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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단체를 조명하다] 3. 인천지역 민권·계몽운동 주도한 ‘박문협회’

1898년 6월9일 인천 개항장서 창립...신분 구애없이 민권사상·주권주의 내건
독립협회의 지회이자 자매단체로 활동...관료부터 교사·학생·신도 등 130여명 회원
신문 투고·新교육 보급·민지 계발 큰 역할...야학·영어학교 등 30여 개교 이상 설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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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던 민중… ‘항일 정신’을 깨우다

■ 조선이 국제무대에 등장하다

만민공동회(기록화)

강요된 강화도조약이나 조선은 이제 ‘은둔국’에서 벗어나 국제사회 일원이 됐다. 이어 미국·영국 등 제국주의 열강과 통상은 국제무대에 등장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서울과 개항장에 형성된 조계지는 이들 열강의 침략을 위한 ‘각축장’으로 변모했다. 통상거주와 치외법권 등을 인정받은 저들은 자국 이익 추구에 혈안이었다. 선교사들은 절대자 앞의 자유와 평등을 내세워 마치 근대문물의 시혜자처럼 군림했다. 그런 만큼 외래 문물에 대한 불신감이나 의혹은 ‘활화산’처럼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개화파는 개화정책에 소극적인 보수정권 타도에 나섰다. 갑신정변 주역은 메이지유신을 롤모델로 인식할 정도로 국제정세에 둔감했다. 이들은 청나라 속방에서 벗어나고자 일본을 우군으로 내세웠다. 외세에 기대어 또 다른 외세를 몰아내려는 무모한 계획은 허무하게 ‘3일 천하’로 막을 내렸다. 이리하여 국민국가를 수립할 가능성도 치명상을 입었다. 곧 개화정책은 재야 세력과 민중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을 당하고 말았다. 소통과 국론통일이 긴급한 시대과제였으나 이를 추진하기에 너무나 허약한 상황이었다.

박문협회 관련 기사(독립신문 1898.7.4)

■ 독립협회가 국민국가 건설을 모색하다

한편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대한제국 ‘보호국화’에 전력을 쏟았다. 민중생존권이 크게 위협을 받는 가운데 지배층에 대한 불신은 폭발 직전의 활화산과 같은 분위기였다. 독립협회는 약육강식의 제국질서에서 살아남기 위해 조직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권계몽단체였다. 슬로건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평등하다는 민권사상과 근대적인 법치주의·주권주의 등을 내걸었다. 독립문, 독립관, 독립공원 건립과 기관지 ‘독립신문’ 발간 등을 통해 자주적인 독립국가로서 면모를 알리는데 노력했다. 이에 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한 고종은 청나라 속국에서 벗어나고자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활동 중 사회적으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백정 박성춘(朴成春)의 만민공동회 연사로서 등장이었다. 강고한 인습이 남아 있는 현실에서 백정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과 같은 존재’로서 멸시와 천대를 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박성춘 등장은 민중의 정치참여 의식을 획기적으로 승화시킨 역사적인 현장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지방으로 확산을 거듭하면서 독립협회의 지회이자 자매단체가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독립협회 연설회에 모인 서울시민

■ 변화에 부응한 박문협회가 조직되다

인천 기독교인과 명망가 등은 일찍이 독립협회 활동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기독교인 복정채는 독립협회를 후원하는 동시에 자신의 정세관을 ‘독립신문’에 투고했다. 주요 내용은 부국강병을 위한 충군애국과 자주독립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담았다. 내리교회 김기범이나 전경택 등도 시국관을 표현한 <경축가>와 <애국가>를 널리 알렸다.

만민공동회로 민권의식이 확산되는 가운데 1898년 6월9일 개항장 인천에 박문협회(博文協會)가 마침내 탄생했다. 이는 경기도에 조직된 최초 계몽단체였다. 명칭은 <논어> ‘안연(〈984F〉淵)’편의 “박학어문 약지이례(博學於文 約之以禮)”라는 의미에서 비롯됐다. 궁극적인 목적은 독립협회 자매단체이자 지회로서 역할에 충실함으로 지역사회구심체임을 자임하고 나섰다.

■ 민지 계발과 민권 신장을 내세우다

창립 직후 회원은 130여명에 달할 정도로 대단한 호응을 받는 분위기였다. 임원진은 회장 이학인, 부회장 나동한, 전 임시의장 강준, 회원 유한식, 김기범, 박현보, 이용인, 이동환 등이었다.

우선적인 과제는 회원들의 시세 변화에 부응한 능력 배양과 친목도모였다. 더불어 신교육 보급을 통한 주민들 민지 계발에 중점을 두었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활동은 회관 내에 관보나 신문 열람, 시무에 유익한 서적 구입과 정보 제공 등이었다. 회관은 단순한 집회장소라는 차원을 넘어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근대적인 도서관으로서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주민들의 열성적인 지원과 참여는 사회적인 책무를 일깨우는 생활현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연설회장에는 태극기를 앞뒤에 각각 배치하고 국가와 황제에 대한 일련의 의례를 거행했다. 국가의식이나 민족의식은 이러한 가운데 확산을 거듭하였다. 통상회에 대한 보도 기사는 당시 계몽단체의 전형적인 모습을 반영하고 있었다. 민의를 수렴하는 여론 공론장의 성격은 여기에서 엿볼 수 있다.

회원들은 다양한 활동으로 계몽운동 확산을 전개했다. 인천항경무서 총순 한우근은 민중계몽과 근대교육 보급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연설회에서 ‘회(會)’자의 의미를 설명한 후 단체 활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위생문제 중 단발은 토론회를 거쳐 실시된 대표적인 결실 중 하나였다. 당시 단발은 단순한 위생적인 차원을 넘어 ‘근대인’을 상징하는 의미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생들의 단발에 대한 보도와 호의적인 보도는 이와 무관하지 않다. 회원들은 토론회에서 각자 의견을 스스럼없이 밝힘으로 자신감을 더욱 가질 수 있었다. 이처럼 계몽단체에 의한 토론문화는 학교의 정규과목으로 채택되는 등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 경기지역 계몽·교육활동에 자극제가 되다

박문협회는 인천인들에게 변화를 알리는 ‘상징이자 희망봉’이었다. 회원들의 열성적인 활동과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는 개항장 인천의 변화를 이끄는 밑거름이었다. 그런데 외세 침략 강화에 따른 정국 불안은 합법적인 계몽활동마저 허용하지 않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제정러시아 전제정치를 지향한 대한제국 지배층은 독립협회를 불법적인 단체로 내몰아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에 박문협회 활동도 사실상 종말을 고하고 역사무대에서 사라졌다.

외형과 달리 회원들은 헌정연구회, 대한자강회에 가담해 계몽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갔다. 일제의 경제적인 침탈에 맞서 근대적인 상업단체나 회사 운영과 근대교육 보급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이들은 사립학교와 야학 설립을 주도하거나 후원에 적극적이었다. 단연동맹회·노인계 등을 결성하여 국채보상운동에도 자발적인 참여에 나섰다. ‘나랏빚 청산으로 독립국가를 수립하려는’ 의지가 더욱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박문협회도 야학인 사립영어학교를 설립·운영했다. 교장은 박문협회장이 겸임한 반면 교사는 인천해관에 근무하는 강준과 이학인 등이 맡았다.

1900년 9월 사립영어학교를 계승한 박문학교는 개교했다. 설립주체는 천주교 제물포본당·샬트르 성바오로 인천분원 수녀들, 박문협회 회원 등이었다. 이 학교는 에우제니오 드뇌(한국명 全學俊) 신부의 활약으로 영화학교와 더불어 민족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강제병합 직전까지 인천지역에 설립된 사립학교와 야학 등은 30여 개교 이상에 달했다. 박문협회가 해산된 이후에도 회원들은 명예교사로 자원하거나 운영비를 자발적으로 기부하는 등 열성을 다했다. 이러한 열정에 의해 영화학교와 박문학교는 대한제국기는 물론 일제강점기 인천지역을 대표하는 민족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수원 삼일여학당·삼일남학당, 강화도 합일학교·보창학교·계명의숙, 개성 한영서원·정화여학당 등은 박문협회 활동에 많은 자극을 받았다.

외세의 각축장이 된 개항장 인천에서 박문협회의 시작은 역사적인 의미가 결코 적지 않다. 이러한 흐름은 경기도 각지로 파급돼 교육·계몽운동을 국권회복운동 일환으로 추동시키는 든든한 에너지원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기호흥학회 등 지회나 다른 계몽단체는 박문협회의 선구적인 활동과 맞닿아 있다. 오늘날 인천광역시로 우뚝 선 배경은 인천을 사랑하고 주민들을 위해 활동한 계몽론자들의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자기희생에서 말미암았다.

글=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