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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37. 조선의 대문호 허난설헌

1천여 편의 詩 흩날리고 꽃잎처럼 스러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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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초월읍 지월리에는 조선중기 천재 시인 허난설헌(본명 초희, 1563~1589)의 묘소가 위치하고 있다. 1985년에 경기도 기념물 제90호로 지정됐다. 묘 오른쪽 시비(詩碑)는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全國詩歌碑建立同好會)에서 허난설헌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 시비(詩碑)에는 허난설헌의 시 가운데 어여쁜 딸과 아들을 가슴에 묻고 쓴 「곡자(哭子)」가 새겨져 있다.

 

허난설헌(許蘭雪軒, 본명 허초희, 1563~1589)은 조선의 대문호이다. 당나라 시인 이백이 “하늘과 땅 사이 홀로 서 있자니 맑은 바람 난설을 흩날린다”(獨立天地間 淸風灑蘭雪)고 노래하듯이 천지간에 1000여 편의 시를 흩날리고 꽃다운 나이 27살에 요절했다. 8살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천재 시인이자 대문장가였다. 매천 황현이 「매천집」에서 허씨오문장가(허엽, 허성, 허봉, 허난설헌, 허균) 중 “첫 번째 신선의 재주를 가진 이는 경번”(景樊, 字라고 하는 난설헌의 이름)이라고 평할 정도였다.

 

난설헌의 집안은 매우 개방적이고 자유스러웠다. 난설헌은 규방에 있으면서도 세상과 소통했다. 화담 서경덕(1489~1546)을 스승으로 둔 아버지 초당 허엽(1517~1580) 덕분에 100여 수의 유선시(遊仙詩)를 짓고 신선세계에 대한 책을 많이 읽으며 도가사상을 섭렵할 수 있었다. 오빠 하곡(荷谷) 허봉(1551~1588)은 난설헌의 문학적 재능을 아껴주고 이끌어 주었다. 때마침 오빠가 난설헌이 11살 때 문과에 급제해 그 이듬해 휴가 받아 집에서 독서(賜家讀書)하며 어깨너머로 배우던 난설헌의 글공부를 도왔다.

광한전백옥루상량문
광한전백옥루상량문
오빠는 친구 이달이 서얼인데도 난설헌의 스승으로 모셔 자유분방한 당시풍(唐詩風)을 배울 수 있게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오면서 손에 넣었던 두보의 「두율杜律」도 “두보의 소리가 동생의 손에서 다시 나오게 할 수 있을 것이다”고 기대하면서 건네주었다. 또한 난설헌이 무엇보다 문학적 감수성을 한껏 키울 수 있었던 것은 “누나의 시와 문장은 모두 하늘이 내어서 이룬 것들”이라고 누나의 천재성을 알아준 동생 허균(1569~1618)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난설헌은 꿈을 꾼다. 자기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신선세계를 향하는 난설헌의 꿈은 거침이 없었다. 벌써 8살에 꿈의 나라를 세우고 상량문을 발표한다. 상량문 첫 문장은 “대장부들에게 글을 지어 올립니다.”로 시작한다. 그럴듯한 명망으로 백성들을 핍박하고 손바닥으로 달을 가리는 벼슬아치들이 가난한 살림을 찍어내서 백성들은 편히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토로한다. 백성들이 바라는 것은 관리들이 난간 옆에 있는 소박한 아이가 춤을 추게 하는 숭고한 정치라고 말한다.

 

그러나 꿈을 꿀수록 현실은 무너져 내렸다.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인데도 연산군 이후 명종에 이르기까지 4대 사화로 피바람을 일으키더니 또 다시 붕당정치에 골몰하고 있었다. 유교적 가부장제 질서와 철저한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은 여성들로 해금 오직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자식 낳는 일에만 열중하도록 만들었다. 여성의 신분으로 시를 짓고 공부를 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 여파는 난설헌이 결혼하면서부터 다가오기 시작했다. 15살쯤에 결혼해 두 아이의 엄마가 됐지만 공부한답시고 기생집이나 드나드는 변변치 못한 남편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시어머니의 닦달과 시집살이에도 시달려야만 했다. 이런 누님을 보고 허균은 “나의 누님은 어질고 문장이 있었으나 그 시어머니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친정아버지마저 상주에서 객사하고 곧바로 어머니마저 죽고 말았다. 이듬해에는 그 어여쁜 딸마저 세상을 등져버리고 또 그 이듬해에는 어린 아들을 가슴에 묻어야만 했다. 억장이 무너졌다. “통곡과 피눈물로 목이 메었다.”(곡자) 마음 붙일 곳도 정 둘 곳도 없었다. 이런 처절한 환경 속에서 난설헌은 질곡의 세상을 시와 독서로 초월하려 애썼다.

난설헌 묘와 비
난설헌 묘와 비

난설헌의 불운한 처지는 세 가지 한으로 압축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작은 나라에 태어난 것, 둘째는 남자가 아닌 여자로 태어난 것, 셋째는 능력과 인품을 제대로 갖춘 남편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난설헌은 이 암울한 현실을 초월해야만 했다. 신사임당처럼 현모양처의 길도 아니다. 그렇다고 황진이처럼 뭇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그런 길도 아니다. 난설헌이 규방에서 한숨을 토하며 한을 품고 산 것만은 분명한 듯하지만 난설헌의 시선은 자신에 머물지 않고 인간을 바라본다.

 

궁사(宮詞)에서는 어린 티가 역력하지만 간택될 수밖에 없는 궁녀의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그것은 남이 아니라 자신이다. “어찌 알았겠는가 지금 내가 들어오게 될 줄을” 이라고. 이런 제도적 관습과 틀을 타파하려고나 하는 것처럼 난설헌은 궁녀가 아니라 왕의 조서를 받는 당당한 여상서(女尙書)로 등장한다. 남녀불평등의 시대에 진솔한 이야기로 자기 목소리를 낸다. 그런 속박을 돌파하려는 강렬한 주체의식을 표출한다. 주체적인 삶을 꿈꾼다. ‘감우(感遇)’란 시에서는 인간사의 흥망성쇠를 말하고 하늘의 이치(天理)를 자신의 언어로 얘기한다.

 

동쪽집 세도는 불길과 같아 / 높은 누대에 풍악소리 흥겨운데 / 북쪽 이웃 가난해 입을 옷 없으니 / 굶주리는 오막살이 신세라오 / 하루아침에 세도 집 기울자 / 오히려 북쪽 이웃을 부러워함이라 / 흥망성쇠는 때에 따라 바뀌는 것을 / 뉘라 하늘의 이치를 피할 수 있으리오

 

남을 보여주기 위한 시가 아니다. 자신의 시이다. 인간사의 일이다. 그래서 난설헌을 두고 여성이랄지 여류시인이라든지 하는 말은 큰 의미가 없다. 난설헌의 시선은 사회와 국가로 확장된다. 국가의 방위를 염려한다. “가위를 손에 쥔 아름다운 아가씨는 심지에 불 돋우어 밤새 군복을 짓고”(야야곡) 있고, 백성들은 “성을 쌓고 또 쌓으며” 환란에 대비한다. 군사들은 검을 빼어 들고 출정해 변방에서 뼈가 굳어지는 동안 말도 함께 단련된다. “장군은 북과 호각을 울려 변방의 위급을 알리지만, 나라님의 치우침이 한스러워 가슴을 비파를 뜯는 듯하다”(야야곡)고 한탄한다. 그래서 바둑 한판으로 온 천하를 승부에 걸었다고 한 수나라 황제를 질타한다.

 

난설헌은 새로운 세계를 창출하려 한다. 시들은 한결같이 난설헌의 생애와 사유를 응축한 결정판이다. “붉은 용이 끄는 수레를 꽃나무 아래 세워놓고, 자황궁 안에서 투호놀이를 구경하겠다”는 세상을 꿈꾼다.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은 벽제관에서 허균으로부터 그의 누이의 시를 건네받고 “이를 어찌 아녀자의 소리라고 비웃으며 빈축을 주겠는가”(1606)라고 「난설헌집」에 서문을 쓴다.

 

이렇게 난설헌이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동안 오빠 허봉은 율곡 이이를 탄핵한 후 선조에게 밉보여 산수갑산으로 유배길을 떠나더니 금강산 주변을 떠돌다 38살의 젊은 나이에 객사하고 만다. 청천벽력이었다. 난설헌이 꿈꾼 세계 역시 오지 않았다. 어느 날 깊은 잠에서 깨어나 “스물일곱 송이 아름다운 연꽃 달밤 찬 서리에 붉게 떨어졌네” 라는 시를 남기더니 1000여편의 시를 몽땅 다비(茶毘)하라고 유언하며 홀연히 선계(仙界)로 떠나고 말았다. 1000여편의 시 또한 다비식으로 장례를 치를 뻔했으나 동생 허균은 누이의 유언을 듣지 않고 213편의 시를 베껴 난설헌집으로 묶어 출간했다. 중국 사신들에게도 주옥같은 누이의 시를 소개해 대륙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일본에서는 1711년 난설헌집이 간행됐다. 한류(韓流)였던 것이다.

 

허난설헌은 제도적 모순을 붓으로 초월하려 했다. 개인적인 불운은 난설헌의 가슴을 새까맣게 태웠지만 결코 초월의지만은 꺾지 못했다. 끊임없이 새로운 평등한 세상을 추구했다. 여성에서 인간으로 인간개성의 해방을 꿈꾸었다. 가정에 그치지 않고 국가의 안위를 걱정한 대문호였다.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교산 허균이 율도국을 꿈꾸며 정치로 현실의 모순을 개혁하려 했다면, 허난설헌은 시로 자기 내면의 소리를 토해 내며 새로운 세상을 설계했다고 할 수 있다.

난설헌 시비
난설헌 시비

권행완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편집위원장(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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