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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단체를 조명하다] 13. 무산아동의 배움터이자 평생교육의 산실 ‘안산 샘골강습소’

희망 꺾인 땅에... 혜성처럼 등장한 ‘상록수 주인공’ 최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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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최용신, 최용신 선생(왼쪽 첫 번째)이 샘골마을 부인 회원들과 함께 있는 모습, 최용신 선생의 유언장

■ 초근목피로 생명을 겨우 이어가다

1920년대 말 쓰나미처럼 몰아친 세계적인 대공황은 민중생존권을 크게 위협했다. 치솟는 물가는 한국인들을 죽음 직전까지 내몰았다. 만성적인 식량난에 직면하는 비참한 광경이 매일 연출됐다. 전통적인 농업국가에서 저급한 만주 좁쌀을 수입하는 한심한 일이 다반사였다. 초근목피로 겨우 목숨만 이어가는 현실이었다.

이마저 여의치 않은 사람들은 중국 동북지역(만주) 등지로 새로운 터전을 찾아 떠났다. 심지어 먹고살기 위해 자식을 팔아먹는 일조차 흔했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농촌계몽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배경은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최용신이다.

■ 신앙생활로 이타적인 삶의 가치를 인식하다

최용신은 1909년 8월12일 함남 덕원군 현면 두남리에서 태어났다. 선조들은 경주에서 대대로 살다가 14대조가 원산 섭섬으로 귀양 간 이후 이곳에 정착하게 됐다. 그는 언니 용순, 큰오빠 시풍, 작은오빠, 여동생 용경 등 3녀 2남 중 차녀였다.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아버지 등은 사립학교를 설립하거나 학무위원·교사 등으로 활동한 계몽운동가였다.

덕분에 그는 사립학교에 입학했다가 원산 루씨여학교로 전학했다. 루씨여학교를 졸업한 후 루씨여학교 고등과에 진학한 이듬해에는 루씨고등여학교로 승격됐다. 두호구락부에 가입해 2년 선배이자 고모인 최직순, 나이 어린 삼촌 최만희, 작은오빠와 사촌오빠 등과 활동했다. 재학 중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많은 서적을 탐독하는 등 지적 능력을 배양했다.

독실하고 참된 신앙생활은 그의 생애를 지탱하는 버팀목이었다. 후배인 전진은 “용신 언니는 남 앞에서 ‘내가 독실한 예수교 신자’다 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 성미였어요. 그러므로 그가 참으로 기독교정신 그대로 살아보겠다는 사람인 것을 알지 못하고 그저 열심인 사람인 줄로만 알기 쉬워요. 그는 세상 사람들이 겉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높고 깊은 견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에요”라고 회고했다.

수기 ‘새벽종소리에 따라 올리는 기도에서’는 신앙인으로서 진면목을 보여준다. 그는 목회자와 같은 금욕적인 생활로 충만했다. 전능하신 주에 대한 찬양과 동경은 자신을 지탱하고 이끌어가는 디딤돌이었다.

■ 농민들과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심하다

최용신은 1925년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웃에 사는 김학준과 약혼했다. 마을 교회를 다니면서 장차 농촌계몽운동에 같이 투신할 결심을 굳혔다. 약혼자는 적극적인 후원을 자처하는 등 용기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재학 중 주일학교나 야학 교사로 참여하는 등 주민들 계몽에도 앞장섰다.

1928년 3월 루씨고등여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후 교목인 전희균의 권유로 서울 협성여자신학교에 진학했다. 특히 황에스터 교수가 농촌계몽운동의 실천성을 강조하며 현장 체험을 적극 권장함에 따라 여름방학에 황해도 수안군 천곡면 용현리로 첫 봉사활동에 나섰다. 동료인 김노득 등과 함께한 현장실습은 좋은 반응을 얻었다.

신앙생활에선 조선남녀학생기독교청년회 하령회 준비와 회장협의회 개최를 위한 협성여자신학교 대표로 참가했다. 이듬해에는 강원 통천군 포항면 옥마동 옥명학원에서 실습 겸 계몽활동 병행에 앞장섰다. 현지 활동은 많은 갈등과 자책감을 불러일으켰다. 가난과 무지가 만연한 피폐한 생활상은 신학공부에만 매달릴 수 없게 만들었다.

■ 안산에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뿌리다

1931년 10월10일 경기 수원군 반월면 천곡(현 안산시 본오동)에 한국YWCA ‘농촌지도원’으로 파견됐다. 1934년 봄까지 2년6개월, 1934년 9월부터 이듬해 1월 사망하기 직전까지 열성을 다했다.

종래부터 운영하던 교회 부속 야학인 천곡강습소 인가와 교사 신축은 첫 번째 과업이었다. 현지에선 위생생활, 생활개선 등에 대해 핀잔을 주기도 했다. 이에 전혀 흔들리지 않고 유지들과 상의해 강습소 인가를 이듬해 5월에 받았다. 강습생이 110여명에 달해 오전·오후·야간반으로 나눴으나 지원자를 수용할 수 없었다. 교실에 들어오지 못한 이들은 돌아가지 않고 예배당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강습소 증축 계획은 1932년 8월 한가위를 맞아 학부형 위로회 개최로 이어졌다. 예배당 마당에 모인 주민들은 독창, 합창, 춤, 연극 등이 끝날 때마다 박수갈채로 응원했다. 마을 부인들은 그동안 저축한 300원 전액을 헌금할 의사를 밝혔다. 장소는 샘골 뒷동산 솔밭으로 소유주인 박용덕의 1천52평 기증으로 이루어졌다. 한 달 만에 정초식과 이듬해 1월 낙성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샘골강습소는 현지인에게 단순한 교육기관 차원을 넘어 자신들의 염원을 담은 상징물이 됐다.

농가 부업 증대 방안은 학교 주변에 뽕나무 심기와 누에치기 권장으로 이어졌다. 여기에서 나오는 수입 중 일부는 강습소 유지비나 농기구 구입 자금으로 충당됐다. 부녀회를 중심으로 위생생활, 환경개선, 저축장려 등을 위한 강연회도 열었다. 다양한 계몽활동은 부인들에게 사회적인 존재로서 스스로 가치를 인식하는 요인이었다.

■ 생을 다하는 순간에도 샘골강습소 유지를 부탁하다

지식과 학문을 충족하기 위한 1934년의 일본 유학은 현장에서 느낀 생각을 실천하는 문제와 직결됐다. 최용신은 고베여자신학교 사회사업학과에 청강생으로 등록해 교내 잡지에 기고문 투고와 봉사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큰오빠 시풍과 동경 용경과의 재회, 약혼자 김학준과의 만남은 상호 믿음과 애정을 확신하는 데 좋은 기회였으나 학업에 정진하던 중 별안간 각기병에 걸려 6개월 만에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9월에 귀국하는 즉시 샘골로 되돌아왔다. 스스로를 지탱하기조차 힘든 병든 몸임에도 이전보다 더욱 정진하는 자세로 일관했다. 한국YWCA의 보조금 지원 중단 선언에 각계 지원을 호소했으나 대답 없는 메아리뿐이었다. 피로와 정신적인 고통으로 수원도립병원에 입원해 여러 차례 수술에도 별다른 차도가 없었다. 최용신은 1935년 1월23일 새벽에 가족과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원한 안식처를 찾아 떠났다.

그는 유언을 남겼다. ①나는 갈지라도 사랑하는 천곡강습소를 영원히 경영하여 주십시오 ②김군과 약혼한 후 십년 되는 금년 사월부터 민족을 위하여 사업을 같이하기로 하였는데 살아나지 못하고 죽으면 어찌하나, ③샘골 여러 형제를 두고 어찌 가나 ④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전로를 어찌하나.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전로를 어찌하나 ⑤어머님을 두고가매 몹시 죄송하다 ⑥내가 위독하다고 각처에 전보하지 마라 ⑦유골을 천곡강습소 부근에 묻어 주오.

샘골강습소는 그의 분신과 같은 너무나 소중한 보배였으리라. 사후에 심훈은 ‘상록수’라는 소설을 통해 그의 인생을 새롭게 조명했다. 유달영은 ‘농촌계몽의 선구여성 최용신소전’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삶에 대한 의미를 부여했다. 1964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에서는 용신봉사상을 제정해 해마다 시상했다. 활동 무대 인근에 상록수역, 상록수공원, 최용신기념관 등이 조성돼 다문화시대에 부응한 ‘상록수정신’을 일깨우고 있다.

글=김형목 (사)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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