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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6. 화성 엄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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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시에 보석처럼 단단한 미술관이 있다. 화성시 봉담읍 오궁길 37 산자락에 안긴 엄미술관(관장 진희숙)은 조각의 보물섬이다. 미술관 이름 ‘엄’은 한국의 1세대 조각가 엄태정 서울대 명예교수를 가리킨다. 엄미술관은 엄 작가의 개인 작업실을 개조해 2016년 개관한 사립미술관이다. 진희숙 관장은 엄 교수가 창작한 작품을 전시하고 현재도 창작에 전념하는 이곳을 “작가의 고향 같은 곳”이라고 소개한다. 건축가 고(故) 김성국 교수가 설계한 진회색의 미술관은 얼핏 연립주택처럼 보인다. 하지만 미술관에 들어서면 전혀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화성시 봉담읍에 위치한 엄미술관은 엄태정 조각가의 개인 작업실을 개조해 개관한 사립 미술관이다. 차한잔과 함께 고즈넉한 풍경을 즐길 수 있다. 윤원규기자

 

■ 세계적 조각가의 창작실에 세운 미술관

 

미술관 안은 기둥과 들보로 지붕을 떠받친 한옥처럼 따사롭고 아늑하다. 실용과 멋스러움이 어우러진 사색의 공간에 평생을 조각에 몰두한 엄 조각가의 청동조각과 회화작품이 숲속의 나무와 돌처럼 자연스레 어우러져 있다. 평생 조각에 매달려온 노대가의 회화도 예사롭지 않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 벽면에 전시한 커다란 하트 모양의 작품부터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얼마나 손목을 움직여 그려낸 것일까. 작품에 가까이 다가서서 종이와 먹이 만난 표면을 살펴본다. 수만 번의 치밀하고 섬세한 붓놀림으로 완성했을 작품은 놀랍게도 차분하고 편안하다. 오롯한 정성과 연륜이 묻어 나는 대가의 작품과 마주하면 자신도 몰래 옷깃을 여미게 된다. “선생님은 지금도 무거운 쇠를 용접하고 섬세하게 붓질하며 하루를 채우고 있습니다.” 진 관장이 들려주는 엄 작가의 일상은 구도자의 그것이다.

 

뒷뜰에서는 엄태정 조각가의 조각을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윤원규기자

 

아흔을 바라보는 노작가를 청년처럼 움직이게 하는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엄 작가의 작품은 관람객의 들뜬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힘을 가졌다. 2층 전시실에서 만난 엄 작가의 작품들은 메시지가 구도자의 기도처럼 간결하고 또렷하다. 대가의 연륜과 깨달음이 빚어낸 작품을 오래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영혼의 충만함을 느낄 수 있다. 엄미술관의 설립 의도를 진 관장은 이렇게 들려준다.

 

“오랫동안 작가가 작품을 위해 애쓴 공간으로 창작의 예술적 삶이 생생하게 스며 있어 미술관의 가치가 있다.” 엄 작가의 아내로서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를 곁에서 도와야겠다는 마음에서 미술관을 시작한 진 관장이 가장 고민하고 정성을 쏟은 것은 지역민들에게 다가가는 미술관이었다. 그의 노력으로 이웃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미술관에 들어설 만큼 문턱이 낮아졌다. 다양한 기획과 방식으로 이웃을 미술관으로 초대하고 있다.

 

2층 전시실에서는 해외 전시를 마친 엄 조각가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윤원규기자

 

■ 치유하는 힘을 가진 조각

 

엄 작가는 ‘현대 조각의 아버지’로 불리는 루마니아 출신의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1876~1957)의 작품에 매료돼 전공을 조각으로 결정한다. 조각의 추상화라는 새로운 길을 개척한 브랑쿠시를 스승으로 생각하는 엄 작가는 자신의 예술관을 이렇게 풀어낸다.

 

“추상 조각은 사물의 형태를 모방하는 게 아니다. 사물을 사유하고 사물의 본질을 수행을 통해 찾아내는 일이다.” 조각을 통해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고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엄 작가의 조각은 깊은 사색이 바탕이다. “조각은 사물을 사유하고 그 안에 내재된 본질에 다가서며 참다운 나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그는 이렇게도 말한다. “추상 조각은 사물의 형태를 모방하는 게 아니라 사물을 사유하고 수행을 통해 사물의 본질을 찾아내는 일이다.” 지난 10월 작고한 김남조 시인은 ‘김세중조각상’을 수상한 엄 작가를 시인으로 불렀다. 사색하는 조각가 엄 교수는 글을 잘 쓰는 작가로도 유명하다.

 

엄 작가는 1967년 제16회 국전에서 국무총리상을, 1971년 제2회 한국미술대상전 최우수상을 받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조각가의 반열에 서게 된다. 이미륵상(2012년)을 수상하고 프리즈 런던 스컬프처(2019년)에 선정되기도 한다. 일찍부터 국전 추천작가와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으로도 활약한다. 서울대 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독일 베를린 예술대 연구교수를 지냈다.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엄 작가의 조각 작품은 나라 안팎에서 만날 수 있다. 대법원 중앙 정원에 법과 정의를 상징하는 동물인 해태의 뿔과 꼬리를 조형화한 ‘법과 정의의 상’과 모교인 서울대에 설치된 ‘쌍학’은 품격과 불멸, 지혜를 상징한다. 독일 베를린 총리공관에도 그의 작품이 영구 소장됐다.

 

용하현 작가의 ‘사라집니다(2023)’ 부분. 윤원규기자

 

■ 지구의 존엄을 지키자

 

엄미술관은 지구 생태와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개발과 성장 만능주의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코로나19가 시작되기 전인 2019년 ‘환경전’을 시작해 ‘대지의 연금술’(2020년), ‘코로지엄과 식탁 위에 카오스’(2021년), ‘푸드 체인 프로젝트’(2022년)는 환경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기후 변화를 주제로 선정해 기획한 전시들이다.

 

“오늘날 다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지구 환경과 땅의 찬가가 필요한 때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구에 지구 고유의 마법, 고유의 존엄을 돌려 주려 합니다. 지구 앞에서 경탄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합니다.”

 

지난 9월 생태미술의 작가로 알려진 ‘이경호’ 개인전에서 진 관장이 건넨 인사말이다. 엄미술관은 전시를 기획할 때부터 폐기물이 나오지 않거나 적게 나오도록 고민한다. 어린이들에게 생태와 환경의 소중함을 알리는 교육도 꾸준하게 진행하고 있다. 환경과 생태를 소중히 하는 엄미술관의 생각은 꾸준한 프로그램을 통해 실현되고 있다.

 

전시실 1층에서는 화성예술지원사업으로 지역 대학생인 용하현 작가의 ‘사라지다;살아지다’ 전시가 열리고 있다. 윤원규기자

 

■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현재 1층 전시실에서 ‘용하현 개인전-사라지다, 살아지다’가 열리고 있다. “화성시와 화성문화재단의 2023 화성예술지원사업으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작가 용하현은 지역의 대학생이지요.” 대학생이 개인전을 열다니 용 작가는 행운아임이 틀림없다. 입구 오른편에 작품들이 여러 점 걸려 있다.

 

올해 제작한 ‘바다’란 작품이다. 푸른색을 머금은 한지와 얼음 조각처럼 차가운 빛을 내는 유리를 배합해 색다른 느낌을 전달한다. 제작 기법이 유리에 열을 가해 굽는 과정을 거친 ‘유리 가마 소성’이다. 찢기고 해어진 현수막에 포구와 어촌이란 글자가 보이고 뒤집힌 세움 간판이 ‘조개구이전문’인걸 보니 작가가 주목한 곳은 바닷가 마을이다. “…무분별한 도시개발로 인해 사라져가는 자연과 이곳에 남아 계속 살아가게 될 우리의 모습을 담아 내려 한다.” 작가의 문제의식, ‘사라지고, 살아지는’ 주제를 드러내는 작품들이다. 공간을 어떻게 배분해 작품을 설치하는가는 큐레이터의 변함없는 숙제다. 용하현 개인전에서도 작품과 전시 공간의 조화, 관객의 시선을 고려한 배려가 전시장 곳곳에서 느껴진다.

 

화성시 봉담읍에 위치한 엄미술관은 엄태정 조각가의 개인 작업실을 개조해 개관한 사립 미술관이다. 차한잔과 함께 고즈넉한 풍경을 즐길 수 있다. 윤원규기자

 

■ 품격을 지키며 앞으로

 

지난 5월 개막한 작가 씨킴의 작품을 담은 도록 ‘충심의 사물, 그 예술의 꿈’을 펼쳐본다. 한글과 영문을 함께 적은 도록에서 품격이 느껴진다. 개관 때부터 매년 두세 차례씩 펴낸 도록은 예술작품처럼 아름답다. 이런 편집 방침을 고수한 덕분에 ‘올해의 박물관미술관 출판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이처럼 매사에 투철하지만 사립미술관의 운영은 매우 고달픈 일이다. 수입은 고사하고 지출이 늘어간다. 열심히 일하면 알아주리라 기대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마저 비웠다. 이제까지 지켜왔던 품격과 신념을 지키며 앞으로 나아갈 것을 다짐한다.

 

미술관 마당에는 소나무가 여러 그루 서 있다. 푸른 소나무와 쇠로 된 조각이 어우러진 풍경과 늦가을 햇살에 황금빛으로 물든 미술관이 멋스럽다. 산자락에 포근히 안긴 미술관에 가을 햇볕이 가득하다. 엄미술관에서 가까운 거리에 세계유산에 등재된 융릉과 건릉이 있다. 찜질방을 개조해 만든 소다미술관과 용주사 경내에 있는 효행박물관도 멀지 않으니 함께 둘러보면 좋겠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