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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선종사원의 전형 양주 회암사지] ③회암사에 들어선 이성계의 궁궐

무학의 하산소 ‘회암사’… 500년 왕실불교 밑거름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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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대곡사 삼화상(무학) 진영(1793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427호).
의성 대곡사 삼화상(무학) 진영(1793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427호).

■ 친구 따라 회암사로 간 태조

조선 건국 후 석 달 뒤인 1392년 10월11일 조선 최초 왕사(王師)의 임명을 축하하는 법석이 개최됐다. 이 날은 태조 이성계가 건국 후 맞은 첫 생일이기도 했다.

함흥의 이름 없는 무장 이성계가 왕이 될 것임을 가장 먼저 예견한 신승(神僧)이자 전국 각지에 왕조 탄생 기도처를 만들어 이성계의 무운을 축원했던 도반인 무학자초(無學自超)는 평생을 전쟁과 정쟁 속에서 보낸 무인에게 정신적 의지처가 되어주었던 지기지우(知己之友)이기도 했다.

무학을 왕사로 임명한 직후 태조는 무학과 함께 양주 회암사로 갔다. 모든 정무를 뒤로하고 회암사에서 머물다 무학을 남겨둔 채 도성으로 돌아왔다. 보통 왕사나 국사로 임명되면 하산소(下山所)가 지정됐는데 무학의 하산소가 회암사였던 것이다.

고려말 조선초의 회암사는 ‘동국 제일의 사찰’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크고 화려한 절이었으며, 개경이나 한양에서 한나절이면 오갈 수 있는 절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무학의 스승인 나옹과 지공의 부도가 모셔져 있는 나옹 법통의 표상과도 같은 장소였다. 이성계가 회암사를 무학의 하산소로 지정한 것은 무학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인 동시에 나옹에 대한 존경, 나옹 문도들이 중심이 돼 조선 불교계를 이끌어 달라는 당부이기도 했다. 이후 무학은 회암사에서 후학들을 양성하고 수행생활을 하면서 지냈다.

 

■ 살아있는 무학의 부도 제작

태조는 1397년(태조 6년) 무학의 부도를 미리 만들어 회암사에 설치할 것을 명했다. 부도는 승려가 입적한 후 다비를 통해 나온 사리를 봉안하면서 제작하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태조는 아직 세상을 뜨지도 않은 무학의 부도를 미리 만들라고 한 것이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무학보다 먼저 세상을 떴을 때 후대 왕이나 유학자들이 무학을 외면할까 선수를 친 것으로 보인다. 태조는 최고의 장인들을 파견해 무학의 부도탑과 부도비 등을 조성했다. 태조의 원력으로 조성된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보물 제388호)은 조선전기 불교 미술의 걸작으로 꼽힌다.

무학의 부도탑은 나옹과 지공 등의 부도탑 아래에 마련됐고, 그 결과 회암사에는 지공에 이어 나옹, 무학 등으로 이어지는 3화상의 부도가 마련됐다. 나옹문도의 구심점인 회암사에 무학의 부도를 조성함으로써 태조는 무학이 지공ㆍ나옹의 법손이며 회암사가 조선불교계의 구심점임을 다시 한번 천명했다.

사실 무학에 대한 평가는 조선시대 내내 매우 냉혹했다. 고려말 원 유학 시절에 연경의 법원사에서 나옹의 제자가 된 무학은 고려 내의 나옹 문도들로부터 적통 제자로 인정받지 못했고, 조선 중기 나옹 법통에서도 배제됐다. 또한 여말선초의 유학자들은 무학을 태조를 불교에 빠트린 요승(妖僧)으로 폄하했다. 하지만 원 유학 시절에 지공과 나옹의 가르침을 받은 무학은 스스로 지공과 나옹 법통을 계승한 적장자임을 자처했다. 이러한 무학의 의중을 읽은 이성계가 무학에게 마련해준 선물이 바로 회암사 부도였다.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및 쌍사자석등(보물 제38 8호‚ 제389호).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및 쌍사자석등(보물 제38 8호‚ 제389호).

■ 회암사 경내에 태조 행궁 들어서다

새 왕조를 개창한 지 7년도 되지 않아 태조의 삶은 참혹하리만큼 무너져갔다. 두 번째 왕비 신덕왕후 강씨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강씨 소생의 두 아들 방번과 방석 등이 배다른 형인 방원에 의해 살해당했다. 태조는 둘째아들 정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오늘은 강원도의 절, 내일은 경기도의 절 등으로 떠돌아다녔다. 가장 똑똑한 아들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했으면 어린 두 아들이 죽지 않았을까. 신덕왕후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두 아들을 살릴 수 있었을까. 내가 왕이 되지 않았다면 어린 자식들을 앞세우지 않을 수 있었을까. 회한만 남은 인생을 덧없어하며 이 절 저 절을 떠돌아다녔다.

태종이 기어코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뒤 태상왕은 한밤중에 훌쩍 도성을 떠나 소요산으로 갔다. 태종이 만류하자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돌연 행적을 감춰버린 것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태종이 배웅하고자 했지만 이미 이성계는 도성을 벗어난 뒤였다. 이성계는 소요산에 있는 행재소(임금의 임시 거처)에서 머물렀다. 회암사에서 약 10여㎞ 떨어진 곳이었다.

소요산에 머물며 회암사를 오가던 이성계는 아예 회암사 내에 궁실을 지어 살겠다고 선언했다. 태상왕이 회암사에서 지낸다는 소식을 들은 태종은 회암사 내에 부왕이 머물 행궁을 짓게 했다. 이후 외국 사신들이 회암사를 들러 태상왕에게 인사를 올렸고, 태종도 간간이 회암사로 행차해 문안을 올리곤 했다.

이성계는 회암사에 머물면서 무학으로부터 계를 받고 수행생활을 이어갔다. 이성계는 회암사에서 거의 출가자나 진배없는 생활을 이어갔다. 이성계가 육식을 끊고 말라가는 모습을 본 태종은 무학에게 화를 내며 “만약 태상왕께서 육선(肉膳)을 들지 않는다면 내가 왕사에게 허물을 돌리겠다”며 협박했다. 이에 태조는 “국왕이 나처럼 부처를 숭상한다면 다시 고기를 먹겠다”고 하자 태종이 술을 한 잔 올리며 그러겠노라 약속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나옹선사 부도 및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 제50호)
나옹선사 부도 및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 제50호)

■ 역대왕 위패 봉안한 어실 조성

왕사의 하산소로 지정된 이래 회암사는 조선 왕실불교의 중심축이 됐다. 왕실의 각종 소재법석(消災法席:불법을 강설하는 법연의 한 종류), 추천재(追薦齋) 등이 회암사에서 치러졌고, 17세기까지 회암사 내에는 역대 왕의 위패가 봉안된 어실(御室)이 설치됐다. 조선시대 왕이나 왕비의 위패를 봉안한 원당사찰에는 보통 1~2명의 위패가 봉안되는 게 일반적이었던 반면 회암사에는 조선전기 대부분의 왕과 왕비의 위패가 모셔졌다. 이로 인해 회암사는 단순한 왕실기도처가 아닌 ‘조선의 국찰(國刹)’ 역할을 수행하게 됐다.

회암사에 언제부터 어실이 설치됐는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태조, 원경왕후, 세종, 문종, 정희왕후 등의 제7재가 회암사에서 설행됐던 것으로 미뤄 태조의 사망 직후부터 이곳에 태조의 위패를 봉안한 어실이 마련됐고, 이후 역대 왕과 왕비들의 위패도 함께 봉안된 것으로 추정된다.

태조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회암사에 대한 왕실의 지원은 계속됐다. 태종은 회암사의 주지는 반드시 계행(戒行)을 지키는 승려로 임명해 불도(佛道)를 보존하라는 명을 내리고 수차례 곡식과 토지 등을 하사했다. 그리고 세종대에는 효령대군, 성종대에는 정희왕후 등이 회암사의 중창을 주도했다.

효령대군은 회암사를 중창했을 뿐만 아니라 회암사에서 각종 왕실법회를 주최했는데 효령대군이 법회를 개최할 때는 세종이 곡식과 면포 등을 내려 불사를 돕도록 했다. 당시 회암사 보광전에는 원경왕후가 보시한 수불(繡佛:자수로 만든 불상)이 걸려 있었고, 회암사 어실에는 태종과 원경왕후의 위패가 봉안돼 있었다. 이들 형제에게 있어 회암사는 부모의 명복을 비는 원찰이었기 때문에 더욱 지극정성으로 불사를 벌였던 것으로 보인다. 효령대군이 회암사에서 개최한 원각법회는 원각사 창건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1464년(세조 10년) 5월 회암사 원각법회에서 사리가 분신하는 상서가 나타나자, 세조는 이 법회의 이름을 딴 원각사를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오늘날의 탑골공원)에 창건했다.

 

효령대군 선덕갑인명 수막새(1434년 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소장)
효령대군 선덕갑인명 수막새(1434년 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소장)

■ 고려ㆍ조선불교의 교두보 역할

태조가 무학이라는 지기를 만났던 건 왕조 개창자와 선승(禪僧)의 만남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태조는 무학이라는 친구로 인해 불교신앙을 평생토록 유지할 수 있었고, 이는 고려의 불교가 조선으로 안착할 수 있는 교두보이자 왕실불교가 500여년간 지속될 수 있는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 존재했던 조선전기 회암사는 무학과 태조의 관계를 상징하는 절인 동시에 왕실불교를 대표하는 국가적 사찰 역할을 담당했다.

탁효정(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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