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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원폭피해자의 악몽] 2. 피해자 생생한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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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합천군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한국인 원폭 피해자가 발생한 지역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산과 들밖에 없었던 경상남도 등지에는 일제의 수탈로 먹을 것도, 일할 것도 없었다. 이때문에 일할거리와 먹을 것을 주겠다는 일제의 꼬임에 경상남도에 거주하는 사람들, 특히 합천군의 사람들이 일본으로 끌려가 강제 노역에 동원됐다. 그렇게 일본으로 끌려간 한국인들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등지에서 군수물품 공장에서 일하다 원자폭탄 투하로 피해를 입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원폭투하 당시 사망했지만, 생존한 이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특히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서는 원폭 피해 1세대들이 여전히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후 한국으로 건너온 이들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에 생존해 있는 원폭 1세대의 생생한 증언과 합천원폭자료관 책자에 담긴 구술 증언 등을 통해 원폭 피해자들의 삶이 어땠는지를 면밀히 살펴보고 원폭 투하 당시와 그 이후의 삶을 조명해본다.

#1.

지난달 5일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 1층 쉼터에서 만난 김일조옹(94)은 보행보조기구에 몸을 의지한 채 천천히 걸어 나왔다. 핏줄이 드러난 손, 희끗한 머리, 빼빼마른 몸을 가진 김옹은 원폭투하 당시를 18세즈음으로 기억한다. 김일조옹은 1945년 출근준비를 하다 ‘꽝’하는 소리와 함께 집에 파묻혔다. 이후 누군지 모를 손에 이끌려 간신히 구조된 김일조옹은 겨우 살아났지만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때려서 죽인다”는 소문을 듣고 한국으로 돌아가기를 마음 먹는다. 한국으로 돌아올 당시 김일조옹은 첫째를 임신한 상태였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안해본 장사가 없다는 김옹은 첫째 딸을 출산하자마자 슬픈 이별을 맞았다. 출산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딸이 감기를 앓더니 돌연 죽어버린 것이다. 김일조옹은 이때 첫째 딸의 사망이 원자폭탄의 영향이 아니었겠냐는 지레짐작만 할 뿐이다. 김일조옹 역시 잦은 병치레와 위암수술을 받았다. 김 옹은 “원자폭탄 투하 당시 생겼던 상처들과 피부가 변한 것이 여전히 남아있다”면서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정말 힘든 삶이었고 지금은 그래도 복지회관에서 편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2.

임영우씨(가명)의 아버지는 합천출신이며 임씨는 일본에서 태어났다. 임씨는 평범하게 공부를 하며 살다가 갑작스레 ‘꽝’하는 소리와 함께 천지가 암흑으로 변했다고 회상한다. 순간적으로 임씨 역시 그 충격에 기절하고 말았다. 가까스로 깨어난 뒤에도 땅이 뜨거워서 맨발로는 길을 걸을 수 없었다. 겨우 보건소에서 기초적인 치료만 받은 임씨는 1945년 12월29일 합천으로 귀국했다. 한국에 돌아온 임씨는 농사일을 하며 삶을 영위했다. 그러던 중 임씨는 갑자기 목이 좋지 않아 부산에 있는 이비인후과에서 검사를 했는데, 후두암 2기 판정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수술하지 못하고 일본 나가사키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한 뒤 지금까지 생존해있다. 임씨는 2남1녀의 자녀를 두고 있는데 첫째 딸이 피부 알레르기가 많이 생겨 병원에서 매일 처방약을 받아먹고 있는 상황이다.

원폭피해자들을 기리며 일본학생들이 접어 보내온 종이학들. 윤원규기자

#3.

전미숙씨(가명)는 히로시마에서 장사를 하신 부모님 덕택에 일본에서 생활의 어려움은 없었다. 일본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던 전씨는 4학년쯤 원폭투하를 겪었다. 전씨는 집들이 오농 무너지고 살림살이도 다 탔으며 죽은 시체가 수두룩한 그야말로 아수라장을 두 눈으로 생생히 목격했다. 이후 전씨는 가족들과 함께 귀국했지만 아버지는 원폭 후유증 등으로 인해 일찍 사망했다. 전씨 본인 역시 고혈압, 뇌졸중, 관절염, 어지러움증, 우울증을 겪었다. 특히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면역력이 급격하게 약해져 감기를 매번 걸려 제대로된 일상을 지내기도 어려웠다.

#4.

전국에서 가장 많은 원폭 피해자가 발생한 합천군에서도 원폭피해 2세들의 처절한 삶은 계속됐다. 백민규씨(가명)의 아버지는 강제징용으로 일본으로 갔다 피폭을 당하고 귀국했다. 이후 갑작스레 거동을 못하고 문 밖 출입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다 4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백씨는 물론 첫째언니, 둘째오빠, 막내인 백씨까지 원인을 알 수 없는 똑같은 증상으로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첫째 언니는 투병끝에 세상을 떠났고 그 언니가 낳은 첫째(피폭 3세대) 역시 같은 증상으로 투병 중이다. 백씨의 둘째 오빠는 고통스러운 투병생활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백씨 역시 병상에 누워 산소호흡기에 의자하고 코로 영양분을 섭취하며 힘겹게 살고 있는 중이다.

정민지씨(가명)는 1966년 합천에서 태어났다. 피폭당시 정씨의 아버지는 4살이었으며 잔기침을 달고 살다 1996년 폐암진단을 받았다. 정씨는 어릴때 부터 다리에 힘이 없어 걸어가는 도중에도 잘 넘어지고 중학교 시절에는 빈혈이 심해 힘든 시간을 보냈다. 지금은 ‘대퇴부무혈성 괴사증’이라는 병명의 진단을 받고 살아가고 있다. 대퇴부무혈성 괴사증은 대퇴부 뼈의 혈액공급이 차단되어 뼈가 썩는 희귀병이다.

합천원폭자료관을 찾은 시민들이 자료관을 둘러보고 있다. 윤원규기자

#5.

심진태 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장(80)은 합천원폭역사의 산 증인이다. 그는 원폭 투하가 일어나기 2년전인 1943년 일본 히로시마 에바마치 251번지에서 태어났다. 상당히 어린 나이로 원폭 당시의 기억은 불투명하지만, 공습경보 소리와 그 소리가 나면 바닥이나 책상 밑으로 엎드렸던 기억만은 선명하게 가지고 있다. 원폭 투하 이후 대대로 살아온 부모님의 고향 합천으로 돌아온 심 지부장은 1994년부터 본격적으로 원폭피해자를 위한 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원폭 피해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같은해 본격적으로 합천원폭협회의 대의원을 맡으면서다. 특히 1996년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이 개관하면서 심 지부장은 ?은 일을 도맡아 했다. 책상, 의자, 침대 등 가구 정리부터 각종 청소 등 복지회관에서 필요한 모든 일에 심 지부장은 두 팔을 걷고 나섰다.

이후에도 원폭자료관 개관과 원폭피해자 지원을 위해서 서울, 경기도, 세종시 등 전국 곳곳을 다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원폭 피해자 구제를 위한 활동을 펼쳤다. 위령각에서 위령제가 진행될 때 보건복지부장관 등 관계자들이 참석하면 “한국 원폭 피해자에게 우리 정부보다 일본이 더 관심이 크다”라며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심 지부장은 현재에도 원폭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그는 “우리야 나이가 먹었으니 죽으면 그만이지만 원폭 피해가 대물림되고 있는 우리 후손들에게는 그 피해를 보상받을 수 있도록 증거라도 남아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원폭 피해자를 위한 활동을 하는 것엔 별다른 이유가 없다. 누군가는 해야할 일이기 때문에 제가 하는 것이다”고 웃어보였다.

심 지부장은 현재 무릎과 발목이 좋지 않아 불편한 다리로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면서도 원폭 피해자 지원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심 지부장은 “젊을 때는 전국을 다 다녀도 다리가 말썽이 없었는데 이제는 다리가 말썽이라 어디 다니기가 힘들다”면서 “다리만 멀쩡했으면 지금보다도 더 열성적으로 원폭 피해자 지원 활동에 나섰을 텐데, 그러질 못하는 것이 아쉬운 부분”이라고 말했다.

원폭피해자들이 수기로 작성한 원폭피해 당시 상황 및 피해상황. 윤원규기자

경기ON팀=이호준·최현호·김승수·채태병·이광희·윤원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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