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도박 사이트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完. 에필로그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만 35년 동안 이 땅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나라를 빼앗기고 총칼의 위협을 받으며 10년 동안 숨죽여 살던 한민족이 떨쳐 일어선 기미년 3월 1일은 자유와 독립의 향한 한국인의 열망을 세계만방에 드러낸 위대한 날이다. 31운동 이후 많은 지사가 망명길에 올랐다. 만세운동에서 독립의 희망을 발견했기 때문이며, 평화로운 운동으로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했기 때문이다. ■ 유학자와 기생이 나서고, 종교와 종교가 연대하다 조선 500년의 통치이념인 유학은 나라가 망국의 위기에 처했으나 무기력했다. 독립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러한 때에 일본인이 주는 밥을 거부하고 대마도에서 굶어 죽었던 면암 최익현(포천)의 의기는 의병항쟁의 불씨가 되었다. 화성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유학자 이정근도 유학의 한계를 극복한 선각자라 할 수 있다. 31운동 이후 유학자들도 만세운동에 참여하지 못한 사실을 반성하며 파리장서를 시작으로 구국운동의 대열에 나서기 시작했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이필주와 이종훈은 천도교와 기독교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흥미롭게도 두 분 모두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 동학농민운동과 31운동은 이름 없이 살아가던 평민을 민족의 앞날을 이끄는 지도자로 키워냈다. 1896년 4월 한글로 만든 독립신문을 발행하고 독립협회가 조직되었다. 독립협회가 정부와 손을 잡고 주최한 만민공동회는 백성에서 시민이 탄생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이처럼 일제를 비롯한 외세의 손을 빌리지 않고 우리 겨레 스스로 민주주의를 실험했던 것이다. 일제의 통치에서 해방된 지 74년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의 근대와 경제적 발전이 마치 일본의 통치 덕분이라고 주장하는 자칭 지식인들이 존재하고 있다. 목숨을 걸고 일제와 전쟁을 벌였던 독립투사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의 망언이 계속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 자신이 선 자리에서 구국의 길을 모색하다 주권을 빼앗긴 식민지 조선에서 생각하며 산다는 것은 고통이었다. 대다수 사람들이 식민지 현실을 수용하고 침묵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수원 기생 김향화는 경찰서 앞에서 동료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감옥에 갇혀서도 만세를 불렀던 김향화의 당당한 태도는 함께 수감된 동지들에게 힘이 되었다. 겨레의 상록수로 살아 있는 최용신(안산)은 교육을 통한 구국의 길을 선택한 분이라면 한결 김윤경(광주)은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분이다. 20세기 초 일제가 한민족의 숨통을 조여 오는 엄중한 현실에서 사실을 사실대로 전하는 언론의 사명은 막중한 것이었다. 석농 류근(용인)은 붓으로 일제의 침략을 고발했다. 그의 붓끝은 역사 저술로 확대되었다.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역사서를 저술해 식민지 청년들의 마비된 의식을 일깨웠다. 그의 동지 무원 김교헌(수원)은 우리 민족의 시원인 단군의 역사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해 독립운동의 이념으로 제시했다. 한국기독교가 민족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던 것은 특별한 사례라 할 것이다. 그것은 선교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유학의 한계를 직시하고 스스로 변화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기독교를 주체적으로 수용한 한국기독교의 독특한 전통에 힘입은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구연영 부자는 성경과 기독교를 통해 구국의 길에 나섰다.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발하게 벌인 무장투쟁의 중심에는 대종교가 있었다. 대종교는 독립운동을 위해 존재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는 민족종교이다. 경기도 출신의 쟁쟁한 독립지사 중에도 대종교인이 여럿이다. 그중에서 2대 교주를 지낸 무원 김교헌은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의 숨은 주역이다.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바쳤기 때문일까. 해방 후 교단의 존재조차 희미해져 버렸다. 그럼에도 대종교가 한국독립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맨 위에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 만주와 연해주, 국내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다 1919년 3월의 만세운동은 독립의 희망을 심어주었다. 맨손으로 나라를 되찾을 수 없다는 사실도 분명히 알려 주었다. 독립지사들이 가족과 생이별하는 고통을 감내하며 만주와 상해로 몰려들었다. 만주로 망명한 지사들은 장기전을 생각하며 농장을 세우고 학교를 설립했다. 서간도에 세운 신흥무관학교는 독립군을 양성하는 사관학교였다. 이 학교의 설립자는 영석 이석영(남양주)이다. 선생은 부친에게 물려받은 엄청난 재산을 신흥무관학교에 쏟아 부었다. 두 아들마저 잃고 굶주리다 중국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일까, 선생의 이름을 아는 이는 여전히 드물다. 여준과 윤기섭은 이석영 6형제가 세운 신흥무관학교를 운영하며 3천 명에 이르는 독립군을 양성한 주역이다. 만주벌의 호장군 노은 김규식(구리)과 한국독립군 참모장 강재 신숙(가평)의 활약은 눈부셨으나 지금은 그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용인이 낳은 북만주 독립군의 최고 지도자 김혁 장군과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 오광선 장군도 마땅히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권총과 폭탄으로 일제와 맞섰던 의열단과 한인애국단, 그리고 아나키스트조직인 남화한인연맹도 기억해야 할 조직이다. 오랫동안 아나키스트라는 사실 때문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으나 10대 소년 시절부터 독립투쟁에 나선 이재현(안양)과 제2의 윤봉길 의사가 되고자 폭탄 거사를 준비했던 원심창(평택)도 새롭게 조명해야 할 분들이다. 안중근 의사보다 먼저 이토를 처단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원태우 의사(안양)의 의거도 마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1945년 7월, 조선총독부가 코앞인 경성 부민관에 시한폭탄이 터졌다. 발악하는 일제와 친일매국노들에게 가한 통쾌한 일격이었다. 20대 청년 류만수(안성)와 조문기(화성)가 주도한 부민관 폭파사건은 일제의 폭압에도 조선의 청년들이 살아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같은 시기 몽양 여운형(양주)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지사들이 은밀하고 조용하게 위대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해방 직후에 전국에 결성된 건국준비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감옥에 갇혀 있던 민세 안재홍(평택)을 비롯한 독립투사들도 광복의 그날을 준비하고 있었다. 물론 해외에서도 광복과 그 이후를 준비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무부장 조소앙(파주)과 내무부장 신익희(광주), 그리고 외교운동에 헌신했던 박찬익(파주), 의회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윤기섭(파주)과 임정의 살림을 맡았던 엄항섭(여주) 같은 지사들도 광복 이후를 준비하고 있었다. ■ 함께 꾸어야 할 꿈 화성과 함께 안성은 31운동의 불꽃이 가장 뜨겁게 타올랐던 고장이다. 일제가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재판정에서 폭동으로 규정한 세 도시의 중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곳이 안성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현실이 숨어 있다. 만세운동의 현장에서 일본 헌병이 쏜 총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순국한 것으로 확인되는 희생자 중에서 아직까지 국가유공자로 서훈을 받지 못한 분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광복된 지 74년이 흘렀다. 이 긴 세월 동안 대한민국 정부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한 현재까지 이를 방치했다는 것은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부끄러운 일이다. 국가 보훈처와 해당 지자체의 분발을 촉구한다. 올 한해 31운동 100주년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그중에서 가장 반가웠던 소식도 들려왔다. 그중 하나. 남양주시가 일제의 만행과 이에 맞선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하자는 취지에서 설립한 역사체험관의 이름을 이석영 광장으로 결정했다는 소식이다. 영석 이석영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1910년 12월, 형제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면서 화도읍 일대 토지를 모두 팔아 항일무장투쟁의 산실인 신흥무관학교를 설립운영하는 일에 전 재산과 일생을 바쳤다. 반상을 따지던 조선의 양반들도 임진왜란 때 적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든 의기 논개를 기념하는 사당을 세웠다. 김향화와 이선경을 비롯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기념하는 공간 설립에 경기도가 앞장서면 좋겠다. 해외에서 투쟁하던 독립운동가들은 해마다 8월 29일과 3월 1일을 기념했다. 국치일을 기념하면서 왜 나라를 빼앗겼는가를 성찰하고, 31운동을 통해 발견한 독립의 열망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우리 한반도를 둘러싼 조건과 환경은 100년 전과 얼마나 다른가. 겨울이 시작되었다. 찬란한 봄을 맞이하기 위해 추위를 견디며 스스로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 100년 전 한마음으로 만세를 불렀던 민중들의 염원은 온전한 독립이었다. 분열과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현실을 떨쳐버리고 화합하고 상생하는 통일된 조국을 꿈을 꾸어야 할 때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39. 만주·연해주서 항일 투쟁 강재 신숙

강재 신숙(申肅, 1885~1967)은 경기도 가평군 군내면 향교리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4대 독자였던 그의 이름은 연길이었다. 숙(肅)이란 이름은 35세가 되던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할 때부터 사용했다. 신숙은 일곱 살 때 천자문을 가르치던 조부가 한자 밑에 단 한글을 보며 뜻을 풀이하는 것을 보고 사흘 만에 한글을 완전히 터득했을 정도로 총명한 아이였다. 12세 때부터 가평에서 명망이 높던 한학자 이규봉의 문하에서 배웠다. 신숙이 깊이 존경했던 스승 이규봉은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제자 신숙의 당부를 받고 고향 가평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분이다. 17세부터 지금의 면장에 해당하는 약정으로, 18세에는 가평군청의 서기가 되어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19세가 되던 1903년, 을미의병 때 강원도 양구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춘천감옥에서 단식투쟁을 하다가 순국한 최도환의 딸 최백경과 결혼했다. 분주한 중에도 사색하기를 좋아하던 신숙은 세상의 변화에 주목했다. 이 무렵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가르치며 보국안민의 대의를 실천하고 있던 동학이었다. ■ 21세에 동학교도가 되다 1903년 12월, 신숙은 동학에 입도하고 이 사실을 부모에게 고백했다. 10년 전 갑오년에 동학도 수십만이 죽임 당한 사실을 알고 있는 부모가 눈물로 말리자 그도 동학을 배교한 것처럼 조용히 지냈다. 이듬해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동학이 진보회란 이름으로 세상의 전면에 다시 등장했다. 목을 벨지언정 머리털은 벨 수 없다던 시절에 동학당의 진보회원 16만 명이 일제히 단발을 단행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20세 청년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1905년 신숙은 부모의 허락도 받지 않고 고향을 떠났다. 서울에서 일자리를 찾던 그는 경무청에서 세운 경무학교에 입학하여 3주간 훈련을 받고 순검생활을 시작했다. 순검으로 재직하면서 대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야학으로 법률도 전공했다. 경무학교 특과생에 당선되어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당국이 승진 약속을 지키지 않자 순검을 그만두었다. 한시를 잘 짓고 문장에 뛰어났던 신숙은 국민신보 기자로 취업했다. 그러나 이 또한 마음에 차지 않아 반년 만에 청산하고, 1907년부터 탁지부 인쇄국 교정원으로 취업했다. 이 무렵 교육이 나라를 살릴 길이라고 생각한 신숙은 동지 김남수, 김남규와 함께 청파동에 4년제의 문창학교(文昌學校)를 설립하고 교감으로 학교 운영에 힘을 쏟았다. 항일의 영웅 이봉창 의사가 이 학교 출신이다. 업무가 끝나면 자녀를 둔 주민들을 만나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여 학생을 모집하고 다시 학교로 달려가 학생을 가르치는 생활이었으나 의욕에 넘쳤다. 애국단체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민중들을 대상으로 열정적인 강연도 벌였다. ■ 독립운동에 나서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이 소식은 들은 신숙은 동지 정한교와 함께 동학의 가르침과 민중을 배신한 일진회장 이용구를 죽이기로 결의하고 단도를 가슴에 품고 기회를 엿보았으나 마침 이재명 의사가 총리대신 이완용을 저격한 사건으로 경비가 강화되어 끝내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이 무렵 의암 손병희를 직접 면담한 신숙은 스승의 가르침에 감화를 받고 평생 그 교훈을 실천하기로 다짐했다. 이 무렵 신숙은 시장에서 연설을 통해 천도교의 교리를 전파했다. 대중연설을 통해 도를 전파한 것은 천도교 역사상 처음이었다. 신숙의 눈부신 활동을 주목하던 손병희는 그를 천도교 대구대교구장에, 다시 중앙총부 대종사 종법원 겸 의사원에 임명했다. 1919년 1월, 고종황제가 매국노와 일제의 하수인에게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번졌다. 2월27일, 신숙은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사에서 사장 이종일의 지휘 아래 김영륜과 함께 밤새도록 인쇄한 2만 매의 독립선언서를 수레에 넣고 그 위에 석탄을 담아 석탄수레로 위장하여 교동 이종일 사택으로 운반하고 목사 함태영이 요구한 2천매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 이를 배포했다. 3월1일, 신숙은 민족대표들이 모인 태화관 입구 중국요리점에서 동지들과 함께 한잔 술을 나누며 초조히 시계를 바라보았다. 12시 정각, 우렁찬 만세소리가 들려왔다. 이날 신숙도 헌병에게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 갇혔으나 기지를 발휘한 진술로 석방되었다. 이때부터 신숙은 천도교계의 제일선에서 만세운동을 지도하다가 5월1일에 다시 헌병대사령부에 체포되었다. 3차례 신문에서 혐의를 모두 부인하여 세 차례나 실신하는 지독한 고문을 당하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수개월이 지나 뜻밖에도 불기소 석방되었다. 일제의 회유책 덕분에 풀려난 것이다. ■ 중국으로 망명하다 1920년 봄. 신숙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요청한 천도교 대표에 선임되었다. 4월23일 밤, 캄캄한 어둠을 틈타 일제의 감시를 뚫고 배를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무사히 상해에 도착한 신숙은 도산 안창호를 비롯한 임정의 대표들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안을 논의했다. 임정에서 천도교에 절실히 바란 것은 운동자금이었다. 신숙은 상해에 머물면서 천도교를 전파하기 위해 천도교의 실사(實事)라는 작은 책을 펴내 활용했다. 45인의 교인동지를 규합한 신숙은 천도교인들의 일치된 독립운동을 지도하기 위해 통일당을 조직했다. 신숙이 정립한 통일당의 이념을 드러내는 삼본주의는 첫째 민본(民本)정치의 실현, 둘째 노본(勞本)경제의 조직, 셋째 인본(人本)문화의 건설이다. 상해 대한거류민단 의사회 의원으로 활약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지도력을 인정받은 신숙은 1921년 4월, 8개 단체 대표들의 군사통일회의가 북경에서 열렸을 때 의장에 추대되고,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되었을 때는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는 다섯 달 만에 임시정부를 두고 양분된 창조파와 개조파의 극한 대립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이러한 심각한 갈등으로 신숙도 반대파 청년에게 살해당할 위기를 맞기도 했다. 1925년 신숙은 국제공산당과 연합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김규식, 이청천 등 동지들과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상해파의 이동휘도 이 사업에 적극 나섰다. 그러나 그 사이 레닌의 사망하자 소련 당국은 이제까지 태도를 바꾸더니 국경을 나가달라고 통고했다. 지원을 기대했다가 배신을 당한 신숙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만주 길림으로 돌아왔다. 심신이 지친 신숙은 마음을 새롭게 다지기 위해 엄숙하다는 뜻을 가진 숙(肅)이라는 이름 대신에 큰 바보라는 뜻의 태치(泰癡)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때 굳세다는 뜻의 강재(剛齋)라는 호도 바보 같은 사내라는 뜻의 치정(癡丁)으로 바꾸었다. 같은 해에 고국에 떨어져 있던 신숙의 부모와 가족들이 무작정 만주로 찾아왔다.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면서도 활동을 멈출 수는 없었다. 북경에 한교동지회를 조직하여 동포들의 민족의식을 함양하고 생활안정을 지원하는 사업을 벌였다. 1930년에 북만주에서 지청천 등 민족주의 계열의 지도자 40여 명이 한 자리에 모여 한국독립당을 조직했다. 이때 신숙은 당의 총무위원장과 문화부장으로 활동했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났다. 이를 절호의 기회로 판단한 한국독립당은 당 직속의 한국독립군을 창설했다. 신숙은 한국독립군의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총사령관 지청전의 지휘를 받은 한국독립군은 중국군과 연합하여 대전자령 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신숙은 한국독립군 참모장의 자격으로 남경과 상해에 파견되어 국민당정부와 군사적으로 긴밀한 협력을 합의하기도 했다. 만주로 향하던 신숙은 배안에서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1935년에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한동안 몸을 추스르고 지역에서 아이들의 교육과 교민들의 생활개선에 집중했다. 그러나 신숙은 어머니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다. ■ 동포들의 안전한 귀국을 돕다 1945년 8월 만주에서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그리던 조국으로 당장 귀국할 수가 없었다. 연합군에 참전한 소련군이 만주로 진주하면서 치안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한인 동포들의 안전이 매우 불안했기 때문이다. 길림성 조선인들이 신숙을 회장으로 추대했다. 이를 수락한 신숙은 조선인 피난민의 수습과 귀국 희망자를 주선하는 한편 소련군이 동포들의 재산을 약탈하거나 여성을 겁탈하지 못하도록 소련군사령부를 직접 방문하여 협상하고 대책을 수립을 요구했다. 1946년 12월 신숙은 미군정이 주선한 마지막 난민수송선을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한 후에도 중국에 남아있는 한인동포들의 안전한 귀국을 위해 노력했다. 좌우합작위원회 위원으로 분단을 막기 위해 노력하던 신숙은 1948년 4월, 남북협상연석회의 연락원 자격으로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평양으로 향했다. 그러나 분단을 막고 통일조국을 세우기 위한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후 신숙은 천도교중앙총부 도사로 종교 활동에 집중했다. 1963년 정부는 신숙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신숙 선생은 살아생전에 국가로부터 서훈을 받은 몇 되지 않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38. 만주벌의 호랑이 장군… 노은 김규식 선생

■ 만주 독립군들 사이에 불리던 호장군 주인공 1920년대 만주의 산하를 달리며 일본군과 싸우던 독립군들 사이에 호장군으로 불리던 투사가 있었다. 그는 10배나 되는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싸워 승리했던 청산리대첩의 주역 김규식(金奎植, 1882~1931) 장군이다. 그러나 김규식은 오랫동안 역사의 그늘에 묻혀 있었다. 동시대의 독립운동가 우사 김규식(尤史 金奎植, 1881~1950)과 혼동해 행적이 뒤섞이기까지 했다. 다행히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이런 잘못이 바로 잡혔다. 구리시는 매년 장군이 서거한 날을 기해 추모제를 벌이고 있다. 김규식은 1882년 양주군 구리면 사노리(현 구리시 사노동)에서 김영선의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도(瑞道)라고 불리기도 했던 김규식은 재야에 은둔하는 선비를 연상시키는 노은(蘆隱)이란 호를 가졌다. 노은은 무장투쟁에 나서면서 얻은 별명 호장군(虎將軍, 호랑이 장군)과 사뭇 대조적이다. 김규식은 15세가 되던 1896년에 같은 마을에 사는 16세 주명래와 혼례를 올리고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다. 김규식은 1903년에 대한제국의 사관학교에 입학해 이듬해 육군시위대 부교에 임명되고, 같은 해 9월에는 육군연성학교 조교에 임명되어 장교와 하사관에게 전술을 비롯해 사격술과 체조, 검술 등을 숙달시키고, 그 원리를 가르쳤다. 1905년 일제는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외교권을 빼앗았다. 군복을 입고 총을 든 군인이지만 나라가 위기에 처해도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현실에 괴로워하던 김규식은 1906년 10월에 자진해서 군복을 벗고 구리로 낙향했다. 이때 육군 정위 출신의 현덕호도 전역했다. 김규식은 현덕호의 소개로 기독교 계통의 신흥학교에서 교무로 일했다. ■ 정미의병으로 출전하다 1907년 8월, 일제는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군대 해산시켰다. 이때 시위대 대대장 박승환이 자결하자 군인들이 일본군과 시가전을 전개했다. 김규식은 현덕호와 같이 양주군 동두천에서 활약하던 의병장 허위의 부대에 들어가 부대원 4~50명(혹은 80여 명)을 지휘하게 되었다. 김규식은 마전, 삭녕, 연천, 철원 등지에서 일본군과 4~5차 교전해 전과를 거두었다. 그해 12월 양주에는 팔도에서 1만에 달하는 의병이 모였다. 이곳에서 의병장들은 이인영(李麟榮, 1868~1909)을 13도 총대장, 경기도에서 활동하던 허위를 군사장으로 삼아 13도 창의군을 결성했다. 이듬해 1월, 창의군이 한성 진공 작전을 개시했을 때 김규식은 허위의 300명 선발대의 일원으로 한성으로 진격했다.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했으나 김규식은 연기우와 함께 적의 총탄에 맞고 체포되었다. 현덕호는 전사했다. 이때의 상황을 매천 황현(1855-1910)은 이렇게 기록했다. 허위와 이인영의 부하는 조수연, 김규식 연기우 등 모두 16인인데, 역사(力士)로 이름을 떨쳤다. 의병장 허위가 붙잡혔으며, 부하 김규식도 체포되었는데 뛰어난 용맹이 있어서 압송되는 길에 포승을 끊고 몸을 솟구쳐 달아났다. 대한매일신보(1908년 7월 10일 자)에도 비슷한 기사가 실렸다. 김규식씨는 허위씨 휘하의 제일 용장인데 인천 등지에서 일병에게 피착되었더니 허위씨의 소재를 추궁하기 위해 그를 밧줄로 묶어 앞세우고 강원도 지방으로 향하다가 도중에 그가 밧줄을 끊고 달아났다는 설이 있다더라. 김규식과 총대장 이인영이 사돈을 맺었다. 그의 맏아들과 이인영의 딸이 혼인한 것을 보면 이인영이 그를 깊이 신뢰했던 것 같다. 러시아에서 무기를 구입하려고 인천에서 밀항을 준비하다가 일경에 체포된 김규식은 내란죄의 명목으로 1908년 8월에 유형 15년을 구형했다. 2년 간 유배 생활을 하던 그는 국권을 완전히 상실한 1910년 9월 5일에 사면되어 풀려났다. 조선합병을 축하하는 특사였던 셈이다. 일제가 작성한 요시찰인명부에 따르면, 김규식은 성격이 강하고 담력이 있으며, 키는 5척 5촌 정도에 농부의 체격을 갖고 있다고 했다. 어떤 자료에는 1917년에 구리에 소재한 동구릉 산림순시원으로 근무했던 것과 구리면의 31운동과 관련해 1920년 8월에 경성고등법원에 다시 기소되었다는 사실도 남아 있다. 1912년 혹은 1913년에 망명했다는 주장과 1920년 7월에 만주로 망명해 북로군정서에 참여했다는 연구도 있어 혼란스럽다. 그의 딸 김현태(1915~1996)의 증언에 따르면, 제삿날 같이 사람이 조금만 많이 모이거나 아버지의 얼굴이 며칠만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일경이 찾아와 괴롭혔다. 이 같은 상황에서 김규식은 만주로 망명했다. ■ 청산리 대첩을 지휘하다 1920년 서간도에서 대종교의 지도자 서일(徐一, 1881~1921)이 중광단을 기반으로 북로군정서를 조직했다. 서일은 북로군정서의 사령관으로 대한제국의 장교로 대한광복단에서 무장투쟁을 주도하던 김좌진을 영입했다. 김좌진은 북로군정서 근거지가 있던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에 병영을 건축하고 사관양성소를 개교하고 의병투쟁으로 명성을 얻었던 김규식을 교관으로 초청했다. 사관양성소에는 만주지역의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31운동으로 조국 광복에 대한 열기가 뜨거웠던 시절이었다. 김규식은 이범석, 이장년 등 동료 교관들과 함께 장래에 독립군이 될 청년들을 지도했다. 교육기간은 연성학교처럼 6개월 과정의 속성이었다. 그해 9월 초에 298명의 학생을 졸업시켰다. 재학 중인 학생이 600명이나 되었다. 이 무렵 북간도의 사관양성소는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와 함께 독립군의 산실이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원의상의 회고에 김규식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이 무렵 나는 삼원보의 한족회 학무부장 김규식선생의 부름을 받고 신흥무관학교로 가서 모교의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범석동지도 이때 이곳에서 교관으로 복무하고 있었다.(원의상, 만주 독립군의 생활 중 신흥무관학교, 1969년 신동아 6월호) 1기가 졸업한 9월 중순, 일제의 압력을 받은 중국군이 북로군정서를 공격했다. 북로군정서는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을 피하려 근거지를 버리고 사관연성소의 문을 닫고 장정에 올랐다. 이 때 졸업생이 중심이 된 교성대가 편성되었다. 이 별동부대는 청산리대첩에 참여한 독립군 주력부대 가운데 하나였다. 이에 앞서 1920년 6월, 봉오동에서 홍범도 부대에 크게 패한 일본은 만주 일대의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해 토벌작전을 세웠다. 마적의 습격을 받았다며 훈춘사건을 조작해 만주 침략을 개시한 일본군은 5개 사단 2만5천 명을 동원하고, 비슷한 규모의 지원 병력과 비행기까지 동원했다. 무려 5만에 달하는 일본군이 출동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독립군 부대들은 우선 피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만주지역의 조선족을 초토화하는 소식을 듣고 전략을 수정했다.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의 청산리 일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홍범도와 김좌진이 지휘하는 독립군은 여러 차례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모두 승리했다. 김규식과 같은 유능한 지휘관들과 죽어가면서도 방아쇠에 손가락을 묶어 총을 쏘는 지휘관들의 분투가 빚어낸 위대한 승리였다. 이때 일본군 1천200명을 사살했다. 일본군은 참패에 대한 보복으로 만주에서 농사를 짓던 조선인들을 잔혹하게 살육하는 경신대참변을 벌였다. ■총사령관 김규식, 소련의 배신으로 자유시 참변 겪다 김규식을 비롯해서 독립군들이 집결한 곳이 만주 동쪽 끝의 밀산이다. 이곳은 일찍이 이상설(李相卨, 1870~1917)이 독립군 기지로 설정해 준비해둔 지역이었다. 이곳에 모인 독립군은 3천500여 명이나 되었다. 여기서 대한독립군단을 편성하고 서일을 총재로, 부총재에는 홍범도와 김좌진, 조성환 그리고 총사령에 김규식을 뽑았다. 청산리전투를 치르면서 지휘능력을 인정받은 김규식에 대한 독립군단의 평가였다. 밀산에 모인 대한독립군단은 식량과 무기 지원을 약속한 소련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당시 소련에는 두 개의 조선인 파벌이 형성되어 있었다. 1921년 6월 28일, 두 세력이 무력 충돌하는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다. 이때 독립군 900명이나 희생되었다. 참변을 피한 김규식은 부대를 인솔해 만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참변의 충격과 상처는 쉽게 치유되기 어려웠다. 1923년 연길에서 고려혁명군이 조직되었을 때도 김규식은 총사령에 선임되었다. 1925년에는 북만지역에 독립운동단체인 신민부가 결성되자 고려국민당에 가입해 군사위원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김규식은 조국에서 어렵게 사는 가족을 만주로 불러들였다. 이때부터 김규식은 자신이 터를 잡고 살던 연수현 태평촌 농장에 학교를 세워 독립군 인재 양성에 정성을 쏟았다. 장기전을 대비한 것이다. 1931년 3월, 김규식은 지청천, 신숙 등과 함께 향후의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 하동농장을 방문했다가 뜻밖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당시 주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던 자들이 김규식이 자신들의 위치를 위협한다고 생각해 암살한 것이다. ■ 애국자를 대우하지 않는 나라 만주에 있었던 김규식 선생의 가족은 독립운동가의 자녀라는 이유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큰아들은 광복 후에 거리에서 일본인의 총에 맞아 죽었고, 둘째 아들도 동북 삼성의 정치범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규식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선생과 한국으로 거처를 옮긴 그의 후손들은 오랫동안 무국적자 신세를 벗지 못했다. 일제가 만든 호적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는데 광복 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호적에 등재된 사람에게 대한민국의 국적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김규식 선생도 2009년에야 무국적자의 신분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37. 일제의 심장을 겨냥하다, 부민관 폭파사건의 주역 류만수

류만수(柳萬秀,1923~1975)는 안성군 금강면 개산리에서 태어났다. 소작농이던 그의 부친이 철도 공사판에 나갔다가 사고로 발을 다쳐 공사판에서 쫓겨나면서 소작마저 부칠 수 없어 고향을 떠나야했다. 배움에 목말랐던 소년 류만수는 한성공업학교 야간부를 다녔다. 새벽에는 신문을 돌리고 낮에는 공장에 나갔다. 하지만 학교를 졸업해도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다. 일제는 똑똑하고 유능한 조선인을 원하지 않았다. 조국의 독립 없이는 희망을 찾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청년 류만수는 독립투쟁에 참여하기로 마음먹었다. 천신만고 끝에 만주에 도착했으나 기대와 달리 독립군을 만날 수 없었다. 일제의 폭압으로 무장단체들이 중국 내륙으로 활동무대를 옮겼기 때문이다. 반년을 만주에서 보내고 귀국하면서 다짐했다. 국내에서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일을 벌이자 집으로 돌아와 기회를 엿보았지만 혼자서는 일을 벌일 수가 없었다. 1943년 류만수는 일본강관주식회사에서 훈련공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 가와자키[川崎]의 일본강관주식회사에 훈련공으로 취업했다. 회사 기숙사에서 21세의 류만수는 17세의 소년 조문기와 한 방을 사용하게 되었다. 조문기는 항일의식이 뚜렷한 당찬 소년으로 바로 의기투합하여 동지가 되었다. ■ 1944년 5월 일본강관 파업을 일으키다 회사에서 회사 간부가 쓴 훈련공 교양서라는 책자를 훈련공들에게 보급했다. 그런데 책의 내용이 황당했다. 훈련공들은 밥만 많이 먹는다, 농땡이를 잘 부린다, 싸움질을 잘 한다 등 모욕적인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이 책자는 조선 청년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류만수는 영향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몇몇 청년들을 방으로 불러들였다. 이번 일을 방치하면 모욕과 차별이 뒤따를 것이다. 조선 청년들은 멍청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한다. 류만수는 이들에게 조문기와 작성한 계획안을 내놓았다. 그날 밤 대표자 회의를 거쳐 각 방마다 회의가 열렸다. 조선인을 멸시하는 책이 도화선이 되었지만 공부를 시켜준다며 속여서 군수공장에 불러들인 일제에 대한 분노가 기름이 되었다. 다음날 3천 명의 조선인 청년들이 식당에 모여 구호를 외쳤다. 훈련공 대우를 개선하라! 조선인 차별을 철폐하라!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류만수와 조문기는 전날 밤에 짐을 챙겨 기숙사를 빠져나와 미리 준비해둔 노무자 숙소로 숨었다. 이 시기에 군수공장에서 일어난 유일한 파업이었다. 류만수는 조문기와 짐을 나르는 힘든 노동을 하며 한동안 숨어 지냈다. 이때 류만수는 일본에서 조선인노동운동을 지도했던 무정부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서상한(1901~1967)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1944년 11월 류만수는 귀국을 결정했다. 조선에 가서 민족을 배반한 친일거두와 침략의 원흉을 처단해서 우리 민족을 긍지를 되찾자. 류만수는 함께 하기로 한 조문기와 귀국 이후의 세부 계획을 세웠다. 가장 먼저 동지를 규합하여 비밀단체 구성하고, 친일 거두와 침략의 원흉을 처단한 다음 중국으로 망명한다는 계획이다. 서상한의 도움으로 도항증을 마련한 두 사람은 귀국선에 올랐다. ■ 애청을 결성하다 1945년 3월 초, 서울 관수동 류만수의 집에서 조문기, 강윤국, 우동학, 권준, 박호영까지 여섯 명의 청년들이 모여 비밀결사 대한애국청년당(애청)을 결성했다. 이들은 모두 유만수의 지인들이었다. 류만수가 임시의장이 되었다. 모임 장소도 당분간 류만수의 집으로 결정했다. 애청의 목적과 행동지침은 류만수와 조문기가 준비한 초안대로 결정했다. 애청의 첫 사업은 친일 거두 3명과 총독부 인사 3명의 처단이었다.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을 앞장 서 죽인 살인마 박춘금, 군수품을 상납하는 화신재벌 박흥식, 독립운동가를 잡아 고문하고 죽인 대가로 중추원 참의가 된 고등경찰 김석태를 골랐다. 정보 수집은 강윤국, 박호영, 권준이 맡았다. 거사에 쓰일 무기는 다이너마이트와 권총으로 결정했다. 박춘금의 특별한 움직임을 탐지한 류만수가 전보를 쳐 동지들을 불러 모았다. 명월관에서 대의당을 결성한다는 정보를 공유했다. 대의당에 참여하는 자는 박춘금, 이성근, 김동환, 고원훈, 손영목 등 일제에 충성경쟁을 벌이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대회까지 아무런 무기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당 결성 이후에 거사를 결행하기로 했다. 류만수는 수색 변전소 작업장의 인부로 취업하여 현장감독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했다. 20여일이 지나자 현장감독이 류만수를 불렀다. 자네 발파경험이 있다고 들었네. 예, 무슨 일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실습을 거쳐 발파작업을 맡게 된 류만수는 지하에 들어가 발파작업을 하면서 다이너마이트를 분해해 떡처럼 뭉쳐져 있는 내용물을 조금씩 떼 내 운동화 밑창에 넣었다. 10여일 빼돌리고 뇌관 2개도 빼냈다. 한편 강윤국은 만취한 헌병 장교가 옷을 벗어 놓고 씻는 사이에 권총 한 자루를 빼냈다. 1945년 7월21일, 다시 관수동 류만수가 작전을 개시를 선언했다. 마침내 기회가 왔소. 3일 후에 박춘근이 아시아민족분격대회를 개최한다니 이 대회를 저지합시다. 회의 끝에 류만수, 강윤국, 조문기 세 사람이 이번 거사에 나서고 다른 동지들은 정보를 수집하기로 결정했다. ■ 친일부역자들의 소굴 부민관을 폭파하다 거사를 앞두고 강윤국이 장사동에 구한 하숙방에서 류만수를 비롯한 세 청년이 시한폭탄 제작에 골몰했다. 남은 시간은 겨우 사흘이었다. 당장 부닥친 문제는 심지였다. 작업장에서 사용하는 것은 불꽃이 크게 일고 소리가 요란하여 발각될 위험이 높았다. 눈앞에서 타 들어가도 잘 보이지 않고 일정한 속도로 타들어가는 심지가 필요했다. 이틀 동안 밤을 새웠으나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류만수가 탄성을 질렀다. 이젠 됐다! 바싹 말린 명주실이 이런 조건에 적합하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마침내 목침 크기의 시한폭탄 두 개가 완성되었다. 시계를 보니 행사가 시작한 지 이미 한 시간이나 지나버렸다. 류만수와 조문기, 강윤국은 폭탄을 잡은 손을 상의를 벗어 가리고 태평로까지 내달렸다. 숨을 고르며 사람들로 꽉 들어찬 대회장에 들어섰다. 조선총독, 정무총감, 군사령관 등 침략의 원흉들과 박춘금을 비롯한 친일부역자들, 그리고 중국과 대만을 비롯한 아시아에서 온 친일대표들이 앉아 있었다. 세 청년은 대범하게도 행사 관계자처럼 단상으로 걸어 나가 단상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무대 밑에 폭탄을 설치하고 행사장을 빠져나왔다. 정확히 3분이 지난 9시 9분 50초에 귀를 찢는 폭음이 연달아 들렸다. 대회는 엉망이 되었다. 다음 날 신문 사회면 구석에는 대회가 해산되었다는 단신이 실렸다. 그러나 서울은 어디를 가나 부민관 폭파사건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총독부는 곧바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경찰을 총동원하여 범인 검거에 나섰다. 쌀 한 말에 10원하던 시절에 현상금이 5만원이었다. 일제는 요시찰 불령선인을 무작위로 연행했다. 고문에 못 이겨 내가 범인이라고 자백한 사람이 수십 명에 이르렀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류만수는 자신의 집에서 동지들과 라디오로 일왕의 항복 방송을 들었다. ■ 분단된 조국에서 굶어죽다 광복의 기쁨은 며칠 가지 못했다. 해방된 조국의 남과 북에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했던 것이다. 남쪽을 점령한 미군은 건국준비위원회와 임시정부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1948년 38선을 베고 죽겠다며 단선을 반대하던 백범 김구가 암살되었다. 유만수와 조문기는 사설 군사조직인 인민청년군을 조직했다. 통일정부 수립을 방해하고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세력에게 겁을 주기 위한 군사조직이었다. 1948년 6월2일, 류만수와 조문기는 단선을 반대하는 행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친일경찰 김종원에게 고문을 당하고 1년 동안 징역을 살았다. 그 사이 대통령 이승만의 명으로 반민특위가 해체되었다. 류만수는 해방 직후에 친일파들을 처단하지 못한 것을 통탄했다. 감옥에서 출소한 류만수는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자그마한 철공소에 취업했다. 그러나 류만수는 애청 동지들과 함께 대통령 암살 정부전복음모사건이라는 조작된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고문을 당했다. 사건이 조작된 것으로 밝혀져 풀려나기는 했으나 건장하던 몸은 완전히 망가졌다. 그럼에도 동지들을 챙겼다. 부산에서 지낼 때는 총각이던 동지 조문기에게 참한 처녀를 소개해 짝을 지워주기도 했다. 다시 서울에 왔으나 셋방조차 구할 돈을 마련하지 못해 중랑교 다리 밑에서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공장에 다녔으나 월급을 제때 받지 못해 다섯 아이들에게 밥도 제대로 먹이지 못할 때 폐병 3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입원조차 못하고 있을 때 동지 조문기가 나서면서 국립마산결핵병원에 입원하여 병을 치료하고 완치되었으나 3년이 지난 1975년에 류만수는 운명하고 말았다. 향년 53세. 조문기는 사람들이 류만수의 사인을 물으면 눈시울을 붉히며 굶어 죽었소.라고 했다. 부민관폭파사건의 주역들이 독립유공자로 신청하지 않자 보훈처에서 신문에 광고까지 냈으나 아무도 신청하지 않았다. 조문기는 동지의 유족을 돕기 위해 대신 신청서를 썼다. 정부는 류만수 선생에게 1977년에 건국포장을, 1990년에 애국장을 추서했다.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36. 제2의 안중근 꿈꾸었던 이수흥 의사

1928년 6월 28일 경성지방법원 법정에서 포승줄로 묶인 22세의 조선 청년이 일본인 판사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조선에 들어온 것은 대관을 암살해서 국체를 변혁하기 위해서였다. 참의부 명령을 받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내가 단독으로 한 일이다. 안중근이 이등을 죽인 것을 본받고 싶었다. 청년은 5척 단신이지만 태도가 당당하고 목소리도 단호했다. ■제2의 안중근 꿈꾸었던 22세의 청년 1926년 6월 10일, 경성에는 순종의 장례식을 기회로 31만세운동 때처럼 대한독립을 염원하는 만세 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7월 10일 저녁 경성 동소문파출소에서 밤의 정적을 깨는 총성이 울렸다. 파출소 앞에서 청년을 심문하려던 순사가 청년이 쏜 권총에 맞아 쓰러졌다. 두 달이 흐른 9월 9일, 이번에는 안성군 부호의 집에서 청년 두 명이 나타나 권총을 겨누며 군자금을 요청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다시 한 달여가 지난 10월 20일 안성군 백사면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에 권총을 든 청년이 총을 쏘고 사라졌다. 닷새가 지난 10월 25일에는 경성 수은동 전당포에서 한 청년이 권총을 겨누며 군자금을 요구하는 사건이 또 일어났다. 일제는 사건 초기부터 많은 경찰을 풀어 범인 색출에 나섰으나 범인은 오리무중이었다. 수천 명의 경찰을 동원하고서도 찾지 못하던 범인이 넉 달 만에 결국 체포됐다. 서울과 경기도를 몇 달간 떠들썩하게 했던 청년은 현상금을 탐낸 일가친척의 밀고로 체포된 것이다. 주모자는 이수흥(李壽興), 그를 도운 협력자는 이수흥의 친구 유남수와 그의 형 유택수 형제였다. ■외동아들이 세상의 차별에 맞서다 이수흥은 1905년 이천군 읍내면 창전리에서 유학자 설산(雪山) 이일영(李日榮)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면암 최익현의 제자였던 이일영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활동에 참여했다. 이때 이일영은 동문수학한 채상덕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후 채상덕은 만주로 망명해 무장독립단체 의군부 총재로 활약했다. 이일영은 두 번 장가를 들었으나 아들을 보지 못하고 재혼한 아내마저 세상을 떠났다.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줄 사람을 찾던 그는 원주에 사는 이씨 처녀가 혼처를 찾는다는 소문을 듣고 50대라는 자신의 나이를 속이고 장가들었다. 이런 까닭에 부부 사이는 좋지 않아 결혼 10년 만에 이수흥이 태어났다. 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우던 소년 수흥은 11세가 되던 1915년에 이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깊이 사귄 친구가 유남수였다. 이일영은 늦게 얻은 아들을 깊이 사랑했으나 친척과 이웃들이 수흥을 차별하자 1918년 봄에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사했다. 수흥의 부모는 이사한 후 사이가 더욱 벌어졌다. 수흥이 14세가 됐을 때 모친이 재가하고 말았다. 자신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에게 크게 상심한 수흥은 만세운동이 온 나라를 휩쓸던 1919년 4월에 학교를 자퇴하고 절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됐다. 놀란 아버지가 절로 찾아와서 장가를 들고 때가 오기를 기다리라고 간절히 설득해 수흥의 승려생활은 2년 만에 마감됐다. 집에 정을 붙이지 못하던 수흥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사진통신사에 들어가 잡일을 했다. 일터에서도 이수흥은 일본인 주인의 차별대우를 받아야 했다. 어릴 적부터 차별을 경험했던 수흥은 일제의 민족 차별정책에 분노하며 독립투쟁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일제의 심장을 저격하는 독립군으로 거듭나다 1922년에 만주로 망명한 이수흥은 만주에서 독립투쟁을 지휘하는 아버지의 친구 채상덕을 찾아갔다. 채상덕은 의병운동을 함께했던 친구의 외아들인 이수흥을 친아들처럼 돌보아주고 이수흥도 채상덕을 스승으로 존경하며 따랐다. 채상덕은 독립운동에 헌신하려는 이수흥의 다짐을 듣고 김좌진 장군이 사관 양성을 위해 세운 신명학교에 입학시켰다. 신명학교를 졸업한 이수흥은 채상덕을 따라 참의부 소속되어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참의부는 1923년 창설한 이래 1925년까지 한만국경에서 벌어진 전투를 주도했다. 1924년 압록강을 시찰 나왔던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저격한 사건도 참의부 소속 전사들이다. 참의부의 파상적 공세에 골머리를 앓던 총독부가 조선인 밀정을 통해 집안현 고마령에서 참의부 수뇌부가 회의를 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대대적인 소탕 작전에 들어갔다. 1925년 3월 15일, 회의가 열리는 고마령을 기습한 일본 경찰의 집중 공격으로 참의부 사령관 최석순을 비롯한 간부와 부대원 42명이 전사하고 말았다. 다리에 총상을 입고 겨우 살아남은 이수흥은 채상덕을 찾아가 사건의 경위를 알렸다. 같은 해 6월 11일, 일제는 만주 군벌 장작림의 지방정부와 비밀 교섭을 벌여 한인 독립운동 단체의 해산에 대한 협조, 독립운동가의 무장해제 및 체포 후 일본으로의 인계 등을 골자로 하는 미쓰야협정을 체결했다. 이로 인해 참의부의 무장투쟁은 빠르게 위축됐다. 채상덕은 이수흥에게 참의부가 처한 상황을 알리고 권총 두 자루의 소재를 알려주며 안중근을 본받으라고 당부하고 자결했다. 아버지이자 스승으로 모시던 채상덕의 자결에 이수흥은 큰 충격을 받았다. 부상을 치료하고 유족을 돌보며 1년 상을 마친 이수흥은 스승이 맡겨둔 권총을 찾아 휴대하고 부대장을 만나 단독행동에 대한 허락을 얻었다. 이수흥이 권총 두 자루를 가슴에 품고 압록강을 건넜다. 1926년 7월, 걸어서 경성으로 잠입한 이수흥은 만주로 떠날 당시 총독부 급사로 일했던 친구 유남수를 찾았으나 친구가 일을 그만두고 이천으로 내려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유남수의 도움을 받아 총독을 암살하려 했던 계획은 잠시 미뤄두고 이천으로 향하던 이수흥은 동소문 파출소 순사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권총을 휴대한 것이 발각된 줄로 판단하고 순사를 향해 총을 쏘고 재빨리 현장을 벗어났다. 한밤의 총격사건으로 경성 시내에는 비상경계가 펼쳐졌다. 하지만 이수흥은 무사히 시내를 벗어나 이천에 도착해 유남수의 집을 찾았다. 이수흥은 유남수와 그의 형 유택수에게 자신의 신분과 입국 목적을 밝히고 독립자금을 마련하는 투쟁에 함께할 것을 권했다. 형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 위험한 일에 기꺼이 함께 하기로 결의했다. 9월 7일, 이수흥은 유남수와 함께 안성의 부자 박승륙을 찾아갔다. 이수흥은 그의 아들 박태병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군자금을 요구했으나 거절하고 잡으려 하자 사살하고 그 길로 안성을 벗어나 몸을 숨겼다. 2주가 지난 후 이수흥은 여주 식산회사 사장 이민웅의 집을 찾아가 군자금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민웅이 자선사업에 많은 돈을 투자해 자금이 없다고 해 순순히 믿고 나왔으나 곧 자신을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식산회사를 직접 찾아갔다. 회사 가까운 곳에 주재소가 있어 거사 후 퇴로가 차단될 위험이 있었다. 주재소를 습격한 후 식산회사를 찾아갔으나 이미 이민웅은 퇴근해 버린 상태였다. 이수흥은 그 길로 백사면사무소로 들어가 숙직 중이던 면서기를 저격하고 자금 확보하고 몸을 숨겼다. 한편 범인의 키가 5척이라는 정보를 확보한 이천경찰서장이 관내 5척 남자들을 모조리 조사하도록 지시했으나 범인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때 이수흥은 아버지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부친의 장례식에 참석해 발인까지 무사히 마친 이수흥은 경찰이 내건 현상금에 눈이 먼 친척의 밀고로 체포되고 말았다. ■독립군의 마지막 유언 이수흥은 수감 생활을 하면서도 의젓했다. 명상과 독서, 감상록 집필로 일관하면서 담담히 집행을 기다렸다. 이수흥은 자신의 변호사에게 편지를 썼다. 혹시라도 갱생의 길이 있기를 비는 것은 단두대 위에 피를 뿌려 혼을 깨끗이 하는 것만 못합니다. 오탁한 세상을 구차히 살아서 치욕스럽게 삶을 끝내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다만, 택수와 남수 형제는 죄가 없으니 힘껏 변호하라. 내가 죽어서도 그 은혜는 갚겠습니다. 1929년 2월 27일, 이수흥은 자신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찾아온 친지들에게도 유언을 남겼다. 나는 일제 재판부에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 내가 기필코 대한독립을 성취하려 했더니 원수들의 손에 잡혀 일의 열매를 못 맺고 감이 원통할 따름이다. 우리 동포 여러분은 끝까지 싸워 우리나라의 독립을 성취해 주시기 바란다. 사형을 당하기 전 술 두 잔을 마신 이수흥은 간수가 남길 말이 있느냐고 묻자 가슴속에 품어왔던 생각을 밝히고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한 후 교수대를 향해 걸어갔다. 제2의 안중근을 꿈꾸던 이수흥은 25세의 청년으로 영원히 살아남았다. 이수흥 선생의 공훈을 기려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6년이 지난 1968년에는 유택수 선생에게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35. 임시정부의 개혁가… 석농 오영선

고양 출신의 석농(石農) 오영선(吳永善, 1886~1939)은 부부가 모두 독립운동가다. 부인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 1873~1935)의 둘째 딸 이의순(李義橓)이다. 아내 이의순 집안은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할아버지 이발, 언니 이인순, 형부 정창빈도 모두 독립운동가다. 오영선은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으나 육군무관학교가 폐지되는 바람에 군인의 꿈을 접어야 했다. 이후 일본 도쿄물리학교에 입학했으나 배일사상이 문제가 되어 퇴학당하고 만다. 고국으로 돌아온 오영선은 이동휘가 세운 개성 보창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한다. 오영선이 언제 어디에서 이동휘를 만났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이동휘의 교육생이라고 불릴 정도로 믿고 따랐다. 이동휘가 설립한 보창학교에서는 을사늑약 이후 국권회복을 위해 학생들에게 중국고전, 한글, 일본어, 영어, 기초과학 등을 가르쳤다. 매일 한 시간씩 군사훈련도 시켰다. 오영선은 캐나다 선교사 그리어슨(Robert Grierson)이 세운 협신중학교 교사로도 활동한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이 끝내 강제로 병합되자 이동휘는 국내에서의 국권회복운동은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이동휘의 교육생이라 불리는 정창빈, 장기영 등 30여 명을 데리고 기독교 포교를 명분으로 북간도로 망명한다. 오영선도 이동휘의 교육생들과 함께 이때 망명길에 나선다. 오영선은 북간도에 망명한 후 북간도 한인사회를 통일적으로 결집한 간민교육회가 연길현에 세운 광성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한다. 그는 간도 한인 자치기구인 간민회(墾民會) 의원에 선출되는 등 북간도의 한인들에게 한인의 권익옹호는 물론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활동한다. 러일전쟁 10주년이 되는 1914년, 러시아에서는 일본에 대한 복수전의 여론이 들끓고 있었다. 이동휘는 제2의 러일전쟁에 대비해 광복전쟁을 계획한다. 이동휘와 이종호는 광복전쟁을 꿈꾸며 독립군 장교 양성을 위해 길림성 왕청현 나자구에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 일명 대전학교)를 설립한다. 오영선은 이 학교의 교관으로 활약한다. 그러나 일본영사관의 요구로 중국이 동림무관학교를 폐쇄하자 오영선은 일부 학생들을 이끌고 훈춘으로 가 이동휘가 군사양성을 위해 세운 북일중학교에 합류한다. 오영선은 연해주를 중심으로 러시아 한인사회의 항일활동이 활발해지자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으로 이동한다. 1918년 8월 29일 한민학교에서 열린 국치일기념행사에서 오영선은 하늘에 닿을 만큼 큰 치욕을 국내에서는 모든 형제ㆍ자매의 흘러내린 붉은 피가 얼마가 되던지 씻어낸다면 우리 해외에 있는 동포들도 피를 흘려 오늘날의 국치를 씻어내기를 희망한다며 붉은 피로 민족의 치욕을 깨끗이 씻어내자고 열변을 토한다. 아내 이의순은 국내에서는 많은 여학생이 피를 흘렸는데 해외에 있는 여자들도 어찌 수수방관하고 집안의 안락을 욕심내며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원수의 총칼 아래서 국가를 위해 생명을 바칠 것을 우리들의 행복이라고 믿는다라고 하며 여성도 목숨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할 것을 호소한다. 1920년 이동휘가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가 되자 오영선은 국무원 비서장으로 국무총리를 보좌한다. 임시정부의 활동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임시정부 조직, 독립운동 방법 등을 두고 각 계파 간에 불신과 갈등이 깊어진다. 이동휘는 임정쇄신안으로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위원제로 변경할 것을 제안한다.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동휘는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상해를 떠나버린다. 오영선은 상해에 남는다. 마침내 1921년 2월 초 박은식, 김창숙, 원세훈 등 상해의 주요 독립운동가 14명은 우리 동포에게 고함을 선언하고 국민대표회 소집을 요구한다. 이 선언은 국민대표회 소집에 대한 지지와 반대를 불러일으킨다. 개조파는 임시정부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임시정부의 잘못된 점을 개선하자고 주장했다. 창조파는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대통령 이승만을 지지하는 정부옹호파는 국민대표회 소집은 정부파괴운동이라고 반대한다. 이렇게 국민대표회 소집을 두고 분열과 갈등의 골이 깊어질 무렵 오영선은 1922년 1월 1일자 독립신문에 신년의 신 각오라는 논설을 발표한다. 그는 이 글에서 구습을 깨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 위한 7가지 각오를 제시한다. 첫째 공과 사의 구분, 둘째 책임감, 셋째 개인 욕망의 억제, 넷째 감정이 아닌 이성, 다섯째 동지의 결점과 단점을 지적하지 않기, 여섯째 경거망동 금지, 일곱째 동지를 선의로 대하자는 내용이었다. 이 글은 독립운동가 내부의 분열과 갈등은 독립운동의 역량을 좀먹는 것이고, 동지들에 대한 믿음과 화합과 단결만이 독립을 앞당기는 처사라고 역설한 것이었다. 오영선은 우리는 독립운동가라는 의미 앞에서는 다 동지입니다. 우리 중에 큰 병이 무엇무엇 해도 의심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 사이의 비방, 질시, 시기, 저주 대부분은 선의로 상대하는 중에서 개선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오영선이 신 각오 7가지를 발표한 다음 달 열린 임시의정원에서는 국민대표회 소집 문제가 최대 현안이 되었다. 오영선은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내분을 제대로 수습하지도 않은 채 무책임하게 미국으로 도망치듯이 가버렸다고(1921년 5월) 이승만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한다. 오영선은 국민대표회 소집을 위한 최종 방안으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내정불통일 ▲외교의 실패 ▲조각 불이행이라는 책임을 물어 조상섭 등과 함께 6월 5일 대통령 및 각원 불신임안을 제출한다. 이 불신임안은 6월 17일 국민대표회 소집 찬성안과 함께 반대파가 퇴장한 가운데 표결로 통과된다. 이승만은 대통령불신임안은 불법이라고 강하게 반발한다. 임시정부 개혁에 대한 오영선의 노력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이에 오영선은 국민대표회를 지지하는 의원들과 함께 의원직을 사퇴하고 만다. 그럼에도 사태가 해결되기는커녕 국민대표회가 소멸될 위기에 봉착하게 되자 오영선은 국민대표회 소집을 주장하는 지지파와 이승만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정부옹호파를 중재해 드디어 국민대표회가 개최된다. 오영선의 중재로 어렵게 열린 국민대표회의에서도 각 계파간의 갈등은 여전했다. 오영선은 개조파였다. 그는 만약 창조파의 제안대로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한다면 결국 두 개의 정부를 낳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고 창조파의 주장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오영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창조파는 자신들만이 참여하는 국민대표회를 열어 국호를 한, 연호를 건국기원으로 하는 새로운 정부를 발표한다. 이에 오영선은 개조파 의원 56명과 함께 국민대표회를 탈퇴하며 창조파의 조치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한다. 결국 장장 6개월에 걸친 국민대표회는 아무런 성과 없이 결렬되고 서로 간의 불신만 남긴 채 끝나고 말았다. 오영선은 임시정부 개혁을 위해 다시 한 번 돌파구를 찾아 나서야만 했다. 그의 정부개혁 방안은 해외 독립운동의 최대 근거지인 만주에서 활동 중인 정의부와 참의부, 신민부 등을 연계해 정부를 구성하는 방안이었다. 이 방안은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하는 문제와 헌법 개정을 주요 현안으로 설정했다. 1924년 12월 박은식을 국무총리로 하는 새로운 내각이 구성되고 오영선은 법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다음해 임시의정원에서는 3월 23일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하고 박은식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한다. 4월 7일에는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로 헌법을 개정해 공포한다. 헌법이 개정되자마자 법무총장 오영선은 1925년 4월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를 방문해 임시헌법 개정의 취지를 설명하고 먼저 정의부 간부들과 임시정부와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한다. 1925년 7월 7일 정의부의 이상룡을 초대 국무령으로 선출하고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 3부의 주요 인물들을 국무원에 임명했으나 이들이 국무원에 불참함으로써 정부조직에는 실패하고 만다. 오영선은 국무원으로서 임시정부의 개혁과 대동단결을 위해 애썼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상해에서 영면한다. 빼앗긴 조국은 풍찬노숙으로만 되찾을 수 없다. 우리 내부에서부터 먼저 화합하고 대동단결해야 한다. 모든 나라는 침입자가 오기 전에 내부의 분열로부터 망한다고 했다. 역사의 법칙이다. 권행완(정치학박사ㆍ다산연구소)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34. 만주 무장투쟁을 후원하다… 무원 김교헌

궐기하라! 독립군! 독립군은 일제히 천지를 바르게 한다. 한 번 죽음은 사람의 면할 수 없는 바이니, 개 돼지와도 같은 일생을 누가 원하는 바이랴. 살신성인하면 2천만 동포는 같이 부활할 것이다. 일신을 어찌 아낄 것이냐, 힘을 기울여 나라를 회복하면 삼천리 옥토는 자가(自家) 소유이다. 일가의 희생을 어찌 아깝다고만 하겠느냐. 아아!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2천만 형제자매여! 육탄혈전함으로써 독립을 완성할 것이다 1919년 2월 초 중국 길림에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이다. 이 담대한 선언은 대종교 제2대 교주 김교헌과 이동녕이 주도해 조소앙이 지은 것으로 28독립선언문과 31독립선언문에 영향을 주었다. 놀랍게도 서명자 39인 중 27인이 대종교인이다. ■ 역사의 격랑에서 역사를 움직이는 힘을 발견하다 무원 김교헌(金敎獻, 1868~1923)은 1868년 수원군 구포리(현 화성시 비봉면)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소론이었으나 숙종의 국구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직계라는 배경을 가지고 정승 판서를 배출한 명문가였다. 부친 김병희도 이조판서와 홍문관제학을 지낸 고위관료였다. 4형제의 장남인 그는 18세가 되던 1885년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1892년에 성균관 대사성에 오를 정도로 탄탄대로를 걸었다. 격동기에 관리로 살던 당대 지식인들의 인식이 바뀐 것은 여럿이지만 가장 큰 충격을 던진 것은 아마도 독립신문과 만민공동회일 것이다. 놀랍게도 독립신문은 군수나 관찰사를 백성의 종으로 규정할 뿐 아니라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면 인민에게 권리를 주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관리 김교헌도 이러한 거대한 변화의 물결에 몸을 실었다. 1898년부터 독립협회에 참여했던 것이다. 그해 10월29일, 김교헌은 1만 명의 청중이 지켜보는데 종로에서 열린 관민공동회에서 관(官)을 대표한 의정부 참정 박정양과 민(民)을 대표한 백정 박성춘의 연설을 들었다. 바야흐로 민중이 역사의 중심이 되는 시대가 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 평생 동지가 되는 유근(1961~1921)을 만났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 외교권이 상실되었으나 여전히 관직에 몸을 담고 있던 그는 외교문제가 첨예하게 격돌하는 동래부사에 임명되었다. 1906년 10월, 동래부사 김교헌은 일본 통감부의 비호를 받던 일본인들의 침탈행위를 법에 따라 징계했다가 면직되는 수모를 겪었다. 망해가는 나라의 관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깊이 고뇌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면직되어 귀경한 김교헌은 비밀결사 신민회의 회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이때 사귄 이동녕(1869~1940)은 평생 그의 가장 든든한 동지가 되었다. 규장각 제학의 신분으로 김교헌은 문헌비고와 국조보감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때 그는 단군이 신화 속의 인물이 아니라 홍익인간과 제세이화의 큰 뜻을 폈던 실존 인물임을 확인하였다. ■ 대종교에 입교하여 단군을 되살리다 1910년 8월29일, 국망을 당했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것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약해서만이 아니었다. 김교헌은 최남선이 주도하던 조선광문회에 참여하여 조선의 명저를 시대에 맞게 출판하였다. 함께한 동지들은 박은식, 장지연, 유근 등이다. 이때 그가 소장하던 장서는 고전 편찬사업에 참고서로 활용되었다. 1911년에는 박영효를 총재로 내세운 문예구락부에도 현채, 류근, 정인보 등과 참여하였다. 국권을 되찾을 방안을 모색하던 김교헌은 운명적으로 홍암 나철(1863~1916)과 만나게 되었다. 을사늑약 이후 네 차례나 도일하여 일본 관리들과 만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담판을 벌였고,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해 권총을 들었던 열혈지사였던 나철은 1910년 1월15일 오기호, 유근 등과 함께 서울에서 대종교를 세웠다. 대(大)자의 뜻이 크다는 한이며 종(倧)은 단군을 가리키는 검이다. 대종교에 우국지사들이 몰려들었다. 상동청년학원에서 교육운동아 앞장섰던 이동녕, 이회영을 비롯하여 박은식, 신채호, 정인보 같은 역사학자들과 주시경, 김두봉, 이극로 같은 한글학자들도 입교했다. 일제의 판단대로 대종교는 조국을 되찾으려는 열혈 지사들의 소굴이 되었다. 나철은 김교헌을 깊이 신뢰했다. 명문가 출신으로 고위 관직을 지냈지만 해박한 역사지식과 진솔하고 겸손한 그의 품성을 높이 샀던 것이다. 대종교에 입교한 김교헌은 이내 자신의 사명을 발견했다. 그것은 전설과 신화로 전해지는 단군의 실체를 역사문헌에서 온전히 되살려내는 과업이었다. 김교헌은 동지 유근, 박은식과 함께 수많은 사서에서 단군 관련 기록을 찾아내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1911년에 펴낸 단조사고는 단군에 대한 자취의 처음과 끝, 문화적 흔적을 망라하고 있다. 이 책은 민족주의 사관의 밑거름이 되었고, 해외의 독립군들에게 무장투쟁의 이념을 제공하였다. 김교헌은 다시 연구에 몰두하여 1914년에 신단민사와 신단실기를 완성하였다. 신단민사는 우리 민족의 뿌리가 광대한 영토에 걸쳐 있었다는 사실을 밝힌 책이다. 놀랍게도 그는 우리를 침략한 원수의 나라라고 배웠던 요, 금, 원, 청나라 역시 단군민족의 후손의 나라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김교헌은 단군을 만나고 고대사를 연구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 무장투쟁을 위해 교단을 만주로 옮기고 망명하다 나철은 1911년에는 만주 화룡현 청파호에 교당과 지사(支司)를 설치하였다. 애국지사들이 대종교에 속속 입교하자 당황한 조선총독부는 1915년에 부령 제83호 종교통제안을 공포해 12월부터 포교활동을 전면금지하였다. 일제의 혹독한 탄압으로 교단이 존폐의 위기에 몰리자 1916년 8월, 제자 여섯과 함께 구월산 삼성사에 들어간 나철은 9일이 지난 15일, 호흡을 조절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보름이 지난 9월1일, 김교헌은 나철의 유명에 따라 대종교 제2대 교주에 올랐다. 1917년 3월, 김교헌은 서울 집과 땅을 팔아 마련한 자금을 가지고 만주로 망명했다. 총본사를 만주에 세운 그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대종교 전파에 전력을 쏟았다. 신단민사를 비롯한 역사책도 보급하였다. 그가 저술한 신단민사는 동포들이 성경처럼 여기며 읽고 또 읽었다.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의 학생을 비롯한 총명한 청년들은 책의 내용을 전부 외울 정도였다. 상해 임시정부를 이끌던 신규식, 이동녕, 조성환 같은 이들도 대종교를 받아들였다. 김교헌은 이동녕과 함께 만주 전역에 46개에 달하는 시교당을 건립하였다. 시교당은 만주에 흩어져 살고 있던 100만 동포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1919년 12월 김교헌은 대종교 교인으로 구성된 북로군정서 총재에 교단의 지도자인 서일, 사령관에 김좌진을 임명했다. 북로군정서 독립군들이 불렀던 군가에는 결전의 의지가 충만하다. 하늘은 미워한다. 배달족의/ 자유를 억탈하는 왜적들을/ 삼천리강산에 열혈이 끓어/ 분연히 일어나는 우리 독립군/ 하느님, 저희들 이후에도/ 천만대 후손의 행복을 위해/ 이 한 몸 깨끗이 바치겠으니/ 빛나는 전사를 하게 하소서. 이듬 해 9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부대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청산리와 봉오동에서 일본군 정규군 1천300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일본군과 전면전을 벌여 승리한 것이다. 이 전투를 지휘한 홍범도 장군 역시 대종교인이다. 독립군에게 패배한 일본군은 한국인 대토벌 작전을 벌여 대종교인을 포함한 1만여 동포들을 학살했다. 김교헌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동만주 화룡현에 있던 대종교 총본사를 영안현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1921년 8월 하순, 동지 서일이 토비들의 습격을 받아 밀산의 독립군 여럿이 희생되자 27일 산에 올라가 정좌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철을 이은 서일의 자결은 김교헌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같은 해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에서 열린 열강의 국제회의에 참관원을 파견하여 독립승인을 제의하고 세계 각국의 동정을 얻기 위해 외국어에 능통한 8명을 외교대표원으로 선발 파견하였다. 이때 김교헌은 서재필(미국) 등과 함께 외교대표원으로 영국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한국독립 승인은 의제에도 상정되지 않았다. 불꽃처럼 후반생을 치열하게 살던 김교헌의 심신도 지쳐갔다. 동포들과 동지들이 일제의 총칼에 무참히 죽어나가는 소식을 들으며 그의 건강은 급격하게 나빠졌다. 1923년 12월25일, 길림성 영고탑에서 고단한 그의 육신은 비로소 안식을 얻었다. 단군을 중심에 둔 역사관을 정립하여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웠으며, 만주 무장투쟁의 숨은 공로자였던 김교헌의 위대한 삶은 한국독립운동사의 찬란한 빛이다. 또 하나, 반드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10만의 대종교인들이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이다.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33. 조국 광복에 모든 것을 바친 거인… 영석 이석영

1910년 12월 30일 이른 새벽, 한 무리의 사람들이 칼바람을 맞으며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이들은 영석 이석영(李石榮, 1855~1934)과 우당 이회영(1867~1932)을 비롯한 6형제와 그 가족들이었다. 고위 관직을 벗어던지고 청년교육에 앞장섰던 월남 이상재가 이 소식을 듣고 이렇게 탄식했다. 동서 역사상 나라가 망한 때 나라를 떠난 충신 의사가 수백, 수천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당 일가족처럼 6형제와 가족 40여 명이 한마음으로 결의하고 나라를 떠난 일은 전무한 것이다. 장하다! 우당 형제는 참으로 그 형에 그 동생이라 할 만하다. 6형제의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百世淸風)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 이 무렵 이동녕, 이상설, 김동삼을 비롯한 동지들도 이회영 6형제가 자리 잡은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을사늑약 이후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서 함께 활동했던 동지들이다. 서간도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려는 계획도 신민회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다 영석(潁石) 이석영은 1855년 서울에서 이조참판을 지낸 이유승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석영은 6형제 중 둘째다. 그는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남양주에서 살게 되었다. 양부 이유원은 대원군의 정적으로 꼽히기도 했던 인물로 남양주에서 서울까지 남의 땅을 밟지 않고 왕래했다는 말을 들을 정도의 갑부였다. 이석영은 양부로부터 현재의 시세로 계산하면 1조 원이 넘는다는 큰 재산을 물려받았다. 21세에 과거에 급제해 승지를 비롯한 요직을 지내고, 2품 장례원 소경이란 벼슬을 받았으나 적성에 맞지 않고 몸이 약해 직무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대며 사직 상소를 올리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의 아우 이회영과 이시영 역시 한학과 신학문을 두루 익히고 일찍부터 국권회복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었다. 1904년 상동청년학원 함감으로 있던 이회영이 아들과 조카들의 머리를 단발시켜 학교에 입학시키자 처음에는 꾸짖던 그도 신학문의 필요성을 설명하자 곧 공감하고 자신의 아들은 물론 주위에도 입학을 권할 정도로 생각이 유연했다. 만주에 도착한 이들은 중국인처럼 보이기 위해 변발하고 중국옷으로 갈아입었다. 땅을 매입하기 위해 나섰으나 만주인들은 낮선 조선인들이 몰려들자 자신들을 쫓아내려 한다고 생각하고 땅을 팔려 하지 않았다. 이시영이 관직에 있을 때 교류를 가졌던 청나라의 군벌 위안스카이를 만나 사정을 설명해 이 문제를 풀었다. 그러나 만주인들의 적대적인 태도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이석영이 중국 옷을 차려입고 화려한 가마를 빌려 타고 거리에 나가면 그를 만난 만주인들은 황제가 나타났다며 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비치게 해 배타적인 만주족을 굴복시켰던 것이다. 우당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의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에는 이 무렵의 사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둘째 영감은 항상 청년들의 학교가 없어 염려하시다가 토지를 사신 후에 급한 게 학교라, 춘분 후에는 학교 건설을 착수하게 선언을 하시고 토지 수천 평을 내 놓으시고 양식과 땔나무까지 부담하시고 아우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거금을 들여 토지를 확보한 후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했다. 교육과 사업을 병진하는 경학사는 훗날 서로군정서로 발전해 남만주 독립운동의 총본산이 되었다. 만주인들이 옥수수를 저장하던 창고를 개조해 신흥강습소를 열었다. 신흥(新興)이란 민주공화정을 추구하는 신민회의 신자와 다시 일어난다는 흥자를 합친 것이다. 이석영은 이사장격인 교주(校主)를 맡아 학교 운영을 책임졌다. 당시 군사교육을 담당한 교관은 이장녕, 이관직, 김창환으로 대한제국에서 설립한 무관학교의 특별 우등생 출신들이다. 님 웨일즈가 지은 아리랑의 주인공 혁명가 김산도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 그는 신흥학교의 특별한 교육 방식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합니하에 있는 대한독립군 군관학교. 이 학교는 신흥학교라 불렀다. 학과는 새벽 4시에 시작하며 취침은 저녁 9시에 했다. 우리는 군대 전술을 공부했고 총기를 가지고 훈련받았다. 그렇지만 가장 엄격하게 요구됐던 것은 산을 재빨리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이었다. 게릴라 전술은 한국의 지세, 특히 북한의 지리에 관해서는 아주 주의 깊게 연구했다. -그날을 위해. ■2천의 독립군을 기른 거목의 풍모 장래의 독립군을 육성하는 신흥무관학교는 학비와 숙식도 무료였다. 그런데 1911년 지독한 흉년이 들어 미곡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그 많던 자금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한인촌을 건설하고 무관학교를 운영하는 것은 몇몇 개인의 기부와 헌신으로 운영하기에는 벅찬 사업이었다. 신민회는 국외에 독립운동기지와 무관학교의 설립을 계획하면서 총 75만 원의 자금을 모아 전달하기로 결의했었다. 그러나 1911년 9월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사건으로 간부 700여 명이 검거되고 그중 105명이 구속되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동지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나섰다. 학생들은 봄에는 들판에 나가 밭을 개간하고 가을에는 산에 올라 땔감을 마련했다. 대갓집에서 하인들을 부렸던 부인들도 학생들의 해진 옷을 깁고 찬물을 길어다 밥을 지었다. 소문을 듣고 학생들이 몰려들자 학술과 훈련을 함께 배우던 것을 본과와 특별과로 나누었다. 본과는 중학 과정이고 특별과는 사관양성의 속성 과정이었다. 일제는 신흥강습소가 이름과 달리 무관을 양성하는 군사학교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파괴공작에 나섰다. 당시 이 무렵 이석영, 이동녕을 비롯한 신흥강습소를 운영했던 간부들의 동정을 기록한 기밀문서가 여럿 남아있다. 학교 측에서도 학생들에게 아무런 연락도 없이 나타나는 사람은 조사해서 처단하도록 교육했을 정도였다. 1913년 봄 경기도 출신의 한 동지가 찾아와서 이동녕, 이회영, 이시영 등 핵심 간부를 암살하거나 체포하기 위해 편성된 고등계 형사들이 만주로 출발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전해주었다. 러시아에 있는 동지 이상설도 비슷한 사연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심사숙고 끝에 이름이 거명된 사람들은 신분이 노출된 것이니 각각 흩어져서 활동하기로 했다. 이회영은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기 위해 국내로, 이시영은 심양으로, 이동녕은 러시아로 떠났다. 교주인 이석영은 학교와 가족을 돌보기로 했다. 국내로 들어갔던 이회영은 천신만고 끝에 다시 중국으로 탈출했으며, 이시영은 북경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우와 동지들이 떠나자 생활은 물론 학교 운영도 더욱 어려워졌다. 총을 든 마적들에게 잡혀갔다 풀려나고 가족들이 총상을 입기도 하는 등 험한 환경에서 10년을 버티던 이석영도 1920년 무렵 북경으로 터전을 옮겼다. 1920년 신흥무관학교는 폐교할 때까지 2천10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많은 졸업생이 청산리 전투, 봉오동 전투에 참전해 일본군 1천2백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의열단원 중에도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많았다. ■영원히 빛날 그 이름, 영석 이석영 아우와 아들, 동지들이 활동하고 있는 중국 도시의 생활도 녹록하지 않았다. 이석영 형제들과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했던 이관직이 지은 우당 이회영 약전에 이석영과 이회영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세태를 안타까워했다. 영석, 우당, 성재(이시영의 호), 세 사람을 살펴보면 성재는 그 지조와 절개, 덕망, 사업 등에 있어서 형인 영석, 우당 두 사람에게 양보하실 듯한데도 세상 사람들은 모두 성재는 알지만 영석, 우당은 아는 이가 드물다. 1920년대 후반이 되면 독립운동 자금줄이 다 막혀 상해 임정 요인들도 거지나 다름이 없었다. 상해에서 발행되던 한민(1936년 5월)에 서간도 초기 이주와 신흥학교 시대 회상기에 실린 글은 이석영의 늠름한 기상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석영이 수많은 재산을 신흥무관학교 운영에 모두 쏟아 붓고 나중에는 지극히 곤란한 생활을 하면서도 한 마디 원성이나 후회하는 빚이 조금도 없고 태연해 장자의 풍모가 있었다. 1932년 봄, 한국인의 기상을 세계만방에 떨친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일제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 상해에 있던 임정은 내륙으로 계속 이동해야 했다. 아우들도 상해를 떠났다. 78세의 상노인이 된 이석영은 동지들의 짐이 되지 않으려 상해에 남았다. 돌봐주는 이가 없는 상해에서 돈이 없어 두부 비지로 연명하던 이석영은 1934년 쓸쓸하게 운명했다. 그 많던 재산을 조국의 광복을 위해 다 쓰고 굶주리다 세상을 떠난 위대한 이석영 선생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여전히 드물다. 최근 남양주에서 이석영광장을 조성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렇다. 한 사회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분들의 이름을 추모하는 사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남양주시의 결정에 큰 박수를 보낸다. 김산(홍재연구소)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32. 만주에서 독립군을 기른 위대한 교육자 여준

시당(時堂) 여준(呂準,1862~1932)은 1862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죽능리에서 태어났다. 외가인 용인 원삼면 일대는 해주 오씨 집성촌이었다. 고향 원삼면에서 해주 오씨 가문에서 세운 서당에서 한학을 익혔다. 여준은 한학의 석학 재당숙 여규형의 도움으로 20대 이후에 상경하여 한성 회현동에 살았다. 이때부터 여준은 여규형의 주선으로 이웃에 살던 이상설(1870~1917), 이회영(1867~1932), 이시영 형제와 어울리며 한학과 신학문을 두루 섭렵하게 되었다. 때로는 벗들과 절에서 합숙하며 공부하기도 했다. 여준의 재주는 친구들 중에서 빼어나 이시영은 그를 절재(絶才)라고 불렀다. 여준이 신학문을 익히던 무렵 나라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1894년의 갑오농민전쟁과 청일전쟁, 연이어 을미사변과 아관파천(1896)이 벌어졌다. 1896년에는 독립신문이 발행되고, 독립협회가 조직되어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이제까지 숨죽이며 살던 민중들이 제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벌어진 엄청난 변화를 지켜보며 여준은 이상설, 이회영 등 벗들과 외국의 신간서적을 구입하여 신사조를 연구하며 위태로운 나라를 구할 방안을 궁리했다. 1905년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당시 의정부 참찬이던 이상설이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오적을 죽이고 조약 파기를 선언하라고 주장했다. 많은 지사들이 목숨을 끊으며 저항했으나 국권은 일제의 손아귀에 맡겨졌다. 이 무렵 여준은 남대문에 자리한 상동교회를 드나들었다. 상동교회 뒷방에는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하여 이회영, 이상설, 이준 등 지사들이 무시로 모여와 국사를 모책했는데라는 최남선의 증언처럼 상동교회는 당시 민족운동의 요람이었다. 용정 서전서숙과 오산학교에서 민족 교육에 힘쓰다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워지자 동지들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1906년 10월 이상설과 이동녕이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북간도 용정촌에서 제일 큰집을 사들여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우고 한인 청소년을 모집했다. 이상설이 숙장을 맡고 여준은 교사로 참여하여 한문, 정치학, 법학 등을 가르쳤다. 이듬해 4월 이상설이 헤이그밀사로 파견되면서 숙장을 그만 두고, 이동녕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면서 여준이 2대 숙장을 맡았다. 그러나 학교는 재정난에 허덕이고 일제의 감시와 방해가 극심해졌다.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여준은 서숙의 폐교를 선언하고 일제의 눈을 피해 학생을 데리고 훈춘현 탑두구로 옮겨 서전서숙을 다시 건립했다. 이곳에서 학생을 더 모집해 3개 반 74명의 학생들을 1년간 단기 속성과정으로 졸업시키고 학교 문을 닫았다. 귀국한 여준은 상동청년회 교사로 참여했다. 1906년 상동교회 지하실에서 우리 역사 최초로 공화정치를 내세운 비밀결사 신민회가 결성되었다. 신민회라는 이름은 국권을 되찾았을 때 새로운 나라의 주인이 민(民)이라야 한다는 이념에서 비롯되었다. 신민회는 민중을 계몽하는 교육 사업에 주력했다. 여준은 신민회에서 만난 남강 이승훈(1864~1930)의 요청으로 오산학교(五山學校) 설립에 참여했다. 1907년 12월 24일 오산학교 개교식이 거행됐다. 교사는 여준과 서진순, 학생은 단 7명으로 시작한 학교였으나 곧 명문사학으로 전국에 이름을 떨쳤다. 여준은 역사 지리 산술을 가르쳤고, 육군연성학교 교관 출신인 서진순은 체육을 맡았다. 학생들은 아침마다 애국가와 여준이 지은 교가를 불렀다. 뒤 뫼의 솔빛은 항상 푸르리/ 비에나 눈에나 변함없이/ 이는 우리 정신 우리 학교로다/ 사랑하는 학교 오산학교 한 동안 오산학교 교사로 재직했던 춘원 이광수는 여준을 평생 잊지 못할 분이라며 이렇게 추억했다. 내가 오산학교에 부임하였을 때 교원 중에서 가장 어른 되는 분은 여준이었다. 그는 백발이 성성한 노학자로서 키는 작고 목소리는 크고 야무졌으며 높은 식견을 가진 애국지사로서 학생들에게 많은 감화를 주었다. 학교 업무를 대부분 여준이 처리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여준을 교장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여준은 신민회의 요청으로 상동청년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평안북도 정주에서 서울까지 먼 거리를 오가며 바쁘게 생활했다. 1910년 7월에 제1회 졸업식이 열렸는데 이때 이승훈은 졸업생들에게 정직과 성실을 강조하고 여준은 이를 실행할 것을 당부했다. 천만 가지 재주를 배웠더라도 실행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니 우리가 4년 동안에 나라를 사랑하라, 민족을 구하라는 말은 남강 선생 이하 여러 사람이 귀가 아프도록 말한 것이니 그것만 실행하여 준다면 아무 근심이 없겠다. 오산학교와 상동청년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여준은 1908년, 이웃과 친지들을 설득하여 고향에 삼악학교(三岳學校)를 세웠다. 상동청년학원에서 가르친 고향 출신의 제자 오광선이 삼악학교의 교사로 헌신했다. 훗날 오광선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여준이 설립한 검성학교의 교사를 지냈으며 광복군 지대장으로 활약했다.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다 1910년 8월, 나라가 사라졌다. 여준은 서간도에 독립운동 기지를 세우기로 결정한 신민회의 결정에 따라 오산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과 형의 가족을 대동하고 압록강을 건넜다. 1912년 말, 여준이 서간도 합니하에 도착했을 때 신흥무관학교를 책임지고 있던 이상룡과 윤기섭, 김창환 등이 맞아주었다. 학교를 설립한 이석영, 이회영 6형제와 이동녕 등은 일제의 암살계획을 듣고 피신하였던 것이다. 영어를 가르치던 여준은 1913년부터 교장에 취임했다. 여준은 부족한 교사를 충당하기 위해 자신이 오산학교에서 가르친 제자들 중에 교육 경험이 있는 사람을 서간도로 불러들였다. 신흥무관학교를 후원하던 경학사가 재정난으로 활동이 정지되었다. 여준은 부족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졸업생과 재학생을 중심으로 신흥학우단을 조직했다. 여준은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다. 조회 시간에 애국가와 교가를 우렁차게 부르는 학생들 앞에서 자주 뜨거운 감동의 눈물을 흘리곤 했다. 여준은 학생들에게 모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강하게 교육했다. 교육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음식도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좀 먹은 좁쌀 밥에 콩기름에 절인 콩장 한 가지 뿐이었다. 수업을 마치면 중국인에게 야산을 빌려 만든 밭에 나가 농사를 지었다. 겨울이면 허리까지 차는 눈을 헤치며 땔감을 마련해야 했다. 이처럼 환경은 열악했으나 교사나 학생은 자긍심이 넘쳤다. 1917년 여준은 신흥무관학교 교장에서 물러나 길림으로 자리를 옮겼다. 만주에서 무장독립운동을 주도하다 1917년 12월 여준은 김약연, 정안립 등과 동성한족생계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아 만주로 이주한 동포를 구제하는 활동을 벌여나갔다. 이듬해 4월 일제가 작성한 재외 불령선인의 활동에 관한 건에 여준의 움직임을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합니하 신흥학교 전 교장 여준은 올 1월 흑룡강성 방면 여행 중 이시영을 만나 2월 15일 합니하로 출발 밀정단을 조직하여 독로(독일과 러시아)에 공헌하여 그 대가로 국권회복의 후원을 구하려는 계획이다. 1919년 2월 27일, 여준은 자신의 집에서 박찬익 황상규 김좌진 등과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했다. 정령에 추대된 그는 다음날 긴급회의를 열어 구미에 독립선언서를 보낼 것을 결의했다. 여준은 대한독립의군부 정령의 자격으로 대종교 교주 김교헌을 비롯한 국외 독립운동 지도자 38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국내의 31운동에 보조를 맞추어 해외에서도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여준이 결성한 한족회는 임정 산하에서 군정부의 역할을 담당하기로 결의하고 서로군정서로 명칭을 바꾸었다. 서로군정서 부독판으로 임명된 여준은 사령관 지청천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했다. 10월에는 무장투쟁조직인 급진단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취임하여 독립군을 모으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이를 위해 하얼빈에서 러시아를 통해 총 500정을 구입했으며, 백두산 부근에 사무소를 설치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독립운동의 영웅 무장투쟁만이 독립을 쟁취하는 길로 확신했던 여준은 임시정부의 준비론을 강하게 비판했다. 임시정부의 개조를 주장했으나 그 변화가 기대에 못 미치자 신흥무관학교에 돌아와 독립군 양성에 전념했다. 1922년 여준은 액목현에 검성중학교를 세우고 교장을 맡아 신흥무관학교의 뒤를 잇고자 했다. 학생들과 함께 농사를 지어 학교 운영비를 마련했다. 1930년에는 북만주 위하현에서 결성된 한국독립당에도 참여하여 고문으로 활동했다. 일흔을 앞 둔 나이였다. 1931년 9월 일제가 중국 본토를 침략하기 위한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만주의 독립군 기지조차 본토로 옮겨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이 무렵 여준의 동지들도 하나 둘 곁에서 사라져갔다. 평생 동지였던 이회영, 이상룡이 세상을 떠났다. 70 평생을 이역 땅에서 풍찬노숙하며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한 여준도 이역 땅에서 눈을 감았다. 위대한 교육자이자 독립투사인 여준 선생의 이름은 오랫동안 역사의 그늘에 묻혀 있었다. 1968년 정부는 선생에게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김산(홍재연구소)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31. 청년 교육·독립군 양성에 전념 규운 윤기섭

윤기섭은 1887년 4월 4일 파주군 파주리 마산동에서 유학자 윤기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과거급제자를 배출한 조선의 명문가였다. 윤기섭은 대여섯 살부터 문중에서 설립한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다. 그러나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10세 되던 해에 고향을 떠나 강원도 철원의 부호이자 문장가였던 박초양의 문하에 들어가 한학을 익혔다. 1906년 봄 윤기섭은 대한제국의 대신을 지낸 이용익이 세운 서울의 명문 사학 보성학교에 입학해 1909년 4월 제1회 졸업생 75명 중 수석을 차지했다. ■ 오산학교에서 인재를 기르다 보성학교를 졸업한 24세의 윤기섭은 그해 5월 평안북도 정주의 명문 사립 오산학교의 교사로 부임했다. 오산학교는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동을 받은 남강 이승훈이 설립한 민족사학으로 명성이 높았다. 윤기섭과 함께 재직한 교사는 여준, 서진순이다. 탁월한 교육자였던 여준(呂準, 1862~1832)은 윤기섭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다. 전국에서 몰려든 80여 명의 학생을 갑을병 3개 반으로 편성하고 모두 기숙사에서 생활했는데, 매일 아침 운동장에 모여 애국가를 부르며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윤기섭은 1909년 5월부터 1911년 5월까지 만 2년 동안 오산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이 기간에 윤기섭은 야학당을 개설해 월남망국사 같은 책을 교재로 삼아 청년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데 헌신했다. 1907년 4월 안창호, 전덕기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가 결성됐다. 윤기섭도 신민회에 가입해 학회활동과 계몽 강연에 힘을 쏟았다. 신민회 간부 중에서 웅변으로 이름을 떨친 인사로는 안창호, 이동휘, 전덕기, 이상재 등 여럿인데 윤기섭도 명연사로 활약했다. 1910년 11월 안중근의사의 사촌 동생 안명근이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우려고 황해도 안악에서 자금을 모으다가 붙잡혀 관련자 160여 명이 처벌을 받았던 안악사건이 일어났다. 남강이 이 사건 주모자로 체포돼 옥고를 치르면서 오산학교는 일제의 탄압과 재정난으로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 윤기섭은 망명을 결심했다. ■ 서간도에서 독립군을 기르다 1911년 8월 윤기섭은 압록강을 건넜다. 일경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하며 우여곡절 끝에 이회영, 이동녕을 비롯한 신민회 선배들이 터전을 닦고 있던 서간도 삼원보에 도착했다. 윤기섭은 교민자치기관 경학사(耕學社) 산하에 무관양성을 위한 신흥무관학교를 창립할 때부터 깊숙이 참여했다. 신흥무관학교의 초대 교장에 이동녕, 교감에 이달, 학감에 윤기섭, 교사에 이갑수 등이 임명됐다. 이후 그는 10년 동안 신흥무관학교에서 학감 및 교장으로 재직하며 수많은 군사 인재를 길러냈다. 이 학교를 졸업하고 교관을 지낸 원병상의 글 신흥무관학교에 등장하는 윤기섭의 모습이다. 눈바람이 살을 도리는 듯한 혹한에 아침마다 윤기섭 교감이 초모자를 쓰고 홑옷을 입고 나와서 점검하고 체조를 시키면서도 그 활기찬 목소리에 그 늠름한 기상과 뜨거운 정성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분의 진실하고 인자한 성격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1913년 3월 윤기섭은 교장 여준과 신흥무관학교 후원 조직이자 혁명 결사였던 신흥학우단을 조직했다. 혁명 대열에 참여해 대의를 생명으로 삼아 조국 광복을 위해 모교의 정신을 그대로 살려 최후의 일각까지 투쟁한다. 다물단으로도 불리던 신흥학우단의 설립목적이다. 그러나 조국 광복까지 달려가야 할 길은 너무나 멀고 험난했다. 1912년부터 대흉작으로 식량난에 시달리고, 학생이 피살되는 사건 등 악재가 연거푸 발생해 이회영, 이동녕 같은 선배들이 서간도를 떠났다. 거듭하는 참혹한 시련에도 윤기섭은 김창환은 좌절하지 않고 학생들과 황무지를 개간하고 이웃 중국인 마을을 찾아가 품을 팔아 양식을 마련해 학교를 지켜냈다. ■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다 1920년 2월, 윤기섭은 31운동으로 뜨거워진 독립 열기를 독립전쟁으로 수렴하고자 서간도 삼원보 남산에서 임시국민대회를 발기했다. 임시회장으로 선출된 윤기섭은 이 자리에서 독립전쟁을 호소하고, 임시정부에 독립전쟁을 위한 재정 지원을 요청하고자 임시의정원 서간도 의원 자격으로 상해로 향했다. 2월 말 상해에 도착한 윤기섭은 도산 안창호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을 방문해 서간도의 상황을 보고하고 지원을 요청했다. 3월 초에는 임시의정원에 등단해 이진산, 왕삼덕과 함께 연명으로 군사에 관한 건의안을 제출했다. 그 내용은 임시정부의 군사기관을 만주와 연해주로 옮기고, 올해 내에 혈전을 개시하자는 것이었다. 우리가 비참한 전투를 한 후에야 세계가 움직이겠고 우리가 비참한 전투를 당한 후에야 국민의 단합이 완성되리라. 이 건의안은 그해 10월에 이뤄진 청산리 전투를 비롯해 간도지역에서 독립전쟁이 전개되는데 기여했다. 1922년 10월에는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창설에 참여했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향후 10년 이내에 1만 명 이상의 병사를 양성하고 100만 원 이상의 전비를 조성한다는 목표로 노병회를 결성한 것이다. 윤기섭은 노병회의 교육부장으로 보병조전(步兵操典)을 편찬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차렷, 열중쉬어 같은 우리말 구령은 그가 만든 것이다. ■ 인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1922년 윤기섭은 인성학교의 학감으로 초빙됐다. 상해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자녀를 가르치는 인성학교에서 그는 한국역사와 국어를 가르쳤는데 어린이들에게도 높임말을 사용했다. 한글학자 김두봉도 그와 함께 교사로 헌신했다. 인성학교 졸업생들은 그가 청렴결백하고 지조가 높으며 희생심이 강한 인격의 소유자라고 입을 모았다. 1923년 4월 윤기섭은 임시정부의 의정원 제7대 의장에 선출돼 의정원을 이끌었다. 윤기섭은 1935년까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며 임시정부의 정상화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헌법기초위원으로 활약했다. 1932년 초 윤기섭은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과는 거리를 두고 있던 성주식, 신익희 등과 함께 남경에서 한국혁명당을 조직했다. 4월 상해에서 일어난 윤봉길 의거로 일경의 추적을 피해 활동 근거지를 남경으로 옮겼다. 윤기섭은 남경에서 중국인사와 교섭해 중한연합의용군을 조직하기 위해 진력했다. 이때도 그는 임시정부와 관계를 유지해 국무위원 및 군무장으로 활동했다. 윤기섭은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운동에 뛰어들었다. 각 세력의 통합논의를 거쳐 1935년 마침내 윤기섭은 약산 김원봉과 협력해 민족혁명당을 창당했다. 비록 김구 세력이 불참했지만 민족혁명당은 단일대당으로 손색이 없었다. 윤기섭은 중앙 집행위원 겸 훈련부 부장을 맡아 군사훈련 방면에서 중국과 연대하기 위해 노력했다. 1937년 11월 윤기섭은 남경이 일본군에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민족혁명당 구성원들과 가족들을 인솔해 남경을 탈출해 이듬해 3월에 국민당정부의 수도인 중경에 도착했다. 도착 후 중경에서 민족혁명당 중경 구당부를 조직하고 이를 이끌었다. 1941년 말 태평양전쟁이 벌어졌다. 일제의 패망이 다가오고 있었다. 대단결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민족혁명당은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1941년 미일 간의 전쟁인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국을 국제공동관리로 하자는 논의가 진행됐다. 윤기섭은 국제공동관리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1943년 윤기섭은 임시정부 군무부 차장에 취임해 중국정부가 한국광복군의 활동을 제약하던 한국광복군 행동 9개 준승의 철폐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4년 6월에는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생활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됐다. ■ 통일을 못 보고 운명하다 해방을 맞이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서둘러 귀국했지만 윤기섭은 중국에 남아 임시정부 가족들과 한인들의 귀국을 돕고 마지막으로 중경을 출발했다. 그가 부인과 어린 두 딸과 함께 부산항에 도착한 것은 1946년 4월이다. 1911년 서간도로 망명한 후 35년 만의 귀국이었다. 남북연석회의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윤기섭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민족교육운동에 투신했다. 1948년 8월 위당 정인보의 뒤를 이어 국학대학 학장에 취임했다. 이 무렵 윤기섭은 고향 파주와 가까운 서울 불광동에서 농사를 지으며 여유롭게 지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했으나 한국전쟁이 일어나 납북됐다. 1953년 휴전 이후 윤기섭은 옛 동지 김원봉의 지원을 얻어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만들려 했으나 실패했다. 윤기섭은 북한 정부의 탄압에 항의하는 단식투쟁을 여러 차례 벌여 건강이 악화해 1959년 2월 27일 평양에서 숨을 거두었다. 선생은 운명하기 전 이런 유언을 남겼다. 갈라진 조국을 후세에 물려주게 되어 죄가 크다. 남부끄럽지 않게 살다 죽었다는 것을 후세들에게 전해다오.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30. 성서격동(聲西擊東)의 외교책략가, 남파 박찬익

남파(南坡) 박찬익(朴贊翊ㆍ1884~1949년)은 우의정을 지낸 창암(蒼巖) 박종악(朴宗岳ㆍ1735~1795년)의 후손이다. 실학파의 거두 박지원과는 일가이기도 하다. 남파는 민영환이 조선 청년들아! 모든 인습적인 생각을 버리고 산업진흥과 공업 습득에 힘을 써라는 신문기사를 보고 그가 세운 상공(商工)학교에 진학할 것을 결심한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틀을 깨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길을 선택했으나 일본 선생과 불화 끝에 퇴학당하고 만다. 친구 박호원의 소개로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해 백성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며 아버지를 설득해 집안 머슴을 속량한다. 이후 관립공업전습소에 입학해 공업연구회 회장으로 활동하다 예관(?觀) 신규식(申圭植ㆍ1880~1922년)과 만난다. 남파는 신규식을 따라 손문의 북벌전쟁에 참여해 주가화(朱家?), 오철성(吳鐵城), 저보성(?輔成), 진과부(陳果夫) 등 국민당 요인들과 두터운 교분을 쌓게 된다. 남파는 대종교(大倧敎)에 가입하고 대종교 지회를 설립하면서 이를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기도 한다. 일제가 을사늑약(1905년)을 체결하고 5년 후 조선을 강제로 병합(1910년)하자 남파는 국권회복과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만주로 망명(1911년)한다. 반년 후 가족들 역시 전 재산을 처분하고 용정으로 이주하며 남파와 뜻을 같이한다. 남파는 만주에 망명하자마자 1911년 3월 대종교 독립운동단체 중광단을 서일과 함께 조직해 망명해 온 독립군들에게 민족정신으로 정신무장을 시킨다. 1919년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 민족대표 39인으로 서명하고, 신흥무관학교에서는 중국어와 한국 역사를 가르치기도 한다. 또한 동북의 군벌 장작림(張作霖) 동생 장작상(張作相)을 만나 한국의 독립 없이는 만주의 독립은 없다고 설득해 보병총 300자루, 권총 10자루, 수류탄 150발, 탄환 5천 발을 조달해 독립운동을 지원한다. 남파는 중앙집행위원장 김혁이 중심이 된 신민부(新民府) 요원으로서 대중(對中) 전임위원을 맡아 외교활동을 전개한다. 임시정부에서는 국무원, 법무부장, 외사국장 등으로 활약한다. 임시정부는 망명지 중국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1940년 9월)한다. 그러나 1년 후에 중국국민당(이하 중국)은 한국광복군은 항일 작전 기간 중이나 압록강을 건너 한국 경내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별도의 협정이 있기까지는 중국군사위원회에 직속되어 참모총장이 장악해 직접 지휘한다는 내용을 임시정부에 일방적으로 통보(1941년 11월)한다. 임시정부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이고 모욕적인 문서였다. 이대로라면 광복군은 사실상 중국의 일부로 예속되어 광복군은 중국의 노예군대(군무부 차장 윤기섭)로 전락할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이것이 소위 한국광복군 9개 행동 준승(準繩)이다. 남파는 이 중차대한 시기에 조소앙, 김규식과 함께 임시정부 대표로 중국과 한국광복군 9개 행동 준승(準繩) 폐지를 위한 교섭 실무를 담당한다. 교섭은 지지부진했다. 남파는 이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을 돌파해야만 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남파는 백범 김구와 같이 한국독립운동 지원 실무 담당자인 주가화를 만난다. 그 자리에서 남파는 주가화에게 미국을 가려고 수속을 밟으렵니다. 여권을 내주십시오. 독립운동 자금을 미국정부에 요청해 보려고 그럽니다(남파 박찬익 전기)라는 기습적인 제안으로 중국의 허를 찌른다. 이른바 성서격동(聲西擊東)의 책략이었다. 한마디로 중국이 이렇게 임시정부에 비협조적이면 임시정부는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옮기겠다고 엄포를 놓은 것이다. 주가화는 남파의 담대하면서도 기발한 전략적 발상에 당황한다. 그는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부탁한다. 한편 임시정부에서 가장 중대하고 시급한 문제는 임시정부를 합법정부로 승인받는 문제였다. 백범은 장개석과 1944년 9월 비밀리에 회담을 개최해 중국정부가 임시정부를 합법정부로 승인할 것을 요구한다. 남파는 통역으로 배석한다. 얼마 후 장개석은 한국광복군 9개 행동 준승 폐지를 위한 실무 교섭을 추진하라고 지시한다. 1944년 9월 임시정부는 중국 측으로부터 한국광복군은 한국 임시정부에 예속한다는 원칙적인 합의를 이끌어 낸다. 1945년 4월 중국 측은 광복군의 통수권을 임시정부에 이양하고 군사원조를 차관으로 바꿀 것을 골자로 한 원조한국광복군 판법(援助韓國光復軍 辦法)에 드디어 서명한다. 해방 넉 달 전의 일이었다. 남파의 격동책은 한국광복군과 미국 OSS(미국전략 특수공작대) 합작의 국내진공작전 준비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아! 왜적이 항복했다(백범일기) 이 한마디가 모든 것을 압축하고 있었다. 백범과 남파는 오철성을 만나 중국정부가 임시정부를 즉각적으로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한다. 또한 한국의 운명이 강대국의 손에 좌우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남파는 백범에게 임시정부가 빨리 동맹국의 승인을 받고 정부 자격으로 고국에 돌아가야 합니다. 소련군이 오면 공산주의 세력이 일어날 것이니 광복군을 확대 강화해 이에 대항해야 합니다라고 강력히 건의한다. 이에 백범은 장개석에게 동맹 각국에 재차 임시정부를 승인토록 제의하고 최단 기간 내 실현시켜 달라. 적군 중 한적(韓籍) 사병은 무장과 함께 광복군에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복순(?純, 남파의 또 다른 이름) 또한 친분을 이용해 오철성에게 중국당국이 먼저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동맹국도 임시정부를 승인하도록 제의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중국은 미국정부의 의사라며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개인자격으로 입국하라는 통첩을 보내고 광복군의 무장을 회수해 갔다. 통탄할 일이었다. 내 조국, 우리 땅으로 들어오라는 주인은 임시정부가 아닌 미국이었다. 백범은 장개석 관저를 방문해 남파와 오철성 비서장이 배석한 가운데 임시정부의 조속한 환국 등 7개 항의 전후 수습책을 논의한다. 임시정부는 귀국 후의 연락 및 400만 동포의 생명과 재산 보호 그리고 귀국문제 등을 수습하기 위해 중국국민당 요인들과의 막후교섭 창구가 필요했다. 임시정부는 남파를 임시정부 주화(駐華) 대표단장으로 임명한다. 남파는 이청천(李靑天), 민석린(閔石麟)을 대표로 하는 주화대표단을 조직하고 남경, 상해, 북경, 대만 등 9개 성(省)과 광주 및 베트남의 교민회를 통제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대표단은 가장 먼저 임시정부 요원 및 동포들의 귀국 경비를 마련하는 일에 착수한다. 또 만주를 방문해 동포들의 생활안정문제와 영농자금 등 시급한 현안 등을 당시 중국농민은행 총재 진과부와 협력해 처리한다. 광복군 제3지대에서 활약했던 아들 영준도 주화대표단 동북총판사처(東北總辦事處) 외무주임으로 일하며 조국에 돌아가지 못해 쩔쩔매는 동포들을 돕는 데 주력한다. 주화대표단의 또 다른 임무는 소련군이 진주한 북한의 정치, 공산당 등의 동향과 남한의 정당, 정세, 미군 현황 등을 상세하게 분석하는 일이었다.(주화대표단의 한국현황보고) 남파는 주화대표단장으로서 오철성과 한국을 시찰하는 웨더마이어(Wedemeyer) 장군에게 한국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미국이 재정적인 원조와 함께 한국이 독립적인 임시정부를 조직하도록 도와줄 것 등을 요청하는 비망록을 보낸다. 그러던 중 남파는 백범이 남북협상을 위해 북행한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급거 귀국한다. 그러나 인천 월미도에 도착했음에도 미군정 세관들이 일요일 근무를 하지 않는 관계로 하룻밤을 바다 위에서 뜬눈으로 보내야만 했다. 서둘러 경교장을 찾아갔으나 백범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남파는 백범이 병원으로 문병 오자 백범 선생이 섣불리 남북협상을 추진한 것은 실수라고 생각됩니다, 잠시 정계에서 은퇴하는 것이 어떻습니까하고 간곡히 권유한다. 그러나 한국독립당 의원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중지되고 말았다.(남파 박찬익 전기)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는 불변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패권 다툼 또한 그치질 않는다. 지정학적 위기의 연속이다. 남파의 격동책은 국제정세와 강대국의 상황 여하에 따라 언제든지 재활용할 수 있는 외교적 자산이 아닐 수 없다. 남파는 외교에서 공식적인 채널도 중요하지만 인적 네트워크 활용도 매우 긴요한 전략 중의 하나임을 일깨워준다. 임시정부 100주년인 2019년. 한국 외교의 방향성과 전략에는 문제가 없는지, 인적 네트워크를 충분히 확보해 활용하고 있는지 남파는 묻고 있다. 권행완(정치학박사ㆍ다산연구소) 사진=국사편찬위 전자사료관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29.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을 향한 한평생… 원심창 의사

14세의 소년, 31운동에 참여하다 평택 안정리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원심창(元心昌, 1906~1971)은 선친을 잃고 편모슬하에서 자랐으나 의협심이 강하고 따뜻한 심성을 가진 총명한 소년이었다. 4년제 평택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농사일을 도우며 지내던 원심창은 14세가 되던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경험은 그를 민족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했고, 고향을 떠나 민족사학의 명문으로 알려진 서울의 중동학교로 진학하는 계기가 되었다. 1922년에 중동학교를 중퇴하고 진로를 모색하던 원심창은 고향에 내려가 지내다가 그해 연말에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다. 16세의 소년 원심창은 낯선 일본의 수도 동경에서 2년 동안 노동과 공부를 병행하며 대학입학을 준비했다. 일본생활이 채 1년도 되지 않은 1923년 9월 1일, 도쿄 일원에 일본역사상 최강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가운데 일본인 자경단이 무고한 한국인을 6천명이나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지진으로 민심이 흉흉한 9월 3일에는 흑우회를 이끌던 아나키스트 박열이 애인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천황과 황태자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는 혐의로 검거되었다. 또 그해 말에는 일본의 저명한 아나키스트 오스키 사카에가 살해되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아나키스트 단체가 후쿠다 대장을 저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원심창은 아나키즘을 주목하게 하였다. 20세가 된 1925년 봄, 원심창은 일본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생이 된 원심창은 당시 세계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과 오스키의 정의를 구하는 마음을 비롯한 아나키즘 관련 서적을 탐독했다. 절대 권위를 배격하고 서로 도우며 정의롭고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하자는 아나키즘은 식민지 청년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 무렵 그는 박열이 조직한 아나키스트 단체 흑우회에 가입했다. 흑우회의 기관지 이름을 불령선인이라할 정도로 박열은 일제에 노골적으로 저항했다. 박열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의열단과 연결하여 여러 차례 폭탄을 반입하려고 시도했을 정도로 일찍부터 무장투쟁에 관심을 가졌다. 그해 9월 원심창은 대학에 자퇴서를 제출했다. 더 이상 학비를 마련한 길이 없었던 것이다. 1927년 원심창은 옥중에서 결혼한 박열의 아내 가네코 후미코가 형무소에서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동지들과 함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한편 그의 유골을 박열의 고향 경북 문경으로 보냈다. 투옥 중인 박열의 사업을 계승하기 위해 단체명을 불령사로 개편하고 기관지 흑우를 발행했으며, 일본의 아나키스트 단체인 흑색청년연맹에 가입하여 반제국주의 연합전선을 펼쳤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에 시달리면서도 노동운동에 주력하여 조선자유노동자연합을 결성하고, 일본 최대 노동조직인 동흥노동동맹을 조직했다. 또한 친일단체인 상애회와 맞서며 그들의 진상을 폭로했다. 이 무렵 좌우 합작으로 출범한 신간회를 통해 공산주의를 전파하려는 움직임에도 맞섰다. 1929년 원심창은 몇몇 동지들과 본국의 가뭄피해를 외면하고 운동회 개최에만 열중하는 유학생들의 비민족적 태도에 반성을 촉구하며 신간회 도쿄 지부를 습격하는 학우회 사건을 벌였다. 이 사건으로 동지 7명과 구속되었다가 1930년 4월 말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당국의 감시가 심해져 활동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원심창은 항일투쟁을 펼치기 위해 중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했다. 육삼정 거사로 무기징역을 살다 1931년 5월 상해에 도착한 원심창은 아나키스트 조직인 남화연맹에 가입했다. 만주사변으로 일본의 통제가 크게 강화되었지만 중국 내에 항일 기운도 높았다. 그해 10월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한중일의 아나키스트들이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했다. 11월 중순, 원심창은 프랑스 조계 안에 있던 백정기의 집에서 결성한 흑색공포단에 참여했다. 원심창은 백정기를 비롯한 동지들과 함께 1932년 1월 천진의 일청기선 부두에서 군수물자를 싣고 입항한 기선과 일본영사관, 일본군 부대에 폭탄을 던졌다. 폭탄의 성능이 약해 큰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으나 이런 과감한 행동을 현지 신문은 항일구국연맹의 활약이라며 대서특필했다. 1932년 4월 29일, 중국과 일본은 물론 아시아를 놀라게 한 사건이 벌어졌다. 일본은 시라카와 대장이 중국군 19로군을 패퇴시키고 상해를 점령하자 일본 군부는 승전을 축하하며 일왕의 생일인 4월 29일 상해의 홍구공원에서 천장절 기념식을 겸한 승전축하식을 열었다. 이 행사장에 한인애국단 소속의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대장 등 핵심 요인들을 처단했던 것이다. 일본 경찰은 이 사건의 배후 지령자임을 밝힌 백범 김구의 목에 거금 60만원의 현상금을 걸었다. 윤봉길의거에 고무된 원심창과 백정기를 비롯한 남화연맹 흑색공포단 동지들은 제2의 홍구공원의거를 구상하고 있었다. 이 무렵 통신사에 근무하는 야타베 유지라는 일본인 아나키스트가 원심창에게 접근해왔다. 대단한 친화력을 가진 야타베는 이내 동지들과 친밀해졌다. 1933년 2월초, 오오끼가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의 육삼정 회합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일본의 군부대신의 지원을 받은 아리요시가 중국 장개석 군대를 거금으로 매수하여 만주에서의 항일투쟁을 무력화시키는 비밀회합을 고급요정 육삼정에서 가진다는 특급정보였다. 원심창은 정화암, 유자명과 함께 야타베를 만나 다시 한 번 정보의 내용을 검토했다. 그의 말과 행동이 진실하다는 동지들의 판단에 따라 아리요시 암살 계획을 실행하기로 결정하고 동지들을 소집했다. 리더인 정화암이 모임의 배경을 설명하자 10명의 동지들 모두가 자기가 맡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결정하지 못하고 다시 모여 결정하기로 했다. 다음날 제비뽑기에서 백정기와 이강훈이 함께 하기로 결정되었다. 원심창은 야타베를 통해 아리요시의 사진과 자동차 번호를 알아내고 현장 안내를 맡기로 했다. 이날 원심창은 백정기, 이강훈을 비롯한 동지들과 제2의 윤봉길의사가 되어 대한 남아의 기개를 세계만방에 떨치자며 배갈을 한 잔씩 나누어 마셨다. 정화암은 윤봉길 의거 뒤 백범이 일제의 추적을 피해 가흥으로 피신을 갈 때 주고 간 폭탄 두 개와 중국인 동지로부터 받은 권총 두 자루와 탄환 20발, 수류탄을 세 사람에게 분배했다. 육삼정 회합은 밤 9시부터 11시까지였다. 거사일인 3월 17일 오후 8시, 원심창은 이강훈, 백정기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현장 부근에서 내렸다. 이들은 육삼정에서 2백 미터 쯤 떨어진 중국음식점 송강춘으로 향했다. 거사에 사용할 폭탄은 윤봉길의사가 던진 폭탄과 성능이 같은 것이었다. 그곳에서 일본인 동지 야타베를 만나 당일 육삼정의 정세를 파악하기로 약속했으나 야타베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종업원들의 수상한 거동을 보고 함정에 빠진 것을 눈치 챈 백정기가 품안의 폭탄을 빼드는 순간 종업원과 손님으로 위장한 일본 형사들이 덮쳤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이강훈, 원심창도 인력거꾼과 행인으로 변장한 여러 명의 일본 형사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체포된 3인은 일본 나가사키로 압송되었다. 그 해 11월 15일 일본 나가사키 지방 재판소는 원심창과 백정기에게 무기징역을, 이강훈에게 15년 형을 구형하였고, 11월 24일 최종 재판에서 재판장은 검사의 구형대로 선고하였다. 거사 직전에 정보가 새어나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국내외의 여러 신문에 크게 실려 일제의 대륙침략 음모가 폭로되었다. 실패한 거사였으나 중국인들을 항일전쟁에 나서도록 했을 뿐 아니라 한국인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후반생은 통일조국을 위해 1945년 10월 10일, 원심창은 13년 만에 일제의 형무소에서 출소했다. 원심창과 이강훈은 맥아더 사령부를 찾아가 아직도 투옥 중인 박열을 석방시켰다. 원심창은 이강훈, 박열 등 동지들과 함께 옥중에서 순국한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찾아내 이봉창, 윤봉길 두 의사의 유해와 함께 조국에 봉환하여 1946년 7월 6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모셨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원심창은 재일교포의 단결을 위해 동지들과 민단을 조직하여 사무국장, 단장으로 활동하며 재일동포의 권익 옹호에 힘을 쏟았다. 원심창의 후반생은 남북의 화합과 협력을 바탕으로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는 숭고한 과업에 바쳐졌다. 고문 후유증으로 신음하며 통일운동에 헌신하던 원심창 선생은 1971년 7월 4일 65세를 일기로 운명했다. 한국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독립투사 원심창 선생의 생애를 살피면서 지금까지 비판 없이 사용되고 있는 무정부주의라는 용어를 바로잡을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스어의 아나르코anarchos에서 나온 아나키즘은 지배자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일본에서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라고 옮기면서 아나키즘을 정부 조직이 없는 혼란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곡해하게 되었다. 단재 신채호와 우당 이회영도 아나키스트였다. 우당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강제적 권력을 배격하는 아나키스트이지,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다. 아나키스트는 타율정부를 배격하지, 자율정부를 배격하는 자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원심창 의사가 아나키즘을 선택한 것은 조국의 광복과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또 하나의 길이었다.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28. 붓으로 어둠을 밝힌 석농 류근

석농, 언론의 힘을 발견하다 정론직필로 사회를 밝혀야할 언론이 가짜뉴스의 진원지로 지탄받는 세상이다. 이러한 시절에 언론인으로 망국의 어두운 시기에 한 점 불빛을 밝히 언론계의 어른이 있다. 바로 석농 류근(柳瑾,1861~1921)이다. 류근은 1861년 9월26일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에 뛰어나 수재로 알려졌던 류근은 자신에게는 엄격하면서 남에게는 너그럽고 따뜻하게 대해 그의 집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아호 석농(石?)의 농은 나를 가리키는 것이니 나는 돌이다란 뜻으로 풀이할 수도 있겠다. 동학농민전쟁으로 갑오개혁이 단행된 1894년, 나이 34세의 류근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빼어난 실력을 갖추었기에 그는 이듬해 김홍집 내각에 참여해 탁지부 주사로 관직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김홍집 내각의 개혁정책에 희망을 걸었으나 이듬해에 민비가 시해된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1896년에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아관파천이 벌어졌다. 러시아에 기댄 고종이 김홍집 내각을 붕괴시키는 바람에 류근도 그해 4월 주사 자리에서 물러나왔다. 첫 도전은 무참히 꺾였으나 실의하지 않고 세상의 변화를 이끄는 힘이 무엇인지 찾던 그는 1896년에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을 주목했다. 한글로 만든 신문을 기반으로 토론회를 통해 민주적 절차를 익히게 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시민들을 정치에 참여하게 했다. 새로운 길을 발견한 류근은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각종 토론회를 지도하고 11월의 만민공동회 때는 간부로 활동했다. 이때 평생 동지가 되는 남궁억, 장지연, 박은식 같은 동지들과 사귀게 되었다. 특히 가깝게 지내던 장지연의 아들과 그의 딸이 결혼하여 두 사람은 사돈지간이 되었다. 황성신문으로 잠든 겨레를 깨우다 1898년 4월 류근은 동지 남궁억, 박은식, 장지연 등과 함께 황성신문을 일간지로 발행했다. 이때 류근은 주필과 논설위원으로 활약했다. 1905년 11월 17일, 일제는 기관총을 설치해 놓고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18일 류근과 장지연은 한 방에서 밤을 새웠다. 이날 장지연이 을사조약을 폭로, 규탄하는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이 날을 목 놓아 통곡하노라]를 썼다. 그런데 폭음으로 장지연이 논설을 끝맺지 못하고 쓰러지자 뒷부분은 류근이 마무리했다. 이 사설은 류근의 독려로 밤새 인쇄되어 전국에 배달되었다. 붓의 힘은 컸다. 동포의 궐기를 촉구하는 이 사설은 항일의병투쟁에 불을 지폈다. 이 일로 류근과 장지연을 비롯한 10여명 사원이 구속되고 신문은 무기한 발행이 정지되었다. 그도 2년 동안 신문사를 떠나야 했다. 한편 류근은 민족운동단체에도 적극 참여했다. 1906년 대한자강회에 가입하고, 해산 후에는 1907년 11월에 남궁억, 오세창 등과 함께 대한협회를 발기했다. 1907년 4월 도산 안창호 등이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신민회를 창립하자, 이에 가입하여 언론출판교육 부분에서 활동했다. 1907년 9월 제5대 사장으로 선임된 류근은 폐간될 때까지 3년간 재임하며 국권회복을 위한 언론구국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한일병합 직전 일제는 그의 입을 막으려 거금을 제공하려 했으나 이를 단호히 물리쳤다. 그러나 1910년 8월 조선을 병탄한 일제는 황성신문을 비롯한 모든 신문을 폐간시켰다. 교육과 출판으로 나라의 장래를 기약하다 1915년 4월 경영난에 빠진 중앙학교를 인촌 김성수가 인수했다. 김성수는 저명한 언론인지자 역사학자인 류근을 중앙학교 교장으로 추대하고 학감은 와세다대 출신의 민세 안재홍을 선임했다. 류근은 안재홍과 함께 김성수 집에서 신입생 환영다과회를 열어 민족의식을 불어넣었으며, 가을 수학여행 때는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 올라 눈물을 흘리며 제단에 절을 올려 이를 지켜보는 학생들에게 나라 없는 슬픔을 일깨웠다. 학교 일로 바쁜 와중에도 류근은 우리 역사와 지리, 국학연구에 몰두했다. 박은식, 김교헌 같은 동지들과 최남선이 주도하는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 참여하여 국학 관계 고문헌의 출판에 힘을 쏟았다. 조선광문회는 동국통감, 삼국사기, 삼국유사, 발해고, 택리지, 훈몽자해, 용비어천가, 산림경제, 열하일기 등 모두 22권의 책을 간행했다. 류근은 고전간행에 힘쓰며 사전편찬에 상근고문으로 참여해 최초의 현대판 신자전(新字典)을 펴냈다. 신자전 편집동인은 국어사전 편찬도 함께 준비했는데, 이 사업은 조선어학회의 우리말 큰사전 편찬의 모태가 되었다. 류근은 역사서 편찬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그가 펴낸 신정동국역사(1906)와 초등본국역사(1908), 신찬초등역사(1910)는 모두 초등중등용 교과서로 집필된 것으로 단군 이래 근세까지의 우리 역사를 서술한 최초의 교과서이다. 1909년 나철이 단군교를 창립했다.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를 조선의 정신적 식량으로 생각했던 류근은 박은식, 신채호 등 동지들과 대종교인이 되었다. 1917년 대종교 2대 교주로 취임한 동지 김교헌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망명하여 포교와 독립운동에 투신하자, 류근은 서울 남도본사(南道本司)에서 강우 등의 간부진과 교무를 전담하여 해외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같은 해 류근은 안재홍, 김성수 등 130여 명과 함께 교원과 학생들에게 조선물산장려계를 지도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고초를 당하고 교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60세에 동아일보 초대 편집국장을 맡다 31운동 직후 한성임시정부 수립운동이 일어나자, 류근은 4월에 개최된 13도 대표자의 국민대회에 대종교계 대표로 참여했다. 그는 한성정부의 정부체제 선택과 각료 선정에 참가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한동안 구속되었다. 31 운동 이후 일제가 문화정치를 표방하자 그동안 금기시됐던 민간신문의 창간운동이 일어났다. 중앙학교에 있던 류근의 집에 29세의 민세 안재홍이 신문 창설을 논의하기 위해 찾아왔다. 그만큼 신문에 경험이 풍부한 사람은 달리 없었던 것이다. 신문창간에 뜻을 모은 두 사람은 매일신보 발행인 겸 편집인 출신 이상협과 평양일일신문 기자를 지낸 장덕준, 오사카아사히 기자로 근무했던 진학문과 함께 신문발간 작업에 나섰다. 그러나 신문발간을 위해서는 큰돈이 드는데 자금의 턱없이 부족했다. 이들은 김성수를 찾아가 신문사를 경영해 보자고 졸랐다. 그러나 김성수는 중앙학교와 경성방직의 일에 전념하겠다며 고사했다. 청년들은 김성수가 존경하는 류근을 앞세웠다. 류근의 권유와 설득에 김성수도 결국 승낙하고 말았다. 류근은 창간하는 신문의 제호를 동아일보라고 지었다. 우리 민족이 장래 풍요롭게 살아가자면 동아 전체를 무대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60세의 류근이 양기탁과 편집감독에 취임했다. 사장 김성수는 30세, 주간 장덕수는 26세, 편집국장 이상협은 28세였다. 류근은 함께 편집감독으로 추대된 양기탁보다도 열 살이 많았다. 류근은 창간호 1면에 아보(我報)의 본분과 책임이라는 논설을 써서 신문의 편집 방향을 알렸다. 동아일보야, 너의 부담 무겁도다. 너는 조선민중의 표현기관이다. 너는 조선민중의 권리보호자이다. 너는 조선민중의 문화소개자이다. 그러면 너는 조선 민중의 기관수며 우편배달부며 전화교환수며 대의사며 정치가며 법률가며 경제가며 사회당이며 노동주의자이다. 무겁다 너의 책임, 아, 동아일보야. 류근은 60세에 여러 청년들에 의해 편집감독으로 추대되었지만 노청년이라 불릴 만큼 젊은이들과 잘 어울렸다. 그는 이른 아침에 신문사에 출근하여 자고 있는 젊은 기자들을 깨워 국밥 집으로 데려가 밥을 사 먹였던 어버이 같은 대선배였다. 언론의 사명이 무엇인가 류근은 잦은 감옥생활과 오랜 숙환으로 1921년 5월20일 소격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61세.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다 감옥에 갇혀 있던 아들은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동아일보는 이튿날인 21일자로 부음을 알리고 22일자 1면에 조(弔) 석농 유근선생이란 장문의 조사를 실었다. 선생은우리 반도 언론계의 원로이며, 평생을 사회에 바쳤으니 다만 교육계의 공로자일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장로이었다. 상해의 임시정부도 고인을 위한 추도식을 거행했다. 동아일보는 다음날 사설에는 유근 선생의 유언이라며 지방열(地方熱)을 제거하라는 글을 실었다. 지방열을 없애라. 이것은 조선인의 고질이니 사회를 위하여 활동하는 자, 민족을 위해 일하는 자는 마땅히 이에 조심하여 그 근멸을 기하라. 한국 언론계의 선구자 석농 류근의 묘소는 용인 처인구 김량장동 현충탑 아래 노고봉 산기슭에 있다. 1962년 3월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추증 받았고, 2001년 10월 국가보훈처 등에 의해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27. 슬픈 조국의 노래… 독립투사 조문기

그날이 되면 나는 산으로 바다로 경축의 냄새가 안 나는 곳으로, 펄럭이는 태극기가 안 보이는 곳으로, 경축 현수막이 안 보이는 곳을 찾아 피신을 간다. 8ㆍ15 이후 숙청된 것은 친일파들이 아니라 독립운동가들과 민족운동 세력이었다. 친일파들은 새로운 권력자 미국을 등에 업고 재빠르게 반공세력으로 변신해 독립운동세력을 무력화시켜놓고 이 나라의 주류로 등장했다. 그래서 나 혼자라도 광복절 경축식은 국민기만이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조문기 선생 회고록 슬픈 조국의 노래 머리말 중- 일제 말 한국 청년들이 시퍼렇게 살아 있음을 증명해 보였던 독립투사 조문기는 1926년 화성군 매송면 야목리에서 태어났다. 화성 야목리는 그가 삶에 지칠 때나 변화를 도모할 때마다 찾았던 곳이다. 매송보통학교를 다니던 조문기는 가난으로 학비를 낼 수 없어 용인 양지에 있는 외가에서 지내게 되었다. 승지를 지낸 외조부는 총독부가 들어서자 낙향했던 분으로 외손자에게 일제의 침략상을 알려주고 민족의식을 심어주었다. 조문기가 전학한 양지보통학교 설립자는 일진회를 만들어 나라를 넘기는데 앞장을 선 친일파 송병준으로 외조부와 대척점에 서 있었다. 제 힘으로 살아가기 위해 각오를 다진 조문기는 경성사범학교 진학을 목표로 세우고 열심히 공부했다. 사범학교에 입학하면 학비를 전액 면제를 받으며 기숙사에서 생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관부선을 타고 일본으로 합격을 자신했으나 결과는 낙방이었다. 낙심하여 서울 거리를 배회하던 16세 소년 조문기는 일본강관주식회사에서 공원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일본행을 결심했다. 1942년 10월, 조문기는 동경 근교에 위치한 군수회사 일본강관의 훈련공으로 입소했다. 조문기는 이곳에서 평생 동지 유만수를 만났다. 안성 출신의 유만수는 조문기보다 4살 연상으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만주로 갔다가 운동 조직과 연결되지 못해 일본으로 온 특별한 청년이었다. 한 방에서 생활하게 된 두 사람은 쉬는 날이면 서점과 도서관을 찾았다. 일본의 현대사를 살피던 중 관동대지진 때(1923년 9월 1일) 조선인 6천여 명이 학살당한 사실을 알고 조선인으로 학살에 앞장선 반역자박춘금에 복수하기로 다짐했다. 1944년 5월, 회사에서 훈련공 교양서라는 책을 배포했는데, 그 내용이 조선인을 멸시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훈련공들은 불성실하다, 밥만 많이 먹는다, 싸움질을 잘한다, 등등 조선인을 매도하는 책은 조선 청년들을 하나로 만들었다. 이번 일을 방치하면 모욕과 차별이 뒤따를 것이다. 조선 청년이 멍청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유만수와 조문기가 치밀한 계획안을 세우고 파업을 조직했다. 파업 전날 밤에 두 사람은 기숙사를 빠져나와 잠적했다. 다음날 3천여 명의 조선청년들이 조선인 차별을 철폐하라!며 농성을 벌였다. 전시체제 하 군수공장에서의 파업은 이것이 유일하다. 파업을 주동한 두 사람은 지명수배자 명단에 올랐다. 전시라 통신이 원활하지 못해 신원 조회가 어려워 일손이 부족한 공장에 가명으로 취직하여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일본인 행세를 하며 지냈다. 1944년 말, 조문기는 유만수와 귀국해서 동지를 모아 비밀단체를 구성하고, 친일 거두와 침략 원흉을 처단한 후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벌인다는 계획을 세우고 귀국을 결정했다. ■부민회관 폭탄사건 두 사람은 곤경에 처한 재일한인들을 후원하던 서상한의 도움을 받아 도항증을 위조하여 1945년 1월에 빈털터리로 귀국했다. 체포 위험 때문에 조문기는 유만수의 집을 찾고, 유만수는 조문기의 집을 찾아 사정을 살펴보니 다행히 수배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다. 두 달이 지난 1945년 3월, 서울 관수동 유만수의 집에서 대한애국청년당이란 비밀결사를 탄생시켰다. 애청으로 불렀던 이 비밀결사에 참여한 동지 대부분은 일본강관회사의 훈련공 출신으로 파업에 참여했다가 헌병대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었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유만수를 의장으로 뭉친 애청은 세 번째 모임에서 거사계획을 확정했다.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에 앞장선 박춘금, 군수품을 일제에 상납하던 화신재벌 박흥식, 독립투사를 잡아 중추원 참의까지 승진한 고등경찰 김석태 3인을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하는 것이었다. 동지들은 이들에 대한 정보 수집에 나섰다. 돈도 없고 마땅히 거처할 곳도 없었던 조문기는 수원에서 서울까지 백리 길을 고픈 배를 움켜쥐고 걸어서 다녔다. 유만수는 다이너마이트를 빼내오기 위해 변전소 작업장에 인부로 잠입했다. 단원들의 노력으로 폭파에 필요한 다이너마이트와 뇌관 2개도 확보했다. 1945년 7월 24일 저녁 9시, 애청 세 사람은 악질 친일파 박춘금이 주도하는 아시아민족분격대회가 열리던 서울 부민회관(현 서울시의회 별관)에 입장했다. 박춘금을 비롯한 친일세력들은 일제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나아가 수천 명의 조선인 민족지도자를 살해할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연 행사였다. 이 거사는 대회를 무산시키는 것이 1차 목적이었다. 식장에 가득 찬 조선인들을 확인한 애청 동지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직원처럼 위장하여 헌병이 지키고선 무대 앞에 시한폭탄을 설치했다. 심지에 불을 붙이고 유유히 밖으로 나왔다. 잠시 후 엄청난 폭음이 들렸다. 대회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혼비백산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대회는 해산되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폭파사건에 큰 충격을 받은 일제는 전국에 비상경계엄령을 선포하고 수사요원을 총동원하여 현상금 5만 원을 걸고 검거에 나섰다. 불령선인으로 불리던 요시찰 인물을 비롯한 600여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연행되었을 뿐 아니라 혹독한 고문에 못 이겨 내가 범인이다라고 자백한 사람만 수십 명에 이르렀다. ■친일 청산은 제2의 독립운동이다 부민관 폭파 의거를 치른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일제가 패망했다. 해방 정국에서 부민관 폭파의 주역인 20세의 청년 조문기는 독립운동가에게도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정세는 기대와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미군은 건국준비위원회는 물론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았다. 일제시대에 종노릇 했던 경찰과 관료를 그대로 수용했다. 조문기는 백발이 성성한 독립투사들의 탄식을 들었다. 고생고생하면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했는데이 나라는 친일파의 나라가 될 거야 독립운동세력은 지역과 좌우로 나뉘어 대립했다. 미소 군정이 실시되면서 한반도는 결국 분단되었고, 좌우투쟁은 격화되었다. 미군정과 이승만은 친일 경찰과 관료를 끌어들여 민족운동을 탄압하며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조문기는 남북협상을 지지하고 분단을 반대하는 통일운동의 길에 나섰다. 이런 와중에 조문기는 어머니의 부음을 들었다. 모친의 갑작스런 별세로 모든 일에 뜻을 잃은 그는 대전 계룡산에 들어가 조도령으로 불리며 한동안 죽은 듯이 지냈다. 그러나 위기에 처한 조국의 운명을 아주 외면할 수 없었다.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밀어붙이던 1948년 6월 2일 밤, 조문기는 동지들과 서울 삼각산 6개 봉우리에 봉화를 올리고 통일정부 수립하자, 단일정부 수립반대, 미군은 물러가라라는 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시내에 내걸기 위해 하산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조문기는 악명 높았던 친일경찰 김종원에게 고문을 받고 1년 6월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온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출범한 반민특위 간부들이 이승만의 명을 받은 친일경찰들에게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끌려나갔고, 보름 후에는 백범 김구가 암살되었다. 분단은 전쟁으로 이어졌다. 동족상잔의 참화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조문기는 10여 년간 유랑극단 배우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1959년 이승만 대통령 암살, 정부전복음모 조작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또 수난을 당했다. 이후 그의 삶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다. 조문기는 하나뿐인 딸마저 친척 집에 맡겨야 할 정도로 궁핍했다. 그의 동지들 형편도 마찬가지였다. 중랑천 다리 밑 판잣집에서 사는 유만수는 폐병 3기가 되었고, 강윤국은 20년 이상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와 동지들은 1962년부터 시행된 독립유공자 신청을 거부했다. 두 동지의 악화된 건강과 가족들의 고생을 보다 못한 그가 두 동지를 설득해 1977년 독립유공자로 등록했다. 그러나 조문기 자신은 포상을 신청하지 않았다. 1982년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장인 장모를 지켜보던 사위가 장인 몰래 신청하여 독립유공자에 올랐다. 조문기 선생은 1985년부터 광복회 경기도 지부장을 지내고, 민족문제연구소 2대 이사장으로 재직하며 친일파인명사전을 발간에 온 힘을 쏟았다. 80평생을 자주독립과 민족통일을 위해 헌신한 선생은 2008년에 별세했다. 화성시 매송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의 동상 옆에는 다음과 같은 어록이 새겨져 있다. 이 땅의 독립운동가에게는 세 가지 죄가 있다. 통일을 위해 목숨을 걸지 못한 것이 첫 번째요,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요, 그런데도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세 번째다.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26. 조선 선비의 사표… 면암 최익현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1833~1906)은 조선을 대표하는 선비다. 면암은 동아시아의 질서가 재편되고 국가의 명운이 경각에 달린 격동의 시기에 살았다. 그 신호탄은 1840년 서양 제국주의 세력 영국과 동양의 맹주 청나라가 충돌한 아편전쟁이었다. 조선은 동양의 맹주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미 사라진 명나라의 정신적인 적통은 조선이라고 자부했다. 조선은 소중화(小中華)였다. 명나라가 망한 지 40여년이 지난 1684년 이제두, 허격 등은 우암 송시열의 부탁으로 심심산골 가평 조종천변 바위에 만절필동(萬折必東: 만 번 꺾여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뜻) 재조번방(再造藩邦: 명나라가 도와서 나라를 되찾음)이라고 새기고 조종암(朝宗巖)이라고 불렀다. 조선중화사상과 숭명배청(崇明排淸)의 성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면암은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1792~1868)의 제자이다. 그는 중암 김평묵(重菴 金平默, 1819~1891), 성재 유중교(省齋 柳重敎, 1831~1893) 등 화서학파 문도들과 함께 조종암에서 중화(中華)의 도(道)를 수호하겠다고 굳은 결기를 다지곤 했다. 그들은 사문(斯文)의 수호자로 자처했다. 사문을 수호하는 전쟁터는 조선이었다. 조선은 사문난적(斯文亂賊)들을 가차 없이 처단했다. 그러나 전선은 두 곳에서 발발하고 있었다. 대내적으로는 대원군이 만동묘와 서원을 철폐하는 조치를 취했고, 대외적으로는 양이(洋夷)들과 일본의 침략이었다. 프랑스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를 빌미로 강화도에 침입하다 패배한다. 1866년 병인양요다. 미국은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도를 침범하나 치열한 싸움 끝에 물러난다. 1871년 신미양요다. 조선에게 이들은 서양 오랑캐(洋夷)일 뿐이었다. 조선은 오랑캐들에게 결코 문을 열어줄 수 없어 쇄국(鎖國)정책으로 일관했다. 오히려 양이가 침범해도 싸우지 않으면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전국 방방곡곡에 척화비를 세우기에 이른다. 대원군은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다. 면암은 백성들에게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는 토목공사를 중지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1868, 丙寅疏)에 이어 옛날 법을 변경하고(政變舊章), 그칠 새 없이 받아내는 각종 세금 때문에 백성들은 어육이 되어 떳떳한 의리와 윤리는 파괴되었다(賦斂不息 生民魚肉 彛倫喪)는 상소(1873년 10월 25일)를 올린다. 면암은 성리학적 의리와 명분에 입각하여 대원군에게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정국을 강타했다. 대신과 신료들은 면암을 규탄하며 몰아세웠다. 이에 면암은 보다 정확하게 구체적으로 요구한다. 면암은 지금 나라의 일들을 보면 폐단이 없는 곳이 없다. 명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불순하여 고치지 않으면 끝이 날 것이라고 경고한다. 면암은 만동묘를 없애버리니 임금과 신하 사이의 윤리가 썩게 되었고, 서원을 혁파하니 스승과 생도간의 의리가 끊어졌다고 말한다. 그래서 오늘의 가장 급선무는 만동묘를 복구하는 것과 서원을 흥기시키는 것(1873년 11월 3일 상소) 이라고 주장한다. 이 상소는 결국 대원군의 탄핵상소가 되어 대원군은 실각하고 만다. 고종은 사리를 모르는 시골 사람이 분수를 망각해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신문하지 말 것을 지시한다.(고종 10년 11월 9일) 고종의 두둔에도 불구하고 면암은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된다. 일제는 1868년 명치유신에 성공한 후 동아시아의 신흥강국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일제는 조선에 개항을 요구하며 강화도 연무당에서 불평등조약 강화도조약(1876년 12월 3일)을 체결한다. 면암은 도끼를 들고 임금이 행차하는 길 옆에 엎드려서(고종 13년 1월 23일) 개항은 절대 안 된다며 척화소(지부복궐척화의소持斧伏闕斥和議疏)를 올린다. 우리나라 역사상 국가적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도끼를 들고 임금한테 나아가 이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거든 차라리 내 목을 치라고 격하게 상소를 올린 경우는 고려의 우탁과 조선시대 중봉 조헌과 면암 최익현 세 사람뿐이다. 그만큼 면암의 척화소는 역사상 유례가 드물 정도로 격렬했다. 조야에 큰 파문을 일으켰음은 물론이다. 그가 개항을 반대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개항하면 나라가 망하기 때문이었다.(고종실록 13권, 고종 13년 1월 23일) 첫째, 화친이 상대편의 구걸에서 나오고 우리에게 힘이 있어 능히 그들을 제압할 수 있어야 그 화친은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겁나서 화친을 요구한다면 지금 당장은 좀 숨을 돌릴 수 있겠지만, 이후 그들의 끝없는 욕심을 무엇으로 채워주겠는가?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첫째 이유이다. 둘째, 그들의 물건은 모두 지나치게 사치한 것과 괴상한 노리갯감들이지만, 우리의 물건은 백성들의 목숨이 걸린 것들이므로 통상한 지 몇 년 되지 않아서 더는 지탱할 수 없게 될 것이며, 나라도 망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두 번째 이유이다. 셋째, 그들이 비록 왜인(倭人)이라고 핑계대지만 실제로는 서양 도적들이니, 화친이 일단 이루어지면 사학(邪學)이 전파되어 온 나라에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세 번째 이유이다. 넷째, 그들이 뭍에 올라와 왕래하고 집을 짓고 살게 된다면 재물과 부녀들을 제 마음대로 취할 것이니,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네 번째 이유이다. 다섯째, 저들은 재물과 여자만 알고 사람의 도리라고는 전혀 모르는데, 그들과 화친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다섯째 이유이다. 면암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야욕을 속속들이 간파하고 있다. 개항하면 국가경제는 파탄지경에 빠질 것이고 일제에 철저하게 예속될 것이다. 유교의 윤리 도덕적 질서 역시 붕괴되어 백성들은 짐승으로 추락할 것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개항은 인간으로 남느냐 짐승으로 전락하느냐 하는 긴박한 국가적 도학적 사태였다. 하지만 도끼 들고 척화소를 올린 바로 다음 날 면암은 의금부에 투옥된다. 이번에는 흑산도에 위리안치 된다. 청일전쟁(1894)에서 이긴 일제는 친러 경향을 띠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1895)을 일으킨다. 3개월 후 고종은 단발령을 공포한다. 유림과 백성들의 분노는 부글부글 끓었다. 제천의병(유인석), 안동의병(권세연) 등 전국에서 의병이 일시에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면암은 내 목을 자를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고 격분했다. 고종은 면암에게 의병을 해산시키는 선유대원(宣諭大員)으로 임명한다. 면암은 김홍집과 정병하, 조희연과 유길준보다 더 큰 역적이 없으니 설사 만 토막을 내고 그의 십족을 도륙하더라도 귀신과 사람들의 분노를 씻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며 왜적을 토벌하지 않고는 원수를 갚을 수 없다(고종 33년 2월 25일)며 선유대원을 완강히 거부한다. 1900년 면암은 눈발을 헤치며 68세의 노구를 이끌며 조종암과 대통묘(大統廟: 명나라 황제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를 방문하여 춘추대의(春秋大義)와 명분을 새롭게 다잡는다.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로 국권이 상실될 위기에 직면하자 면암은 창의격문(倡義檄文)을 선포한다. 이적의 화가 어느 나라엔들 없을까마는 그 어느 것이 오늘날의 왜놈과 같겠는가? 바로 의병을 일으켜야 할 것이요, 많은 말이 필요없다.(면암집) 면암은 임실군수를 역임한 임병찬 등과 함께 태인, 정읍에서 군수물자 등을 확보하여 순창에서 왜군과 싸우다 관군의 공격을 받아 중군장 정시해(鄭時海)가 전사하자 민족상잔의 참변은 더 이상 볼 수 없다고 의병을 해산하고 만다. 면암은 임병찬 등 13명과 함께 서울로 압송된 후 대마도에 투옥된다. 그는 고종에게 원수를 능히 없애지 못하고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며...4천년 화하의 정도(正道)가 흙탕에 빠지는 것을 붙들지 못하고 선왕의 백성이 어육이 되는 것을 구하지 못하였으니...라는 유소(遺疏)를 남기고 일제의 것이라면 쌀 한 톨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겠다며 곡기를 끊고 순국하고야 말았다. 조선은 외국으로 유학 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오직 조선 땅에서만 세상을 진단하고 대응하려 했다. 면암은 소중화의 도를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였다. 그러나 그의 시대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 약육강식이 보편화 되는 그런 시대였다. 면암은 공법(公法)은 세계 만국이 다 같이 지키는 것이나 우리나라만이 행하지 못한다(면암집)고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민족의 자존, 국권 회복, 백성 구원 등을 오직 춘추대의만을 고집했다. 조선 선비의 한계였다. 권행완(정치학박사다산연구소)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25. 해평 이재현 지사

원수 일본제국주의자들을 때려 부셔 내 조국의 독립을 찾을 수 있는 최후의 기회였다. 가슴에는 피가 끓어올랐다. 8월 8일 새벽 출발 예정이었으나 대기 상태로 비행기는 뜨지 않았다. 9일 본부로 되돌아왔다. 일제가 무조건 항복했던 것이다. 조국 독립의 기쁨보다 우리는 땅을 치고 울었다. 내 몸을 바쳐 조국독립을 이루지 못한 안타까움에서였다. -해평 이재현의 회고록 에스페란토와 나 중에서 광복군, 통한의 눈물을 흘리다 1944년 겨울부터 이재현(1917~1997)을 비롯한 한국광복군은 미국전략사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과 협약을 맺고 현서성 종남산에서 국내로 진공하기 위해 낙하훈련을 비롯한 특수훈련을 받았다. 임정 주석 김구는 OSS책임자와 한미 간의 공동작전을 협의하고 OSS훈련을 받은 광복군을 본국으로 들여보내 국내의 주요 군사시설을 파괴 또는 점령하게 한 후에 미국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1945년 8월 7일, 이재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과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이 참석한 자리에서 생사를 같이할 동지들과 함께 수료식을 마치고 국내 낙하3조장으로 지리산을 담당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런데 수료식 하루 전날인 8월 6일에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일제가 곧 항복할 것을 직감한 광복군은 다음 날 새벽에 출동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일제가 당일 항복하면서 작전계획이 모두 취소되었다. 눈물을 삼키며 본부로 회항했던 광복군은 새로운 임무를 부여 받았다. 미군 22명과 광복군 5명의 선발대가 서울에 입성하여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내는 작전이었다. 8월 14일 이재현은 제2지대장 이범석과 장준하, 김준엽, 노능서, 이계현 등의 광복군 6인과 미군 22명과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14일 새벽 4시에 서안비행장에서 이륙했으나 6시간 40분 후 회항하라는 본부의 명령이 떨어졌다. 일본군의 최후 발악이 극심하다는 이유였다. 18일에 다시 출격하여 여의도에 착륙했으나 같은 이유로 되돌아왔다. 9월에야 중국전구사령부에서 작전권을 넘겨받은 태평양전구사령부가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안타깝게도 광복군은 이 중요한 순간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백범이 그토록 열망한 한국독립문제에 대한 발언권도 사라지고 말았다. 이 일은 청춘을 고스란히 독립운동에 바친 광복군 이재현에게 천추의 한이 되었다. 형제가 독립운동에 나서다 안양 자유공원에는 독립투사 이재천(1907~1941)과 이재현 형제가 손을 잡고 있는 동상이 서 있다. 형제의 아버지 이용환은 백범 김구와 뜻을 같이한 지사로 온 겨레가 일어선 1919년 31운동 직후 두 아들을 데리고 고향을 떠났다. 광복 후 백범 김구는 광복까지 지조를 지킨 이용환의 이름을 백범일지에 실어 동지의 의로운 삶을 기렸다. 이렇게 형제는 유년시절부터 중국 상해에서 백범을 비롯한 독립투사들을 지켜보며 성장했다. 상해의 조계지는 1842년 아편전쟁에 패배한 후에 열강들에게 분할 점령된 곳으로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일본 등 온갖 나라 사람들이 살았던 국제도시였다. 형제는 독립지사와 교포들의 자녀를 교육하기 위해 설립한 인성소학교를 다녔다. 이재천은 1930년 임정 국무위원 조소앙의 지도하에 화랑사를 조직하여 단원으로 활동하며 기관지 화랑보을 펴냈으며, 1931년에는 백범의 지도하에 상해 소년동맹의 위원장으로 월간지 새싹을 발간하여 상해 교민사회에 전달하고 국내에도 발송했다. 1935년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한 이재천은 그해 10월에 임시정부의 밀명을 받고 인천으로 입국하다가 정보를 입수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동아일보 1935년 3월 10일자에 중국에서 한중러의 3국인 암살훈련단인 려지사(勵志社)를 조직하고 단원 이재천 등 20여명을 한국 만주 일본에 파견하다.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11월 하순, 이재천이 인천에서 검거되고 말았다. 이듬해 2월 28일 이재천은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같은 해 1935년 여름, 18세의 이재현은 백범에게 해평(海平)이란 호를 하사 받고 이해평이란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해에 이재현은 30여 명의 중앙군관학교에 소속된 한국인 청년들과 함께 안휘성의 변경에 있는 용지산 깊은 산속에서 특별훈련을 받았다. 그가 특수훈련을 받고 이듬해에 배속 받은 임지는 중국의 남단도시 광동성 광주였다. 이때 이재현은 백범의 큰아들 김인(19171945)과 함께 백범 김구의 특명을 받고 광동성 광주시에 파견되었다. 이 도시에 있는 중산대학에 유학을 온 한국학생을 포섭하여 독립군으로 만드는 특별임무를 띤 비밀공작대원이었다. 이곳에서 공작대를 지휘하는 교관이 안우생(1907~1991)을 만났다. 안중근 의사의 조카 안우생은 영어, 불어, 일어 등 어학에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며 노신의 소설을 중국 최초로 번역했던 실력자였다. 안우생은 이재현과 의기투합하여 희망의 말, 에스페란토를 배우기 시작했다. 1937년에 일본군의 침공으로 중산대학이 있는 광주일대가 함락되어 이재현은 학업을 그만 두고 상해지하공작을 지원하기 위해 김인, 이하우 등과 함께 홍콩으로 파견되었다. 홍콩에서의 임무를 완수한 이재현은 중국의 임시 수도인 중경으로 다시 활동무대를 옮겼다. 훗날 그는 나는 30년 동안 중국 천지를 걸어서 3분의 2는 다녀보았다.고 회상했다. 1939년, 이재현은 중경에서 나월한, 이하우, 김인, 김동수 등과 함께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조직하여 선전반장을 맡았다. 특별한 임무를 띠고 중경을 떠나 본부로 삼은 협서성 서안으로 이동했다. 서안에서 중화민국 전시간부훈련 한청반 교육을 수료하고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분대장에 임명되어 태행산 유격지구에 파견되었다. 이재현은 교전이 벌어지는 최전선에서 일본군을 대상으로 선무공작을 펼쳐 한국인 청년을 모아 광복군으로 훈련시켰다. 이 무렵, 형 이재천이 행방불명이 되었다. 1941년 2월 26일까지 만기 복역한 기록은 있으나 행방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옥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게다가 비슷한 시기에 지대장 나월한이 부하들에게 희생되는 사건으로 그도 혐의를 받아 법정에 서야했던 고통스런 시기였다. 그러나 광복을 위한 투쟁까지 멈출 수는 없었다. 이재현은 1944년부터 광복군 제2지대 한미합동훈련반 특별반의 조교로 한국에 투입될 대원들을 가르쳤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본이 예상보다 빠르게 항복하는 바람에 이 작전은 취소되었다. 이때 그가 지은 광복군 제2지대 군가는 광복군의 열망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다. 총 어께매고 피 가슴에 뛴다/우리는 큰뜻 품은/한국의 혁명청년들/민족의 자유를 쟁취하려고/원수 왜놈 때려 부수려/희생적 결심을 굳게 먹은/한국광복군 제2지대 /앞으로 끝까지 전진/앞으로 끝까지 전진/조국독립을 위하여/우리민족의 해방을 위해 1945년 10월, 이재천은 한국광복군 국내정진군 주임으로 북경에 파견되어 귀국하는 교포의 민정을 지원하면서 일본군 대본영으로부터 한국 국적을 가진 병사들을 인수 받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때 받은 병력으로 1개 대대를 개편했는데 일본군 대위 신현준(초대 해병대 사령관)과 만주특설대 중위 박정희도 있었다. 단체로 입국을 계획하던 광복군 지도부는 일본군 장교로 복무한 자들도 중국군의 한국인 학도병 자격으로 광복군에 입대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광복군의 세를 불려 귀국하려는 조치였으나 매우 잘못된 판단이었다. 1946년 6월, 이재현은 미군정의 지시로 군복을 벗고 개인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지 못한 것이 뼈에 사무쳤다. 임정 주석 김구도 개인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다. 지분을 요구하지 않은 투사 이재현 선생은 고심 끝에 군대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20년 경력의 광복군 장교라는 빛나는 경력으로 출세할 수 있는 길 대신 만인 평등과 세계 평화를 추구하는 에스페란토 연구와 보급에 헌신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평등과 평화를 추구하는 언어 운동인 에스페란토가 답답한 조국의 현실에 희망의 빛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1963년 31절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노 독립투사 이재현 선생은 박정희 대통령 을 만났다. 박대통령이 선생을 반기며 청와대에 초청했으나 선생은 청와대를 찾지 않았다. 광복절에 다시 한 번 더 초청했지만 역시 가지 않았다. 이후 다시는 선생을 더 부르지 않았다. 그 당시 선생의 생활형편은 매우 어려웠다. 그럼에도 이렇게 말했다. 내가 대통령에게 부탁할 일이 무엇이 있겠어. 독립유공자로 연금을 받게 되자 선생은 그 돈을 모아 예스 한 사전을 편찬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재현 선생이 자녀에게 가르친 말은 단순명쾌했다. 현실에 맡겨진 일에 충실하라, 그것이 곧 애국이다. 선생은 운명하기 전 이런 유언을 남겼다. 투사는 결코 지분을 요구하지 않는다! 김산(홍재연구소)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24. 부자가 나라를 위해 죽다… 구연영 선생

일본 낭인들이 왕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공포되었을 때 고향 이천에서 의병을 모아 무력투쟁에 나섰다가 이에 한계를 느끼고 애국의 수단으로 기독교에 입문한 사람이 있다. 한때 벼슬을 살았고 의병대장으로 활약했던 그가 총 대신 성경을 들고 시골마을을 찾아다니며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고 한글을 가르치는 전도사가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전도를 하며 조직한 구국회를 통해 일제의 야욕을 폭로하고 나라와 민족을 배반한 일진회를 성토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아들과 함께 순국한 사람이 있다. 그는 춘경 구연영 선생이다. 춘경 구연영(具然英,1865~1907)은 서울에서 능성 구씨 철조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경기도 광주에 살았다. 구연영은 변미례와 혼인하여 큰아들 정서(禎書,1883~1907)를 포함하여 네 아들을 두었다. 그의 호 춘경(春景)은 우리말로 봄볕이다. 그의 삶은 아호처럼 위기에 처한 나라와 가난한 이웃에게 봄 햇살처럼 밝고 따사로웠다. 백암 박은식이 동학농민전쟁에서 31만세운동까지 민족사관에 입각해서 엮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구연영은 잠시 관직 생활을 하다가 정계의 부패를 볼 수 없어 퇴직하고, 독립협회에 가입해서 조국 광복운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 책에도 구연영의 의병활동에 관한 내용은 빠져 있다. 그의 의병활동에 관한 사실은 일본의 군대가 남긴 폭도일기와 이천수의진의 대장 김하락의 진중일기에 실려 있다. ■ 의병장으로 일본 침략자들과 맞서 싸우다 1984년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고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노골적으로 조선을 침탈하자 조선인들의 원한과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1895년 6월 명성왕후가 일본 낭인들의 칼에 살해되었다. 구연영은 청장년 시절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나라의 앞날을 염려했다. 의기가 높은 선비 김하락(金河洛, 1846~1896)을 중심으로 열혈 청장년들이 모여들었다. 김하락의 진중일기에 따르면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을 동제인(同濟人)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모임의 이름이 동제사가 아닐까 싶다. 어려운 시대를 함께 헤쳐가자는 결사의 핵심 구성원 다섯은 모두 유생이었다. 김하락과 조성학은 재야유생, 구연영은 전직관료, 김태원은 현직관료였다. 단발령이 공포된 다음날인 1895년 12월 31일 서울을 출발한 이들은 1896년 1월 1일에 이천에 도착했다. 화포군 영장 방춘식을 만난 이들은 포군명부를 펼쳐 놓고 100여 명을 선발하여 이들과 함께 의병을 모집했다. 구연영이 양근과 지평에서 모집한 300여 명을 포함하여 총 900여 명의 군사로 이천수창의소를 출범했다. 김하락이 총지휘를 맡고 구연영은 중군장에 임명되었다. 1896년 1월 17일, 일본군 수비대 보병 100여 명이 이천으로 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창의소는 광현 야산에서 적을 협공하는 전술로 일본군 수비대 180여 명을 사살하는 놀라운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2월 12일 새벽, 군세를 대폭 늘인 일본군 200여 명의 기습 공격을 받아 이틀을 분전했으나 우세한 화력을 갖춘 적들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부하들을 이끌고 원주로 피신한 구연영은 그곳에서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이천으로 귀환했다. 흩어졌던 의병들을 수습하여 2천여 명으로 부대를 재편하고 새로운 창의대장으로 박준영을 추대한 후 광주 남한산성으로 진을 옮겼다. 남한산성은 갑오개혁으로 주둔군을 철수시킨 까닭에 쉽게 장악할 수 있었다. 중군장 구연영은 성 중앙부 수비를 맡았다. 일본의 압력을 받은 정부는 서울 친위대와 강화도 주둔군을 남한산성으로 파견했다. 산성을 포위하고 20여 일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자 관군이 이간책을 썼다. 동문 방어를 맡은 김귀성이 포섭되고 김귀성을 통해 창의대장 박준영마저 포섭되었다. 두 사람은 수원 유수와 광주 유수로 임명해 준다는 제안에 넘어간 것이다. 1896년 3월 21일 박준영은 저녁에 군사들을 위로한다며 술과 고기를 잔뜩 주어 깊이 잠들게 한 후 새벽녘 성문을 열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파악하고 분노한 의병들은 관군들에게 쫓기면서 배반자 박준영 부자를 처형한 후 남한산성에서 퇴각했다. 장수들이 향후 대책을 논의한 끝에 김하락의 고향인 안동으로 옮겨 그곳에서 군사를 모아 다시 싸우기로 했다. 경상도로 이동한 이천의병은 5월 14일 경군 100여 명과 화현에서 전투를 벌였다. 10여 일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전투 끝에 의병들은 다시 후퇴했다. 강력한 화력과 보급망을 갖춘 조일 연합군은 계속 강화되는 반면 의병들은 숫자가 줄고 보급도 여의치 않아 수세를 면치 못했다. 패전이 거듭되면서 더 이상 싸우기 힘든 형편이 되었다. 1896년 5월 27일, 구연영은 자신을 따르던 경기도 의병 30여 명을 거느리고 회군을 결정했다. ■ 의병에서 기독교 신자가 되어 구국운동 나서다 구연영은 고향집에서 여섯 달 동안 조용히 지내며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이때 그는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 교육을 통해 계몽운동을 펼치고 있는 기독교를 주목했다. 1897년 2월, 서울 남대문에 있는 상동교회를 찾아 선교사 스크랜튼을 만나 기독교에 입교했다. 유학을 공부한 그가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물론 나라를 구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상동교회는 장사꾼을 비롯한 하층민들이 많이 다니던 민중교회였다. 구연영은 상동교회 엡웟청년회를 이끌던 전덕기(全德基,1875~1914)를 만나면서 자신의 결정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청년이라는 이름이 붙은 최초의 청년회를 이끌던 전덕기는 구연영보다 열 살이나 적었을 뿐 아니라 기독교인이 되기 전 숯장수였던 청년이 당대 최고의 명사들의 구심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이 또한 기독교의 힘이라 생각한 구연영은 전덕기가 이끄는 청년회에서 활동하면서 독립협회에도 가입하여 전국에서 모인 지사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꿈을 꾸었다. 고향에 돌아온 구연영은 노비 문서를 불태우더니 종들에게도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다. 이런 파격적인 행동으로 그는 집안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 그가 선택한 직업은 선교사에게 월급을 받으며 성경책을 판매하는 권서인(勸書人)이었다. 구연영은 궁평 본가를 떠나 장항에서 권서인으로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마을을 다니며 성경을 팔고 복음을 전하고, 한글을 배우려는 사람이 있으면 성경책을 교재로 삼아 한글을 가르쳤다. 성경을 팔러 다니는 길에 의병활동을 함께 했던 동지들을 찾아다녔다. 그의 설득으로 동지들이 하나둘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렇게 재결합한 동지들과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조직한 것이 구국회(救國會)였다. 교회 조직을 통해 국채보상운동도 활발히 벌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망국의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다. 구연영은 아들 정서와 함께 이천ㆍ광주ㆍ여주ㆍ장호원 등지를 순회하면서 군중집회를 열어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고 조약 체결의 철회를 촉구했다. 때로는 시장철시를 통한 비폭력 저항운동을 주도했다. 군중집회에서 구연영은 일진회의를 매섭게 규탄했다.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던 일진회는 을사조약 체결에 지지선언을 하는 매국적인 활동으로 지탄받고 있었다. 이 무렵 발행된 대한매일신보에 이천 기독인들의 동향이 소개되었다. 이천군에서는 예수교인들이 지석 장터에 웅거하여 인민을 선동하니, 무슨 거조가 있을는지 기세가 굉장하여 배일하는 주의가 있으며, 지석 장터 근처는 상업이 유명한 곳이라 사면으로 통하기가 편함으로 의병이 아무 때나 무슨 거조가 있으리라 하나 알지 못하겠고 1907년 일제는 헤이그 밀사사건에 대한 책임으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내정 간섭을 합법화하고 군대까지 해산시켰다. 이천에서도 다시 의병이 궐기하자 일본군 헌병대가 광주와 이천에 진주했다. 이 무렵 구연영은 일본 경찰로부터 이런 평가를 받았다. 경성 동편 십여 군에는 구연영만 없으면 기독교도 없어질 것이요, 일본을 비방하는 자도 근절될 것이다. ■ 이용주 밀고로 체포 죽음으로 지킨 애국 일진회는 구연영의 밑에서 일하던 이용주를 매수했다. 이용주의 밀고로 구연영은 맏아들 정서와 함께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구국회에 속한 동지의 이름을 대라는 회유와 협박에 굴하지 않고 대항하다가 1907년 8월 24일 낮, 이천 장터에서 아들과 함께 총살을 당했다. 그의 나이 44세, 아들은 25세였다. 대한매일신보는 부자구몰 -일병 오십여 명이 이천읍 안에 들어와서 예수교 전도인 구연영 구정서 부자를 포살하고 그 근처 오륙 동리를 몰수히 충화하엿다더라.라며 일제의 만행을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이때 일본군의 보복으로 이천 군내의 민가 930여 호가 불에 타버렸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벼슬을 버리고 의병을 일으켰으며, 나라를 구하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하고 몸을 낮추어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 믿음과 구국의 씨앗을 뿌렸던 구연영 부자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이들 구연영 부자의 치열한 삶과 거룩한 죽음은 1919년 31운동으로 부활한 것이다.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23. 조국 광복을 위해 폭탄이 되다… 의열단원 남정각 의사

1948년에 반민특위가 출범하여 악질 친일파를 체포했다. 이때 체포된 친일파 중에 이인희라는 자가 있다. 그는 군자금 요청하는 의열단을 경찰에 밀고한 갑부였다. 이인희의 고발로 체포되어 7년을 감옥에서 보낸 남정각이 반민특위 증언대에 섰다. 이인희는 이완용에 못지않은 반민자라 사료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우리 거사가 실현되었더라면 민족 만년에 그 쾌거가 남았을 것이며, 우리 민족 전체의 자랑이 되었을 것을 본인이 체포됨으로써 미리 약속했던 폭탄 영수자가 없어서 사건 전체가 수포로 돌아가고 김시현, 황옥 등 동지가 체포되었습니다. 당연히 극형에 처할 악질자입니다. 약산 김원봉과 의기투합하다 민족 전체의 자랑이 되었을 거사를 준비했던 남정각(南廷珏, 1897~1967)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에서 태어났다. 호를 오산(午山)이라 하고, 남영득(南寧得, 英得)으로도 불렸던 그는 영의정을 지냈으며 동창이 밝았느냐라는 시조로 유명한 숙종대의 문인 남구만의 직계 후손이다. 1913년까지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던 그는 16세에 상경하여 서울기독청년회 공업과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우면서 기독청년회에서 활동하던 이상재, 이필주 같은 애국지사들을 통해 독립운동에 뜻을 품게 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수원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고향 용인과 안성 지역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만세운동에 참여하도록 설득했다. 경찰의 체포를 피해 그해 8월에 중국 북경으로 망명한 남정각은 북경 중국청년회 어학과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그해 12월 학교를 중퇴했다. 천진상해 등지를 돌며 망명한 지사들과 만나 독립운동 방향을 모색하던 남정각은 장춘에서 김원봉(1898~1958)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면서 동지가 되었다. 1921년 겨울 북경에서 김원봉을 다시 만났다. 이때 김원봉은 윤세주, 황상규 등 12명의 동지들과 함께 의열단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부산경찰서와 밀양경찰서는 물론 조선총독부를 폭파한 것도 의열단이었다. 김원봉이 의열단의 취지와 투쟁방식을 들려주고 가입을 권유하자 그는 흔쾌히 단원으로 가입했다. 한편 1921년 말 미국 워싱턴에서 태평양회의가 열렸을 때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단체들은 총력을 기울여 외교운동을 전개했다. 기대와 달리 일제의 방해공작과 열강들의 무관심으로 조선의 독립문제는 의제로 상정되지도 못했다. 외교활동이나 자치운동은 독립과는 거리가 멀었다. 의열단은 좌절감과 무력감에 빠진 독립운동 진영의 투쟁의지를 북돋우기 위한 투쟁을 계획했다. 1922년 하반기에 군자금 조달과 연계하는 국내 폭탄 거사와 대규모 암살 파괴 거사를 동시에 준비했다. 독립운동 진영의 투쟁의지를 북돋우기 위한 투쟁 1922년 6월 천진에서 남정각은 국내로 들어가 김한(1887~1930)의 거사 의지를 타진해 달라는 김원봉의 지시를 받았다. 임시정부 사법부장을 지낸 김한은 국내 청년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지도자로 남정각도 장춘에서 김원봉과 함께 만난 적이 있었다. 6월말 국내에 잠입한 남정각과 류자명은 서울에서 김한을 만나 의열단의 계획을 알렸다. 이에 김한은 폭탄을 중국 안동까지만 운반해 주면 자신이 부하들을 시켜 국내로 반입하여 조선총독부 등에 투척하겠다고 다짐했다. 김한의 의지를 확인한 두 사람은 곧 출국하여 상해에서 김원봉을 만나 김한의 의사를 전달했다. 이에 김원봉은 남정각에게 거사 자금 2천원을 김한에게 전달할 것을 부탁했다. 8월에 다시 국내로 잠입하여 김한에게 자금을 전달하고, 폭탄 반입과 투탄 계획을 확정하고 출국했다. 그 해 10월 20일 김원봉이 남정각을 찾아와 폭탄을 전달할 준비를 끝냈다고 전하면서 국내로 들어가 직접 폭탄을 투척할 뜻이 있는지 물었다. 이에 남정각은 흔쾌히 동의하고 김원봉에게 폭탄 투척방법을 배워 연습까지 마쳤다. 12월 28일 동지 이현준과 같이 입국하여 서울에 머물면서 폭탄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이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벌어졌다. 의열단 동지 김상옥이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를 폭파한 뒤 10여 일 동안 수백 명의 무장경찰을 상대로 신출귀몰하게 총격전을 전개하면서 일경 여러 명을 사살하고 자결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감시와 경계가 한층 강화되어 폭탄 운반이 더욱 어려워졌다. 설상가상으로 김한이 이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남정각은 삼엄한 포위망을 뚫고 서울을 빠져 나가 북경을 거쳐 2월 1일 천진에 도착했다. 김원봉을 만나 그동안의 경과를 보고하면서 그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한이 체포되었지만 김시현(1883~1966)을 중심으로 국내에서 대규모 암살파괴 작전이 계속 추진 중이라는 사실과 운동자금이 부족하여 동지들이 몹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폭탄 도착을 기다리면서 동지들과 거사 자금을 자체로 조달하는 계획을 세웠다. 동지 유시태(1890~1965)와 협의하여 부호 이인희로부터 거사 자금을 거출하기로 결정했다. 2월 21일 그는 상해에서 온 임시정부 군무총장 정 모라 가칭하고 유시태와 함께 이인희의 집에 가서 군자금 5천원을 요구했다. 적극 협조하겠다던 이인희는 당장 거금을 마련하기 어려우니 며칠간 기다려 줄 것을 간청했다. 약속한 3월 3일 남정각이 홀로 이인희의 집을 찾아갔다가 잠복하고 있던 10여 명의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종로경찰서로 끌려간 남정각은 혹독한 구타로 정신을 잃기까지 하면서 강도행위라고 주장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유시태도 이인희 집을 찾았다가 체포되었다. 매일신보 3월 8일자에 권총 강도 공범자 남정각과 그 누이동생까지 공범자로 잡아 엄밀히 취조라는 기사가 실렸다. 한편 경기도 경찰 황옥의 수상한 움직임을 주시하던 함경도 경찰에게 3월 15일 신의주에서 김시현유석현 등 단원들이 한꺼번에 체포되었다. 일경에게 압수된 거사 물품도 세상을 놀라게 했다. 건물 파괴용 폭탄 6개, 방화용 폭탄 17개, 암살용 폭탄 13개 등 폭탄 36개, 권총 5정과 실탄 155발, 단재 신채호 선생이 지은 조선혁명선언 361부, 조선총독부 소속 관공리에게라는 협박문 548매 등이다. 동아일보는 이 사건을 상세히 보도하며 의열단의 강령을 기사형식으로 일부 소개했다. 그런데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에는 4개 조건이 제시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1. 민중은 우리들의 혁명운동의 대본영이다. 2. 폭력은 우리들의 혁명에 유일한 무기이다. 3. 우리들은 민중으로 더불어 손을 잡고 천만년이 지날지라도 이 강도 일본의 세력을 파괴하기 위하여 폭력에 의한 암살파괴폭동 등을 끊이지 아니할 일. 4. 우리들의 생활에 적합하지 못한 제도를 벗어나서 인류가 인류를 압박하고 권력이 인류를 압박하는 등의 일이 없는 이상적 조선을 세울 일 등이다. 훗날 이 사건에 경기도 경찰 간부 황옥, 여류 화가 나혜석 부부가 깊숙이 개입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더욱 화제가 되었다. 8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의열단원 12명의 공판이 벌어졌다. 그는 최후진술을 했다. 나는 한일 합병에 불평과 불만을 품고 의열단에 가입한 후 오직 조선을 위하여 생명을 받쳤소이다. 나는 조선 민족에게 각성을 주기 위하여 오늘날까지 살았은즉 나의 형벌에 대해서는 사형도 좋소이다. 재판정에서 남정각의 법정 최후진술을 목격한 동아일보 기자는 말끝마다 피가 돋는 남영득의 진술이란 제목으로 의기에 찬 그의 모습을 전했다. 1923년 8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9년 출옥하자 다시 중국 천진으로 망명한 남정각은 비밀리 독립운동을 전개하며 천진교민회를 조직하여 이주 한인동포들의 권익 옹호를 위한 사업을 벌였다. 건강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약자 편에 서다 1945년 8월 일제가 항복했다. 남정각은 교민회를 가동하여 동포들의 귀국을 돕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 천진에서 동분서주하며 동포들의 귀국 배편을 마련하고, 또 일본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동포들의 귀국 여비로 제공하는 등 동포들의 안전한 귀국을 위해 노력한 후에야 귀국길에 올랐다. 1946년 남정각은 50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유시태를 중심으로 고려동지회를 조직했다. 고려동지회는 실천 강령을 이렇게 제시했다. 전민족의 총의에 기반하여 수립된 정부를 지원하고, 실천적 활동으로 건국 대업에 기여하며, 가장 진보적인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산업의 진흥을 도모하고, 특히 농민대중을 지도하여 그들의 질적 향상과 농업기술의 발전을 도모하며, 건실한 사회의 기초가 될 건전한 인격의 수련을 도모함이다. 남정각은 동지들을 농촌으로 파견하여 농민들의 의식개혁과 생활향상을 도모하는 계몽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일본에서 전쟁 피해를 입은 동포들의 구호사업을 벌이는 등 귀환 동포들의 생활안정에도 힘썼다. 1963년 정부는 남정각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1967년에 별세하자 국립서울현충원애국지사 묘역에 모셨다. 고향 용인시 모현읍 파담에는 용인향토사학회와 후손들이 세운 의사의 유허비가 있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22. 조국의 운명을 죽음으로 알린 이한응 열사

슬프다! 나라의 주권이 없어지고 사람의 평등을 잃었으니 무릇 모든 교섭에 치욕이 망극할 따름이라 진실로 핏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어찌 견디어 참을 수 있으리오. 슬프다. 종사가 장차 무너질 것이요, 온 겨레가 남의 노예가 될 것이니 구차히 산다 한들 욕됨만이 더할 따름이라. 이 어찌 죽음보다 나으리오. 내 결심한 바 있으니 여기서 더 할 말이 없다. 주영서리공사(駐英署理公使) 이한응(李漢膺, 1874.10.30.~1905.5.12.) 열사가 동포들에게 남긴 피끓는 유서이다. 그는 나라를 대표하는 외교관으로서 국가의 명운이 풍전등화와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국권을 지키기 위해 영국을 상대로 외롭게 외교활동을 펼쳤다. 1840년 아편전쟁으로 청나라 천하질서를 무너뜨린 그 영국이었다. 아편전쟁 이후 동아시아는 제국주의 사냥터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조선은 도덕 만능의 주자학으로 오그라들 대로 오그라들어 있었다. 이한응은 일제가 운요호 사건(1875)을 일으키기 한 해 전에 태어났다. 그는 다섯 살 때부터 한학(漢學)을 배웠다. 그러다 15살 되던 해인 1889년 서울에 있는 관립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입학한다. 육영공원은 당시 정부가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해 근대학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특별히 세운 학교였다. 그는 육영공원에서 2년 동안 영어와 수학, 자연과학, 역사, 정치학 등 근대학문을 배우고 1891년 졸업한다. 그러나 육영공원을 졸업하는 것만으로는 조선을 근대국가로 만들어보려는 뜻을 펼칠 수 없어(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전통적인 과거시험을 치러야만 했다. 1894년 특별과거시험(司馬試)에 응시하여 성균관 진사로 합격하였다. 이한응은 신학문과 전통유학을 겸비한 인재였다. 1899년에는 관립 영어학교 교관으로 임명되고 2년 후 1901년에는 런던주재 대한제국 참서관(參書官)으로 임명된다.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전권대사로 파견되었지만 유럽 국가에는 아직 외교관 파견이 없는 상태였다. 1901년 이한응은 민영돈 공사를 수행하는 참서관으로 팍스 브리테니카(Pax Britannica)의 중심지 영국 런던의 상주 외교관으로 파견되었다. 당시 국제사회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도덕적 법적 제약도 받지 않고 자국의 이익을 무제한 추구하는 마키아벨리적 전통(이상우, 국제정치학강의)에 익숙해져 있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일제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러시아가 중국의 의화단 사건으로 만주를 점령하자 영국과 동맹을 체결(1902년 제1차 영일동맹)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차단하려 했다. 결국 러시아와 일본은 한국과 만주 지배권을 두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전쟁으로 치닫고 있었다. 고종은 러시아와 일본의 개전이 임박한 상황에서 군사적 충동사태에 연루되지 않으려는 입장(강광식, 중립화와 한반도 통일)과 한반도가 전쟁터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전시국외중립선언을 비밀리에 기획한다. 고종은 러일전쟁 발발(1904년 2월 8일) 바로 직전인 1904년 1월 23일 중국 치푸(芝?)에서 기습적으로 한국의 국외중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미국을 위시하여 일본, 러시아,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중립선언 외교문서를 접수한 그 어떤 국가도 지지 표명은 없었다. 고종의 공식적인 전시국외중립 외교가 거의 무산될 즈음에 영국에서는 민영돈 공사가 해임되어 귀국하였다. 이한응은 1904년 초부터 서리공사직을 맡아 영국을 상대로 독자적으로 외교업무를 수행했다. 이한응은 러일전쟁 약 3주 전인 1월 13일과 19일에 영국 외무성을 방문하여 동아시아 지역체제(regional system)를 범세계적 차원의 세력균형체제와 연계시켜 한반도 중립화 방안이 담긴 장문의 메모와 각서를 전달하였다. 이한응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강대국 간에 서로 견제하는 세력균형(balance of power) 상태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각에서 그는 유럽은 영국과 프랑스가 세력균형의 축을 이루고 동아시아는 러시아와 일본이 세력균형의 축을 이루고 있다고 봤다. 그래서 동아시아에서 러일전쟁으로 인해 힘의 균형이 무너지면 유럽도 무너지게 되며, 이는 전 세계적인 세계균형체제의 붕괴로 이어진다는 입장이다. 때문에 이한응은 1차적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세력균형의 균형자(balancer)가 되어 한반도에서 러시아와 일본 간의 분쟁을 조정해 달라고 촉구한다. 이는 한국의 독립, 주권, 영토의 보존이 곧 세계평화와 직결된다는 것을 역설하려 한 것이다. 그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한다. 영국은 일본과, 프랑스는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있는 점을 이용하여 각 당사국은 4개국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전쟁의 위험을 제거하는 동시에 한국과 만주를 보호하여 동아시아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세계평화에 기여한다는 구상이다. 국제정치를 보는 이한응의 통찰력은 탁월했으나 그 판을 움직일만한 힘이 없었다. 강대국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한 반면에 약소국 외교관은 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통하지 않았다. 이한응은 2차적으로 장차 러일전쟁이 발발하더라도 어떻게 하면 국권을 유지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그가 작성하여 영국 외무성에 전달한 각서는 한국의 독립과 주권, 영토 및 특권 보존을 위한 새로운 보장을 요망하는 중립화 방안이었다. 첫째, 영일동맹에 의거하여 한국의 독립주권 및 영토보존을 보장할 것, 둘째, 어떠한 침략적인 국가가 어떠한 수단으로든지 한국 정부를 지배하려 기도할 경우 이를 방지할 것, 셋째, 어떠한 침략적인 국가가 한국 내에 있는 외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할 만한 소요가 발생하지 않을 경우에도 불구하고 한국 내지로 군대를 파병하는 행위를 금지할 것, 넷째, 만약 한국 내에 소요나 폭동 사태가 발생하면 한국 정부가 먼저 그 주권행사에 의거하여 질서를 회복하는 의무를 다할 것, 다섯째, 러일전쟁이 발발할 경우 영국 정부는 어느 쪽이 승리하든 전쟁의 결과에 관계 없이 열강과의 양해를 통하여 한국의 독립주권 및 영토보존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일 것 등이었다. 영국정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러일전쟁이 발발한 다음날에도 이한응은 캠벨(Campbell) 차관보에게 다시 서신을 보내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으려고 시도했으나 냉담한 반응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이한응은 동아시아 담당자 랭글리(Langley)와 회담한다. 러일전쟁이 끝나고 러일 평화조약이 체결될 때 한국의 독립이 보장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이한응의 요구는 무시되었다. 우군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영국 외무성에 대한 수차에 걸친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국정부는 노골적으로 냉담했다. 절망적이었다. 그 해 4월부터 괴한 2명에게 살해 위협까지 받는다. 그는 영국정부에 신변보호를 요청했다. 영국 외무성 고위관리에게 면담도 요청했으나 만날 수가 없었다. 그는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의 한복판에서 세계를 상대로 처절한 싸움을 하다 경각에 달린 조국의 운명을 직감하고 1905년 5월 12일 시운이 이렇게 되니 다만 죽을 뿐이요, 살길이 없습니다.(兄主前上書) 라는 유서를 남기고 장엄하게 순국했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기 6개월 전이었다. 그의 나이 32살이었다. 그야말로 불꽃같은 생애였다. 루마니아의 25시 작가 게오르규가 잠수함에 산소가 부족하면 가장 먼저 토끼가 죽는다고 말했듯이 이한응은 조국이라는 잠수함 속의 토끼였다. 조국은 그의 예언대로 6개월 후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1905)이 강제로 체결되더니 급기야 1910년에는 병탄(倂呑) 되고야 말았다. 그의 유해는 사체가 고국에 돌아가는 날에는 용인 선산 밑 양지에 깊이 묻어(兄主前上書) 달라는 유언에 따라 그해 7월 해로로 고국에 반장되어 경기도 용인 이동읍 덕성리에 안장되었다. 고종황제는 서울 중구 장충단(?忠壇)에 기념비를 건립하여 이한응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고자 하였다. 국제정치 현실은 엄중하다. 조선은 제국의 사냥터가 되었다. 세계열강들은 잔인하게 묵인했다. 조선은 제국의 핵심이익이 첨예하게 충돌하는 역학관계 속에서 쓰러져 갔다. 한반도의 전략적 위치는 불변이다. 미중의 패권경쟁 또한 치열하다. 약소국의 자존양식인 중립화 이론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역사의 바다에서 항해하는 잠수함에 아직도 토끼가 죽어야만 산소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눈치 채는지 경계하고 또 경계할 일이다. 권행완(정치학박사, 다산연구소) 사진=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소장자 이민섭 제공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21. 농촌계몽의 선구자 최용신

1930년대까지 2천만 한국인의 8할이 농민이었다. 31운동에 참여했던 청년과 학생들은 농촌에서 식민지 조국의 희망을 찾기 위한 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청년들은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는 구호를 외치며 일제의 수탈에 신음하는 농촌으로 들어가 아동을 모아 야학을 열고, 성인들을 위한 한글 강습과 농촌의 환경을 개선하는 활동을 줄기차게 벌여나갔다. 조선의 희망을 농촌에서 찾자 농촌계몽운동의 선구자 최용신은 1909년 8월 원산과 가까운 함경도 덕원에서 아버지 최창희와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사립학교를 세워 육영사업을 했던 분이며, 아버지는 교육자로 1927년 신간회운동이 벌어졌을 때 덕원지회 부회장으로 활동한 분이다. 최용신은 개화한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심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이목구비는 반듯했으나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얼굴이 곰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최용신은 이에 주눅 들지 않고 남 앞에 나서서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밝히는 당찬 아이였다. 최용신이 공부한 원산 루씨여고는 기독교 명문사학으로 31만세운동은 물론 농촌계몽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최용신은 전희균에게 참된 기독교신앙과 민족주의를 배웠다. 최용신은 이 학교에 다니면서 제때에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애를 태웠고 4년 동안 점심을 끊었다고 할 정도로 곤란을 겪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들이 학교 근처에도 가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자신은 행운아라 생각하며 열심히 공부해서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1928년 4월 1일자 조선일보에 최용신의 얼굴 사진과 교문에서 농촌으로란 글이 실렸다. 중등교육을 받은 우리가 화려한 도시생활만 동경하고 안일의 생활만 꿈꾸어야 옳을 것인가? 거듭 말하노니 우리는 손을 서로 잡고 농촌으로 달려가자. 1929년 최용신은 서울에 있는 감리교협성신학교로 진학하여 정인보, 정경옥, 조병옥 같은 교수들에게 역사와 사회학과 신학을 배웠다. 교장 채핀 부인은 농촌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으로 신학교에 여성 농촌지도자 양성을 위한 농촌사업지도교육과를 개설하고 황애덕 교수에게 그 일을 맡겼다. 황애덕은 28독립선언에 참여하고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군자금을 송금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한 독립지사였다. 최용신을 농촌운동가로 이끌었던 황애덕은 방학이 되면 학생을 둘씩 짝을 지워 농촌으로 파송해 계몽운동에 참여시켰다. 그 해 여름방학에 최용신은 김노득과 함께 황해도 수안에서 석 달을 지내며 농촌의 현실과 농민들의 어려운 살림을 체험하였다. 1931년 봄, 최용신은 교장 케이블 박사와 몇몇 교수들이 한국의 문화를 낮추어보고 한국인을 차별하는 태도에 분노하여 동맹휴학을 모의하고 이를 전교생에게 알리다가 주동자로 지목되어 징계를 받았다. 결국 이 사건으로 신학 공부를 중단하게 되었다. 재학시절부터 농촌과 농민을 위해 살기로 작정한 최용신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일하여도 의를 위하여 일하옵고 죽어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죽게 하소서. 한편 조선총독부에서도 1931년부터 정책적으로 농촌진흥운동을 펴고 있었다. 농민의 생활을 윤택하고 안정시키는 것을 표면에 내세웠으나 그 목적은 일본이 대륙 침략 전쟁을 수행할 때 필요한 군량미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농촌계몽운동은 총독부의 농촌진흥운동에 대한 반동으로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 운동에 가장 앞장 선 단체는 기독교청년회와 사립학교와 31운동으로 창간된 조선동아조선중앙 세 신문사였다. 샘골에 울려 퍼지는 희망의 노래 1931년 10월, 최용신은 YWCA 농촌지도원 자격으로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천곡에 파견되었다. 샘골교회 예배당을 빌려 아동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열자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최용신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노래와 춤, 연극, 연설 등으로 구성된 발표회를 준비하여 추석명절에 학부형들을 초청해 강습소의 필요성을 알렸다. 부녀회와 청년회를 조직하여 주민들이 서로 믿음을 가지고 마을 공동의 사업을 도모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최용신의 헌신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처음 샘골에 도착했을 때 고개를 갸웃하던 주민들이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신간회 수원지회 감사를 지낸 염석주의 도움이 컸다. 1932년 5월에는 기다리던 강습소의 인가가 나왔고 이듬 해 1월에는 1천3백 평의 대지에 새 교사를 마련하였다. 학교를 확장하여 배나 많은 120명을 모집했지만 입학을 원하는 아동을 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최용신은 이들을 모아 따로 가르쳤다. 뽕나무를 심어 누에치기를 권장하고 감나무를 비롯한 유실수 묘목을 주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여기서 거둔 수입의 일부를 강습소 유지와 농기구를 구입하는 경비로 사용하였다. 미혼의 20대 처녀는 어느 듯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마을에 울려 퍼졌던 샘골 강습소 교가는 그의 야무진 꿈이 담겨 있다. 반월성 황무지 골짜기로/ 따뜻한 햇볕은 찾아오네/ 우리에 강습소는 조선의 빛/ 우리에 강습소는 조선의 빛 오늘은 이 땅에 씨 뿌리고/ 내일은 이 땅에 향내 뻗쳐/ 우리에 강습소는 조선의 싹/ 우리에 강습소는 조선의 싹 샘골학원의 비약적인 성장을 부담스럽게 여긴 일제는 경찰을 통해 학생 수를 반으로 줄이라는 압력을 넣었다. 학원의 운영비와 생활비를 지원해주던 YWCA에도 압력을 넣어 후원금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출구를 모색하던 최용신은 유학을 계획했다. 일본에 유학중이던 약혼자 김학준과 만나 장래를 의논하고, 완전한 교육을 위해 공부를 더 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1934년 3월, 최용신은 학원 운영을 후임 교사에게 맡기고 현해탄을 건넜다. 일본 고베여자신학교 사회사업학과에 진학하여 공부를 시작했으나 유학 생활 석 달 만에 각기병에 걸리고 말았다. 다리가 부어올라 걷기도 힘들었다. 결국 그는 9월에 귀국길에 올랐다. 고향에서 요양할 계획이었으나 다시 샘골로 돌아왔다. 단지 누워 있기만 해도 좋으니 꼭 샘골로 돌아와 달라는 주민들의 간청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병을 치유하며 교육에 정성을 쏟고 있을 때 샘골학원에 위기가 찾아왔다. 1934년 10월, YWCA가 더 이상 운영비를 지원해 줄 수 없다고 통보하였던 것이다. 최용신은 동포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글을 여성잡지에 기고했다. 조선의 부흥은 농촌에 있고 민족의 발전은 농민에 있다하거든, 배우지 못하고 가르치지 못한 우리에게 무슨 발전이 있으며 늘어감이 있겠습니까? 뜻있는 이여, 우리 농촌의 아들과 딸의 눈물을 씻어 주소서.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이 땅을 적시다 최용신의 절절한 호소에도 세상은 별 반응이 없었다. 대안을 찾기 위해 궁리했으나 별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았다. 운명일까, 이번에는 장이 꼬이는 희귀한 병이 들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내 몸뚱이는 샘골과 조선을 위해서 생긴 것이다. 그 샘골, 조선을 위해서 일하다 죽는다 한들 그게 무엇이 슬프랴! 두 번에 걸쳐 수술을 하고 수원도립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샘골 사람들의 병문안이 줄을 이었다. 추운 겨울에 어린 학생들까지 50리 길을 걸어서 문병하며 쾌유를 빌었다. 그러나 1935년 12월 23일 자정 샘골, 샘골을 되뇌던 최용신은 끝내 숨을 거두었다. 샘골 주민들은 자신들을 위해 헌신하다 숨을 거둔 26세 젊은 여선생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렀다. 신문 기사를 보고 심훈이 샘골을 방문하여 최용신의 행적을 취재한 후 지은 소설 상록수가 동아일보에 장기간 연재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수원고농에 재학할 때 최용신을 후원했던 류달영이 스승 김교신의 도움을 받아 최용신 소전를 펴내면서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은 실존 인물 최용신이라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샘골학원을 계속 운영해 달라는 최용신의 유언은 지켜졌다. 일제의 집요한 방해가 있었으나 지역민들이 마음을 모으고 사정을 알게 된 청년 학생들이 자원봉사에 참여했다. 언니의 뜻을 잇기 위해 동생 최용경도 보조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최용신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여성단체협의회가 용신봉사상을, 안산시가 최용신봉사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다. 지역민의 노력으로 1995년에 국가독립유공자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고, 2005년 1월에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정치 연재

지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