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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36. 100년의 역사 간직한 안성 구포동성당

양식 품은 ‘한옥성당’… 안성 근대교육의 역사 숨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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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성 구포동성당 전경
비봉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안성 구포동성당(九苞洞聖堂)은 1901년 대한제국시대에 건립된 천주교 성당으로 1985년에 경기도의 기념물 제82호로 지정됐다.

 

소나무가 서 있는 원형계단에 올라서면 빨간 벽돌로 단장한 로마네스크 풍의 고풍스런 구포동성당이 나타난다. 성당의 정면은 서양 가톨릭 성당 형식이지만 측면은 전통의 한옥처럼 보이는 특이한 건물이다. 성당의 외관은 팔작지붕 형태인 전통 한옥건축 양식과 서양식 종탑이 어우러져 있으나 안으로 들어가면 내부가 왕대공트러스 공법의 서양식 구조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구포동성당은 형태나 구조는 한국식이지만 서양의 바실리카교회가 가지고 있는 공간구성을 모두 갖춘 특별한 건축물이다. 아래는 성당에 세워진 안내판의 일부이다.

 

“이 성당은 1901년 프랑스 신부 꽁베르에 의해 처음 건립됐다. 현재의 건물은 보개면 신안리에 있었던 동안강당의 목재와 기와의 일부를 활용해 1922년에 재건된 것이다. 평면은 긴 십자가형으로 날개채가 크게 돌출되지 않아 전체적으로는 장방형에 가깝다. 입구는 서쪽에 위치하며 중앙에는 회중석이 있고 동쪽 끝에는 제단이 있어 서양식 성당의 공간구조와 유사하다. 

회중석은 좌우에 고주(高柱)가 열 지어 서 있는 신랑(身廊)과 그 옆의 측랑(側廊)으로 구성돼 있다. 측랑 상층의 회랑(回廊)에는 난간이 설치돼 있으며, 측면에는 채광을 위한 고창이 나 있다. …지붕에는 서까래가 걸리고 한식기와가 올려 졌는데 처마는 비교적 짧다. 1955년에는 전면 입구와 종탑이 로마네스크 풍으로 개축됐다. 이 성당은 서양 가톨릭 성당의 형식을 따랐지만 재료와 결구에 있어서 전통적인 방식이 적용된 절충식 건물로서 성당 건축사 연구에 있어서 귀중한 자료이다”

 

한옥과 성당의 절묘한 만남

안성에는 언제부터 천주교 신자가 존재했을까? 1846년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했을 때 천주교 신자 이민식이 김 신부의 시신을 자신의 선산이 있던 양성 미리내로 옮겨 매장했던 사연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안성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이보다 훨씬 이전일 것이다. 

1866년 자국 선교사를 살해한 죄를 응징한다며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점령한 병인양요를 계기로 흥선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은 더욱 강화됐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도 심해졌다.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통상 요구를 강화하기 위해 충남 덕산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묘를 도굴하려 시도했던 사건은 대원군을 크게 자극해 서양 세력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더욱 굳히는 계기가 됐다. 신자들은 거센 탄압을 피해 금광면, 고삼면, 양성면, 서운면 일대로 숨어들어 교우촌을 형성하고 옹기를 빗고 숯을 구워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1876년 개항이 되면서 신자 수가 크게 늘어나 20년이 지난 1896년에 미리내 본당이 설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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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베르 신부와 한국인 수사

1900년 10월 천주교 프랑스 선교사 안토니오 공베르(1875~1950, Antonio A. Gombert, 한국명 孔安國) 신부가 안성에 도착했다. 함께 입국한 동생 줄리앙 공베르 신부는 1901년 금사리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해 활동했는데, 신부 형제는 선교와 교육으로 헌신하다 한국의 흙이 됐다. 

1900년 8월 파리 외방선교회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동방선교를 자원했던 25살의 젊은 공베르 신부가 조선의 안성을 선교지로 선택한 것은 안성사람들에게 큰 복이었다. 안성은 조선 3대 시장으로 꼽힐 정도로 번화한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였기에 선교활동을 하기에 적합한 고장이었다. 공베르는 군수를 지낸 백씨(白氏)의 집을 사서 임시성당으로 사용했는데, 이듬해 2월 무렵 충청도 아산 공세리 본당에서 분할돼 정식으로 안성본당을 창설했다.

안성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은 구포리 현재의 성당터를 매입하고, 그 자리에 있던 기와집을 8칸의 성당으로 개조해 1900년 9월에 낙성식을 거행했다. 안성 구포동성당에서 보듯 초기 성당은 형편에 맞추어 기존의 한옥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일부분을 개조해 사용했다. 

목조 한옥식으로 지어진 성당은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1910년부터 서양식 벽돌조 종탑을 증축하거나 벽체를 벽돌로 바꾸는 등 한국과 서양의 건축양식을 절충해 개조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차츰 성당 내부의 기둥이 사라지고 수직·수평의 분절도 약화됐지만 외관의 종탑과 정면의 양식은 대체로 고수됐다. 안성 구포동성당은 화산성당, 신의주성당과 함께 이러한 시대적 경향을 잘 드러내고 있는 건축물이다.

 

1920년 주임신부인 공베르는 신도들과 함께 성당건립 운동을 벌여 1922년 3월에 로마네스크양식의 벽돌 성당건물을 건축했는데, 설계와 감독은 푸아넬(Poisnel, V.) 신부가 맡았다. 건축에 사용된 기와와 돌, 목재의 일부는 안성군 보개면 동안마을에 있던 30평짜리 유교 서원인 동안강당(東安講堂)을 헐어서 썼고, 기둥과 들보로 사용된 목재는 압록강과 서산에서 구해온 것이다. 

완공까지 신자들이 돌아가면서 땀을 흘렸다. 1925년에는 덕원수사원 목공부 출신의 원재덕이 뒷 벽면을 조각 장식으로 꾸몄고, 종탑부는 1955년에 고딕양식의 붉은 벽돌로 증축했다. 정면 5칸, 측면 9칸의 구포동성당은 전형적인 바실리카식 라틴십자형이다. 종탑부에는 세 개의 첨탑이 있는데, 높이 26미터의 가운데 첨탑은 사각형에서 끝이 팔각형으로 변형됐고, 좌우첨탑은 네모뿔로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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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 내부

안성 포도와 근대 교육의 역사가 숨 쉬다

공베르 신부는 1909년 1월, 사립 초등학교인 안법학교(安法學校, 현 안법고등학교의 전신)를 설립했다. 자비로 운영된 안법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국어와 역사를 집중해서 가르쳤다. 안법학교는 1912년에 지방 최초로 여성교육을 실시했으며, 1927년에는 <동아일보>가 ‘순조선식으로 가르치는 안법학교’라는 특집기사를 실었을 정도로 한민족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교육을 고집했다.

 

학교 이름인 안법(安法)은 지명인 안성과 설립자의 국적 법국(法國, 프랑스)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안법학교는 1951년에 안법중학교와 안법고등학교로 분리됐다. 한편 안성 본당은 1919년 삼일운동 때 만세운동에 가담한 주민들을 성당 안에 보호하기도 했다. 프랑스에서 모금한 기금으로 전답을 매입해 소작 농민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가난한 농민들을 도왔고, 흉년이 들면 굶주리는 이웃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는 등 빈민구제 활동도 벌였다.

 

안성의 근대교육을 연 구포동성당은 안성을 포도의 고장으로 만들었다. 1901년 콩베르 신부가 미사용 포도주를 마련하기 위해 성당 앞마당에 고국 프랑스에서 가져온 포도나무를 심었다. 얼마 후 그는 안성의 토질과 기후가 포도재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하고 32그루의 포도묘목을 다시 가져와 심어 2그루를 살려냈다. 안성 구포동성당에는 당시 조성된 포도밭이 아직도 가꿔지고 있다. 포도는 선교에도 큰 도움이 됐다. 달콤한 포도를 먹기 위해 아이들이 성당을 드나들고, 약과 포도를 얻기 위해 병자들도 성당을 찾게 됐던 것이다. 현재 안성에는 900여 농가가 600여㏊의 면적에 포도를 재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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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베르 신부 흉상
공베르, 안성을 빛낸 인물로 영원히 기억되다

구포동성당을 건립하고 안성에서 32년 동안 신자들을 돌보던 공베르 신부는 서울에서 신학생을 가르치던 중 1950년 7월 전쟁 중에 납북됐다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11월 세상을 떠났다. 세월이 흘러도 사람들은 그를 잊지 않았다. 2012년 5월, 안성문화원은 공베르 신부를 ‘안성을 빛낸 인물’로 선정하고 흉상을 제작해 성당에 설치하고 제막식을 가졌다.

 

본당에서는 1985년 6월 기존의 성당 건물이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문화재 보수 사업에 따라 성당을 크게 보수했다. 또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을 펼치던 2000년 1월 본당 명칭을 안성본당으로 변경해 옛 이름을 되찾고, 옛 성당 옆 터에 유물전시실과 연구실을 갖춘 지하 1층, 지상 1층의 기념관을 건축했다. 전시실에는 구포동성당 100년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진과 옛 성직자들이 사용했던 전례용구를 비롯해 각종 교리서와 성경 등이 전시돼 있다. 경기문화재단이 출간한 <경기 문화유산 세계화 기초조사 연구>라는 책의 세계유산 편에서 한옥절충형 기독교 유산에 해당하는 안성 구포동성당의 문화사적 가치를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안성 구포동성당은 경기도나 한국을 넘어 인류가 보존해야할 문화유산이라는 것이다.

이경석 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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