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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24. 오리 이원익 초상화

영의정 여섯번 지낸 ‘경세가’ 섬약한 외모 고스란히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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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감당
▲ 관감당
“공(이원익)은 진정 장대한 체구에 근엄하고 씩씩한 모습이리라. 드높은 태산, 화악 같았으리라 상상했지만 실상은 섬약한 아래턱이며 불그레한 콧날에 어른어른 주근깨가 여기저기 박힌 모습이로다”

 

다산 정약용이 오리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의 초상을 보고 말한 글의 일부분이다. 다산이 초상을 보고 지은 글처럼 이원익은 섬약한 아래턱에 불그레한 콧날을 가졌으며 뺨에는 어른어른 주근깨가 여기저기 박힌 모습이었다. 업적으로 상상했던 이원익의 모습이 아니었기에 꽤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초상화를 그린 조선의 화가들은 인물의 모습은 물론 정신까지 드러내는 경지 즉, 전신(傳神)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화력을 초상화에 다 쏟아 부었다. 이러한 자세로 초상을 그렸기 때문에 대상 인물의 감추고 싶은 약점까지 모두 드러냈던 것이다.

 

■초상으로 만나는 청백리 이원익의 모습

국내에 알려진 이원익의 초상화는 모두 6점이다. 이 중에서 4점이 광명시 소하동 충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과 경북 영주의 소수서원에 1점씩 소장되어 있다. 문화재청이 2005년 7월 5일 충현박물관 소장된 오리 영정 중에서 ‘호성공신도상(扈聖功臣圖像)’을 보물 1435호로 지정했다.

 

초상화 속의 이원익은 오사모를 쓰고 흉배가 딸린 단령포의 대례복을 입은 전신의좌상(全身椅坐像)이다. 두 손을 소매 안에 넣고 곡교의(曲交椅)라는 의자에 앉은 모습인데 왼편얼굴을 포착한 구도이다. 이러한 형식은 공신이나 관료초상화의 전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앉아 있는 바닥에 진한 채색의 중국식 채담이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화려한 채색무늬를 위에서 본 것처럼 평면도식으로 그리고 측면에서 본 초상과 합성했다. 이러한 방식은 이 무렵에 제작된 공신 초상화의 전범이 되었다. 얼굴에는 음영 효과가 거의 들어가 있지 않고 얼굴은 선묘 위주로 되어 있으며, 족좌대 위에 흑피혜와 채전이 깔렸다. 오사모에 단령을 입은 좌안7분면(左顔七分面)의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으로 17세기 공신도상의 전형을 보여준다. 왼쪽 팔꿈치 뒤로는 단령 자락을 들고 앉음으로써 생겨나는 뾰족하게 세모꼴로 그려진 무가 보이는데, 이것 역시 17세기 정장관복본 초상화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크기는 167×89㎝.

▲ 이원익 호성공신도상
▲ 이원익 호성공신도상(충현박물관 소장)

한편 ‘경기도유형문화재 제80호 오리 영정’도 주목되는데 이 작품은 1595년 무렵 평양의 생사당에 모셔졌던 것이다. 이 영정은 일반 영정과 구도가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오리가 오른손에 부채를 쥐고 왼손에는 관대를 잡고 있는데 이것은 불교 고승을 그린 화상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이를 근거로 추측해보면 이 초상을 그린 이는 평안도에서 활동했던 화승(畵僧ㆍ불교승려 화가)일 가능성이 크다.

 

영주 소수서원에 오리 이원익의 초상이 모셔져 있는데, 이와 관련해 번암 채제공의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1794년 정조가 미수 허목(1595~1684)에게 크게 감동을 받아 채제공에게 명해 허목의 초상화를 가져오도록 지시했을 때 연천 은거당에 있던 초상을 서울로 옮겨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 화산 이명기에게 모사해 소수서원에 모시도록 했던 사실을 밝혔다. 허목의 영정을 소수서원에 모시면서 채제공은 이렇게 말한다.

 

“오리는 선생(미수 허목)의 사우(師友)이자 지기(知己)임에랴!”

 

18세기 영남 사림들의 뜻으로 오리 이원익의 초상이 모셔져 있는 소수서원에 오리의 제자인 미수 허목의 초상을 모시게 된 것이다.

 

■오리, 3대에 걸쳐 여섯 번 영의정에 오르다

이원익은 선조, 광해, 인조 3대에 걸쳐 의정부 영의정을 여섯 번이나 지낸 탁월한 경세가다. 1569년(선조 2년) 문과에 급제해 벼슬을 시작한 이원익은 사람과 사귀고 어울리기를 싫어해 공적인 일이 아니면 나오지 않았기에 그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다만 서애 유성룡과 한강 정구와는 평생 가깝게 지냈다. 삼사의 요직을 거치고, 1573년 성절사의 질정관으로 북경에 갔다가 명나라 관리들 앞에서 유창한 회화로 임무를 잘 처리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황해도 도사로 군적을 잘 처리해 황해도관찰사 율곡 이이의 주목을 받았던 일도 특별한 일이다. 이이의 천거로 정언이 되고, 승지로 근무하던 이원익은 벼슬에 물러나 한동안 야인으로 지내다가 1587년 안주목사로 부임해 행정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굶주리는 주민을 빠르게 구제하고 양잠을 통해 지역경제를 살렸으며, 군 복무 기간을 단축해 생업에 충실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안주는 물론 평안도민의 칭송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선조가 이조판서이던 이원익을 평안도 도순찰사에 임명한 것도 이런 일이 배경이 되었다. 이원익은 선조의 피란길을 열면서 흩어진 군사를 모으고 군대를 훈련해 왜적과 싸웠다. 1593년 1월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한 후에는 평안도 관찰사로서 전후 복구에 전념하는 동시에 지역 유림을 설득해 서원과 향교에 서검재(書劍齋)를 세워 군사 지휘관을 육성했다. 

1595년에는 우의정에 제수되어 경상 전라 충청 강원 4도 도체찰사로 떠나자 평양감영의 서리들이 생사당을 세우고 이원익의 초상화를 그려 생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올린 것은 이를 뒷받침하는 유명한 일화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확인한 이원익은 사람을 보내 생사당을 허물고 초상화만 수습해 오도록 했다. 도체찰사로 활약하던 이원익의 풍모를 한 세대 뒤에 태어난 남학명(1654~1722)이 이렇게 전해주고 있다.

 

“이원익은 속일 수는 있으나 차마 속일 수 없으며, 유성룡은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 없었다”

 

이순신이 선조의 미움을 받아 서애 유성룡마저 비판할 때에도 그는 “경상도의 많은 장수 중에서 이순신이 가장 뛰어나다”라며 끝까지 이순신을 옹호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초대 영의정에 오른 이원익은 대동법(大同法)을 경기도에 시행하고 불합리한 세금제도를 고쳤으며 군사제도를 개혁했다. 

영창대군의 처형과 인목대비의 유폐를 적극 반대하다가 결국 강원도 홍천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자 여주에서 살았다. 1623년 봄, 인조반정으로 들어선 서인정권에서 의정부 영의정으로 등용되었다.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기필코 죽이려고 했으나 이원익은 대비를 설득해 광해군을 살렸다.

▲ 오리영우
▲ 오리영우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77세의 노구를 이끌고 공주로 피란하는 인조를 호위했다. 1631년 1월 인조가 승지를 보내 이원익을 문안하고 사는 형편을 알아오도록 했다. 승지는 “두 칸 초가가 겨우 무릎을 들일 수 있는데 낮고 좁아서 모양을 이루지 못하며 무너지고 허술해 비바람을 가리지 못합니다”라고 아뢰자 인조는 “내가 평생에 존경하고 사모하는 것은 그 공로와 덕행뿐이 아니다. 

이공의 청렴하고 간결함은 모든 관료가 스승 삼아 본받을 바이다”라며 5칸짜리 집 한 채를 지어 하사했다. 하지만 이원익은 “이것도 백성의 원망을 받는 한 가지”라며 받기를 거듭 사양했다. 이때 인조가 내린 집이 충현박물관 옆에 있는 관감당(觀感堂)이다. 관감당 옆에 그의 초상화를 모신 영우가 있다. 이곳은 영당이 있는 마을이라 해 ‘영당말’이라 불렸다.

 

충현박물관에는 이원익의 친필을 비롯한 여러 가지 유물을 살펴볼 수 있다. 박물관 근처 동산에 이원익의 신도비와 묘소가 자리 잡고 있다. 근처에 있는 광명시가 세운 오리서원은 공직자들의 청렴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공직자가 새길 네 글자 견리사치

이원익은 격동의 시대, 당쟁의 시대에 관리가 되었으나 오직 국가의 안위와 민생의 안정을 정책의 최우선으로 삼아 청렴한 몸가짐으로 공무에 헌신해 백성은 물론 정적들에게도 존경을 받았다. 3대에 걸쳐 6번 영의정에 올랐던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다.

 

“천하의 일이나 국가의 일은 다만 공(公)이냐 사(私)냐 하는 두 글자에 달렸을 뿐”이라며 공에 충실해야 함을 강조했다. 말년에 이원익이 가까운 지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익을 보면 치욕을 생각했다”

이원익이 평생 스스로를 단속했던 ‘견리사치(見利思恥)’라는 네 글자는 공을 잃어버린 우리 시대의 공직자 가슴에 새길 말이 아닐까.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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