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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키자! 미래유산] ⑤용인 ‘영화지’, 용서받지 못할 매국노 송병준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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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매국노 송병준 별저에 조성된 정원 연못 '영화지'의 모습. 용인문화원 제공

여러분은 근대건축물을 어떻게 보시나요. 누군가는 미래유산으로 보고, 누군가는 흉물로 볼 테죠. 견해가 서로 다른 까닭에, 그동안 수많은 근대건축물이 보존이냐, 철거냐 기로에 서서 온갖 수난을 겪어내야 했습니다. 안타까운 건 개중에 문화재로 가치가 높은 것들이 소실됐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지역의 역사와 정체성을 담은 귀중한 근대문화유산을 앞으로 얼마나 더 허무하게 잃어버릴지 모릅니다. 그래서 시작합니다. 꼭 지켜야 할 미래유산을 찾아가는 여정을. 1876(개항기)에서 1970년 사이에 지어진 경기도의 근대건축물을 중심으로 문화재로 등록되지는 않았지만, 미래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것들을 발굴해 보존 대책을 찾아보려 합니다. 선조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그대로 우리도 후손에게 온전하게 물려줄 수 있길 바라며.

편집자주

 

친일 매국노의 대명사 송병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를 수 없는 정미칠적 중 하나인 민족 반역자다. 용인시 양지면에는 그의 마지막 흔적이 남아있다. 옛 별저 터에 유일하게 존치된 정원 연못 영화지. 지금은 눈여겨보지 않으면 연못인지 모를 정도로 볼품없지만 들여다볼수록 화려했던 옛 자취가 또렷하다.

죽음으로도 용서받지 못할 송병준의 유산이기에 없애야 된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겠지만, 뼈아픈 역사를 증명하는 증거물이다. <지키자! 미래유산> 다섯 번째는 언제 사라질지 모를 악인의 흔적 영화지를 재조명한다.

 

친일 거두의 영광과 오욕을 비춘 유일한 증거 연못

▲ 1. 송병준의 99칸 별저가 있었던 자리에 지금은 양지온누리 교회가 들어서 있다. 2. '영화지' 표지석. 

금박산 자락에 자리한 추계리 239번지. 송병준의 99칸짜리 별저가 있던 자리다. 별저는 오래전 허물어지고 현재는 양지온누리 교회라는 종교시설로 탈바꿈된 상태다. 지난 11일 기자는 김장환 용인문화원 사무국장과 함께 이곳을 방문해 송병준의 흔적인 정원 연못이 아직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정원 연못은 교회로 들어가는 진입로 오른쪽에 있다. 도로변 가로수 중간쯤에 영화지(映華池, 화려함을 비추는 못)’라 새겨진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눈이 쌓여있고 잡풀과 갈대가 무성해, 표지석이 없었다면 연못임을 알아차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영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어 만들어진 시기는 불분명하다. 다만 송병준이 이곳에 별저를 지은 시기가 1905년경으로 알려져 있어 영화지 역시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 1. 서쪽 금박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끌어들이도록 조성한 취수구. 2. 취수구 바로 아래 조성된 작은 못. 3. 연못 가장자리 정교하게 쌓인 이중 석축.
▲ 1. 서쪽 금박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끌어들이도록 조성한 취수구. 2. 취수구 바로 아래 조성된 작은 못. 3. 연못 가장자리 정교하게 쌓인 이중 석축.

멀찌감치 서서 정원을 한눈에 담으니 영화지 형태가 다소 특이했다. 크고 작은 두 개의 타원형 연못이 합쳐진 ‘8 모습이다. 그리고 큰 못 가운데 둥근 섬을 조성한 원도형 구조를 갖췄다. 이는 민간정원에서 볼 수 있는 방지원도형(사각형 못에 원형의 섬을 만든 전통적 형태)의 구조와는 사뭇 다르다. 지형을 변형시키지 않고 생긴 그대로의 모습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면 연못 가장자리를 따라 이중으로 정교하게 쌓인 석축이 보인다. 세월의 무상함을 이기지 못해 무너져 내린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원형이 잘 보존된 상태다. 작은 연못의 석축을 따라 옛 벌저가 있던 서쪽 방향으로 올라가면 금박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끌어들이도록 설계된 취수구까지 식별이 가능하다.

▲ 1. 옛 사진에 담겨 있는 팔각정과 현재 그 터에 남아 있는 주춧돌. 2. 예전 모습의 아치형 다리는 사라지고 지금은 철제 다리가 놓여져 있다.
▲ 1. 옛 사진(왼쪽,용인문화원 제공)에 담겨 있는 팔각정과 현재 그 터에 남아 있는 주춧돌. 2. 큰 못 가운데 소나무가 심어진 둥근 섬으로 이어지는 아치형 다리는 사라지고, 지금은 철제 다리가 놓여져 있다.

표석 반대편인 북쪽에는 팔각정의 주춧돌이 남아 있다. 화강석을 깎아 만든 주춧돌이 모서리마다 2개씩 16개가 둥글게 배치돼 있고, 가운데 작은 주춧돌 2개가 세워져 있다. 큰 연못 안쪽에 조성된 섬의 윤곽도 뚜렷하다. 수령 100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되는 소나무는 이곳이 연못의 섬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용인문화원에는 이 같은 추정을 뒷받침하는 옛 사진이 있다. 사진에는 팔각정 쪽에서 소나무가 심어진 섬으로 연결되는 아치형 다리가 놓여있다. 나무로 만들어졌던 다리라 무너졌는지 지금은 철제 다리가 놓여 있다.

▲ 영화지에 자라고 있는 오래된 '금송'을 발견한 김장환 용인문화원 국장은 송병준이 심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나무의 가치를 설명하고 있다. 소나무의 잎은 2~3엽송인 반면 금송은 자라는 형태가 다르고 솔잎보다 넓고 두껍다.
▲ 영화지에 자라고 있는 오래된 '금송'을 발견한 김장환 용인문화원 국장은 송병준이 심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나무의 가치를 설명하고 있다. 소나무의 잎은 2~3엽송인 반면 금송은 자라는 형태가 다르고 솔잎보다 넓고 두껍다.

영화지를 감싸고 있는 숲을 둘러보면 소나무, 비자나무, 측백나무, 상수리나무 등 다양한 고목들이 있다. 그중 수령이 오래된 금송 한 그루가 발견돼 놀라움을 안겼다. 동행한 김 국장에 따르면 금송은 오직 일본 남부지방에서만 자라는 침엽수다. 일왕을 상징하기도 하며, 무령왕릉의 왕과 왕비를 모셨던 관재로 사용된 귀한 나무다. 현재 영화지 금송의 경우 어른 두 명이 팔을 벌려야 겨우 끌어안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상태다. 김 국장은 생장 속도가 느린 특성을 감안해 송병준이 심은 100년 넘은 금송일 것이라 추정했다.

김장환 국장은 국립공주박물관 앞뜰에 일제 강점기에 식재된 세 그루의 금송이 자라고 있다. 수령 80년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금송으로 알려졌는데, 아직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영화지의 금송이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송병준이 일본으로부터 친일 행각에 대한 감사의 선물로 받았거나 일본을 상징하는 이 나무를 직접 가져다 심었을 것으로 여겨진다고 했다.

영화지의 규모는 약 991로 꽤 큰 편이다. 현재 교회로 들어가는 입구 자리에 별저의 정문이 있었고, 주차장 자리가 안채였던 것을 감안하면, 영화지는 10만 평 규모였다는 별저의 위용을 한껏 높여주는 구실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친일 거두의 영광과 오욕을 비추었던 유일한 증거인 셈이다.

 

일진회의 본거지로 쓰인 별저...거대한 군사요새

▲ 현재는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고 방치되어 볼품없지만, 화려했던 옛 자취가 고스란히 남은 영화지 전경.

이토록 화려한 연못을 지어놓고 부귀영화를 누렸던 송병준. 그가 이곳에 별저를 지은 연유는 무엇일까.

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가 2008년 발간한 <발로 찾아가는 독립운동 유적지>를 살펴보면 대규모 친일조직을 만든 것과 관련이 있다.

송병준은 1891 4월까지 양지현감을 지내다 갑오개혁으로 체포령이 내려지자 1894년 일본으로 도피했다. 그곳에서 노다 헤이지로로 창씨개명 하고 일본인 행세를 하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1905년 통역관으로 조선에 돌아왔다. 그리고 일진회를 조직하고, 추계리에 대저택을 지었다.

목재는 광주군 도척면의 큰 한옥을 헐어 우마로 옮겼다 한다. 조선총독부 총독이나 이완용 등 친일파들도 이곳을 자주 찾아와 공사를 지원했다고 전해진다. 10만여 평의 부지에 금박산 능선을 따라 높은 담장을 쌓고 본채만 99칸으로 완성된 별저는 결국 일진회의 본거지가 됐다. <발로 찾아가는 독립운동 유적지>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설명돼 있다.

송병준이 일진회 고문의 직함을 갖고 별저에 머물 당시, 일진회원 400여 명과 일본 낭인 수십 명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이들은 용인과 여주를 잇는 신작로( 42번 국도)를 강제 개설하고 식료품 운반(일본으로 유출) 등 각종 이권에 개입하면서 때론 저항하는 주민이나 항일지사를 잡아다 고문을 자행하며 폭력을 행사했다. 별저 부근에서는 일진회원들과 의병과의 교전이 자주 일어나 다수가 사상했다. 일진회 회원 800여 명이 의병활동에 위협을 느껴 이곳으로 피신하기도 했으며, 그 후 50명의 일본군이 상주했다.”

 

▲ 현재 양지온누리 교회 입구에는 송병준 별저가 용인 지역 의병들의 공격대상이 되었음을 알려주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 현재 양지온누리 교회 입구에는 송병준 별저가 용인 지역 의병들의 공격대상이 되었음을 알려주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일진회원 800여 명, 일본군 50여 명이 상주할 정도였으니 거대한 군사요새였던 셈이다. 일진회는 일제로부터 막대한 활동자금을 지원받으며 온갖 매국 행각을 벌였다. 일본에 외교권 위임을 주장하는 '일진회 선언문'까지 발표했는데, 이는 일본으로 하여금 을사늑약을 강요케 하는 명분을 주었다.

송병준은 일본 우익 흑룡회와 손잡고 이완용, 이토 히로부미와 협력하면서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데 나섰다. 1907년 농상공부 대신으로 있으면서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어전회의에 칼을 차고 들어가 고종 황제를 협박하고 양위를 종용했다. 정미7조약 강제 체결에 앞장선 정미칠적의 우두머리도 그였다. 이 같은 공로로 1910년 일왕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고, 1920년 백작으로 승작 됐다.

1925년 송병준은 추계리 별저에서 사망했다. 죽은 후에도 추계리 뒷산에 묻혔으나 비난을 두려워한 후손들에 의해 파묘되어 흔적조차 없다. 그의 많은 재산과 백작 작위는 장남인 송종헌에게 물려졌다. 해방 후 송종헌은 별저와 전답을 처분해 서울로 피신했으나, 반민특위에 체포됐다.

 

친일행위 반면교사로 삼을 교육의 장으로

▲ 1. 송병준 선정비와 송종헌 백작 영세기념비. 2. 송종헌이 일제를 찬양하며 쓴 ‘팔굉일우’ 비석.
▲ 1. 구 용인문화원에 보관중인 송병준 선정비와 송종헌 백작 영세기념비. 2. 송종헌이 일제를 찬양하며 쓴 ‘팔굉일우’ 비석.

2008년에는 송병준과 관련된 석비가 양지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발견됐다. 송병준이 친군장위영영관이 되었던 시기(1891)에 제작된 선정비와 아들 송종헌이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물려받으며 만든 기념비다. 송종헌이 일제 침략전쟁을 찬양하며 팔굉일우라 쓴 비석도 함께 있었다. 돌에 새긴 악업의 기록인 이들 비석은 현재 구 용인문화원에 보관되며 역사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반면 별저 정원의 연못 영화지는 안타깝게도 표지석과 함께 방치된 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가고 있다. 더욱이 소유주가 온누리선교재단이기에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때문에 문화계는 부끄러운 역사 현장을 보존해 증거물로 삼길 바라고 있다.

김장환 국장은 볼품없이 퇴락해 버렸지만, 전체적인 구조가 크게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어 조선시대 민간정원으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특히 경기도에는 능원 외에 이렇다 할 민간정원이 없어 영화지는 민간정원을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송병준의 악행과 일제의 조선 침략을 증거하는 역사적 장소이기에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도 크다 시급히 복원하고 지방 문화재로 지정해 친일의 반면교사로 삼을 교육장으로 살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자랑스러운 역사만 미래유산 대상이 아니다. 민족의 아픈 역사도 우리의 유산이다나라를 팔아 온갖 권세를 누렸던 송병준의 악업을 엿볼 수 있었던 영화지. 별저에 이어 영화지마저 사라지기 전에 송병준의 악업을 후손에게 알려줄 방도를 강구해야 하지 않을까.

·사진=황혜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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