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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35. 임시정부의 개혁가… 석농 오영선

“우리 모두는 독립운동가”… 분열 대신 단결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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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가을 상해에서 찍은 오영선(맨 오른쪽) 가족사진. 국가보훈처 제공
1926년 가을 상해에서 찍은 오영선(맨 오른쪽) 가족사진. 국가보훈처 제공

고양 출신의 석농(石農) 오영선(吳永善, 1886~1939)은 부부가 모두 독립운동가다. 부인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 1873~1935)의 둘째 딸 이의순(李義橓)이다. 아내 이의순 집안은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할아버지 이발, 언니 이인순, 형부 정창빈도 모두 독립운동가다. 오영선은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으나 육군무관학교가 폐지되는 바람에 군인의 꿈을 접어야 했다. 이후 일본 도쿄물리학교에 입학했으나 배일사상이 문제가 되어 퇴학당하고 만다. 고국으로 돌아온 오영선은 이동휘가 세운 개성 보창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한다. 오영선이 언제 어디에서 이동휘를 만났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이동휘의 교육생’이라고 불릴 정도로 믿고 따랐다. 이동휘가 설립한 보창학교에서는 을사늑약 이후 국권회복을 위해 학생들에게 중국고전, 한글, 일본어, 영어, 기초과학 등을 가르쳤다. 매일 한 시간씩 군사훈련도 시켰다. 오영선은 캐나다 선교사 그리어슨(Robert Grierson)이 세운 협신중학교 교사로도 활동한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이 끝내 강제로 병합되자 이동휘는 국내에서의 국권회복운동은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이동휘의 교육생’이라 불리는 정창빈, 장기영 등 30여 명을 데리고 기독교 포교를 명분으로 북간도로 망명한다. 오영선도 ‘이동휘의 교육생’들과 함께 이때 망명길에 나선다.

오영선은 북간도에 망명한 후 북간도 한인사회를 통일적으로 결집한 간민교육회가 연길현에 세운 광성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한다. 그는 간도 한인 자치기구인 간민회(墾民會) 의원에 선출되는 등 북간도의 한인들에게 한인의 권익옹호는 물론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활동한다. 러일전쟁 10주년이 되는 1914년, 러시아에서는 일본에 대한 복수전의 여론이 들끓고 있었다. 이동휘는 제2의 러일전쟁에 대비해 광복전쟁을 계획한다. 이동휘와 이종호는 광복전쟁을 꿈꾸며 독립군 장교 양성을 위해 길림성 왕청현 나자구에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 일명 대전학교)를 설립한다. 오영선은 이 학교의 교관으로 활약한다. 그러나 일본영사관의 요구로 중국이 동림무관학교를 폐쇄하자 오영선은 일부 학생들을 이끌고 훈춘으로 가 이동휘가 군사양성을 위해 세운 북일중학교에 합류한다.

오영선은 연해주를 중심으로 러시아 한인사회의 항일활동이 활발해지자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으로 이동한다. 1918년 8월 29일 한민학교에서 열린 국치일기념행사에서 오영선은 “하늘에 닿을 만큼 큰 치욕을 국내에서는 모든 형제ㆍ자매의 흘러내린 붉은 피가 얼마가 되던지 씻어낸다면 우리 해외에 있는 동포들도 피를 흘려 오늘날의 국치를 씻어내기를 희망한다”며 붉은 피로 민족의 치욕을 깨끗이 씻어내자고 열변을 토한다. 아내 이의순은 “국내에서는 많은 여학생이 피를 흘렸는데 해외에 있는 여자들도 어찌 수수방관하고 집안의 안락을 욕심내며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원수의 총칼 아래서 국가를 위해 생명을 바칠 것을 우리들의 행복이라고 믿는다”라고 하며 여성도 목숨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할 것을 호소한다.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잠든 석농 오영선.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잠든 석농 오영선.

1920년 이동휘가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가 되자 오영선은 국무원 비서장으로 국무총리를 보좌한다. 임시정부의 활동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임시정부 조직, 독립운동 방법 등을 두고 각 계파 간에 불신과 갈등이 깊어진다. 이동휘는 임정쇄신안으로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위원제로 변경할 것을 제안한다.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동휘는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상해를 떠나버린다. 오영선은 상해에 남는다. 마침내 1921년 2월 초 박은식, 김창숙, 원세훈 등 상해의 주요 독립운동가 14명은 ‘우리 동포에게 고함’을 선언하고 국민대표회 소집을 요구한다. 이 선언은 국민대표회 소집에 대한 지지와 반대를 불러일으킨다. 개조파는 임시정부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임시정부의 잘못된 점을 개선하자고 주장했다. 창조파는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대통령 이승만을 지지하는 정부옹호파는 국민대표회 소집은 정부파괴운동이라고 반대한다. 이렇게 국민대표회 소집을 두고 분열과 갈등의 골이 깊어질 무렵 오영선은 1922년 1월 1일자 ‘독립신문‘에 ‘신년의 신 각오’라는 논설을 발표한다. 그는 이 글에서 구습을 깨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 위한 7가지 각오를 제시한다. 첫째 공과 사의 구분, 둘째 책임감, 셋째 개인 욕망의 억제, 넷째 감정이 아닌 이성, 다섯째 동지의 결점과 단점을 지적하지 않기, 여섯째 경거망동 금지, 일곱째 동지를 선의로 대하자는 내용이었다. 이 글은 독립운동가 내부의 분열과 갈등은 독립운동의 역량을 좀먹는 것이고, 동지들에 대한 믿음과 화합과 단결만이 독립을 앞당기는 처사라고 역설한 것이었다. 오영선은 “우리는 독립운동가라는 의미 앞에서는 다 동지입니다. 우리 중에 큰 병이 무엇무엇 해도 의심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 사이의 비방, 질시, 시기, 저주 대부분은 선의로 상대하는 중에서 개선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오영선의 아내 이의순이 속한 연해주 조선인적십자회 간호부.
오영선의 아내 이의순이 속한 연해주 조선인적십자회 간호부.

오영선이 신 각오 7가지를 발표한 다음 달 열린 임시의정원에서는 국민대표회 소집 문제가 최대 현안이 되었다. 오영선은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내분을 제대로 수습하지도 않은 채 무책임하게 미국으로 도망치듯이 가버렸다고(1921년 5월) 이승만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한다. 오영선은 국민대표회 소집을 위한 최종 방안으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내정불통일 ▲외교의 실패 ▲조각 불이행이라는 책임을 물어 조상섭 등과 함께 6월 5일 대통령 및 각원 불신임안을 제출한다. 이 불신임안은 6월 17일 국민대표회 소집 찬성안과 함께 반대파가 퇴장한 가운데 표결로 통과된다. 이승만은 대통령불신임안은 불법이라고 강하게 반발한다. 임시정부 개혁에 대한 오영선의 노력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이에 오영선은 국민대표회를 지지하는 의원들과 함께 의원직을 사퇴하고 만다. 그럼에도 사태가 해결되기는커녕 국민대표회가 소멸될 위기에 봉착하게 되자 오영선은 국민대표회 소집을 주장하는 지지파와 이승만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정부옹호파를 중재해 드디어 국민대표회가 개최된다.

오영선의 중재로 어렵게 열린 국민대표회의에서도 각 계파간의 갈등은 여전했다. 오영선은 개조파였다. 그는 만약 창조파의 제안대로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한다면 결국 두 개의 정부를 낳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고 창조파의 주장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오영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창조파는 자신들만이 참여하는 국민대표회를 열어 국호를 ‘한’, 연호를 ‘건국기원’으로 하는 새로운 정부를 발표한다. 이에 오영선은 개조파 의원 56명과 함께 국민대표회를 탈퇴하며 창조파의 조치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한다. 결국 장장 6개월에 걸친 국민대표회는 아무런 성과 없이 결렬되고 서로 간의 불신만 남긴 채 끝나고 말았다.

신년의 신 각오가 실린 독립신문(1922년 1월 1일).
신년의 신 각오가 실린 독립신문(1922년 1월 1일).

오영선은 임시정부 개혁을 위해 다시 한 번 돌파구를 찾아 나서야만 했다. 그의 정부개혁 방안은 해외 독립운동의 최대 근거지인 만주에서 활동 중인 정의부와 참의부, 신민부 등을 연계해 정부를 구성하는 방안이었다. 이 방안은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하는 문제와 헌법 개정을 주요 현안으로 설정했다. 1924년 12월 박은식을 국무총리로 하는 새로운 내각이 구성되고 오영선은 법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다음해 임시의정원에서는 3월 23일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하고 박은식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한다. 4월 7일에는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로 헌법을 개정해 공포한다.

헌법이 개정되자마자 법무총장 오영선은 1925년 4월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를 방문해 임시헌법 개정의 취지를 설명하고 먼저 정의부 간부들과 임시정부와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한다. 1925년 7월 7일 정의부의 이상룡을 초대 국무령으로 선출하고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 3부의 주요 인물들을 국무원에 임명했으나 이들이 국무원에 불참함으로써 정부조직에는 실패하고 만다. 오영선은 국무원으로서 임시정부의 개혁과 대동단결을 위해 애썼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상해에서 영면한다.

빼앗긴 조국은 풍찬노숙으로만 되찾을 수 없다. 우리 내부에서부터 먼저 화합하고 대동단결해야 한다. 모든 나라는 침입자가 오기 전에 내부의 분열로부터 망한다고 했다. 역사의 법칙이다.

권행완(정치학박사ㆍ다산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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