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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38. 만주벌의 호랑이 장군… 노은 김규식 선생

청산리전투 진두지휘… 일본군 1천200명 사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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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대첩 승전 기념사진. 독립기념관 제공
청산리 대첩 승전 기념사진. 독립기념관 제공

■ 만주 독립군들 사이에 불리던 ‘호장군’ 주인공

1920년대 만주의 산하를 달리며 일본군과 싸우던 독립군들 사이에 ‘호장군’으로 불리던 투사가 있었다. 그는 10배나 되는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싸워 승리했던 청산리대첩의 주역 김규식(金奎植, 1882~1931) 장군이다. 그러나 김규식은 오랫동안 역사의 그늘에 묻혀 있었다. 동시대의 독립운동가 우사 김규식(尤史 金奎植, 1881~1950)과 혼동해 행적이 뒤섞이기까지 했다. 다행히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이런 잘못이 바로 잡혔다. 구리시는 매년 장군이 서거한 날을 기해 추모제를 벌이고 있다.

김규식은 1882년 양주군 구리면 사노리(현 구리시 사노동)에서 김영선의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도(瑞道)라고 불리기도 했던 김규식은 재야에 은둔하는 선비를 연상시키는 ‘노은(蘆隱)’이란 호를 가졌다. 노은은 무장투쟁에 나서면서 얻은 별명 호장군(虎將軍, 호랑이 장군)과 사뭇 대조적이다. 김규식은 15세가 되던 1896년에 같은 마을에 사는 16세 주명래와 혼례를 올리고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다.

김규식은 1903년에 대한제국의 사관학교에 입학해 이듬해 육군시위대 부교에 임명되고, 같은 해 9월에는 육군연성학교 조교에 임명되어 장교와 하사관에게 전술을 비롯해 사격술과 체조, 검술 등을 숙달시키고, 그 원리를 가르쳤다. 1905년 일제는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외교권을 빼앗았다. 군복을 입고 총을 든 군인이지만 나라가 위기에 처해도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현실에 괴로워하던 김규식은 1906년 10월에 자진해서 군복을 벗고 구리로 낙향했다. 이때 육군 정위 출신의 현덕호도 전역했다. 김규식은 현덕호의 소개로 기독교 계통의 신흥학교에서 교무로 일했다.

■ 정미의병으로 출전하다

1907년 8월, 일제는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군대 해산시켰다. 이때 시위대 대대장 박승환이 자결하자 군인들이 일본군과 시가전을 전개했다. 김규식은 현덕호와 같이 양주군 동두천에서 활약하던 의병장 허위의 부대에 들어가 부대원 4~50명(혹은 80여 명)을 지휘하게 되었다. 김규식은 마전, 삭녕, 연천, 철원 등지에서 일본군과 4~5차 교전해 전과를 거두었다. 그해 12월 양주에는 팔도에서 1만에 달하는 의병이 모였다. 이곳에서 의병장들은 이인영(李麟榮, 1868~1909)을 13도 총대장, 경기도에서 활동하던 허위를 군사장으로 삼아 13도 창의군을 결성했다. 이듬해 1월, 창의군이 한성 진공 작전을 개시했을 때 김규식은 허위의 300명 선발대의 일원으로 한성으로 진격했다.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했으나 김규식은 연기우와 함께 적의 총탄에 맞고 체포되었다. 현덕호는 전사했다. 이때의 상황을 매천 황현(1855-1910)은 이렇게 기록했다.

“허위와 이인영의 부하는 조수연, 김규식… 연기우 등 모두 16인인데, 역사(力士)로 이름을 떨쳤다. …의병장 허위가 붙잡혔으며, 부하 김규식도 체포되었는데 뛰어난 용맹이 있어서 압송되는 길에 포승을 끊고 몸을 솟구쳐 달아났다.” <대한매일신보>(1908년 7월 10일 자)에도 비슷한 기사가 실렸다. “김규식씨는 허위씨 휘하의 제일 용장인데 인천 등지에서 일병에게 피착되었더니 허위씨의 소재를 추궁하기 위해 그를 밧줄로 묶어 앞세우고 강원도 지방으로 향하다가 도중에 그가 밧줄을 끊고 달아났다는 설이 있다더라.”

김규식과 총대장 이인영이 사돈을 맺었다. 그의 맏아들과 이인영의 딸이 혼인한 것을 보면 이인영이 그를 깊이 신뢰했던 것 같다. 러시아에서 무기를 구입하려고 인천에서 밀항을 준비하다가 일경에 체포된 김규식은 내란죄의 명목으로 1908년 8월에 유형 15년을 구형했다. 2년 간 유배 생활을 하던 그는 국권을 완전히 상실한 1910년 9월 5일에 사면되어 풀려났다. 조선합병을 축하하는 특사였던 셈이다.

일제가 작성한 <요시찰인명부>에 따르면, 김규식은 성격이 강하고 담력이 있으며, 키는 5척 5촌 정도에 농부의 체격을 갖고 있다고 했다. 어떤 자료에는 1917년에 구리에 소재한 동구릉 산림순시원으로 근무했던 것과 구리면의 3·1운동과 관련해 1920년 8월에 경성고등법원에 다시 기소되었다는 사실도 남아 있다. 1912년 혹은 1913년에 망명했다는 주장과 1920년 7월에 만주로 망명해 북로군정서에 참여했다는 연구도 있어 혼란스럽다. 그의 딸 김현태(1915~1996)의 증언에 따르면, “제삿날 같이 사람이 조금만 많이 모이거나 아버지의 얼굴이 며칠만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일경이 찾아와 괴롭혔다.” 이 같은 상황에서 김규식은 만주로 망명했다.

김규식 부인묘
김규식 부인묘

■ 청산리 대첩을 지휘하다

1920년 서간도에서 대종교의 지도자 서일(徐一, 1881~1921)이 중광단을 기반으로 북로군정서를 조직했다. 서일은 북로군정서의 사령관으로 대한제국의 장교로 대한광복단에서 무장투쟁을 주도하던 김좌진을 영입했다. 김좌진은 북로군정서 근거지가 있던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에 병영을 건축하고 사관양성소를 개교하고 의병투쟁으로 명성을 얻었던 김규식을 교관으로 초청했다. 사관양성소에는 만주지역의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3·1운동으로 조국 광복에 대한 열기가 뜨거웠던 시절이었다. 김규식은 이범석, 이장년 등 동료 교관들과 함께 장래에 독립군이 될 청년들을 지도했다. 교육기간은 연성학교처럼 6개월 과정의 속성이었다. 그해 9월 초에 298명의 학생을 졸업시켰다. 재학 중인 학생이 600명이나 되었다. 이 무렵 북간도의 사관양성소는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와 함께 독립군의 산실이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원의상의 회고에 김규식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이 무렵 나는 삼원보의 한족회 학무부장 김규식선생의 부름을 받고 신흥무관학교로 가서 모교의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범석동지도 이때 이곳에서 교관으로 복무하고 있었다.”(원의상, <만주 독립군의 생활> 중 ‘신흥무관학교’, 1969년 <신동아> 6월호)

1기가 졸업한 9월 중순, 일제의 압력을 받은 중국군이 북로군정서를 공격했다. 북로군정서는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을 피하려 근거지를 버리고 사관연성소의 문을 닫고 장정에 올랐다. 이 때 졸업생이 중심이 된 교성대가 편성되었다. 이 별동부대는 청산리대첩에 참여한 독립군 주력부대 가운데 하나였다. 이에 앞서 1920년 6월, 봉오동에서 홍범도 부대에 크게 패한 일본은 만주 일대의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해 토벌작전을 세웠다. 마적의 습격을 받았다며 ‘훈춘사건’을 조작해 만주 침략을 개시한 일본군은 5개 사단 2만5천 명을 동원하고, 비슷한 규모의 지원 병력과 비행기까지 동원했다. 무려 5만에 달하는 일본군이 출동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독립군 부대들은 우선 피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만주지역의 조선족을 초토화하는 소식을 듣고 전략을 수정했다.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의 청산리 일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홍범도와 김좌진이 지휘하는 독립군은 여러 차례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모두 승리했다. 김규식과 같은 유능한 지휘관들과 죽어가면서도 방아쇠에 손가락을 묶어 총을 쏘는 지휘관들의 분투가 빚어낸 위대한 승리였다. 이때 일본군 1천200명을 사살했다. 일본군은 참패에 대한 보복으로 만주에서 농사를 짓던 조선인들을 잔혹하게 살육하는 ‘경신대참변’을 벌였다.

■총사령관 김규식, 소련의 배신으로 ‘자유시 참변’ 겪다

김규식을 비롯해서 독립군들이 집결한 곳이 만주 동쪽 끝의 밀산이다. 이곳은 일찍이 이상설(李相卨, 1870~1917)이 독립군 기지로 설정해 준비해둔 지역이었다. 이곳에 모인 독립군은 3천500여 명이나 되었다. 여기서 대한독립군단을 편성하고 서일을 총재로, 부총재에는 홍범도와 김좌진, 조성환 그리고 총사령에 김규식을 뽑았다. 청산리전투를 치르면서 지휘능력을 인정받은 김규식에 대한 독립군단의 평가였다. 밀산에 모인 대한독립군단은 식량과 무기 지원을 약속한 소련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당시 소련에는 두 개의 조선인 파벌이 형성되어 있었다. 1921년 6월 28일, 두 세력이 무력 충돌하는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다. 이때 독립군 900명이나 희생되었다. 참변을 피한 김규식은 부대를 인솔해 만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참변의 충격과 상처는 쉽게 치유되기 어려웠다. 1923년 연길에서 고려혁명군이 조직되었을 때도 김규식은 총사령에 선임되었다. 1925년에는 북만지역에 독립운동단체인 신민부가 결성되자 고려국민당에 가입해 군사위원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김규식은 조국에서 어렵게 사는 가족을 만주로 불러들였다. 이때부터 김규식은 자신이 터를 잡고 살던 연수현 태평촌 농장에 학교를 세워 독립군 인재 양성에 정성을 쏟았다. 장기전을 대비한 것이다. 1931년 3월, 김규식은 지청천, 신숙 등과 함께 향후의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 하동농장을 방문했다가 뜻밖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당시 주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던 자들이 김규식이 자신들의 위치를 위협한다고 생각해 암살한 것이다.

■ 애국자를 대우하지 않는 나라

만주에 있었던 김규식 선생의 가족은 독립운동가의 자녀라는 이유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큰아들은 광복 후에 거리에서 일본인의 총에 맞아 죽었고, 둘째 아들도 동북 삼성의 정치범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규식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선생과 한국으로 거처를 옮긴 그의 후손들은 오랫동안 무국적자 신세를 벗지 못했다. 일제가 만든 호적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는데 광복 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호적에 등재된 사람에게 대한민국의 국적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김규식 선생도 2009년에야 무국적자의 신분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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