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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종 칼럼] 문명의 대척점에 서 있는 ‘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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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종 한국테러학회장·호원대 명예교수

지난 두 달여간 뉴스를 볼 때마다 끔찍한 상황에 가슴 졸이고 더 큰일이 벌어질까 무서웠던 것은 어쩌면 가자지구의 참극을 우리 역사에 포개어 봤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6·25전쟁을 겪은 세대와 이후 세대의 안보 관점은 똑같을 수 없지만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전쟁이 모두에게 주는 느낌은 처참한 비극이었다.

 

이번 전쟁은 하마스의 기습공격이 불을 댕겼다. 1천400명이 넘는 이스라엘인을 닥치는 대로 살상하고 납치한 행위는 인도주의뿐 아니라 국제법에 위배되는 심각한 테러이며, 전쟁범죄다. 그들의 행위가 가자지구의 인도적 위기를 불러왔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자위권은 당연히 지지돼야 한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전쟁의 첫 번째 희생자는 ‘무고한 민간인’이다. 그런 점에서 ‘피의 보복’에 나선 이스라엘의 무차별 공습과 포격은 정당방위 수준을 넘어선 또 다른 전쟁범죄일 뿐이다. 양쪽 모두가 피해자이지만 팔레스타인 쪽 민간인의 희생과 참상은 훨씬 더 비극적이다.

 

그래서 하마스에 맞선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봉쇄 폭격은 이른바 침략군에 맞서 항전하는 도덕적 우위를 가진 쪽이라는 명분마저 찾지 못하고 있다. 억울할 수 있지만 폭력과 폭력이 만났을 때 ‘가치’는 실종되고 ‘관성’만 남기 때문이다.

 

강대국 미국에 대한 정치 비판가로 유명한 놈 촘스키가 말한 강자의 테러를 비판하는 유명한 해적 이야기가 있다. 알렉산더 대왕이 잡혀온 해적에게 이렇게 묻는다. “넌 어찌하여 감히 바다를 어지럽히느뇨?”

 

이에 해적의 답변은 “그러는 당신은 어찌하여 감히 온 세상을 어지럽히는 건가요? 전 그저 자그마한 배 한 척으로 그 짓을 하기 때문에 도둑놈 소릴 듣는 것이고, 당신은 거대한 함대를 이끌고 그 짓을 하기 때문에 제왕이라 불리는 것뿐이외다.” 해적의 대답은 촌철살인이었다.

 

한마디로 지금 서방국가들에서 사용되는 테러리즘의 개념은 정의의 본질에서 본다면 ‘편향된 이중 잣대’에 불과하다는 게 그의 견해다. 사실 우리가 테러리즘과 관련해 놓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일반적으로 테러리즘이라고 하면 중동에서 일어나는 극단주의 테러단체의 무차별적 테러만을 떠올리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정의를 수호하기 위한 ‘하얀 전쟁’이든지, 혹은 ‘테러 행위를 예방하기 위한 합법적 선제공격’이든지 아무리 좋은 명분이더라도 강대국이 약소국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할 목적으로 국가의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도 또 다른 형태의 테러라고 부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미국과 서방이라는 ‘제왕’의 테러리즘은 정의를 회복하기 위한 ‘정벌’ 내지 ‘징벌’이 되고 그 외 나라 혹은 단체가 행하는 ‘해적’ 행위는 테러리즘으로 규정돼 주살(誅殺)해야 할 ‘악’이 된다는 촘스키의 비유적 일갈은 정의를 강자의 이익으로만 봐야 한다는 기존 가치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테러리즘의 개념이 제왕의 폭력보다는 단순히 해적의 좀도둑을 기준으로만 고착돼 버린다면 지구촌 곳곳의 평화와 인권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관점이다.

 

따라서 하마스의 행위가 가자지구의 인도적 위기를 불러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스라엘의 ‘도덕적 우위’ 역시 지켜져야 한다. 지금 당장 시급한 것은 국제질서와 정치적 해법보다 더 이상의 무고한 인명 피해를 막는 일이다. 그들의 서로 다른 종교의 ‘계약과 율법’도 결코 평화와 사랑이 아닌, 폭력과 살육이 되는 잘못은 없어야 한다.

 

지난 두 달여간 필자가 바라본 이번 전쟁의 느낌은 문명의 대척점에 서 있는 야만뿐이었다. 그러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서둘러 귀국한 이스라엘인들의 정신은 적이 지척임에도 여전히 양치기 소년의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