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도박 사이트

[변평섭 칼럼] 高宗의 무능인가, 지정학적 운명인가

카지노 도박 사이트

변평섭 전 세종특별자치시 정무부시장

험한 파도에 시달리는 배의 선장은 나약하고 무능했다. 조선 500년 역사가 그렇게 침몰하는 중심에는 고종 임금이 있었다. 1896년 2월11일 새벽, 고종은 미리 대기시켜 놓은 궁녀가 타는 가마에 몸을 숨기고 경복궁 영추문을 쏜살같이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을 향해 달렸는데 대궐 경비병들조차 궁녀의 출입이려니 생각하고 고종의 밀행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로부터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세자와 함께 1년을 보냈는데 이것이 유명한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어떻게 임금이 자기 나라 궁궐을 몰래 빠져나와 남의 나라 공사관에 거처를 정할 수 있을까. 국가의 체통이 무너져 버렸다. 물론 고종으로서는 1895년 10월8일 명성황후(민비)가 일본 낭인들에게 무참히 시해 당하는 사건을 겪고 나서 신변 보호를 간절히 원했던 것은 사실이다. 자신의 안위를 어느 강대국에 맡기는 것이 좋을까 고민도 했을 것이다.

 

청나라는 임오군란의 책임을 물어 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해 3년여 연금시킬 만큼 조선을 자기네 속국처럼 마음대로 휘둘렀으나 1894년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무참히 깨지는 것을 보고는 종이호랑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청일전쟁이 이 나라에서 벌어진 것도 고종이 동학난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한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큰 실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 후 서울에 군대를 주둔시키고는 친일 내각을 구성케 하는 등 횡포를 부리고 있으니 고종으로서는 러시아밖에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러시아로서는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 남진정책을 추진하는 마당에 고종이 자기네 공사관에서 살겠다고 하니 그야말로 굴러온 꿀단지가 된 것이다. 그런 데다 고종이 1년여 자기네 공사관에 있는 동안 울릉도 산림 벌채와 광산채굴권 등 많은 이권을 따냈으니 대환영이었다. 하지만 러시아 남진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영국이 1885년 4월 전남 여수의 거문도를 무단 점거하고 포대를 설치하는 등 요새화 작업에 들어가자 동북아 정세가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결국 영국과 일본이 영일동맹을 맺고 영국은 거문도에서 철수했는데 말하자면 러시아 남진을 막는 골키퍼를 일본에 맡긴 셈이다. 특히 1904년 발생한 러일전쟁에서도 일본이 승리를 거두자 고종의 마음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최근 그동안 숨겨졌던 조선말기(특히 1905년 을사늑약 전후) 한일 관련 문서와 기록들이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것을 보면 부질없고 민망한 내용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고종이 일본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저자세와 오판이다.

 

1904년 3월18일 이등박문이 고종을 알현했는데 이 자리에서 러시아와의 전쟁 경비로 상당액의 군자금을 하사했다는 것이다. 러시아 공사관에 몸을 의지하던 고종이 이번에는 그 러시아와 싸워 이기라고 일본에 군자금을 준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고종은 이등박문을 독일을 일으킨 비스마르크에 비유하면서 자신에게 국정 자문 역할을 해달라고 몇 차례 부탁까지 했다는 것.

 

그런데 그로부터 몇 달이 되지 않아 이등박문은 고종 임금과 대신들을 위협해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을 체결했으니 이런 배신이 어디 있는가. 마침내 1907년 고종은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강제 퇴위를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나라도 망했다. 고종이 이처럼 강대국 눈치 보느라 확고한 주관 없이 흔들리던 시절, 100여년 세월이 흘렀건만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지정학적 운명은 지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한반도 지도를 보노라면, 그리고 100여년 그대로 변치 않는 극심한 국론 분열을 보노라면 가슴이 답답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