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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24. 부자가 나라를 위해 죽다… 구연영 선생

민족배신 일본찬양 날뛰는 ‘매국노’ 핏빛규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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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진회와 싸우다 아들과 함께 순국한 구연영 선생, 의병투쟁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군은 전국 각처에서 파괴를 일삼았다. 사진은 초토화 된 마을.
일진회와 싸우다 아들과 함께 순국한 구연영 선생, 의병투쟁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군은 전국 각처에서 파괴를 일삼았다. 사진은 초토화 된 마을.

일본 낭인들이 왕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공포되었을 때 고향 이천에서 의병을 모아 무력투쟁에 나섰다가 이에 한계를 느끼고 애국의 수단으로 기독교에 입문한 사람이 있다. 한때 벼슬을 살았고 의병대장으로 활약했던 그가 총 대신 성경을 들고 시골마을을 찾아다니며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고 한글을 가르치는 전도사가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전도를 하며 조직한 ‘구국회’를 통해 일제의 야욕을 폭로하고 나라와 민족을 배반한 일진회를 성토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아들과 함께 순국한 사람이 있다. 그는 춘경 구연영 선생이다. 춘경 구연영(具然英,1865~1907)은 서울에서 능성 구씨 철조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경기도 광주에 살았다. 구연영은 변미례와 혼인하여 큰아들 정서(禎書,1883~1907)를 포함하여 네 아들을 두었다. 그의 호 춘경(春景)은 우리말로 ‘봄볕’이다.

그의 삶은 아호처럼 위기에 처한 나라와 가난한 이웃에게 봄 햇살처럼 밝고 따사로웠다. 백암 박은식이 동학농민전쟁에서 31만세운동까지 민족사관에 입각해서 엮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구연영은 잠시 관직 생활을 하다가 정계의 부패를 볼 수 없어 퇴직하고, 독립협회에 가입해서 조국 광복운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 책에도 구연영의 의병활동에 관한 내용은 빠져 있다. 그의 의병활동에 관한 사실은 일본의 군대가 남긴 <폭도일기>와 이천수의진의 대장 김하락의 <진중일기>에 실려 있다.

초기 의병들의 모습.
초기 의병들의 모습.

■ 의병장으로 일본 침략자들과 맞서 싸우다

1984년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고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노골적으로 조선을 침탈하자 조선인들의 원한과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1895년 6월 명성왕후가 일본 낭인들의 칼에 살해되었다. 구연영은 청장년 시절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나라의 앞날을 염려했다. 의기가 높은 선비 김하락(金河洛, 1846~1896)을 중심으로 열혈 청장년들이 모여들었다.

김하락의 <진중일기>에 따르면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을 ‘동제인(同濟人)’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모임의 이름이 동제사가 아닐까 싶다. 어려운 시대를 함께 헤쳐가자는 결사의 핵심 구성원 다섯은 모두 유생이었다. 김하락과 조성학은 재야유생, 구연영은 전직관료, 김태원은 현직관료였다. 단발령이 공포된 다음날인 1895년 12월 31일 서울을 출발한 이들은 1896년 1월 1일에 이천에 도착했다. 화포군 영장 방춘식을 만난 이들은 포군명부를 펼쳐 놓고 100여 명을 선발하여 이들과 함께 의병을 모집했다.

구연영이 양근과 지평에서 모집한 300여 명을 포함하여 총 900여 명의 군사로 이천수창의소를 출범했다. 김하락이 총지휘를 맡고 구연영은 중군장에 임명되었다. 1896년 1월 17일, 일본군 수비대 보병 100여 명이 이천으로 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창의소는 광현 야산에서 적을 협공하는 전술로 일본군 수비대 180여 명을 사살하는 놀라운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2월 12일 새벽, 군세를 대폭 늘인 일본군 200여 명의 기습 공격을 받아 이틀을 분전했으나 우세한 화력을 갖춘 적들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부하들을 이끌고 원주로 피신한 구연영은 그곳에서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이천으로 귀환했다. 흩어졌던 의병들을 수습하여 2천여 명으로 부대를 재편하고 새로운 창의대장으로 박준영을 추대한 후 광주 남한산성으로 진을 옮겼다. 남한산성은 갑오개혁으로 주둔군을 철수시킨 까닭에 쉽게 장악할 수 있었다.

중군장 구연영은 성 중앙부 수비를 맡았다. 일본의 압력을 받은 정부는 서울 친위대와 강화도 주둔군을 남한산성으로 파견했다. 산성을 포위하고 20여 일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자 관군이 이간책을 썼다. 동문 방어를 맡은 김귀성이 포섭되고 김귀성을 통해 창의대장 박준영마저 포섭되었다. 두 사람은 수원 유수와 광주 유수로 임명해 준다는 제안에 넘어간 것이다. 1896년 3월 21일 박준영은 저녁에 군사들을 위로한다며 술과 고기를 잔뜩 주어 깊이 잠들게 한 후 새벽녘 성문을 열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파악하고 분노한 의병들은 관군들에게 쫓기면서 배반자 박준영 부자를 처형한 후 남한산성에서 퇴각했다. 장수들이 향후 대책을 논의한 끝에 김하락의 고향인 안동으로 옮겨 그곳에서 군사를 모아 다시 싸우기로 했다. 경상도로 이동한 이천의병은 5월 14일 경군 100여 명과 화현에서 전투를 벌였다. 10여 일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전투 끝에 의병들은 다시 후퇴했다. 강력한 화력과 보급망을 갖춘 조일 연합군은 계속 강화되는 반면 의병들은 숫자가 줄고 보급도 여의치 않아 수세를 면치 못했다. 패전이 거듭되면서 더 이상 싸우기 힘든 형편이 되었다. 1896년 5월 27일, 구연영은 자신을 따르던 경기도 의병 30여 명을 거느리고 회군을 결정했다.

친일파 이용구는 1904년 8월 16일 진보회를 조직후 같은해 12월 4일 일진회로 통합해 매국행위를 앞장서서 자행했다. 1908년 12월 이용구의 집에서 찍은 일진회 자영단 원호대. 일본인들과 뒤섞여 있다.
친일파 이용구는 1904년 8월 16일 진보회를 조직후 같은해 12월 4일 일진회로 통합해 매국행위를 앞장서서 자행했다. 1908년 12월 이용구의 집에서 찍은 일진회 자영단 원호대. 일본인들과 뒤섞여 있다.

■ 의병에서 기독교 신자가 되어 구국운동 나서다

구연영은 고향집에서 여섯 달 동안 조용히 지내며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이때 그는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 교육을 통해 계몽운동을 펼치고 있는 기독교를 주목했다. 1897년 2월, 서울 남대문에 있는 상동교회를 찾아 선교사 스크랜튼을 만나 기독교에 입교했다. 유학을 공부한 그가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물론 나라를 구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상동교회는 장사꾼을 비롯한 하층민들이 많이 다니던 민중교회였다. 구연영은 상동교회 엡웟청년회를 이끌던 전덕기(全德基,1875~1914)를 만나면서 자신의 결정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청년’이라는 이름이 붙은 최초의 청년회를 이끌던 전덕기는 구연영보다 열 살이나 적었을 뿐 아니라 기독교인이 되기 전 숯장수였던 청년이 당대 최고의 명사들의 구심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이 또한 기독교의 힘이라 생각한 구연영은 전덕기가 이끄는 청년회에서 활동하면서 독립협회에도 가입하여 전국에서 모인 지사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꿈을 꾸었다. 고향에 돌아온 구연영은 노비 문서를 불태우더니 종들에게도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다. 이런 파격적인 행동으로 그는 집안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 그가 선택한 직업은 선교사에게 월급을 받으며 성경책을 판매하는 권서인(勸書人)이었다. 구연영은 궁평 본가를 떠나 장항에서 권서인으로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마을을 다니며 성경을 팔고 복음을 전하고, 한글을 배우려는 사람이 있으면 성경책을 교재로 삼아 한글을 가르쳤다. 성경을 팔러 다니는 길에 의병활동을 함께 했던 동지들을 찾아다녔다. 그의 설득으로 동지들이 하나둘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렇게 재결합한 동지들과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조직한 것이 구국회(救國會)였다. 교회 조직을 통해 국채보상운동도 활발히 벌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망국의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다. 구연영은 아들 정서와 함께 이천ㆍ광주ㆍ여주ㆍ장호원 등지를 순회하면서 군중집회를 열어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고 조약 체결의 철회를 촉구했다. 때로는 시장철시를 통한 비폭력 저항운동을 주도했다. 군중집회에서 구연영은 일진회의를 매섭게 규탄했다.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던 일진회는 을사조약 체결에 지지선언을 하는 매국적인 활동으로 지탄받고 있었다. 이 무렵 발행된 <대한매일신보>에 이천 기독인들의 동향이 소개되었다.

“이천군에서는 예수교인들이 지석 장터에 웅거하여 인민을 선동하니, 무슨 거조가 있을는지 기세가 굉장하여 배일하는 주의가 있으며, 지석 장터 근처는 상업이 유명한 곳이라 사면으로 통하기가 편함으로 의병이 아무 때나 무슨 거조가 있으리라 하나 알지 못하겠고…”

1907년 일제는 헤이그 밀사사건에 대한 책임으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내정 간섭을 합법화하고 군대까지 해산시켰다. 이천에서도 다시 의병이 궐기하자 일본군 헌병대가 광주와 이천에 진주했다. 이 무렵 구연영은 일본 경찰로부터 이런 평가를 받았다. “경성 동편 십여 군에는 구연영만 없으면 기독교도 없어질 것이요, 일본을 비방하는 자도 근절될 것이다.”

아버지 구연영 선생과 함께 26세의 나이로 적탄에 쓰러진 구정서. 동대문교회 전도사로 청년운동을 전개하고 여주와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아버지 구연영 선생과 함께 26세의 나이로 적탄에 쓰러진 구정서. 동대문교회 전도사로 청년운동을 전개하고 여주와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 이용주 밀고로 체포… 죽음으로 지킨 ‘애국’

일진회는 구연영의 밑에서 일하던 이용주를 매수했다. 이용주의 밀고로 구연영은 맏아들 정서와 함께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구국회에 속한 동지의 이름을 대라는 회유와 협박에 굴하지 않고 대항하다가 1907년 8월 24일 낮, 이천 장터에서 아들과 함께 총살을 당했다. 그의 나이 44세, 아들은 25세였다.

<대한매일신보>는 “부자구몰 -일병 오십여 명이 이천읍 안에 들어와서 예수교 전도인 구연영 구정서 부자를 포살하고 그 근처 오륙 동리를 몰수히 충화하엿다더라.”라며 일제의 만행을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이때 일본군의 보복으로 이천 군내의 민가 930여 호가 불에 타버렸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벼슬을 버리고 의병을 일으켰으며, 나라를 구하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하고 몸을 낮추어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 믿음과 구국의 씨앗을 뿌렸던 구연영 부자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이들 구연영 부자의 치열한 삶과 거룩한 죽음은 1919년 3·1운동으로 부활한 것이다.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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