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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단체를 조명하다] 2. 13도 창의대진소와 서울진공작전

강원도 원주 중심 활동하던 이은찬·이구채...경북서 은거중인 이인영 ‘의병장’으로 추대
1907년 관동창의군으로 조직 확대·정비, 이틀간 전투 끝... 사상자만 200~300명
독자적인 항일전 활약상 전세계에 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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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서울진공작전을 펼친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13도 창의군 탑. 작전은 실패했지만 의병장 허위의 호를 딴 진격로는 남았다

각국 영사관에 日 불의 성토… 서울진공작전 펼치다

을사늑약 이후 우리나라는 식민지화에 대한 위기의식이 어느 때보다 팽배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일본은 헤이그특사 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마지막 보류인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수도방위를 책임진 시위대는 이를 거부하고 치열한 ‘서울시가전’을 전개하는 등 ‘구국간성’으로서 임무에 충실했다. 이에 지방의 진위대 병사들도 무기를 탈취한 후 의병진에 합류, 국권 수호에 대한 자신감은 높아지기도 했다. 그런 만큼 투쟁역량 강화와 더불어 고립·분산적인 항일투쟁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지는 분위기였다. 평안도 의병은 황해도 의병장 박기섭, 황해도 의병은 장단 의병장 김수민과 연락하고, 김수민은 철원 의병장 김규식, 김규식은 적성•마전 의병장 허위, 허위는 지평•가평 등지 의병장 이인영, 이인영은 제천 등지 이강년과 원주 등지 민긍호 등과 상통하며 같이 모의하는 상황이었다. 통일적인 체제를 갖춘 의병진인 13도창의대진소(이하 창의대진소) 결성은 곧바로 시대적인 소명임을 의미한다. 물론 과정은 원만하지 않았으나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엄중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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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총대장 이인영, 군사장 허위(초상화)

■ 전국적인 의병부대, 13도 창의대진소의 결성

강원도 원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은찬과 이구채는 이를 추진한 중심적인 인물이었다. 이들은 경북 문경에 은거 중인 이인영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기 위해 찾아갔다. 부친 간병을 이유로 이를 거절하던 이인영은 마침내 원주로 이동해 의병원수부를 설치한 후 의병 모집에 착수했다. 1907년 11월 하순에는 관동창의군으로 조직 확대와 더불어 굳센 항일전을 전개할 수 있도록 조직을 정비했다.

창의대장 이인영은 원주진위대에 경고장을 보내는 한편 ‘해외 동포에게 보내는 격문’을 통해 의병전쟁의 정당성을 밝혔다. 관동창의군은 연합의진 결성을 위해 근거지를 원주에서 경기도 지평으로 옮겼다. 이곳을 중심으로 일본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이는 동시에 서울을 공격하기 위한 군사력 보강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근거지를 서울 근교인 양주로 이동하자 이때 의병장 허위를 비롯해 각지의 의병진이 이곳으로 집결했다.

이듬해 1월에는 지도부를 다음과 같이 재정비했다. 총대장은 이인영, 군사장은 허위이고 △관동창의대장: 민긍호 △호서창의대장: 이강년 △교남창의대장: 박정빈 △진동창의대장: 권중희 △관서창의대장: 방인관 △관북창의대장: 정봉준 등이다.

이 같은 창의대진소의 중요 기반은 강원도의 이인영 계열, 경기도와 황해도의 허위 계열, 충청도 이강년 계열 등으로 볼 수 있다. 한반도 중부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의병진 연합부대로서의 성격도 지닌다. 주목할 부분은 전국적인 연합의진을 표명한 사실로, 그 의미는 자못 크다.

■ 서울진공작전으로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성을 알리다

창의대진소는 양주를 근거지로 1908년 2월 초순까지 서울 근교를 무대로 두드러진 활약상을 벌였다. 삼산전투와 마전전투는 일본군의 싸운 대표적인 경우였다. 서울 공격을 위해 창의대진소는 군수품과 군자금을 조달하는 가운데 원주와 서울에 주둔한 일본군 공격으로 이틀 동안이나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여기에서 의병 사상자가 200~300명이나 나올 정도로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다만 전투를 통해 전술을 발전시키고 화력을 보완하는 등 의병진 사기가 높아져, 과감하게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하는 원동력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의진끼리는 서로 연락하며 성원을 받았다. 각 도에 격문을 전하니 북을 치고 일어나는 원근의 응모자가 주야 끊이지 않고 모여들어 모두 1만여 명이나 됐다. 그리하여 서울로 진군, 통감부를 격파해서 협약(을사늑약과 정미칠조약)을 취소시키고 국권을 회복코자 했다. 이인영은 각 도 의병으로 하여금 일제히 진군하도록 촉구하고 몸소 300명을 이끌어 동대문 밖 30리에 이르렀다. 하지만 각 군이 이르지 않았는데 일본군이 먼저 쳐들어 와 서로 분전했으나 적과 대적할 수 없어 퇴군하고 말았다. 이는 전국에서 결집한 의병부대로 서로 연락이나 연합작전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군사장 허위가 이끄는 선발대 300여 명은 증원군이 도착하기 이전에 일본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퇴각하고 말았다. 군사장은 이미 군비를 신속히 정돈해 철통같이 준비, 한 방울의 물도 샐 틈이 없었다. 이에 모든 의진에 전령해 일제히 진군을 재촉해서 동대문 외곽으로 나아가니 대부대는 장사(長蛇)의 기세로 천천히 진격하게 했다.

하지만 전군이 온다는 시기를 어기고 일본군이 졸지에 공격하는지라. 여러 시간을 격렬히 사격하다가 후원군이 이르지 않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총대장 이인영은 부친상을 당함으로 서울진공작전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을 맞았다. 이로 인해 각지에 결집한 의병부대는 원래의 근거지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하지만 의병부대는 조직을 재정비한 후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4월에 허위는 임진강과 강화도 등지 서해안 일대에 활약 중인 의병부대에 항일투쟁 촉구하는 통문을 보냈다. 제2의 진공작전은 증강된 일제의 압도적인 화력을 감당할 수 없어 결국 계획에 그치고 말았다.

■ 왜 서울진공작전을 감행했나

창의대진소가 서울진공작전에 매진한 목적은 무엇인가. 목적은 서울로 들어가 통감부를 타격하고 성하(城下)의 맹세를 이루며 종래의 이른바 신협약 등을 파기해 대대적 활동을 기도함이라. 우선 신임하는 인물을 서울에 잠입시켜 각국 영사관을 순방하고 통문 한 통씩을 전달하니 그 개략적인 의도는 일본의 불의를 성토하고 한국의 불행한 상황을 상세히 진술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의병의 순수한 애국적인 혈단(血團)이니 열강도 이를 국제공법상의 전쟁단체로 인정해줄 것과 정의와 인도를 주장하는 국가의 응원을 호소하려는 목적이었다.

이들은 서울로 진격해 통감부를 점령한 후 외교적 담판을 벌이되 한국에 주재 중인 구미열강의 외교적 지원을 기대했다. 또 이들은 ‘오적칠간(五賊七奸)을 처단하고 의병 중에서 인물을 골라 정부를 조직할 의도였다. 즉 서울진격작전은 일제 통감부의 타격, 일제와 맺은 조약의 파기, 친일정부의 축출과 의병 주도의 신정부 조직 등을 목표로 했다. 이들은 열강의 지원을 받아 국제법상 유리한 입장에서 국권회복 문제를 일제 통감부와 담판하려는 의도로 나섰던 셈이다.

■ 창의대진소를 통해 본 역사적 의의

창의대진소의 서울진공작전은 실패했으나 의병전쟁사에 차지하는 위상은 상당히 크다.

우선 최초로 편성된 전국적인 연합의병부대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당시 각지의 의병부대는 독자적인 항일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분산적인 활동은 국권을 수호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연합전선 구축과 연계는 이후 의병전쟁으로 승화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또 통감부와 외교적 담판을 위한 군사활동이라는 점이다. 무력항쟁에 중점을 둔 양반 유생들과 달리 서울진공작전은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통문을 보내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상을 호소했다. 아울러 자유·정의·평화를 지키기 위한 한국인의 활약상을 세계에 알렸다.

글=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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