여주목읍지와 영릉참봉교지 등 여주박물관 소장유물과 국립민속박물관의 윤도(輪圖), 국립고궁박물관의 국기판(國忌板) 등 타 기관 소장유물이 함께 전시하고 있다. 2부 여주, 영릉과 함께하다는 여주사람들의 삶에 자리한 두 왕릉의 의미를 보여준다. 영릉 성역화사업, 세종문화큰잔치, 세종대왕 숭모제전, 한글백일장 등 여주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과 여주시민들의 추억을 담은 인터뷰 영상을 볼 수 있다. 두 영릉과 여주사람들이 오랜 세월 맺어온 특별한 관계를 살필 수 있는 이번 기획전은 12월13일까지 열린다. 박물관 바로 옆에 8개의 보물을 간직한 신륵사가 있다. 나옹선사가 입적한 곳으로도 유명한 신륵사 부도탑에서 선사가 지은 노래를 떠올려 본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박물관 탐방을 하며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영릉이다. 세종과 효종이 잠든 영릉을 참배하고 잘 생긴 소나무숲으로 난 왕의 길을 걸으며 가을의 정취를 느껴보면 기억에 오래 남을 특별한 여행이 될 것이다. 지친 다리는 여주 햅쌀로 만든 밥을 먹으면서 풀면 좋지 않을까.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2020 경기도 박물관ㆍ미술관 다시보기] 24.여주 목아박물관

■ 목조각장 박찬수 선생의 정성과 집념 여주시 강천면 이호리에 자리한 목아박물관(관장 박우택)은 국가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장 박찬수(朴贊守) 선생의 정성과 집념으로 세워진 사립박물관이다. 1989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90년에 본관 전시관을 완성하고 목아전통공예관으로 문을 열었다가 학예연구실을 비롯한 부속 건물과 야외 조각공원을 완성한 1993년 6월에 목아불교박물관으로 정식 개관하였다. 2014년에는 목아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목아(木芽)는 초대 박물관장이기도 한 설립자 박찬수 선생의 호인데, 죽은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어 싹을 틔운다는 뜻이다. 불교 조각 공방인 목아미를 경영하던 그는 우리 전통과 불교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전국 사찰을 다니면서 문화재가 훼손되는 안타까운 현장을 보다가 불화를 비롯한 불교문화 관련 자료를 꾸준하게 수집했다. 박물관에는 박찬수 선생의 조각 작품과 수십 년간 모은 6만여점의 유물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중 2천여점이 본관 전시관에 전시되고 있다. 목아박물관은 보물을 세 점이나 소장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예념미타도량참법(보물 제1144호), 묘법연화경(보물 제1145호), 대방광불화엄경(보물 제1146호)이 그것이다. 박물관 입구 왼편에 서 있는 석조 미륵삼존불은 현대적인 조형미가 느껴지는 석조물이다. 놀이 질 저녁 무렵에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건물 이름이 모두 한글이다. 여주에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영릉이 있다는 사실에서 그 까닭이 연상되지만 멋진 결정임에 틀림없다. 큰 말씀의 집은 박찬수 선생이 조각한 500여개의 목조 나한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법당이다. 석가모니부처님과 불경을 넣어둔 윤장대, 수미단, 닫집과 비천상이 사람의 발길을 붙든다. 오백나한 모두가 각기 다른 몸짓과 얼굴을 가졌다니 나한의 표정만 살펴도 재미있을 것 같다. 네 기둥에 달린 한글 주련도 눈길을 잡는다. 마음이 부자인 사람, 베풀 줄 아는 사람, 가정이 행복한 사람, 언행일치하는 사람은 가슴에 새겨야 할 복된 말씀이다. ■ 아름다움과 성스러움, 깨달음이 공존하는 공간 전시관 건축이 이국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인도의 석굴 사원을 모방했기 때문이다. 붉은 벽돌을 가로 세로로 쌓은 박물관 외벽이 아름답다. 서울 혜화동에 있었던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건물이 헐릴 때 나온 벽돌을 재활용한 것이라니 이 또한 윤회라 하겠다. 입구에 달린 밝고라는 현판은 무슨 의미가 담겨 있을까. 불교의 가르침이 해탈이니, 신심과 정성으로 조각한 작품을 보며 눈과 마음을 맑게 씻어 밝아지라는 뜻이 아닐까. 본관인 전시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이다. 둥근 기둥 형태의 계단이 독특한데, 이는 불교의 불(佛)법(法)승(僧) 삼보를 형상화시킨 것이라 한다. 전시관 내부는 전통 한옥의 창문과 틀을 응용하여 불교의 현대화와 융합을 도모하려는 높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전시관 3층 목조각전시실은 목조각장 박찬수 선생의 작품 세계를 한눈에 보여 주는 곳이다. 장인의 50년 작품 활동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대표 작품 150여점이 전시돼 있으니 오래 머물러야 할 곳이다. 일본 교토 고류지에 신라인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목조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있다. 일본인이 국보 1호로 사랑받는 작품이다. 이 반가사유상을 꼭 같이 조각한 작품이 있다. 반가사유상을 지긋이 바라보라. 불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서서히 감동이 밀려올 것이다. 부처의 자비로운 마음과 은은한 미소를 살리기 위해 기울였을 장인의 땀과 정성까지 느낄 수 있다면 최상의 감상법이다. 죽 늘어선 십이지신상은 동양의 신화와 생활문화의 산물이다. 이 또한 깨달음과 맞닿아 있다. 천진난만한 동자상 앞에서 잠시 마음을 들여다본다. 컴컴하다. 예닐곱 살 아이들의 해맑은 표정과 활달한 몸짓을 보며 어둠을 털어낸다. 이제야 동자상을 조각한 장인의 마음을 알 것 같다. 훗날 이 작품을 보게 될 사람이 자신의 내면을 환히 밝히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박찬수 선생의 조각 작품은 사포 질을 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오로지 칼질로 깎아 낸 것인데도 동자의 해맑은 얼굴과 어깨선이 부드럽다. 물론 이런 섬세한 조각품만 있는 것은 아니다. 찍어 내는 망치인 짜귀로 사람의 다양한 사람들의 표정을 새긴 작품도 있다. 표면이 거칠지만 조화롭고 주제의식도 선명하다. 작품의 재료가 무슨 나무인지 살펴보는 것은 흥미를 더해준다. 가장 자주 눈에 띄는 것이 비자나무였는데, 천 년의 미소를 간직한 반가사유상은 소나무로 만들어졌다. 2층 불교유물실과 기획전시실에서는 설설설, 베푸는 이야기가 샘솟다를 주제로 조선시대 불화를 선보이고 있다. 절에서 불화를 멀리서 지나치듯 보아 아쉬웠던 사람들에게 불화를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입체적인 조각으로 채워진 3층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글을 모르는 대중에게 불법을 전달하기 위해 제작한 탱화에 담긴 이야기는 낯설지만, 사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그리 낯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염라대왕이 십시왕과 함께 업경대를 통하여 이승에서 지은 인간의 죄를 심판한다는 이야기는 천만 관객을 모은 신과 함께라는 영화의 소재였다. 중생을 깨치기 위해 만들어진 불가의 옛이야기도 윤회하듯 현재진행형이다. 불교는 천 년도 넘는 긴긴 세월을 우리 겨레와 함께한 종교로 우리 역사 곳곳에 그 문화가 스며들어 있다. 유교를 이념으로 건국한 조선왕조의 상징적인 건축물인 궁궐의 형식조차 불교 사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사실도 그 하나다. 전시실 곳곳에 배치된 불화 대형 퍼즐 맞추기나 트릭아트 사진 촬영은 어린 관람객들이 즐거워할 것 같다. 1층 불교회화실은 기획 전시실로서 동자전을 비롯한 기획전시와 유물 교체전시 등을 하는 공간이다. 나무의 역사라는 기획전시가 열리는 지하 1층에서 한 가족을 만났다. 대여섯 살의 아이가 나무의 지게를 지고 걷는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의 표정이 해맑다. 전시실을 나와 야외 정원으로 향했다. ■ 사색의 공간, 정원 야외전시실 저기 건물의 지붕을 보세요. 모두 조금씩 다르죠?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의 지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왜 저럴까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이하늘 학예사의 설명을 들으니 비로소 고개가 끄덕여진다. 얕은 지식으로 형성된 선입견을 가지고 판단하려는 못된 버릇은 이참에 버려야겠다. 잘생긴 소나무가 운치를 더하는 정원에는 각종 목조각, 석조각, 청동작품이 곳곳에 있다. 3천평의 너른 정원에는 만해 한용운의 시와 장승, 수령 500~1천년 된 나무로 만든 천연테이블이 있는 카페도 있다. 해 질 녘에 조각상이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고 하니 카페에서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저녁 풍경을 감상해도 좋을 것 같다. 정원 한 켠에 하늘교회가 있다. 불교 미술품이 대부분인 박물관에 하늘교회라니 궁금해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십자가에 달린 예수상이 있다. 교회 옆에는 나뭇결 모양을 살린 성모상도 서 있다. 나뭇결이 너무 생생하게 살아있어 살짝 손가락을 대어보니 뜻밖에도 나무가 아니라 구리다. 목아불교박물관에서 목아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꾼 비밀이 풀렸다. 박물관은 현재 2020 문화가 있는 날 세종이 사랑한 책을 주제로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세종이 사랑한 책은 조선 세종 때 만든 책으로 우리나라 풍토에 맞는 농법을 기술한 농업기술서인 농사직설과 백성들의 교화서로서 윤리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삼강행실도 그리고 한글 창제의 과학적 원리가 담긴 훈민정음, 우리나라 최초의 역법서인 칠정산 네 권이다. 3층 전시실 입구에서 만난 세종대왕상이 떠올랐다. 한글을 창제한 것만 해도 세종대왕은 영원히 칭송받아야 할 분이다. 10월 마지막 주 일요일까지 프로그램이 진행되니 기억해둘 일이다. 코로나19 여파로 목아박물관도 관람객이 크게 줄었다. 관람료에 의존하는 사립박물관 대부분은 운영에 어려움을 큰 겪고 있다. 이럴 때 사립 박물관과 미술관을 자주 찾으면 좋겠다. 관람객이 적으니 전세를 낸 것처럼 호젓하고 여유롭게 예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니까.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0 경기도 박물관ㆍ미술관 다시보기] 23. 하남역사박물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대, 치열했던 역사의 무대는 과연 어디일까. 대륙으로 진출하여 수당과 경쟁하던 고구려, 일본으로 선진문화를 전파한 백제, 백제에 밀리다가 뒤늦게 분발하여 삼국통일의 주체가 된 신라가 있다. 삼국시대는 오늘날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과 가장 닮은 시대가 아닐까. 한강은 여의주와 같았다. 세 나라는 한강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한강을 가장 먼저 차지한 세력은 온조가 건국한 백제였다. 한성백제, 위례백제의 찬란한 역사가 숨 쉬는 곳이 하남이다. 하남문화재단(이사장 김상호) 하남역사박물관은 하남 유일의 박물관이다. 오랜 역사와 풍부한 유적을 가졌음에도 2004년에야 박물관 문을 연 까닭에 하남시민들은 도시 역사를 알고자 서울로 찾아갔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서울에서도 찾아오는 박물관이 되었다. 김진성 학예조사팀장은 하남역사박물관을 이렇게 소개한다. 우리 박물관은 지역문화유산의 거점 기관으로 박물관대학을 비롯해 학생부터 노년층까지 지역민과 교감하는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심도 있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선사시대부터 근현대까지 1천여점의 유물을 상설전시하고 있는데, 전시품의 95% 이상이 하남지역에서 출토되거나 하남시와 관련된 유물입니다 ■ 유구한 역사를 품은 하남 하남시는 살아있는 역사박물관이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는 미사리 유적(사적 제269호)과 백제의 비밀을 간직한 이성산성(사적 제422호)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흥미로운 유적이다. 오층석탑(보물 제12호)과 삼층석탑(보물 제13호)이 나란히 서 있는 절터 동사지(사적 제352호)와 국내 최대 규모인 철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332호)이 발굴된 천왕사지, 교산동의 마애약사여래좌상(보물 제981호) 같은 유적과 유물은 하남이 고려 불교의 중심 무대였던 사실을 알려준다. 그뿐인가. 광주향교(문화재 자료 제13호)와 사충서원은 유교 국가 조선의 교육과 정신문화를 살필 수 있는 유적이다. 하남역사박물관은 하남의 유구한 역사를 품은 다양한 유물을 한눈에 관람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3층 상설전시실은 하남지역의 선사시대 인류의 생활 모습과 백제의 문화, 고려시대 불교문화를 두루 살필 수 있다. 아름다운 물결과 모래로 이루어진 섬이란 뜻을 지닌 미사리(美沙里)는 오랜 역사와 이야기를 간직한 보물섬이다. 1960년에 발굴된 미사리 유적을 비롯하여 선동, 춘궁동 유적에서 빗살무늬토기와 마제석기가 발견되면서 신석기시대로 알려졌다. 이후 정밀한 발굴로 1천600여 점의 찍개, 긁개 같은 유물이 쏟아졌는데 연구를 통해 후기구석기시대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1979년에 사적 제269호로 지정된 미사리를 1980년대 후반에 다시 정밀하게 발굴 조사하여 미사리 유적은 신석기부터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전기에 걸쳐 형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주거지 등 총 466기의 유구가 확인되었고, 빗살무늬토기 석부 석촉 어망추 지석 같은 유물과 한성백제시대의 생활도구와 무기가 출토되었다. 구멍무늬토기, 골아가리구멍무늬토기라는 긴 이름의 토기가 있다. 작은 구멍이 촘촘하게 뚫려 있다. 유물을 보면서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을까를 상상해 보는 것도 유물을 보는 재미를 더해준다. ■ 역사적 상상력을 키워주는 공간 근초고왕 대에 번영을 누리던 백제는 고구려와의 전쟁(5세기)과 신라와의 전쟁(6세기)을 치르면서 국력이 쇠퇴하여 하남지역은 신라의 차지가 되었다.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조선의 학자들이 하남지역을 백제 초기의 도읍인 하남위례성의 유력한 후보지로 꼽았다. 하남의 백제 유적으로는 미사동 유적과 덕풍동 수리골 유적, 광암동 고분군이 있다. 수리골 유적에서는 백제 토광묘, 광암동 유적에서는 횡혈식석실분이 확인되었고, 가밀동에서 백제 석실분 52기가 발굴되었다. 김진성 학예조사팀장은 이러한 무덤을 특화한 박물관을 머잖은 장래에 건립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 준다. 옛사람들은 죽음을 어떻게 인식했을까? 3층에 전시된 두 개의 항아리가 그 비밀을 풀 단서를 던져준다. 백제의 분묘문화를 볼 수 있는 특별한 유물이다. 설명에 따르면 항아리를 관으로 사용했던 옹관문화는 청동기 시대에 시작되어 삼국시대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성산성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비밀을 여럿 간직하고 있다. 흙으로 만든 말(토제마)과 쇠로 만든 말(철제마)은 어디에 쓰려고 만들었을까. 나무 빗, 팽이, 시루나 쇠도끼, 화살촉, 쇠스랑 같은 도구야 그 쓰임을 금방 알 수 있다. 하지만 얼굴모양의 나무 조각품과 전신 인물상은 상상력을 동원해도 그 쓰임을 짐작하기 어렵다. 글씨가 또렷하게 남아 있는 목간이 이성산성의 얼굴을 살짝 보여주었을 뿐이다. 허리에 차는 악기 요고(腰鼓)도 아주 특별한 유물이다. 고구려 벽화에 등장하는 요고는 이성산성에서 최초로 발견되었다. 대량으로 발굴된 벼루는 이성산성이 단순한 군사시설이 아니라 종교시설 혹은 행정기관일 가능성도 보여주고 있다. 박물관 3층 전시실 입구에 모셔진 철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332호)은 10세기에 제작된 철불로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몸은 다소 거칠지만 균형이 잡혀 있고 부처님의 얼굴은 너무나 평화롭다. 청동은입사대접과 청동원숭이모양촛대에서 고려인들의 빼어난 미의식을 엿볼 수 있다. 고려와 조선에 걸쳐 행정의 중심지였던 하남의 역사를 알려주는 전시물을 살피면 하남이 전시대를 걸쳐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세종대에 경기도관찰사영을 하남 고골(춘궁동)로 옮기고 경기도관찰사가 광주목사를 겸임했으며, 세조대에는 하남에 광주목을 두어 목사가 지방행정을 관장하다가 왜란과 호란 이후에 유수 겸 수어사 체제로 승격되어 광주부가 되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춘궁지에 있던 광주 읍치를 남한산성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광주 관아가 위치했던 경기도 행정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통해 조선시대에 하남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2층은 조선시대 하남의 교육과 양반문화를 이해하도록 꾸며 놓았다. 선비의 생활공간인 사랑채에는 문갑과 관복장, 서안, 연상이 놓여 있다. 머리칼을 감쌌던 망건과 신분증인 호패는 물론 비녀와 경대 같은 여성들의 생활용품도 볼 수 있다. 분청사기와 백자도 시대별로 전시하고 있다. 광주에 사옹원 분원이 있었으니 도자기도 하남을 대표하는 문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향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명부인 청금록, 신분증의 역할을 하는 호패, 정3품 당상관의 고위 무관이 가슴과 등에 착용했던 쌍호흉배도 눈길을 끈다. ■ 특별전 한강과 전쟁 올해는 6ㆍ25전쟁 70주년이다. 현재 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는 이를 기념한 한강과 전쟁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한강과 전쟁 특별전은 삼국시대부터 6ㆍ25전쟁까지 한강을 차지하기 위해 싸운 전투를 주제로 한 전시이다. 삼국시대의 화살촉부터 임진왜란 때 사용한 총통과 광해군 10년(1610)에 편찬한 무예제보번역속집은 눈에 띄는 유물이다. 6ㆍ25전쟁 당시 국군과 UN군, 북한군과 중공군이 사용한 기관총과 81㎜ 박격포, 삐라 등 평시에 접하기 어려운 전쟁 관련 자료를 볼 수 있다. 등록문화재 제383호인 미해병대원 버스비어 기증 태극기는 일장기에 덧칠하여 만든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던 미국 해병 버스비어는 한국인에게 받은 이 태극기를 전쟁 기간 트럭에 달고 다니다가 휴전이 되자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2005년 버스비어가 하남시에 기증하여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왔던 곡절 많은 태극기이다. 박물관 관계자의 전언처럼 우리나라 현대사의 질곡된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유물이다. 이달 27일까지 예정된 특별전이지만, 안타깝게도 코로나19로 현재 임시 휴관 중이다. ■ 하남의 역사와 미래를 담는 박물관 하남지역 유적발굴의 대부분은 박물관이 건립되기 전에 이루어졌다. 이런 까닭에 하남의 역사를 간직한 유물의 상당 부분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실정이다. 박물관은 이러한 유물을 수집하는 사업도 활발히 벌이고 있다. 3기 신도시가 건설되면 하남은 40만 도시로 성장할 것인데 그때는 박물관 3개를 가진 문화도시로 성장할 것이다. 내년에는 국가의 지원을 받아 박물관과 이성산성을 연계한 실감콘텐츠 사업을 진행할 계획입니다. 유적에 대한 친절한 설명과 당대 사람들의 모습을 첨단기술을 통해 영상으로 실감 나게 구현해내는 것입니다. 하남은 광주와 교육을 함께 진행했는데 내년부터 초등 3학년 교과서에 분리합니다. 역사인물의 발굴과 불교문화를 활용하는 사업도 적극적으로 벌일 계획입니다.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2020 경기도 박물관ㆍ미술관 다시보기] 22.구리 고구려대장간마을 박물관

고구려대장간마을 박물관은 구리시 아천동 우미내길 41번지 아차산 자락에 자리한다. 고구려대장간마을 박물관은 고구려 유적을 전시하는 전국 유일의 고구려 전문 공립박물관이다. 아차산은 시민들이 언제든지 오를 수 있는 야트막한 동네 야산이었다. 수도권 시민들의 휴식처로만 알고 있던 그 아차산에 고구려 유물이 묻혀 있는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구리시에서 중국 동북공정이 한창이던 1994년 지표조사를 시작으로 아차산 일대에 대한 학술조사를 추진해 1997년부터 고구려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한다. 아차산 제4보루(堡壘)를 필두로 봉우리마다 구축된 20여개의 보루에서 약 3천여점의 토기와 철제 유물들이 출토됐다. 1천500여년 동안 묻혀 있던 고구려가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이에 따라 아차산 일대 보루군(群)은 2004년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제455호)로 지정됐다. 한강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각축을 벌였던 삼국시대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삼국은 국가 이익의 사활이 걸린 한강을 둘러싸고 첨예하게 충돌했다. 한강은 해양력을 확보할 수 있는 해상교통로였다. 그 한강과 한강으로 흐르는 왕숙천과 중랑천의 상황을 두루 경계하고 침투를 감시할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아차산이었다. 고구려는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소수림왕 때 율령 반포 등을 통해 독립국가로서 중앙집권국가체제를 확립한다. 광개토태왕(재위 391~413)은 독자적 연호인 영락(永樂)을 사용하며 만주 일대를 정복하면서 한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는 동시에 동북아시아 강자로 발돋움한다. 정복군주 광개토태왕에 이어 집권한 장수왕(재위413~491)은 만주 통구에 있던 수도 국내성을 평양으로 천도한 후 남진정책을 추진한다. 475년 장수왕은 3만 군대로 백제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백제 개로왕을 사로잡아 죽인 뒤 한강 이남까지 점령한다. 고구려는 남진정책의 최전방 전초기지이자 국방의 요충지로 아차산을 확보한다. 당대 동북아시아 패자였던 고구려는 551년 신라와 백제의 동맹군에 의해 퇴각할 때까지 76년 동안 아차산 보루를 진지 삼아 한강 일대를 지배한다. 보루의 병사들은 전투가 주임무였다. 쇠스랑 등 농기구들이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주둔지에 필요한 식량은 아차산 아랫마을 어디쯤에서 농사를 직접 지어 조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고구려 병사들의 병영생활은 전투하면서 평시에는 둔전(屯田)을 일궈 농사도 짓는 형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단한 병영생활이었으리라. 고구려대장간마을 박물관 전시 공간은 크게 실내의 고구려 유적 전시관과 야외전시장으로 구분된다. 실내전시관은 1층과 2층으로 나뉜다. 문화해설사는 18명이 근무하고 있다. 1층은 고구려 전성기 강역도와 고구려가 한강을 건넌 후 76년간의 기록을 간략하게 일별할 수 있다. 또한 고구려 토기 파편을 직접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배려했다. 2층은 아차산 4보루와 일대보루군(群)을 전시한다. 먼저 아차산 4보루 축소 모형물을 볼 수 있다. 보루는 성벽과 생활터로 구성돼 있고 성벽에는 적을 감시하고 방어할 수 있는 치(雉)가 확인된다. 성벽 내부에는 병사들의 막사로 사용된 건물들과 각종 시설물이 축조됐다. 생활에 필수적인 물을 담을 수 있는 저수시설, 성벽 밖으로 물을 빼내기 위한 배수로가 보인다. 온돌은 고래가 하나뿐인 외고래 형식이다. 취사와 함께 공기를 따뜻하게 덥히는 기능을 동시에 한 듯하다. 솥은 쇠 솥이다. 솥은 비록 녹슬었지만, 솥의 자태를 원형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두 번째로 눈여겨 볼만한 유물은 도끼, 투구, 등자, 화살, 말재갈 등 무기이다. 도끼는 고구려 시대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 모양에 따라 외날 도끼, 양날 도끼, 초승달형 도끼로 구분되는데 특히 외날 도끼는 안악3호분 벽화의 부월수가 들고있는 것과 동일하다. 등자는 말을 탈 때 발을 딛는 도구이다. 이 등자가 있기 때문에 쏜살같이 달리는 말 위에서 중심을 잡고 활을 쏠 수 있다. 이렇게보면 부대는 병사가 소지한 무기에 따라 부월수, 궁수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말을 탄 기병도 편제된 것으로 추정된다. 병사들은 무기 등 전투 장비가 파손되거나 마모되었을 때 집게 등을 이용해 간이대장간에서 직접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로 보습, 삽날, 낫, 쇠스랑 등 농기구가 전시됐다. 모두 철제 농기구이다. 제철기술이 발달한 고구려는 철제 농기구를 제작해 사용했다. 쟁기질할 때 쓰는 보습은 얼마 전까지 농촌에서 사용했던 보습과 크기만 약간 다르지 모양은 영락없이 똑같다. 쇠스랑 또한 1천500년의 시간이 무색할 정도다. 농사를 지은 후 농산물을 보관하는 항아리도 출토됐다. 명절 때 고향의 부모형제를 그리며 떡을 쪄서 먹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시루. 물 긷는 동이. 맥주 안주를 담아놓는 쟁반같이 생긴 오절판 토기 그릇 등 이 모두는 고구려군의 문화이자 병영생활을 엿볼 수 있는 소재들이다. 야외전시장은 아차산에서 출토된 유물을 기반으로 상상의 건축물을 구축했다. 삼족오 대문을 밀고 들어서면 가상의 고구려 세계로 빠져든다. 가장 먼저 거믈촌이 다가온다. 거믈촌 지붕은 널빤지를 이용한 너와지붕이다. 연호개채는 대장간 맞은편에 있는 건물로 쪽구들과 해신과 달신의 그림이 분위기 조성에 한몫한다. 대장간은 고구려 최첨단의 철기문화를 대표한다. 대장간에는 화덕에서 풀무로 공기를 불어넣어 쇠를 녹이고 거푸집에 쇳물을 부어 칼 등의 모양새를 주조하는 시설들이 구비됐다. 달구어진 쇠는 망치로 두들기고 담금질을 반복한 후에야 제품으로 탄생한다. 금방이라도 돌아갈 것 같은 지름 7미터의 물레는 장엄하기까지 하다. 고구려대장간마을 야외전시장은 그동안 태왕사신기, 신의, 선덕여왕 등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 안시성 등의 촬영장소로 각광을 받았다. 관람객들은 때로 드라마와 영화 속의 그 장소에서 주인공이 되어 보기도 한다. 고구려의 건국과 광개토태왕의 활약상을 기리기 위해 414년 길림성 집안에 세운 광개토태왕비의 모형 비석도 방문객을 기다린다. 고구려대장간마을 박물관에서는 유치원생부터 어르신까지 고구려 복식 입기, 갑옷 입고 활쏘기, 대장장이 망치질하기 등을 통해 역사의 산 교육장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는 찾아가는 박물관, 초등학교 역사체험단 등을 상시 운영하였으나 코로나19 사태로 대면수업이 어렵게 되자 학교에서 고구려 대장간마을과 놀자라는 프로그램을 새롭게 개발해 보급하고 있다. 고구려는 고조선 이래 우리 역사의 한 축이다. 그러나 중국은 동북공정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고구려를 중국 국경 내의 소수민족이 세운 소수민족 지방정권ㆍ변방민족정권으로 탈바꿈시킨다. 현재 중국 영토 내에 벌어졌던 역사는 모두 중국의 역사라는 입장이다. 한나라, 당나라같이 팽창기일 때에는 천하를 하나로 보는 대일통(大一統)의 시각이 중심축으로 등장한다. 송나라, 명나라처럼 위축되는 시기에는 정통성의 시각으로 중국의 내부 분열 상황을 극복하려 한다. 지금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출범한 지 70여년이 흘러 도광양회(韜光養晦: 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는 의미)를 벗어버리고 대국굴기(大國屈起) 하는 시점이라 대일통(大一統)의 시각이 대두되고 있다. 오늘날 중국이 점유하고 있는 정치적 영토와 그 정치적 영토 안에서 전개되었던 과거 역사와의 불일치를 해소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북한 붕괴 시 북한 영토에 대한 역사적인 연고권을 확보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기도 하다. 고구려 역사 문제는 고대사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고구려는 5천년 민족문화의 보루다. 따라서 고구려 문제는 국가공동체와 민족공동체의 역사와 정체성까지도 좌우할 수 있는 중차대한 문제이다. 자손만대의 미래를 위해 치밀한 역사전략이 필요한 때이다. 8월15일(화)부터 야외전시장은 개장했다. 한국에 하나뿐인 아차산 고구려대장간마을 박물관에서 잊혀져 가는 민족혼을 재확인해보자. 권행완(정치학박사, 다산연구소)

[2020 경기도 박물관ㆍ미술관 다시보기] 21.부천 한국만화박물관

1970년대의 만화방은 청소년들의 해방구였다. 그러나 어른들은 만화를 불량 식품처럼 위험한 것으로 생각했다. 어른들이 불량한 것으로 매도했던 만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사람이 즐기게 됐다. 역사 해석에도 뛰어났던 만화가 고우영은 삼국지를 만화로 신문에 연재해 점잖은 성인들까지 독자로 끌어들였다. 강철수, 허영만 같은 만화가들은 어른들도 만화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훤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유신의 종말로 잠시 자유를 맛본 청년들은 1980년 5월 이후 깊은 절망감에 빠져들었다. 이때 등장한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은 좌절감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젊은 세대에게 탈출구를 열어주었다. 80년대에 난 네가 기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라는 까치의 엄지를 향한 고백을 모르는 사람은 간첩이었다. 1990년대는 만화의 부흥기였다. 일본문화가 개방되면서 한국 만화시장도 엄청난 변화와 성장을 가져왔던 것이다. 일본만화의 양과 질은 한국만화를 압도했다. 그렇다면 30년이 지난 현재는 어떨까. 온갖 오락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인데도 청년들은 왜 웹툰에 빠져드는 것일까. 인기를 얻은 웹툰은 속속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다. 물론 이것은 우리나라만의 특별한 현상이 아니다. ■ 한국 만화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부천시 원미구에 위치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사장 이해경) 내 한국만화박물관(이하 만화박물관)은 만화를 좋아했던,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찾아야 할 곳이다. 2001년 10월에 설립했던 것을 현재의 장소로 이전해 2009년 11월에 재개관했다. 만화는 어린이부터 팔순의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문화이다. 그럼에도 만화 앞에는 오랫동안 불량이란 말이 붙어다녔다. 만화를 불량식품처럼 취급하던 시절에 우수한 만화책들도 불태워졌다. 그렇게 사라져간 만화책이 얼마나 될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어른들은 만화가 문화 예술적 가치가 아주 높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런 깨달음이 한국만화박물관을 건립하게 했다. 만화박물관에 가면 영영 사라질 뻔했던 우리 만화를 반갑게 만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만화의 소중함을 파악하고 박물관을 설계한 주역들의 혜안에 박수를 보낸다. 만화박물관은 시대와 호흡했던 우리 만화를 후손들에게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물려주기 위해 정성을 쏟고 있다. 만화박물관을 둘러보면 만화가 얼마나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해 주었는지를 보여준다. 만화박물관은 지하 1층ㆍ지상 4층의 초대형 복합문화공간이다. 규모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넓었다. 만화박물관은 만화 관련 자료를 수집 보관하는 수장고와 만화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꾸민 상설전시관과 기획전시관은 물론 만화도서관, 교육실, 만화영화상영관을 갖추고 있다. 한 해 평균 26만명이 만화박물관을 찾고 있다고 한다. 1층에 380석 규모의 만화영화상영관은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가족 애니메이션을 비롯해 극장개봉작 애니메이션들이 상영되는 영화관이다. 이곳에서 독립영화를 비롯한 예술영화도 만나볼 수 있다. 아울러 최신 만화에 대한 핫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박물관에서 현재 열리는 행사가 무엇인지 바로 확인할 수 있다.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2층은 꿈의 공간이다. 책장을 가득 채운 만화책이 유혹하는 만화도서관에 들어서면 누구나 만화책을 보며 행복해 했던 유년 시절의 어떤 풍경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만화 전문 자료실답게 국내만화와 해외만화, 학술자료와 논문 등 31만여권이 소장됐다. 국내 최대 규모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으니 시간 보내기에 아주 좋다. 일반 열람실과 아동 열람실을 구분하고 있으니 아이가 성인물을 볼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3층은 만화역사관이다. 한국만화 100년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로운 공간이다. 국내외 유명 작가들의 작품들을 관람하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1909년부터 시작된 한국만화의 역사를 시대와 흐름별로 전시되고 있다. 자연스레 관람객 자신이 만화를 즐겨보던 시대에 가장 오랜 시간을 머물게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찾았던 옛날 만화방의 풍경이 궁금한가. 1960년대를 배경으로 꾸민 만화방에 들어서면 함께 어울리던 고향 친구들 얼굴도 떠오를지 모르겠다. 1970~80년대 청년대학생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었던 강철수의 사랑의 낙서 같은 성인만화를 보면 옛 애인의 얼굴이 떠오를지 모를 일이다. 만화영화로 제작, TV에 방영돼 더욱 인기를 얻은 이진주의 달려라 하니, 김수정의 아기공룡 둘리 같은 명랑만화도 반갑다. 만화잡지 보물섬에 10년 동안 연재했던 아기 공룡 둘리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만화주제가를 흥얼거리게 될 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유명 만화가들의 캐릭터를 나무 액자에 새겨 넣어 나무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명예의 나무도 찾아보자. 만화박물관은 다양한 기획전을 연 3회 이상 개최하고 있다. 현재 만화 속 페미니즘을 통해 성 평등 인식을 제고하는 노라를 놓아라 전시와 518 40주년을 기념한 사람과 사람과 사람들. 만화가 기억한 5ㆍ18 전시가 진행 중이다. 만화로 여성을 이해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아픈 역사이지만 결코 잊어서는 알 될 5ㆍ18을 만화 작품으로 조명하는 이번 기획은 만화는 시대의 거울이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었다. 4층 만화체험관은 어른보다는 아이들이 더욱 좋아할 공간이다. 웹툰 전시코너에 들어서면 2000년대 이후 우리 만화의 큰 흐름을 이룬 웹툰 초기작을 살펴볼 수 있다. 인기 웹툰을 배경으로 한 체험 공간에서 사진을 찍고 출력할 수 있도록 배려한 기획자의 섬세함이 돋보인다. 네이버 인기 웹툰 조선왕조실톡 작품을 활용한 인터렉티브 미디어 체험전시도 역사를 좋아하는 학생들에게 좋은 선물이 될 것 같다. 지하 1층에 마련된 수장고는 첨단시설을 자랑하는 곳으로 고바우 영감, 엄마찾아 삼만리 같은 1950~60년대 유명 작가들의 육필원고 8만여점과 코주부 삼국지를 비롯한 만화 단행본과 희귀잡지 등 희귀만화도서 2만여점과 허영만 작가의 오! 한강, 타짜를 비롯한 유명 작가들의 육필원고 약 15만점이 보관돼 있다. ■ 만화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 만화박물관에서 유독 눈길을 끌었던 공간이 있다. 그곳은 작가들이 기증한 펜을 전시하는 코너였다. 수북하게 쌓인 작가들의 뭉툭해진 펜을 보면 한국 만화의 힘이 무엇인지 누구나 느낄 것이다. 내용의 정확성을 기하고자 자주 펼쳐 너덜너덜해진 한 만화가의 낡은 국어사전에서 한국 만화가들이 쏟은 정성과 성실함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만화가들의 정성과 집념 그리고 박물관 관계자들의 노력으로 만화는 이제 등록문화재가 되었다. 엄마 찾아 삼만리의 경우 원고 전체를 등록문화재로 등재했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는 유명 만화가들의 작업실이 있다. 입주한 작가 중에는 우리 귀에 익숙한 너무나 유명 작가들이 여럿이다. 8시가 되면 출근하는 작가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화는 엉덩이로 그리는 것이다라고요 백수진 학예사가 들려주는 말이다. 사실 1990년대까지 한국만화는 일본만화에 압도됐다. 그러나 2020년 현재 한국이 일본을 앞지르고 있다. 특히 한국 웹툰은 세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백 학예사는 한국만화의 승리를 자신했다. 이미 한국은 K팝을 비롯해 대중문화에서도 일본을 앞지르고 있다. 한국만화박물관은 하반기에 위안부를 주제로 한 작품을 전시할 계획이다. 여가부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본래 해외에서 전시할 계획이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국내에서 진행하게 됐다. 박물관 관계자에게 만화박물관을 자랑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림과 글로 구성된 만화가 소비재가 아니라 역사임을 박물관에 오면 느낄 수 있습니다. 예전 한때는 만화를 불량식품처럼 취급해 화형식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소비재가 아니라 현재를 담은 문화재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습니다. 부천은 만화를 소중한 문화라는 사실을 가장 일찍 발견하고 만화박물관을 세운 문화도시다. 어서 코로나19가 수그러져 만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찾아가 보기를 소망한다. 개관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다시 찾아가보고 싶다. 이경석 (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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