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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종교] 경직성은 영성에서 멀다

양두영 천주교 수원교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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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인을 포함해 종교인들이 도덕이나 윤리규범 혹은 자기네 종교의 규율이나 전통에 집착하다 오히려 거기에 갇혀 버리는 경우들을 간혹 본다. 그러나 종교의 본질은 도덕이나 율법이 아니다. 종교의 본질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2)라고 하신 것처럼 ‘사람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에 있다. ‘믿음’을 통해 ‘자유’와 ‘책임’의 삶을 당당히 살아가게 해주는 것에 있다. 신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 우리가 신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것,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 우리 안에 신적인 가능성이 있다는 것, 우리가 정말 사랑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것, 그러한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에 있다. ‘세상은 주지 못하는 것’을 ‘증거’하는 삶에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적지 않은 종교인이, 또 자기반성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한국 천주교 역시 이따금 자기 안에 갇힌 모습을 본다. 사람들과 직접 부대끼는 ‘현장’에서는 예수의 핵심 가르침은 놓친 채 그저 ‘희생해야 한다’, ‘순교해야 한다’는 “~해야 한다”에 집착하다가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있고 중앙 부처에서는 종교 밖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모른 채 ‘우물 안’에만 안주하고 있는 경우도 있으며 또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휩쓸려 버릴까 봐 두려워하며 그저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경우도 본다. 물론 필자 역시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롭지 않다.

 

필자를 포함해 종교인들이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경직성이다. 사실 ‘여정을 떠나지 않는 이’, ‘이미 답을 가진 이’, 즉 ‘답정너’는 구도자일 수 없다. 구도자는 말 그대로 길을 찾는 사람이지 길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다. 그 누구도 신을, 진리를, 답을 독점할 수 없다. 묻지 않는 사람, 찾지 않는 사람,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 여정을 떠나지 않는 사람은 구도자일 수 없다.

 

그 점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연인들은 상대방을 사랑함으로 인해 자신이 ‘변화되는 것’, 즉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받고 ‘물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걸 두려워하는 이는 사랑을 할 수 없다. 종교가 정말 세상을 사랑하고, 신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고 싶다면 세상의 영향을 받을까 봐 두려워 문을 닫아 걸고 자기들만의 세상을 고수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고립과 도태를 자초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종교가 사회를 위해 해야 할 기본 역할도 못하게 되는 길이다. 이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 다 나온 이야기다.

 

사실 정말로 신을 믿는 이는 신이 ‘내가 모르는 방식으로도 활동’하신다는 것을 알기에 미지의 도전을 오히려 설렌 모험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늘 신과 함께 새로운 꿈을 꾼다. 그렇기에 그는 언제든 구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여정을 떠날 준비가 돼 있다. 치기 어린 마음으로 새것만 좇거나 게으름에 빠져 옛것에만 안주하는 경직성에 사로잡히지 않고 생동감 있게 옛것과 새것을 오가며 ‘살아있는 삶’을 산다. 그렇게 ‘생명력’을 전하는 참된 삶을 산다.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그의 나이 일흔다섯 살이었다.”(창세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