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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의 길 위에서] 나의 여행 동반자 ‘토니 휠러’

30년간 여행 가이드 ‘론니플래닛’ 저자 대면
여행은 자신만의 역사 교과서 새로 쓰는 과정
더 많은 인권·평등·정의 갈망하는 삶 살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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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가덕도 카페에서 휴식 중인 토니 휠러. 김남희 여행작가

 

봄꽃이 다 함께 피어나 당혹스러웠던 지난 봄날의 어느 저녁, 연희동에서 저녁 모임이 있었다. 밥은 편하게 먹고 살자는 신념으로 낯선 식사 모임에는 나가지 않는 내가 15명의 처음 보는 사람들과 저녁을 먹게 된 자리였다. 제법 오래 인연을 이어온 신발끈 여행사 장영복 대표의 초대와 더불어 그날의 주인공이 토니 휠러였기 때문이었다.

 

휠러가 누군가 고개를 갸웃거릴 이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배낭을 메고 혼자 세상을 떠돌아본 적이 있는 이라면 한 번쯤은 그가 쓴 가이드북에 기댔을지도 모른다. 론니플래닛 시리즈로 ‘배낭여행자의 바이블’이라 불리는 책이다. 나는 첫 여행을 했던 20대 초반부터 30년이 넘는 지금까지 가이드북이라면 영문판 론니플래닛을 고집해 왔다(영어는 더듬거리는 수준이지만 한글 번역판이 거의 없기에 어쩔 수 없다.) 내 여행 준비는 언제나 론니플래닛을 구입하는 일로 시작된다. 요즘은 집에서 볼 종이책과 여행지에서 볼 전자책을 동시에 구매하기도 한다. 그 론니플래닛 시리즈를 만든 사람이 휠러와 그의 아내 모린 휠러. 그들이 첫 장기 여행을 마친 1973년, 주변 사람들이 계속 숙소며 교통편 같은 질문을 해대는 통에 부엌 식탁에 앉아 쓰기 시작한 책이 론니플래닛이었다. 조 코커의 노래 중에 나오는 ‘러블리 플래닛’이라는 가사를 토니가 ‘론니플래닛’으로 잘못 기억해 책 제목이 됐다. 지구는 물론 사랑스러운 행성이지만 나는 외로운 행성이 더 근사하다고 여긴다. 답을 주지 않는 우주를 향해 끝없는 신호를 쏘아 보내는 고독한 행성의 거주민으로서.

 

사실 나는 장르 불문하고 어떤 책을 좋아한다고 해서 저자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저자와는 책으로 만나면 충분하다고 믿고, 좋은 책일수록 내가 쌓은 이미지의 성을 부수고 싶지 않기도 하니까. 하지만 지난 30년간 내 여행의 가장 가까운 동반자였던 가이드북의 저자를 만나 한 번쯤은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기도 했다. 배낭여행 1세대 여행사인 신발끈 여행사가 오랫동안 론니플래닛 독점 수입판매를 해왔던 인연에 더해 장영복 대표 본인이 열렬한 론니플래닛 키즈여서 만들어진 자리였다. 직접 만나본 휠러는 일흔여섯의 나이가 무색하도록 젊고 건강해 보였다. 무엇보다 그 나이쯤 살아온 사람의 얼굴에 드러나기 마련인 삶의 궤적이 만든 표정이 좋았다.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선하게 살아온 사람의 얼굴이랄까. 실제로 말하는 태도도 소탈하고 수줍었고, 이야기의 내용에도 과장이나 허세가 없었다. 그는 몇 년 전에 론니플래닛을 BBC 월드와이드에 넘긴 이후 플래닛 휠러 재단을 만들어 저소득 국가의 기후위기, 인권, 교육 활동을 돕는 일에 헌신하고 있다.

 

론니플래닛 시리즈와 함께인 토리 휠러. 김남희 여행작가

 

그의 이야기 중 인상적인 대목은 이렇다. “사람들이 나에게 가장 좋았던 곳을 물으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가장 이상했던 나라를 물으면 이곳을 꼽는다. 북한,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 나는 좋은 이스라엘 친구들도 있지만 그 나라는 정말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전적으로 공감이 가는 이야기였다. 나 또한 거의 30년 전에 팔레스타인 땅을 여행하고 이 땅에 평화가 돌아오지 않는 한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던 곳이다. 현재 팔레스타인 이스라엘의 상황을 봐서는 다시 돌아갈 날은 쉽게 올 것 같지 않다. 예루살렘을 비롯해 그 땅 전체가 비할 데 없는 유적지(여러 종교의 성지이기도 하고)이지만 나는 자신들만이 신에게 선택 받은 종족이라 믿는 이들의 자비 없는 신앙에 질렸다. 무엇보다 그 땅에서 일어나는 가장 슬픈 일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거주지를 ‘세계에서 가장 큰 개방형 감옥’으로 만들고 있는 장벽의 건설이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의 2022년 12월 보고서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서안지구 팔레스타인 땅을 가로막으며 쌓고 있는 분리장벽의 길이는 713㎞에 달하고 65% 이상이 완공됐다(이미 2004년 국제사법재판소는 이 분리장벽이 국제법 위반이라며 철거 권고 의견을 발표했다). 내가 운이 나빠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땅에서 내게 호의를 베푼 이들은 모두 핍박 받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었다. 오랫동안 탄압 받았던 민족이 다른 민족을 탄압하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주는 슬픔이 버거웠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안 가봤지만 여성 인권이 세계 최악이라는 점에서 별로 여행하고 싶지 않은 나라다. 북한은 굳이 말을 보탤 것도 없다. 세 나라 모두 인권과 평등을 비롯한 보편적 정의의 실현에 있어 심각한 문제가 있는 나라다.

 

김남희 여행작가

여행이란 결국 자신만의 역사 교과서를 새로 쓰는 과정이다. 역사는 승리한 자의 목소리로 기록된 일방적인 이야기일 수 있기에. 나 역시 팔레스타인 땅과 중동지역 곳곳을 여행하며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패배한 자의 목소리로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시간이 없었다면 나만의 세계사 교과서를 쓸 수 없었을 것이다.

 

휠러는 기후위기와 관련해 여행의 미래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기도 했다.

 

“비행기를 탈 때마다 죄책감을 느낀다. 하지만 인간은 타인을 만나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서로 만나야만 하는 존재다. 여행은 그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나 또한 비행기를 탈 때마다 부끄러워진다. 환경을 위해 내가 하는 다른 모든 노력(배달음식을 먹지 않고, 고기 섭취를 최소화하고, 환경단체에 정기적으로 기부하고, 여행 중 제로웨이스트를 실천하기 위해 애쓰는 일 등)이 허무하게 느껴지곤 한다. 그럼에도 여행을 멈추지는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자신은 없다. 여행은 나의 좁은 장벽을 넘어 다른 세상으로 나가는 문이자 내가 살아가는 이 행성과 사람들을 더 깊이 사랑하게 만드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내가 론니플래닛을 좋아했던 이유 중 하나는 어떤 나라의 역사적 사건을 다룰 때 견지하는 진보적인 관점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론니플래닛은 늘 신중하게 약자와 소수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왔다. 굳이 정치적 프레임으로 구분하자면 중도좌파의 시선이랄까. 정치적 역사적 사건을 기술할 때 가이드라인 같은 게 있었냐는 내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은 간명했다.

 

“아마도 그건 나 자신이 그런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월이 흘러 할머니가 된 후에도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물론 ‘꼰대’는 이미 됐지만 ‘구제불능의 꼰대’까지는 되지 않기를 꿈꾼다. 언제나 더 많은 인권과 더 많은 평등과 더 많은 정의를 갈망하는 할머니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