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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단체를 조명하다] 12. 신간회 도내 지회가 민중운동 주도하다

문맹퇴치서 계급·계층 실태조사까지... 민족해방운동 구심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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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광주지회 회원들의 모습

■ 민족협동전선체로서 신간회 탄생

3·1운동 이후 민족해방운동은 크게 민족주의·사회주의·아나키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성향의 단체에 의해 전개됐다. 그런 만큼 운동방략이나 주도 세력 등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자치운동으로 대표되는 개량주의를 지원하는 일제의 민족분열정책은 대립과 갈등을 조장했다. 항일투쟁에서 민족적인 역량 강화는 우선적인 과제로서 다가왔다.

1927년 2월15일 창립된 신간회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민족협동전선(민족통일전선)’으로 민족유일당운동의 일환이었다. 이에 앞서 발기인대회에서 “①우리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한다 ②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한다 ③우리는 기회주의(자치운동) 일체를 부인한다”라는 강령을 채택했다. 1931년 5월 해소될 때까지 신간회는 서울에 본부를 두고 국내외에 150여 지회를 뒀다. 회원도 4만여명에 달하는 식민지 시기 가장 규모가 큰 항일단체로서 자리매김한다.

■ 경기도내에 신간회지회가 조직되다

신간회는 창립 직후 내부 조직을 정비한 후 지회 설립에 나섰다. 농민·노동·학생·청년·여성 등 부문 운동에서도 민족 협동을 강화했다. 경기도에는 서울을 비롯해 강화, 개성, 광주, 수원, 안성, 용인(미상), 인천, 장호원 등지에 지회가 조직됐다. 서울에 조직된 경성·경서·경동지회 등을 제외한 1930년 9월 당시 회원은 광주 65명, 수원 243명, 안성 60명, 인천 116명, 개성 112명 등이었다.

개성지회는 준비위원회를 조직해 노력한 끝에 8월8일 설립대회를 개최했다. 부서는 출판부·서무부·정치문화부·재정부·조사연구부·조직선전부 등으로 각 부에 간사 3인을 뒀다. 피선된 임원은 회장 이연교, 부회장 한창환, 간사 이기연 등 15명이었다.

박용희 신간회 안성지회장

광주지회는 임시사무소를 두고 회원을 모집하는 가운데 8월24일 설립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서막을 올렸다. 임원진은 회장 한순희, 부회장 석혜환, 총무간사 한철기 등 5명, 상무간사 변종희 등 5명, 간사 구자달 등 5명이었다. 한순희는 한학자로 3·1운동에 참가한 이후 천도교 광주교구장 등을 역임했다. 사회주의자 석혜환은 광주공산당협의회의 비서부 책임자를 지냈다. 이러한 인적 구성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의 민족협동전선임을 의미한다. 지회 활동 중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지역민들의 기본인권을 위한 투쟁이었다. 광주지역 군리원(郡吏員)은 주민들을 폭행하는 경우가 빈발했다. 조사연구부는 이 같은 사실을 폭로하는 한편 회장 한순희를 파견해 항의했다.

수원지회는 10월에 준비모임을 가진 후 17일에 지회설립대회를 개최했다. 임원진은 회장 김노적, 총무간사로 서무부 김병호, 재무부 이각래, 조사연구부 공석정, 조직선전부 홍종각, 간사 이연학·김현설 등이었다. 이들은 3·1운동 이후 구국민단을 조직해 항일운동에 참여한 사람들과 천도교·기독교 지도자, 사회주의자 및 교사 등이었다. 김노적·홍종각 등은 종교 세력, 공석정·염석주 등은 사회주의자로 명실공히 민족협동전선이었다.

12월12일 조직된 안성지회의 임원진은 회장 박용희, 부회장 이구순, 총무간사로 서무부 윤진영, 정치문화부 김태영, 조직선전부 민홍식, 조사연구부 윤효병, 간사 유창준 등 6명이었다. 이들은 안성청년동맹과 죽산농우연맹을 비롯해 계몽운동과 대중운동을 주도하는 계층으로 구성됐다.

인천지회·장호원지회·광흥지회 등도 다른 지회와 성향이 비슷한 인물로 구성됐다. 이는 민족협동전선에 대한 활동가들의 높은 관심도를 보여준다.

■ 지역사회 민족해방운동의 구심체가 되다

지회의 구체적인 활동은 안성지회가 결의한 내용에서 엿볼 수 있다. 주요 내용은 노동자·농민·청년·여성·소년 각 부문 운동 지원, 문맹퇴치와 미신타파 등 생활인식의 변화와 각 계급·계층의 실태조사는 물론 정치 사회문제에 대한 대응이었다. 광주지회·수원지회·안성지회 등은 재만동포옹호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또한 원산총파업 지지와 아울러 각지의 수재민과 이재민을 위한 지원 활동에도 나섰다.

신간회 본부는 실질적인 활동 방침을 제시하지 못했으므로 점차 지회들은 본부 측에 구체적인 활동 방향을 요구했다. 실제로 정기대회를 이용해 본부에 ‘건의안’을 제출했다. ‘중외일보’에 따르면, 안성지회는 1928년 2월 예정된 신간회 정기대회에 제출하기 위해 37개 항목의 건의안을 작성했다.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 획득, 파벌주의자 배격, 봉건적 관습 폐지, 조선인본위 교육 실시 등은 물론 소작권과 소작료 문제, 노동시간과 최저임금제, 고리대금 반대, 조선인본위 상공업기관 조직 촉진, 학생의 과학사상 연구의 자유, 여성의 대우 차별철폐, 사형제 폐지 등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 활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지역에서 신간회 지회의 이름으로 각 부문 운동에 참여하기는 어려웠다.

경찰의 탄압도 지회 활동을 어렵게 만들었다. 회의를 비롯한 모든 모임은 경찰에 허락을 받아야 했다. 회의 안건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대회가 금지되고, 회의가 허락됐다가 당일 취소되기도 했다. 수원의 인쇄소 노동자는 직공 생활의 비참한 내막을 이야기하다 경찰에 의해 중지를 당했고, 용인군 기흥면의 농민은 농촌의 현실을 예로 들며 현 사회의 문제점을 말하려다가 제지를 당했다. 그리고 곧바로 경찰서로 연행돼 취조를 받았다.

지회의 주요 회원은 농민과 노동자가 다수였다고 하나 실질적인 활동의 중심은 지식인들이었다. 수원과 안성, 광주, 강화지회의 주요 지도자들 가운데는 신문 기자인 청년운동의 간부들이 많았다. 대체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지회장으로 선출된 가운데, 사회주의 성향의 청년들이 실질적인 헤게모니를 가지고 지회를 이끌어 나갔다. 수원지회의 경우 1928년 중반 이후 청년운동단체를 매개로 사회주의자들이 활동을 주도했다.

■ 엄혹한 현실에도 민족해방을 꿈꾸다

1931년 5월 신간회 제2차 전체대회는 신간회를 새로운 성격의 단체로 전환하기 위한 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신간회 해소가 가결됐다. 대회에서 수원지회의 박승극과 공석정은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됐다. 이들은 모두 신간회 해소를 주장하는 그룹이었다. 광주지회, 안성지회, 장호원지회, 인천지회의 대표자들은 이때 본부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정됐다. 신간회 수원지회의 지도자이자 수원청년동맹과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수원지부의 집행위원장이었던 박승극의 ‘조선청년총동맹 해소’ 주장은 곧 신간회 해소 논의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일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도 신간회 해소 주장에 합류했다. 신간회가 해소된 이후 주요 활동가들은 공산주의자 단체나 비합법적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에 참여하며 민족 해방을 꿈꾸며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주변 곳곳에는 일제에 의한 탄압 현장과 함께 치열하게 전개된 항일투쟁 현장이 곳곳에 남아있다.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많은 유적지가 사라지거나 변형되는 안타까운 오늘날이다. 최첨단 기술을 이용한 역사현장이 생생하게 다시 우리에게 다가오기를 바란다.

글=김형목 (사)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