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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양은 칼럼] 나의 금연기

임양은 논설위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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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넘게 인연을 맺어 왔던 담배와 작별한지 어언 3년이 넘었다. 그 날을 2010년 8월16일로 기억한다. 비록 담배를 끊었지만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결코 아니다. 끽연을 굳이 혐오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랑이 못 되는 것처럼 어려운 것도 아니다. 무슨 건강을 생각해서 담배를 멀리한 것은 아니다. 귀찮아서 피우지 않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방이 깨끗해졌다. 담배를 태우면 아무래도 방이 지저분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 보다는 담배 피우는 것에 하도 제약이 많아 아예 끊어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그런 제약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예를 들어 끽연시대엔 기차 차량 중 금연차량을 한량 두었었다. 혐연시대인 지금은 흡연차량을 한량 둘만한데도 없다.

흡연 규제가 귀찮아서 끊어

흡연차량은 커녕 차량끼리 연결된 복도에서조차 담배가 금지된 전 차량 금연 시설이다. 그런다고 코레일 사장한테 흡연권을 보장하라는 진정서를 내봐야 휴지조각 밖에 안 된다. 불과 10여년 전후다. 끽연권 우선의 대세에서 혐연권 우선의 대세로 전환한 사회 변화는 괄목할만한 현상이다.

흔히 말하기를 담배를 끊기 위해 이를 악물고 참는다고 한다. 그래서는 실패하기 쉽다. 이를 악물만큼 괴로워서는 그 많은 세월을 참을 수 없다. 또 어떤 이는 비법이라며 담배 생각이 나면 배가 빵빵 하도록 물을 마시라고 들려 주기도 했다. 하지만 억지로 물 마실 고생을 할 필요가 없다. 담배가 뭔가, 습관성 중독성은 있지만 꼭 필요한 절대식품은 아닌 기호품이다.

언제든 입에 댈 수 있으나 한번 참아 본다는 심정으로 사흘 일주일 1개월이 지나면 지난 세월이 아까워 입에 대지 않게 된다. 즉 어떤 강박 관념보다 유연하게 출발하는 게 효과적이다. 금연을 비장한 결의로 시작하면 오히려 부담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금연은 별로 어려운 게 아니라는 인식을 가져야 금연의 노력이 수월하다.

50년이면 긴 세월이다. 긴 세월동안 담배를 피워 사연도 적잖다. 젊었을 적에 한번은 버스 안에서 담배를 태우다가 남의 옷을 태운 일이 있다. 그 땐 버스 좌석 등에 재떨이가 붙어 있었다. 어른들 앞에선 담배 피우는 것을 조심했던 게 이제 나이 들어 자신이 어른이 됐다. 어른 앞에서 담배 안 피우는 것은 우리 고유의 장죽문화에 유래한다.

권연 담배가 발달했던 서구나 일본은 아버지 앞에서 아들이 담배를 예사로 피운다. 사대부의 길다란 장죽은 사치와 권위였다. 그리고 과학이었다. 장죽을 통해 니코틴을 여과 시켰던 것이다. 담배대를 입에 문 스스로는 담배를 대에 담을 수 없을 만큼 길어 몸종이 담고 다 피운 재를 놋재떨이에 탕탕 소리내며 털어내는 것은 일종의 폼이었다. 그런데 부자가 마주 앉아서 그런 거드름을 피울 순 없지 않은가, 그래서 어른 앞에선 담배를 금기시 했던 것이다.

우리 나라 담배 역사에서 애연가를 말하면 이미 작고한 원로 시인 공초(空超) 오상순(吳相洵)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평생을 독신으로 일관한 그는 ‘담배와 혼인했다’할 정도로 담배를 즐겼다. 왜정 항거로 서정시에 사상성을 불어넣곤 하면서 방랑과 참선 등 기행을 일삼은 공초는 ‘명정, 사십년’으로 유명했던 두주불사의 원로 시인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선생과 당대의 쌍벽을 이뤘다. 그러나 이젠 시대가 다르다.

담배 끊는 일 생각보다 쉬워

그 때엔 시대적 배경이 그러한 기행 역시 풍류와 낭만으로 통했으나 지금은 안통한다. 끽연세대에서 혐연세대로 가는 시류도 이 같은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금연을 굳이 권고할 생각은 없다. 혐연이 권리인 것과 마찬가지로 애연도 권리라고 여긴다. 본인이 알아서 선택할 노릇이다. 그래서 혹시 금연으로 변절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별다른 비법이나 왕도는 없고 방법은 간단하다. 요란 떨 것이 없다. 이미 말한 것처럼 안 피우면 된다는 마음으로 가볍게 시작하는 것이다.

임양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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