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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29.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을 향한 한평생… 원심창 의사

‘제2의 홍구공원의거’ 결의 거사 실패… 일제 간담 서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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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일제에 체포되었을 당시의 원심창, 이강훈, 백정기 의사(왼쪽부터).
1933년 일제에 체포되었을 당시의 원심창, 이강훈, 백정기 의사(왼쪽부터).

14세의 소년, 3·1운동에 참여하다

평택 안정리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원심창(元心昌, 1906~1971)은 선친을 잃고 편모슬하에서 자랐으나 의협심이 강하고 따뜻한 심성을 가진 총명한 소년이었다. 4년제 평택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농사일을 도우며 지내던 원심창은 14세가 되던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경험은 그를 민족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했고, 고향을 떠나 민족사학의 명문으로 알려진 서울의 중동학교로 진학하는 계기가 되었다. 1922년에 중동학교를 중퇴하고 진로를 모색하던 원심창은 고향에 내려가 지내다가 그해 연말에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다. 16세의 소년 원심창은 낯선 일본의 수도 동경에서 2년 동안 노동과 공부를 병행하며 대학입학을 준비했다. 일본생활이 채 1년도 되지 않은 1923년 9월 1일, 도쿄 일원에 일본역사상 최강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가운데 일본인 자경단이 무고한 한국인을 6천명이나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지진으로 민심이 흉흉한 9월 3일에는 흑우회를 이끌던 아나키스트 박열이 애인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천황과 황태자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는 혐의로 검거되었다. 또 그해 말에는 일본의 저명한 아나키스트 오스키 사카에가 살해되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아나키스트 단체가 후쿠다 대장을 저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원심창은 아나키즘을 주목하게 하였다. 20세가 된 1925년 봄, 원심창은 일본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생이 된 원심창은 당시 세계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과 오스키의 <정의를 구하는 마음>을 비롯한 아나키즘 관련 서적을 탐독했다. 절대 권위를 배격하고 서로 도우며 정의롭고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하자는 아나키즘은 식민지 청년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 무렵 그는 박열이 조직한 아나키스트 단체 흑우회에 가입했다. 흑우회의 기관지 이름을 ‘불령선인’이라할 정도로 박열은 일제에 노골적으로 저항했다. 박열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의열단과 연결하여 여러 차례 폭탄을 반입하려고 시도했을 정도로 일찍부터 무장투쟁에 관심을 가졌다. 그해 9월 원심창은 대학에 자퇴서를 제출했다. 더 이상 학비를 마련한 길이 없었던 것이다.

1927년 원심창은 옥중에서 결혼한 박열의 아내 가네코 후미코가 형무소에서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동지들과 함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한편 그의 유골을 박열의 고향 경북 문경으로 보냈다. 투옥 중인 박열의 사업을 계승하기 위해 단체명을 불령사로 개편하고 기관지 <흑우>를 발행했으며, 일본의 아나키스트 단체인 흑색청년연맹에 가입하여 반제국주의 연합전선을 펼쳤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에 시달리면서도 노동운동에 주력하여 조선자유노동자연합을 결성하고, 일본 최대 노동조직인 동흥노동동맹을 조직했다. 또한 친일단체인 상애회와 맞서며 그들의 진상을 폭로했다. 이 무렵 좌우 합작으로 출범한 신간회를 통해 공산주의를 전파하려는 움직임에도 맞섰다. 1929년 원심창은 몇몇 동지들과 본국의 가뭄피해를 외면하고 운동회 개최에만 열중하는 유학생들의 비민족적 태도에 반성을 촉구하며 신간회 도쿄 지부를 습격하는 ‘학우회 사건’을 벌였다. 이 사건으로 동지 7명과 구속되었다가 1930년 4월 말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당국의 감시가 심해져 활동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원심창은 항일투쟁을 펼치기 위해 중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했다.

육삼정 거사로 무기징역을 살다

1931년 5월 상해에 도착한 원심창은 아나키스트 조직인 남화연맹에 가입했다. 만주사변으로 일본의 통제가 크게 강화되었지만 중국 내에 항일 기운도 높았다. 그해 10월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한중일의 아나키스트들이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했다. 11월 중순, 원심창은 프랑스 조계 안에 있던 백정기의 집에서 결성한 ‘흑색공포단’에 참여했다. 원심창은 백정기를 비롯한 동지들과 함께 1932년 1월 천진의 일청기선 부두에서 군수물자를 싣고 입항한 기선과 일본영사관, 일본군 부대에 폭탄을 던졌다. 폭탄의 성능이 약해 큰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으나 이런 과감한 행동을 현지 신문은 항일구국연맹의 활약이라며 대서특필했다.

1932년 4월 29일, 중국과 일본은 물론 아시아를 놀라게 한 사건이 벌어졌다. 일본은 시라카와 대장이 중국군 19로군을 패퇴시키고 상해를 점령하자 일본 군부는 승전을 축하하며 일왕의 생일인 4월 29일 상해의 홍구공원에서 천장절 기념식을 겸한 승전축하식을 열었다. 이 행사장에 한인애국단 소속의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대장 등 핵심 요인들을 처단했던 것이다. 일본 경찰은 이 사건의 배후 지령자임을 밝힌 백범 김구의 목에 거금 60만원의 현상금을 걸었다.

윤봉길의거에 고무된 원심창과 백정기를 비롯한 남화연맹 흑색공포단 동지들은 ‘제2의 홍구공원의거’를 구상하고 있었다. 이 무렵 통신사에 근무하는 야타베 유지라는 일본인 아나키스트가 원심창에게 접근해왔다. 대단한 친화력을 가진 야타베는 이내 동지들과 친밀해졌다. 1933년 2월초, 오오끼가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의 육삼정 회합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일본의 군부대신의 지원을 받은 아리요시가 중국 장개석 군대를 거금으로 매수하여 만주에서의 항일투쟁을 무력화시키는 비밀회합을 고급요정 육삼정에서 가진다는 특급정보였다. 원심창은 정화암, 유자명과 함께 야타베를 만나 다시 한 번 정보의 내용을 검토했다. 그의 말과 행동이 진실하다는 동지들의 판단에 따라 아리요시 암살 계획을 실행하기로 결정하고 동지들을 소집했다. 리더인 정화암이 모임의 배경을 설명하자 10명의 동지들 모두가 자기가 맡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결정하지 못하고 다시 모여 결정하기로 했다. 다음날 제비뽑기에서 백정기와 이강훈이 함께 하기로 결정되었다. 원심창은 야타베를 통해 아리요시의 사진과 자동차 번호를 알아내고 현장 안내를 맡기로 했다. 이날 원심창은 백정기, 이강훈을 비롯한 동지들과 제2의 윤봉길의사가 되어 대한 남아의 기개를 세계만방에 떨치자며 배갈을 한 잔씩 나누어 마셨다. 정화암은 윤봉길 의거 뒤 백범이 일제의 추적을 피해 가흥으로 피신을 갈 때 주고 간 폭탄 두 개와 중국인 동지로부터 받은 권총 두 자루와 탄환 20발, 수류탄을 세 사람에게 분배했다. 육삼정 회합은 밤 9시부터 11시까지였다.

거사일인 3월 17일 오후 8시, 원심창은 이강훈, 백정기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현장 부근에서 내렸다. 이들은 육삼정에서 2백 미터 쯤 떨어진 중국음식점 송강춘으로 향했다. 거사에 사용할 폭탄은 윤봉길의사가 던진 폭탄과 성능이 같은 것이었다. 그곳에서 일본인 동지 야타베를 만나 당일 육삼정의 정세를 파악하기로 약속했으나 야타베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종업원들의 수상한 거동을 보고 함정에 빠진 것을 눈치 챈 백정기가 품안의 폭탄을 빼드는 순간 종업원과 손님으로 위장한 일본 형사들이 덮쳤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이강훈, 원심창도 인력거꾼과 행인으로 변장한 여러 명의 일본 형사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체포된 3인은 일본 나가사키로 압송되었다. 그 해 11월 15일 일본 나가사키 지방 재판소는 원심창과 백정기에게 무기징역을, 이강훈에게 15년 형을 구형하였고, 11월 24일 최종 재판에서 재판장은 검사의 구형대로 선고하였다.

거사 직전에 정보가 새어나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국내외의 여러 신문에 크게 실려 일제의 대륙침략 음모가 폭로되었다. 실패한 거사였으나 중국인들을 항일전쟁에 나서도록 했을 뿐 아니라 한국인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후반생은 통일조국을 위해

1945년 10월 10일, 원심창은 13년 만에 일제의 형무소에서 출소했다. 원심창과 이강훈은 맥아더 사령부를 찾아가 아직도 투옥 중인 박열을 석방시켰다. 원심창은 이강훈, 박열 등 동지들과 함께 옥중에서 순국한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찾아내 이봉창, 윤봉길 두 의사의 유해와 함께 조국에 봉환하여 1946년 7월 6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모셨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원심창은 재일교포의 단결을 위해 동지들과 민단을 조직하여 사무국장, 단장으로 활동하며 재일동포의 권익 옹호에 힘을 쏟았다. 원심창의 후반생은 남북의 화합과 협력을 바탕으로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는 숭고한 과업에 바쳐졌다. 고문 후유증으로 신음하며 통일운동에 헌신하던 원심창 선생은 1971년 7월 4일 65세를 일기로 운명했다. 한국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독립투사 원심창 선생의 생애를 살피면서 지금까지 비판 없이 사용되고 있는 무정부주의라는 용어를 바로잡을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스어의 ‘아나르코anarchos’에서 나온 아나키즘은 ‘지배자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일본에서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라고 옮기면서 아나키즘을 정부 조직이 없는 혼란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곡해하게 되었다. 단재 신채호와 우당 이회영도 아나키스트였다. 우당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강제적 권력을 배격하는 아나키스트이지,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다. 아나키스트는 타율정부를 배격하지, 자율정부를 배격하는 자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원심창 의사가 아나키즘을 선택한 것은 조국의 광복과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또 하나의 길’이었다.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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