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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 임진강 거북선 복원, 그 방향을 찾다] 完 복원 과제 및 활용 방안 좌담회

이원식 소장 - 조선 중기 전선떮임진란 거북선 건조한 전통 한선 형상기법 등으로 복원해야 채연석 위원장 -각종 산술치 적용 결과 1413년 거북선 1740년 해골선과 비슷한 규모로 추정 서영일 원장 - 조선 후기 발전과정 등 고증이 우선 원형 고증한 고려 말 군선 연구 필요 고호남 대표 - 소나무 확보 등 작업 현장 어려움 커 건조기간 고려 실시설계 수정 불가피 최종환 시장- 실물 크기 복원 전통군선 완벽 구현 선소와 전시관체류형 마을 동시 진행 파주시는 지난달 24일 조선 최초 임진강거북선 복원을 위한 학술연구 및 기초설계 용역 최종 보고회를 마쳤다. 1592년 이순신장군 거북선보다 180년 앞선 1413년 거북선 원조 임진강거북선을 특정했던 이번 기초설계용역은 문헌ㆍ과학적으로 좋은 평가 속에 마무리되면서 실물크기 임진강거북선 복원에 대한 기대감을 더욱 높였다. 이에 본보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가 지원한 조선 최초 임진강거북선 복원, 그 방향을 찾다 좌담회를 마련, 임진강거북선 복원과제 및 활용방안 등을 들어 봤다. 좌담회는 코로나19로 비대면으로 진행했다. - 전통 한선과 조선 최초 임진강거북선 건조방법에 대한 연관성은. 이원식 원인고대선박연구소장: 조선시대 전통 한선식 전선의 구조와 형상은 다음과 같은 주요 특징이 있다. 저판(底板)은 통나무 10주를 연결한 평저형(平底型), 현판(懸板)은 개탕어린탑접방법(開 魚鱗塔接方法)으로 선두(船頭)ㆍ로판(板)ㆍ선미(船尾)ㆍ축판(板)은 횡판(橫板), 횡량(橫梁) 즉 멍에 위에 2층 포판(鋪板)을 포설(鋪設)했다. 신방과 언방과 기둥 사이 공간에는 방패판(防牌板)을 세우고 방패판 위 언방 위에는 거북 잔등을 덮고 선두에 용두를 설치했다. 돛대는 이물돛대와 한판돛대를 세우고 좌우 현의 멍에 위에 노를 설치했다. 배 밑 선창에는 좌우 측 칸에 1~2층 선실과 창고를 설치했다. 이를 토대로 임진강거북선 형태를 추정하면 조선중기 읍진전선(邑鎭戰船)과 임진년 거북선 등의 구조 및 형상과 상호 관련성이 깊다고 본다. 전통 한선의 조선전기 조선기술인 맹선(猛船)과 평전선 즉 병조선 (兵漕船)이 발전해 조선중기 상장전선과 임진년 거북선 등으로 계승됐다. 조손관계인 것이다. 따라서 임진강거북선은 조선중기 전선과 임진란 거북선을 건조한 전통한선의 형상과 조선기술과 조선기법 등으로 복원해야 한다. - 조선 최초 임진강거북선 학술연구 및 기초설계 용역 성과는. 채연석 조선 최초 임진강거북선 복원추진공동위원장(UST 전문교수): 1413년 임진강거북선의 기초설계연구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저판의 크기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태종 때 전선 규모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경국대전을 보면 대선ㆍ중선ㆍ소선 규모가 나와 있는데 그것은 당시 화물선의 크기다. 즉 세금으로 각 지방에서 걷히는 쌀을 운반하는 조운선인 셈이다. 전선과 조운선 용도가 다르듯 형태도 확실히 다르다. 정조 22년 실록에는 200석을 실을 수 있는 저판 길이가 7파(35척), 너비와 높이가 1.5파(7.5척) 규모의 작은 규모 전선인 병선과 500석을 실을 수 있는 길이가 8파(40척)에 너비 3파(15척), 높이가 2파(10척) 규모의 조운선과 비교했다. 조운선이 전선보다 배의 중간 폭, 즉 허리가 2배 넓은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이런 형태의 배는 짐을 많이 실을 수는 있지만 속도를 낼 수는 없어 전선으로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하다. 태종 때 3종류 전선의 규모는 가장 큰 전선인 대선이 80명, 중선이 60명, 소선이 30명 등을 태울 수 있었지만 크기와 관련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1413년 임진강거북선은 각종 산술치를 적용해 1740년 등장해 작은 거북선으로 불렸던 길이 40척 규모에 56명이 탑승했던 해골선과 비슷한 규모였다는 점을 이번 연구로 추정할 수 있게 됐다. 이를 바탕으로 세계 최초 장갑 군선인 임진강거북선 기초설계를 최초로 완성했다. - 전국에서 이순신장군 거북선을 복원하면서 고증부실 논란이 여전하다. 임진강거북선 고증은. 서영일 (재)한백문화재연구원장: 조선 최초 임진강거북선은 이순신장군 거북선보다 180년 전 존재했던 거북선의 원조이다. 따라서 임진강거북선 복원은 이순신장군의 거북선이나 그 이후 조선 후기 거북선 발전과정에 비춰 원형을 고증하는 일이다. 이순신장군 거북선은 조선시대 군선인 판옥선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판옥선이 처음 등장한 건 1555년이다. 판옥선은 조선 초기 전선이 대형화된 것으로 이전 것과 비교하면 새로운 형태의 군선이다. 한편 고려후기 최무선장군은 화포를 개발하고 이를 군선에 장착, 왜구를 격파했다. 박위장군은 화포를 장착한 대선단을 이끌고 대마도를 정벌했다. 세종 1년 대마도 정벌을 위해 많은 군선이 제작돼 동원되기도 했다. 이 군선들이 고려말 군선과 별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임진강거북선은 조선시대 거북선 원형이기도 하지만 고려시대 군선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 원형을 고증하기 위해선 고려말 군선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 고고학에선 궁터나 사지를 발굴하면 매장된 유구가 드러나고 그것을 바탕으로 원래의 건물의 크기와 구조를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복원하는 건 조심스럽다. 혹시 고증이 잘못되면 원래 유구가 훼손돼 복구가 어렵기 때문이다. 임진강거북선 복원은 이와 사정이 좀 다르다고 하더라도 결과물을 두고 필연적으로 발생되는 고증 논란은 피해가기는 어렵다고 본다. 또한 복원과정에서 상당한 예산이 투입돼야 하기에 이에 대한 논란도 생겨날 수 있다. 이런 문제와 고증과 관련된 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선 돌다리도 두드리고 걸어간다는 각오로 장기적이고 치밀한 연구가 우선 필요하고, 실제 복원 제작에 앞서 활용과 관련된 시뮬레이션 작업도 고려돼야 한다. - 현장에서 거북선 제작과정에서 부딪히는 문제 등은. 고호남 군장조선(주) 대표: 그동안 실물크기 거북선과 조선통신사선 등 전통한선을 기반으로 한 목선을 건조해 본 결과 거북선을 실제로 제작해본 경험이 없는 설계진이 이론과 문헌 중심으로 디자인한 실시설계가 현장 작업환경과 너무 달라 애를 먹는다. 이 때문에 발주처의 실시설계를 자체 설계팀에게 재설계하도록 해 선박을 건조하는 게 현실이다. 몇 가지 사례를 보면 거북선 제작 실시설계는 선박의 맨 밑바닥인 저판을 좁게 하라고 지정하나 저판을 좁게 하면 배가 뒤뚱뒤뚱 거리면서 복원력에 문제가 생겨 자칫 전복될 수 있음을 무시한다. 이순신장군 거북선이 복원력에 문제가 있었으면 어떻게 적진을 헤집고 다니며 포를 쏠 수 있었겠는가. 또한 각층의 전판을 마디 없이 통나무 설계를 원하지만 큰 나무를 구입할 수 없는 등 현실성이 떨어진다. 노와 돛 실시설계도 상상 속 그림으로 현장 작업환경과 차이가 커 설계를 수정할 수밖에 없다. 목선으로 무조건 국내산 소나무(금강송)를 설계에 지정하지만 소나무 확보도 쉽지 않고 산림보호문제도 발생, 건조기간을 고려하면 현실과 많이 동떨어진다. 발주처의 실시설계대로 거북선을 건조하면 과연 전투력이 있는 거북선인가라는 회의감이 밀려올 정도다. 기능이나 구조, 형태 등보다는 멋에만 집착한 결과다. 특히 거북선 제작도 해당 지역과 떨어진 조선소에서 작업이 이뤄지는데 시민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왜 베일에 싸이게 하면서 건조하는지 모르겠다. 파주시가 조선 최초 임진강거북선을 복원한다면 지역 내 특정 지역을 선정, 거북선 제작의 모든 과정을 공개, 국내외 관심 등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 - 조선 최초 임진강거북선 복원은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활용 구상은. 최종환 파주시장: 조선 최초 임진강거북선 복원은 조선왕조실록 태종 13년에 명확히 기록된 파주의 실증역사를 근거로 이순신거북선의 원형이 되는 고려말 조선 초의 전통 군선을 복원하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업이다. 다양한 사료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임진강거북선은 우리나라를 자주 침범했던 왜선의 선상 육탄전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특수 기능 군선이라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고려말 조선 초의 전통 군선 연구선 상에서 당시의 거북선만이 갖고 있는 특수성을 밝혀내는 게 조선 최초 임진강거북선 복원사업의 핵심이다. 파주시가 복원 중인 1413년의 거북선은 거북선의 원조로 우리나라 전통 한선의 맥을 이어가는 중요한 매개체가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임진강과 거북선의 파주가 문화산업군사적으로 얼마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었는지 반증할 기회가 될 것이다. 노와 돛을 이용해 움직이며 실제로 적을 향해 포를 쏠 수 있는 거북선의 실물 크기 복원을 목표로 전통 군선 기능을 상세히 구현하고자 한다. 거북선의 정비정박시설인 선소와 거북선 전시관 및 체류형 거북선마을 조성사업을 동시에 진행, 조선 최초 임진강거북선 탄생지이며 국내 유일 유적지이기도 한 임진나루를 찾는 국내외 방문객들이 만족하고 즐길 수 있는 종합 관광자원으로 개발하겠다. 조선 최초 임진강거북선 복원은 단순히 배를 만드는 것뿐만이 아니라 15세기 찬란했던 문화ㆍ문명을 재현, 새로운 역사적 가치를 창출하는 문화콘텐츠사업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김요섭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조선 최초 임진강거북선 복원,그 방향을 찾다] 외국 옛 군선 마케팅, 국내 복원 거북선과 다르다

"거북선이 움직이지도 않네요. 내부가 궁금한데 출입도 안되구요. 체험시설은 아예 없고 거북선관련자료라고는 달랑 안내판 하나가 전부이니 거북선에 대한 환상이 깨졌습니다. 지난달 27일 오후 경상남도 거제시 거제조선해양문화관 야외광장에 전시된 거북선을 관람하던 김한수씨(57 김해시)는 어릴 적부터 들었던 거북선은 바다에서 적진을 향해 돌진, 포 등을 쏘고 왜선을 격멸 했다며 그런데 전시된 거북선은 너무 달라 실망 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광장에 전시된 거북선은 통영시가 2012년 전라좌수영거북선을 고증을 거쳐 길이 25.6m, 폭 6.87m, 높이 6.06m의 3층구조 실물크기로 건조한 거제1호거북선이다. 직사각형 울타리안에 갇힌 채 전시돼 있다. 이 문화관 최호영 해설사는 방문객들이 이게 무슨 거북선이냐고 말을 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며 그래도 거북선인데 지나 칠 수 없어 해설 흉내만 하곤 한다고 말했다. 거제 1호 거북선 처럼 1980년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실물 크기로 복원된 거북선들이 빈약한 컨텐츠 등 창의적 군선 마케팅을 펼치지 못해 관람객의 외면을 받고 있다. 전문가들로부터 세계적인 문화컨텐츠를 사장시키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영국 등 옛 군선당대 컬렉션 결합 가치창출 마케팅 1592년 임진왜란 거북선과 엇비슷한 시기에 활약했던 군선을 복원한 영국과 스웨덴 등은 감동과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16~17세기 문화ㆍ문명을 수집해 가치를 창출하는 군선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영국은 투더왕조 헨리 8세 시대인 1511년 건조된 영국 최초 함포를 갖춘 메리로즈호가 침몰된 지 420년 이 지난 뒤 좌현 뼈대만을 1965년 인양, 오랜 복원과정을 거쳐 2013년 메리로즈호박물관을 만들어 전시했다. 메리로즈호 선체는 관람객 이동구간과 유리 칸막이로 분리해 놓았고 3층 구조의 선체 내부를 층별로 수군의 생활상을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으로 만들어 프로젝터로 쏘아주며 보여준다. 동제 대포, 의복, 항해기구 의료 및 요리기구 등 16세기 컬렉션도 함께 전시했다. 자원봉사자들은 투더왕조시대 의상을입고 밧줄 다루기, 화살 쏘기 등 각종 체험을 안내하고 있다. 메리로즈호박물관은 메리로즈호를 16세기 세계 최고 문명이라는 스토리를 만들어 뮤지컬, 오페라,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문화영역을 시도하는 등 가치창출에 주력한다. 스웨덴은 1628년 폴란드 원정을 위해 처녀 출항했던 초호화 예술선 바사호가 침몰, 1961년 최초 인양되기까지 333년 동안 바다에 묻혀 있었던 내용을 스토리로 만들어 17세기 세계 유일 군선이라는 문명ㆍ문화를 마케팅 한다. 박물관 안에는 인양한 바사호를 98% 수준까지 복원해 놓았다. 6층 구조로 층별로 선원들의 각종 선상 생활상을 엿볼 수 있도록 용품들을 전시했다. 8~11세기 활약했던 바이킹족 후손 노르웨이와 덴마크는 바이킹 배를 인양, 복원해 박물관을 만들어 미스테리하고 전설적인 바이킹 역사를 현대로 초대했다. 덴마크는 바이킹 배의 복제선을 만드는 과정 살펴보기, 복제된 배로 주변 연안 항해체험 프로그램 등을 운영한다. 바이킹 마을도 조성, 역사적 가치가 뛰어났던 바이킹생활상을 재현했다. 바이킹축제도 개최, 뛰어났던 수공 장식품 판매, 전사 뽑기, 음식 맛보기 등을 통해 당시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 노르웨이는 북미대륙을 탐험가 콜럼버스보다 500년 먼저 발견했다는 바이킹 배 고크스타호를 복제, 당시 그 항해대로 미국을 방문해 세계를 놀라게 했는가 하면 자국 화폐 100크로네(1만원 정도)에 그 문양을 새겨 넣을 정도로 바이킹 배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다. 국내 복원 거북선, 옴짝달싹 못하는 조형물 전락 1592년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 유적지가 있는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등지에서 실물크기 등으로 복원된 거북선들은 육상 및 해상 전시 그리고 실내 전시됐는데 노를 저어 움직이며 적진을 헤집고 다니며 충돌하고 함포를 쏘던 옛 기록과 다르다. 이 때문에 체험 없는 조형물로 전락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순신 장군과 함께 해전에 참전했던 그의 장조카 이분이 자신의 저서 이충무공행록에서 기록한 전쟁이 벌어졌을 때 거북선이 선봉이 돼 나가는데 좌우전후에서 한꺼번에 포를 쏘고, 적진 속을 마음대로 드나들며 가는 곳마다 적이 쓰러졌다고 기록한 것과는 대비된다. 거북선 내부구도도 엉성하다. 거제2호 거북선, 통영거북선, 사천 거북선 등 내외부 관람이 모두 가능한 거북선의 안을 들여다보면 거북선의 노 숫자도 기록과 다르고 1개 노에 4~5명이 있어야 하는 데 없거나 1~2명의 노젓는 노군 마네킹을 만들어 놓았다. 천ㆍ지ㆍ황ㆍ현자총통 복제품도 포군 없이, 포혈도 겨냥되지 않은 채 중앙통로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는 등 세계 최초 철갑선을 무색케 하고 있다. 용두는 포를 쏠 수 없도록 만들어졌는가 하면 전시된 거북선에 대한 안내는 표지판 외에는 알 길이 없고 거북선 관련 문헌자료조차 확보할 수 없는 등 거북선 마케팅이 엉성했다. 전문가들은 옛 군선을 발굴, 복원한 뒤 오리지널 군선 가치에다 그 시대 문화와 문명을 담아 또 다른 가치를 겹겹이 축적해가는 영국 등은 해양문화 자본강국소리를 듣는다며 우리는 스토리텔링이 비교우위에있는 거북선을 단순 관람에만 머물게 하고 있다. 가치확장을 하지 않는다고 아쉬워했다. 조선 최초 임진강 거북선 활용, 제대로 된 군선마케팅 절실 채연석 박사 등 전문가들은 조선 최초 임진강 거북선을 복원하는 파주시는 꼼짝달싹도 못하고, 거북선 내부구조 콘텐츠도 빈약하고, 거북선을 알 수 있는 자료 판매도 없는 3무의 국내 복원 거북선 활용 현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고 주문했다. 특히 태종실록에 임진강 거북선 전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더라도 적이 해칠수가 없으니 결승의 양책이라고 한 기록을 토대로 복원시 구조, 기능, 형태 등을 참고해야 한다며 실제 전투력을 선보이는 복원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조선 최초 임진강 거북선이 복원 후 활용 스펙트럼을 넓게 가져가기 위해선 옛 군선을 복원해 끊임없는 문화콘텐츠를 생산하는 등 선진 사례 군선 마케팅을 벤치마킹 해야 한다는 조언도 있다. 거북선 및 전통한선 설계 권위자인 손창련 중소조선 연구원 서남권분원장은 임진강 거북선을 복원해 단순전시만 하면 기존 거북선 복원사례와 대동소이하다며거북선 원형 복원과 관련,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고민해야 한다 며 가치확대를 제안했다. 김요섭기자

[조선 최초 임진강거북선 복원,그 방향을 찾다] 4.미익(尾翼)은 거북선 꼬리가 아니다

국내 실물크기 거북선 복원사업은 1980년 1월 해군사관학교 1호 거북선 복원을 시작으로 최근까지 40여년 동안 전국 곳곳에서 추진됐다. 통영 거북선 등 10개에 이른다. 이 시기 1592년 이순신 장군 당시 거북선과 1795년 통제영 거북선ㆍ전라좌수영 거북선, 통제영과 전라좌수영 거북선 혼합형 등 여러 종류 거북선이 복원됐지만 꼬리를 복원한 거북선은 없다. 거북선 복원 당시 너도나도 1592년 이순신 장군 거북선 복원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옛 기록과는 다르게 꼬리를 만들지 않았다. 좌우현판의 길게 뻗어 나온 미익(尾翼)을 거북꼬리로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거북선 꼬리가 중요한 건 꼬리 밑에 총혈이 있기 때문이다. 이분의 이충무공행록에는 (이순신 장군 거북선) 뒤에는 거북꼬리처럼 돼 있고 그 밑에 총혈이 있다며 용두는 물론 꼬리로도 포를 발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홍순구 순천향대 교수는 이순신의 별제귀선(別制龜船)연구를 통해 거북선 전면의 용두포혈에 현자총통이 숨겨져 있듯 선미에도 뾰족한 고리가 있고 바로 밑에는 철환이 장착된 화포가 숨겨져 있어 왜선이 근접하면 화포를 발사했다. 미익처럼 꼬리가 길게 위로 치솟아 있으면 선미의 꼬리와 꼬리 밑의 좌우방패에 있는 화포를 사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특히 현재 복원된 모형 거북선들의 미익은 1795년 전라좌수영 거북선 그림처럼 모두 구부러져 올라간 것으로 제작됐다며 1994년 김재근 서울대 교수의 논문 한국의 배에 조선시대 군선 꼬리가 치솟아 있는 건 일종의 멋으로 위용을 과시하려고 배꼬리 길이를 늘이고 힘껏 위로 치올렸다고 하지만 이순신 장군 거북선에는 적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즉, 이순신 장군 거북선 선미에 꼬리와 꼬리 밑에 포혈을 위치시킨 건 전술로 추정되며 거북선 꼬리와 미익과는 기능이 전혀 다른데도 복원 거북선들은 이 부분을 놓쳤다는 것이다. 김요섭기자

[조선 최초 임진강거북선 복원,그 방향을 찾다] 3. 내부 3층구조 본격화

가지각색의 거북선 원형 그대로 복원이 관건 거북선유적지가 산재한 경상남도는 2008년 이순신 거북선 프로젝트 용역을 마무리하면서 기존에 복원된 거북선이 임진왜란 당시가 아닌 1795년 편찬된 이충무공전서 기록을 토대로 한 거북선 복원 및 모형으로 한계가 있다며 1592년 이순신 장군 거북선을 3층 구조로 건조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해군사관학교가 1980년 1호 거북선 내부를 2층구조로 복원, 30년째 거북선 표준모델로 유지돼 온 것을 뒤엎는 것이어서 충격적이었다. 특히 당시 거북선연구가들 사이에서도 인정받던 거북선 내부구조가 2.5층설마저 뛰어넘는 것이어서 이목이 쏠렸다. 정진술 전 해사박물관 기획실장은 경남도 발표 이전 복원 거북선은 30년 전에 설계된 것들로 그 당시 연구결과를 충분히 반영해 복원했다며그러나 법으로 규정한 것은 아니지만 2층구조로 표준모델 지위를 갖는 해사거북선이 있었는데 경남의 3층구조 거북선이 현재 서로 다른 모습으로 전시되면서 거북선 원형 모습에 대한 국민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거제 1~2호거북선, 사천거북선, 통영거북선 경상남도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 거북선 제작방침에 따라 2010년 이후 새로 복원 건조된 거북선은 3층구조이며 1592년 당시 임진왜란 거북선임을 분명히 내세우고 있다. 거제시 조선해양문화관 광장에 전시된 거제1호와 대우조선해양 건물 앞 공원에 전시된 거제2호 거북선은 3층구조다. 1층은 병사들의 휴식처, 2층은 노역, 3층은 전투할 수 있도록 건조됐다.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 제원 추정치로 길이 25.6m, 너비 6.87m, 높이 6.06m, 무게 122t 등의 규모로 제작됐다. 통영 거북선은 전라좌수영 거북선과 통제영 거북선 2종류가 1795년 이충무공전서 기록을 토대로 2012년 3층구조로 제작됐다.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사 시절 1592년 5월29일 거북선을 첫 출전시킨 사천해전의 사천거북선도 3층 구조이다. 실물 크기로 2012년 12월 복원됐다. 길이 25.6m, 너비 6.87m, 높이 6.06m 등의 규모다. ■3층이나 내부는 2.5층 구조 등 각종 고증 부실 시달려 경상남도 발표와 달리 이 시기에 실물크기로 복원된 거제ㆍ통영ㆍ사천 거북선들은 제작된 지 10년 가까이 된 지금까지도 각종 고증 부실 논란에 휩싸여 있다. 확인 결과 내부구조는 3층이 아닌 2,5층에 가깝게 건조됐고 당시까지 학계에서 연구돼 온 1592년 이순신장군 당시 거북선 구조나 형태를 원형대로 복원하지 않았다. 거제1~2호 거북선은 임진왜란 당시 용두가 -자형으로 현자 철환을 쏘던 통제영 거북선구조이나 이와 무관한 전라좌수영 거북선 용두로 제작됐고 용두 크기(길이 1.34m, 넓이 93.9㎠)마저 축소해 만들었다. 노 또한 좌우현 7개씩 만들어 이순신 장군 거북선과 비슷하다고 언급된 통제영 거북선의 좌우현 20개에 크게 못 미쳤다. 거제 2호는 포혈이 아예 없고 내부 관람이 가능하지만 3층 아닌 2.5층 구조에 가깝다. 기록에 있는 거북꼬리 없이 제작됐다. 통영 거북선이 임진왜란 이후 203년 뒤인 1795년 편찬된 이충무공전서 기록을 토대로 건조됐다고 하나 통제영 거북선 포혈이 72개, 전라좌수영 거북선은 그 절반인 36개 등의 기록과는 달리 통영거북선은 모두 포혈수가 크게 못 미쳤다. 노 또한 좌우현 총 4개에 불과, 통제영 거북선 20개, 전라좌수영 16개 등에 비해 부족했다. 용두에는 임진왜란 당시 현자총통을 이용해 철환을 쏘거나 조선후기 때 등장한 통제영 거북선의 용두에서 유황과 염초를 태워 연기를 내뿜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통영 거북선들은 기록에도 없는 용두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등 전체적으로 고증 부실이라는 지적을 면치 못하고 있다. 사천거북선도 거제 1~2호 거북선과 통영 거북선 등과 마찬가지로 기록대로 복원하지 않았다. 내부는 3층 구조를 표방했으나 실제 2층 위에 원두막형태의 공간을 만든 2.5층 구조에 근접해 복원했다. 노도 좌현 3개, 우현 7개 등 총 10개에 불과, 통제영 거북선 20개, 전라좌수영 거북선 16개 등과는 차이가 있다. 용두 또한 현자총통으로 철환을 발사할 수 없는 구조로 제작됐다. 2층에는 수군과 노군이 함께 있는 마네킹을 만들었으나 학자들은 3층 구조에서 제각각 존재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거북선 내부구조의 자의적 해석 부실 불러올바른 해석 필요 거북선 부실 복원 논란과 관련, 정진술 전 해사박물관 기획실장은 거북선 복원에는 임진왜란 때의 것과 1795년 것을 별도로 구분해 복원할 필요가 있는데 현재 복원된 거북선은 사대를 뛰어넘어 뒤죽박죽 혼합된 형태로 복원돼 논란이다라며 구조나 크기, 형태 등이 최적인 이충무공전서의 귀선도설과 그림에 대한 자의적 해석이 아닌 올바른 해석이 복원의 관건이라고 주장했다.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 제장명 교수도 거북선 복원 기본원칙은 내부구조가 3층이고 용두는 전투원의 활동공간과 같은 위치에 놓여야 하며 거북선 등판의 철갑선 재고도 필요하다며 이 같은 원칙에 맞게 거북선을 복원한다면 1592년 임진왜란 때 거북선형태에 더욱 근접한 거북선을 국민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조선 최초 임진강 거북선은 고려말 1380년 등장 북한이 바라보는 거북선 연막전법 과 화약무기 시초는? 북한은 거북선이 용두를 통해 유황과 염초를 태워 연막을 만들어 적들로 하여금 눈을 뜨지 못하게 하고 싸울 수 없게 한 연막전법에 능했다고 주장한다. 염초는 연소할 때 검은 연기를 배출하는 화약으로 질산칼륨(KNO3), 유황, 탄소 등을 일정한 비율로 섞어 만든 흑색 화약이다. 북한의 거북선 연막장치 사용과정을 보면 바람을 일으키는 수군(발풍수)이 발판을 밟으면 가마에 농축된 유황염초가 연통과 배출관으로 공기압력에 따라 배출판에서 뿜어 올라가 배출되면서 용두에서 흑색화약이 내뿜어진다. 이때 질산칼륨은 산화제, 탄소는 가연제, 유황은 점화촉진제 등으로 작용한다. 1795년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에는 통제영 거북선이 용두에서 연기를 내뿜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북한은 화약무기를 군선에 실은 시기를 조선 최초 임진강 거북선이 등장한 33년 전인 고려말 1380년으로 보고 있다. 고려사 권 114 등을 근거로 1380년 8월 화포를 장착한 100척의 고려 군함이 진포 앞바다에 나타난 왜선 500척에 불을 지르고 격멸했다고 주장했다. 유럽에선 1571년 처음으로 포격전이 펼쳐졌는데 반해 진포해전은 세계해전사에서 처음으로 화포를 적용한 해전이었으며 해상포격전의 시초라는 견해다. 거북선의 화약무기도 이 전통을 계승한 화포무장선이었다고 강조했다. 서울과 경기 등 수도권 거북선모형은 축소형 서울ㆍ경기 등 수도권 등지에는 거북선이 축소형으로 복원돼 전시돼 있다. 이순신 장군 생가가 있는 충남 아산 현충사는 1969년 기증받아 전시된 거북선이 있었으나 고증문제에 시달려 2014년 자진 철거했다. 실물 60% 크기였던 현충사 거북선은 용두가 전라좌수용 거북선 형태의 ㄱ 자형으로 포를 쏠 수 없도록 제작됐다. 좌우현 노는 각각 8개로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과 비슷한 통제영 거북선 노 좌우현 각각 10개와는 차이를 보였다. 앉아서 젓는 서양식 노라는 지적도 받았으며 2층 구조여서 포를 쏘는 포군과 노를 젓는 노군이 같은 층에 모여 전투하는 것과 거북 모양의 꼬리가 없는 모형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서울 용산전쟁기념관 거북선은 실물의 40%크기 축소형으로 1795년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에 등장하는 통제영 거북선을 모델로 건조됐다. 하지만 통제영 거북선이 -자형으로 된 용두에서 현자총통으로 철환을 쏜데 반해 ㄱ자형의 전라좌수영 거북선 용두로 제작됐다. 개판(지붕) 또한 통제영 거북선과는 다르게 복원되는 등 전체적으로 통제영 거북선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을 혼합한 형태의 새로운 거북선류로 분류돼 고증 부실 논란을 빚고 있다. 과천국립과학관에 전시된 거북선은 2층 구조의 축소형 모형으로 용두가 -자형으로 1795년 편찬된 이충무공전서를 바탕으로 복원된 통제영 거북선으로 추정되나 좌우현 노가 10개씩인 통제영 거북선과는 달리 노가 없다. 70개가 넘는 통제영 거북선 포혈수와도 맞지 않게 제작됐다. 김요섭기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조선 최초 임진강 거북선 복원, 그 방향을 찾다] 2.1980~2009년 복원 거북선

최근 파주시가 1413년 조선 최초 임진강 거북선 복원사업을 본격화하는 가운데, 거북선 연구자들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 거북선의 구조, 기능, 형태 등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하고 있다. 고려 선박과 거북선 등을 복원했던 전통한선연구 권위자 이원식 박사는 고려 때 배무이(선박건조) 기술이 조선시대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다며 이순신장군 거북선 기록을 소홀히 할 수 없으며 당연히 살펴봐야 하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이순신장군 거북선 내부구조의 함포 배치 연구 결과로 주목을 끌었던 채연석 박사는 태종실록에 임진강거북선이 튼튼함 등 일부 기록은 남아 있지만 구조나 크기 등에 대한 언급이 없다. 임진강거북선의 기능, 구조, 형태 등이 어떤 형태든지 이순신장군 거북선 제작에 영향을 끼쳤다며 임진왜란 거북선을 살펴보면 조선 최초 임진강거북선이 보인다라고 강조했다. 이순신장군 거북선연구의 첫 시작과 발표는 1934년 연희전문학교 미국인 교수인 언더우드 교수다. 그는 1795년 정조 때 편찬된 이충무공전서를 토대로 △거북선은 내부구조 2층 △서양식 노 장착 등 연구결과를 영ㆍ미권에 발표했다. 언더우드 교수 연구는 현재의 학계 연구결과와는 큰 차이를 보이지만 국내 연구자들에게는 각자 전문성을 무기로 지속적으로 거북선을 연구하며 서양식 노를 동양식 노로 수정하는 등 연구의 기폭제가 됐다. ■ 해군사관학교 1호 거북선, 한강거북선과 여수돌산거북선 언더우드 교수의 거북선이 첫 연구 이래 46년 만인 1980년 해군사관학교에서 첫 실물크기 1호 거북선을 복원했다. 이충무공전서를 완역한 노산 이은상 선생 등이 참여했다. 당시까지 연구된 거북선 내부구조를 토대로 2층으로 건조됐다. 1795년 이충무공전서 기록으로 길이 34.2m에 선체 높이 6.4m, 선 폭 10.3m, 홀수는 1.4m, 함포는 14문 등으로 좌우현 각각 6개 뱃머리 용두와 꼬리 등에 각각 1개씩이다. 승조원은 130명 정도다. 국가가 아닌 지자체로는 서울시가 처음으로 실물크기 거북선을 1990년에 제작했다. 길이 34m, 폭 10m, 높이 6.3m, 180t 등의 규모다. 해사 1호 거북선 영향을 받아 내부구조가 2층이다. 국가와 광역 지자체와는 달리 이 시기에 민간영역에서 주도한 거북선 첫 복원도 있다. 여수돌산거북선으로 1986년 4억여원을 들여 (유)전라좌수영문화개발이 건조했다. 해사1호거북선 영향을 받아 2층 구조에 길이 37m, 높이 6.8m, 넓이 8.20m, 150t 등의 규모로 탑승인원 130~150명 속도 6노트 수준으로 만들어졌다. 전라좌수영 거북선이 모델이다. ■ 복원된 거북선들은 1592년 이순신장군 거북선이 아니다 이순신장군 거북선의 특징은 선조에게 올린 그의 장계와 함께 해전에 참전했던 장조카 이분의 이충무공행록 등에 어느 정도 나와 있다. 이순신장군 장계는 용머리를 붙여 현자 철환을 쏘고, 등에 쇠못을 꽂았으며, 천ㆍ지ㆍ현ㆍ황자 총통을 쏘고, 안에선 밖을 볼 수 있으나 밖에선 안을 볼 수 없도록 했다고 기록됐다. 이분의 이충무공행록은 거북선 크기는 판옥선만 하고 위는 판자로 덮고 판자 위에 십자형세로를 두어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했으며 그 나머지는 칼 송곳을 꽂아 사방으로 발붙일 곳이 없도록 했다고 기록했다. 앞에는 용머리를 붙이고 그 입은 총구멍이 됐고 뒤는 거북꼬리처럼 됐는데 꼬리 아래에 총구멍이 있고 좌우에 각각 6개의 총구멍이 있다고 기록했다. 이순신장군 거북선 등장 203년 뒤인 1795년 정조 때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에는 통제영거북선이 당시 이순신장군 거북선과 수치에 약간 가감은 있지만 비슷하다고 기록돼 있다. 이들 기록을 토대로 1980~2009년 실물크기로 복원한 해사1호 거북선, 한강거북선, 여수돌산거북선 등이 전시된 장소를 방문, 확인한 결과 이순신장군 장계 등의 기록과는 큰 차이를 보였다. 국가 주도로 제작돼 거북선표준인 해사1호거북선은 1592년 당시 이순신장군 거북선이 아닌 1795년 편찬된 이충무공전서기록을 토대로 건조됐고 개판을 철갑선으로 복원했다. 용두가 - 자형이 아닌 ㄱ자형으로 함포를 쏠 수 없는 구조였다. 용두 크기 또한 길이 1.34m에 넓이 93.9㎝ 기록과 다르게 축소됐다. 이 때문에 전라좌수영거북선이 아닌, 그렇다고 통제영 거북선도 아닌 어정쩡하게 이 둘을 합친 혼합형 거북선으로 만들어졌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한강거북선도 2층 구조로 제작됐는데 용두는 기록에도 없는 여의주를 물고 있었고 현자 철환이 발사되지 못하는 구조였다. 노는 앉아서 젓는 서양식에 가깝고 이마저도 전라좌수영(16개) 혹은 통제영거북선(20개)과는 노 숫자와는 다르게 건조됐다. 전통 노가 아닌 디젤엔진으로 추진동력을 삼은 것도 상업용으로 제작됐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전라좌수영 거북선을 모델로 복원됐던 여수돌산거북선도 옛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1795년 이충무공전서에 나오는 전라좌수영거북선은 포 위치가 거북머리 아래 포혈이 2개, 방패에 각각 10개의 포혈이 있는 등 전체 36개로 기록돼 있으나 복원된 거북선은 이보다 한참 못 미친다. 2층에 노군과 포군이 한데 모여 노를 젓고 포를 쏘도록 재현한 것도 지금의 연구결과로 보면 포를 쏘는 공간이 확보돼야 하는 등 논란이 되고 있다. 특히 용두에 유황ㆍ염초를 태워 연기를 내품었다는 기록을 토대로 용두를 복원했지만, 이는 통제영거북선 기능으로써 전라좌수영거북선과는 다른 기능이다.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 제장명 교수는 복원된 거북선들은 오래전에 설계되다 보니 당시의 연구 한계로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 모습을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용두가 기록과는 다르게 기능하고, 노군과 전투원이 같은 층에서 활동하는 등 기록과는 무관하게 만들어져 혼란을 겪기 때문이다. 원래 기록에 충실하게 복원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 북한 거북선은 통제영거북선모델 이 시기 북한에서 제작된 거북선을 확인하기 위해선 방문이 어려워 거북선 관련 북한서적을 입수해 전문가와 함께 분석했다. 2001년 북한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가 발간한 김흥규 저 거북선이다. 북한에선 거북선의 구조와 형태 등을 도해로 기술한 거북선 권위서로 평가받고 있다. 북한은 복원된 거북선을 목선에서 철선으로 가는 과도기적 함선구조형식으로 보고 있다. 노는 좌우현 20개로 이순신장군 거북선과 비슷한 것으로 기록된 1795년 통제영거북선 형태를 띠고 있다. 외형상으로 거북선 내부가 2층 구조로 개판이 철갑으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는데 지붕에는 십자형 세로를 둬 2개의 돛을 세우고 눕히도록 했고 수군들이 이동하도록 길을 만들었다. 용두는 -자형으로 현자총통을 쏘도록 한 기록처럼 포를 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채연석 박사 등 거북선 전문가들은 일부 오류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복원개념을 통제영거북선 형태를 유지하도록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고 분석했다. 제장명 순천향대 교수거북선 세계 첫 철갑선 아닌, 쇠못 꽂은 형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당연시하는 1592년 이순신장군 거북선의 개판(지붕)이 철갑선인지 여부에 대해 남북 학자들 사이에서 견해가 갈리고 있다. 1934년 연희전문학교 언더우드 교수가 1795년 편찬된 이충무공전서를 토대로 한 첫 연구 발표 이후 국내 학자들의 거북선 연구가 80여년이 넘었지만 거북선이 세계최초 철갑선이냐라는 논란은 여전하다. 반면 북한은 세계 최초 철갑선은 거북선이라고 일관 되게 주장하고 있다. 거북선문헌연구자 권위자인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장 제장명 교수는 거북선의 등 부분은 철판으로 장갑 된 형태가 아니라 목판으로 장갑한 가운데 쇠못(또는 칼ㆍ송곳)을 꽂은 형태라며 이순신장군 장계와 이순신장군의 장조카인 이분의 이충무공행록 등 옛 문헌을 뒤져 봐도 철갑선이란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어 일본의 고문서인 정한위략(가와구치), 고려선 전기(도노오카) 등과 미국인 헐버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며 그래서 국내 실물크기로 복원된 거북선 개판(지붕)이 고증문제로 논란의 중심에 있다고 말했다. 반면 북한학자 김흥규는 자신의 저서 거북선에서 임진란 발발 184년 전 태종실록 태종 8년(1408년) 12월 정유조에 배무이((선박건조)용 철물을 수군에게 제련할 수 있게 해달라고 전라도 통제사가 왕에게 건의했다며 당시 거북선의 6각형 장갑철 주조는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의 임진란 기록인 고려전전기와 정한위략 등에는 과장이 없다며 6각형의 철갑판 두께를 5㎜로 했을 때 개당 질량은 25㎏으로 거북선의 총철갑 질량은 7천385㎏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이순신장군 거북선의 철갑선 여부는 논란의 소지가 크지만 이미 조선 최초 임진강거북선 등장 5년 전 선박기술용 철을 확보해 달라고 건의한 전라도 통제사의 기록은 군선 관련 철사용에 대한 연구 필요성을 강력하게 제기하고 있다. 김요섭기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조선 최초 임진강 거북선 복원, 그 방향을 찾다] 1. 태종실록 등장

파주시가 1413년 임진강에서 왜선을 상대로 모의 전투훈련을 했던 조선 최초 임진강 거북선 복원프로젝트를 본격 가동했다. 임진왜란 발발시기인 1592년 이순신 장군이 창제했던 거북선보다 무려 180년 앞선 거북선 원형 찾기 대장정 돌입에 나선 것이다. 남북한 학계는 조선 최초 임진강 거북선이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 창제 때 영향을 미친 할아버지와 손자의 관계로 본다. 파주시의 조선 최초 임진강 거북선 복원프로젝트는 이 때문에 거북선 원형을 찾는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깊다. 본보는 조선 최초 임진강 거북선의 유적지인 파주 임진강에서 건져 올려질 임진강 거북선 복원의 의미와 국내외에서 복원된 거북선ㆍ옛 군선과의 사례 비교, 향후 활용방안 등을 총 5회에 걸쳐 게재한다. 편집자주 파주시가 조선 최초 임진강 거북선 복원 프로젝트를 본격 가동했다. 지난 5월 조선 최초 임진강 거북선 복원 학술연구 및 기초설계 용역 발주 등에 이어 지난 7월24일 중간 보고회를 마치는 등 민선 7기 핵심공약인 조선 최초 임진강 거북선복원사업이 본 궤도에 올랐다. 임진강거북선은 조선 선조 1592년 임진왜란 때 침략한 왜선을 궤멸시켰던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보다 180년 앞선 조선 최초 거북선의 원형이다. 조선왕조실록 중 태종실록 25권(태종 13년:1413년) 2월5일 갑인 1번째 기사와 태종실록 30권(태종 15년:1415년) 7월16일 신해 2번째 기사에 잇따라 등장한다. 태종실록에는 통제원 남교에서 머무르다. 임진도(임진나루)를 지나다 거북선과 왜선이 싸우는 것을 구경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어 2년 뒤 좌대언 탁신이 거북선의 법은 많은 적과 충돌해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가위 결승의 좋은 계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게 해 전승의 도구로 갖추게 하소서라고 하자 태종이 병조에 지시를 내렸다고 기술돼 있다. ■ 세계기록문화유산 조선왕조실록에 최초 등장한 임진강 거북선의 특징 태종실록을 근거로 임진강 거북선의 특징은 △조선 최초 거북선은 임진강 거북선 △임진강은 거북선 전투력을 실험했던 유적지 △임진강 거북선은 큰 군선인 대선급 혹은 중선급 규모 △화통(화약을 써 화살이나 탄알을 내쏘는 무기)의 군선 △임진강 거북선 계속 건조 등이다. 화약과 함포 전문가인 채연석 박사는 임진강 거북선은 같은 시기, 서양 군선보다 앞서 월등한 조선 및 함포 기술을 보유했던 세계 최초 장갑 군선이었다고 말했다. ■ 조선 최초 임진강 거북선 특정에 나선 파주시 파주시가 지난 5월 발주, 3개월 동안의 기간을 거쳐 최근 중간 보고회를 마친 조선 최초 임진강 거북선 복원 학술연구 및 기초설계 용역의 핵심은 임진강 거북선의 구조와 형태, 기능 등을 특정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 권예자 파주시 문화예술과장은 조선 초기 군선의 종류, 형태와 조선기술 고찰, 임진강 거북선의 구조 분석에 적용할 조선 초기 군선을 특정ㆍ구조 연구, 조선 최초 임진강 거북선의 기초설계와 전통 한선(韓船)의 노(櫓) 연구, 국내외 고선박 및 군선 복원사례 조사와 활용 실태 등 5개 분야에 대해 실증적인 연구를 진행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 임진강 거북선 실물크기 건조는 내년 하반기 가능 임진강 거북선이 실물 크기로 모형을 제작하는 시기는 몇 가지 전제조건만 맞으면 내년 하반기가 유력하다. 김영기 파주시 문화정책팀장은 최근 끝난 중간용역에 이어 최종보고회까지 마쳐 의미 있는 결과가 도출되면 이후 일정은 실시설계 발주와 거북선 및 임진강 관광자원화 기본계획 수립용역을 발주하는 것이라며 이 과정이 순탄하면 조선 최초 임진강 거북선 모형 제작과 복원 건조 등은 내년 8월도 가능할 것으로 내다본다고 말했다. ■ 한반도 평화관광 핵심은 임진강 거북선 파주시는 조선 최초 임진강 거북선 복원 후 활용과 관련, 평화관광사업으로 추진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한반도 평화수도 파주시의 핵심 관광사업으로 임진강 거북선을 브랜드화해 국내외에 널리 알리겠다는 것이다. 황수진 파주시 문화교육국장은 체험형과 체류형 관광자원화의 두 날개로 파주 북부권역 균형발전을 이루는 도시재생으로 연결해 추진하겠다며 수도권 이점을 살려 국내는 물론 해외 관광객을 적극 유치하는 전략을 구상 중이라고 말했다. 최종환 파주시장노젓고 포 발사 동적인 거북선 만들 것 600여년 전 왜구 침탈을 방어하기 위해 임진강을 누볐던 조선 최초 임진강 거북선이 차별화된 문화콘텐츠로 복원되도록 심혈을 기울이겠습니다. 최종환 파주시장은 최근 보고회를 마친 조선 최초 임진강 거북선 복원 학술연구와 기초설계 용역발주 중간 보고회에서도 차별화를 수차례 강조했다며 이미 국내 실물 크기로 복원된 거북선과는 전혀 다른 콘텐츠로 진검 승부하겠다며 이처럼 말했다. 이어 차별화와 관련, 1980년부터 건조된 국내 거북선 실물크기 복원은 모두 육상과 해상에 전시됐을 뿐 움직이지 못한 채 내외부 관람을 위한 조형물에 머물러 있다며 조선 최초 임진강 거북선은 당시 기록을 충실히 반영, 노를 저어 이동해 포 발사 등 동적 체험위주로 운영하겠다고 덧붙였다. 임진강 거북선 복원사업의 의미에 대해선 학계에선 16세기 이순신 장군 거북선은 고려는 물론 조선 초 선박의 선형과 구조, 조선공작기법 등 전통 한선의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한다며 따라서 조선 최초 임진강 거북선은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에 영향을 줬다. 복원은 거북선 원형을 찾는 역사적 과제사업이라고 말했다. 최종환 파주시장은 앞으로 학계의 다양한 의견 수렴, 실시설계 발주와 문화관광자원화 기본계획 등을 촘촘하게 수립하겠다며 임진강 거북선 복원으로 평화관광을 주도, 부분적으로 도시재생, 폭넓게는 파주시 전체의 성장동력으로 활용하겠다. 지켜봐 달라고 말했다. 손창련 중소조선硏 서남권본부장조선 군선기록 토대로 복원 충분히 가능 파주시의 조선 최초 임진강 거북선 복원사업 추진은 또 다른 성장동력인 문화콘텐츠를 창출하는 것입니다. 손창련 중소조선연구원 서남권본부장은 조선통신사선, 거북선 복원 등 설계용역을 도맡아 수행해 왔는데 의뢰 기관들은 비용보다도 역사적 가치 회복과 관광산업 등에 큰 무게를 뒀다며 이처럼 말했다. 그는 전통 한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거북선 설계 권위자다. 손 본부장은 임진강 거북선 실시설계와 관련, 이전에 경상남도의 1592년 이순신 거북선 설계 등을 연구해본 결과 통상 1년 정도 소요된다며 임진강 거북선 실시설계도 이 정도 기간을 잡고 추진해야 전체 일정에 차질이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순신 장군 거북선처럼 임진강 거북선도 설계도가 없고 목격한 사람도 없다. 실시설계에 어려움이 뒤따른다며 하지만 조선 초기 군선기록 등을 면밀히 살펴 추정하면 임진강 거북선 복원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특히 거북선 부재(나무자료)에 대해선 국내산 소나무는 구입부터 건조까지 3~4년 걸린다. 가격도 수입목보다 2~3배 비싸다며 아비통(Apitong)이나 캐나다산 홍송 등도 좋다고 추천했다. 손창련 본부장은 현재 해사 3호 거북선을 설계 중인데 이순신 장군 유적지 지자체를 중심으로 거북선 복원사업이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며 임진강 거북선이 이들 지역과 승부하려면 수도권이라는 지리적 이점 이외에 무언가 다름을 충분히 보여줘야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파주=김요섭기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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