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도박 사이트

[광복 76주년, 우리가 몰랐던 친일 잔재 알리기] 獨, 끊임없는 사과·배상 노력

전범국가였던 독일, 전후 철저한 탈 나치화 작업
자기반성 힘써 과거사 청산 모범국으로 ‘日과 대조’
국외 식민잔재 청산작업은 어떻게 진행됐나

카지노 도박 사이트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의 주역들은 모두 지하로 숨어들었다. 가장 악명 높았던 아이히만(A. Eichmann)도 도주했다. 그는 이름을 리카르도 클로멘트로 속이고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 유대인의 도살자들을 찾아 나선 이스라엘의 비밀정보기관 모사드는 끈질기게 그를 추적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인근에 숨어 살던 아이히만은 1960년 5월 체포돼 비밀리에 이스라엘로 끌려와 법정에 섰다. 7개월간 계속된 이 세기의 재판에서 아이히만은 인류의 가치에 반하는 반인륜 범죄자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이듬해인 1962년 6월에 형이 집행됐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아이히만은 자신은 상부의 명령에 따른 충실한 집행자였을 뿐이니 무죄라 주장했다. 실제로 선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그의 외모에서 홀로코스트가 상상되지 않았다. 그러나 재판과정을 지켜본 독일계 미국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 Arendt)는 ‘악의 평범성’을 거론하며 아이히만의 죄는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그는 아주 근면한 인간이지만 이런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유죄인 명백한 이유는 아무 생각이 없는 바보였기 때문이다”며 아무리 상부의 지시라도 반인륜의 명령에 그대로 생각 없이 따른 죄는 씻을 수 없는 범죄라고 지적했다.

그의 생각 없는 행동이 독일의 나치 치하에서 유대인 600만명을 죽음으로 몰고 갔고 이스라엘은 끝까지 추적해 단죄한 것이다. 이처럼 생각 없이 식민치하에서 적국에 이롭게 행동함으로써 제 민족에게는 씻을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른 추악한 범죄자들에 대한 과거사 청산 작업은 식민지배를 겪은 나라들 모두의 과제였다.

주변국 공감을 얻는 과거사 청산 독일

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가였던 독일은 전후 가장 먼저 나치당을 해체했고 뉘른베르크 법정에 자살한 히틀러를 제외한 24명의 주요 지도자들을 반평화적 범죄(Crime against peace)를 위한 공모죄, 침략전쟁을 계획하고 실행한 죄, 전쟁법 위반 그리고 반인륜적 범죄의 혐의로 재판에 처했다. 300명 이상의 증언자들이 나와 그들의 범죄행적을 고발했다. 재판 중에 자살과 정신착란을 일으킨 2명을 제외하고 12명은 교수형, 3명은 종신형, 4명에게는 10년에서 20년에 이르는 징역형을 선고했고 3명만이 무죄 석방됐다. 석방된 이들도 후일 서독정부의 사법부에 의해 모두 징역형 처분을 받았다. 여기까지는 일본의 전범 7명을 사형시킨 동경재판과 비슷하지만, 이후의 과거사에 대한 청산 과제는 확연히 달랐다.

일본은 동경재판에서 사형당한 도조 히데키 같은 일급전범을 추모하고 패전이 아닌 종전이었다며 현행 평화헌법을 개정해 군대를 둘 수 있는 보통국가를 획책하고 있는데 비해, 독일은 철저한 자기반성을 통한 청산작업에 임했다.

통독 이전의 분단국가 시절 동독에서는 나치와 관련된 인물들 12만명을 수용소에 가뒀다. 이를 피해 많은 사람이 서독으로 이주했다. 구금된 사람들 대부분은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가 없었다. 상대적으로 서독정부는 사법적 판단에 맡기는 등 온건 정책을 펼쳤고 청산문제는 동독의 이념적 공격무기가 되기도 했다. 실제로 서독정부는 뉘른베르크재판으로 나치 청산이 됐으며 나치당원이었던 일반인들에게는 단순가담자로 판정해 대부분 면죄부를 줬다.

이런 독일이 과거사 청산의 모범국가로 인식되고 있는 이유는 주변국들과 유대인들에 대한 끊임없는 사과와 적극적인 배상노력 때문이다. 1970년 빌리 브란트(W. Brandt) 서독총리는 폴란드를 방문해 유대인 게토(집단 거주지) 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홀로코스트에 대해 사죄했다. 전 세계의 찬사를 받은 이 사건은 지금도 독일의 과거사 청산의 상징적 사진으로 남아 있다. 브란트 이후 서독의 총리들은 재임 중에 반드시 유태인 관련 지역에서 무릎을 꿇었다. 사과는 피해자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하는 것이라며 멈추지 않았다. 아울러 2차 대전 당시 자신들이 침략한 나라들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최선을 다해서 지원해 주었다. 2010년의 그리스가 재정위기에 빠졌을 때도 독일은 아낌없이 그리스를 후원해 줬다. 오늘 유럽연합(EU)의 지도적 국가로 독일이 부상한 데에는 그들의 진정성이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생각 없는 자들에 대한 응징 프랑스

과거사 청산에 있어서 프랑스의 경우는 가장 역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식민잔재 청산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등장하는 프랑스는 2차 대전시 독일에게 4년 동안 나라를 잃었었다. 프랑스 남부에 나치의 괴뢰정부인 비시정부가 설립되고 1차 대전의 프랑스 영웅인 페탱(H. P. Petain)은 총리가 돼 친나치 정책을 펼쳤다. 파리를 되찾은 드골(C. de Gaulle)의 자유프랑스 정부는 생각 없이 행동한 나치 협력자들을 정리할 것을 천명했다. 비시정부의 고위 공직자들과 추종자들 그리고 나치의 승리를 위해 지원한 모든 매국노가 대상이었다. 페탱 처벌에 대한 동정론도 있었지만, 사법부는 냉정하게 페탱에 사형판결을 내렸고 대통령 드골은 무기형으로 감형해 90살이 넘은 그를 대서양 한가운데의 요새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다.

“국가가 애국적 국민들에게는 상을 주고 민족 배반자나 범죄자에게는 벌을 주어야만 비로소 국민들을 단결시킬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의 드골은 철저한 청산작업에 나섰다. 약 35만명이 사법대상이 됐고 그 중 11만8천명이 재판에 회부돼 6천763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3만8천명이 유ㆍ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사형판결을 받은 자 중에 1천500명은 형이 집행됐다. 중앙에서 재판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지역에서는 약식으로 처형된 자가 9천명(일설에는 3~4만명)이고 여성 부역자 2만여명은 삭발당한 채 마을에서 추방당했다. 그리고 약 5만여명에게는 ‘비국민 판정’을 내리는 시민권을 박탈, 공직 입문과 일정한 정도의 재산취득을 막았다.

프랑스가 식민잔재 청산에 가장 주목한 자들은 지식인과 종교인, 언론인들이었다. 이들이 다른 분야의 부역자들보다 더 엄중하게 처벌받았던 것은 그들의 말과 글이 부역의 증거자료로 남아 있기도 했지만 자신의 잘못된 생각이나 사상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어서 그 역할과 책임에 엄격한 잣대를 갖다 댄 것이다. 특히 언론인에 대한 처벌이 가장 엄격해 일간지 ‘오주르디’의 편집인 쉬아레즈, 일간 ‘누보 땅’의 발행인 쟌 뤼세르(신문협회의 회장), 수필가 겸 문학비평가 브라질라쉬 등은 나치 치하에서 신문을 발행하며 부역을 한 죄로 모두 사형과 재산몰수형에 처했고, ‘르 마뗑’지의 논설위원 스테판 로잔느는 20년의 독방구금형과 재산몰수를 당했다. 자진 폐간했던 ‘르 피가로’지 등은 복간되어 영광을 회복했다.

엄격한 청산작업에 대해 작가인 모리악(F. Mauriac)과 카뮈(A. Camus) 간에는 대논쟁이 전개됐는데, 톨레랑스(관용)의 정신을 강조하며 자비와 화합을 주장하는 모리악에 대해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던 알베르트 카뮈는 정의를 위한 단죄가 진정한 톨레랑스라고 주장했다. 너무 많은 프랑스의 인재들을 잃는 것 아니냐는 주변국들의 우려에 드골은 프랑스는 민족정기를 택했다고 단호하게 일축했다. 아울러 이들 부역자에게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래서 1998년 프랑스 사회당 정부에서 예산장관까지 지낸 거물 정치인인 모리스 파퐁이 과거 비시정부에서 유대인을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는 데에 협조한 이유로 체포돼 10년형을 받았다. 그의 나이 90살이었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이 재판을 두고 프랑스의 ‘르 몽드’지에 한 중학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적으론 안 된 일이지만 역사를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지금도 프랑스에서는 과거 생각 없이 민족을 배반한 자에 대해서는 공소시효 없이 철저히 응징하고 있다.

이처럼 과거 나치의 지배를 받았던 유럽 대부분 국가는 과거사 청산을 위해 비슷한 과정과 결과를 냈다. 벨기에, 네덜란드, 노르웨이 등은 오히려 프랑스보다 더 높은 비율로 부역 행위자들을 심판했으며 많은 국가는 소급입법을 만들어 부역자를 기소했고, 폐지했던 사형제도를 부활해 처벌하는 등 과거사를 청산했다.

그러나 식민잔재 청산에 나선 국가들 모두가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른 것은 아니다. 스페인의 과거사는 ‘망각’이라는 이름으로 철저하게 가려졌다. 가장 철저한 청산작업을 단행한 프랑스에서조차 적법성의 애매함 등으로 드골의 정치재판이었다는 비난이 나왔다. 더욱이 자신들이 행했던 아시아 아프리카의 식민지 통치행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함구했다. 독일도 나치당원이 770만명에 이르렀지만 대부분 사면됐으며 유대인 학살에만 집중함으로써 롬족(집시), 슬라브인, 공산주의자, 성소수자, 장애인 등에 가했던 폭력은 역사의 이면에 가려져 버렸다.

또한 식민지배를 받았던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도 완전한 청산을 한 나라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상대적으로 중국과 북한이 부역자들에 대한 청산을 진행했지만 그들 역시 정부수립 초기에는 부역자들의 능력이 필요했고 또 적절히 활용했었다.

식민잔재는 아니지만, 과거사 청산의 모범국가는 남아공이다. 300년 아파르트헤이트(흑백분리정책)에 희생된 흑인들은 1994년 만델라(N. Mandela) 대통령의 취임으로 청산작업이 활기를 띠었다. 만델라는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통해서 철저한 진상규명을 하되 용서를 비는 가해자를 사면하는 방식을 택했다. ‘용서는 하되 망각하지는 않는다’는 정신은 전세계 식민잔재 청산 작업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임형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 경기일보(committingcarbicide.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