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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사아 선종사원의 전형 양주 회암사지] ④문정왕후의 회암사 무차대회

■ 손자 잃은 대비의 절절한 발원 1565년(명종 20년) 회암사에서 열린 무차대회(無遮大會:승려속인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해 법문을 듣는 법회)의 풍경은 억불숭유시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화려하고 성대했다. 수천명의 승려들이 참석하고 수만명의 불자들이 몰려든 이 법회는 회암사 중창불사(重創佛事) 낙성식을 겸해 열린 행사였다. 온갖 화려한 장식으로 불단이 꾸려졌고, 하늘에는 비단으로 만든 붉은 깃발이 휘날렸다. 무차대회를 위해 제작된 불화의 수만 400여점에 달했다. 이처럼 사치스러운 법회는 이전에 듣도 보도 못했고 왕실 창고가 모두 고갈됐다는 탄식이 유학자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회암사 무차대회를 주최한 이는 명종의 모후 문정왕후였다. 12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왕을 대신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대비는 허응당 보우를 등용해 각종 불교정책을 펼쳐나갔다. 조선왕조가 건국된 이래 100여년간 유학자 관료들이 투쟁 끝에 폐지시킨 승과(僧科), 도첩제(度牒制), 선교양종(禪敎兩宗) 등의 제도가 부활했다. 흔히 명종대를 일컬어 불교미술의 르네상스라고 칭하는데 조선시대 제작된 최고의 불화들은 대부분 문정왕후의 시주로 조성된 작품들이다. 그런데 문정왕후는 왜 1565년에 회암사에서 불사를 진행했을까. 회암사 무차대회가 열리기 2년 전인 1563년(명종 18년) 명종의 유일한 자식인 순회세자가 13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명종에게는 1명의 왕비와 6명의 후궁이 있었으나 오로지 인순왕후만 순회세자를 낳았고 나머지 후궁들은 딸 한명도 생산하지 못했다. 그토록 귀한 혈육이 세상을 떠났으니 종통이 끊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순회세자가 사망한 직후 문정왕후는 보우의 권유로 대대적인 회암사 중창불사를 진행했다. 2년만에 회암사 중창불사가 완료하자 문정왕후는 대대적인 무차대회를 개최했다. 무차대회는 뭍과 물의 모든 중생이 신분이나 빈부의 차별 없이 평등하게 공덕을 받든다는 의미의 불교행사로 문정왕후는 이를 통해 명종이 후사를 얻기를 발원했다. ■ 선왕들의 은덕 얻으려 회암사 선택 문정왕후가 후손을 얻기 위해 회암사를 복전(福田)으로 정한 데는 이곳이 여타 왕실원당과는 격이 다른 특별한 사찰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회암사에는 역대 왕의 위패를 봉안한 어실이 있었다. 명종실록에서 모든 능의 기신재(忌晨齋:왕의 기일에 열리는 불교식 제사)가 회암사에서 열린다고 할 정도로 회암사는 왕실불교의 핵심 사찰이었다. 따라서 문정왕후 입장에서 볼 때 회암사는 명종의 조상인 조선 역대왕의 은덕과 불보살의 가피(加被:부처나 보살이 자비심으로 중생에게 힘을 줌)를 동시에 빌기 위한 최적의 장소였던 것이다. 무차대회를 계기로 회암사는 또 한 번의 전성기를 누리는 듯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달이 이지러지기 직전의 마지막 변곡점이었다. 문정왕후는 회암사 무차대회를 준비하면서 매일 냉수로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기울였다. 하지만 64세의 고령에 냉욕을 한 게 무리였던 탓인지 문정왕후는 심한 독감에 걸렸고 무차대회가 진행되고 있는 도중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대비의 죽음으로 인해 무차대회는 중단됐다. 문정왕후의 죽음은 회암사에도, 조선 불교계에도 거센 후폭풍을 몰고 왔다. 대비가 사망한 직후 보우는 제주로 유배를 갔고 불교중흥책은 모조리 폐기됐다. 문정왕후의 마지막 불사 현장이자 왕실불교의 상징인 회암사는 유생들의 표적이 됐다. 유생들이 회암사에 방화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명종의 귀에까지 들릴 정도였다. ■ 서서히 무너져간 동국 제일 가람 한때 동국 제일의 사찰로 꼽히던 회암사는 언제 폐사했을까. 일반적으로 회암사는 명종대에 유생들의 방화로 폐사했다거나 임진왜란 때 왜적들의 침입으로 폐사됐다고 서술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선조~인조대도 회암사는 왕실사찰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암사가 선조대를 전후해 일시적으로 폐사됐던 건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3년째 되는 1595년 회암사 옛터에 있던 큰 종을 녹여 조총을 만들겠다는 선조실록의 기록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시점에 회암사가 빈 절이 됐음을 알려준다. 그 시점이 명종대인지, 선조대인지에 대해선 아직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이에 대해 회암사지의 유구들은 역사서에 등장하지 않는 숨겨진 진실을 말해주고 있다. 회암사지에선 모두 12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진행됐는데, 대부분의 유적층에서 16세기말 전소된 흔적이 나타났다. 2단지에선 불에 타다 만 마룻바닥이 확인됐고, 4단지에선 불에 탄 문짝의 목재가 나타났으며, 8단지에선 지붕 전체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 게 그대로 드러났다. 즉 16세기의 어느 한 시기에 회암사 전체가 불에 타 무너져내렸음이 밝혀진 것이다. 하지만 발굴조사 결과만으로는 회암사의 화재가 명종대 유생들의 방화사건인지, 임진왜란 당시 왜구의 소행인지 단언하기 어렵다. 그런데 회암사지에서 발견되는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출토된 불상 대부분이 목이 잘렸다는 점이다. 어떤 불상은 머리와 몸통 등이 매우 멀리 떨어진 지점에서 각각 발견되기도 했다. 불교 말살을 외치던 특정 집단에 의해 인위적으로 불상의 훼손이 이뤄졌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회암사는 16세기 전소된 이후에도 한동안 왕실사찰로 유지됐다. 임진왜란 직후인 1605년(선조 38년) 선조는 회암사에서 선왕의 어실을 수리하는 동안 잡역으로 침해하지 말라는 전교를 내렸고, 1626년(인조 4년) 종실인 항상군 이정이 회암사에서 크게 불사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왕실의 지원에도 조선후기 회암사는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숙종 12년 승정원일기 기록에는 양주 회암면 사람이 양안에 등록된 전답을 회암사에 보시했으나 지금은 주인 없이 경작을 하지 않는 땅이 됐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회암사가 소유 전답을 관리하지 못할 정도로 퇴락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 왕실 최고 사찰의 명암 승정원일기를 끝으로 회암사에 관한 기록은 19세기 초까지 역사서에서 사라지다시피 했다. 한때 동국 제일의 사찰로 꼽히던, 조선 최초 왕사의 하산소로 지정됐었던, 역대 왕의 위패를 봉안했던 사찰이 어떻게 승려 1명 없는 빈 절이 됐을까. 결과론적으로 유추해볼 때 회암사의 화려한 역사는 사실상 사찰의 자립이 불가능한 환경을 만들었다. 회암사는 공민왕대 고려 왕실 지원으로 크게 조성됐고, 조선 전기 내내 왕실의 끊이지 않은 경제적 지원을 통해 유지될 수 있었다. 조선전기까지만 해도 원경왕후, 정희왕후, 정현왕후, 문정왕후 등 역대 대비들이 독실한 불교신앙을 갖고 회암사에 대해 지원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하지만 선조대 이후 사림정치가 본격화되고 여성들의 발언권이 크게 약화되면서 왕실여성들의 불사 행위는 매우 소극적으로 변모했다. 회암사에 대한 대비들의 대대적인 불사도 중단됐다. 왕실불교의 표상이라는 화려한 타이틀은 오히려 유생들의 표적이 되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조선후기 불교계의 변화들도 회암사의 쇠락을 부추겼다. 양란 이후 불교계의 중심세력이 된 휴정의 제자들은 나옹 혜근의 법통이 아닌 태고 보우의 법통임을 자처했다. 또한 양란 이후 조선의 민중들은 전란에 시신조차 찾지 못한 가족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사찰에서 수륙재(水陸齋: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에게 공양을 드리는 불교의식)와 영산재(靈山齋:불교에서 영혼 천도를 위해 행하는 종교의례) 등을 설행했다. 불교계 안팎에선 불안한 민초들을 위무하기 위한 염불신앙이 크게 유행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대해 회암사가 적극적으로 대처한 흔적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회암사는 사회적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채 점점 쇠락해져 갔고, 결국 17세기말에 이르면 승려 1명도 상주하지 않는 빈 절이 되고 말았다. 화려한 이력과 배경에도 억불숭유시대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회암사는 결국 스스로 무너져 내렸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탁효정(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동아시아 선종사원의 전형 양주 회암사지] ③회암사에 들어선 이성계의 궁궐

■ 친구 따라 회암사로 간 태조 조선 건국 후 석 달 뒤인 1392년 10월11일 조선 최초 왕사(王師)의 임명을 축하하는 법석이 개최됐다. 이 날은 태조 이성계가 건국 후 맞은 첫 생일이기도 했다. 함흥의 이름 없는 무장 이성계가 왕이 될 것임을 가장 먼저 예견한 신승(神僧)이자 전국 각지에 왕조 탄생 기도처를 만들어 이성계의 무운을 축원했던 도반인 무학자초(無學自超)는 평생을 전쟁과 정쟁 속에서 보낸 무인에게 정신적 의지처가 되어주었던 지기지우(知己之友)이기도 했다. 무학을 왕사로 임명한 직후 태조는 무학과 함께 양주 회암사로 갔다. 모든 정무를 뒤로하고 회암사에서 머물다 무학을 남겨둔 채 도성으로 돌아왔다. 보통 왕사나 국사로 임명되면 하산소(下山所)가 지정됐는데 무학의 하산소가 회암사였던 것이다. 고려말 조선초의 회암사는 동국 제일의 사찰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크고 화려한 절이었으며, 개경이나 한양에서 한나절이면 오갈 수 있는 절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무학의 스승인 나옹과 지공의 부도가 모셔져 있는 나옹 법통의 표상과도 같은 장소였다. 이성계가 회암사를 무학의 하산소로 지정한 것은 무학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인 동시에 나옹에 대한 존경, 나옹 문도들이 중심이 돼 조선 불교계를 이끌어 달라는 당부이기도 했다. 이후 무학은 회암사에서 후학들을 양성하고 수행생활을 하면서 지냈다. ■ 살아있는 무학의 부도 제작 태조는 1397년(태조 6년) 무학의 부도를 미리 만들어 회암사에 설치할 것을 명했다. 부도는 승려가 입적한 후 다비를 통해 나온 사리를 봉안하면서 제작하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태조는 아직 세상을 뜨지도 않은 무학의 부도를 미리 만들라고 한 것이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무학보다 먼저 세상을 떴을 때 후대 왕이나 유학자들이 무학을 외면할까 선수를 친 것으로 보인다. 태조는 최고의 장인들을 파견해 무학의 부도탑과 부도비 등을 조성했다. 태조의 원력으로 조성된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보물 제388호)은 조선전기 불교 미술의 걸작으로 꼽힌다. 무학의 부도탑은 나옹과 지공 등의 부도탑 아래에 마련됐고, 그 결과 회암사에는 지공에 이어 나옹, 무학 등으로 이어지는 3화상의 부도가 마련됐다. 나옹문도의 구심점인 회암사에 무학의 부도를 조성함으로써 태조는 무학이 지공ㆍ나옹의 법손이며 회암사가 조선불교계의 구심점임을 다시 한번 천명했다. 사실 무학에 대한 평가는 조선시대 내내 매우 냉혹했다. 고려말 원 유학 시절에 연경의 법원사에서 나옹의 제자가 된 무학은 고려 내의 나옹 문도들로부터 적통 제자로 인정받지 못했고, 조선 중기 나옹 법통에서도 배제됐다. 또한 여말선초의 유학자들은 무학을 태조를 불교에 빠트린 요승(妖僧)으로 폄하했다. 하지만 원 유학 시절에 지공과 나옹의 가르침을 받은 무학은 스스로 지공과 나옹 법통을 계승한 적장자임을 자처했다. 이러한 무학의 의중을 읽은 이성계가 무학에게 마련해준 선물이 바로 회암사 부도였다. ■ 회암사 경내에 태조 행궁 들어서다 새 왕조를 개창한 지 7년도 되지 않아 태조의 삶은 참혹하리만큼 무너져갔다. 두 번째 왕비 신덕왕후 강씨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강씨 소생의 두 아들 방번과 방석 등이 배다른 형인 방원에 의해 살해당했다. 태조는 둘째아들 정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오늘은 강원도의 절, 내일은 경기도의 절 등으로 떠돌아다녔다. 가장 똑똑한 아들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했으면 어린 두 아들이 죽지 않았을까. 신덕왕후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두 아들을 살릴 수 있었을까. 내가 왕이 되지 않았다면 어린 자식들을 앞세우지 않을 수 있었을까. 회한만 남은 인생을 덧없어하며 이 절 저 절을 떠돌아다녔다. 태종이 기어코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뒤 태상왕은 한밤중에 훌쩍 도성을 떠나 소요산으로 갔다. 태종이 만류하자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돌연 행적을 감춰버린 것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태종이 배웅하고자 했지만 이미 이성계는 도성을 벗어난 뒤였다. 이성계는 소요산에 있는 행재소(임금의 임시 거처)에서 머물렀다. 회암사에서 약 10여㎞ 떨어진 곳이었다. 소요산에 머물며 회암사를 오가던 이성계는 아예 회암사 내에 궁실을 지어 살겠다고 선언했다. 태상왕이 회암사에서 지낸다는 소식을 들은 태종은 회암사 내에 부왕이 머물 행궁을 짓게 했다. 이후 외국 사신들이 회암사를 들러 태상왕에게 인사를 올렸고, 태종도 간간이 회암사로 행차해 문안을 올리곤 했다. 이성계는 회암사에 머물면서 무학으로부터 계를 받고 수행생활을 이어갔다. 이성계는 회암사에서 거의 출가자나 진배없는 생활을 이어갔다. 이성계가 육식을 끊고 말라가는 모습을 본 태종은 무학에게 화를 내며 만약 태상왕께서 육선(肉膳)을 들지 않는다면 내가 왕사에게 허물을 돌리겠다며 협박했다. 이에 태조는 국왕이 나처럼 부처를 숭상한다면 다시 고기를 먹겠다고 하자 태종이 술을 한 잔 올리며 그러겠노라 약속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 역대왕 위패 봉안한 어실 조성 왕사의 하산소로 지정된 이래 회암사는 조선 왕실불교의 중심축이 됐다. 왕실의 각종 소재법석(消災法席:불법을 강설하는 법연의 한 종류), 추천재(追薦齋) 등이 회암사에서 치러졌고, 17세기까지 회암사 내에는 역대 왕의 위패가 봉안된 어실(御室)이 설치됐다. 조선시대 왕이나 왕비의 위패를 봉안한 원당사찰에는 보통 1~2명의 위패가 봉안되는 게 일반적이었던 반면 회암사에는 조선전기 대부분의 왕과 왕비의 위패가 모셔졌다. 이로 인해 회암사는 단순한 왕실기도처가 아닌 조선의 국찰(國刹) 역할을 수행하게 됐다. 회암사에 언제부터 어실이 설치됐는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태조, 원경왕후, 세종, 문종, 정희왕후 등의 제7재가 회암사에서 설행됐던 것으로 미뤄 태조의 사망 직후부터 이곳에 태조의 위패를 봉안한 어실이 마련됐고, 이후 역대 왕과 왕비들의 위패도 함께 봉안된 것으로 추정된다. 태조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회암사에 대한 왕실의 지원은 계속됐다. 태종은 회암사의 주지는 반드시 계행(戒行)을 지키는 승려로 임명해 불도(佛道)를 보존하라는 명을 내리고 수차례 곡식과 토지 등을 하사했다. 그리고 세종대에는 효령대군, 성종대에는 정희왕후 등이 회암사의 중창을 주도했다. 효령대군은 회암사를 중창했을 뿐만 아니라 회암사에서 각종 왕실법회를 주최했는데 효령대군이 법회를 개최할 때는 세종이 곡식과 면포 등을 내려 불사를 돕도록 했다. 당시 회암사 보광전에는 원경왕후가 보시한 수불(繡佛:자수로 만든 불상)이 걸려 있었고, 회암사 어실에는 태종과 원경왕후의 위패가 봉안돼 있었다. 이들 형제에게 있어 회암사는 부모의 명복을 비는 원찰이었기 때문에 더욱 지극정성으로 불사를 벌였던 것으로 보인다. 효령대군이 회암사에서 개최한 원각법회는 원각사 창건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1464년(세조 10년) 5월 회암사 원각법회에서 사리가 분신하는 상서가 나타나자, 세조는 이 법회의 이름을 딴 원각사를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오늘날의 탑골공원)에 창건했다. ■ 고려ㆍ조선불교의 교두보 역할 태조가 무학이라는 지기를 만났던 건 왕조 개창자와 선승(禪僧)의 만남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태조는 무학이라는 친구로 인해 불교신앙을 평생토록 유지할 수 있었고, 이는 고려의 불교가 조선으로 안착할 수 있는 교두보이자 왕실불교가 500여년간 지속될 수 있는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 존재했던 조선전기 회암사는 무학과 태조의 관계를 상징하는 절인 동시에 왕실불교를 대표하는 국가적 사찰 역할을 담당했다. 탁효정(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동아시아 선종 사원의 전형 양주 회암사지] ②나옹의 회암사 중창

■고려의 나란타 세우라는 당부를 받들다 인도 동부 비하르주에 있던 나란타사원은 5세기부터 12세기까지 수많은 학승을 배출한 거대한 승원이다. 한때 1만명의 승려가 동시에 재학했을 정도로 나란타사원은 세계 최고의 불교대학이었다. 소설 서유기는 623년경 나란타사원으로 유학을 떠나던 당나라 승려 현장 법사의 구법행로를 모티브로 쓰인 이야기다. 현장이 인도 나란타사원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700여년이 지난 뒤, 현장의 까마득한 후배인 지공이 서역을 거쳐 원의 수도 연경으로 왔다. 원 황실의 행향사(行香使:임금의 명령을 받고 신불에게 제사를 지내는 벼슬아치)로 고려를 방문한 지공은 금강산의 법기도량을 방문한 뒤 경상도와 전라도의 여러 사찰을 유람하던 중 개경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나란타사원과 아주 흡사하게 보이는 곳을 발견했다. 산 3곳과 물 2곳이 만나는 지점. 양주 천보산 자락에 있는 회암사였다. 젊은 시절 수학했던 나란타사원의 환영이 보였던 것일까. 아니면 그곳에서 수많은 선승이 배출될 예지통이 열렸던 것일까. 사실 일반인들의 육안으로 볼 때 인도 동부 갠지스강 유역 평원에 있는 나란타사원과 산줄기 사이의 작은 분지에 들어선 회암사지는 지형적으로는 전혀 비슷해 보이지 않는다. 회암사지는 산봉우리 사이의 골짜기를 따라 길게 늘어선 분지 지형인 반면 나란타사원은 강의 범람으로 만들어진 넓은 평야지대에 있다. 그럼에도 왜 지공은 양주 천보산 자락을 고려의 나란타가 들어설 길지로 보았던 것일까. 오늘날의 학자들은 개경과 남경(현재의 서울)에서 가까운 지역, 다수의 강의시설이 들어설 수 있는 길쭉한 평지, 학승들의 경제적 지원이 가능한 양주의 비옥한 토지 등이 최고의 불교대학이 들어설 후보지 조건으로 평가됐을 것으로 추측한다. ■원에서 지공의 수제자가 되다 양주에서 상경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지공은 원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고려에 남긴 지공의 명성은 여전히 높았고, 고려의 승려들이 그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 원의 수도 연경에 있는 법원사를 찾아갔다. 지공이 거하는 사찰의 승려 대부분이 고려승이었다고 전해질 정도로 법원사에는 고려 출신의 유학승들이 모여들었다. 1348년 법원사를 찾아간 젊은 고려의 승려는 몇 마디 문답으로 지공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미 고려의 회암사에서 견성(見性:모든 망념과 미혹을 버리고 자기 본래의 성품인 자성을 깨달아 앎)을 경험했다 하는 젊은 학승의 그릇을 지공은 단번에 알아보았다. 지공은 10년간 법원사의 판수(板首:불교의 공양의식인 食堂作法의 구성원)를 나옹에게 맡겼다. 판수는 총림을 이끄는 직임으로 문도의 대표격인 자리였다. 훗날 공민왕의 왕사가 돼 고려의 개혁 불교계를 이끄는 나옹 혜근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10년간 법원사의 판수를 맡는 중에도 나옹은 중국 강남과 화북의 여러 사찰을 유력하면서 고승들을 만나 가르침을 얻고 인가를 받았다. 1353년 지공은 종지 밝힌 법왕에게 천검(千劍)을 준다는 게송(偈頌:부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찬탄하는 노래)과 전법계를 주었다. 자신의 법통이 나옹에게 전해짐을 공표한 것이었다. 나옹이 유학생활을 마치고 고려로 돌아간다고 고하자 지공은 제자에게 다음과 같은 당부를 했다. 고려에 돌아가 삼산양수지간(三山兩水之間)에 나란타와 같은 사원을 세운다면 불법(佛法)이 크게 흥할 것이다. ■공민왕의 불교 개혁에 가담 스승의 간곡한 당부를 안고 나옹은 고려로 돌아왔다. 고려는 나옹이 유학을 떠나기 전과 크게 달라져 있었다. 나옹이 유학을 떠날 당시만 해도 고려는 원의 간접적인 지배하에 있었다. 원 간섭기 고려에서는 원 황실의 원찰이 많이 늘어났고 권문세력과 결탁한 사찰들의 사원전과 노비 수가 크게 늘어났다. 시대를 불문하고 국가의 혼란이 종교의 타락으로 이어지는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하지만 나옹이 법원사에 수학하고 있을 무렵 고려의 새로운 왕으로 등극한 공민왕은 고려의 자주독립을 기치로 내세우고 각종 개혁조치를 시행해갔다. 공민왕은 불교계의 친원 성향을 누르고 새로운 인물들을 배치함으로써 종교적으로도 개혁조치를 단행하고자 했다. 공민왕이 불교 개혁을 맡길 인물을 찾을 즈음 고려로 돌아온 나옹의 명성이 들려왔다. 10여년간 원에서 유학하며 당대 최고의 임제승들로부터 가르침을 얻고 고려에 온 달마 지공의 문하에서 수제자로 인정받은 나옹의 명성이 공민왕의 귀에까지 전해진 것이다. 공민왕은 나옹을 정중히 초청해 궁궐에서 법회를 열었다. 나옹의 설법을 들은 직후 공민왕과 그의 왕비 노국공주는 나옹의 열렬한 지지자가 됐다. 공민왕은 해주 신광사와 청평사 등 고려후기 대찰들의 주지로 임명했다. 아직 고려 내에 지지기반이 거의 없는 나옹을 신광사와 같은 대찰의 주지로 임명한 것은 매우 파격적인 조치였다. 이는 공민왕이 나옹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그리고 공민왕의 불교 개혁 조치의 일환으로 시행된 공부선(功夫選:고려ㆍ조선시대 승려에게 법계를 주기 위해 시행했던 과거시험)의 주관자로 위촉됐다. ■지공의 사리 봉안한 회암사 중창 그러던 중 1370년 지공의 사리가 고려에 도착했다. 지공의 사리가 개경에 도착하자 공민왕은 왕륜사에서 법회를 크게 열었다. 얼마 뒤 지공의 사리는 회암사로 옮겨져 봉안됐다. 회암사는 나옹이 원으로 유학으로 떠나기 전 수학하던 사찰로 그가 처음으로 깨달음을 얻은 곳이었다. 공민왕은 지공의 수제자인 나옹을 왕사로 임명한 다음 회암사에 지공의 부도를 세우고 회암사를 대대적으로 중창할 것을 명했다. 공민왕이 회암사를 지공의 부도 조성 장소로 택한 데에는 지공에 대한 존경의 의미도 있었지만 지공의 법을 받들어 회암사를 불교개혁의 거점으로 삼아달라는 당부도 담겨 있었다. 이후 나옹은 회암사에 주석하면서 중창 불사에 온 힘을 쏟았다. 하지만 회암사 중창불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1374년 공민왕이 살해되면서 고려는 또 한번의 격변에 휘말렸다. 우왕 즉위 직후 공민왕의 개혁정치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인물들은 반대세력으로부터 대대적인 숙청당했고 그 중 한명이 공민왕의 왕사였던 나옹이었다.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린 와중에도 나옹은 회암사 중창불사에 매진해 1376년(우왕 2년) 회암사를 완공시켰다. 목은 이색이 지은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에는 당시 회암사의 화려한 모습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보광전을 비롯해 총 262칸의 건물이 완성됐고, 15척(약 4.5m)에 달하는 불상이 7구에 달했다. 이색은 크고 웅장하기가 동국에서 제일로서, 이런 절은 중국에서도 보기 드물다고 한다고 전했다. 명실상부한 고려 최고의 절이 탄생한 것이었다. 오늘날 회암사지에 남아있는 회암사의 기본 골격은 나옹의 중창 당시에 만들어진 것이다. 나옹이 중창하기 이전부터 회암사는 양주 천보산에 있던 사찰이었지만 중창 이전의 회암사의 위치는 명확하지 않다. 12차에 걸쳐 진행된 회암사지 발굴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회암사지에서 가장 오래된 유구는 고려말의 것으로 그 이전의 유물이나 유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지금의 천보산 자락에 회암사가 들어선 것은 나옹의 중창불사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1376년 4월 회암사의 완공을 기념하는 낙성식이 개최됐다. 260여 칸에 달하는 회암사의 낙성식은 매우 화려했다. 하지만 그토록 웅장하고 수려한 절이 완성된 그날, 회암사에는 나옹의 길을 막으며 대성통곡을 하는 신도들로 가득했다. 우왕은 나옹에게 회암사 낙성식 직후 밀양 영원사로 내려갈 것을 명했다. 사실상 공민왕의 왕사에 대한 숙청이자 정치적 유배였다. 회암사 열반문을 나서던 나옹은 목 놓아 통곡하는 신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디 노력하고 노력해 나 때문에 중도에 그만두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나의 여행길은 마땅히 여흥(오늘날의 여주)에서 끝날 것이다. 나옹은 밀양으로 내려가던 도중 여주 신륵사에서 사망했다. 일설에는 반대파들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당했다고도 전해진다. 지공이 나옹에게 내린 고려의 나란타를 세워 불법을 일으키라는 당부도, 공민왕이 나옹에게 당부했던 개혁 불교의 기치도 모두 물거품이 되는 듯했다. 하지만 나옹의 사망 이후 나옹의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접지 않았다. 고려 불교계의 개혁세력으로 부상하던 나옹의 문도들은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세력들과 손을 잡았고, 조선이라는 새 나라의 지지 세력이 됐다. 나옹의 제자인 무학은 조선 최초의 왕사가 돼 회암사를 고려의 나란타가 아닌 조선의 나란타로 부활시켰다. 탁효정(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동아시아 선종사원의 전형 양주 회암사지] 문화적 가치 고찰

양주 회암사지는 한국에서 가장 잘 보존된 절터이다. 이 절은 고려말 조선초의 불교계를 이끄는 구심점이자, 조선 역대 왕의 위패를 봉안했던 대표적인 왕실원당이었다. 하지만 양란 이후 쇠퇴를 거듭하던 회암사는 서서히 허물어져 오늘날 대부분의 사역(寺域)이 폐사지로 남아있다. 회암사지는 1997년대부터 2015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12차례의 발굴조사와 유적정비, 박물관 건립 등 종합정비사업을 통해 13~14세기 동아시아 선종사원의 전형이자 고려말 조선전기 최대의 왕실사찰 유적임이 증명됐다. 회암사지는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다. 이에 회암사지가 지닌 역사적 의미와 폐사지 복원의 문화적 가치를 고찰한다. 편집자주 ①지공의 회암사 방문 ②나옹의 회암사 중창 ③회암사에 들어선 이성계의 궁궐 ④문정왕후의 회암사 무차대회 ⑤다시 살아나는 회암사 ■고려에 남긴 인도 승려의 날카로운 추억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는 것보다 명확한 사실을 알려줄 때가 있다. 와인 향기가 포도나무 뿌리의 깊이를 알려주고, 현악기 선율이 연주자가 지닌 영혼의 빛을 전해주듯, 수백ㆍ수천년 전 무너져버린 유적들은 역사서에서 말해주지 않는 숨겨진 진실을 전해주곤 한다. 오래전 지어졌다 폐허처럼 남아있는 빈 절터들은 건물이 빼곡히 들어선 사찰보다 더 깊고 은밀한 이야기를 말해준다. 어지러이 널려 있는 돌의 문양들은 이곳이 1천여년 전 사찰이었음을, 지난 수백년간 그 누구도 살지 않았음을, 수차례 건물이 지어지고 무너지기를 반복했음을, 한때 이곳에 머물던 수많은 납자(衲子:절에서 살면서 불도를 닦고 실천하며 포교하는 사람)들이 한국의 수행 전통을 이끌어 왔음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절터에 갈 때면 깊은 영감과 회한이 온몸을 감싸는 느낌이 들곤 한다. 고려와 조선의 불교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는 폐사지 중 한곳인 양주 회암사지. 한때 고려와 조선의 가장 융성한 사찰이었으나 언제부턴가 1명의 승려도 거주하지 않게 된, 그럼에도 절터의 윤곽은 그 어느 곳보다 잘 남아있는 곳. 고려에서 조선으로 건너오는 격변기에도 사세를 유지했지만, 결국 숭유억불시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스스로 허물어진 사찰이다. 그 어느 곳보다 찬란했기에 그 어느 곳보다 더 황량하게 남아있는 회암사지의 기나긴 이야기가 역사 전면에 등장하게 된 건 700여년 전 고려를 방문했던 한 인도의 승려로부터 시작된다. ■달마로 추앙된 인도 마갈타국의 왕자 1326년(충숙왕 13년) 지공이라는 이름의 선승(禪僧)이 고려를 방문했다. 검은 얼굴을 지닌 낯선 이방인 승려는 고려인들로부터 열광에 가까운 환영을 받았다. 누군가는 그를 일컬어 석가모니의 환생이라 했고, 누군가는 달마가 고려를 찾았다며 환호했다. 석가모니가 다시 태어나 인도에서 먼 고려 땅까지 친히 오셨으니 어찌 찾아뵙지 않겠느냐며 이른 새벽부터 인도 승려가 머무는 사찰 앞은 고려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인도에서 온 승려의 이름은 디아나 바드라(dhyāna-bhadra), 한자로는 제납박타(提納薄陀)라고 음역했다. 산스크리트어 수니아 이시아(śūnyā-diśya)를 한자로 의역한 지공(指空)은 그의 호였다. 인도 마갈타왕국에서 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나란타사원에서 출가한 후 남인도 길상산에서 보명(普明)의 법을 이었고, 서천(西天) 제108조가 됐다. 이후 인도의 남부와 서부, 북부 등지의 여러 나라와 티베트를 거쳐 1324년 원제국에 이르렀다. 석가족의 후예인 마갈타국 왕자가 출가해 선불교를 계승한 서천 108대의 조사가 됐고, 수만리 험난한 길을 거치면서 외도들을 굴복시키고 이교도들을 교화시켜 수많은 신도가 생겨났다는 풍문은 원의 수도 연경에까지 도달했다. 원의 불교신자들은 달마가 다시 한번 중국을 찾아온 것이라고 믿었다. 그 명성을 전해 들은 원의 태정제는 지공을 연경으로 초청, 황궁에서 법회를 열었다. 지공은 황실과 관인은 물론 원의 사부대중들로부터 큰 우대와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2년 뒤인 1326년 지공은 어향사(御香使)로서 고려를 방문했다. 그가 아시아의 맨 동쪽 고려까지 찾아온 이유는 법기보살(담무갈보살)이 상주한다고 전해지는 신비로운 산, 금강산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담무갈보살 친견 위해 고려 방문 14세기 원제국은 물론 고려와 일본에선 보살의 주석처로 전해지는 산을 순례하는 게 하나의 신앙처럼 유행했다. 그런데 오대산, 보타산, 용문산, 아미산 등 보살 상주처가 대부분 중국에 있는 것과 달리 금강산은 고려에 있는 불교 성지로 꼽혔다. 화엄경 제보살주처품에는 동북방의 바다 가운데에 금강산이 있으니, 담무갈보살이 1만2천의 보살들과 더불어 항상 반야심경을 설법하는 곳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중국인들은 화엄경에서 말하는 동북쪽의 담무갈보살 상주처를 고려의 금강산이라고 믿었다. 13세기 중국에선 고려국에 태어나 금강산을 꼭 한번 가보고 싶다(願生高麗國 親見金剛山)는 말이 속담으로 전해질 정도로 금강산 순례는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소망으로 여겨졌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 온 사신들은 금강산 순례를 조정에 요청했고, 원과 명의 황제들은 사신에게 번과 기를 내려 금강산 사찰에 봉안하라는 명을 내리곤 했다. 원의 수도 연경에서 이 전설을 전해 들은 지공도 금강산에서 담무갈보살을 친견하고자 고려로 건너오게 된 것이었다. 지공은 고려의 수도 개경에 도착했고 곧바로 금강산의 법기도량을 방문했다. 지공이 방문한 법기도량은 금강산의 유점사로 추정된다. 원 황실로부터 하사받은 향(香)을 들고 금강산을 방문한 지공은 법기도량에서 향을 공양하는 의식을 올린 뒤 고려의 여러 사찰을 유람했다. 1328년 통도사를 방문해 석가모니의 사리를 친견한 지공은 통도사 뒷산을 보고 인도의 영취산(靈鷲山)과 같은 모양이라고 말했다. 영취산은 지공의 고향인 인도 마갈타국의 왕사성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석가모니가 법화경을 설법한 곳이다. 통도사가 영취산문이라고 불리게 된 건 이때 지공이 붙인 이름에서 유래한다. 예천 대곡사, 전주 화엄사, 광주 무등산 등지를 방문한 지공은 개경으로 돌아가기 직전 양주 땅을 거치던 길에 회암사를 들르게 됐다. ■양주에서 만난 나란타의 모습 회암사가 들어선 천보산 기슭을 바라본 지공은 이곳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3개의 산과 2개의 강물이 만나는 지형에 둘러싸인 회암사에서 그는 자신이 젊은 시절 수학했던 나란타 사원의 모습을 읽었던 것이다. 지공이 방문했을 당시의 회암사 모습은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1174년(명종 4년) 원경국사(元敬國師)의 친필을 보기 위해 금의 사신이 왔다는 것이나, 1304년 원의 승려 철산소경(鐵山紹瓊)이 회암사에 들러 서액을 했다는 기록들이 간간이 전해진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회암사는 고려 불교계에서 크게 비중이 있는 사찰이 아니었고, 이 절의 문도나 건축물 등이 언급될 정도로 유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의 회암사 모습을 추정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지공에게 있어 회암사는 고려에서 가장 큰 여운을 남긴 사찰임에 분명했다. 이때 지공이 받은 강렬한 인상은 훗날 그의 제자 나옹혜근에게 삼산양수지간(三山兩水之間)에 고려의 나란타를 세우라는 수기를 남긴 계기가 됐다. ■고려에 남겨진 지공에 대한 깊은 존경 1328년 9월 고려에서의 2년 7개월간의 여정을 마치고 지공은 다시 원으로 돌아갔다. 원으로 돌아간 뒤에도 지공에 대한 고려인들의 존경은 계속됐다. 고려 출신의 기황후와 강금강 등 원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의 후원을 받았고, 대부대감 철한목첩아의 고려인 아내 김씨는 지공이 주석하도록 연경에 법원사(法源寺)라는 절을 지었다. 지공이 머무는 법원사에는 나옹혜근(懶翁惠勤), 백운경한(白雲景閑) 등과 같은 고려의 유학승들이 찾아와 지공의 제자가 되기를 청했다. 당시 고려에선 수많은 승려가 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송과 원의 저명한 선사로부터 인가를 받아 고려에 중국의 선맥을 이어가는 게 하나의 문화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공은 중국에 뿌리를 둔 승려가 아니었고 원나라 내에서도 그의 명성이나 기반은 취약한 편이었다. 그럼에도 고려에 머무는 동안 지공이 남긴 명성은 고려의 납자들을 불러들였고, 나옹혜근을 비롯해 고려말 조선초의 불교계를 주도할 법제자들이 지공의 문하에서 배출됐다. 지공은 2년 7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고려를 방문했지만, 그가 남긴 기억은 매우 강렬하고도 깊었다. 누군가에게는 법 높은 스승의 표상으로 남았고, 누군가에게는 석가모니 모습을 빼닮은 부처의 현신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고려를 압박해온 원나라 불교를 극복할 정신적 구심점으로 받아들여졌다. 1363년 법원사의 방장 지공이 입적했고, 1372년(공민왕 21년) 그의 사리 일부가 고려로 전해져왔다. 지공이 남긴 사리는 고려의 새로운 선풍(禪風)을 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탁효정(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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