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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태동, 한국이민사 120주년] 120년 전 낯섦과 설렘… 한국 이민사 뿌리가 되다

하와이로 떠난 국내 이민자 102명... 정체성 지키기위한 투쟁 재조명
서구열강들 침탈 속 불안한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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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1월13일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한 갤릭호의 모습. 한인 첫 이민자 102명은 하와이 오아후 섬의 와이알루아 농장 모쿨레이아에서 이민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왼쪽 사진). 1902년 12월22일 첫 하와이 이민자 가족인 김치원씨 부부와 그의 자녀들 모습. 하와이 이민자 승선 명단에는 이들의 출신지가 인천의 옛 명칭인 제물포로 기록해 있다. 한국이민사박물관 특별전 ‘그날의 물결, 제물포로 돌아오다’ 제공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장편소설 ‘파친코’는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시대의 비극을 각자의 자리에서 이겨내야 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파친코는 4대에 걸친 한인의 이민사인 ‘코리아 디아스포라’의 삶을 일대기 형태로 묘사한다. 코리아 디아스포라는 120년 전 인천 제물포항에서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닿은 102명의 삶에서 시작한다. 타국에서의 기대와 두려움속에 떠난 그들. 그들은 어떤 심정으로 여정에 떠났을까. 영영 돌아오지 못한 그들의 삶은 조국에 대한 열망으로 남아있다. 본보는 ‘인천 태동, 한국 이민사 120주년’ 기획 보도를 통해 인천에서 시작한 이민자들의 삶의 궤적에서부터 타국에서 꽃피운 그들만의 역사까지 코리아 디아스포라를 조명하고, 740만의 재외동포와 함께할 수 있는 방향 등을 찾아본다. 편집자주

 

① 인천 제물포에서 미지의 세계로

코리아 디아스포라는 역사라는 거대한 파도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다.

지난 1902년 12월 22일 인천 제물포항. 대한제국의 불안정한 사회 분위기와 일제의 무자비한 양곡수탈에 시달린 백성 121명이 일본 나가사키로를 거쳐 미국 하와이로 가는 겐카이마루선에 올라탔다. 한민족 이민 역사의 첫 발걸음이다.

이들 중 일본 나가사키항에서 이뤄진 신체검사를 통과한 102명은 미국 하와이행 갤릭호에 몸을 싣는다. 이후 22일간의 긴 항해 끝에 이듬해 1월13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해 조선인으로서 처음으로 미국의 땅을 밟았다. 이들은 오아후 섬의 와이알루아(Waialua) 농장 모쿨레이아(Mpkuleia)에서 이민자로서의 일을 시작한다.

19일 한국이민사박물관 등에 따르면 하와이 이민은 국가가 허락한 첫 공식 이민이지만, 전형적인 노동 이민이다. 당시 대한제국을 둘러싼 서구 열강들의 침탈과 불안한 사회적 분위기로 백성의 빈곤은 커져 갔다. 때마침 미국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호황기를 맞아 이미 이민 와 있는 일본·중국인이 아닌 다른 나라의 노동자가 필요했다. 당시 서양의 최고 인기 향신료인 설탕은 하와이에 주요 농장이 많았다.

주한 미국 공사 알렌(Horace Allen)은 조선인의 하와이 노동이민을 위해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을 만나 설득한다. 고종은 1902년 11월 여권과 이민 업무를 담당할 정부 조직인 ‘유민원’, 즉 지금의 출입국사무소를 만든다. 이어 알렌의 지인인 미국인 데쉴러(D. W. Deshler)는 이민 대행사인 ‘동서개발주식회사(EWDC)’를 세워 이민을 본격화한다. 동서개발은 인천 제물포(현 중구) 내동의 옛 인천예식장터에 자리잡았다.

백태웅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 소장은 “당시 이민자들이 고향을 떠나는 선택을 한 것은 엄청난 모험”이라며 “흉년 탓에 경제적으로 힘들고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던 국가의 상황은 그들이 이민을 선택하게 한 것”이라고 했다. 이어 “하와이에 뿌리를 내린 이민자들은 어느 민족보다 악착 같이 살아남았다”며 “조국이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 당하고, 일제에 주권을 침해 받아도 그들만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한국이민사박물관이 지난 6일 개막한 ‘한국 이민 120년 기념 특별전 개막식’에서 이행숙 인천시 문화복지정무부시장과 참석 내빈 등이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인천시 제공

대한민국 관문도시 ‘K-디아스포라’ 출발점이자 종착지

하와이 호놀룰루行 이후 수많은 이민자

인천항·공항 통해 떠나고 되돌아 오고 한국이민사박물관 역사와 관통하는 곳

인천의 관문도시 역사는 ‘코리아 디아스포라’에서도 이어진다. 인천은 근대사회 시작과 더불어 제물포항을 개항했고, 현대에 와서는 공항과 항구를 모두 가진 관문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19일 한국이민사박물관 등에 따르면 제물포에서 호놀룰루항에 도착한 첫 이민자 102명 중 89명(87%)도 제물포를 비롯한 인천지역 출신이다. 이후 같은해 6월까지 하와이로 옮겨간 초기 이민자 515명 중 193명(37%)이 제물포·강화·부평·송도 등 인천지역 출신이다.

전문가들은 제물포항을 중심으로 한 항구도시의 특성이 하와이 이민의 번성을 이끌었다고 본다. 정든 고향을 떠나 외국에서 생활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은 굉장한 모험이지만, 항구도시인 인천시민은 유랑 노동계층이 많고, 외부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이다.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 관장은 “인천에서 이민의 역사가 시작했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고 했다. 이어 “근대시대 첫 항구도시라 새로운 문화와 물건들을 누구보다 빠르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환경 탓”이라고 분석했다.

이 같은 역사는 중구 월미도에 있는 한국이민사박물관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인천시는 지난 2003년 하와이 이민 100주년을 맞아 한국이민사박물관 건립을 추진했다. 한국이민사박물관은 2008년 전국 최초로 이민사를 연구하는 곳으로 탄생한 뒤, 지금은 하와이 이민의 출발부터 해외 입양까지 다루는 ‘코리아 디아스포라’ 흐름을 완성했다. 신은미 전 한국이민사박물관 관장은 “이민자 개인의 사진과 증언 등으로 시작해 지금은 그들의 삶과 전 세대들의 역사적 자료까지 보유·연구하고 있다”고 했다.

인천의 이민 역사는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시는 사할린 강제이주 피해자들을 위한 ‘인천사할린센터’를 만들고, 지금도 사할린 동포들을 위한 지원을 이어가고 있다. 연수구에 있는 사할린 동포회관에는 90여명이, 남동구의 임대주택에는 300여명이 넘는 사할린 강제이주 피해자들이 살고 있다.

여기에 인천은 이민사의 출발지인 동시에, 현재는 인천국제공항을 품은 덕에 국내로 들어오는 외국인 이민자의 발자취가 남는 곳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지역 안팎에서는 이민자 역사의 시작점이자 항구와 공항을 가진 인천이 ‘코리아 디아스포라’의 대표지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김 관장은 “인천은 관문도시로서 유입·진출 이민사의 거점이 되고 있는 만큼 한인 이민사를 연구하는 데 최적의 장소”라고 했다.


19일 오전 인천 중구 내리교회 역사관 앞에는 하와이 이민을 독려한 존슨 목사(George. H. Jones)의 흉상도 함께 있다. 김지혜기자

내리교회 존슨 목사 설교 듣고 ‘약속의 땅’으로…

교회 곳곳에 하와이 이민 발자취 생생히 남아... 당시 동서개발과 함께 이민자 모집의 중심지

‘존슨(George. H. Jones) 목사를 쓰시어 1903년 1월 13일 미주 땅에 코리아 디아스포라를 허락했다’

인천 중구 내동 29에 있는 인천 내리교회의 붉은 벽돌담에 그려진 동판에는 ‘코리아 디아스포라’의 시작이 담겨있다. 내리교회에는 하와이 이민을 위한 설교에 앞장 선 존슨 목사의 동상도 함께 마련해 놓고 있다.

특히 내리교회 곳곳에는 하와이 이민에 발자취가 담겨있다. 사무실과 예배당이 있는 2층 한편에는 하와이 이민자들의 단체사진을 비롯한 선교 활동 사진이 걸려있다. 내리교회는 이민 역사에 대한 기록을 ‘역사관’으로 마련해 이민 역사에 대한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김흥규 내리교회 담임목사는 “해마다 이 곳을 찾는 재외동포들이 5천여명”이라며 “여기서 본인에 대한 정체성을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인천에서 시작한 ‘코리아 디아스포라’는 교회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첫 하와이 이민자 102명 중 80명 이상이 내리교회 신도다. 당시 내리교회는 동서개발주식회사와 함께 이민자 모집의 중심지의 역할을 했다.

당시 동서개발과 내리교회가 내건 이민 공고문에는 ‘하와이 군도로 누구든지 정착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월급은 미국 금전으로 15달러, 1일 10시간 노동하고, 일요일에는 휴식할 것’이라고 하와이 이민을 홍보했다. 이어 ‘날씨가 좋고, 학비가 없어 자녀를 교육할 수 있다’는 문구도 함께 포함했다.

그러나 본인이 나고 자란 고국을 뒤로 하고,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 삶을 선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동서개발의 대표 데쉴러는 내리교회의 목사 존슨에게 설교를 부탁한다. 존슨 목사는 당시 설교를 통해 하와이를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라는 성경구절을 인용하는 등 적극적인 이민을 권했다. 이로 인해 교인들의 하와이 이민 행렬이 이어지기도 했다. 현재 하와이 지역의 감리교인 70%가 한국인이다.

이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 하와이 현지에서 교회를 만들고, 단체를 조직했다. 결과적으로 하와이 이민자에는 단순 노동 이민을 선택한 사람들을 포함해 신문물과 평등사회를 꿈꾸는 기독교인들이 함께였다. 이는 이후 10년 후 본격화하는 미주 독립운동의 한 갈래인 ‘계몽운동’의 전초 기지가 될 수 있던 자양분으로 작용했다.


변휘장 하와이 한인문화회관 추진위 부회장 “교회·여성이 고국 독립운동 견인”

“인천에서 시작한 하와이 이민자들이 미국에서의 고국 독립운동의 중심 역할을 한 것은 바로 교회와 여성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변휘장 하와이 한인문화회관 추진위원회 부회장(67)은 “미국이라는 낮선 장소에서 이민자들을 하나로 모을 구심점이 절실했다”며 이 같이 강조했다.

변 부회장은 40년전 하와이로 이민을 와 이덕희 하와이 한국사연구소장을 만난 뒤부터, 하와이 이민자들의 역사 자료를 수집하고 해석하고 있다.

변 부회장은 “이민자들에게는 먹고살기 힘든 조국의 상황과 더불어 평등한 사회로의 기대가 컸다”며 “이 때문에 교회가 학교가 됐고, 공간은 곧 지역사회의 구심점이자 독립 운동의 전초 기지 역할을 했다”고 했다.

변 부회장은 또 “특히 사진만 보고 중매결혼이 이뤄진 사진 신부가 등장했는데, 그들이 가족을 꾸리면서 한인 사회가 구축되기 시작했다”고 했다.

변 부회장은 하와이 이민사의 의미를 알릴 수 있는 공간인 한인문화회관 건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는 “하와이에 한인 역사와 문화를 볼 장소가 없다는 것이 한국인으로서 마음이 아프다”며 “하와이가 신혼여행지가 아니라, 한인들의 독립운동의 숨결과 역사의 도시가 됐으면 한다”고 했다.

김지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